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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참세상 기사를 보고

  • 등록일
    2005/01/04 09:18
  • 수정일
    2005/01/04 09:18
미디어 참세상에 기사를 오늘 하루 훌터 보았다. 전선 논쟁, 반한나라 vs 반노무현정권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전선논쟁에서 일국정치적 현상만 바라보고 전선을 규정할 수 있을까? 그 면면을 살펴보면 현상적 정치투쟁에 대하여 전선이 명확성을 규정하고자 하지만 이는 자칫 활동에 있어 시야의 협소성과 정치투쟁방향(이하 정치투방)을 잘못 규정하는 크나는 무오류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는 전선의 방향이 아니라 투쟁방향이라 해야 옳고, 현 정권에 대한 규정이라 할 수 있다. 전선이라 함은 전체적 맥락속에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분명 전지구적 전선은 신자유주의의 탄생물인 WTO가 존재하는 한 총자본대 총노동의 필연적 대립일 수 밖에 없다고 본다. 한국 운동사회 또한 10년전 신자유주의를 예견하면서 총노동대 총자본의 대립구도로 전선을 규정하였으나 이 전선 구축기에 많은 운동진영에서 자체 정치개편기를 맞이하였다. 이 전선투쟁은 투쟁으로 이어나가지는 못하였다. 그만큼 우리 자체가 정치활동을 통해 많은 역량이 손실되었다 볼 수 있다. 결단도 반한나랑대 반노무현정권은 현 전선의 본질 일 수 없다. 정권에 대한 규정성이다. 신자유주의 지구화는 필연적으로 총노동대 총자본의 대결구도로 귀착될 수 밖에 없다. 낡은 구도의 진보대 보수라는 국가독점자본주의론(국독자론)의 해체로 폐기되었다. 대결은 이전 GATT 해체와 ROUND 협상 체계의 개편에 따른 WTO 출범, 그리고 김영삼정부의 출범 이후 무한경쟁과 세계화라는 슬로건은 국가독점자본이 더이상 WTO출범으로 해체되었음을 선언하고 새롭게 동북아와 동남아의 블록화 경제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는 김영삼이 이끄는 경제 브레인의 실패로 IMF를 맞이하게 된다. 총자본의 파이를 늘리기 위한 김대중의 신용카드와 아파트 값 2배 부풀리기... 김대중은 IMF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공기업 해외매각을 적극적으로 단행하였다. 특히 은행에 대한 정부투자분을 해외주식매각을 단행하는가 하면 벤쳐기업 육성이라는 새로운 경제체계를 만들었다. 그럴것도 김대중정부는 정치 자금을 대줄 말한 재벌들에 없었다. 새롭게 정치자금을 만들고 새롭게 정치 자금을 순환할 자금 책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아파트값 2자리 인상과 사회간접자본의 증대를 초래하였다. 지금 뉴타운이니 뭐니 하면서 수도권전체가 아파트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이와 무관치 않는다. 지금보라 2000년 초만해도 인천에 아파트 살려면 9천만원(계양구 24평 아파트)이면 될 것이 지금은 무려 1억5천정도를 주어야 한다. 이런 부동산 가격인상은 금융실명제가 아무리 맹위를 떨쳐도 지하자금은 순환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전부터 지금까지 전선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것은 참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현재 많은 활동가 조직들이 총노선을 잡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습에서 보여지듯 현 정치노선과 조직노선을 정하는데 많은 애를 먹고 있는 것 또한 현실적 고민이다. 한국사회구성체논쟁의 종결은 운동사회의 다양한 정치, 사회, 문화 분석에 있어 어려움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80초반 MC-MT논쟁(일명 무림-학림논쟁, 이어진 식민지 예속론(NLPDR론), 식민지반봉건론, 식민지반제주국주의론, 식신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 등 다양한 사회구성체논쟁이 각 조직들의 기관지를 통해 활발히 토론되었다. 그 많던 역량들 다 어디로 떠났던가? 어디로 유량하고 있던가? 구별을 위한 구별로 대립이 아닌 대립으로 귀결되는 지금... 무엇이 우리를 내용으로 갈라놓고 있는가? 난 갈라놓고 있는 그 자체의 이론적 규정성이 무엇인지 궁금할때가 많다. 혹시 과거 자신이 속한 정파에 기인하여 그런거라고 생각되지만 이는 결단코 올바르지 않다. 그 과거 정파의 내용 스스로 폐기하고 새롭게 우리내 시작하지 않았던가?(그렇지 않은 조직들도 있지만...) 진보진영 중에서 좌파라고 자임하는 조직들이 주축이 되어 맑스코뮤날레를 기획한다. 위기 일수록 맑스로 회귀하려는 현상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서구 유럽의 경우 이를 넘어 맑스에 대한 재구성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실천에 대한 경종의 역사이다. 누구나 맑스-레닌을 부정하지만, 혁명의 성공 사례가 지구상에서 많았던가? 러시아, 중국, 쿠바, 베트남 이후 어느 나라에서 노동자 민중의 힘으로 혁명을 일구어 내었던가? 우리 맑스의 귀절을 인용하며 경제적으로 낙후한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던 것을 폄하하는 무오류도 범하지 않았던가? 과연 경제적으로 고도화되면 혁명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가? 유토피아로 귀결되는가? 자본 또한 방어를 하지 않을까? 난 신좌파가 되지 못하는 될 수도 없는(신좌파 운동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혁명을 일구어내지 못한 유럽 지식인과 활동가들의 모색을 위한 아고라(Agora)로 난 생각한다.) 사람이다. 내가 자임 할 수 없지만 난 좌파(난 스스로 좌파라 할 만큼 실천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스개 소리로 쪽파에서 대파로 가고자 한다고 스스로 말한다. 내가 처한 현실이 씁쓸)를 지향한다. 많은 담론들이 언어의 유희가 아니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언어들이 공허하게 들린다. 그래 책속엔 혁명이 없다. 모색이란 이름으로 그 많던 활동가들 공부를 하거나 유학떠났지만 돌아와 하는 건 무엇인가? 그래 새로운 이론으로 지평을 열었지만 그건 책속에서나 꿈꾸는 상상에 불과하다. 지금 전국을 돌아보고 전지구를 돌아보자! 노동자 투쟁이 역동적으로 일어나고 있는지...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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