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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지만 끈질긴 싸움 평택미군기지 이전 투쟁..

  • 등록일
    2004/11/22 15:20
  • 수정일
    2004/11/22 15:20

용산미군기지 이전 싸움이 승리하였던가? 과연 미군이 용산에서 철수 한것을 두고 우린 어떠한 평가를 내려야 하는가? 미군의 평택기지 이전의 의미에 대해 깊은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그리고 평화운동가들의 적극적인 평택미군기지 이전에 대한 연대투쟁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이전 평택에서의 평화축제가 일회성 행사가 아닌 연대를 위한 전단계였다면 이제 연대와 지지를 위한 응답이 필요하지 않을까? 개인적인 생각을 가져본다.

 

난 견습생이라 여러 곳을 돌아다닐 수 없는 몸이지만 이 곳 다솜공부방 아이들이 보고 온 평택 미군기지 이전 촛불집회는 뜨거웠다고 한다.

늙은 나이에 자신의 삶을 터를 쫒겨나야 만 하는 어르신들은 아무런 연대도 없이 80일간의 촛불시위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아~~ 자신의 삶을 터전을 지키는 투쟁에서 미군기지 이전이 갖는 동북아 군사전략이라는 거대한 미명은 잘 모르지만 그래도 실천을 위한 그들의 끝없는 투쟁은 어떠한 명분이고 어떠한 목적없이 오로지 자신의 삶을 터전을 지키기 위한 순결한투쟁으로 전개되어지고 있다.



이라크 전쟁 관련 투쟁, 한반도 평화협적 체결과 평화통일을 위한 활동, 대북 지원사업 등 굴직한 활동들이 남한내에서 전개되어져 왔다. 그러나 이 굵직한 투쟁은 투쟁의 이슈시기가 지나면 뭍히고 만다. 정확히 말해 관심밖이 되면 그들만의 싸움으로 그칠 수 밖에 없는 운동적 한계를 지니고 지금까지 활동은 전개되어져 왔다.

 

MD문제도 평화단체에서는 일상사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광주 패트리어트 미사일 배치만 해도 광주지역주민들만의 투쟁으로 그치고 있다. 몇몇 활동단위에서 결합하여 활동을 전개하고 있지만 그 활동은 전국적으로 파장되지 못하고 지역사안으로 묶어져 있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운동사회내에서 운동을 지향하는 이들이(난 활동가라는 말은 자임하는 말이기에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을 이전부터 가져왔다. 정확히 말해 우린 운동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활동가라는 말은 자신이 붙이는 말이 아닌 타자에 의해서 명명되어지는 말이라는 사견을 가지고 있음.) 아직도 수가 부족하여 전 사안을 책임지지 못하고 있다. 안타깝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사안이 있으면 한사안을 끝까지 책임을 지고 나가는 추진력이나 책임성은 이전에 비해 많이 상쇄되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여름 김선일씨의 피살사건으로 뜨거워진 이라크 파병반대 투쟁은 언제부터인가? 사그러 들더니 이라크 전범재판 배너가 달려있다. 이라크 전범재판 기소 투쟁 또한 중요하다. 그러나 이 투쟁은 운동을 지향하는 이들의 투쟁으로 그칠 위험이 농후하지 않던가?  무수한 사안들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과정...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은채... 마음이 무거웠던 기억... 우리는 투쟁을 쫒아다니는 사람이 아니지만 역량과 밀려오는 사안에 떠밀려서인지 중요한 우리의 투쟁들은 함께 뭍혀지는 일을 일상활동에서 많이 겪고 느끼지 않았던가? 이 문제중 우리가 과연 해결하기 위해 끝까지 간 것은 몇개 있을까? 많다고 할 이들도 있지만... 내가 보기엔 해결된 문제보다 미해결된 문제들이 무수히 많지 않았던가?

이라크 관련 투쟁 사안이 어떻고 저쩌고 난 잘 모르겠다. 다만 이라크 전투병 철회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면 투쟁을 통해 관철시켜야 되지 않던가? 우리가 언제 승리를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던가?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고 투쟁을 전개하다보면 패배하더라도 그 활동 속에 같이 땀흘린 동지들이 만지 않았던가?

 

인천에 있을때 어느 노동자가 이런 말을 해주었답니다. "조직은 망해도 사람은 남는다." 참 중요한 말인 것 같습니다. 조직은 언제 바뀔지 모르다 그 속에서 단련되고 동지애를 쌓은 사람들이 어디 가겠습니까? 함께 나가겠죠.

 

이렇듯 이라크 파병, 한반도 평화, 전지구적 평화연대를 위한 활동이 한 방향으로 목소리를 낼 수는 없지만 운동의제로 내걸었던 사안만큼은 우리 끝까지 부여잡고 갔으면 한다.

부문운동이 확장되어 다양한 영역이 분화되었지만 이라크 전쟁은 분명 제국주의에 대한 대항투쟁이 아니던가? 부문의 확장은 중요하다고 하지만, 어찌보면 섹션화되는 운동이 전문화라는 포장속에서 우리가 또다른 운동적 소외현상을 낳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때가 많다. 길은 한 방향이다. 그러나 그 도착점에 있어서 다양한 길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활동을 지향하는 사람이지 전문가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아니지 않던가? 우리가 부족한 점은 채워나가면 된다. 이 채워나가는 과정엔 무수한 사람들이 있겠지....

 

한번 끝장내는 투쟁을 보고 싶다. 평택미군기지 이전은 미군의 북침 대응을 위한 한반도 전략의 일환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가져보며. 부디 미국 기지 이전 그리고 SOFA개정,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이라크 전쟁반대의 목소리가 다양한 운동에서 터저나오는 사안의 중요성 처럼 일정하게 다루어졌으면 한다. 운동 또한 그렇고....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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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같은 인간이고 노동자다

  • 등록일
    2004/11/22 14:56
  • 수정일
    2004/11/22 14:56

한국 생활 10년만에 강제추방된 서멀 타파  
 
편집부 editor@digitalmal.com
 
 
전현준  본지 편집위원

 

글머리부터 수수께끼 하나를 내보자. 상대성 이론의 창시자 아인슈타인, 문화이론가 스튜어트 홀, 정치학자 랄프 밀리반드, 언어기호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 중국의 실용적 국가주의 지도자 등소평, 트로츠키주의 경제학자 알렉스 켈리니코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올 2월 15일 서울 대학로 혜화동에서 한국에 온 지 10년째 되는 이른바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 청년 한명이 대한민국 법무부 출입국관리직원들에게 연행되어 한반도 남단 여수보호소로 끌려갔다. 그는 ‘강제추방저지’, ‘노동비자(노동허가권) 쟁취’, ‘사업장 이동의 자유쟁취’를 요구하며 보호소에 수용된 지 이틀만인 2월 17일 단식투쟁에 돌입, 31일간의 단식투쟁을 벌였다. 단식투쟁을 끝낸 지 열흘만인 4월 1일, 그는 정부군과 반정부군 사이에 내전이 격화되고 있는 그의 조국 네팔로 강제송환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불순분자로 낙인찍혀 제 나라 땅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법무부에 의해 저질러진 ‘21세기 한국의 야만적 행동’으로 기록될 이 사건의 당사자가 바로 서멀 타파(Samar Thapa)이다.



내전의 조국으로 강제송환된 이주노동자

 

앞서 냈던 수수께끼의 답을 말할 때가 된 것 같다. 이들은 모두 이주자 혹은 이주노동자로서, 이주한 그 나라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이들이다. 하지만 21세기 한국사회의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의 처지는 어떠한가? 보다시피 한국사회의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앞에 아주 사납게 노출되어 있을 뿐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서멀의 지나온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보자. 서멀 타파는 1973년 석가모니의 고향인 네팔 룸비니에서 가까운 부터월 이란 고장에서 태어났다. 네팔 인민대학(Nepal People's College)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며 초등학교 수학교사로 일하던 중 1994년 5월 30일 선업연수생의 신분으로 한국에 들어 왔다. “고생이 되더라도 3년 동안 기술을 배운 후, 3년간 돈을 모아 돌아가겠다.”던 그의 코리안 드림은 그런데 처음부터 어긋나기 시작됐다. 그가 노무현 대통령 앞으로 보낸 2004년 3월 8일 편지에 따르면, 영등포의 한 중소기업에서 일을 했던 그는 당시 월급 40만원 가운데 19만원을 관리회사가 떼어 가는데 항의하다 입국 8개월 만에 불법체류자 신세가 되어 버렸다. 월 임금 21만원을 받고 기숙사에 갇혀 강제노동과 임금착취를 당하는 것보다 단속에 걸려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그는 자유를 선택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 후 서멀은 새시공장, 양계장, 전자부품회사 등에서 저임금 노동자로 일해 오다가 1999년 3월 신문 배달을 하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아주 많이 다쳤지만 돈이 없어서 수술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 무렵 안양 전진상복지관 (관장 이금연)의 도움으로 한 5개월가량 그곳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다친 몸을 추스릴 수 있었다. 그리고 2000년에는 공장에서 일하며 성공회대학교가 주관하였던 이주노동자지도자과정을 마치고, 2002년 민주노총산하 평등노조 이주지부 안양군포 분회장에 선출되었다. 얼마 후 그 해 11월에는 28개 네팔공동체의 연합조직인 UNMA(United Nepalese Migrant Association)을 각 공동체 대표자들과 조직하여 사무국장을 맡아 일하던 중 2003년 평등노조 이주지부 지부장에 선출되었다. 그때까지 그는 무려 14~15차례 직장이동을 거쳐 왔다고 한다.

 

사실 서멀 타파와의 인터뷰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매우 힘들게 이루어졌다. 애초 올해 4월 1일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서멀이 강제 추방된 이후 그를 아는 한국친구들은 앞서 말한 대로 그의 안위를 크게 걱정했었다. 그러던 중 2004년 메이데이를 맞아 민주노총과 한국의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일부가 네팔 노총(GEFONT)의 초청으로 네팔을 방문해 서멀 타파와 감격적인 해후를 가졌다. 그리고 다시 필자가 7월 중순 네팔 고문피해센타(CVICT)을 취재하러 갔을 때 서멀과 연락이 닿는다는 사람의 휴대전화 번호를 하나 갖고 갔는데 그 전화는 네팔을 떠날 때 까지 내내 연락이 되지 않았다. 서멀 역시 집에 전화가 없다. 그 후로 서울에 돌아와 서멀과 전화인터뷰를 가지려고 한 30여 차례 시도 했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같은 네팔출신 이주노동자 레기미 보드라저와 나렌드라 구릉의 도움으로 서멀과 전화통화가 이뤄진 것은 10월 3일 오후 4시경이었다.

 

“여보세요, 서멀?”
“아,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서멀입니다.”

네팔 출입국 관리들도 입국 거부

비행기로 쉬지 않고 가도 8시간 30분이나 걸리는 거리에서 전화선을 타고 흐르는 그의 목소리는 예상 밖으로 맑고 차분했다. 그간의 자초지종은 얘기하고 나서 본격적인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다.

 

올해 2004년 4월 1일 한국정부에 의해 서멀이 강제출국 당했을 때 많은 한국의 친구들은 당신의 신변에 대해 걱정을 했다. 말지의 지면을 빌려 현재 네팔에서의 생활에 대해 말해 달라.

“지난 4월 1일 한국 법무부 출입국관리직원 3명과 함께 인천공항에서 네팔로 강제출국 당하는 비행기를 탔을 때 나의 기분은 뭐라 말하기 힘들 정도로 착잡했다. 네팔 국영항공의 비행기를 기다린 시간까지 무려 18시간 만에 카트만두 트리부번 공항에 도착하였을 때 사실 걱정이 많았다. 공항에서 입국심사를 받을 때 나의 입국서류는 여권도, 비자도 없이 달랑 여권복사본 1장만이 전부였다. 동행한 한국 출입국관리직원들은 나를 네팔 출입국직원들에게 빨리 인계하려고 했고, 네팔 출입국직원들은 나의 신변 인수를 거부하였다. 공항에 나와 있던 한국대사관 직원이 내가 한국에 불법체류를 하다가 강제 추방된 사실을 알리자 네팔 출입국직원들은 그때서야 마지못해 나의 신변을 인수했다.

 

그 과정에서 별다른 위협을 받지 않았지만, 새벽 3시 무렵 자세한 조사를 하겠다며 나를 카트만두 시내 모처로 연행하였다. 당시 나는 31일간의 단식을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아픈 몸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다행히 네팔 노총에 전화 걸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 네팔 노총관계자와 변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조사를 받고 무사히 풀려 날 수 있었다. 네팔에 돌아와 나는 예전에 다니던 인민대학 경제학과에 다시 복교해서 아침 6시 30분에서 9시 30분까지 3시간씩 공부하며 그 이후로는 네팔 노총에서 현재 상근자로 일하고 있다.”

 

산업연수생에서 불법체류자로, 불법체류자에서 다시 강제출국까지 한국에서의 10년 생활이 후회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나?

“1994년 5월 내가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한국에 왔을 때 처음에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연수생 관리회사가 우리가 받아야할 임금을 중간에서 착취하고, 네팔에서 했던 계약을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들 멋대로 바꿨다. 그때는 한국말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몰라서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산업연수생 제도에서 받았던 인권침해와 탄압에서 벗어나 불법체류자가 되었지만 더 힘들었다.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고 강제로 일을 시키고, 일하다가 다쳐도 산재처리도 안 되고 갖가지 차별과 탄압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10년 동안 생활하면서 한국 문화와 음식과 생활 그리고 한국인 친구들을 알게 되면서 한국을 알아 가면서 좋은 것도 많이 배우게 되었다. 강제출국 되기 전까지 10년간 한국에서 일하고 노동운동하면서 나 개인적으로는 인생을 사는 법과 노동과 노동자의 삶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었다. 이주노동자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받아 주지 않는 한국 정부를 제외하고 한국인들에 대한 감정은 정말 없다. 우리는 모두 진짜 좋은 친구(good friends)로 만나야 한다.”

 

“노동자의 삶, 한국에서 배웠다”

한국정부는 그 동안 문제가 많았던 산업연수생 제도를 고용허가제로 바꿔 이제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침해가 사라졌다고 한다. 과연 그렇다고 생각하나?

 

“2003년 7월 새 제도인 ‘고용허가제’가 한국 국회를 통과했다. 물론 고용허가제는 우리들(외국인노동자들)이 노동자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역시 빠져있다. 그리고 그나마 한국 체류 3년 미만자만이 합법적인 신분을 얻을 수 있다. 4년 이상 불법 체류한 이주노동자는 모두 한국에서 떠나야 한다.

 

또한 한국 정부는 지난 2월말까지 자진 출국하는 이주노동자들을 올해 8월에 고용허가제로 다시 입국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들 입장에서 보면 한번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한국에 다시 오기는 쉽지 않다. 또 다시 큰돈을 내지 않으면 아무리 한국 정부가 입국을 보장하더라도 올 수가 없다.

 

현재 한국정부는 한국거주 4년 이상의 불법체류 이주노동자 10만 명을 강력하게 단속하고강제추방하고 있다. 한국정부의 대책 없는 추방결정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이주노동자 14명의 아까운 목숨을 앗아갔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는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생계를 송두리째 뽑아 버리는 중대한 인권침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서멀 타파 당신을 비롯한 이주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은 무엇인가?

“지난 2003년 11월 15일 명동성당에서 80여명의 이주노동자들과 20명의 한국 실무자들이 함께 농성에 들어간 지 벌써 300여일이 지났다. 우리들의 요구는 ‘대책 없는 단속추방저지’. ‘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 ‘사업장 이동의 자유’이다. 그런데 농성이 1년이 다 되어가는 대도 한국정부는 모른척하고 있다. 잘하는 것 많이 없지만 내가 우리 농성단의 이주노동자 대표를 맡아왔다. 그 동안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제 우리 이주노동자들을 차별과 탄압에서 벗겨주고, 똑같은 노동자로 인정하면서 우리들의 인권과 자유로운 노동권을 보장해야 한다.”

지난 8월 한국의 민주노동당사 앞에서 “이주노동자들이 한국노동자들의 일자릴 뺏어 간다.”며 외국인노동자를 몰아내자는 일단의 한국인 노동자들의 시위가 있었다. 이런 일단의 한국 현실을 감안하면서 한국 내 이주노동자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것으로 보는가?

 

“이 문제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한국의 노동자 동지들, 지금 한국에 40만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정말 많은 숫자다, 그런데 한국 정부와 자본은 이주노동자를 더 많이 받으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예전에는 건설, 제조업체만 있었지만 이제는 더 많이 농업과 축산업 서비스업 등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것뿐만 아니라 이제 대기업까지 이주노동자를 받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노동자 동지들에게 : “우린 같은 인간이다”

한국 정부와 자본은 매일 경제가 어렵다, 회사가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회사 돈 빼내어 비자금 챙기고, 값싼 노동자들을 찾아 세계 여러 나라로 떠나고 있다. 결국 피해를 받는 것은 전체 노동자들이다. 자본가들은 자유롭게 이 니라, 저 나라 다니면서 우리 노동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같은 나라가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하고 제대로 대우하지 않고, 인권침해 하면서 노동자들을 노예처럼 일만 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어려움은 우리 이주노동자들만 갖고 있는 거 아니다. 많은 한국 노동자 동지들도 참을 수 없는 탄압과 차별 때문에 분신하고 자살하지 않았나. 그런데 한국 정부와 자본들은 아무 아픔이 없다. 아무 평가가 없다. 이게 바로 한국 땅에서 우리 노동자 농민, 빈민과 힘없는 사람들의 현실이다. 이제 우리 모두가 단결하여 모든 탄압에서 벗어날 필요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이주노동자들도 같은 인간이고 노동자다. 더 이상 서로를 모른척하고 흩어지고 갈라지지 말자. 분리하고 분열시키는 것은 자본의 술책이다. 한국노동자와 이주노동자가 하나 되면 세계 노동자가 하나가 될 수 있다.

 

우리 이주노동자들은 아직 예비활동가이다. 동지들의 연대가 정말로 필요하다. 동지들에 연대하면 다 같이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같이 투쟁하는 노동자와 살아있는 노동의 힘이 되고 싶다. 서울 경지지역 많은 동지들은 우리 이주노동자들의 실태를 잘 알고 있었지만 지방에 있는 동지들을 아직 잘 모르고 있어서 더 많은 관심을 부탁한다. 동지들의 관심과 연대에서 우리 전체노동자의 해방이 올 수 있다. 각 사업장에 이주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받아 주시고 또 각 지역에 있는 지역본부에서 우리들 조직할 수 있는 사업 만들었으면 좋겠다.”

31일간의 단식 투쟁과 여수출입국 관리사무소 내 보호소에서의 생활은 어떠했는지 말해 달라.

 

나는 연행되자마자 바로 여수보호소에 수용되었고, 2월 17일부터 단식을 시작했다. 단식시작하면서 식사시간마다 나는 아지테이션(선동)과 투쟁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보호소 직원이 나한테 와서는 계속 소리치면 독방에 넣겠다고 협박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권리 있다. 협박하지 마시라”고 말했다. 그래도 계속 협박했다.

 

그리고 방마다 있는 공중전화기를 17일 직원 한명이 와서 이제부터 밤 11시부터 다음날 오후 1:00시까지 전활 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갑자기 왜 이렇게 하는 건지 묻고, 다른 방에 있던 이주노동자들도 전화 연결하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우리 요구를 보호소 직원들은 무시했다. 또 보호소안 각 방마다 CC카메라 설치되어 있다. 방안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을 카메라가 감시한다. 직원들은 우리의 안전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카메라 때문에 안전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갖고 있는 문제를 제대로 상담하고 해결하는 방법이 제일 안전한 거라고 생각한다.”

 

“한국 정부가 일제 식민지 비판할 수 있나”

한국정부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10만 명이 넘는 우리 4년 이상 체류한 이주노동자들, 일하다 많이 죽고, 장애인이 되면서 이 나라 경제를 위해 많은 피와 땀을 흘렸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갑자기 4년 이상 체류자는 모두 2003년 11월 15일까지 한국에서 나가야 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한국 정부가 어떻게 이러한 결정을 할 수 있을까? 그토록 피해 받고 죽은 이주노동자들 가족에게 한국 정부는 언제 보상 한번 해줬나? 아니다. 이러고도 한국정부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비판할 수 있나?

그동안 사업장 이동 자유가 없어서 산업연수생들은 어쩔 수 없이 ‘불법체류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살아왔다. 바로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만으로 많이 이용당해 왔다. 또 많은 이주여성노동자들이 한국인들한테 성폭행을 당했다. 대한민국 법무부와 노동부직원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열심히 일이나 하지 왜 집회를 하느냐?’, ‘ 집회하는 것 불법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도 우리처럼 임금체불 당하고, 일하다가 산재 입어서 보상 못 받고, 똑같이 일하면서 차별받고, 그리고 성폭행까지 당한다면 마음이 어떨까? 이렇게 입 다물게 하고 이주노동자들을 언제까지 써먹을 것인지 정말 알 수가 없다.

 

참을 때까지 참아왔다.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본다. 이제는 우리들의 현실을 제대로 알려야 한다. ‘우리는 한국 땅의 노예가 아니다.’, ‘ 이 나라에 살아 움직이는 노동의 힘이다.’, ‘더 이상 노예처럼 일시키는 산업연수생제도,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없는 고용허가제는 우리들을 보호하고 노동권을 보장할 수 없다. 이제 우리 이주노동자들에게 한국정부는 노동비자(노동허가제)를 인정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당신을 알고 걱정하는 한국의 많은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한국동지들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했다. 어제도 목숨 걸고 우리 동지들 보호하기 위하여 싸웠다. 많이 다쳤다고 들어서 마음 아팠지만 동지들의 영원한 연대가 항상 있어서 오늘 우리가 여기까지 투쟁할 수 있는 거 사실이다. 바로 동지들께 많은 것 배웠다. 동지들과 함께 ‘평등한 세상 만들 수 있다’는 것 알게 되었다. 그리고 특히 안양 전진상 복지관과 여수 보호소에 있을 때 사랑과 연대의 정을 베풀어 주신 한국동지들한테 정말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힘내고, 서로 열심히 투쟁합시다.

 

마지막으로 우리 자랑스러운 농성투쟁단 동지들 절대 포기하지 맙시다. 절대 흩어지지 맙시다. 끝까지 투쟁합시다. 또 같이 연대해주시는 인권단체들, 사회단체들, 문화단체 동지들, 그리고 민주노총 동지들, 학생 동지들 많이많이 보고 싶습니다. 모두 건강하시고 좋은 시간 보내시기 바란다. 마지막 날까지 투쟁하겠습니다!”

 

명동성당 이주노동자농성단 후원계좌
농협 386-12-109380
예금주 kabir
연락전화 017-209-4822 서 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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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매를 만드는 계절이 돌아오건만 즐거운 일과 근심이 교차한다.

  • 등록일
    2004/11/22 14:08
  • 수정일
    2004/11/22 14:08

겨울 논에서 썰매를 타던 그때가 떠오른다.

썰매를 만들어 논바닥 얼음판을 내달리던 때... 동네 형 동생들과 함께 나무판과 쇠 가닥을 구해 만들어 타던 썰매는 겨울철 놀이중의 백미였다. 논 바닥 또한 물이 어느정도 차 있으면 날씨가 추운날 알아서 잘 얼어붙은 빙판이 되어주었다.

 

날씨가 시골 아이스링크장을 만들어주었던 때라고 할까? 그 시절 서울이나 경기도 등지에서도 논밭을 임대해 스케이트장을 개장하여 운영하던 때가... 15년전까지만 해도 경기도 일대에서 흔히 볼 수 있던 풍경이다.



 

스케이트장은 스케이트 타러가기 위한 공간만은 아니었다.

스케이트장에서 먹는 라면, 오뎅 등은 그 추운날 몸을 포근하게 만들어주는 음식들이었다.

스케이트장에서 날을 가는 아저씨 지금도 간혹 나오지만 다른 컵라면에 밀려서 많이 찾지 않은 농심육계장 사발면을 젖가락으로 휘감아 한 잎에 먹던 기억이 아른 거린다.

스케이트장은 그 당시 겨울 놀이의 백미이다. 지금은 스키장이 생겨 스키, 스노우보드, 눈 썰매를 타러 스키장을 방문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논바닥에 차려놓은 스케이트장은 지금의 스키장에 버금가는 공간이었다.

 

스케이트장에 갈 형편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논바닥 빙판에서 썰매를 타러 다니거나 야산에 올라가 비닐 부대하나에 의지한채 눈썰매를 타면서 겨울 나기를 하였다.

아 야산에 올라 눈썰매를 타는 것도 무척 재미난 일이지만, 이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있었다.

다름 아닌 감자나 고구마를 구워먹는 일이다. 지금은 나오는지 모르는 집 부엌칸에 어느집 가리지 않고 있었던 U,N 성냥통을 들고나와 불을 지피고 감자를 구워먹던 일. 그러다 논바닥에 불을 지폈다 볏짚을 다 태워버렸던 일 등등 무수한 사건과 사연을 간직한 그 겨울이 이제 성큼 다가옵니다.

 

논과 산만 있었으면 즐기던 썰매와 눈썰매 놀이는 이제 도시와 도시 인근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든 놀이문화가 되었습니다. 다들 썰매를 타기위해서 반드시 스키장이나 놀이동산 또는 공권에 가서야 놀수 있는 곳.... 남들은 눈썰매장에 가서 눈썰매 타는데 1만원이면 싼것 아니냐... 스키장에서 스키를 빌려 타는데 하루 5만원 정도가 비용이 소요되는데 저렴한 것 아니냐 말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만큼은 이 돈은 비싼 돈이다.(이 돈으로 책을 읽는 다면 난 세계일주나 상상여행을 하는데 한달간 마음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돈이고, 집에서 삼겹살 사다 소주먹으면 한달간 충분히 먹을 수 있는 돈이다.)

 

모든지 상대적이라 할 수 있겠다.

돈이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1만원과 5만원은 큰 돈이 아니겠지만... 최저생계비를 36만원(이도 실제 수령액은 27만원 정도 된다.) 비닐 봉투, 그리고 부식들을 현물로 지급을 하고 있어 실제 수령액인 27만원 정도의 돈으로 한달을 살아가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나마 다솜공부방 같은 곳과 연계가 되어 삶을 이어가고 있는 분들은 조금은 낳은 형편이다. 푸드뱅크로 얻은 음식들을 나누어 먹고, 아이들은 공부방에서 음식을 해결하기에 식사에 들어가는 부대비용을 줄일수 있다. 그리고 각종 나눔선교회세어 나오는 지원금을 갖고 저축을 하며 살아가는 분들 또한 있다고 한다.(극히 일부이겠지... 그러나 현실에서 이 돈으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 어려움을 알겠는가? 각자 자신이 받는 월급의 액수에 따라 소비의 패턴이 좌지우지 되지 않던가? 그래서 난 이곳을 본 후 보편적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느끼고 있다. 보편성이라는 말에서 특수성이라는 의미는 자연히 퇴색하게 된다. 그리고 특수라는 말에서 그들은 우리 이웃지만 특수한 사람으로 만들어진다. 같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무언가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 그들이 사회인으로 경제활동을 할 수 있게 자활사업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극빈층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정부에서 지원하고 있다. 사회적 자활에 대한 대체적인 모색이나 방향성은 상실된 채로... 그들이 진정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맞는 일자리 또는 자활프로그램이다. 그렇지 못한 분들도 있지만, 적어도 영세민과 소년소녀가장은 다르게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 

 

아 상상할 수 없는 일... 이 돈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살아가는 것이 희안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끼고 아끼고 해가며 살아가고 있는 분들...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군침을 삼켜야 하고 쓰고 싶은 것이 있지만 쓰지 못하는 분들... 자신이 꼭 내야 할 곳이 아니면 지출을 자제한다고 한다. 부스러기 선교회 그리고 각종 구호 선교단체들로 부터 지원 받아서 살아가고 있지만 선교회의 지원을 받지 않는 사람들의 삶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이 겨울 즐거운 눈썰매와 스케이트를 타기 위해 이 곳 아이들은 오산인근 경부고속도로에서 오산시민들이 만들 예정인 야산에 눈을 모아서 만들게 될 눈썰매장과 논밭에 물을 채워 만든 스케이장에서 아이들이 티없이 뛰어놀겠다는 생각은 즐거운 일이나... 겨울 치솟는 유가로 인해 난방비 걱정 방학으로 인해 줄어들 푸드뱅크 사업으로 들어갈 부식비 걱정을 해야 오산 다솜공부방 학부용들의 근심이 교차한다.

 

겨울은 누가 그랬던가?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 고역의 기간이라고... 없는 사람들의 겨울나기는 힘들다고... 결코 쉽지 않은 일이겠구나 생각하니 마음 한켠이 무겁다. 그렇다고 내가 돈이 많아 지원을 팍팍해줄 수도 있는 형편은 더욱 어렵구... 한숨만 휴 쉬어본다.

 

그래도 희망은 있겠지... 아이들의 뛰노는 공간의 해맑음 처럼 이 겨울나기 위해 학부용의 근심 또한 훌훌 털어버리면 좋으련만.... 있는 사람들에게 겨울은 레포츠의 계절의 백미라고 하지만 없는 사람들은 겨울나기 위한 근심 걱정은 추운날씨 만큼이나 마음을 얼얼붙게 한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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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를 준비하며...

  • 등록일
    2004/11/21 10:20
  • 수정일
    2004/11/21 10:20
다솜공부방 몇명의 아이들은 부모가 아침 일찍 일을 나가 아침밥을 챙겨먹지 못하는 아이들이 조금 있습니다. 아침 일찍 공부방에 찾아와 컴퓨터를 몰래하는 것을 일요일 저에게 종종 들킵니다. 혼을 내보지만 아이들인지라 재미난 것을 즐기기 위해 까맣게 잊어버리는 일일 비일비재합니다. 혼을 내켜보지만 그때뿐이라는 것을 잘알고 있으면서도 아이들에게 혼을 냅니다. 그러나 정작 나도 어린시절 똑같았으면서 아이들에게 혼을 내고 있는 저의 모습을 발견하곤 미안한 마음이 밀려들더군요.


혼을 내키는 내가 과연 잘하는 것일까? 생각해보지만 잘 하는 일은 분명 아닙니다. 그렇지만 전 아이들에게 대인관계에서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생활 속에서 알려주고 싶은 내 욕심으로 아이들에게 혼을 냅니다. 혼을 낸다는 것이 막연히 호통치고 꾸지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과 공부방 선생님이 회의를 통해 결정한 사항들에 대해 왜 지켜야하는지 그리고 약속을 한 것은 지켜야 함을 가르쳐 주고 싶은 저의 욕심에서 하는 행위입니다. 미안한 마음과 혼을 내킬 자격은 없지만 그래도 내 욕심을 저는 주로 챙깁니다. 사회라는 곳에서 아이들이 지켜야 할 중요한 덕목이기에... 오늘 일이 없어 공부방에 올라와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나는 알아서 밥을 챙겨먹는데 아이들은 그렇지 못하는 것이 아쉽게 느껴집니다. 늘 아이들에게 일요일 밥을 먹고 오지 않으면 큰형들이 먼저 밥을 챙겨주라고 말하지만 컴퓨터 게임을 하는데 온통 정신이 팔려 밥은 뒷켠으로 사라지고 재미에 푹 빠지나 봅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이면서 아이들에게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혼을 내키는 것은 잘못된 일인줄 알면서 그 아이들보다 더 오래 살았기에 혼을 내킵니다. 쉽게 고쳐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내가 아이들에게 혼을 내키더라도 내가 혼을 내킬 수 있는 자격이 되겠끔 행동하고 아이들과 함께 배워나가야 겠습니다. 세상사 중에서 가장 힘든 것이 마음의 수련인데... 아직 전 덜 되었나 봅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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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안도현] 저물 무렵(혼자 미소 지으며 웃어 보았다.)

  • 등록일
    2004/11/20 22:08
  • 수정일
    2004/11/20 22:08
* 이 글은 갈막님의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에 관련된 글입니다.

갈님이 올려 놓은 노랫말과 음악을 들어며 그냥 생각해 보았다. 아 그리워하던 대상이 있었다는 것... 당시는 아픔이 밀려왔지만 그 아픔뒤에 성숙해진 내가 있었고, 지금 혼자 웃음짖게 하는 좋은 추억거리 하나가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그리고 오늘 읽은 안도현 저물 무렵이 갈님이 올려놓은 노래말과 노래와 잘 어울릴 것 같아 트랙백을 하였다. 누군가 그리워 하는 것은 아마도 그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요즘 사랑이라는 의미가 많이 희석화 되고 왜곡되고 있지만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순수했던지 아니면 바보였던지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 참 어렸지만 어리지 않다고 박박 우겼던 시절... 머리가 다 컸다고 나만의 착각에 사로잡혔던 시절... 그렇지만 밤하늘이 무척 고왔고, 밤이 정말 길었고, 낮에 얼굴이 붉게 달구었던 시절이 다 있을 것이다. 그 애와 손잡아보고 영화도 보고 같이 분식점에서 함께 의자에 나란히 앉아 라면, 떡볶이, 만두, 튀김 등등 함께 먹으며 이야기 하고 싶었던 그때가 있었다. 그러나 한번도 실행할 수 없었다. 나만의 일방적 짝사랑의 설레임이 었으니까... 무수한 상상의 세계에서 허우적 거렸지만 참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사랑에 열병은 사람을 성숙시킨다고 했던가? 그래 누군가에게 사랑한다 이야기 못들어 보았던 첫사랑이라는 열병이 짝사랑으로 그치지만 그 짝사랑은 내 인생 한해를 풍요롭게 해주었다. 나의 경험을 비춰 보았을때....


다들 그녀 또는 그남자로 인해 세상이 정말 아릅답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갖가지 상념에 밤을 세웠을 기억들... 그러나 막상 그녀 또는 그남자 앞에서 멈칫 자신의 속내를 들킬까봐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던 첫사랑의 시절이 있었을 것이고.... 그녀 또는 그남자 앞에서 사랑한다. 사귀자는 말을 꺼내지 못하는 쑥맥이 되어 보았을 것이고, 뒤돌아 서서 후회를 하며 가슴을 치지만 그 앞에만 서면 말문이 도통 열리지 않던 아 바보같고 미련 곰땡이 같지만 그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나고 되돌아 보면 추억이라는 기억의 노트가 풍요롭게 느끼게 해줍니다. 첫사랑은 누군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 첫사랑이 있기에 살면서 그 시절을 회상할때 길을 걷거나 문듯 하늘을 쳐다볼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추억 치고는 괜찮은 추억이다. 혼자 미소를 지어보내며 실 없이 미소를 짖게한다. 이렇게 갑자기 생각을 하게 해준 그녀 또는 그남자에게 이 겨울 감사의 마음을 선사해 보시길 바랍니다. 자신만의 비밀이거나 또는 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그 당시는 아픔이겠지만.... 갈님의 글을 읽고.... 시하나 남겨 봅니다. ----------- 저물 무렵 그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서 강물이 사라지는 쪽 하늘 한귀퉁이 적시는 노을을 자주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둘 다 말도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애와 나는 저무는 세상의 한쪽을 우리가 모두 차지한 듯싶었습니다 얼마나 아늑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는지요 오래오래 그렇게 앉아 있다가 보면 양쪽 볼이 까닭도 없이 화끈 달아오를 때도 있었는데 그것이 처음에는 붉은 노을 때문인 줄 알아드는 것이었고 나는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웠습니다. 다만 손가락으로 먼 산의 어깨를 짚어가며 강물이 적시고 갈 그 공장의 이름을 알려주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랑이었습니다 강물이 끝나는 곳에 한없이 펼쳐져 있을 여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큰 바다를 그애와 내가 건너야 할 다리 같은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습니다 날마다 어둠도 빨리 왔습니다 그애와 같이 살 수 있는 집이 있다면 하고 생각하며 마을로 돌아오는 길은 늘 어찌나 쓸쓸하고 시렵던지 가시애 찔린 듯 가슴이 따끔거리며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애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포개였던 날이 있었습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애의 여린 숨소리를 열 몇 살 열 몇 살 내 나이를 내가 알고 있는 산수공식을 아아 모두 삼켜버릴 것 같은 노을을 보았습니다 저물 무렵 그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세상을 물들이던 어린 노을인 줄을 지금 생각하면 아주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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