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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09/30
    연휴가 끝났군요.
    간장 오타맨...
  2. 2004/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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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4/09/29
    창밖 가로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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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4/09/29
    한가위의 보름달은 어려운 이웃과 함께 바라봅시다.
    간장 오타맨...

금속연맹 현중노조 제명과 민주노조 운동에 대한 짤막한 생각...

  • 등록일
    2004/09/15 23:37
  • 수정일
    2004/09/15 23:37

울산노동시민사회단체 웹페이지인 씨줄날줄 기사를 보니 압도적 다수의 찬성으로 금속연맹에서 제명 결정을 내렸다는 소식을 접하였다.(9월 14~15일 일정으로 진행된 금속연맹 임시대의원대회에서 15일 열린 현대중공업노동조합 징계건에 대한 결과입니다. 내부토론을 거쳐 징계수위는 '제명'으로 표결에 부쳐졌고 ▶ 참석 대의원 총원 : 264명 ▷ 제명 찬성 대의원 : 232명 결과로 현대중공업노동조합의 금속연맹 제명이 결정되었습니다.)

 

현중노조의 제명을 환영하며....

울산현중노조는 작년 6월경 울산현중 해고자 5명(이갑용, 조돈휘... 기타 등등)에 대해 정식으로 노조 대의원대회에서 해고를 정당화시켰다. 이로 인해 기간 해고자복직투쟁을 전개하던 이들의 복직투쟁에 찬물을 끼얹은 사건이 발생하였다.(이로인해 기간 해고자들에 대한 노조의 임금 지급이 동결된 상태를 맞이한다.) 그리고 올해초 현중비정규직노조 박일수 열사의 분신사건에 대해 현중노조는 지역 공대위 구성에 있어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며 대책위 결합을 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박일수 열사 대책위를 꾸린다는 기자회견을 한 것을 언론을 통해 접하였다. 그러나 현중노조는 사측의 입장과 동일한 행보를 걸어왔다. 박일수 열사에 대해 온갖 유언비어를 퍼트리며 현중 비정규노조 활동을 전면적으로 탄압 또한 자행하였다.



현중 비정규직노조원인 박일수 열사를 현중노조와 대의원들은 두번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민주노조 깃발이 무색할 정도로 현중노조의 만행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대책위 천막에 대해 탄압을 가하였고, 이도 모자라 현중 대의원들은 박일수 열사가 안치된 영안실에 까지 찾아와 폭력만행을 서슴없이 저지른가하면...대책위의 활동에 구사대와 하나가 되어 폭력으로 일관하였다.

 

골리앗 투쟁의 역사는 온데간데 없고 현중노조는 노동조합으로서 자신의 역활과 임무를 스스로 포기하였다. 현중노조의 투쟁 정신은 정녕 어디로 팔아먹었단 말인가? 구사대의 폭력에도 굴하지 않았던 전투성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선봉장이 었던 그들이 불과 17년밖에 시간 속에 노동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사측과의 임단협투쟁에만 매몰되는 모습.... 어찌 현중만의 문제인가.... 광주 케리어노조의 금속노조 제명.... 한국통신.... 그리고 기타 대공장들의 모습 속에서 노조가 철밥그릇 챙기는 모습에서 노동해방의 불씨는 사그라 들었다.

 

대공장 노조는 더 이상 노동운동의 희망이 아니다. 기간 노동운동이 발전기 대공장의 파업투쟁은 사회적 영향력과 파장력을 갖고, 노동운동의 사회화에 앞장서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을 보라 대공장노조의 투쟁이 과연 사회적 이슈를 내걸 정치투쟁인가.... 아니다 그들의 투쟁은 철 밥그릇 지키는 투쟁에 지나지 않는다. 투쟁은 전략속에서 배치되는 것이 아닌 전술로서 교섭권에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실리적 총파업투쟁이 대부분이다. 한번 조합원들의 분노가 치밀어 오르더라도 지도부의 결단력이 부재하다. 밑바탕인 조합원은 지도부에 대한 신뢰 또한 과거에 비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어디서 파생된 것인가....

대공장 노조운동의 운동의 출범부터 갖고 있었던 근본적 문제이다. 대공장 노조의 경우 다른 중소영세사업장 노조보다 현장조직 운동이 활성화 되었다. 그러나 이 현장조직운동은 노동운동의 대의에 있어 헌신성, 전투성, 선진성은 시간의 흐름에 소멸되고, 현장조직은 그야말로 현장에서 친목을 도모하거나 자신의 정치노선과 조직노선을 이야기하는 곳에 지나지 않는 곳으로 전락하였다. 현장운동의 단절이라 말한다.

 

현장운동의 단절 그 요인은 무엇인가?

근원적 문제는 노동운동진영의 헌신성, 전투성, 선진성이 실천의 모태를 두고 있으나 실천활동은 사그러진지 오래고, 현장조직운동이 갖고 있던 기반의 붕괴로 정체성의 상실에서 오는 그들의 딜레마가 아니겠는지... 생각해 본다. 사회운동은 양적확대를 계속해 다양한 부문영역의 운동으로 확장되었지만 노동운동은 기간 활동에 있어 축척된 질적 양적 자양분을 시간의 흐름속에 사장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현재 민주노총은 조합원 대중의 조직률로 버티고 있으나 운동적 자신의 기반은 하나둘 까먹고 있다. 민주노총의 초기적 정신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민주노동당의 대두...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이라는 역사적 성과를 이루어 내었다. 그러나 보라 진보정당 원내 진출 과연 우리는 자축할 일인가..... 그 진보정당의 계급적 기반이 현재 하나둘 사그라들고 있다. 활활 타올라도 모자랄 촛불이 서서히 빛의 세기가 희미해져 간다. 진보정당의 계급적 기반이 노동자가 아니라면 뭐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난 노동자 정당인 진보정당은 이제 한국에 이념 정당으로 발돋움하지 못하면 그 역사적 수명은 오래가지 않는다라고  판단한다. 아니면 자본주의 정당과 별반 다를게 없는 의회전술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난 그 도구가 운동의 투쟁성을 많이 갉아먹을 것이라 판단된다. 실천보다는 법제도적 장치에 대한 모색이 주요한 전술로서 배치되며 전략이 부재한 상황을 초래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그러나 나는 반대하지만 아직도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헌신성, 전투성, 계급성을 겸비한 많은 활동가들이 민주노동당에 포진되어 있어 다소 안심이나 의회정당으로서의 한계는 분명히 있다. 이 돌파구를 찾지 못한다면 민주노동당의 역사적 성과는 역사적 성과에 그치고 말 것이다. 난 민주노동당을 지지하거나 비판적 지지하는 이도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과거 전투성과 혁명성에 기대어 남한을 변혁으로 이끌 무언가가 필요하다기에 민주노동당이 아닌 다른 정치조직에 가입하고 있다. 이 양자의 긴장성이 운동의 건강한 토대를 싹튀운다 생각치만... 내가 속한 정치조직은 그 영향력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아쉽다. 정치적 결단은 올바르나 실천이 부재한 현실... 투쟁을 조직못하는 현실이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나로부터 투쟁이 필요한데... 난 이렇게 한가로이 신세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허허 참 기막히죠.)

 

민주노총은 어디서 이끌고 있는가?

난 자신있게 말한다. 비정규, 이주, 중소영세사업장, 장기투쟁 사업장이 민주노총을 이끌어 가고 있다고, 비록 작은 규모지만 이들의 투쟁이 민주노총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생각한다. 이들 투쟁이 민주노총 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간혹 사회적 파장력이 잠재된 대단위 노조에서 투쟁을 하지만... 이는 초기 활화산 같은 분위기가 치밀어 오르다 모닥불처럼 쉽게 꺼지면서 민주노조운동의 질곡으로 치닫게 만든다. 승리와 패배의 공존이라 표현할 수 있다.

아직도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농성 날자를 하루씩 갈아치우면서 끝까지 투쟁하고 있는 경인지역 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투쟁(이주노동자 투쟁), 올해말 뜨겁게 달구었던 파워플랜트 비정규직노조 투쟁 등 무수한 중소영세사업장, 장기투쟁 사업장이 민주노총을 받쳐주고 있다. 그러나 이도 요원하지 않다. 그들의 패배는 곧 민주노총 산하조직의 탈퇴와 노조 해산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들의 민주노조 건설운동의 패배는 자신들의 민주노조운동 10년의 역사를 과거로 되돌리는 현상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투쟁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은 처절하다. 민주노조를 건설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그들의 기간 민주노조건설 투쟁의 성패가 달려있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에 우린 무관심하다. 대공장이거나 대규모 노조가 아니기에.... 사회적 파장력이 미온적이기에... 지금도 민주노조를 건설하고 민주노총에 가입하는 조직에 있어 다소 적지만 투쟁의 패배로 조합을 해산되는 노조가 우리가 보거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많은 지역에서 이들은 승리 아니면 패배에 따라 민주노조건설이라는 기로에 놓여있다.

현재 이들 전투성이 민주노총을 떠 받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노동운동의 공통의 화두는 무엇일까?

과거에 비해 다양한 문제들이 노동운동진영의 문제로 확장되고 있으며, 민주노총 또한 과거에 비해 전문화를 요구받고 있으며, 전문화되고 있다. 투쟁의 양태가 전문적으로 치닫는 것도 있지만 민주노총의 양적/질적확대가 이루어졌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양적/질적확대에도 불구하고 우린 노동운동의 딜레마에 놓여져 있다. 이 딜레마는 노동운동의 방향성과 이후 투쟁의 과제에 대한 점이다. 변혁적 산별건설이 90년대 중후반 노동운동의 화두였다. 그러나 지금은 구조조정 분쇄, 최저인금 인상. 노동조건 후퇴없는 주5일제 도입 등 노동자들의 생활 깊숙한 곳에 필요한 것들 원초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것들에 대한 주요한 방점을 두고 사업을 한다. 이것이 중요치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향후 노동조합의 조직적 확대방안 마련과 이후 노동운동의 나아갈 방향성 설정에 있어서는 아직 미온적이라 판단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이도 지켜봐야 할 것이다. 민주노총의 상근집행력이 취악한 것 또한 문제이다.

더욱 큰 문제는 민주노총이 선진노동자들과 조합원 대중들이 중심이된 조합으로 아직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 지적하고 싶다. 80년 90년 노동자투쟁을 통해 각성된 노동자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들의 헌신적 활동과 전투성은 전노협 건설과 민주노총 건설로 이루어졌건만 그 주체들은 다 어디로 숨었다 말인가.... 민주노총 스스로가 장기적 계획을 갖고 아래로부터 힘받는 민주노총으로 거듭나야 된다. 또한 민주노총은 일년 사업이라는 골간은 유지하되... 장기적 노동조합 발전방안을 강구하여야 한다. 1500만 노동자중 민주노총에 가입한 노동자는 겨우 80만명을 조금 못미치고 있지 않은가? 이에 대한 고민이 장기적으로 되어야 하며, 민주노총의 투쟁은 연대투쟁과 동맹파업과 같은 노동운동내에 계급운동적 권위를 복원시켜야 한다.

이제 긴호흡 강한걸음으로 준비할때이다. 아직 민주노총 투쟁에 희망을 접기는 이르다. 아직 민주노총은 희망이 남아 있다.

노동자 스스로의 아래로부터 창발성을 이끄는 것도 유효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역과 현장의 노동운동 복원이 무엇보다 급선무이다.

 

정치노선은 있으나 조직노선이 없는 현실....

정치투쟁에 있어 반자투쟁이니 신자유주의 저지 투쟁이니 하며, 다양한 운동 화두 및 이슈들이 던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투쟁에 대한 방법만이 있을뿐 이에 대한 구체적 상은 모호하다. 노동자 중심성은 이야기하지만 이 중심성을 노동자 스스로가 가져가기엔 버겁다. 노동자들도 어찌 못하는 사안이 공염불처럼 구호와 슬로건... 그리고 찌라시는 왜 이리도 집회장만 나갔다 하면 너두나도 할 것 없이 돌리는 것인지.... 이럴 시간 있으면 더욱더 현장조직화 사업에 박차를 가하였으면 한다. 필요한 찌라시도 있다. 장기투쟁사업장, 중소영세사업장, 이주노동자 등 당면 투쟁을 어떻해든 투쟁으로 돌파하고자 하는 노동자들의 절규섞인 찌라시...보면서 한숨만 내쉴때가 많다. 집회도 자주 나가지는 못하지만....  

반자투쟁 신자유주의 지구화 대항투쟁 등 일국적 차원의 투쟁으로부터 전지구적 투재에 이르기까지 요구받고 있는 투쟁의 수위는 과거에 비해 다층화되고 있다. 좋은 현상이다. 그러나 정치노선에 있어 서로가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선 다소 차이가 있겠으나 투쟁에 대한 당위성만을 놓고 보았을땐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이유는 어디있겠는가? 바로 조직노선의 부재에서 오는 한계가 아닐까... 과거 활동에 대한 향수가 그리워서가 아니다. 분명한 자신의 조직적 목적이 투영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양성이라는 미명하에 그 조직적 원칙은 동일한 인식으로 등치되고 이념적 기반이 희석화된다. 안타까운 일이다.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맞다고 하기엔 난 너무 아는게 없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히 안다. 과거 사회구성체논쟁은 자신이 어떤 입장을 지향하는 냐를 밝히는 동시에 이 지향성을 실천의 모태속에서 검증하고자 부던히 노력하였다는 것을... 지금은 책장에 한권의 책으로 머물고 있는 한국사회구성체논쟁(죽산 1, 2, 3, 4권)을 책들을 보면서 목마른 갈증만 애태운다.

 

운동의 자양분이 될 무엇가가 필요하다 생각한다. 무엇보다 현장운동의 복원의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기를 빌어본다. 아직도 일국적 노동운동이 필요한 때이다. 일국적 운동의 경형을 토대로 전지구적 노동자연대의 포문을 열기를 열망하며.... 나의 짧은 생각을 마칠까 한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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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김수영] 사랑의 變奏曲

  • 등록일
    2004/09/15 21:01
  • 수정일
    2004/09/15 21:01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都市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제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三월을 바라보는 마른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삼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나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넝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않는 것처럼 사랑의 節度는

열렬하다

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빡거리는 푸른 눈망울 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떳다 감는 기술-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四.一九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우러놓은 暴風의 간악한

信念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狂信을 가리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가지 자라라

人類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美大陸에서 石油가 고길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都市의 疲勞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瞑想이 나닐 거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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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짧지만 내 활동을 써봅니다.

  • 등록일
    2004/09/14 22:10
  • 수정일
    2004/09/14 22:10

저의 인식을 기반으로 제가 기간 짧은 활동들을 정리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져왔는데... 뜨문뜨문 드는 생각을 이어나가 짧게 정리해보고자 글을 써봅니다. 허접한 글이니 읽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저의 오타의 경지를 아는 분들은.... 읽지 마셔오,,,,

 

오늘따라 웬지 학교 담벼락이 애타게 보고 싶습니다.

졸업식때 학교를 돌면서 내가 돌아다니면 붙였던 대자보가 나부끼는 캠퍼스 이곳저곳이 오늘따라 웬지 보고 싶습니다. 이유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마냥 그 담벼락이 보고 싶습니다.

 

학교때 웬 선전물은 그리도 많은지 붙혀도 붙혀도 끝이 없는 선전물과 청테이프를 들고 대자보를 부치던 그때가 세삼 그립습니다. 그 당시 고민은 배부른 자의 낭만이었습니다. 그 당시 고민을 나눠가질 이들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대자보를 부치던 때는 참 무모하였지만 자신감이 넘쳐 흘렀습니다. 운동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미래에 대한 막연한 확신과 동경을 그려보았습니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할때 왜 이리도 학교건물이 측은해 보인건지 아니면 내 마음이 나약해 그 건물에 대한 애착심인지 이유야 모르겠지만 학교를 떠나는 날 새벽 학교를 우두커니 돌아보며 눈가엔 이슬이 과포화상태가 되어 내리더군요. 참 그때 뭐가 그리도 그리웠는지 뭐가 이리도 안타까웠는지.... 학교 건물을 보면서 그냥 흐느껴 보았습니다.



학교를 졸업(남들보다 학교를 오래다녀 졸업 정확히 말해 수료증을 받았음.)과 동시에 인천으로 갔습니다.

 

기대반 설레임반.... 그 기대를 갖고 인천이라는 낮설지만 희망의 땅인 곳에서 아무것도 없이 그냥 막연히 일을 찾아 다녔습니다. 단체를 만들고 해야 할 것은 자명하였지만, 지역에 기반이 없는지라 큰 고전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맞은 98년 IMF....  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인천지역시민연대에서 추진하는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에 결합하며, 상근활동을 진행하였습니다. 저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많았지만 이 계기를 통해 많은 이들을 알게 되었고 노조와 지역사업에 일정정도 결합하여 사업을 집행할 수 있는 추진력을 갖추었습니다.

 

참 무모하였지만 행복했던 시기였습니다.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에서 부분적으로 일을 하면서 지역단체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인천에 내려갈 당시 컴퓨터 조립기술을 터득한 지라... 이 곳에서 사회활동가 컴퓨터를 제가 대략 한 50대를 맞춰준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잘 몰랐지만... 진보넷을 이용하여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참으로 노조나 지역시민사회단체들에게 있어 유용하였던 모양입니다. 다르 웹기반보다는 상업통신망을 이용하거나 통신보다는 활동에 있어 주요한 도구로서 팩스가 이용되던 시기이니 그리 세삼스러운 것도 아니지요... 서울만해도 많은 단체들에게 전용선 또는 ISDN, 56Kbps 팩스모뎀을 사용하여 통신을 이용하던 터라 인터넷은 낮설은 것이였을 것입니다. 이에 저는 팩스모뎀을 이용한 인터넷 이용법을 노조나 단체에 가르쳐 줄 기회도 많았습니다. 이를 통해 많은 노조의 상집간부나 노조전임자를 알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활동의 시작점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배울 수 있었습니다. 무모하였지만 성과가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이는 곧바로 지역사업으로 이어졌습니다. 인천에선 인권운동사랑방에서 하는 인권영화제에 상영한 영화를 토대로 인천인권영화제를 희망터라는 지역교육센터에서 전문으로하여 진행하였는데... 제가 속하였던 인천지역 단체도 이 행사에 주관단체로 참여하여 주도적으로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천 노동문화제 첫 행사또한 함께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기억납니다. 밥과 자유인가라는 주제로 인천 인하대에서 개최한 그 행사를...

 

저는 그리고 지역단체를 떠났습니다. 무엇이 그리도 급했는지 저는 전망이라는 이름을 내세우고, 운동의 희망을 위해 인천이 아닌 서울로 내려왔습니다.

지금은 없어졌는지 있는지 모르는 나름데로 어떤 음악이라는 곳에 저의 고민을 남겨놓고 인천을 떠나와... 용산구 갈월동 진보넷 옆사무실에 저의 상근활동 보금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참 그 당시 행복하였습니다. 부족한 제가 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 행복하였습니다.

 

인천에서 내려와 몸담앗던 단체 그곳에서 언 4년하고도 1개월이 넘는 세월을 몸담았던 곳.... 아직도 애정이 있고 희망을 갈망하지만 제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아 마음을 졸이며 고민하였습니다. 애정과 희망만으론 운동을 할 수 없다는 개인적 판단을 갖고 애정이 깃든 곳을 먼발치에서나마 잘되기를 빌면서 새로운 일을 찾기 위해 떠날 생각을 하였고, 떠나기로 입장을 정리하엿습니다... 전 인천에서 내려와 들어가게 된 단체에서 평생운동의 포부를 갖고 새롭게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부족한 제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배려로 이 자리에서 길면 길고 짧으면 짧다는 4년하고도 1개월이라는 시간동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뭣도 모르는 저는 진보넷과 사무실을 같이 쓰던터라 진보넷 주관하고 한국정보보호진흥원인가?에서 후원하는 정보화 지원사업의 일환인 홈페이지 제작, 포토샵 교육을 무료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이때만 해도 저의 상근비가 진보넷에서 부분네트워크 지원으로 상근비를 받았으니까요. 2002년 6월까지.. 나머지 부족분은 또 다른곳에서 받았구요... 상근비 없이 인천에서 활동하던터라 주머니가 두둑했습니다.)그러나 홈페이지 제작에 워낙 이해도가 부족한 저는 교육을 받아도 뭔 소리인지 모르겠더군요... 이에 저는 홈페이지 제작은 포기하고 그냥 단체 사무국 간사의 일에만 전념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2000년 10월 진보넷과 함께 정보통신검열반대 공동행동 활동을 하면서 본격적인 정보통신운동에 발을 담게 되었습니다. 진보넷이 있어 계속해 덕보게되는 출발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운동을 함께 지향하는 벗들과 같은 존재를 알게되었습니다.(나의 소심함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다들 잘 받아주었고, 참 고맙게 대해주었습니다. 이 은혜 어찌 값을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공동행동이 해소되기 전까지 정말 밤세워 술도 먹어보고, 명동성당에서 일일 릴레이단식도 해보고, 별 지랄 날리부스는 다 쳐보았던 것 같습니다. 이때가 내 사회운동에 몸담게 되면서 맞이한 생애 최고로 행복하였던 시기로 기억될 것입니다. 다들 각 단체일로 바삐 움직여 공동행동이 공대위로 전환되고 난 후 잦은 만남의 기회를 갖을 수 없었지만 그때의 사람들이 아직도 연락을 할 수 있는 이들이 되었습니다.

참 술많이 먹고 어떻게 하면 사고 한번 칠까 고민하는 날의 연속이 었습니다. 지금 하라면 그 당시 활동은 다시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공대위 운동에 비판적이었던 저로서는 참 공동으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활동이었기에 참 좋았답니다. 앞으로 이런 기회가 저에게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함께 들더군요.

 

2000년 내가 상근하고 처음 맞이한 노동미디어 행사.... 제가 준비하지는 않았지만... 참 낮설고 어색하였지만... 그 행사가 무사히 잘 취로졌습니다. 진보넷 2주년 행사도 대학로 서울대병원 부근 5000원 부패에서 하였고, 술과 고기를 많이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2001년 대우자동차 해외매각 투쟁은 정말 전국 노동자연대의 흐름과 전지구 노동자연대의 가능성을 가늠케 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당시 인터넷의 급속한 확장은 전국적으로 인터넷 망 이용한 온라인 상의 전국노동자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저희 단체는 대우자동차공투본 홈페이지를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미디어활동단이라는 정보통신, 미디어 초기단계 활동가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맞이하였습니다. 이 사건투쟁에 대한 영상과 사진 그리고 소식을 홈페이지에 고스란히 옮겨 이 투쟁의 정당성을 알려나갔습니다. 그리고 Wanted 김우중(김우중 체포조가 프랑스까지 가서 전지구적 연대를 한 사례도 남겼구요)를 통해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주요 노동넷이 이 사안을 전지구적으로 확산시키는 성과를 가져왔습니다. 무엇보다 미디어활동단의 활약상은 가히 폭발적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영상이 전국을 넘어 전지구적으로 확대되면서 경찰폭력의 실상과 탄압받고 있는 노동자들의 생생한 모습을 타전할 수 있었으니까요.... 대우자동차 노동자 1951명 해고라는 건국이례 최대의 정리해고 단행과 대우그룹 해체 대우자동차 해외매각 등 굵직한 사안을 남기고 끝난 싸움... 그들의 투쟁은 기나긴 겨울까지 이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지금 대우자동차는 GM 대우차로 해외매각되어 상호가 바뀌었고, 대우그룹은 해체되고, 부평 대우자동차 공장은 운명은 GM에 넘겨졌습니다.

 

2001년 무모하지만 대우자동차 해외매각 저지투쟁을 발판으로 노동진영 공동미디어서버를 구축하는 소기의 성과도 달성하였습니다. 진보넷과 참세상방송국(현 미디어참세상)이 Real Streming Server를 참세상방송국과 연계하여 무료버전인 25 user가  동시접속이 가능한 스트리밍서버를 갖추고 있었는데, 저희는 이를 조금 넘는 60 user가 동시접속 가능한 real 스트리밍 서버를 구축하였습니다.(회선은 진보넷에서 전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습니다.)목소리를 전국노동자와 전지구노동자에게 생생히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였습니다. 노동진영 공동미디어 서버 구축 사업은 잊을 수 없는 사업중에 하나게 되었습니다. 현재 노동진영과 사회운동진영에서 전반적으로 노동진영 공동미디어 서버를 이용하여 동영상 서비스로 확대되었져 노동사회운동 물적인프라 구축에 주요한 기반이 되어 지금도 운영되고 있습니다.

 

2001년 또 다시 정보통신운동의 이슈가 검열반대 운동을 넘어서 다분화되는 계기를 맞이하는 해였습니다.(진보넷과 정보통신운동단체 주도의 정보운동포럼의 개최... 정보통신운동의 사회의제 확장의 계기로 작용하는 첫 단추를 끼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도 참여했구요.) 

 

2001년 세계노동절 행사 비정규직 주간행사에서 저는 취재원으로서 디지털카메라와 취재수첩을 들고 이리저리 집회와 거리 그리고 게임방을 활보하면서 활동하던 기억이 생생하게 납니다. 참 집회에서 거리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호흡한다는 것이 마냥 신났던 시기입니다.

 

2001년 제3회 국제노동미디어 행사... 버겁지만 그래도 행복한 순간을 머금을 수 있게 하는 행사였습니다. 제가 상근하고 처음으로 맞이한 국제행사 조직하는 것도 힘들었고, 무엇보다 장소섭외에 애로가 많았는데.... 다행히 중앙대(룸메이트 도움으로... 룸메이트가 중앙대 출신이라.. 중앙대 대학원총학생회에서 힘을 많이 써주셨답니다.)에서 행사가 무사히 마쳤습니다. 제가 아니었으면 좀 더 잘 할 수 있었을 텐데... 국내 조직화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국제행사 개최하는데 온 집중을 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이후 누가 이 행사를 진행할지 모르겠지만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개인적으로 가져봅니다.

 

2002년 공공3사(철도, 가스, 발전) 노조의 공동파업투쟁이 새해벽두부터 준비가 되어 2월 14일 총파업투쟁이 선언되기 전까지 지난한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철도 노민추의 노조민주화가 결실을 맺고 그리고 더 나아가 철도, 가스, 발전 등 한국노총 사업장에서 발전노조가 민주노총 사업장으로 상급단체를 옮겨 맞이한 첫 파업.... 생각에서는 철도가 오래 투쟁을 진행할 줄 알았지만 예상외로 발전노조의 38일간의 산개투쟁... 한국노동운동사의 희망으로 자리매김되는 사건에 제가 주체로서 참여하였다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져보았답니다. 민주노총의 교섭의 잘못으로 파업이 끝났지만... 21세기 노동자 투쟁의 새로운 희망으로 자리매김한 사건인 것만은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2002년 6월 진보넷 사무실의 사정으로 인해 저희 단체 사무실을 영등포 당산동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새 보금자리는 이전 사무실보다 확장되어 참 안락하고 좋은 공간으로 사무실을 이사하게 되어 좋았답니다.

 

2002년 6월인가 9월경 노동진영 공동미디어 서버의 확산을 위하여 윈도우2000 Media 스트리밍 서버를 구축하였습니다. 이 서버를 통하여 노동운동의 미디어 자원의 소통과 공유를 위한 초벌적 인프라를 구축하였습니다. 리눅스 기반의 리얼은 보는 이의 제약과 남한 전국적으로 보급된 컴퓨터 기반이 MS 윈도우의 끼워팔기 상술에 말려 많은 노동자들이 리얼보다는 윈도우 미디어플레이어로는 환경에 익숙해져 저희도 정보통신운동에 있어 리얼과 GUN 취지는 동의하나 전국 노동자들이 볼 수 있는 환경에 맟춰가며 서서히 리눅스와 GUN의 의미를 알려나가는 것이 올바르지 않은가라는 자체판단을 통해 구축하였습니다. 이 서버를 통해 노조 주요 행사에 대한 인터넷생중계를 본격적으로 추진할 물적 인프라를 구축하였고, 이 서버를 통해 기아, 민주노총, 공공연맹, 철도노조, 금융산별노조 조흥은행지부, 한국노총 대의원 대회 등 인터넷 생중계를 기간 진행하였습니다.

 

2002년 9월 경으로 기억하는데...  WSIS(정보사회세계정상회의)에 대한 준비모임을 진보넷과 함께 진행하였습니다. 무엇인지 잘 모르는 WSIS 관련 내용에 귀를 세우고 들어가면서 배웠고, 영문의 글자로 된 듬성듬성 단어들을 조합해가며 난해한 것들을 이해볼려구 해보았지만 참 난 감하더군요. 영어에 대해 읽기는 좀 되기만 잘 읽히지 않더군요... 영어 잘하는 사람이 부럽다... 

 

2002년 노동자감시근절을위한연대모임 복구.... 작업장 감시모임이 단절을 이어내기 위해 진보넷과 민주노총이 주축이되어 노동자감시근절을위한연대모임을 발족하여 이에 대한 자료수집 및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 사업의 결과물로 소원이었던 2003년 노동자감시실태조사보고서를 한길리서치에 의뢰해 초벌적 통계자료를 확보한 성과를 낳았습니다. 참 가슴벅찼습니다. 그리고 2002년 11월 2일 워크샵에서 또한 노동자 감시의 사회적 경각심을 전국 노동자에게 알리는 성과와 2004년 1월 13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노동자 감시 매뉴얼을 만든 것 또한 제가 참여할 수 있었던 만으로도 행복하였답니다.

노동자감시근절연대모임은 현재 주요하게 진행될 개인정보보호법제정(개인정보보호위원회인지 프라이버시보호위원회가 될 지 모르는 법제정 및 기구 설치)을 위한 주요한 활동창구로 발전하게 된다 

 

2002년 프라이버시연석회의라는 틀에서 프라이버시보호법(현 개인정보보호법)제정과 프라이버시보호윈원회(현 개인정보보호위원회) 설치를 위한 TF(Task Force)팀을 구성하여 초기적 고민에 대한 논의를 가져가며 운동을 전개하는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현재 갈 길은 멀지만 첫 스타트인 개인정보보호법 초안이 2004년도 8월경에 나와 향후 입법운동의 전개에 있어 방향성이 나올 예정입니다. 어떻게 될지 기대가 됩니다. 제가 더이상 같이하지 못함이 아쉬움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큰 비중도 역활도 없었던 부담없이 나왔답니다. 내가 정보통신운동을 하면서 운동을 가르쳐 주었던 사람들인지라... 그분들은 다 잘해낼거라는 믿음과 확신이 있습니다. 다 쟁쟁하고 기라성 같은 분들이기에 마음쓰지 않고 나올 수 있었답니다.  

 

2003년 금속노조 두산중공업지회에서 가슴 미어터지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배달호 열사 분신.... 현장에 와도 재미가 없다로 이어지는 그의 유서에는... 자본의 악랄함이 스며져 있었습니다. 한 노동자의 분신은 우리에게 노동자는 투쟁만이 살길임을 각인시켜 주었지만, 우리는 배달호 열사의 분신에 대한 화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사회적으로 부부문운동과 시민운동이 확장되어 외연적으로 사회적 민주화와 진보를 이루어냈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80년대로 회귀하고 있습니다.(대기업노조가 임금을 많이 받는다고 하지만... 그들은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현재 한국노총 이용득위원장은 비정규직의 처우개선의 방편으로 대기업노조가 임금을 많이 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금융노조이외에 어디 한번 제조업 노동자들의 임금 명세표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과연 얼마나 많은 임금을 받고 있는가? 중소영세사업장의 임금수준을 높이고 동일임금동일노동을 위해 투쟁하여야할 노총의 우두머리가 하는 말이 노조가 임금을 많이 받고 있으니 임금인상을 자제해야 한다는 발언은 저로서는 용납이 되지 않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노동자가 정당한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지불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금융산업은 어떠할 지 모르나 제조업은 월급제가 아닌 일급 한달급여제(저의 표현)입니다. 그들은 주야 맞교대에서 잔업 특근 야간수당으로 임금을 받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중소영세사업장에 비해 일급이 조금 높고, 상여금과 복지후생 그리고 성과급에서 더 많이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비정규직은 차별이 아닌 철폐가 되어야 하며, 중소영세사업장은 하청, 도급, 파견제를 철폐하고 그들이 정당한 대가를 산정하여 실질임금을 인상시켜야 할 또다른 투쟁이라 생각이 됩니다.제가 알고 있는 기아자동차 조합원은 15년 이상 근속자인데 하루 일급이 4,5000원이라고 합니다. 잔업, 특근, 야간근로수당을 합해야 겨우 4,000만원 조금 넘는 임금을 보전받고 있습니다. 과연 그들이 임금을 많이 받고 있는 것인지 저는 반문하고 싶습니다.)

배달호 열사... 투쟁에 우린 무기력함을 나타냈습니다. 아무런 투쟁의 불씨도 지피지 못하고 금속노조만의 투쟁으로 두산중공업지회의 문제로... 우린 해결하지 않았나 씁씁함이 들더군요. 열사여 고이잠드소서.... 부디 투쟁하지 못한 우리를 용서하고 영면하소서....  

 

2003년 한해를 넘기고 노동미디어 국내행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이전 노동미디어 행사가 정보통신 미디어 활동가의 결합이 어려웠던 점을 감안하여 2박3일 기간을 설정하여 노동미디어 노동정보캠프로 행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캠프로 진행한 행사에 많은 활동가들이 참여하여 주요한 논의를 이끌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초기인지라 이전에 비해 그래도 초기 캠프는 성과가 있었다고 봅니다. 노동정보화에 목말라 하는 활동가들에게 구체적인 방향성은 제시해 주지는 못하였지만, 1년의 평가와 2003년도 정보통신 미디어활동가들이 방향성 논의에 있어 유의미한 역활을 수행하지 않았난 자임해 봅니다.

 

2003년 WSIS 대응을 위한 회의를 성공회대에서 진행하였습니다.

여기서 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 수 있었다. 미국 장애인들이 MS를 상대로 투쟁을 통해 인터넷 환경에 있어 접근적 설계 방편으로 제어판 "내게 필요한 옵션"이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의제에 대해 인식할 수 있었던 주요한 행사였습니다. 이 행사가 전국정보운동포럼 행사 대체로 진행되었다는 것은 2004년 전국정보운동포럼에 참가하고 나서 알았습니다.

 

2003년 부산 한진중공업노조에서 김주익위원장이 타워크레인에서 목매달아 자살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위원장의 월급명세서를 보면서 손배가압류의 가혹성을 느꼈습니다. 태품 매미때에도 28호 크레인에서 태풍의 모진 바람을 이겨내며 투쟁을 굽히지 않았건만... 그러나 자본가의 악랄한 탄압과 노조탄압을 온몸으로 지키기 위해 그는 자신의 한몸을 노동해방 불꽃으로 피워내었다. 배달호 열사가 분신한지 꼭 10개월만의 입니다.(사회가 변화였다지만 노동자에게 과연 무엇이 변하였단 말인가? 노동자들이 생활수준이 나아졌다지만 그 월급명세서를 보면 과연 노동자들의 생활이 낳아졌단 말인가? 노동조합활동이 과격하다고 하는데 과연 노동조합이 과격한가? 왜 자본가들의 비열하고 악랄함은 언론엔 보도되지 않는가? 다들 한통 속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요구에 부당노동행위로 일삼는 그들이 아직도 판을 치고 한국노총 민주노총 합해야 20만도 못미치는 노조가입률... 이게 이땅의 노동의 현실이다. 1500만 노동자라고 하지만 조직된 노동자가 20만도 되지 않는 이 현실에 과연 노동해방의 갈길은 멀구도 험하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절규.... 그리고 투쟁.... 시청앞에서 벌어진 전국노동자대회... 그러나 우린 또다시 투쟁을 조직하지 못하고 김주익열사를 솔밭산에 뭍어야 했습니다. 열사력에 한사람한사람의 노동자, 농민, 빈민 들의 이름이 명부처럼 올라갈때마다 우린 우두커니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과거 국민대회니 하면서 온 사회를 요동쳤던 혁명의 기운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입니까... 땅을 치고 통곡해도 시원찮을 판에 우린 우리들의 그 쇳덩이 같은 기운을 어디로 팔아먹었단 말입니까?..... 이 투쟁 지켜보면서 이후 머리가 온통 백지통 같았던 기억이 납니다....

 

2003년 한진중공업 김주익 열사에 이어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 아름다운 청년의 분신을 동영상으로 보고 마음이 찌저질듯한 절규를 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비정규직/정규직으로 갈라치기 하며 간혹 노동조합 내에서 노-노 갈등이라는 중앙일간지들의 보도를 보면서 자본과 정권에 대한 적개심이 들때가 많았습니다. 비정규직을 누가 양산하였는데.... 민주노총이 98년 정리해고 조인한 것이 비정규직의 양산이라고 어처구니 없다. 정리해고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회사를 회생하기 위한 수단이라구.... 자본과 정권은 로비로 몇조에 달하는 공적자금(국민의 혈세를...)을 자신의 돈인냥 펑펑 써대면서... 회사를 회생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의 정리해고를 통한 구조조정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거짓말을 당당하게 언론을 통해 보도한다. 누가 믿겠는가 자본과 정권의 거짓말을.... 정작 정리해고 대상인 기업주와 임원들은 그대로 두고 왜 노동자가 정리해고의 우선대상인가... 기업을 잘못 운영한 그들이 정작 정리해고의 대상이지.... 양산되는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에 화두로 던진 아름다운 청년의 산화는 의미하는 바가 크지만 우리 노동형제들이 노동해방의 횃불을 들고 투쟁하기에 우리들의 힘이 미약함을 느꼈습니다. 투쟁이 진행되면 아무리 노조가 의지가 높다손 치더라도 이제 민주노조는 엄호지지 보다는 교섭과 타협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투쟁은 이제 과거의 추억으로 묻어야 하는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교섭은 최후의 보루이지만 이제 투쟁에서 교섭은 최선의 선택이 되고 있음에 분노가 치밀던 기억이 납니다. 남들은 대책없이 투쟁만을 말한다지만... 노동자 투쟁이 어찌 생존권이란 경제투쟁만이겠습니다. 노동자 투쟁은 엄밀히 말해 정치투쟁이지 않습니까... 우리 노동형제들은 정치투쟁의 긴박성을 놓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았답니다.

세상의 변혁의 주체는 여전 노동자입니다. 유럽과 다르게 제3세계 노동자들의 현실... 한국의 노동자들의 현실이 말입니다. 코민테른에서 일국적운동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사회 정치 문화적 다양성과 국가의 형태가 다른 노동자들이 어찌 동일한 깃발을 들 수 있겠습니까?... 전지구적 투쟁에 있어서 구심을 갖추어야 되지만.... 다국적 기업이 국가마다 다른 노동법을 갖고 노동자들에게 직격탄을 날리는데 동일임금동일노동의 조건을 내걸겠습니까?(일국적 차원에서도 어려운 문제이건만...) 노동자 정치투쟁에선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호가 맞지만 자본과 정권의 처해있는 억압과 착취와 고리가 동일하지 않는 조건에서 노동자 투쟁의 전술과 전략은 각 나라마다 다르게 적용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에 각 국가별 정치노선과 조직노선의 차이가 여기서 나타나기에.... 노동자들의 투쟁은 일국적 투쟁을 통하여 전지구적 연대로 발돋음 할 수 밖에 없는 필연적 투쟁의 과정을 갖고 있지 않나 개인적 판단을 해봅니다.

2003년 서롭고 슬프고 분노했던 한해는 나는 이렇게 흘려 보냈습니다.

 

2004년은 별로 한 것 없이 보냈습니다.

일상사업과 6월 보건의료산별 파업, 7월 궤도연대 파업 등을 하면서 저는 이제 저의 역활이 다했음을 직시하였습니다. 초기 공장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으나... 어떻게 할지는 9월달 생각을 해보고 결정하기로 하였습니다.

 

활동이라는 시간 속에서 제가 별로 한것 없이 보냈지만 그래도 희망과 아픔을 딛고 설 수 있었던 것은 주변에 많은 좋은 이들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봅니다. 이에 더이상 좋은 이들에게 얹혀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 이제 홀로서기를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가벼운 마음으로 저의 일을 무엇이 되었던 시작할까 합니다.

 

막상 쉬고 나니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저의 지금 모습으론 만나는 것이 결코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에 연락은 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괴변만 늘어놓을 것 같아서.... 그런데도 저에게 먼저 연락을 해주시고 자신의 인생의 여로를 저에게 들려주면 삶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신 장목사님에게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혼자 있는 저에게 손을 내밀며 힘내라는 위로의 말보다 값진 이야기를 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무엇을 할 지 곰곰히 생각해보라는 충고에 힘입어 다시금 무언가를 시작해 보고자 합니다.

 

이 공간을 통해 저에게 격려해주신 여러분께도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 빚 열심히 사는 것으로 보답할 생각입니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알고 있는 분과 짧지만 긴 인연은 언젠가는 이어지겠지요.... 언젠가는 볼 수 있을거라 믿습니다. 같은 길을 간다면....

제가 정리가 되는데로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떠나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그동안 부족한 저에게 신심어린 동지애로 감싸주신 분들께 감사하다는 짧은 말 남겨봅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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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은 사랑의 다른 표현입니다.

  • 등록일
    2004/09/14 20:15
  • 수정일
    2004/09/14 20:15

아이들을 보면서 미움은 사랑의 다른 표현임을 일깨울 수 있었습니다.

서로가 싸우고 미워하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이들은 서로를 진정으로 아끼는 사이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는 방법이 서툴러 때론 싸우거나 다투지만 그들은 둘도 없는 형제입니다. 둘도 없는 친구이며 형제, 자매, 남매입니다.

 

이 세상에 둘만이 있다는 것이 외롭고 힘들지만 둘이 있어 이 험난한 세상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으로 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서로가 이겨낼 진정한 인간이 되기를 바램합니다.

 

둘의 미움은 사랑의 또다른 표현입니다.



이 곳 아이들의 모습에서 참 많은 것을 배워갑니다.

 

아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부모나 다름없습니다. 할머니, 친척이 있지만 세상에 의지할 이들은 두 형제나 자매, 남매, 형제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더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며, 더많은 사랑을 배풀어 주기를 원하나 봅니다. 선생님들도 사람인지라 애타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아이들의 이후 삶을 위해 선생님들은 애타는 마음을 졸이며 이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랑을 주고 싶으나 이도 그들을 위해 절제하고 있습니다. 지켜보는 저러서는 측은함을 넘어 애간장을 녹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아이들을 잘 알기에... 누구보다 그리움에 목말라 있기에... 정을 애타게 갈구하고 있음을 말입니다. 저는 여기에 머물다 가면 그만이지만 이 곳 선생님 아이들은 이 곳에서 성장하고 선생님은 아이들의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또다른 부모님입니다. 선생님들은 이들에게 마음의 정을 나눠줍니다. 그러나 사랑이 서툰 이 곳 아이들은 선생님의 마음속 내리사랑을 알고 있지만 보여주는 표면적 사랑을 갈구합니다. 지켜보기 안스럽습니다. 

 

이들은 내가 바라보는 애처로운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 동생들입니다. 우리 사회구성원입니다. 그들에 대한 애처로움이나 갑싼 동정은 그들에겐 필요없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건 따스한 말 한마디와 동생같이 대해주는 사람들의 시선입니다.  

 

그들에겐 미래와 꿈이 있습니다. 아직 무르익지 않았지만 그 기상을 펼 수 있도록 우리는 지켜보는 파수꾼입니다. 그들이 잘못된 길을 갈때는 길을 인도하고 길이 없는 곳에 부딪히면 길을 만들어주는 것이 파수꾼의 역활입니다. 그들이 자신의 길에서 이탈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세상사 마음데로 되는 것이 아니지요. 이에 그들이 자신의 길에서 어려움을 당할때 스스로 나올 수 있는 바른 시선을 가졌으면 합니다. 그들이 어엿한 사회의 주체로 서기 위한..... 그들을 바라보는 따사로운 시선이 그들의 길을 가는데 큰 장애로 작용합니다.

 

그들에게 따스한 말한마디보다는 따스한 시선이 필요합니다.

 

이들이 세상의 주인으로 세상의 주체로 당당히 서기를 바램합니다.

이 들에게 알라, 부처, 예수, 하느님의 가호가 있기를....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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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사람

  • 등록일
    2004/09/14 20:11
  • 수정일
    2004/09/14 20:11



바른사람... 아이 눈에 비친 어른은 어떨가 상상해 봅니다.

선생님 말이 진리요 정의인 아이들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존재는 어떻게 다가올까요.

태어나면서 부터 부모의 말이 진리와 정의인 아이들은 사회라는 집단에서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사회를 알아갑니다.

아이들이 밝은 세상을 보기보다는 많은 것들에서 판단이 잘되는 어른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다만, 노동자가 못사는 사람이 아니라 땀흘려 일하는 진정한 이 세상의 주인임을 알아나갔으면 합니다.

노동의 중요성이 과거에 비해 퇴색되어져 가지만 인간의 역사는 노동의 역사요 노동자의 역사인 것을 이 땅 아이들이 알아나갔으면 합니다. 노동자가 주인이라는 것을...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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