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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08/06
    [시] 가난한 사랑 노래 (신경림)
    간장 오타맨...
  2. 2004/08/06
    E.H.Carr 역사란 무엇인가?
    간장 오타맨...
  3. 2004/08/06
    그대 사랑하는 마음에 나무 한 그루 심었네
    간장 오타맨...
  4. 2004/08/06
    오늘날의 노동자계급
    간장 오타맨...
  5. 2004/08/03
    [시] 인간의 시간
    간장 오타맨...

민중의 창조

  • 등록일
    2004/08/07 15:55
  • 수정일
    2004/08/07 15:55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 中...
( http://www.shinyoungbok.pe.kr/ ; 신영복 선생님 홈페이지)
 
그들을 말미 암음으로써 우리가 사는 시대를 더욱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키워주는 '응달의 사람들', 소외되고  억눌리고  버려진 사람들 속에 자기 자신을 심고 그들과 함께 고반(苦飯)을 드는 사람과 자비의 이야기들은 뜻있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크지 않는 목소리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저의 뇌리를 줄곧 떠나지 않는 것은 "우리 시대의 민중은 누구인가?",  "우리 사회의 민중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집요한 자문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민중의 든든한 실체를 파악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 민중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한 그 시대, 그 사회를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법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로서의 민중, 특히 격변기의 역사무대에 그 모습을 확연히 드러낸 경우의 민중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대 사회의  생생한 현재 상황 속에서 민중의 진정한 실체를 발견해내는 데는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착종(錯綜)하는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의 대립, 현실의 왜곡, 사실의 과장, 진실의 은폐 등 격렬한 싸움의 현장에서 민중의 참모습을 발견해내고 그것의 합당한 역량을 신뢰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껏 잡은 것이 민중의 '그림자'에 불과하거나 '그때 그곳의 우연'에다 보편적인 의미를 입히고 있는 등……, 감상과 연민이 만들어낸 민중이란 이름의 허상이 우리들을 한없이 피곤하고 목마르게 합니다. 그것은 '왜 불행한가?'라는 불행의 원인에 대한 질문에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게 하는 '눈물의 예술'로 그 격이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것은  위안을 줌으로써 삶을 상실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십수년의 징역살이 그 일인칭의 상황을 살아오면서 민중이란 결코 어디엔가 기성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이 '창조'되는 것이라 생각해오고 있습니다.
 
응달의 불우한 사람들이 곧 민중의 표상이 아님은 물론, 민중을 만날 수 있는 최소한의 가교(假橋)가 되어주지도 않습니다. 민중을 불우한 존재로  선험(先驗)하려는 데에 바로 감상주의의 오류가 있는 것입니다.
 
민중은 당대의 가장 기본적인 모순을 계기로 하여 창조되는 '응집되고 증폭된 사회적 역량'입니다. 이러한 역량은 단일한 계기에 의하여 단번에 나타나는 가벼운 걸음걸이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장구한 역사 속에 점철된  수많은  성공과 실패, 그 환희와 비탄의 기억들이 민족사의 기저(基底)에 거대한 잠재력으로 묻혀 있다가 역사의 격변기에 그 당당한 모습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중을 이렇게 신성시하는 것도 실은 다른 형태의 감상주의입니다.  어떠한 시냇물을 따라서도 우리가 바다로 나아갈 수 있듯이 아무리 작고 외로운 골목의 삶이라 하더라도 그곳에는 민중의 뿌리가 뻗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민중 특유의 민중성입니다. 부족한 것은 당사자들의  투철한  시대정신과 유연한 예술성입니다.
 
그 허상의 주변을 서성이며 민중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실패가 설령 그들 각인의 의식과 역량의 부족에 연유된 것이라 할지라도, 저는 그들  개인의 한계에 앞서 우리 시대, 우리 사회 자체의 역사적 미숙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인식과 역량은 기본적으로는 사회적 획득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온 지 두 달입니다만 아직도 쓸고 닦고 파고 메우고 고르고……,  크고 작은 일들로 주변이 어수선합니다. 그러나 새벽의 여름산에서 들려오는 산새소리,  때묻지 않은 자연의 육성은 갖가지 인조음에 시달려온 우리의 심신을 5월의 신록처럼 싱싱하게 되살려줍니다.
 
1984.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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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가난한 사랑 노래 (신경림)

  • 등록일
    2004/08/06 21:59
  • 수정일
    2004/08/06 21:59

 가난한 사랑 노래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 제4시집 "가난한 사랑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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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H.Carr 역사란 무엇인가?

  • 등록일
    2004/08/06 20:16
  • 수정일
    2004/08/06 20:16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가지만, 자신이 바라는 꼭 그대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환경 속에서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환경 속에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모든 죽은 세대들의 전통은 악몽과도 같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머리를 짓누른다.
                                                                  - 맑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이 구절은 맑스의 프랑스 혁명 3부작 중 하나인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 나온 유명한 문구이다.

우리에게 역사란 과거로부터의 유산이요, 현재의 거울이며 미래에 대한 교훈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순간에도 새로운 역사들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 역사는 과거와의 단절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맑스의 표현대로 "죽은  세대들의 전통"하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E.H.카의 표현을 빌리자면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1. 역사란 역사가의 해석여하에 달렸다.
E.H.카는 1960년에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라는 제목하에 여섯개의 강의로 이루어진 초고를 완성하였다.

서문에 따르면 2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이후 유럽지식인 사회에 불어닥친 절망과 회의적인 분위기를 반성하면서 '보다 낙관적인 미래를 전망'하고자  이와 같은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생각처럼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그 시대가 낳은 산물이라 할 수 있겠다.

E.H.카는 지난 세기인 19세기 역사풍토를 되짚어보면서, 영국 빅토리아  여왕기의 낙관주의적 역사관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른바 랑케류의 실증주의적 역사관에 대해선 비판적으로 그려내었다.
 
역사란 사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실중에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여 역사적 사실로 전환시키고 이를 해석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1장에 나온 예처럼 그리스의 역사는 소수의 아테네 지배계급에 의해 왜곡된 역사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역사가의 임무란 과거의 역사속에서 중요한 사실들을 골라내어 새롭게 재구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문제는 역사가의 시각 역시 시대적, 사회적 산물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18세기 역사가가 바라본 그리스의 역사와 20세기 역사가가 바라본 그리스의 역사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 프랑스에서 탄생한 아날학파는 E.H.카와는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해석한다.

아날학파 중 한사람인 앙리 페브르는 "역사학의 역할은 과거와 현재는 다르다는 인식, 즉 <시대 착오>의 위험성을 환기시키는 일이다."라고 말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는 그리스의 역사는 카의 해석대로라면 오늘날의 시각으로 재구성된 그리스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그당시 그리스인의 생각과 삶은 어떠했는가?"라는 물음을 던질 수 밖에 없으며 이에 대한 아날 학파의 지적은 유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E.H.카의 말처럼 역사란 시대의 산물이지만 과거 그 자체를 알고자하는 시도 역시 역사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역사란 역사가의 해석여하에 달렸다."라는 E.H.카 류의 역사해석에 대한 물 음이라 할 수 있겠다.
 
2. 역사속의 위인과 클레오파트라의 코
[사회와 개인]이라는 2장부분에서 '역사속의 위인'에 대한 언급이 있다. 위인이란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자 대리인이며 이와 동시에 세계의 모습과 인간의 사유를 변화시키는 사회적 힘의 대변자이자 창조자인 탁월한 개인이라 하였다.

위인에 대한 정의를 통해 카는 역사의 두 가지 의미 즉,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그려내고 있다. 역사 속의 뛰어난 개인인 위인은 역사밖에서 살펴볼 수 없고, 역사 속에서 살펴볼 수 있는 사회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에서의 인과관계]라는 4장부분에서는 '클레오파트라의 코'라 불리우는 "역사란 우연의 계속이다."라는 논리에 대한 비판이 그려져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이라도 낮았더라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비극적 사랑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거라는 논리이다.

앞에서 설명한 위인과 연결되는데 레닌이 없었다면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레닌이 죽지 않았더라면 러시아는 달라졌을 것이다라는 논리 역시 '클레오 파트라의 코'적 오류이다. 레닌이 없었다 할지라도 러시아혁명이 안일어난다고 볼 수 없으며 그 양상만 달라졌을 것이다. 또한 레닌이 1924년도에 죽지 않고 더 오래 살았다할지라도 스탈린주의적 러시아가 생기지 않았을까? 라는  가정은 가정일 뿐결코 합리적인 역사해석이라 말할 수 없다.

요근래 발생한 인천화재사건에 대한 의견 중에서도 이러한 오류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날 인현동 라이브 호프집에서 청소년들이 술을 먹지 않았더라면 살수있었을텐데..."라는 가정 역시 이러한 예라 할수 있겠다.

인현동 라이프 호프집 화재사건도 우연이고 거기서 죽은 청소년들도 우연 이라고 돌릴수 있는 것인가?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한국의 소방시설과 감독부실을 일차적 원인으로 제시할 것이다.

인현동 라이프 호프집이라는 특정 업체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예상할수 없겠지만 이와 비슷한 화재가 일어날 수 있는 개연성은 한국의 소방상태라는 객관적 조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전에 발생한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역시 우연이 아니라 한국사회가 지니고 있는 구조적 모순속에서 나온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3. 역사는 목적의식을 담아내야 한다.
헤브라이즘이 서양정신사에 유입되면서 목적론적 역사관이 탄생하게된다. 목적론적 역사관이란 역사과정이 지향하는 어떤 목표를 설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헤브라이즘은 "신의 뜻대로 역사가 이루어진다"라는 중세의 역사관을  이루었으나 서구 계몽주의시대의 합리주의자들은 이러한 역사관을 세속적인 역사관으로  전환시켰다. 이러한 목적론적 역사관은 19세기 후반 빅토리아여왕기에 절정을  이루는데 이 시기에 역사는 '진보적인 학문'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하지만 서구자본주의의 폐단이 등장하고 두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1930년대 대공황을 겪으면서 서구의 몰락과 진보에 대한 회의가 전유럽지성사회를 뒤덮게 된다.

이에 E.H.카는 역사의 진보로서 목적론적 역사관의 복원을 주장한다. "역사에서의 객관성이란 어떤 고정불변의 판단기준에 의존하거나 의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미래에 남겨진 그리고 역사과정이 전진함에 따라서 발전하게 되는 그러한 기준에 의존하거나 의존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과연 역사는 진보라는 이름의 목적의식을 담고 있는 것인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라이토스는 "한번 담은 물은 두번 다시 담을 수 없다"라는 변증법적 명제를 제시한다.

인간의 역사가 고정불변이라고 가정한다면 고대 인간의 문명과 오늘날 인간의 문명은 별다른 차이가 없다. 하지만 우리가 대충 살펴보아도 고대 인간의 문명과 오늘날 인간의 문명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물질적인 차이 뿐만 아니라 사회적 제도 더 나아가 인간의 윤리적 판단까지 변화하였다. 그렇다면 미래의 문명은 오늘날의 문명과는 다른모습을 담아낼 것이다.

이에 물음이 하나 남게되는데, 단지 변했다는 것을 진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라는 것이다. 이에 E.H.카는 "진화의 원천이 생물학적인 유전이라면 역사에서의 진보의 원천은 사회적인 획득이다"라는 유용한 모델을 제시한다.

과거의 유산과 경험은 오늘날까지 축적되어 보다 나은 오늘을 만들어 냈으며 오늘날의 유산과 경험은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토대를 이루게될 것이다.
 

 4. 밀레니엄 시대의 역사
 사실 2000년이라는 숫자는 해를 나타내는 연도일뿐이다.

 그이상 그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서구 기독교문명이 전세계를 제패하면서 서기는 전세계적으로 사용되는 표준 연도가 되었고, 천년이라는 연도-요한계시록의 천년 왕국류의 해석-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게 되었다.

 E.H.카가 슈펭글러류의 "서구의 몰락"과 두차례의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난 회의주의와 상대주의에 대한 무기로서 "진보로서의 역사"를 제시하였듯이 오늘날 포스트 모던과 세기말적 분위기속에서 인류의 진보에 대한 새로운 각오가 필요하다.

 인권, 노동, 환경문제 등이 산적해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역사는 "사회적 축적"을 통해 발전되어 왔다. 또한 지식이나 학문에 대한 상대주의는 수많은 고민들을 던져주었지만 이에 대한 실천적 대안들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속에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우리에게 비판적이고 실천적인 인간상을 제시해준다.

 앞서 인용한 맑스의 문구처럼 비록 우리가 바라는대로 역사가 이루어 지지 않지만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체는 바로 우리들 자신, 인간이다. 밀레니엄 의 시대인 현시점 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역사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복원해본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진보에 대한 인간의 발걸음은 하나둘 전진해 나갈것이며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고민 또한 새로운 전기를 맞이 할 것이다.
 
 인천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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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사랑하는 마음에 나무 한 그루 심었네

  • 등록일
    2004/08/06 16:55
  • 수정일
    2004/08/06 16:55

오늘 열사력을 보면서 이 세상 이리도 무심히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한해한해 추가되는 열사 이름을 보면서 열사들이 야속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정은임 아나운서의 죽음.... 나와 상관은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보고 있는 이 또한 여러가지 상상을 하지 않을 수 없을까요. 비록 개인의 죽음이겠지만 무수한 사람의 마음속에 가슴 아픔을 주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정은임 아나운서의 죽음은 모든이의 가슴에 한 줄기 가시꽃이 각인되는 것이겠죠. 그러나 전 정은임 아나운서의 죽음에서 무수히 죽어간 노동자 민중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햇살 밝은날 동지들의 가슴속에 묻어야만 했던 무수한 열사들.... 그리고 가시는 그길에 열사의 눈물로 퍼부었던 수많은 빗줄기 속에서 늘 결의를 다지던 나를 되돌아 보았습니다.

그랬던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반문합니다.

오늘 하루종일 일이 잡히지 않군요.

그래서 모든 열사 그리고 이름없이 비명을 달리한 이들에게 시하나 선사합니다.

 



그대 사랑하는 마음에 나무 한 그루 심었네

 

                                                                           백무산

 

 

그대 사랑하는 마음에 나무 한 그루 심었네

한사코 길들일 수 없는 얼음과 불꽃의 계절

겨울이 와도 잠들지 않는 불꽃

봄이 와도 꽃 피지 못하는 얼음 속

그대가 와서 뿌리 내릴 흙 한줌 없어

내 마음 거친 빈 들에 나무 한 그루 싶었네

 

한번 심은 후로 저 혼자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돌보지 않아도 쑥쑥 키가 자라고 잎이 피고

내가 발을 헛디딜 때마다 꽃망울 하나씩 터지고

거친 일터 험한 싸움터에는 문득 바람이 불고

한번씩 쏠려 우수수 잎새 나부끼는 꽃잎 지는데

 

내 마음 들에도 계절이 지나는 바람소리 들리고

물소리 깊어지고 앙상한 가지마다 눈 내리 쌓이는데

접어둔 내 어린 꿈들 있어

나래쉼 할 곳 없이 찾아들지 못하더니

새 되어 그 나무 눈 내린 가지에 이제 와 우는데

 

그대 사랑하는 마음 빈 들에 한 그루 심은 나무

잎이 지고 꽃이 다 언후에

내 어린 꿈들 내려앉아 새들 우짖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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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노동자계급

  • 등록일
    2004/08/06 14:29
  • 수정일
    2004/08/06 14:29

동구사회주의가 몰락의 길을 접고 사회주의 운동이 패배한 운동으로 치부되는 현실에 직격탄을 날리는 하나의 소나기와 같은 책입니다.

국제사회주의자인 저자의 글을 통해 필연적 사회주의의 희망을 읽어나가 보시기를,,,,

신좌파의 상상력은 어찌보면 서유럽 사민주의자들의 호도일 수도 있습니다.

러시아 혁명의 역동성 마르크스-레닌주의 행동과 실천 강령은 결코 패배하지 않은 직관적 현실임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해 보시기를.....

 

간장 오타맨이....



알렉스 캘리니코스/크린스 하먼 지음/ 이원영 옮김

 

아무리 작은 승리라 할지라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자신감과 새로운 이해력을 제공한다. 아무리 작은 패배도 어느 정도의 사기저하, 절망, 현상태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동의를 낳는다. 역사에는 그 계급의 승리들이 서로서로를 가르쳐 그 계급의 가장 취약하고 자신감없는 구성원들까지도 계급적 일치의 감정으로 이끌고 그 견인의 힘으로 다른 계급의 일부까지 잡아당기는 강력한 운동성을 창출하는 시기가 있다. 또 역사에는 운동성이 일시적으로 사라지고 패배가 서로를 갈등하게 하며 그 계급의 강력한 부분의 일부에서도 계급적 정체감의 파괴를 가져오는 시기도 있다. 투쟁의 상승기에 한 계급의 의식과 활동성은 냉담하고 객관적인 시기에 측정된 것보다 춸씬 강력하게 솟구쳐 오를 수 있다.(파리 꼬뮌의 시기를 생각해 보라!) 그러나 역으로 투쟁의 침체기에 그 계급의 의식과 활동성은 그것의 객관적 힘 이하로 하락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지금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국면이다. 많은 활동가들이 느끼고 있는 사기저하가, 일시적인 패배를 영원한 죽음이라고 주장하는 유행적 이론들이 창궐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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