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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노조 설립 - "신앙공동체는 노동자 권리 더 보장해야" (뉴스엔조이)

"신앙공동체는 노동자 권리 더 보장해야"  


신앙공동체여서 노조가 불가하다는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신앙공동체라는 이유로 사람들의 권리가 침해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이유로 노동자들의 권리가 침해당할까봐 헌법에 노동자의 권리를 명시한 것이다. 다른 법도 아닌 헌법 33조에 노동자의 권리를 신성한 것으로 인정한 것이 그 이유에서다. 하나님을 앞세워 교인들을 바보로 만드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신앙공동체라는 것이 노동자들의 권리를 침해할 이유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신앙공동체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권리를 더 보장해야 하는 것이다.

최초의 신앙공동체 모습이 무엇인지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는 출애굽부터 시작되었다. 최초로 기록된 성경은 다 알다시피 출애굽기이다. 애굽에서 수 백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다가 거기서 탈출하면서 기독교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노예들이 노예 해방에서 승리하면서 자기 역사를 기록한 것이 성경의 시작이다. 가나안에서 만든 공동체 이름이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의미의 '이스라엘'이었다. 왜 그런 이름이 지어졌겠나. 인간이 인간을 다스리는 사회를 수 백년 간 피눈물을 흘리며 겪었으니 다시는 그런 사회가 되지 않기 위해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다.

이스라엘은 인간이 다른 인간의 권리를 빼앗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제도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열 두 지파가 모여 재산을 분배하면서 제사장직을 맡은 레위인에게는 한 푼의 재산도 주지 않았다. 종교는 힘이기 때문에 종교를 가진 사람이 재산까지 가지면 또 하나의 특권층이 생기기 때문이다. 신앙공동체 원칙에 충실하려면 교회 목사님들은 재산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보라, 얼마나 많은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고, 그 교회에서 일하는 수많은 다른 직원들에 비해 얼마나 고임금을 받는가. 비성경적이고 비기독교적인 것이다. 신앙공동체를 내세우며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발상은 철저하게 비기독교적인 것이다.

교회 안에 노조가 생기면 갈등 요소가 늘어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노조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도록 한번이라도 교육받은 일이 있는지 생각해 봐야한다. 우리 나라는 어떤 제도권 교육에서도 노조와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교육하지 않는다. 2년 전 비행기 조종사들의 파업을 모든 국민이 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당시 언론에서 이들이 연봉 1억이 넘는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이들 중 연봉 1억이 넘는 사람은 10% 정도였다. 국민들은 고연봉의 사람들이 파업을 해 항공대란으로 겪었다고 알고 있지만 왜 이들이 파업을 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 사회를 유지해온 교육 시스템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노동 문제를 올바로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국민들은 노조를 수십 년 동안 권력과 자본을 가진 사람들이 훈련시키는 관점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다른 나라는 노동자의 권리와 노조에 대해 다 가르친다. 우리 나라 국민의 대부분은 노동자이거나 그 가족이다. 국민의 대부분이 노동자인 사회에서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가르치지 않고 다만 노조가 우리 사회에 해롭다는 것만 가르칠 뿐이다.

헌법이 보장한 노동3권이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이다. 단결권은 노동자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조직을 만들 권리이고 혼자가 아니라 단체로 사용자와 교섭할 권리가 단체교섭권이다. 단체행동권은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기업에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끼치고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면서 파업할 권리이다. 이는 헌법이 보장한 신성한 권리이다. 사실, 얼마나 살벌한 권리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에게 손해를 끼칠 권리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타인을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는 권리를 왜 헌법에 보장했는지 생각해 보라. 왜 이런 권리를 전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신성한 권리로 인정하겠는가? 이런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한 일이 있는가?

노조를 부정하는 시각이 교회에서는 한층 더 강한 것 같다. 이유가 무엇일까.

노조에 대한 몰이해와 교회의 보수적 성격이 결합해 문제를 한층 어렵게 몰아가는 것 같다. 성모병원을 보라. 200일 넘도록 노동자가 파업을 하는 동안, 한 번도 교섭이 되지 않았다. 신부·수녀님들은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사람들이니 우선 업무에 복귀하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다른 병원은 교섭이 이루어지는 데 가톨릭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교섭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노조에 대한 몰이해가 보수적인 신앙과 결합하면서 상승 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병원 노동자들이 하도 답답해서 로마로 갔었다. 교황청의 담당자는 물론 유럽의 담당자와 인사들이 한결 같이 한 말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자기 사회에서는 지금까지 노조와 가톨릭이 적대적인 관계가 된 적이 없었는데, 가톨릭은 언제나 약자의 편이었는데, 한국 사회에서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이해하지 못했다. 신부·수녀님들이 노동자들을 고발해서 잡혀가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노동자에 대한 왜곡된 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 당연히 성직자도 포함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는 편향된 기독교가 들어왔다. 기독교를 노예에서 출발한 종교로 보는 관점이 있고 이를 애써 무시하는 전통이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잘 보면 예수님은 편파적으로 노동자를 사랑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식민지와 분단을 겪으며 굳어진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와 기독교의 보수 정서가 결합하여 더욱 천박해진 것이다.

교회 안의 노조를 사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설득할 방법이 있다면.

쉽지 않다. 노동자 역시 노조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볼 것을 강요당하는 사회에서 살았다. 노동자가 자신들의 싸움을 먹고 살기 위한 치사한 싸움이 아니라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올바른 싸움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교인들에게는 더 오래 걸릴 것이다.

안식일을 보라. 남종이나 여종뿐만 아니라 주인에게도 쉬라고 명령하고 있다. 주인이 쉬어야 하인들도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악덕기업주들의 공통점이 무언 줄 아는가. 자신의 헌신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대우 그룹의 김우중 회장을 보라. 그 사람이 한국 경제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쳤는지는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뭐라고 말했나. 자신이 대우 그룹 전체에서 가장 적게 자고 열심히 일한다고 강조했다. 식사도 승용차에 한다고 했다. 김우중 식사법을 개발했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고 말했다. 나도 열심히 일하니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논리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 성경은 안식일에 반드시 주인이 쉬라고 한 것이다. 이런 의미를 신앙 생활을 통해 익혀야 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쉬셔서 안식일에 쉰다고만 가르치는 것은 사기이다. 목사님들이 공부를 해야 한다. 기독교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면 노동자의 권리를 이해하게 된다. 희년 제도를 왜 두었겠는가. 철저하게 노동자 권리를 보호하는 종교가 기독교였다.

교회 노조는 고용주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핑계다. 정부가 모든 결정권을 가지는 공기업 문제에 대해 정부가 책임을 지지 않는 논리와 비슷한 것이다. 공기업에서, 정부가 결정하지 않으면 사장은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노동자들은 정부 책임자가 나와서 협상할 것을 요구한다. 많은 경우, 정부 책임자가 나오지 않는다. 사용자가 누구인지는 아주 명백하다. 그 사람을 채용하고 내보낼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하는 사람이 사용자인 것이다. 그 사람이 교섭에 나서면 되는 것이다. 노동자 권리를 회피하자고 하면 수많은 이유를 댈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비겁한 것이다.

줄 타는 광대가 있다고 치자. 남사당패의 광대는 보통 손에 부채를 들고 줄에 오른다. 부채는 언제나 몸이 기우는 반대 방향으로 펼쳐진다. 그래야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이 사람이 몸이 기울어지는 쪽으로 부채를 펼치면 바로 떨어질 것이다. 엄정·객관·합리를 유지하며 중립을 지키겠다는 사람은 바로 떨어진다. 교회 내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중에 누구의 목소리가 더 큰가? 누구의 주장이 더 잘 관철되는가? 교회에서 지위가 낮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교회 운영에 지장이 될 정도로 지나치게 크다면 교회에서 힘있는 사람 방향으로 부채를 펼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 목회자들의 목소리와 권한이 지나치게 크다면 부채를 어느 방향으로 펴야겠는가?

사람들이 이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이익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교회에서 힘없는 사람들의 편을 드는 것이 한 푼이라도 이익이 된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선교 사업을 유지하려면 힘있는 교회로부터 돈을 받아야하므로 그들에게 맞서는 행위를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대로 선택을 한 것뿐이다. 경제적인 작은 유익 앞에 수십 년 쌓아온 이성이 쉽게 무너지는 것이다.

숲을 보면 키가 큰 나무도 있고 작은 나무도 있다. 키가 큰 나무는 아무리 인격이 훌륭하고 착해도 작은 나무의 햇볕을 가리게 되어 있다. 이는 인격·지식·교양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가 결정하는 것이다. 교회 내에 힘있는 목사들과 힘없는 일꾼들의 대립구도가 이와 같다. 키 작은 나무가 죽지 않고 살려면 자기 키를 키우든지 큰 나무의 가지를 걷어내야 한다. 키 작은 나무는 인격과 교양이 낮아도 숲의 구조가 평등한 방향으로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교회 목사님들은 교회 직원보다 일반적으로 더 많이 배운 사람이고 세련되고 매너도 훌륭하고 교양도 많고 문화적 소양도 높다. 낮은 직급의 일꾼들은 모든 면에서 뒤진다. 목사는 숲 속의 키 큰 나무다. 우리 사회와 교회는 이 구조를 그대로 둔 체, 키 작은 나무를 계속 인격적·신앙적으로 훈련해서 숲에 적응하도록 만드는 것만 가르쳤다. 긍정적 사고방식과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자아발견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수 천년 인류 역사는 숲의 구조가 평등해지는 방향으로 변해왔다. 가끔 후퇴는 했지만 진행 방향은 바뀌지 않았다. 교회 역시 이런 상황인데 누구 편을 들어야겠는가? 공정하고 중립적인 입장은 비겁한 짓이다. 바늘만큼이라도 옳은 편을 들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는 노조가 아닌 새로운 방식의 갈등 해결 방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다.

그럼 소유의 문제를 교회에서 먼저 해결하라. 교회를 보라. 하루에 수천만 원을 버는 부자와 한 달에 50만 원을 버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소유의 문제를 그대로 둔 체, 똑같이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한다. 이런 부분에 대해 아무런 고민도 없다. 먼저 소유의 문제를 해결하면 노조 문제를 다르게 해결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세계 어느 나라도 노조에 대한 권리를 말하면서 '단 이 조항은 신앙공동체에는 적용하지 않는다'라고 한 나라가 없다. 신앙공동체에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옳다면 법에 포함이 되었을 것이다. 모든 노동자는 노동기본권을 가지는 것이다.

교회 노조가 교회 개혁을 촉발할 수 있을까.

 

그것이 노조의 본질이다. 전교조가 10년 동안 교사 처우 개선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참교육과 민주화 문제를 말했다. 공무원이 노조를 만들었지만 아직 처우 개선 문제를 말하지 않는다. 공직 사회의 부정·부패 추방을 주장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곳에 문제가 있어서 이를 고발하는 사람은 혼자만 손해를 보고 해직되었다. 속된 말로 그런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정의로운 공무원만 개피를 보고 끝난 것이다. 그러나 노조가 결성되면 이를 해결할 수 있다. 앞으로 교회 부패를 도저히 보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모여서 노조를 만들어 교회에 대항하게 될 것이다. 조직의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하는 방법을 노조가 제공하는 것이다. 노조가 300년 역사 동안 수행한 역할이다.

신기하게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지라도 그 행동이 불의에 맞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래서 노동자의 권리를 신성한 것으로 정한 것이다. 어느 나라도 '자신의 개인적인 유익이 아닌 공적인 유익을 위해 노동 3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단서를 가진 나라는 없다.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권리를 사용하면 이것이 사회의 공익이 되기 때문이다. 교회에도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목회자들이 직원들에게 존경을 받는다면 노조가 덜 만들어질 것이다. 교회에 노조가 생길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을 반성하는 것이 먼저다.  

노조 간부가 귀족화되는 문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존재한다.

노조가 가진 역기능이 있다. 그러나 역기능은 순기능에 비해 무시해도 적을 정도로 작다. 우리사회는 수십 년 동안 역기능만을 세뇌 당한 사회였다. 노조가 그렇게 나쁘다면, 그렇게 노조를 혐오하는 힘 있는 사람들이 법과 제도를 만듦에도 불구하고 왜 노조를 인정했겠는가? 노조를 불법으로 하지 못하는 이유는 노조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유익이 크기 때문이다.

교회 직원들이 지역노조를 만들 때 여러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큰 교회가 작은 교회를 지원하는 일이 생길 것이다. 노조는 본래가 산별 노조이고 지역 노조이다. 기업별 노조는 한국만의 특수한 현상이다. 필리핀과 우리 나라만 가진 기형적인 구조다. 지역 노조를 만들어도 교섭을 하면서 충분히 조정이 된다. 재정 여유가 있는 교회에서 가난한 교회를 지원하고 교회공동체에 복지의 개념이 들어올 것이다. 큰 교회로서는 반대할 것이다. 교회 노조를 반대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논리를 개발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 노조는 대세이므로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교회에 노조가 안 된다는 것은 한국에서나 통하는 아주 무식한 말이다. 교회 부교역자들에게도 언젠가는 노조 설립 움직임이 생길 것이다. 부교역자는 버스를 타고 다니고 담임목사는 벤츠를 타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목회자는 가장 가난한 사람이어야 한다. 내가 목회의 길을 선택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지금보다 훨씬 가난하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은 노동자 수준으로는 살아도 된다. 그러나 목회자는 굉장히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 왜 레위인에게 재산을 주지 않았겠는가? 하나님 권위를 등에 업은 사람이 재산까지 가지면 반드시 부패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사회의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사기다. 모든 권력은 부패한다는 가정을 갖는 것이 부패를 막는 길이다.

권위를 가진 사람은 자칫 타락할 수 있으므로 이를 막는 제도를 가진 사회는 더 깨끗해질 수 있다. 교회 노동자들이 작게나마 그런 역할을 할 것이다. 불이익을 감수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고생을 하는 노동자들에 의해 교회가 변할 것이다. 이런 움직임을 교회는 일반 사기업체와 똑같이 막을 것이다. 구사대와 보수적인 교인들을 동원할 지도 모른다. 노조가 생기면 교회 돈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 된다. 이는 교회에서 이권을 누리던 사람들에게 엄청난 불이익이다. 앞으로 교회의 추악한 모습을 많이 보게 될 것이다.

2003년 04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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