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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물교환

카라안님의 [2010년 JUSTAO사업] 에 관련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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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국제노동영화제

banrani님의 [경기국제노동영화제] 에 관련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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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군사,경제,전쟁연습

결혼 이야기

손을 내밀어 우리님의 [주례가 둘이더라] 에 관련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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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개혁-교수노조-

이주탄압

“낮은 자리 들꽃이 하나님입니다” 집나온 불우청소년들 품어 ‘들꽃피는학교’ 가꾸는 김현수목사

“낮은 자리 들꽃이 하나님입니다” 집나온 불우청소년들 품어 ‘들꽃피는학교’ 가꾸는 김현수목사


그 들꽃의 풀씨들이 경기도 안산노동교회에 날아든 것은 1994년 7월이었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의지하던 셋방살이 교회였다. 목사는 처음 이 풀씨들을 밖으로 쓸어 보냈다. 어디서 얼마나 뒹굴고 다녔는지 교회는 형언할 수 없는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거름 썩는 냄새 같기도 하고, 청국장을 띄울 때 나는 냄새 같기도 한” 악취에 하나님의 집은 장악되어 있었다.


목사는 아침을 먹이며 다시는 들어오지 말라고 엄중 경고했다. 그러나 풀씨들은 잊혀질 만하면 교회 안으로 스며들었다. 때론 교회 안에 똥까지 싸질러 놓았다. 경찰의 구둣발과 매질은 잘 참았던 목사였지만 그 꼴은 두고 볼 수 없었다. 86년 창립 이래 한번도 잠그지 않았던 교회 문에는 커다란 자물통이 걸렸다. 풀씨들은 교회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기도를 마치고 안산서초등학교에 운동을 나갔던 목사와 사모는 학교 운동장에 웅크리고 있는 풀씨들과 조우했다. 아이들은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반가와했다. 달려와서는 팔에 매달려 밥을 달라고 졸랐다. 원망을 들을 줄 알았던 목사는 당황했다. 문득 이들의 사연이 듣고 싶었다. 아침을 먹여 보내며, 저녁에 다시 오라고 했다. 그날이 바로 김현수 목사의 진로를 바꾼 문제의 10월9일이었다.


가정이 있는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엄마가 없었다.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에다 남편의 술주정과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떠났다고 했다. 엄마가 당하던 주정과 폭력은 아이들에게 향했고, 결국 아이들도 집을 나와 들판의 풀씨가 되었다. 허름한 아파트 옥상이나 공사가 중단된 건물, 연립주택 계단 밑, 철거중인 폐가 등이 이들의 거처였다. 그런 곳에서는 어디서나 본드가 엉켜있는 라면봉지, 니스병이나 부탄가스통이 발견됐다.


갈곳없는 풀씨처럼 떠돌다가 가난한 교회 찾아든 ‘문제아’들 10여년 노동사목 길을 바꿨다


‘그날’ 이후 경찰에서는 목사를 자주 호출했다. 풀씨들은 경찰서에 끌려가면 보호자로 목사 부부의 이름을 댔던 것이다. 그러면 목사는 신병인수증을 써주고 이들을 데려나오곤 했다. 동네 사람들도 부아 난 얼굴로 교회를 찾아오곤 했다. 아이들이 일을 저지른 것이다. 아이들 중에는 앵벌이 소매치기는 물론 교회만 3백 군데를 털었다는 왕도둑 민이(가명)도 있었다.


목사 부부는 자신도 모르게 이 여덟 풀씨의 보호자가 되어 있었다. 그제야 “예수님이 진작에 세워놓은 계획”을 인정했다. 풀씨들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셋방살이 교회 사택에서 여자 아이 두명이, 교회 공부방에서 남자 아이 여섯명이 잠을 자도록 했다. 목사는 남자 아이들과 함께 생활했다.


올해로 벌써 10년째가 된다. 그동안 목사 부부는 수없이 많은 눈물의 밤을 보냈고 아이들과 싸움의 날들을 보냈다. 내상이 깊었던 아이들도 ‘예수가정’에 적응하는데 고생했다. 이런 눈물과 아픔은 풀씨들이 하나둘 꽃을 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제 예수가정은 11개로 늘어났다. 어엿한 들꽃피는마을을 이뤘다.


목사 부부가 꾸려가는 잔디네가정, 김금훈·양진희 선생 부부의 야긴새별이슬가정, 백길권 선생의 코스모스가정, 정기영 선생의 아모텍진달래가정, 권인희 권사(목사의 어머니)의 새밭토끼풀가정, 김문규 김진영 부부의 인애해바라기가정, 오순석 선생의 한신예수가정, 성기만 정청자 선생의 상록수가정, 유승권 여승현 부부 선생의 이랜드들국화가정, 김미연 선생의 백합가정, 송진혜 이선희 선생의 안산한신청소년쉼터 등이 그곳이다. 풀씨는 강원도 봉평의 유기농 공동체로도 날아가 그곳에 또 하나의 가정을 이뤘고, 전북 장수의 덕유산 기슭에도 한 가정을 탄생시켰다. 안산의 들꽃마을에는 지금 55명의 아이들이 살고 있다. 들꽃 가정을 거쳐 사회로 나간 이들은 300여명에 이른다. 박미선선생 등 일부 들꽃 선배들은 들꽃학교 선생으로 혹은 후원자로 되돌아왔다.


타이르고 싸우며 흘린 눈물로


소담하게 피워낸 들꽃송이들


이제는 희망씨앗 날려보낸다


들꽃 가정이 늘면서 들꽃피는학교도 생겼다. 들꽃마을 아이들 가운데 40명은 정규학교에 다니고, 정규학교에 다니기 싫은 아이들 15명은 이 학교에 다닌다. 10월엔 대지 155평에 연건평 360평의 그럴듯한 건물과 함께 들꽃청소년센터가 완공된다. 이곳엔 들꽃피는학교와 기도의집 자원봉사센터 청소년대안공동체연구소 청소년상담소가 들어선다. 세상 밖으로 밀려났던 안산의 풀씨들은 비로서 자신의 꿈을 키울 공간을 갖게 됐다.


“마을과 학교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준 선생님과 자원봉사자, 사랑의 인간띠를 만들어준 교회와 기업 지역사회 후원자들 덕분입니다. 하나님이 참다운 사랑을 실천하는 길을 드러내기 위해 내게 보내주신 그 아이들이야말로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이 아이들은 낮은 곳에서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현재 학교를 그만 두고 거리로 밀려나 있는 아이들의 숫자는 7만명이라고도 하고, 10만명이라고도 한다. 정확한 통계조차 없으니 이들을 위한 정책이 있을 리 없다.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더 많은 아이들이 지금도 세상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들꽃피는마을과 들꽃피는학교의 선생님들은 매일 아침 하루를 열기 전, 이곳을 거쳐간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른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아이들과 함께 하기를 기도한다. 500여명의 후원자들을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이 땅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자라는 아이들을 생각한다.


목사는 아침 5시반에 일어난다. 예수님께서 이 아이들과 함께 하여,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 또다른 상처입은 사람 위로하고 좋은 길로 이끄는 사람이 되도록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묵상에 잠긴다. 대개는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으며”(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이 주제말로 떠오른다. 지난 92년 깊은 번민의 수렁에 빠졌을 때 그를 잡아준 말씀이다.


목사는 중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대신하고, 한신대학교에 진학했다. 재학중 유신반대 학내시위를 주도하다가 2년4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고, 80년대 위장취업을 거쳐 86년 안산노동교회를 세웠다. 노동교회를 하면서 감방을 들락날락하다가 이 아이들을 만났다. 경찰도 잡지 못해던 그의 발목은 이 아이들에 의해 붙잡혔다. 96년 안산노동교회 담임마저 놓아버리고 들꽃피는마을과 학교에 전념했다. 그는 최근 <똥교회 목사의 들꽃피는마을 이야기>(김현수 목사 지음, 청어람미디어 펴냄, 8900원)라는 활동 보고서를 펴냈다. 책갈피마다 마른 가슴을 촉촉히 적시는 흔치않은 이야기와 꿈이 차곡차곡 담겨있다. (031) 486 8836


위의 글은 <똥교회 목사의 들꽃피는마을 이야기>를 지은 김현수 목사에 대한 한겨레신문 2004년 9월 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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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에 충실한 사람이 되어 목적과 목표를 이루어야 한다.

노동자의 의사소통, 민주화된 국가권력,

조직된 힘을 바탕으로 투쟁하여라.

 

여러가지 책임을 맏고도 책임 감당을 다하지 못한 사람

한가지의 일도 성취할수없는 이 마음은 부끄럽고 애처롭다.

 

이름 뿐인 삶의 자리를 돌아보며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번민한다.

한순간 한순간 하나 하나의 사건들을 분석하여 제자리로 돌려 놓고

역사와 사상의 정리를 할 수 있는 고향의 집, 어릴때 몸을 녹이던 나의 자리가 그립다.

 

블로그의 시대,

변화에 문명의 이기를 통하여 지난 삶을 돌아보며

앞으로를 향한 삶의 투쟁을 텅하여 승리의 자리를 펼친다.

 

내가 태어나기전 아버지의 역사와 조상들의 고난,

그리고 앞으로 백년 후 사랑하는 민중들의 해방세상을 위하여 자리를 펼친다.

 

너, 불로그

내가 희망하는 아시아노동넷의 촉메가 되거라

민중들의 의사송통과 하나됨이

통일로,해방으로 , 자주로 평등으로

너 불로그가 이루어 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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