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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6

르완다, 프랑스와 맞장뜨다! /아프리카 학살에 개입한 혐의로 프랑스 정치인들을 기소 입력: 08-08-22 16:59 르완다 정부가 1994년 르완다에서 벌어진 학살에 직접 개입한 혐의로 프랑스 정치인들을 기소했다. 르완다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르완다 위원회는 미테랑 프랑스 전 대통령과 30여명의 원로 정치인들이 학살에 개입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고 르완다 정부는 이 보고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이들을 기소했다. 그 동안 프랑스 정부가 르완다 학살에 개입했다는 주장은 많이 제기되었으나 르완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처음이다. 르완다 학살 (Julius Guzy의 작품) 르완다 대학살이라고 불리는 사건은 1994년에 벌어진 투치족과 후투족 사이의 갈등으로 투치 인 80만 명과 온건파 후투 인 수만 명이 살해된 사건이다. 투치와 후투는 유목민이었던 투치가 15세기에 나일강 유역에서 아프리카 중앙에 위치한 현재의 르완다 지역으로 남하하면서 같은 지역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런데 1916년부터 1962년까지 약 40년 동안 벨기에가 르완다를 식민 지배하는 동안 투치와 후투에 대한 분리정책을 실시하면서 그들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벨기에는 투치 사람의 외모가 후투 사람의 외모보다 우월하다는 말을 퍼뜨리기도 하였고, 이 둘을 구별하는 신분증을 발급했다. 또 투치 인들에게만 정치, 경제, 교육에 특혜를 주어 이들이 후투 인들을 지배하게 하였다. 르완다가 벨기에에서 독립한 이후에도 투치 인들이 지배층의 다수를 차지하고 후투 인들이 소수를 차지하는 구조는 계속되었다. 1963년 12월에 이러한 사회 구조에 반감을 가진 후투 인들이 2만명의 투치 인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10년 뒤인 1973년에는 후투 인들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프랑스는 1975년부터 1994년 대학살 이후 정권이 바뀌기 전까지 후투 정권에 경제와 군사 원조를 하면서 후투 정권을 지원해왔다. 1994년에 투치에 대한 후투의 대 학살이 벌어진 것은 1990년에 우간다에 거주하던 투치 망명자들이 군대를 조직해 르완다를 공격하면서 고조된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후투의 강경파 정치인들은 투치가 반군을 지원하고 정권을 빼앗으려 한다며 후투 인들에게 반투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후투 정권을 지원했던 프랑스 정부는 투치 반군을 막기 위해 무기와 군대 등 군사지원을 퍼부었다. 그리고 프랑스는 1990년부터 1993년 12월까지 르완다 군대를 조직하고 훈련시켰다. 그러던 중 당시의 대통령 주베날 하비아리마나가 비행기 폭파로 살해된 후 투치엔 대한 후투 민병대 인터함웨군의 대량학살이 빠르게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인터함웨는 민병대라는 이름으로 구성되었지만 실제로는 정부군의 지원 하에 조직되었고 정부군의 지원을 받아 안정적으로 학살을 저지를 수 있었다. 그리고 투치 반군이 정권을 잡고 학살이 중단되기 전까지 100일 동안 80만 명이 살해되는 20세기의 가장 끔찍한 학살이 벌어지게 된다. 르완다 학살 사건을 사실감있게 그린 영화 [호텔 르완다] 그 동안 르완다 정부와 프랑스 정부는 르완다 학살의 책임을 두고 마찰을 빚어왔다. 르완다 정부는 학살 당시에 평화유지군으로 르완다에 군대를 파병했던 프랑스가 직, 간접 적으로 학살에 개입했다고 주장해왔다. 당시 르완다 정부군이 인터함웨 민병대를 지원하는 과정에 프랑스 정부가 개입했고, 프랑스 정부의 도움으로 학살이 더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프랑스 정부는 르완다 정부의 주장을 완강히 부인하다가 올해 초에 당시 외교적인 실수가 있었다고만 입장을 밝혔다. 오히려 프랑스의 한 저명한 판사가 르완다의 현 대통령인 폴 카가메가 1994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주베날 하비아리마나의 살해를 지시했고 그 때문에 학살이 시작되었다는 혐의로 폴 카가메 대통령과 그의 측근 9명을 기소했었다. 카가메 대통령은 한 국가의 지도자라는 직책 때문에 기소되지 않았지만 다른 9명에게는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그러나 주베날 하비아리마나 전 대통령이 살해되기 이 전에 이미 투치에 대한 대량학살이 계획되고 있었다는 것이 기정화된 사실이었기 때문에 설령 카가메 대통령이 주베날 하비아리마나를 살해했다고 하더라도 카가메 대통령에게 학살의 책임이 있다는 주장은 큰 논란이 되었다. 또한 프랑스 재판관이 제시했던 증거가 후투 극단주의자들에게서 받은 것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도 비난이 쏟아졌다. 프랑스 정부가 르완다 대학살에 개입했다는 증거를 조사하기 위한 르완다 위원회는 2006년 10월에 활동을 시작하여 거의 2년 만에 르완다 정부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르완다 위원회는 프랑스의 전직 대통령과 총리, 외무장관 등이 후투 극단주의자들을 무장시켰고 프랑스 정부가 후투를 지원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프랑스 정부는 학살 이전부터 당시까지 후투 정권에 정치, 군사, 외교적 지원과 물자지원을 했다. 위원회는 후투 정권이 남기고 간 공문서를 그 증거로 제시했는데, 공문서에는 프랑스 정부가 후투 정권에 대규모로 무기를 지원했고 학살을 저지른 인터함웨 민병대의 병사들을 훈련시켰다는 증거가 남아있다. 또한 보고서는 프랑스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르완다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이 투치 인에게 반인륜범죄를 저질렀으며 학살의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유엔 난민촌을 이용하여 도망갈 수 있도록 했다는 혐의도 두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프랑스 군은 투치 반군에 대항하는 작전에 포병대를 투입시키고 무장 헬리콥터를 사용했다. 그리고 프랑스 군인들이 직접 투치 인과 투치 인을 숨겨준 후투 인을 살해하기도 하였으며 투치 생존자들을 강간하는 일도 수 차례 발생했다. 르완다 위원회는 이러한 사실을 조사하기 위해 프랑스 군과 함께 전투에 참여했던 후투 인과 언론인들의 증언을 수집했고, 그 중에는 프랑스 장교들과 같이 인터함웨 병사들을 훈련시켰던 후투 군 지휘관도 포함되어있다고 한다. 르완다 법무부는 르완다 위원회의 보고서를 근거로 기소된 프랑스 정치인과 군 지도자들을 법정에 세울 수 있게 모든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당국에 요구했다. 이에 대해 프랑스 외교부는 자신들이 보고서를 다 읽기 전까지 답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뻔뻔하고 거만한 프랑스의 정치인들을 르완다의 법정에 세우기는 쉽지 않겠지만, 르완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프랑스의 전쟁범죄 혐의를 조사하고 공개한 것 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많은 아프리카의 국가들이, 그리고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이 서구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독립을 성취한 이후에 식민유산으로 인한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정리되지 못한 식민유산은 그 형태를 바꾸어 그림자 같은 망령처럼 민중의 미래를 갉아먹고 있다. 르완다 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과거사 청산의 의지가 같은 처지의 동료 국가들에게도 울림이 되길 기대해본다. 분류: 아프리카 입력: 경계를넘어 / 08-08-22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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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르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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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 다르푸르 지역에서 매달 1만명 사망 [수단]
http://blog.ifis.or.kr/blog/index.php?blog_code=mini&article_id=138


미니가 번역했음
그래서 번역이 정확한지는 나도 모름 ^^;;
그냥 목마른 놈이 우물 파는 심정 ㅋ
잘못된 것이 있으면 알려 주세요 ^.^


UN: 10,000 a month die in Darfur
Tuesday 15 March 2005 5:23 AM GMT

UN : 다르푸르 지역에서 매달 1만명 사망2005년 3월 15일 화요일

()
The UN emergency relief coordinator, Jan Egeland, has estimated that more than 180,000 people have died in Sudan's Darfur region from hunger and disease over the past 18 months, his spokesman says.

UN 긴급구호 책임자인 Jan Egeland는 지난 18개월 동안 굶주림과 질병으로 수단 다르푸르지역에서 18만명 이상의 사람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고 그의 대변인이 말했다.

The deaths do not include people killed during ongoing violence in Sudan's arid western region, said spokesman on Monday.

대변인인 Brian Grogan는 이 사망자 수는 수단의 건조한 서부지역에서 계속되고 있는 분쟁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수를 포함하지 않은 것이라고 지난 월요일 말했다.

Last week, Egeland said earlier estimates of 70,000 dead from last March to late summer were too low, telling a news conference: "Is it three times that? Is it five times that? I don't know, but it is several times the number of the 70,000 that have died altogether."

지난주, Egeland는 지난번 조사에서 지난 3월부터 늦은 여름까지 7만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한 것은 너무 낮았다고 한 뉴스 토론회에서 말했다. : “그것의 세배냐구요? 다섯배?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7만명의 몇배에 이르는 수가 사망했습니다.”

Egeland now estimates that an average of 10,000 people have died each month over the past year and a half from malnutrition and disease, Grogan said.

Grogan은 Egeland가 지난해부터 매달 1만명의 사람들이 사망하고 있고, 절반 가량은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사망하고 있는 것으로 현재 추정하고 있다고 했다.

Conflict
분쟁


()
Conflict has raged in Darfur for more than two years with groups fighting the government for power and resources.

다르푸르지역에서는 2년 이상 권력과 자원 문제 때문에 정부에 대한 투쟁이 격렬했다.

In response, the government says it recruited militias to fight the rebellion but not the Janjawid, which it calls outlaws.

이에 대해 정부는 무법자들인 잔자위드(Janjawid)가 아니라 반란군들과 싸우기 위해 병사들을 모집했다고 발표했다.

Two million people have fled their homes since early 2003, mostly to camps near towns and some to neighbouring Chad.

2003년 초 이후 2백만명의 사람들이 집을 떠나 대부분은 도시 근처의 난민캠프로, 일부는 이웃나라 차드(Chad)로 갔다.

The UN Security Council this week expects to adopt a resolution that would authorise a 10,000-member peacekeeping force in southern Sudan to monitor a landmark accord that ended 21 years of civil war.

이번 주 UN 안전보장이사회는 21년간의 내전을 끝냈던 역사적인 협정에 대한 조사를 하기 위해 1만명의 평화 유지군을 수단 남부지역으로 파견하는 결의한 채택을 예정이다.

Council members are at odds over where to try cases of gross human rights violations.

이사국들은 전반적인 인권침해에 대한 재판을 어디서 열 것인지 아직 합의하지 못했다.

The United States is opposed to the International Criminal Court in The Hague and instead has proposed a new tribunal in Arusha, Tanzania. No other council member supports that proposal.

미국은 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에 반대하면서, 대신에 탄자니아 아루샤(Arusha)에 새로운 법정을 설치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이사국들은 미국의 제안에 반대하고 있다.

작성시간 : 2005-03-18 pm 05:12 미니 | 인쇄 | 트랙백[0] | 덧글[0]
그날 르완다는 왜 미쳐버렸는가 [르완다]
http://blog.ifis.or.kr/blog/index.php?blog_code=mini&article_id=157


(르완다 학살이 있은지 10년이 지났고, 이 글은 1년이 지났지만 우리에겐 아직 시작되지도 않은 시간이어서 글을 옮겨 봅니다 )


10주년 추모식을 계기로 돌아본 100만명 학살의 참상… 제국주의가 교묘히 증오를 조장하다

파리= 이선주 전문위원 nowar@tiscali.fr


언 땅에서 라일락을 싹트게 하고 봄비가 죽은 뿌리를 흔들어놓아 ‘잔인한’ 엘리엇식 4월이 있다면, 살아 있는 것들로부터 죽음을 상기해야 하기에 더 잔인한 또 다른 4월이 있다.

()

△ 르완다 학살의 한 생존자가 당시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다. 그날 이웃 · 선생 · 학생 · 신부 등이 하루아침에 살인자로 돌변했다.(사진/ SYGMA)

4월7일,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의 한 공설운동장에는 15개국의 대표단과 르완다 국민들이 모인 가운데 엄숙한 추모식이 열렸다. 1994년 르완다 전국을 생지옥으로 만들었던 ‘인종학살’ 10주년을 맞았다. 학살로 숨진 이들의 넋을 기리는 동시에 지금도 기억 속에 각인돼 있는 참상을 상기해 지구상에 다시는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는 의도로 매년 4월마다 치러지는 행사다.

벨기에가 도입한 ‘카스트 제도’

이번 4월이 예년과 특별히 다른 점이 있다면, 학살이 일어난 지 10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 끔찍한 일을 한 단락 마무리할 수 있을 거라는 바람을 더할 수도 있겠다. “그들이 아내도 죽이고, 형제도 죽이고, 늙은 어머니도 죽이고, 친척도 죽이고, …모두 죽였어요”라고 외치는 살아남은 자들의 한탄은 암울한 역사의 한 장으로 접어두기에는 너무나 생생하다. 잊혀지기는커녕 나날이 되살아나는 고통이다.

1994년 4월부터 7월까지 3개월 동안 100만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르완다쪽은 90만~100만명을, 국제연합(UN)은 8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총인구가 800만명을 겨우 헤아리는 나라에서 다수족 ‘후투’(Hutus)가 소수족 ‘투치’(Tutsis)를 학살하면서 인구의 10%가 넘는 사람들이 살해된 셈이다. 르완다의 비극이며, 인류사에 남겨놓은 또 하나의 인간 만행이다.

르완다의 인종학살은 터키의 아르메이아인 학살, 나치의 유대인·집시 학살 그리고 크메르군의 캄보디아인 학살과 함께 20세기에 행해진 가장 끔찍하고 가장 짧은 기간 동안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학살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면 왜 이런 끔찍한 일이 르완다에서 일어났을까. 게다가 학살이 강행돼 100만여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동안 국제사회는 도대체 무엇을 했을까. 1899년 르완다는 부룬디와 함께 공식적으로 독일의 식민지가 된다. 이로써 서유럽 제국들이 앞다퉈 과자 조각 나눠먹듯 아프리카를 탈취하던 시절, 마지막으로 식민지 대열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식민통치에 어려움을 겪던 독일이 물러나고, 1919년부터는 벨기에령으로 바뀐다. 중앙아프리카 지역에 이미 식민지들을 갖고 있던 벨기에는 르완다와 부룬디를 ‘루안다-우룬디’라는 지명으로 부르며 옆 나라인 벨기에령 콩고의 지방쯤으로 간주하며 통치했다. 당시 이 지역을 구성하고 있던 대표적인 두 종족이 ‘투치’와 ‘후투’다.

학살을 고무한 프랑스는 말이 없다

식민통치 이전까지 투치족이 왕족을 형성하고 있긴 했어도 역사상 공존하며 같은 문화와 같은 언어를 사용해온 종족들이라, 이들을 구별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게 역사가들의 견해다. 그런데 이들 종족 간에 인종차별적 인식을 부추긴 것은 벨기에였다. 식민통치기간 벨기에는 통치정책의 하나로 부와 직업에 따라 차등을 매기는 일종의 카스트제도를 도입했다. 신분증에 종족명을 명기하면서까지 부유하고 엘리트층인 투치족과 그렇지 않은 후투족을 차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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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살 10주년 추모식에서 연설하고 있는 카가메 대통령. 르완다 학살은 제국주의의 산물이었다.(사진/ GAMMA)

그러다가 1950년대 말 아프리카 식민지 나라들의 독립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 이미 엘리트층을 형성하고 있던 투치족 사이에는 벨기에에 맞서 독립 주권을 획득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한편 후투족은 독립과 더불어 벨기에의 간접통치가 사라질 자리에 절대적인 지배층으로 들어서게 될 투치족에 대한 우려가 생겨나면서, ‘반투치’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이런 불안정 속에서 벨기에는 독립을 외치는 투치족을 억누르기 위해 기존 정책을 바꿔 이번에는 후투족을 지원했다. 급기야 1959년 후투족이 일으킨 반란과 학살로 수많은 투치족들이 살해되거나 이웃나라로 떠나게 되고, 결국 후투족이 권좌에 앉는다. 그런 직후 1962년 7월 르완다와 부룬디는 각각 독립국가로 거듭 태어난다.

무릇 탈식민지 나라들 대부분이 그렇듯, 독립 뒤 르완다의 상황은 한마디로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다. 1973년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섰고, 후투족인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은 식민시대의 잔재인 인종차별 정책을 다시 도입했다. 식민시절과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엔 ‘투치족보다 우월한 후투족’이라는 모토를 내건 점과 그 내용이 더욱 강경화됐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990년 발표된 ‘후투 10계명’ 내용을 살펴보자. “후투족은 투치족보다 훨씬 우월하기 때문에 모든 지배계층은 후투족이 장악해야 하고, 후투족은 투치족과 결혼을 해서도, 또 투치족을 고용해서도 안 되며, 투치족에게 동정심을 가져서도 안 된다.” 극심한 인종차별적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투치족은 국내에서 차별받는 소수의 투치족과 이웃나라로 달아난 투치족들이 있었다. 후자 가운데는 군사세력의 기반을 닦으면서 르완다 재탈취의 꿈을 키워가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런 중에 투치 게릴라 운동단체이자 군사·정치단체인 르완다애국전선(FPR)이 1987년 이웃나라 우간다에서 정식으로 창립되기에 이른다. 그렇게 탈식민으로 획득한 해방과 자유의 자리에 이젠 종족 간의 내전 기운이 무르익게 되었다. 마침내 1990년 르완다 북쪽 우간다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역에서 FPR의 공격이 개시된다. 전쟁 동안 르완다의 교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프랑스와 벨기에 그리고 자이르(지금의 콩고)군이 후투족쪽에 가담해 군사 개입을 했다. 이 전쟁의 여파로 르완다 내의 인종차별 기운은 더욱더 짙어져 ‘후투 10계명’까지 나오게 된다. 1993년 UN의 개입으로 FPR의 국내 복귀 조건인 평화협약이 체결되지만 그것은 현실을 외면한 국제기구의 환상일 뿐이었다.

1994년 4월6일,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을 실은 비행기가 폭격당하자 다음날 바로 인종학살이 펼쳐졌다. 인종청소를 겨냥해 치밀하게 계획된 만행이었다. 투치족뿐 아니라 친투치 성향의 후투족까지 대학살의 제물이 되었다. 학살 직전 르완다의 인구는 800만여명을 헤아렸고, 그 가운데 후투족 85%, 투치족 14% 그리고 극소수의 트와족으로 구성돼 있었다. 당시 살해당한 자들의 75%가 투치족, 나머지가 후투족인 것으로 알려진다.

하루에 1만명씩, 석달 동안…

1994년 7월4일 투치족의 FPR가 수도를 점령하면서 학살은 끝이 났고, 그와 함께 투치족이 다시 권좌에 올라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국제사회의 외면이 그렇듯 많은 희생자를 냈다는 르완다 현 정부와 인권단체들의 호소가 이어졌고, 1998년 클린턴 행정부는 인종학살을 방치한 무책임을 인정했다. 그리고 2000년 벨기에 총리는 6돌 추모식에서 식민통치와 인종학살 외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했다. 같은해 UN도 학살을 막지 못한 잘못을 반성했다. 하지만 1990년 전쟁 전후, 르완다의 후투족 군사와 정치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투치족 대학살을 격려한 혐의를 받고 있는 프랑스는 아직까지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은 4월7일 추모식에서 이런 뻔뻔한 프랑스의 태도를 비난했다.

석달 동안 하루에 1만여명씩을 살해한 학살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군인들이 총을 들고 서로 겨눈 전쟁이 아니라 이웃·선생·학생·신부 등이 하루아침에 살인자로 돌변해 칼, 도끼, 몽둥이, 괭이 등을 들고 저지른 살상의 장면을 상상하기는 더욱 힘들다. 그러나 르완다의 학살은 그런 식으로 행해졌다. 사망자 수뿐 아니라 인구 10명 가운데 1명이 학살범으로 수감된 사실은 참상의 끔찍함을 짐작하게 한다. 수많은 무리를 이룬 살인자들이 다른 무리를 쫓아가며 머리를 내리쳤고, 나무를 자르듯 사람들의 사지를 잘랐으며, 살인을 하기 위해 마치 출근이라도 하듯 아침부터 저녁까지 3개월 동안 학살작업을 이어갔다. 그런 지옥 속에서 모든 가족이 주검으로 변한 장소에서 살아남은 자는 오히려 죽기를 갈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어떤 이는 잃어버린 가족에 대한 기억으로, 어떤 이는 그때 당한 성폭행으로 자신에게 남겨진 자식을 바라보면서, 또 어떤 이는 밤마다 허덕이는 악몽으로 그날을 되새기고 있다. 그러면서 오늘도 스스로 묻고 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에게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까.” 10년 동안 되묻고 있지만, 아무도 속시원하게 대답해주는 이는 없다.

■ 참고 웹사이트 http://www.avega.org.rw (AVEGA·생존여성들을 돕기 위한 르완다의 인권단체)

출처 : 한겨레 http://h21.hani.co.kr/section-021019000/2004/04/021019000200404140505020.html
작성시간 : 2005-03-07 pm 04:48 미니 | 인쇄 | 트랙백[1] | 덧글[1]
르완다와 아부 그라이브 [르완다]
http://blog.ifis.or.kr/blog/index.php?blog_code=mini&article_id=158


(르완다 학살이 있은지 10년이 지났고, 이 글은 1년이 지났지만 우리에겐 아직 시작되지도 않은 시간이어서 글을 옮겨 봅니다 )


지난 4월은 르완다 학살 10주년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학살 방지 실패에 대한 많은 자기 분석이 있었다. 때문에 당시 워싱턴 포스트지 머릿기사는 "'1994년 르완다 민족 청소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 어떤 결말이 나오는지 가르쳐준다."(리차드 홀브루크), "르완다로부터 배울 점"(빌 클린턴)으로 채워졌다. 그러면 우리는 르완다 학살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르완다에선 100일동안 하루 8000명 꼴로 살해당했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2004년으로 눈을 돌려보자. 아프리카에선 어린이가 쉽게 치료할 수 있는 병때문에 하루 1만여명 비율로 죽어가지만 우리는 아이들을 구할 어떤 것도 하지 않고 있다. 르완다처럼 단지 100일이 아닌 매일매일, 그것도 매년 되풀이되면서 르완다 학살과 같은 비율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르완다 학살보다 어린이 사망을 멈추게 하는 것이 더 쉽다. 제약회사가 치료제를 생산토록 돈을 쓰는 것은 그야말로 푼돈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또 다른 의문점을 불러 일으킨다. 도대체 어떤 종류의 사회경제적인 구조가 뇌물을 줘야 르완다 학살 규모의 어린이 사망이 멈출 정도로 잔혹하고 광기어리게 된 것일까? 그것은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가장 이윤추구적인 산업구조다. 그것은 가장 심각한 미치광이가 상상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선 사회구조적인 정신이상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우린 르완다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그리고 왜 그것은 이슈가 되지 않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이유는 명쾌하다.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나 힘들기 때문이다. 아부 그라이브의 경우처럼,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

노암 촘스키.

2004년 5월 10일 오전 9시 42분

Rwanda and Abu Ghraib


The past month was the 10th anniversary of the massacres in Rwanda, and there was much soul-searching about our failure to do anything about them. So headlines read "To Say `Never Again' and Mean it; the 1994 Rwandan genocide should have taught us about the consequences of doing nothing" (Richard Holbrooke, Washington Post); "Learn from Rwanda" (Bill Clinton, Washington Post). So what did we learn?

In Rwanda, for 100 days people were being killed at the rate of about 8000 a day, and we did nothing. Fast forward to today. In Africa, about 10,000 children a day are dying from easily treatable diseases, and we are doing nothing to save them. That's not just 100 days, it's every day, year after year, killing at the Rwanda rate. And far easier to stop then Rwanda: it just means pennies to bribe drug companies to produce remedies. But we do nothing.

Which raises another question: what kind of socioeconomic system can be so savage and insane that to stop Rwanda-scale killings among children going on year after year it's necessary to bribe the most profitable industry that ever existed? That's carrying socioeconomic lunacy beyond the bounds that even the craziest maniac could imagine? But we do nothing.

So what was learned from Rwanda. And why isn't it a story? I think the reason is clear. It's too hard to look into the mirror. In the case of Abu Ghraib, we can say someone else is responsible.

Noam Chomsky

Posted by Noam Chomsky at May 10, 2004 09:42 AM

출처 : 계륵 뉴스 http://blog.naver.com/jay1124.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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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반대 투쟁

이제는 제국주의 선교방식을 지양하여 협력선교의 시대로 가자

제목 : 이제는 제국주의 선교방식을 지양하여 협력선교의 시대로 가자
(부제 : 폭력과 대처하는 화해, 평화선교에 대한 한국교회의 전문성?)

장창원목사(다솜교회 협동목사)

(들어가는 말)

세계교회는 전쟁과 재난으로 패망하는 지구의 현실을 직시하고 "폭력극복 10년"의 주제를 발표하였다. 이것은 우리민족이 통일되기를 염원하며 기도하듯이 죽어 가는 지구를 살리는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을 반성하며 어둠의 요소들을 반대하고, 생명을 살리며 죽어 가는 지구를 구원하고 부활하여 풍성케 하시려는 주님의 부르심에 화답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를 파괴하고 우리들을 죽이는 전쟁과 폭력은 세계곳곳에서 오늘도 계속되고 개발의 명목으로 자본과 사상을 도구화하며 지구와 영혼이 황폐하게 파괴되고 있다.

지난 2001년 1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PCK)는 종족의 화해와 평화를 만드는 협력선교를 위하여 아프리카 르완다장로교 총회(E.P.R)에 단기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세계개혁교회 연맹(WARC)의 중계 역할로 전쟁의 기운이 가시지 않고 있는 중앙아프리카에서 협력선교사는 한국의 1950-3년 전쟁 후 산업화와 민주화과정의 특수한 상황에서 발전된 민중교회선교연합의 전문성을 연결하여 살릴 수 있는 역할의 모색을 위해서 이다. 1999년 선교사를 추천하였고 2년여의, 인선과정을 거쳐서 일하는예수회 노동목사를 단기선교사로 파송하였다. 그리고 1년간 세계개혁교회가 협력하여 계획하고 설립하려는 "평화교육센터"의 건립과 운영의 기초적 현지조사와 타당성을 검토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르완다는 물자와 식량이 부족한 반군들이 수시로 밀림 주변국도로 진출하여 지나가는 수송차량을 습격하여 강탈하고 반항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상황, 무장한 정부군이 도로에 배치되어 있지만 야간에는 역부족으로 그들이 활보한다. 결국 내전이 그친 상태가 아닌 중앙아프리카의 상황이다. 여러 가지의 복합적인 세계의 정치경제 흐름과 아프리카의 전통적인 문화의 독특성 이해 없이는 동양에서 가장 먼 나라에 살고있는 그들의 삶과 현실문제를 접근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르완다의 모든 것을 배운다는 낮은 자세로 입국하여 생활하였다. 한국전쟁 후의 6-70년대 공비출현을 연상하게 하는 휴전선이 보이지 않는 분단과 갈등의 현장이었다.

지난 1년간 르완다의 키갈리와 부타레를 중심으로 살면서 한국 협력선교사의 역할과 전망을 돌아보며 선교의 타당성을 조사하였다. 한국의 1950년 전쟁경험과 분단 그후 민중선교의 경험이 세계사회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협력선교의 전문성으로 발전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몸 말)

르완다에는 아름다운 호수와 세계적인 산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스위스라고 부르는 지리, 환경적인 것을 르완다의 삶과 발전의 계기로 삶을 수 없을까?

중앙아프리카 르완다와 콩고의 접경지역에는 아직 살아있는 2개의 활화산이 있다. 4.507M의 화산지역 깊은 산 속 밀림에는 94년 르완다의 시민전쟁(제노싸이드)의 패전한 군인들이 들어가서 게릴라전을 하며 살고 있는 곳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호수가 산 주변에 둘러 쌓여있고 다이아몬드 등의 희귀한 천연자원을 간직하고 세계적인 보호종으로 고릴라가 살고있는 깊은 산속, 콩고와 부른디 등 주변 국가의 반군들이 몰려있는 접경지역이다. 언제 게릴라전이 벌어질지 모르는 위험한 지역이다. 지난 2002년 1월17일 중앙 아프리카의 콩고 의 제2수도라는 고마지역에서는 화산이 폭팔 하여 많은 사람이 용암으로 화재가 나서 죽고 피난을 가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처음 출발은 상식적인 기초지식을 가지고 시작하니 여러 가지가 어렵게 생각되어 졌다. 르완다는 아프리카의 중앙오지 세계 최 극빈국, 인구밀도가 높고, 언어는 불어, 르완다어, 영어를 사용하며 일부다처제로 생활이 문란하고, 에이스 감열률이 세계에서 높은 나라. 미개하여 좋지 않은 여러 가지 상황을 듣고, 대비하였다.

짧은 1년의 단기협력선교 이지만, 여러 가지 계획하고 목표했던 선교사역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예수님의 가난한 민중에 대한 사랑의 열정이, 넉넉하게 르완다의 단기협력선교생활을 마치게 하셨다. 고국과 가족을 떠나서 혼자 살아간 1년 이제 세계가 한가족이라는 증거를 체감하는 생각하지 못한 꿈같은 여러 가지 축복을 덤으로 받고 돌아왔다.

낮에도 눈만 빛이 나는 온통 검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아프리카 대륙,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어느 곳 누구에게나 동일하시고, 생명을 살리고 풍성케 하신다는 복음으로 우리 인류를 구원하려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이웃사랑과 하나님사랑의 큰 계명의 실천의지로 갈급한 심령이 되어 르완다로 갔다.

오랜 세월 협력하는 한국교회의 외국선교사들은, 우리민족이 어려울 때 친구가 되신 예수님의 사랑이, 지구의 다른 친구가 어려움에 처할 때 함께 살아가며 돕는 것이 이웃사랑의 본질이다. 땅 끝까지 전파하며 증언하라 하신 복음의 말씀에 실천으로 여기고, 그 동안 우리도 너희에게 받은 사랑의 빚을 갚겠다는 기도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한국전쟁을 치르며 어려웠던 시절, 그리고 지금도 분단되어있는 조국의 현실을 통일하려는 우리들의 신앙이 세계 교회 앞에 평화와 화해의 전문적인 선교영역으로 쓰임 받는 계기가 되었다..

지구와 인류를 살리고 풍성케 하는 일은 천지창조 때 우리들에게 주신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물질, 명예, 권력의 욕심과 허황된 꿈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늘도 지구를 부수고 파괴하며 홍수와 이상기온의 날씨를 만들고, 테러와 살인을 서슴지 않는 전쟁을 하고 있다. 이미 아름다운 자연과 세계환경을 허락하였고 지금도 무한한 자원과 자연환경은 무한하다. 바다를 비롯한 여러 환경들 욕심 없이 보존하며 하나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평화의 낙원이 이루어지고 화해와 사랑의 사회가 가능하도록 하라하신 우리들에게 맡겨 주신 사명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다시 되새겨 본다. 가난한자, 애통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아프리카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전쟁만 없으면 잘 살 수 있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행복을 찾으며 살아가려는 중심을 가진 여러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행복의 척도를 다시 돌아본다. 어렵고 가난한 아프리카의 현실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과 행복을 자연환경 속에서 호수, 산, 들, 날씨, 인간성의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지구와 세계의 잠재력의 풍성함을 토대로 인류가 화해하고 사랑하면 미래를 희망과 축복이 넘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전국민의 70% 카토릭 10% 개신교 10% 무슬림 10% 무속자연신앙 기독교국가로서 20만명의 장로교회 총회본부에서 선교사무데스크를 마련하였다. 시내의 거리에서 할렐루야를 외치면 누구나 아멘 하며 웃음으로 회답하며 인사하는 기독교 국가이다. 1910년 독일장로교회 선교, 개척 전통을 이어받아서 현재 16개 노회 90명의 목사(10명 여성), 20만의 성도가 지교회를 중심으로 한 지역교회 개념의 아프리카의 독특한 열정적 신앙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일예배는 2-3시간의 찬송과 춤을 중심으로 한 예배이며 장로교의 전통을 지키려 한다.

지난해 5월에 장로교 목사들의 키갈리에 모여서 정책세미나를 하는 곳에 참석했습니다. 주된 논의사항이 장로교회는 르완다의 어려운 경제현실을 극복하는 일과 에이스, 과부, 고아 문제를 비롯한 보건 교육의 열악한 현실에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함께 대처하기로 결의하는 모습을 보았다. 르완다장로교회는 2001년 12월 10-13일까지 키부예호숫가의 아름다운 베다니홀에서 총대의원 약 200명이 모여서 "40차 총회를 열었다. 총회의 주제말씀은 요한 복음 10장 10절의 "도둑은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케 하려고 왔다"이다. 총회에서는 새로운 총회장으로 부타레신학교의 학장을 선출하였고, 전임 총회장 안델슨 가라마가목사는 세계개혁교회 연맹의 부회장으로 아프리카를 대표하여 대외적인 업무를 발전시키며 키갈리에 장로교 종합대학을 설립하는 계획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번 르완다의 단기선교를 통하여 선교현지의 상황에 맞는 전문적인 선교가 필요한 시기임을 확신하였다.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여 기독교 국가의 현 상황이해와 문화를 이해하고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며 그 동안 물량공세를 앞세운 제국주의적인 문화 침탈방식의 선교는 중단하여야 한다. 세계개혁교회연맹은 남남협력선교로 양국교회의 파트너 쉽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선교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우리는 아프리카와 르완다의 어려운 역사현실에 동참하며 그들의 사회를 배우고 이해하고 앞으로 양 국가와 교회의 공동관심사를 프로젝트로 "평화, 화해, 통일교육과 청소년선교 센터"를 건설할 방향을 타진하고 의사를 전달하였다.

이제는 제국주의 선교방식을 지향하여 협력선교의 시대로 가야한다. 우리에게 알맞은 협력선교의 방법과 교훈으로 폭력에 대처하는 화해, 평화, 통일의 선교에 대한 한국교회의 전문성을 살려야 한다. 르완다 당신들이 종족간에 100만 명을 죽이는 전쟁을 하였다면, 우리 민족은 200만을 죽이고 지금도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다고 전하며, 예수의 생명과 부활의 역사를 우리가 함께 믿고 실천하며 살아간다면 희망과 평화를 만들고 누릴 수 있다는 말씀의 증거를 하였다.


간단한 르완다역사 이해

-아프리카는 고대 사회의 문명의 발상지 중 한군데로 오랜 역사적 뿌리
-기원전2000년전부터 트와(피그미)족 수렵/채취자 살림거주 하며 1%
-AD1.000년경 농경사회건설하며 삶 거주지에 후투족의 이동하여 살기시작하며
-AD1.500년경 유목민인 투치족이 이동과 추장족 후견과 피후견으로 삶
-1880년대 이후 독일의 통치로 신분, 대리통치
1920년대 이후 벨지움의 식민지국가로 소수족의 대리통치와 분화정책, 불란서 문화, 언어사용, 사회/신분제도 분리강화, 식민지체제 경제 국가
1960년대 국민투표정부의 사회주의국가 노선과 평등사회 추구 -토지공개념 등 사회문화형태. 이전 소수지배족의 비협조와 내전 4 -5차례, 30여 년 이상 유엔 난민 지원국으로 불안한 삶의 자리를 계속함. 중국과 제삼세계동맹관계참여
1991년 우루과이라운드로 주요산업 해체로 경제적 위기, 아이엠에프 통치 시작, 정치적인 투쟁
1994년 세계적인 참사, 제노사이드와 전쟁복구와 생존을 위한 노력들이 계속되고 있다.
2001년 7-80%의 국민들 교과서 없이 공부하는 학생들, 신발 없이 살아가는 자연인의 삶.
예장 목회자총회의 주제와 교단사업의 초점은 국가경제 회복과 보건사업
-한국과 교류는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들이 60년대 독립하고 제3세계 연대국가로 북한과 중국과의 밀접한 관계를 갖고있음. 70년대 남북한 공동수교, 그리고 80년대 북한군사고문단 파견으로 남한 대사관 철수, 90년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북한대사관 철수. 지역의 특성과


삶의 자리를 통하여 르완다의 현실을 돌아보면

-지역적 특성 : 르완다는 최근 화산 폭발한 콩고 고마지역(4.300m)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기세니와 루행게리 지역은 활화산과 키브예호가 인접해있는 한 중앙아프리카 적도부근의 고원지역입니다. 해발 평균 1000m이상의 고원지대에서 키갈리를 수도로 인접국 우간다, 케냐, 탄자니아, 부른디, 콩고 등의 나라들에 감싸여 어울려서 살아가는 인구 약 800만 명으로 우리 나라의 10/1에 면적의 작은 국가입니다. -농,목축업을 중심으로 하는 1차 산업과 도시를 중심으로 한 영세상업으로 생산된 제품보다 수입유통업이 많다. 노동조합에 가입되어있는 조직노동자는 8만 명이고 대다수의 국민이 농업에 치중한다.
-일용노동자의 하루임금이 500RF(노동법800프랑, 한국1,500원)입니다. 주요산업은 차와 커피 경작하여 수출하고 공업은 자동차 수리업, 소규모 건설과 제조업이며 인도를 비롯한 수입상들과 외국의 비정부협력기구들이 아직도 많이 들어와 활동을 하고 있다.
-통신, 전기, 수도는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발달되어있고 70%농민들은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일반국민들은 라디오를 듣는다.
-한국인들은 어린이 포함하여 약 20여명으로 월드비젼에서 독립한 이웃사랑회와 선교사 한
가정 그리고 소규모 제조업체와 건설업체가 한군데씩 들어와 있으며, 약 15년 아프리카 생
활 속에 6년째 르완다에서 살고있는 한 가정이 기술학교를 시작하였다.
-중국도로공사 르완다 지사장 한가정과 미국대사관 직원으로 한국계 미국인 여성 한 가정
이 살고 있다. "키갈리 100만을 비롯하여 도시지역에 인구가 집중하고 실업자가 많아서 밥,
그릇을 덜며 가사노동을 돕는 사람이 많고 빈부격차가 심하여 도시 집에는 경비와 가사노동
자가 많다.
-날씨와 문화 : 평균 21-3도의 온도이며, 땀이 흘러도 기분이 상쾌한 고원지대 특유의 날
씨이며 한낮 2시간의 더위와 우리의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대우기 -대건기-소우기-소건
기의 계절 변화 속에 2-3모작이 가능한 토지와 환경으로 사철 푸른 나무와 꽃이 만발하여
있고 새소리가 그침 없고 아침과 저녁, 그리고 밤하늘의 별이 아름다운 자연환경이다.
-전쟁만 없으면 굶어죽을 염려가 없는 하늘아래 낙원 같은 곳입니다. 보석을 돌처럼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원시적이지만 평화롭게 살아가는 르완다를 비롯한 중앙 아프리카에
1800년대부터 서구의 사람들이 들어오고 식민지를 하며 사람과 보석들을 빼앗아 가면서 비
극은 시작된다.
-총회에 보고서를 계속 보내서 기초적인 르완다의 아름다운 상황을 이해하시리라 생각하지
만, 총회의 간사는 르완다의 아름다움보다는 현실의 어려움에 대하여 집중하여 보고를 해야
교회의 많은 관심과 지원이 계속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간단한 르완다 단기선교사의 생활 이야기

-4주 동안 가족을 떠나 르완다의 난민촌을 방문한 프랑스 봉사단체 여성이 물었습니다? 1
년은 길고 가족들에게 무리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우리가족의 사랑은 이야기, 우리민족의
분단이야기, 인류의 화해와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가족들 사랑이야기를 한다.

-몸무게 100kg으로 출국하여 하루 점심을 중심으로 먹고, 아침과 저녁은 간단히 차와 간식
을 하며 10개월만에 약 8kg가 빠졌습니다. 그러나 10개월만에 말라리아가 걸려서 2주간 치
료를 하며 한국기업체의 후원으로 한국음식을 먹으며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돌아와서 보
니 98kg입니다. 살 빼기는 힘들고 살찌기는 쉬운 것 같다.

-수도 키갈리 110만 유동인구와 세계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나라. 800만 르완다의 국가현실
과 역사는 아름다운 키부예호수와 활화산과 보석, 그리고 동물 등의 자원을 착취하는 강대
국의 식민정책으로 일관한다.

-중앙 아프리카의 대부분의 도로는 중국도로공사가 건설하였다. 세계 극빈국 중의 한곳으로
유엔의 교육 집중지원대상국 이다. 아프리카의 자동차는 일본제 중고자동차가 다수이다.

-주식은 감자. 콩, 바나나, 고구마, 야채스프, 카사바(마뇩),사탕수수, 고기(양,들소,닭 , 돼지)

-남아공 2주간 아프리카 선임 선교사와 생활하며 교육, 훈련을 받음: 1년은 탐색기간, 3년은
자리잡는 시기, 10년은 살아야 선교의 활동 영역 구축하고 20년이 되어야 목적했던 사업을
실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집은 르완다교회에서 제공하고 식사와 생활은 한국교회에서 제공한다는 약속에 따라서 부
임하여 먼저 키갈리에서 장로교회 교회본부 게스트하우스 1개월 생활하며 현지적응을 합니
다. 아침, 저녁으로 조깅과 산책하고 지리를 익힙니다.

-숙소로 수도 중심부의 카토릭 성바울 게스트 하우스 4개월을 생활하였다.

-7월 제7차 아프리카, 유럽 청소년 캠프를 키갈리와 키브예에서 1개월 보내며 봉사활동과
문화교류를 합니다.

-휴가철인 아프리카 케냐, 탄자니아, 우간다, 브른디, 콩고 선교지 방문여행 2주와 유럽(독
일, 영국, 노르웨이)선교사 집에서 2주간 보내며 8월을 보낸다.

-브타레 신학교 3개월은 교육과 문화의 중심 부타레지역의 개신교신학교에서 생활하며 아
프리카 그 지역에서 유명한 부타레 대학과 박물관, 왕궁 등을 방문하고 역사와 문화를 돌아
보며 묵상과 정리를 하며 지역교회를 순회하는 과학신학과 자연신학의 비교를 할 수 있는
기간입니다. 신학교에서는 6차례의 특강과 컴퓨터 교육을 했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교육환경은 인터넷 1시간 이용료는 노동자 하루 일당 500RF(한국1,500
원)이다.

-말라리아를 걸리고 한국인 건설업체의 모델하우스에서 핸드백 공장을 운영하는 한국인의
간호를 받으며 1개월을 살았다. 한국기업체의 르완다평가는 거리와 문화 등의 관계로 경제
성 없는 장사

-떠나오기 전 키갈리 이사노게스트하우스를 중심으로 생활하며 활동을 정리하고 총회 등,
여러 단체들과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며 1개월을 살았다.


(나오는 말)

오랜 시간 세계개혁교회연맹은 힘을 합쳐서 분단된 한국의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창조질서보전과, 경건과 절제를 위해서, 에큐메니칼 선교를 위하여 등 등 의 기도제
목을 정하여 함께 기도하여 왔습니다. 최근 2001년부터는 앞으로의 10년간을 "폭력 극복"의
해로 정하고 구체적인 기도와 행동을 시작하였다. 지금 세계는 극심한 폭력으로 절대위기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군사적인 핵전쟁을 비롯한 종교, 종족, 경제, 전쟁 등 세계, 국가적인
폭력과 사회, 가정, 성폭력 등을 비롯하여 지구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환경파괴의 폭력까지
위험한 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선교는 세계교회 선교사의 모델적인 협력선교의 시작이다. 세계적으
로 한국이 새롭게 부흥한 교회의 현실을 기반으로 하여 오늘도 폭력과 전쟁으로 죽음의 그
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웃들을 위하여 구원하고 살리며 풍성하게 하는 사역이다. 어려움
과 무거운 현실을 민중들이 협력하여서 민족화해,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교회의 사명을 다하
는 것이다.

협력선교는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자립하고 자애하며 자주적으로 교회와 나라를 세우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현장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마음의 문을 열고 고난의 역사 한가운
데 마르지 않을 영혼의 우물을 파주는 일이다. 인류가 계속하여 함께 좋은 친구로 살아가며
한국의 분단과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 아직도 전쟁의 기운에 휩싸여있는 아프리카 르완다
의 평화협력 선교사를 파송하여 어려움에 처한 르완다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
님께 감사드린다.

1년간의 선교사역을 통하여 앞으로 한국 산업선교와 민중교회의 역사적 선교 교훈을 함
께 공유하고 르완다의 어려운 식민지, 내전 후 가난과 전쟁의 공포로부터 해방되는 영성을
갖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 침탈과 전쟁으로 침체되어있는 르완다 민중들의 정신과 영혼을
살리고 자립심을 키울 수 있는 의식화의 교육을 통하여 기백을 살리며 고유한 전통과 문화
를 살리며 의식을 깨우쳐서 르완다교회가 추진하는 경제회복과 보건대책사업을 함께 할 수
있도록 하자. 구체적으로 최근 르완다교회가 추진하는 기독교 대학 설립사업에 참여하고 대
학 내에 평화, 화해, 통일 연구소를 함께 설립하며 운영하고, 그 동안 세계개혁교회연맹이
부타레 지역에 추진하였던 평화 청소년 교육쎈타를 함께 설립하여 운영하도록 기도하자.

(요한 10장 7- 10절) "도둑은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
을 얻고 더 얻어 풍성케 하려고 왔다"(1-10절 묵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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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신자유주의 반대

* 이 글은 간장 오타맨...님의 [세계 장로교회, '신자유주의 반대'를 선언하다] 에 관련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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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콩고에서온 편지

 

Hello Dear,

This is Mr. YIOMBI  THONA  from congo.

First,I'm gonna whish greetings to you in the most wonderful,faithful,precious and highly exalted name of our lord and saviour Jesus Christ,who loved and still loves us;died on the cross of calvery for remission of our sins,rose up again on third day,who is our righteousness,redeemer and who is coming very soon for us to take us away to be with him for ever and ever.

Dear ,

This is the coming of our lord,and every one have to be ready,by cleaning all our sins.even it's difficult but we have to try.We  have to start  by making good conditions from our live.If  you are not living in good conditions; living on troubles,be sure Dear that  the coming of  the lord Jesus will never been prepared  as well as possible.I don't want  to bring you in to philosophy.But let me Dear tell you one thing which is happening some where,may be you don't know because of  distance from Korea,your home country.

Dear,

Since 1998 to 2003,in the Democratic Republic of Congo in the center of Africa, 4.550.000 humans have  been killed by a group of other human from others countries,by using the republic  of Rwanda Uganda and Burudi,because of money.I don't want to introduce you into  politics,too .But you have to know Dear that  those  countries have because of there strong positions in the world, placed a president in Congo my Home country,without  elections, without Congolese want a young man of 30  years old,whom  is not a sun of Congo.By ageement with the Rwanda Republic,there are killing,killing and killing HUMAN who are like you are Dear.And no one  can say; No one can defend CONGOLESE  by saying a simple  STOP KILLING IN CONGO.And  this is 2 weeks  ago fighting has  began.

Dear, I will not keep you for a long time,this is the time from which every christian is looking peace to prepare the coming of Jesus our lord.Congolese don't  have a result by asking PEACE from POLITICIANS in this world.That's why we are tourning to you Dear,TO HELP  CONGOLESE TO GET PEACE, BY  SAYING STOP KILLING  IN CONGO. To your church;your pastor;friends;yours wife;your husband;to every one you know.

AND  DON'T  FORGET PLEASE  TO PRAY  FOR  THE  PEACE  IN THIS  COUNTRY.

GOD  ALL MIGHTY  BLESS  YOU.

Sincerly,YIOMBI  THONA  REFUGEE  from Congo D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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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선교지 선정이유와 단기사역계획서

 

르완다 선교지 선정이유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 17) 말씀에 따라 산업사회 속에 정의와 평화를 일구어 내려는 산업선교회는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삶과 형편, 고통을 살피고 위로하며 노동자들의 권리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선교사역으로 권세자들의 탄압과 침탈속에도 굴하지 않고 40년간 한국교회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여 왔습니다. 산업선교회는 민중교회와 노동사회를 연결하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가난한자에게 복음을 전파하였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반독제, 민주화 투쟁을 하였으며, 눈먼자에게 다시 보게 하려고 주경야독을 하며 학습하였고, 성령의 가르침에 따라(눅 4 :18 -19) 민족의 구원을 위한 죽음과 십자가의 길이라도 따라나서며 예수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민중목회자라는 영광으로 감사하였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전도사가 되어 비인간적이며 형편없는 작업환경과 분단과 분열의 악한구조와 역사, 불평등의 현장인 공단, 빈민, 농촌지역에서 소리 없이 겸손하게 업드려 민중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구원의 은총을 받은 본인은 92년부터 민중교회, 노동선교사역에 참여하여 영등포산업선교회를 중심으로 10여년간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나 발달하는 정보화, 세계화, 냉전구조의 해체, 지식산업 발달의 시대적 변화속에서도 변함없이 민중들의 삶은 고통스럽게 살아가며 빠르게 괴물로 변한 세계자본은 불평등한 분배구조로 노동자들은 거리에 노숙자로 전락하고 있으며 세계인구의 많은 인구가 절대빈곤과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 노동자, 민중의 가난과 빈곤의 심화로부터 그리고 노동현장의 비정규직화의 로인한 생존권 불안으로부터 올바르게 대처하는 선교사업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합니까? 87년이후 공장과 거리를 수없이 해매이며 시위하는 노동자, 민중들의 요구사항을 둘러보고, 노동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밤세워 교회에 모여서 교육하고 기도하며 얻은 것은 독득한 한국의 노동운동과 산업선교 문화가 생겼습니다. 이제 산업화가 되거난 다국적 기업의 횡포로 신음하는 신식민지적 제3세계는 한국에서의 활동과 투쟁이 모범적인 방법으로 쓰여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노동운동을 세계노동사회가 주목하고 있으며 배우려 한다는 것입니다. 양심이 살아있는 세계사회의 지지와 연대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결과를 되돌아보며 앞으로의 세계선교방향과 목표를 해야할 일을 설정할 때입니다. 그 동안 세계교회가 한국의 산업선교를 위하여 물심 양면으로 얼마나 후원하고 지원하였으며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호주연합교회에서는 선교협력을 위한 실무자를 파송하여 국제연대의 활동을 원활하게 하고있습니다. 세계교회의 관심으로 성장한 한국산업선교회가 이제 국내에는 전국적으로 노동교회, 상담소를 중심으로 민중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민중교회들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아온 그 동안의 경험과 활동이 IMF경제대란으로 수백만의 실업자가 발생하였을 때 대처하고 세계자본에 횡포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선구적인 실업운동과 구호, 대책사업으로 피난처로서의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였음을 보았습니다. 가난한 노동자, 민중들과 함께 살아가며 어려운 지역에서 모범적으로 활동하는 작은 교회들이 물량주의, 대형교회의 방향타와 교회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가르침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세계가 더욱 가까운 이웃이 된 오늘날 아프리카에서는 수 백년의 식민지와 종족분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러한 책임은 인류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문제이며 책임임을 통감합니다. 이제 우리는 세계 산업선교(URM)현장의 확장을 통한 에큐메니칼 선교사업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경험을 통하여 세계 노동자, 민중들이 의식화하고 자각하며 단결하고 연대하여 자기의 권리를 세계곳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노동자의 무한한 창조적 힘이 민주적 역량으로 발전되고, 아름다운 노동의 인간화와 가치가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창조적인 현장의 힘이 성령의 힘으로 승화되고 폭팔 하여 살인적인 물질문명의 피해를 제거하고 하나님나라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며 풀뿌리민주주의와 지역 자치적인 평등세상으로 발현되어 이웃과 세계를 살리는 성숙한 민중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 자주성이고 주체적인 노동자, 민중으로 연대함이 필요와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은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민중들을 향해 실천되어야 합니다. 이제 막 태어나는 세계나라의 산업선교들에 연대와지지가 더욱 확산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제 43년의 장년이 된 한국의 산업선교회는 전국의 민중교회로 모여 이미 이러한 일들을 결의하여 시작하고 진행하여 왔습니다. 그 동안 양심적인 세계로부터 받은 지지와 연대, 후원과 기도에 감사하며, 97년부터 식민지와 종족갈등을 비롯한 여러 원인으로 고통 당하는 아시아의 이웃나라에 대한 기도와 산업선교훈련, 지원과 연대을 하기로 결의하여 캄보디아에는 산업선교훈련을 받고 예민선의 회원인 서경기목사를 파송하여 3년간 성공적인 활동을 하였습니다. 또한 우리의 물질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아시아교회협의회와 아시아 태평양 노동자연대기구의 협력으로 인도네시아, 미얀마, 스리랑카 등등의 아시아지역 산업선교실무지도력과 노동운동가를 매년 1회 1개월간 초청하여 현장방문과 지도력 훈련을 실시하고있습니다. 이러한 산업선교와 민중교회의 프로그램 계획과 진행의 담당목사로 함께 참여 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역속에 노동선교사라는 약칭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며 노동목사가 된 것은 산업선교와 예장민중교회선교연합의 오랜 목회자훈련과정의 전통과 공동체적 목회정신으로 지금도 노동현장에서 소리 없이 눈물로 씨를 뿌리는 목회동지들이 함께 함입니다. 민중목회자로 손잡고 함께 하는 우리 안에서의 역사가 앞으로도 가장 큰 힘입니다.


  90년 초반까지 한국교회와 산업선교에 대한 세계교회의 물질적 지원이 OECD가입 등으로 끊어졌습니다. 한국교회는 분단과 미국의 경제지원과 노동자들의 헌신적인 노동으로 경제발전을 하였으며 그러한 현상 속에 교회가 상징적으로 부흥하였습니다. 여러 사회적 조건이 교회가 돈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본래 헌금의 목적과 정신인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맞게 쓰여지지 않고 부의 축척과 교인들만을 위한 일들에 쓰여지고 있다고 합니다. 은행에서 이자가 붙 기도하고 주식투자를 하기도하며 목회자가 교회를 확장하려 미국의 카지노를 들락거린다고 합니다. 이상현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자본에 우선하는 교회가 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산업선교회는 교회의 지원이 없어서 유지하기가 힘들 상황이지만 처음처럼 정의롭고 진리의 말씀에 중심을 잡고 계속하여야 할 한국교회의 상징적일이고 확장되고 부흥되어야 할 교회의 역할입니다. 교회의 신성한 헌금이 노동자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여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우리를 지원했던 세계교회와 양심세력들이 아프리카로 연대의 방향을 돌렸습니다. 한편으로는 가고있습니다. 파괴되지 않은 원시림을 보호하는 것이 인류가 공존할 수 있는 희망이라 말하듯이 그 동안의 수탈에 힘겹게 버팅겨온 아프리카에 민중들에게 함께 서서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인간애를 나누고자합니다. 그러한 현실이 95년 예장총회가 한국교회의 헌금으로 종족분쟁과 가난으로 고통 당하는 아프리카 르완다를 지원하였고 물질보다 소중한 우리에 경험을 나누기위해서 산업선교의 실무자를 파송하게 된것입니다. 99년 총회장과 사회부 총무가 세계개혁교회협의회의 안내로 종족분쟁과 가난으로 고통 당하는 아프리카 르완다 지역의 선교현장을 방문 한 후, 한국교회 예장총회가 르완다교회 총회를 통하여 약속한 실천을위하여  한국교회가 경험한 여러 형태의 선교 현장의 경험과 고난 속에서 산업선교가 설립되어 사회적 활동을 하였던 역사를 바탕으로 르완다교회의 산업선교와 민족화해를 위한 평화선교사역을 감당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민중교회의 선교경험자를 선발하려 1년 단기선교사를 모집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떠나게 됨을 무한영광으로 앞으로의 40년 연대를 바라보고 디딤돌 하나 만들려 합니다.

   노동선교사된 나는 최근 정, 경유착의 IMF 경제대란으로 노동사회의 구조조정과 퇴출로 인한 비정규직, 임시직, 실업자 등의 노동사회와 노동인권 문제의 심각한 세계적 문제앞에 가장 밑바닥 이라하는 가에서 대처를 위해서 여러 시민, 사회, 종교 단체들과 연대하여 세계자본의 정보와 네드웍에 대응하는 제2회 서울국제노동미디어대회 운영위원장 역할을 감당하면서 활동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국교회와 노동사회가 역사와 경험을 토대로 하여 국제적인 노동선교사역의 연대와 확장이 절실하게 필요함을 알게 되었으며 92년부터 시작한 민중선교현장목회자훈련과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의 10년간 사역의 경험을 총동원하여 고통받는 르완다교회와 가난한 민중들에게 적합한 선교방법을 연구하고 개발하여 연대하고 협력하려 아프리카로 가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산업선교와 민중교회 전초기지를 마련하려는 기도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자 합니다. 


 단기사역계획서

  산업사회의 발달초기 교회가 돌보았던 가난한 이들의 선교가 오늘날 주일학교의 효시가 되었드시 영등포산업선교회와 한국기독교산업선교의 발전적인 미래상을 연구하여 가난하고 고통받는 노동자와 민중선교를 위한 세계산업선교의 활성화 방안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제시하려는 르완다선교계획은 총회사회부와 세계선교부의 협의를 거치며 장기적인 목표와 구체적이고 자세한 것은 민중교회선교연합이 함께 하여 세워 질 것이다.

우선 단기선교사로서의 큰 틀과 원칙을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1) 아프리카와 르완다의 현지선교상황과 언어, 교육, 정치, 역사, 전통, 문화, 환경을 존중하고 이에 대한 충분한 학습, 연구, 이해가 필요하므로 자료를 준비한다. (자주, 독립, 준비성)

2) 그 동안 세계교회가 연대하여온 소중한 자료와 경험들을 바탕으로 한국교회가 협력하여 할 수 있는 에큐메니칼 선교계획을 세우고 선교사들이 현지적응과 언어훈련을 통하여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선교하도록 발판을 마련한다. (단결, 연대, 평화성)

3) 르완다와 세계노동자를 위하여 공동으로 기도하고 협력하여 민중교회의 공동체성을 선교사업의 산업선교, 민중교회, 노동단체로 구성한다 (겸손, 통일, 공동체성)

4) 세계교회가 지원하여 이룩한 한국의 40여 년간의 산업선교활동과 자주적인 민중교회의 역사를 바탕으로 아프리카 르완다의 가난한 민중들의 삶의 현장에서 함께 살아간다. (현장,민주, 민족성)

5) 노동자,농민의 권리쟁취역사와 민주화운동의 전통을 나누며 전하고 민중속에서 솔선하여 실천하며 살아가는 민중교회선교방식을 실천한다.(투쟁, 노동, 민중성)

6) 세계 각국의 산업선교기관이 아프리카를 위하여 집중하여 기도하고 조직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후원, 지원, 봉사의 구조를 만들도록 조직한다.(연대, 에큐메니칼,봉사성)

7) 국제노동, 민중선교의 국제연대를 추진하여 산업화가 시작되는 어려움에 처한 각국의 노동자가 연결되는 미디어의 발전전략으로 세계 민중네드웍의  체계를 점검하고 건설하여 민중교회선교의 발전적인 토대를 마련한다. 

8) 르완다의 선교가 종족갈등을 없애고 평화와 자유를 풍성히 하며 노동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게 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세계개혁교회연맹(WARC)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청소년평화의 쎈타를 건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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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의 역사흐름(1)

 

<별첨1> 르완다공화국(Republic Rwanda)의 역사의 흐름


-아프리카 중앙부에 있는 내륙소국으로 우간다, 탄자니야, 부룬디, 자이르 등의 국경지역으로 면적 2만6338km*.인구 773만(1997). 수도 키갈리로 대부분이 구릉과 호수로 이루어진 해발고도 2000이상의 산맥지형으로 아프리카의 스위스라 불리운다. 

 

-원주민은 피그미계 트와족이며 현재 약 9.000명이 수렵, 채집생활을 하고 있다.

-1000년경부터 반투계 농경민 후투족(인구의 90%)이 거주하기 시작하였고 부른디지역에 살고있었음. 약 600년전 호전적인 유목민 투치족(인구의 9%)이 북쪽으로부터 침입하여 후투족은 대항하지 못하고 지배자로 인정하여 음와미왕을 받드는 왕국을 형성하였다.

 

-1897년 독일의 지배가 시작되고 독일령이 되었다. 1923년 1차대전이후 국제연맹위임통치령, 1946년 2차대전후 국제연합신탁통치령으로 UN에 의해 벨기에 간접통치령 정책속에 투치족의 전통적 왕국은 계속되며 권세와 교육을 독점하였다.

 

-1957년 후투족의 전제종결과 식민지제 타파를 선언하였다. 1959 르완다왕의 죽음으로 정치적불안이 시작 후투족반군과 투치족간 15만명의 사상자를낸 내전후 1960년 선거로 후투족G. 카이반다가 정권 장악하고 초대대통령으로 1961년 벨기에의 신탁통치를 벗어나 독립하여 1962년 7월 1일 르완다공화국이 세워졌다.

 

-1963-64년 투치족게릴라사건으로 수천명희생. 70년대 부룬디와의 긴장으로 반투치 감정이되살아나고 정치정세가 불안하였으며

 

-1973년 투치족의 아비야리나마가 쿠테타를 일으켜 국가개발혁명당을 결성하고 78년 단일정당으로 일당독제를 편성하여 대통령에 취임하여 지방주의와 부족대립을 해소하고 국가통일과 국제연대의 정책을 펼쳤으나 종족분쟁은 계속되었다.  

 

-1994년 내전에 휩쓸려 대혼란과 살상으로 95년 현재 UN군의 감시하에 있다. 

- 미국이지원하는 투치 군부정권이 독재를 하며 사회를 안정시키려하지만

산악지역을 중심으로한 반군들의 저항이 2001까지 계속되었으며 나라의 국기를 바꾸며

새로운 체제를 준비하고 있다.



<별첨2> 경제상황과 문화


-국민 90%이상이 농업이며 콩, 고구마, 감자, 바나나, 옥수수, 땅콩이 자급농작물이나 인구밀도가 높고 주기적인 흉작으로 자급자족이 어렵다.

-수출 주상품 커피와 차가 총수출액의 54%를 차지하며 광산물 주석, 텅스텐 등이 수출되고, 천연가스도 분출한다.

- 수력발전소가 있으며 경공업은 키갈리를 중심으로 발전하여 비누, 도료, 방충제, 고무신,맥주 등을 생산하고 목축이 번성하지만, 르완다의 국민총생산은 약 19억 만달러, 국민1인당소득은 230달러로 아프리카중에도 최극빈 국가로 분류되고 있다.

- 소수 투치 목축민의 중앙집권적 조직왕국과 약40개의 지방조직으로 농산물과 수세를 관리하는 추장제도로 후치족과의 계층관계의 오랜 전통문화가 신성시되었다.

-소를 둘러싼 봉건적 주종관계가 종족갈등의 원인이되고 생명력을 둘러싼 복잡한 종교관념은 전통종교로 연구되고있으며 바구니, 돗자리, 우유병, 목제용기, 의식용 도끼 등의 기하학적 세공품과 현악기 반주의 전통음악의 독특한 소리등 전통문화가 발달 하였다. 

-국민의 50%가 카토릭이며 추기경이 탄생하였다. 교육도 잘 보급되고 110만이상이 초등학교에 다니고, 92년 국립대학이 개설되어 3,454명이 다니고 있다. 언어는 킨야르완다어, 프랑스어, 스와힐리어가, 영어가 공용어이다.

- 1991년 주산업인 차가 UR협상이후 값의 폭락하였고 1992년 IMF경제위기의 수렁에 빠졌으며 전쟁의 한가지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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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올것 같은 화해와 평화는

2001년 일년간 르완다에서 살면서 접한 확인된 새로운세상

먼 이국 현장에서의 바램과 삶은 곧 올것 같은 화해와 평화였다.

다시만남의 약속시간은 오지 않고 시간이 지나가며 가끔들리는 소식

전쟁과 아픔이 그치지 않고 있다. 

우리 동네의 거울이되는  그동네  

전쟁터 가운데 어서도 참 평화와 화해는 존재하는가?

되물어보며  

지난 1년간의 르완다 생활기록을 다시 정리하지않으면 

진한 연대와 나눔의 추억에 몸부림이 사무쳐서 

세계의 평화와 사랑의 혁명을 꿈구어본다.

 

1. 파송경과


  -1994년 인류최대의 비극인 르완다 내전 당시 약 80만명의 대학살 이후,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pck)는 1995년 목회차원의(5만불) 구호금을 세계개혁교회연맹(WARC)을 통하여 지원하였다.

 

-1999년 1월 18일-25일까지 르완다 장로교회 총회가 구호금 지원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본 교단 대표를 WARC를 통하여 초청하였다. 당시 총회장 유의웅 목사와 사회부 총무 류태선 목사가 르완다를 방문하였다.  방문시, 르완다 장로교회와 본 교단과의 지속적인 협력의 일환으로 단기 선교사 파송 건에 대하여 합의하였다. (총회 99년 르완다 방문보고서 참고)

 

-단기 선교사 희망자를 찾던 중, 영등포산업선교회 간사로 일하던 장창원 목사를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추천하였으며(3월 말), 총회 사회부 제5차 실행위원회(4월 10일)에서 장 창원목사를 세계선교부에 르완다단기선교사 추천하기로 하고, 영등포노회 등에 협조를 요청하기로 하였다. 

 

- 2000년 7월 28일 르완다 장로교회로부터 예장총회본부에 장 창원 목사를 초청하는 초청장을 보내왔고 장 창원 목사는 세계선교부에 단기 선교사 파송 청원서를 8월 5일 제출하였다. 세계선교부는 84-2차 인선위원회 8월 24일 파송을 결정하였다. 

 

2001년 1월 파송 예정하며 파송협력선교기관,교회는 예장총회사회부, 영등포노회 세계선교부, 영등포산업선교회, 도림교회, 목민교회, 대전제일교회, 대전대덕교회, 광명교회 등 이 나섯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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