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12/09/06 14:56
Filed Under 손가락 수다방

최근에는 되도 않는 영어로 논문을 쓰는 일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간만에, 건강형평성 학회 소식지에 쓴 글.

이 글을 쓰던 당시에는 진짜 마음이 무겁고 착잡했는데, 이젠 좀 안정된 것 같다.

쓰던 당시의 무거운 마음이 너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서 좀 부끄럽군...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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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이잉~”

책상위에 놓아 둔 핸드폰이 문자가 왔음을 알린다. 6월의 어느 토요일, 오후에 직업환경의학회에서 지원하는 전자산업연구회 모임이 끝난 뒷풀이 자리였다. 불안해졌다. 그날 오전 우리가 연구회 세미나를 진행하는 그 병원에서 또 한 목숨이 가픈 숨을 쉬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분은 군산출신으로 LCD 패널 절단하는 공정이었는데 앞 공정에서 화학물질을 발라주는데 ‘시큼하고 불쾌한’ 냄새가 났다고 합니다. 지금은 몇 시간째 코와 입으로 출혈이 계속되고 있고 의식은 없습니다. 오늘을 넘기기 어려워 보입니다.”

라고. 적혀있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그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게 56번째 사망자는 세상을 떠났다. 올해 들어서만 벌써 4번째였다. 뇌종양으로 고생했던 윤정씨를 떠나 보낸지 한 달만이었다. 이젠 좀 익숙해질 법도 한데, 그 이들의 죽음은 항상 무겁고 먹먹하다. 2007년 기흥공장에서 일하다가 23살의 나이에 백혈병으로 사망한 유미씨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시작된 죽음의 행렬이 계속 되고 있는 것이다. 내 나이 또래이거나 그 보다 어린 그이들의 죽음은 매번 너무 무겁다.

이들의 죽음은 도대체 무엇때문일까? 전자산업에서 사용하는 발암 물질 때문일까? 아니면 개인적으로 운이 없었던 것 뿐일까? 직업환경의학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항상 내 머릿속은 업무관련성이 ‘매우 높다’, ‘상당하다’, ‘가능성이 있다’, ‘낮다’, ‘없다’, ‘배제 할 수 없다’ 중 무엇으로 결론을 내릴 것인지를 고민한다. 과거에 어떻게 일을 했는지도 잘 모르고, 전자산업이라는 것이 매우 생소하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100% 확실하다거나 100% 관련성이 없다고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언가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의견을 제시해야 하는 전문가가 인과성에 대해 어떤 모델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서 결론은 달라진다. 1960년대의 Hill’s criteria, Rothman의 sufficient cause 모형, counterfactual 모형이나 marginal structural 모형 등 다양한 인과성 추론 모형 중 무엇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 질 수 있다. 또한 대규모 역학연구를 근거로 개인의 질병 위험을 추측하는 현재의 방식이나 95%가 안전할 거라는 노출기준의 문제 역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다.

산재보상보험법 상의 상당인과관계라는 것이 법적・사회적으로 규정된 무엇일지는 몰라도 최소한 ‘상대위험비가 2.0 이상이면 된다’와는 다른 말이지 않은가? 결국 정답이 없는 상황에 정답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닐까? 정답이 없는 상황에서 전문가들이 자신의 답이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순간, 그이들은 고통받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질문들이, 양비론의 스펙트럼에서 어느 지점을 고를 지를 고심하다 보면 머리를 복잡하게 한다.

이런 질문이 머리를 멍하게 하던 어느날, 엑셀 파일로 정리되어 있는 제보자들의 자료를 보다가 문득, 부서, 직무, 근속, 진단명, 진단연도, 생년 월일 등등 컴퓨터 자료화 되어 있지 않은 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궁금해졌다.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아 왔을까?

그녀들은 대부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서울 출생도 아니고 지방의 소도시 출신이 많다. 부모님은 농사를 짓거나 택시운전을 하시거나 별 직업이 없는 경우도 많다. 한 부모 가정인 경우도 있다. 너무 일찍 철이 든 그들은 실업계 고등학교를 가고 또 착하게 공부도 열심히 한다. 고등학교 생활이 채 끝나기전 실습생의 신분으로 일을 시작한다. 좋은 회사니까, 한국에서 가장 큰 회사니까 그이들의 앞날에도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말이다.

일은 정말 많다. 그래서 너무 바쁘다. 뭐, 회사가 워낙에 잘 나가니까, 그리고 회사가 잘 나가야 월급도 오를 거니까 그리고 다른 중소기업 다니는 친구들 보다는 월급도 많으니까 그들은 열심히 일한다. 밤낮없이 회사와 기숙사 밖에 모르는 생활을 하고 쉬는 날이면 잠깐 집에 다녀오거나 시내에 나가 친구들과 수다도 떤다. 부모님께 생활비를 보태드릴 수가 있어서 너무 기쁘다.

그러다가 어느 날 희귀한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모아놓은 돈도 별로 없고, 집에 돈이 많은 것도 아닌데 치료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 동안 들어놓은 보험도 신청하고 해보지만 서울에 있는 대형병원의 치료비를 감당하기는 어렵다. 항암치료라도 받으려고 지방과 서울을 오가다 보면 길거리에 뿌리는 돈도 장난이 아니다. 그나마 집에 있던 것 중에 돈이 될 만한 것은 다 내다팔고 여기저기서 빚도 끌어다 써 보지만 가정 형편은 더 나빠진다. 기초생활 수급권자인 경우도 있다.

그이들은 참으로 비슷한 삶을 살았다.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이라고 했던가? 그이들의 생애주기는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이라는 것의 집약체를 보는 느낌이었다. 여성, 빈곤, 교육, 사회적 자본, 부모의 사회경제적 수준, 열악한 노동조건 등등... 평생 뭐 하나 유리한 조건인 적이 없었던 그이들의 삶을 보면서, 그리고 그렇게 죽어간 그들의 화사한 영정 사진을 보면서 마음이 먹먹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마, 이런 사람들의 죽음이 사라진다면, 그리고 그이들의 죽음 뒤에 남겨진 가족들의 사회경제적 고통이 사라진다면 건강형평성이 달성된 사회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현재의 우리는 이들이 발암 물질에 노출이 되었는지 아닌지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지만, 그이들의 삶도 그녀들이 그 나이에 죽게 만든 원인인 것은 아닐까? 발암 물질이라도 나온 다면 산재보험으로 보상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그녀들의 고단한 삶을 보상해 줄 수 있을까?

너무나 착해서, 더 슬픈 그들의 죽음 앞에서 소위 전문가라는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조금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만이 망각의 강 레테를 넘어가는 그녀들의 상여에 조그마한 꽃 한 송이 띄우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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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6 14:56 2012/09/06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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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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