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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0/25
    분노와 용기
    만주개장수

분노와 용기

                           

..."가장 큰 것에도 굴복하지 아니하고, 가장 작은 것에서도 기쁨을 찾아내어라!"

휠덜린의 <히페리온>은 이런 구절로 시작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이 말을 머리에 떠올릴 때마다 아주 자연스럽게 예수를 함께 떠올리게 된다. 예수는 바로 이 말을 체현하고 살다 간 사람이었다. 예수는 신에 의하여 예정된 대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하는 표준적인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느낌을 내가 실감하는 깊이까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처럼 예수를 닮고 싶은 갈망도 없고, 닮을 수 있다는 희망도 없고, 닮으려고 노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예수는 닮아야 할 대상일 수 없고, 다만 경배와 동경의 대상일 뿐이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신의 독생자'를 어떻게 감히 닮겠는가!

예수를 '추체험'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그들은 끝끝내 예수의 삶과 죽음의 뜻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어느 날엔가 또 한 사람의 예수가 이 세상에 나타날 때 또다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야 말 것이다.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야 예수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묘한 '아이러니'가 아닌가? 종교인들이 얼토당토않은 신학적 허구를 쌓아 올리면서 개소리를 하든 말든, 우리는 힘을 다하여 예수를 닮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하지만 좀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예수는 가장 작은 것에서도 기쁨을 찾아내었기 때문에 가장 큰 것에도 굴복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예수가 갈망했고 사람들에게 가르친 사랑의 공동체는 원수를 사람하고 자신을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공동체, 모든 사람이 천진스런 어린아이가 되는 공동체, 안식일에도 배가 고프면 벼이삭을 베어서 먹을 수 있는, 무수한 계율이나 터부의 그늘에서 벌벌 떨지 않아도 되는, 자유롭고 오순도순 살아가는 공동체였다. 거기서는 개인 대 개인의 수준에서, 다시 말하면 '나 개인'에게 가하여지는 악의에 대하여 무한히 관대하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구조적, 조직적으로 '나 개인'을 포함한 약자들을 괴롭힐 때, 그것은 예수가 갈구했고 또한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아름다운 공동체의 존립을 허용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사랑의 삶을 방해하는 힘이 '가장 큰 것'일지라도 예수는 결코 용서하지 않았고 '굴복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예수의 그 엄청난 분노와 용기는 바로 그와 상응하는 '작은 것에 대한 기쁨'의 강렬함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임에 틀림없다. 분노 없는 사랑이 과연 참된 사랑일 수가 있을까?

예수는 바리새파, 율법학자, 서기관들을 격렬하게 저주했고, 낡고 썩은 비인간적 상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개탄하고 분노했으며, 글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성전 지배체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성전 상인들을 격렬하게 몰아냈다.

예수의 '사랑'을 왜소화시켜서 일면적으로만 강조함으로써 달콤한 꿈나라와 같은 이야기를 날조하여 예수가 긍듸 죽음을 통해 가르쳐 준, '가장 큰 것에도 굴복하지 아니하는' 분노를 의식적으로 외면하는 예수의 사이비 제자들은 예수 바로 그 사람을 닮으려는 노력을 포기함으로써 어느 시대에나 천 년 만 년을 가도 특정 이데올로기의 시녀 노릇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흔히 현실의 정치적 관계를 '초월'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거짓이다. 인간집단에 있어서 그 어떠한 상황이든 정치적이 아닌 상황이 없는 이상 그들 역시 '정치적 입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이 하나님의 의사와 일치되어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지극히 정치적인 판단이나 생활태도를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즉, 신 역시 정치를 초월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해야 할 일은 가장 정의로운 '정치적 입장'을 신에게 부여해 주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과학을 공부해서 높은 사회의식을 소유해야 한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일반적으로 사회과학 공부를 좋아하지 않고 예쁜 처녀와 함께 노래 부르기를 훨씬 더 좋아하니 신이 불쌍하다.

소박하고 거친 사람들이 신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도 신을 모독하는 일이 아니다. 왜 기독교인들은 신에게 부정의한 '정치적 입장'을 강요하는 것이 신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우찌무라 간조를 통하여 기독교와 기독인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고, 복음서 학습을 통하여 '속류'에 대한 투지와 인간해방의 이상이 심화되어 감을 스스로 느낀다. 우찌무라의 저작이 '백발이 성성하고 갈색테 안경을 쓴 틀이 좋은 노인'의 은은히 울려 오는 음성이 되어 나에게 "양심의 자유를 지킨다는 신앙을 잃지 말도록!"하고 말해 줄 때, 나는 지친 정신에 채찍질을 가하고 다시 용감하게 살아갈 힘을 얻는다. 하지만 나의 주위에 있는 많은 크리스천들은 결코 그것을 기뻐해 주거나 축복해 주는 법이 없다.

"빛이 어두움에 비추이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빛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어두움은 도대체 누구일까? 나일까? 아니면 주여, 주여 하는 사람들일까?

 

 

- 서준식 '옥중서한 1971~1988'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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