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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12/02
    구조적 폭력
    만주개장수
  2. 2005/12/02
    우고 차베스
    만주개장수
  3. 2005/12/02
    자아실현을 위한 두 가지 조건
    만주개장수
  4. 2005/08/29
    나, 사회주의자
    만주개장수
  5. 2005/08/27
    뭐가 되고 싶니
    만주개장수
  6. 2005/08/27
    폭력적인 남성 우위 사회
    만주개장수
  7. 2005/08/27
    절대 평화주의인가, 힘에 의한 사회정의인가
    만주개장수
  8. 2005/08/27
    인권
    만주개장수
  9. 2005/08/27
    민주주의
    만주개장수
  10. 2005/08/19
    자유의지란 피지배자의 환상?(1)
    만주개장수

아기

누군가 내 걱정을 해주거나 하면 반사적으로 거부감부터 든다.

나에게 인사치레로 애는 언제 가지냐고 묻는 말에도 내 사생활 중 가장 지극히 은밀하고 개인적인 부분을 캐묻는 듯한 느낌이 들어 불쾌감이 불쑥 일어나곤 한다.
그런 질문을 인사치레로 흘려듣지 않고 의미를 따져 들을라치면 기분 나쁜 일이 한 두번이 아니다.
'애는 언제 가질거냐'는 질문은 '결혼한 사람은 아기를 가져야 한다'는 대전제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보이지는 않으나 엄청난 폭력이다.
보라. 분유값 한푼 보태줄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멀쩡한 사람을 임신 시키려 한다.
이게 폭력이 아니고 뭔가?
그렇다면 결혼이란 건 아기를 낳을려고 하는 건가?
분명 그런 사람도 있긴 있을거다. 그런 사람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살고 싶어서 결혼했지, 설마 나같은 놈을 세상에 한 놈 더 꺼내놓고자 결혼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 부모님의 경우만 보더라도 나를 낳아 키우시느라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과 여유를 자식 뒷바라지에 쏟아 부으셨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권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은 애초에 본질이 규정되어 있지 않은, 자유의사를 가진 실존적 존재 아니던가.
명절이나 제사 때 친척분들을 만나면 '늙어서 후회한다'고 말씀들을 하신다.
나에게 나름대로 애정이 있어서 하는 말씀이신 것 같으나 지독한 개인주의자인 나로서는 쓸데없는 참견에 불과하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개인을 책임진다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노르딕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사회보장만이라도 해줘야 애를 낳을 마음이 생길 것 아닌가?
개인에게 질병ㆍ실업ㆍ빈곤 등이 갑자기 닥쳤을 때 이 사회는 구원의 손길을 내밀기는 커녕, 담담히 그를 자살바위로 인도한다.
자식 낳는 것만이 노후를 든든히 받쳐주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국민연금을 비롯한 사회보장제도가 내 생활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보다 많을 수밖에 없는 나라에서 아이 가질 생각을 한다는 건 대단한 모험이다.

 

 

명절 때마다 '남자 어른들은 앉아서 놀고 왜 여자들만 몸살 나도록 일하는가'가 항상 불만이었는데, 막상 어른이 되고 나서도 어른들이 하던 행동을 나 자신 그대로 따라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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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94년 월드컵이었을 거다.

친구들이 우리집에 맥주를 사들고 와서 경기를 관람했다.
나는 축구를 비롯한 여러 스포츠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으므로 역시 그 중계를 보지 않고 내 방에 앉아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친구들은 '애국자가 아니'라는 둥, '니가 우리나라 사람 맞냐'는 둥 헛소리를 지껄여댔다.
경기가 흥미진진하게 진행되고 있는 모양인지, 내 친구들은 박자를 맞춰 박수를 치거나 큰 소리로 응원을 하곤 했지만 나는 왠지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게만 느껴졌다.
경기가 끝나고 결과는 예상대로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이 졌다.
그런데 한가닥 기대를 안고 경기를 관람한 나의 친구들은 그 실망감과 상실감을 분노로 승화시키더니 어딘가에서 보상받고자 하다가 급기야 홀로 방에 앉아 있던 나에게 와서 여과 없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오늘 경기에 패한 원인은 바로 '내가 경기 응원을 안했기 때문'이란다.
그런 유치한 발상이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지 정말 궁금했고, 또한 나에게 그렇게 커다란 능력이 있는 줄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 후 군대에 갔는데 일요일이 되자 고참들이 축구를 하자고 했다.
뜀박질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는 역시 '안하겠다'고 했다가 순식간에 험상궂게 변하는 고참의 얼굴을 보고는 '저 축구 진짜 좋아합니다. 단결!'이라 외치며 부리나케 운동화를 신고 달려 나갔다.
허나 마음은 열심히 뛰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계속 헛발질만 해댔다.
그 다음 일요일엔 안되겠구나 싶었던지 골키퍼를 시켰다.
군대 축구의 과격성을 아는 사람은 족히 알겠지만 정말 와일드한 경기방식이다.
얼마나 공을 세게 차는지 나는 공을 잡는 골키퍼가 아니라 공을 피하는 피구선수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 후부터 나는 상병 중간 호봉 때까지 응원단장을 했다.
그런데 아까 말했듯이 나에겐 놀라운 능력이 있었다.
내 친구가 일깨워준 신비롭고 놀라운 능력!
근데 그 능력이란 내가 응원을 한다해서 이기게 되는 능력이 아니라 내가 응원을 안하면 지게 되는 능력이었나보다.

문제는 대부분의 고참들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스포츠를 자기들끼리 즐기는 데만 끝나지 않고 후임병에게 동참하기를 강요하고, 꺼려하면 소대 발전의 걸림돌이라느니 이기적이라느니 하며 제멋대로 화를 낸다는 데 있었다.



최신식 무기로 무장된 현대화된 군대에서 박정희 시대 때에도 과다했던 대규모 사병 인원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그러니 휴식을 위해 만들어진 공휴일날 고단한 육신을 뉘이고 싶은 쫄다구에게 축구하러 나오라고 고함을 지를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공격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는 북한을 남침야욕에 불타는 괴물로 그려놓고 사람들을 겁주고 그것을 이용해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려는 지배계급들.
한낱 공놀이에 지나지 않는 축구경기에까지 알량한 '애국심'이라는 만병통치약으로 사람들을 '국가와 민족'으로 묶어 놓아 지배계급의 지배 수단으로 삼으려는 수작과 다를 바 없다.
제도 교육 12년과 보수권 미디어를 통해 애국심을 강요 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군대에 가서는 충성심까지 강요 당한다.

2002 월드컵에서 4강에 들어가려 하니 매스컴에선 이것으로 인해 앞으로 창출될 이익이 몇 십 조원이라 떠들어 댔다.
모든 것을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보는 천박한 버릇도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 창출된 이익이 과연 우리에게 제대로 분배되었나, 아니면 SK와 삼성에게 고스란히 넘어갔나.

필요에 의해 동원되었음에도 자신이 동원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은 정말 비참한 일이다.
억지로 끌려갔으면서도 제대하고 나서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러 갔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우리에게 국가란 반쪽짜리인 '대한민국'뿐인가?
우리가 과연 학교에서 배운대로 단일 민족인가?
만일 단일 민족이라 치더라도 단지 그 이유로만 통일이 되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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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는 금욕의 파트너

...자본주의가 대마초를 혐오하고 적대시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노동자 계급에게 지나치게(?) 적은 비용으로 과한 기쁨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마초와 대마초가 상징하는 삶의 방식은 금욕적 노동에 기초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것이었다. 또한, 대마초를 통해 얻는 기쁨은 물질적 소비의 기쁨을 희석할 수도 있었다. 소비는 금욕주의가 조장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자본의 축적과정에서는 불가피한 것이었고 금욕과 마찬가지로 노동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즉, 보다 많은 소비를 위해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노동강도를 높이고 노동시간을 연장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소비는 금욕의 파트너였다.
대마초는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위협하는 존재로 비추어졌다. 자본주의는 대마초를 거두는 대신 담배를 내밀었다. 담배는 대마초가 갖고 있는 위험성을 극적으로 완화시키면서도 대마초와 유사한 것처럼 보였다. 담배의 미덕은 대마초보다 훨씬 기쁨이 덜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노동에도 별 방해가 되지 않았다. 담배가 대마초보다 해롭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금욕을 둘러싼 계급 간의 불화는 자본주의 발달의 초기부터 빚어졌으며 부단한 투쟁의 역사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와 시민, 대중의 지위는 향상되었지만 금욕적 억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던 때는 없었다. 대마초는 바로 그 억압과 저항 사이에 위치해왔다.
- 후략


- 유현 '대마를 위한 변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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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 검사

오늘 인권위의 '일기장 검사 관행'관련 발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설마 아직까지 초등학생의 일기장을 검사하는 구태가 남아있을 줄 몰랐다.
한편 지금까지도 내겐 마음속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5학년 때의 아픈 기억을 다시금 끄집어 내게끔 해준다.
작문을 그다지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하루는 놀다보니 일기 쓰는 것을 까먹어 버렸다. 까짓거 내일 이틀치 쓰면 되지 하고 미뤄뒀는데 다음날이 되니 또 미뤄지게 되었다. 그렇게 하다보니 거의 한달 치를 미루게 되어버렸다.
그럴 즈음, 담임 선생이 '한달이나 일기장을 제출하지 않는 녀석이 있다'고 했다.
음... 오늘 밤을 일기 쓰느라 꼬박 새워야 되겠구나 하며 후회와 번민이 교차하는 순간 '나한중이, 이리 나와'
어이없게도 사전 1차 경고도 없이 체벌이 가해졌다.
아동의 양쪽 볼이 성인 남자의 두터운 손바닥에 좌우로 쉴 새없이 마음껏 유린 당했다. 교탁에서 교실 끝까지. 다시 교실 끝에서 교탁까지...사실상 체벌이라 할 수도 없다. 나는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었다.
피해자가 없는 범죄가 있을 수 있나?
그렇다면 분명 교육 목적은 아니었음이 확실하다.
그건... 포마드 바른 40대 중년 남성의 욕구불만의 더러운 찌꺼기 배설 행위라 할 만하다.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커다란 손바닥으로 한 시간 동안 린치를 가하며 그 사내는 나에게 뭘 원했을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 사내는 내 귀를 잡고 옥상으로 끌고 가더니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마음껏 펼칠 수 없었던 초식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 즈음엔 구타에도 탄력이 붙어 상대가 조그만 초등학생이란 사실은 이미 문제될 것도 없었다.
내 인생에 그렇게 장시간 동안 일방적으로 맞아본 일은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결코 없으리라 자신있게 장담할 수 있다.
그 사내의 직업이 교사였던 것을 감안해볼 때 그는 과연 나에게 무엇을 깨우쳐 주려 '사랑의 린치'를 가했을까?

그 사내에게 있어 '일기장 검열'이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그 사내가 생각하는 교사의 역할이란 무엇이며 권력 행사의 한계는 어디까지라고 생각했을까?

그 일로 인해 아직까지도 분노를 삭히지 못할 만큼 내 가슴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아로새겨지게 되었지만 그 사건은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체험이고, 그런 사내가 교사라는 직업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지극히 우연이었을 뿐이라 자위하듯 믿고 있다.
하지만 그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던 기저엔 학생의 사생활이 담긴 사적 기록을 공적으로 검열할 수 있도록 장치된 시스템이 분명히 빌미가 되었다.
더군다나 그 사내는 물론, 다른 몇몇 교사들도 일기 검열을 통해 얻어진 정보를 토대로 '너는 어제 학생이 해서는 안될 행위를 했다'며 학생들에게 체벌을 가한 경우도 빈번했다.
이건 바로 '작문능력 향상'이란 허울 좋은 목적 아래 학생들의 사생활을 앉아서 감시하려는 CCTV가 아니고 뭔가?
또한 지극히 은밀하고 개인적인 일은 검열될 일기장엔 기록되지 못한다. 일기를 문학이라고 본다면 교사의 검열에 대비한 자기검열로 창작의욕을 상실케 만드는 폐단이며, 생활의 기록이라 본다면 소중하고 중요한 기억을 검열이란 무식한 제도 덕에 잃어버리게끔 하는 잔인한 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인권위 의견, 전적으로 공감하며 지지한다. 20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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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 속에서 피어오르는 혐오감

자본주의만이 우리가 견지해야 할 유일한 체제라 생각하는 습관들은 제도권 교육에서의 반복적인 주입학습을 통해 세뇌당한 흔적이라고 한 발 양보해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시장의 원리랍시고 정글의 법칙에 의해 경제적 약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자본주의 내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여기는 미성숙한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 인간들을 볼 때마다 마음 속 한 켠에 피어오르는 혐오감을 감춰둘 곳이 마땅찮아 내심 당황스러울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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沒個性을 强要하는 軍隊라는 制度

...... 내가 獨逸의 政治制度에서 값지게 생각하는 것은 個人이 病들거나 困窮에 處할 때 그에 도움이 되는 對策을 한層 폭넓게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보기에 虛飾에 휩싸인 人間의 삶에서 참으로 값진 것은 政治制度가 아니라 創意的이고 知覺이 있는 個人, 卽 個性인 듯하다.
大衆이 생각도 느낌도 다 같이 무딘 채로 남아 있을 때 그런 個性만이 高潔하고 氣品 있는 것들을 創造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集團 生活의 가장 좋지 않은 形態로서 내가 嫌惡하는 軍隊 問題로 話題가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밴드의 旋律에 맞춰 四列 縱隊로 行進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그를 餘地없이 輕蔑할 것이다.
이런 사람이 큼직한 頭腦를 갖게 되었다면 이는 오로지 失手 때문이다. 그에겐 保護膜이 없는 脊髓만 있어도 될 것이다.
文明의 災殃을 상징하는 이런 行爲는 可能한 限 가장 빠른 時間 안에 없어져야 한다. 命令에 따라 發揮되는 勇猛性과 無分別한 暴力, 愛國心이란 이름으로 恣行되는 온갖 메스껍고 어리석은 行爲야말로 내가 몸서리치게 嫌惡하는 것이다. 나에게 戰爭이란 얼마나 嫌惡스럽고 卑劣하게 비치는가! 나는 그런 可憎스러운 일에 끼어드느니 차라리 亂刀질을 當하겠다. 나는 人類를 높이 評價하기 때문에 萬若 商業的, 政治的 利害 關係者들이 敎育과 言論을 通해 사람들의 健全한 意識을 組織的으로 墮落시키지 않았다면 이런 惡鬼는 오래 前에 사라졌을 것으로 믿는다.
-後略

-아인슈타인 '나의 世界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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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조직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서 보람과 긍지를 얻으려 하지 비판적인 생각이나 후회를 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다들 군대에 대해서만큼은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여유가 없는 것 같다.
군대란 태생적으로 살인을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다.
국민의 안위를 위한다는 명목이 있긴 하나 살인은 어차피 살인일 뿐이다. 내 가족과 내 나라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 한다면 맞다. 틀린 말은 아니다.
허나 자기 손으로는 절대로 살인할 수 없다는 사람에게까지 억지로 살인 도구를 쥐어 주는 짓은 너무나 야만적이다.
그런 사람을 위해 대체복무제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보다 선행돼야 함과 동시에 또한 중요한 것은 징병제 철폐다.
군생활로 인한 인간성과 사고방식의 변화를 두고 우리는 '사람 됐다'고들 말한다.
한 개인이 국가로부터 인간성 개조를 강제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너무 당연히 여기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까지 한다.
군대 다녀왔다는 우월감과 보상심리에 젖어 아직 군대를 갔다오지 않은 이들이 앞으로 겪어야 할 고통에 대해서도 당연하게들 생각한다.
'일당 몇 백 원에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과 의미 없이 힘든 노동과 춥고 더운 날씨와, 소중한 사람들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 고독감 등을 감내해야만 하는 고통' 등을 나도 당했으니 너도 당해봐야 한다는 일종의 보상심리, 또한 징병제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군대를 찬양하고 긍정적인 면만 부각시키는 것은 바로 징병제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이다.
개인의 존중 받아야 할 개성보다 민족이나 국가라는 개념의 비중이 이 나라에서 지나치게 확대되어 있는 현상엔 바로 이 징병제가 크게 한몫하고 있다고 본다.
양심의 자유란 것이 그들에겐 전과자 딱지와도 맞바꿀 수 있을 정도로 절박하고 소중한 것임에도 모두들 민족과 국가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혹은 단지 남의 얘기라 여기고 그것을 너무나 가볍게 무시해버린다. 나아가 비웃기까지 한다.
더욱 비참하고 곤혹스러운 것은 우리 국민의 안위도 아닌 미국의 이익을 위해 한국군을 파병한 것은 누가 봐도 자명한 사실임에도, 그것에 대해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말을 하는 사람과 마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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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연습

2년 전쯤 우리 가게에서 일했던 아르바이트생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로서 현재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라 했다.
분명 힘든 생활일 텐데도 편지 내용에서는 그런 느낌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고 오히려 밝고 명랑한 분위기였다.
나는 진정한 평화란 모든 이가 다 같이 무기를 버릴 때 비로소 찾아온다고 믿는 사람인데,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몸소 실천한 그에게 부끄럽고 미안하다.
생각해 보라, 우리 동네에 칼 가게가 하나 생겼다.
들어가서 칼을 구경하다 보니 전부 생소하게 생긴 칼들뿐이기에 가게 주인에게 무엇에 쓰는 칼입니까? 물으니 '사람 찌를 때 쓰는 칼입니다' 하고 대답한다면 얼마나 섬찟하겠는가?
같은 논리로, 모든 남자들 손에 '사람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총을 억지로 쥐어주고 2년 간 살인 연습을 하라고 하고 있다. 이건 더 섬뜩한 얘기 아닌가 말이다.
대표적인 살인 도구인-총 쥐는 것 말고 다른 대체복무로 다른 이들과 공평하게 복무를 하겠다는 사람을 굳이 교도소로 보내어 고생시키고 전과자로 만들어서 출소 후 사회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선사해 버리는 이런 형편없는 나라에서 나는 살고 있다.
이런 나라를 강제로 지키라 하다니 에라이, 나라도 안지키겠다.
징병제가 하루 속히 폐지되어 사람들이 군대식 사고 방식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없어졌으면 좋겠고, 군인이란 사나이로 태어나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아니라 경찰, 세무사, 속기사같은 다만 특수한 직업 중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
국가가 시키는 일이라면 당연히 따라야 한다는 생각도 때론 지극히 위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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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인권

어떤 나라든 인권 상황이라는 게 그 나라의 지배 계급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인권이 가진 이데올로기적인 기능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인권, 인권 해도 인권이 다 좋고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는 거다. 인권이 보편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실은 지배 계급의 정치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人權은 처음부터 國家 權力과의 對抗 關係 속에서 태어난 槪念이다. 그리고 나는 階級 社會에서 普遍的인 人權이란 存在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世界人權宣言文의 私有 財産의 權利나 知的 財産權 같은 건 事實 매우 資本主義的인 槪念이다. 人權의 槪念은 歷史的으로 變해 왔고 앞으로도 變해 갈 것이다. 人權 運動의 于先 課題는 資本主義 社會를 爲해 만들어진 人權 槪念을 普遍的인 人權 槪念으로 바꾸는 일이다. 

 

보편이라는 말은 참 폭력적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반드시 힘 센 놈이 강요하게 되어 있다. 서구 자본주의 강국들이 제3세계에 침략해서 자원 같은 걸 막 가져가면서 자본주의의 틀을 잡았는데 이 과정에서 내세운 것이 바로 가톨릭의 보편적 가치다. 보편을 강요하고 보편의 이름으로 자기 정치적 이익을 챙기는 거다. 물론 인권은 보편적이어야 하지만 사회 구성원 간이나 나라들 간에 이해 관계의 대립 조건 속에서는 보편적 인권이라는 게 불가능하다. 이해 관계가 대립되어 있을 때 한쪽 인권을 보장해 주면 다른 쪽 인권은 무시되는 법이니까. 기본적으로 지배 피지배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말은 지배 계급의 기만일 뿐이다. 결국 이해 관계가 같은 방향으로 가는 그런 시대가 와야 하는데 결국 계급의 문제다. 원칙적으로 계급이 없어지고 계급 지배가 없어지지 않는 한 보편적 인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 서준식 인터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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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선언


 


전쟁에서 승리를 획득하기보다는 평화를 얻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일이다...

반군국주의자들이며 반식민주의자들이며, 반종교적인 초현실주의자들은 2차대전 전에 "당신들의 전쟁도 반대" "당신들의 평화도 반대"라는 요란한 제목의 선언서를 발표했다. 그들의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여전히 옳다. 군사적 승리에 힘입어 상대편에 굴욕적인 자세를 강요하는 강제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이라크 전쟁은 이 점을 확인시켜 주었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 점을 계속 확인시켜 줄 것이다. 강제로 평화조약에 서명하도록 강요받은 쪽은 두고두고 복수할 기회를 노릴 것이다.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미국도 여전히 그들이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군사적 수단을 총동원하여 이와 유사한 "평화"를 얻기를 원한다. 이는 정말 한심한 착각이다. 이 두 나라의 정치지도자들은 이런 착각에 빠져 자만해서는 안 된다.



-후략

알랭 쥬프로와_Alain Juff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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