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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의 논리

노장 사상을 추종하는 이들이 권유하는 삶의 양식과는 반대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삶의 현실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개별적 역사와 문화에 의해 결정된 구체적인 현실을 적극적으로 개척하고 그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자기 실현을 주장하는 공자의 사상은 정통적인 그 어느 사상들보다도 (...)에 가장 가깝다. (박이문, <논어의 논리>, 문학과지성사, 2005, 208쪽)

 

 

괄호 안에 들어가는 것은 어떤 철학 또는 사상 조류일까?

• 박이문 교수의 답: “21세기의 지배적 세계관인 포스트모더니즘”.
• 내 느낌: 18세기에 등장해 서구 사상계를 뒤집었다는 낭만주의.

 

근거는?

• 박이문 교수의 답: “포스트모더니즘은 내세가 아니라 내세에서의(“현세에서의”를 잘못 쓴 듯) 자기 실현을 강조하는 현실주의적 세계관과 구체적인 지리적 조건과 문화사에 의해서 가변적인 인식론을 바탕에 깔고 있다.”(208쪽)
• 내 대답: 낭만주의는 두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지금쯤은 익숙할 불굴의 의지에 대한 개념으로, 인간이 성취하는 것은 가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가치의 창조라는 것이다. 인간은 가치를 창조하고, 목표를 창조하며, 목적을 창조하는데, 궁극적으로는 마치 예술가가 예술 작품을 창조하듯이 (중략) 자기만의 고유한 세계관을 창조한다.” “두번째 명제는 사물의 구조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반드시 익혀야 할 모범 따위는 없다. 존재하는 것은 쉼 없는 흐름이 아니면, 부단한 세계의 자기 창조뿐이다. (중략) 세계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자기 전진의 과정이자 끊임없는 자기 창조다.” (이사야 벌린, <낭만주의의 뿌리> 한국어판 194, 195쪽)

 

남들의 평가

• 박이문 교수의 해석에 대해: 이 책을 계기로 우리의 논어학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대 철학과 이승환 교수)
• 내 추측에 대해: 다음 둘 중 하나. “엉터리” 또는 “누가 물어봤어?”

 

덧붙임1: 공자 사상을 박이문 교수가 요약한 데로 이해하는 게 옳은지 판단할 능력이 없지만, 공자 사상이 “21세기의 지배적 세계관인 포스트모더니즘”과 가까우며 그래서 보수적인 사상이 아니라 첨단적인 사상이라면 그에 대한 구체적인 논증이 필요하다. 하지만 <논어의 논리>에는 자세한 논증이 없다. 사실 박이문 교수가 규정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도 상대주의적이라는 점을 빼고는 전적으로 공감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게 포스트모더니즘의 정확한 규정이라 하더라도, 이 측면은 낭만주의의 영향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낭만주의에 대해서는 이사야 벌린의 <낭만주의의 뿌리>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는 존 산본마쓰의 <탈근대 군주론>을 보면 명쾌하게 정리가 될 거라고 본다. (절대 책 광고 아님... 믿거나 말거나^^)

 

덧붙임2: 박 교수는 이 책에서 공자의 핵심 사상인 '인'은 “그냥 또 하나의 동물로서 인간이 아니라 다른 모든 동물들과 구별되는 인간 고유의 도덕적 심성을 지칭한다. 인간에게 인간으로서 사는 것보다 더 귀중한 가치가 있을 수 없고, 인간답게 사는 것이 동물과는 정말 다른 도덕적 원리대로 사는 것을 뜻한다면, 그 차이를 '인'이라는 덕목에서 찾지 않는다면 다른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라고 쓴다.(57쪽)

 

그런데 눈길을 끄는 대목이 '인'과 '예'의 관련성에 대한 설명이다. “인이라는 덕목이 인간이 갖추어야 할 내적 심성의 속성을 지칭하는 데 반해서 '예'라는 덕목은 '인'의 덕목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서 인간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관습화된 가시적 행동 양식이다.”(156-157쪽) 공자가 노자와 달리 '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한다. “도덕적으로 언제나 선하고 옳은 행동은 우연적이고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저절로인 것처럼 언제 어디에서고 실천되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그러한 태도와 행동이 마치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어 억지 없이 취해지고 수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64쪽)

 

진짜 흥미있는 대목은 바로 이어지는 문장이다. “혹독한 훈련을 거친 후에 비로소 손가락 움직임, 공던지기, 도자기 빚고 굽기, 우아하고 정확한 피아노 연주, 자유로운 예술 작품을 창작하고 명곡을 독창할 수 있고 (중략) 마찬가지로 '예'를 통해서 습관화되어 몸에 배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인'에 젖은 즉 착한 사람이 되고, 그렇게 착한 일을 몸에 밴 듯 실천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예'를 만들고, 그것을 마치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몸에 익히게 되기 때문이다.”(같은 쪽)

 

기술을 몸에 익히는 것처럼 예를 익힌다고 과연 착해질까? 이런 비교는 '범주 오류'가 아닐까? 박 교수 스스로 “지적 능력의 우열은 육체적 힘의 우/열과 똑같은 잣대로 측정할 수 없으며, 도덕적 선/악과 경제적 효율성을 똑같은 원칙으로 측정할 수 없다. 만일 그렇지 않고 이 두 가지 경우를 같은 원칙에 의해 같은 잣대로 측정한다면 그것은 '범주 오류'라는 논리적 잘못을 저지름을 의미한다.”(184쪽)고 했듯이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걸 '수사학'이라고 하는 건가?

 

덧붙임3: <논어의 논리>는 논어에 대해 잘 알고 싶은 사람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세계관이나 진리, 가치, 윤리 문제 등 서구 철학의 주요한 개념들에 대해 쉽게 설명한 개론서 또는 안내서로서는 아주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2005/10/25 14:40 2005/10/25 14:40
2 댓글
  1. gaudium 2005/10/26 16:40

    생각해보니 그런 식의 재구성이 서양학자에 의해 이루어진 적이 있습니다. 카를 야스퍼스의 <<위대한 사상가들: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공자, 예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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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marishin 2005/10/26 17:26

    야스퍼스가 그런 것도 했군요. 읽을 책은 많고 시간은 없고... 능력이 있어서 이해도가 빠른 것도 아니고 그렇습니다. 아무튼 정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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