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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고민 변천사

** 기억해두고 정리하기 위해서 쓰는 내 경험 얘기다. 모두 영어로 된 사회과학 서적 번역 경험이니, 다른 언어, 다른 종류 번역의 경우로 일반화하기 어려울 소지가 있다. **

 

내가 번역을 시작한 때는 대략 1990년대 말이다. 이 때 내가 가장 중시한 것은 의미 전달이다. 원문의 뜻이 훼손되지 않는 한도에서, 문장을 나누기도 하고, 문장을 풀어서 번역하기도 했다. 뜻을 알기 어려운 번역문들을 보면서 “차라리 내가 하자”고 마음 먹은 게 번역을 시작한 동기여서 이런 태도를 취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번역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라면 누구나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2000년에 나온 <이제는 미국이 대답하라>가 이런 자세로 번역한 책이다.)

 

조금 지나니, 번역문이 원문의 문투나 느낌은 담지 못하고 모두 내 문투로 재구성된 것을 깨닫게 됐다. 그래서 마음을 바꿨다. 원문의 어감, 문체를 최대한 살려보려고 했다. (2004년에 나온 <싸이버타리아트>는 이런 자세로 번역한 책이다. 이 책을 이렇게 번역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저자는 정식 경로로 학자가 된 이가 아니라 현장 운동 경험을 축적한 연구자이고 그래서 그런지 문체가 보통의 학자들과 많이 달랐다. 이런 특성을 최대한 반영하는 게 올바른 번역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조금 독특한(?) 번역문이 나왔다.) 

 

그러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원문의 문장 구조까지 최대한 반영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도치된 문장을 그대로 유지한 채 번역하고(도치는 보통 강조다), 부사의 위치를 원문 문장 구조에 가장 가깝게 배치하고, 관계대명사로 연결된 문장을 앞부분부터 순서대로 번역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원문 구조를 번역문에 반영했다. (2005년에 나온 <탈근대 군주론>부터 이런 자세가 번역문에 반영됐을 것이다. 이 또한 번역을 맡게 된 책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이 책은 정식 교육 과정을 거친 학자가 서양 사상을 두루 거론한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을 확장한 것이다. 논문의 엄격함을 고려하고 수없이 많은 인용문을 제대로 다루려면 문장 하나 하나, 단어 하나 하나에 충실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렇게 작업하니 번역문이 '우리말답지 않다'는 소리가 조금씩 들렸다.(사실 내 번역에 대한 독자 반응은 거의 없다. 워낙 읽는 이가 적은 책들이다. 내가 듣는 얘기는 대체로 출판사쪽 평가다.) 이른바 번역투와는 조금 다른 것이지만, 많은 사람은 차이를 두지 않았다. 당연하다. 그래서 다시 고민에 빠졌다. 이제 목표는 원문의 의미 전달에 충실하고 원문 구조도 최대한 유지하는 '한국어다운 번역’이 됐다. 이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원문의 문장 구조에 충실하면 '한국어다운 번역'이 나오기 아주 힘들다. 당연히 뒤따르는 것이지만 번역문이 너무 어렵다는 얘기들도 들렸다.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번역이 “가장 잘된 번역”이라는 게 요즘은 상식처럼 퍼져 있으니 내 번역은 잘된 번역과 아주 거리가 먼 셈이다.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해야 하는 건 번역자의 지상과제지만, “쉬운 번역이 가장 좋은 번역”은 절대 아니다. 어려운 책은 번역문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어려운 학술서를 중고생도 술술 읽을 수 있게 번역하면 그건 번역이 아니다. (이건 “번역자의 윤리” 문제이기도 하다.) 관련 지식이 없으면 읽기 어려운 책은 아무리 애써도 역시 어려운 번역서가 된다. 한국에서 번역 대상이 되는 사회과학 서적들이 보통 이렇다. 책 한권을 잡고 6개월쯤 씨름한 번역자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관련 지식이 없는 일반 독자가 잡자마자 머리 속에 쏙쏙 들어가게 번역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두 부류다. 하나는 천재, 다른 하나는 사기꾼! 둘 다 될 수 없는 나는 “번역을 그만할 때가 왔다”고 느꼈다. 이게 아마 <진실 말하기>를 끝낸 2008년 초일 것이다.

 

번역문은 필연적으로 한국어와는 다른 어떤 '낯선 요소’가 있다고 변명을 해보지만, 읽는 사람들은 그저 무능한, 그리고 게으른 번역자의 핑계로 여길 뿐이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욕이나 먹지 않으면 다행인 일, 그만 두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번역에서 손을 떼고 지내다가 이런 저런 사정으로 다시 번역을 하게 됐다. 곧 출판될텐데, 이 책을 번역하면서 다시 자세를 조금 바꿨다. “무조건 쉬운 번역이 최고”라는 독자들한테, 원문 구조까지 충실히 반영한 번역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고민했다. 그 결과 내 번역 자세가 결국 맨 처음 번역하던 때와 비슷해졌다. (그래도 출판사의 기대에는 한없이 미달한다. 독자들의 기대는 더 말할 것도 없겠고.)

 

그러던 와중에 번역 공부 모임에 도움을 주는 일이 생겼고, 이 경험이 나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줬다. 오역이 많고 읽기 어려운 번역문이 나오는 구조를 조금 이해하게 된 것이다.

 

엉터리 번역문은 

첫째, 글의 맥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나오고,

둘째, 영어에 한정한 얘기지만 동사, 특히 조동사의 뜻을 정확히 모르는 데서 나오고,

셋째, 단어의 기본 뜻(밑바탕에 깔린 뜻)을 모르는 데서 나온다는 깨달음이다.

(예컨대 보통 persuade를 “설득하다”로 번역한다. 그런데 이 단어의 기본 뜻을 “설득해서 무엇무엇을 하게 하다”로 머리에 담아두지 않으면 반대말인 dissuade를 번역할 때 어려움을 겪는다. “설득하다”의 반대말이라니?? persuade가 “설득해서 무엇무엇을 하게 하다”로 자리잡고 있으면 dissuade를 “설득해서 무엇무엇을 단념시키다”로 번역해야겠다는 생각이 쉽게 떠오를 수 있다.)

 

이제 내 번역관은, 원문의 문맥을 정확하게 판단해 전달하고, 특히 조동사의 번역에 신경을 쓰며, 무엇보다 원 저자가 쓴 각각의 단어 뜻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한국어 단어를 찾는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게 됐다.

 

내 변역 태도를 정리하면 이렇다.

 

1. 먼저 원문의 의미에 최대한 충실하게 번역한다. (번역자를 개입시키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어차피 번역은 “번역자의 독해 결과”이다. 하지만 목적을 잊으면 안된다. 번역은 번역자의 작업 결과를 선보이는 것이 아니라 원 저자의 이야기를 “언어를 바꿔 전달하는 것”이다.) 

 

2. 원문의 문장 구조, 느낌, 문체, 어감 따위를 최대한 살려서 번역한다. (이 작업을 하다보면, 번역자 나름의 '한국어 문장 구조'를 만들어내는 데까지 가기도 한다. 예컨대 한국어에 없는 관계대명사로 연결된 문장을 앞 부분부터 번역해서 뒷부분과 연결시키는 방식 따위를 나름대로 만들어내야 한다. 뒤에서부터 번역하면 쉽지만, 이는 서양 언어 문장 순서를 뒤집는 것이고, 결국 글쓴이의 생각 흐름 또는 논리 흐름도 뒤집는 것이다.)

 

3. 한국어 어법에 어울리는 문장을 찾되, 특히 원어 단어의 본래 뜻에 가장 가까운 한국어 단어를 찾아내는 게 중요하다. (이 작업에는 답이 없다. 다만 이른바 '윤문'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원문의 의미에 충실하고 원문의 구조에 충실한 것이 대전제다.)

 

이상으로 10여년 동안 책 몇권 번역한 경험을 정리해봤다. 직업으로서 번역을 택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쪼개서 번역을 해보려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직업 번역가가 되려는 이들한테 이런 고민은 사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빠르게 번역하는 요령이다. 아니면 굶어 죽는다. 서글프지만 한국 번역계의 냉정한 현실이다.)

2012/04/27 13:36 2012/04/27 13:36
8 댓글
  1. 비밀방문자 2012/04/27 14:36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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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곰탱이 2012/04/27 14:59

    이 글을 퍼 가겠습니다. 저한테도 그렇고, 학생들한테도 꼭 읽혀주고 싶은 글이라서요.^^
    허락도 없이 먼저 퍼 가는 것 양해해 주셔요.^^ 퍼 간 곳 주소 올려 놓겠습니다.^^
    퍼 간 곳 주소 : http://cafe.naver.com/jennymar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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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앙겔부처 2012/05/02 15:28

    저는 항상 뒤에서부터 번역하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차피 뜻만 통하게 번역을 하고 있었지만.. 조동사같은 것도 뜻만 통하도록... 생각해보니 아무리 바쁘고 전달 목적의 번역이었다고 해도 문체나 어조같은 데에 대해선 조금의 고민도 없었네요. 반성하고...ㅜㅜㅜ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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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뽀삼 2012/05/05 15:13

    역쉬---번역은 어렵군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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