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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 논란'…사교육이 문제라고? 문제는 '정치'

'신해철 논란'…사교육이 문제라고? 문제는 '정치'
 
[주장] 신해철 학원 광고 논란, 사교육 필요없는 공교육 못만든 정치 문제
 
안일규
 
 
한동안 가수이자 독설가 신해철 씨의 입시학원 광고가 논란이었다. 한국의 교육을 강하게 비판해오던 그가 입시학원에 광고를 했다는데 수많은 누리꾼들과 '사이비' 진보주의자들이 그의 입시학원 광고에 대해 비판에 나섰다. 그동안 신 씨를 사교육 반대론자로 규정해왔던 이들로선 일종의 배신감을 느낀 비난 여론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 비난 덕택에 신 씨의 반박에서 귀담아야 할 몇 시사점들마저 놓치는 분위기이자 동시에 사교육은 '절대 악'이며 공교육은 '절대 선'이 되버리는 아이러니함을 자아내고 있다. 지금 입시지옥과 대학서열체계에서 허우적대는 공교육이 선한 존재가 된다니 웃지 않을 수 없다.
 
이번 논란에서 흡족한 표정을 짓는 곳은 어디일까? 바로 지난 10년간 교육파탄을 냈던 이들과 지금의 대학서열체계에 혁혁한 공로가 있는 SKY 대학들이다. 수능, 입시, 0교시, 야간자율학습 등을 만들어내고 특목고 환상과 조기유학, 등록금 폭탄, 대학 자율화 등 지방대를 죽이고 서울의 중심대학들을 중심으로 모든 대학 기능을 집중시켰던 지난 DJ-노무현 정권과 현 이명박 정권의 책임을 지움과 동시에 '특목고 프랜들리'를 내세우며 일반계 고등학교 학생들을 모두 떨어뜨리는 고려대 등 이른바 SKY로 불리는 학벌중심 대학들의 미소가 눈에 선하게 보인다. 일부 누리꾼들과 '사이비' 진보주의자들이 "신해철 죽이기"에 나서는 동안 문제의 핵심을 공교육과 이를 잘못한 정치에서 사교육이란 매우 지엽적인 틀로 가둬버리려 하는 것이다. 범죄 행위도 아닌 광고 출연에 한 가수가 욕을 먹는 사이, 지난 10년간 아이들의 교육을 망친 세력은 '민주투사'가 되어있고 이 시기에 교육파탄으로 배불린 이들도 여전히 건재하다. 이미 교육파탄을 낸 기득세력의 계략이 작동되고 있다.
 
'학부모' 신해철의 공교육 비판, 그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     © CBS노컷뉴스
신 씨의 이번 반박에서 왜 시사하는 바가 클까? 바로 현장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평소 학부모들이 쉽게 하는 이야기란 말이다. '학부모' 신해철의 주장을 전면으로 비난하고 귀담아듣지 않았던 곳이 아이러니하지만 자칭 진보주의자들이었다.
 
신 씨는 말한다. '사교육=입시 교육을 더욱 지옥으로 만드는 절대악'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말 그대로다. 특별히 이념적인 학부모가 아닌 이상 그럴 것이다. 그동안 학생들의 개별 특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화된 수업 틀 속에서 하던 공교육에 줄을 세우는 입시제도가 생겼을 때 그 틈에 들어온 것이 사교육이다. 입시지옥을 해결하는 장소가 사교육이었지 지옥같은 입시교육을 '더' 지옥으로 몰아넣은 것이 아니다. 적어도 '학부모' 신해철의 관점에선 그러했을 것이다.
 
그는 말을 잇는다. "나는 공교육의 총체적 난국을 내가 생각해도 과격할 정도로 비판해 왔지만 입시 교육 비판은 그러한 공교육 비판의 일부였지 사교육과 거의 무관한 얘기였다"고 말이다. 백 번 맞는 말이다. 사교육이 문제니까 사교육을 없애거나 '인간의 얼굴을 한' 사교육으로 만드면 학생들이 입시지옥에서 벗어나나? 그만큼 단순한 사람이 어딨겠나. 그럼 30년 전만 하더라도 입시지옥에 있었던 북유럽 교육은 사교육을 때려잡아서 학생들이 입시지옥에서 벗어났나? 공교육이 먼저 바뀌어서 아닌가.
 
신 씨의 공교육 비판은 당연하다. 사교육은 비판할 가치도 없다. 사교육 비판하고 개혁한다고 문제의 근본이 바뀌나? 대학서열체계가 공고하게 남아있고, 입시화된 특목고가 꿈쩍도 안하는데? 학생들의 인간성과 다양성이 우선되지 않고 입시의 틀 속에서 허우적대는 공교육인데? 사교육은 안 받아도 될 지 모르겠지만 신 씨가 말하듯 "'공교육'은 음식과 같은 것"이어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공교육이 바뀌지 않고서는 희망찬 학생들의 학창시절이 될 수 없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다. 신 씨의 불만과 짜증이 늘 공교육에 향하는 게 옳다. '학부모' 신해철은 그럴 자격이 있다. 이를 두고 "사교육이라는 공통의 적을 두고 공교육을 비판해선 안된다"는 '사이비' 진보주의자들의 논리는 "'나쁜' 공교육에게 아이들을 맡겨라"고 학부모들에게 외치는 격이다. 다시 말해서 '나쁜' 얼굴의 공교육이라도 '선한' 얼굴의 사교육보다 낫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신 씨는 말한다. "나는 12세 이상은 '준 성인'이며 중학생 시기에 이 아이가 공부를 계속 할 것인지 기술을 배울 것인지가 거의 결정이 나야 한다고 믿는다"고 한다. 또 그는 "어린이와 입시생은 또 다른 문제이며, 입시를 보겠다고'선택'을 했다면 그 후엔 공교육이고 사교육이고 본인에게 도움이 되는게 장땡이겠다"고 말한다. 학생들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선택할 수 있는 교육, 앞으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는 데 이 정도의 선택권은 필요하다. 미래의 '88만원 세대'인 학생들이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비전이 있나, 이에 맞춰갈 교육에 대한 선택권이 있나. 전혀 없지 않나. 우리의 공교육은 어떤가? 기술을 배우러 간 공고, 농고 등 학교들의 학생들은 벌써부터 '퇴물' 취급 받는다. 사회적으로 인문계 안가면 인간으로 취급해주지 않는 분위기 아닌가. 신해철을 비판한다는 이들이 더 잘 아는 사실일테다. 결국엔 공교육이 문제 아닌가.
 
여전히 문제는 '정치', 공교육 변화없이 학생들에게 희망 줄 수 없다
 
그렇다고 신 씨의 주장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공교육을 폐기해버려야 한다는 과격하고 비현실적인 생각까지 하는 것은 오히려 신 씨가 바라는 교육과 더 요원해질 수 있다. 그러나 "사교육이란 자동차나 핸드폰 같아서 필요하면 쓰고 싫으면 안 쓰면 되는 선택의 여지가 있다"고 말하듯 지금 학원에 안가면 다른 학생보다 더 뒤쳐지는 것 같고 사교육없인 입시전쟁을 치룰 수 없다고 말하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모습에서 최소한 그러한 선택의 여지는 만들어줘야 됨을 시사한다. 특히 이런 사단을 낸 정치가 문제임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국민이면 누구에게나 '참된' 교육을 받을 권리이자 의무가 있다. 공교육을 비판한 '학부모' 신해철로서는 당연한 권리를 요구했다. 그런 그에게 오히려 잘못했다고 때리나? 신해철의 공교육 비판이 진정한 공교육을 위한 쓴소리이자 이 문제는 엄연히 우리의 아이들을 지옥의 불구덩이에 집어넣는 공교육을 만든 정치의 문제이다. 참교육의 모델로 요즘 거론되는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의 교육도, 오랜 교수직 경험으로 새로운 교육정책 모델을 제시한 강성종 박사의 <한국과학기술 백년대계를 말한다>에서도 공교육의 혁신이 핵심이다. 사교육을 때려잡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지금 이 사단을 만들어놓은 정치의 문제이자 공교육으로 표현될 정치의 역할이 필요하다.
 
신해철을 비판한 이들에게 묻겠다. 신 씨가 "사교육이 눈에 거슬린다면 사교육이 무용지물이 되는 환경을 만들든가 할 일이지"라고 하지 않았나. 당신들은 그런 환경을 만들려는 노력이나 해봤는가. 사교육이 필요없는 환경은 유럽에서 배워올 수도, 새로운 것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런데 신해철을 비판한 이들을 보면 그런 환경을 만드는 데 고민이 부족한 이들이었다. 하나같이 신 씨가 말한대로 "공교육이 우수한 학생은 감당 못하고 떨어지는 학생은 배려 못하니 가려운 부분은 사교육이라도 동원해서 긁어주고, 공교육은 자취를 감춘 인성 교육과 사회화의 서비스를 강화하는 게 현재의 차선책"이라고 했던 이들 아닌가?
 
다시 한 번 묻자. 왕따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학생들에게 교사가 두들겨 맞는 등 지난 민주정부 10년과 이명박 정부의 공교육을 죽이는 개혁들의 폐해가 눈에 선하게 보이고 있는데 공교육을 비판할 대상이 아니라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고 말하는 학생들을 성적 순으로 세운 것이 사교육인가? 바로 공교육과 정치 아닌가? 희망찬 공교육, 참된 공교육을 만들지 않고 사교육만 잡으면 되나? 등록금만 잡고, 학원비만 잡으면 학생들이 행복한 '판타지아'가 열리나? 사교육을 들쑤시는 정책들 투성인데 사교육에, 성적조작, 외고 안간 게 죄라고 탄식하는 학생들. 도대체 무엇이 공교육을 비판하면 안될 정도로 제정신이라 할 수 있나.

한 학교가 "중하위권도 '다닐 맛' 나는 즐거운 학교"라고 신문에 대문짝하게 소개되는 현 상황에 사교육이 어찌 판을 치지 않을 수 없겠나. 사교육 없이 학창시절을 보내는 것은 사교육 없이 다닐 수 있는 공교육이 우선이다. 이 공교육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유능한' 정치의 역할이다. 나는 학생들이 즐거운 공교육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줄 정치의 역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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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제도'가 아닌 '리더'가 중요하다 / 박상훈 대표 강연(2009. 03. 02)

정치는 '제도'가 아닌 '리더'가 중요하다
 
[박상훈 대표 강연] 한국,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말할 리더가 필요하다
 
안일규
 
 
지난 주까지 7주간 경향신문과 문지문화원 '사이'의 기획으로 "위기를 극복한 리더십" 강연이 이어졌다. 지난 주 마지막 강연자로 나선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강연에서 발제문과 달리 리더십에 관련해 버락 오바마, 막스 베버에 초점을 뒀다. 이 날 박 대표는 50분 간 강연을 통해서 리더십에 대한 정치이론이 적고 어려운 주제여서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한다. 최근 리더십 유형을 설명하는 것은 실용적인 측면이 강하며 그나마 리더십에 대한 정리가 잘 된 것으로 박 대표는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라고 본다. 아래부터 박상훈 대표의 강연을 정리한 전문이다.
 
정치의 불편한 진실, 통치자와 피통치자와의 관계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이하 박상훈) : 인간사회에 가장 중요한 본질은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관계다. 많은 사람들은 이걸 빼고 싶다. 통치와 피통치는 관념적으로 썩 듣기 좋지 않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권위주의의 경험이 있는 나라에서 리더십이든 통치의 개념을 좋아하기가 어렵다. 통치와 리더십의 문제는 권위주의이전에 인간이 필연적으로 대면할 수밖에 없는 문제다. 이걸 버려버리고 나면 정치학 모두를 버린 것과 똑같다. 통치 또는 리더십 표현이라 하면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러나 그걸 말하지 않고 정치를 말한다면 우리가 바라는 좋은 공동체를 만든다는 건 허위의식일 뿐이다. 우리가 대면하기 싫은 진실이지만 무자비한 진실을 피하지 말고 그걸 어떻게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안에 묶어서 잘 다룰 수 있어야 그래도 우리가 정치를 통해서 사회문제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고 강조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라는 정의를 생각하면 일반 시민의 통치, 지배, 인민의 주권, 통치와 같이 여러가지 개념을 통해 말할 수 있는데 그건 하나의 가치로서 이야기하는 건 틀리지 않지만 현실에서의 민주주의라는 것은 피통치자의 동의에 의한 통치라는 현실을 피할 수 없다. 통치와 피통치의 분리라는 것은 우리가 원하든 아니든간에 정치의 출발점이기 때문에 문제는 피통치가 원하는 또는 동의하는 정치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그 사이를 메꾸는 것은 여러제도나 법도 있고, 기구도 있고 조직도 있겠지만 인간의 현실을 제도로 환원해서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게 안되는 게 정치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정치학을 경제학과 비교해보면 경제학은 체계가 있어서 어느 경제학을 보든간에 주제는 비슷할 수 있고 가능하다. 그러나 정치학은 불가능하다. 정치학은 근본적으로 연역적인 학문이 아니고 원리와 같이 환원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닌 인간의 불확정적인 실천이 정치현상의 중심이다. 공통의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니라 수많은 이견으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정치학은 잘하기 어렵고 아주 수준있지 않으면 보통사람들이 이해하는 정치와 학자가 이해하는 정치의 차이가 크지 않다. 그래서 어느 면에서는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저보다도 실력이 더 나을 수도 있는 부분이 있다. 학문적인 개념을 덜 쓸 뿐이지 여러분이 고민하는 것과 정치학자가 고민하는 것에 큰 차이가 나지 않을 수 있다.

정치학자가 뛰어난 정치가가 된 것을 본 적 있나? 경제정책을 만드는 사람은 경제학을 안하면 안된다. 경제정책을 여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맡길 수 있나? 경제학은 전문가가 있어야 된다. 정치학자가 뛰어난 정치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정치학자들이 왜 정치를 안했겠나? 뛰어난 정치가가 되는 것이 뛰어난 정치학자가 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그만큼 정치가 어떻게 해야된다는 행위존칙이 분명치 않다. 누군가에 의해서 계도되거나 교육받아서 하기 어려운 상당정도는 그 사람의 뛰어난 감수성과 다른 사람의 필요를 느낄 수 있는 자질이 필요하다. 정치의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특히 정치학자들이 말하는데 그 중에 7~80%는 틀린 얘기를 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이 주제와 관련되서는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차이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
 
오바마가 거쳐 온 '과정'과 '방식'에 관심가져야
 
박상훈 : 민주주의가 되었다는 얘기는 가장 좋은 매력은 보통사람들이 큰 일을 칠 수 있는 게 가장 좋은 정의라 본다. 누가 정의했는 줄 아나? 민주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이 비범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버락 오바마 책에 보면 있는데 아주 좋은 정의라 본다.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정치체제의 이상형이라 하면 모든 갈등이 사라진 어떤 곳이 아니라 아주 기본적인 필요와 지식의 자각만 있어도 공동체 속 다수를 소외시키지 않을 수 있으면 된다고 본다. 이번에 오바마는 잘 실현시켰다.
 
정치학을 배우고 싶다면 나는 오바마에 관심을 가지라고 하고 싶다. 오바마의 사례나 쓴 책 두 권은 좋은 정치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어떤 것보다도 훌륭한 교재가 될 것이다. 이상하게 우리나라에서는 미국과의 관계나 한국정치에 미치는 방식 등 좋지 않다보니 경시하는 면이 있는데 어느 사회나 통치와 피지배로 설명할 수 없는 다소 그런 게 정치의 현실이기 때문에 오바마의 사례는 매우 보편적인 정치를 다루고 있다고 보고 보통의 사례가 아니라고 본다. 우리나라에선 소개가 잘 안돼서 오바마의 승리를 많은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는데 이번 대선에서 흑인 유권자 비율이 몇 %인지 아시는가. 13%다. 오바마는 그 어느 민주당 후보가 얻은 표보다도 많이 얻었을 뿐만 아니라 백인 민주당 후보들이 백인들에게 얻은 표보다도 더 많이 얻었다. 히스페닉을 합쳐도 22%다. 아시아는 2%밖에 안된다. 73%에 이르는 백인 유권자 속에서 당선된 건 쉬운 게 아니다. 오바마의 이번 성과는 격렬함만 동반하지 않았을 뿐 사실상 혁명적인 일이다.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 목적이 하나인데 표를 많이 얻으면 된다. 통치는 다르다. 목적이 수만가지가 되고 전선도 수천가지가 된다. 우리가 기대한 만큼 오바마는 좋은 성과를 못 거둘 가능성이 훨씬 많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기까지 과정은 우리에게 경험적인 현실이고 배울 게 많다. 몇 가지만 더 본다면 오바마가 당선된 뒤 가장 먼저 한 게 무엇인줄 아는가. 시카고에서 직장 폐쇄에 공장 점거한 노조원들에 대해 당선자 신분으로 기자회견에서 뭐라고 했을까. 오바마는 단호하게 점거한 노동자들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했다. 친노동자여서?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해서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권리를 희생시키는 방향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것은 나름대로 진보적이어서가 아니고 경제에 대한 특별한 해석이 있는 것이다. 그럼 가장 먼저 사인한 법안은 무엇일까? 남녀임금고용평등법이다. 그 다음 법안은 관급공사에 노동자 탄압 등의 기업엔 배제한다는 것이다.
 
막스 베버 "정치는 '매우 위험한 것'이자 '인격화'가 중요"
 
박상훈 : 베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막스 베버를 이해하기 굉장히 어렵다. 막스 베버가 1920년에 죽는데 죽을 때 마스 베버는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말년에 가서 훨신 진보적이었다. 1919년에 뮌헨 대학에서 당시 군국주의자들이 베버에게 시위를 많이 하고 했는데 베버는 당시 군국주의자들의 과도함에 대해 많이 비판했고 가장 완숙적인 모습을 보였다.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1919년 가을에 나왔는데 1919년 1월달 강연을 책으로 옮긴 것인데 레디컬한 이들의 봉기 등으로 고조되는 민주화의 열망 속에서 진보적인 자유주의 성향의 학생들의 정치에 대한 강연 요청을 거절했다가 아주 진보적인 정치학자에게 강연 섭외 소식에 베버가 말려서 한 것이다.
 
막스 베버는 정치는 매우 위험한 직업이다는 게 그의 원칙이다. 합법적인 폭력을 누가 독점할 것인가에 따르는 경쟁이다. 그렇지만 본질은 '폭력'이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라는 것은 좋은 뜻으로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가지는 파괴적인 속성이라거나 정치란 선한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으로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의 정치의 세계로 과도하게 뛰쳐나가서 혁명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게 학생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대로 실현되지 않을 것을,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데 강연문 제일 마지막에 보면 학생들에게 제안을 한다. 10년 뒤에 다시 이 주제를 가지고 논해보자. 여러분들은 내가 말한 것에 대해서 실망할 것이고 왜냐면 정치를 통해서 사회, 경제를 많이 바꾸고 싶어하는 학생들에게 그것만으로는 왜 부족한지, 그래서 신중함이 필요한지에 대해 한참 얘길했으니 10년 뒤에 얘길해보면 내가 왜 이렇게 얘기했는지 알 거라는 내용이다.
 
막스 베버가 정치에 대해서 두 가지 메시지를 줬는데 하나는 방금 말한대로 정치는 폭력이라는 아주 위험한 무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정치는 단순한 것만으론 곤란하고 한 정치가가 내 행동의 결과가 어떨지에 대해 충분하게, 신중하게 해서 책임을 져야 된다는 것이다. 10년 뒤에 옳다는 것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이런 정치를 하겠다고 강요해선 안되며 다른 한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정치가 왜 중요하냐. 리더십에 대한 것이다. 베버는 이 책에서는 충분히 다루지 않았지만 베버의 사회학에서 중심적인 테마는 인간사회는 근대화라는 충격을 흡수하면서 필연적으로 사회는 관료화되고 제도화되고 체계화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한다. 그 결과는 어떻나, 매우 비관적이다. 인간이 이성에 천착하면서 합리적인 개성이 발휘되기보다는 체제 한 부분으로 작동하면은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그럼 뭘로 바꿀 수 있을까. 그걸 변화시키는 걸로 생각한 게 정치다. 막스 베버에게서 정치는 합리화다. 이성이 중심인 곳이 아니고 충돌, 열정, 지배욕구가 이뤄지는 곳이다. 인간의 불확정적인 힘들이 쏟아져나오는 것이 정치의 세계다. 그러면 이 정치의 세계가 그렇다면 그러면 정치 안에서도 질서가 있어야될 거 아닌가? 그것이 리더십이다. 베버는 체계적으로 얘기하지 않고 카리스마라는 것으로 말했다. 카리스마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합리적이고 토착해서 이론화할 수 없는 것인데 이성의 반대 개념으로 불러들인 신화적인 용어다. 베버가 말하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정당이 될 수도 있고 리더가 될 수도 있으며 어떤 조직이 될 수도 있다. 정치의 특징을 말하는 개념으로 쓰인 것이다. 우리 정치에 무언가를 제도화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은 베버다운 게 아니다. 베버는 여전히 가장 큰 특징은 인격적인 것이다. 정치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법을 어떻게 만들고 제도를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실천하느냐라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막스 베버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이 지겹도록 물고 늘어지는게 결국 나치즘을 전파한 거 아니냐고 할만큼 막스 베버에 있어 리더십이나 정치적인 것의 핵심은 '인격적'이다. 개인이 갖고 있는 탁월함이 막스 베버에서 리더십이 핵심이다. 이것이 없으면 정치질서? 글쎄. 베버는 내각제, 비례대표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대게 정치를 제도나 추상적인 것에 의해 비유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요소가 작동되는 정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말할 수 없는 현 정부의 정치와 리더십은 바뀌어야
 
▲ 지난 25일 서울 동교동 소재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위기를 극복한 리더십"을 주제로 발제하고 있는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     ©대자보
박상훈 : 그래서 막스 베버는 민주주의는 두 가지밖에 없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나는 리더십 없는 민주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 있는 리더십이다. 그런데 이걸 체계적으로 자세히 하지 않았다. 다만 막스 베버는 리더십 있는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말한 것은 인격적 요소의 내용, 윤리성, 끌리는 힘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그것이 정치체제에서 작동하지 않으면 남은 것은 파벌의 득세라 봤다. 전체적인 질서를 운영할 수 있는 리더십이 작동하지 않으면 결국 남는 건 부분적인 것들, 파벌과 이해관계, 권력추구 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묻고 싶은 건 리더십이라는 것이 없이 합리적인 제도와 규범으로 정치를 할 수 있을까?
 
막스 베버는 책에서 마지막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증명할 수 있는 요인, 그것이 리더십이라고 했다. 이명박 정부로 하자면 진보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를 평화의 비용으로 생각하고, 기업을 돕는 것도 좋지만 IMF 이후 지난 10년동안 불평등이 심화되었고 일자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의 경제적 위기가 크다고 생각하는 게, 보수에게 사회통합이 가장 중요한 가치인 만큼, 여러 주장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이익만이 아니라 보통의 일하는 사람들의 권익도 생각하자고 하면 리더십이 작동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이것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본다.
 
기득세력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회전체적인 것을 그대로 수용한다면 리더가 있을 필요가 없다. 리더십이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말할 수 있는 것이고 막스 베버의 관점에서 파당적인 요소를 뺄 수 없지만 사회전체적인 이익을 병행할 수 있는 사회전체적인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사회의 중상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부정적이지 않은 공익적인 요소를 병행시킬 수 있는 일을 지도자라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이다. 보수세력이 집권했다고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듯 보수적이어서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거기서도 좋은 가치가 있고 병행할 수 있는데 그런 게 없이 생으로 보수라면 문제다. 진보도 마찬가지다. 사회전체의 지도자로서는 부족한 것이다. 사회전체적인 것이 병행될 수 있는 것을 기대했던 거지 지금대로라면 보수가 갖고 있는 나름대로의 가공할만한 긍정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우리사회의 적나라한 이익들이 관철되어도 좋다고 해석하는데 이건 문제가 있다. 사회 부분 이익을 전체 이익으로 강요하는 것이 나타난다. 이명박 정부는 정치와 리더십에 대한 기본원리와 배치되는 현실이기 때문에 수정되거나 교정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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