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후마니타스

정치는 '제도'가 아닌 '리더'가 중요하다 / 박상훈 대표 강연(2009. 03. 02)

정치는 '제도'가 아닌 '리더'가 중요하다
 
[박상훈 대표 강연] 한국,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말할 리더가 필요하다
 
안일규
 
 
지난 주까지 7주간 경향신문과 문지문화원 '사이'의 기획으로 "위기를 극복한 리더십" 강연이 이어졌다. 지난 주 마지막 강연자로 나선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강연에서 발제문과 달리 리더십에 관련해 버락 오바마, 막스 베버에 초점을 뒀다. 이 날 박 대표는 50분 간 강연을 통해서 리더십에 대한 정치이론이 적고 어려운 주제여서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한다. 최근 리더십 유형을 설명하는 것은 실용적인 측면이 강하며 그나마 리더십에 대한 정리가 잘 된 것으로 박 대표는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라고 본다. 아래부터 박상훈 대표의 강연을 정리한 전문이다.
 
정치의 불편한 진실, 통치자와 피통치자와의 관계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이하 박상훈) : 인간사회에 가장 중요한 본질은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관계다. 많은 사람들은 이걸 빼고 싶다. 통치와 피통치는 관념적으로 썩 듣기 좋지 않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권위주의의 경험이 있는 나라에서 리더십이든 통치의 개념을 좋아하기가 어렵다. 통치와 리더십의 문제는 권위주의이전에 인간이 필연적으로 대면할 수밖에 없는 문제다. 이걸 버려버리고 나면 정치학 모두를 버린 것과 똑같다. 통치 또는 리더십 표현이라 하면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러나 그걸 말하지 않고 정치를 말한다면 우리가 바라는 좋은 공동체를 만든다는 건 허위의식일 뿐이다. 우리가 대면하기 싫은 진실이지만 무자비한 진실을 피하지 말고 그걸 어떻게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안에 묶어서 잘 다룰 수 있어야 그래도 우리가 정치를 통해서 사회문제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고 강조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라는 정의를 생각하면 일반 시민의 통치, 지배, 인민의 주권, 통치와 같이 여러가지 개념을 통해 말할 수 있는데 그건 하나의 가치로서 이야기하는 건 틀리지 않지만 현실에서의 민주주의라는 것은 피통치자의 동의에 의한 통치라는 현실을 피할 수 없다. 통치와 피통치의 분리라는 것은 우리가 원하든 아니든간에 정치의 출발점이기 때문에 문제는 피통치가 원하는 또는 동의하는 정치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그 사이를 메꾸는 것은 여러제도나 법도 있고, 기구도 있고 조직도 있겠지만 인간의 현실을 제도로 환원해서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게 안되는 게 정치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정치학을 경제학과 비교해보면 경제학은 체계가 있어서 어느 경제학을 보든간에 주제는 비슷할 수 있고 가능하다. 그러나 정치학은 불가능하다. 정치학은 근본적으로 연역적인 학문이 아니고 원리와 같이 환원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닌 인간의 불확정적인 실천이 정치현상의 중심이다. 공통의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니라 수많은 이견으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정치학은 잘하기 어렵고 아주 수준있지 않으면 보통사람들이 이해하는 정치와 학자가 이해하는 정치의 차이가 크지 않다. 그래서 어느 면에서는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저보다도 실력이 더 나을 수도 있는 부분이 있다. 학문적인 개념을 덜 쓸 뿐이지 여러분이 고민하는 것과 정치학자가 고민하는 것에 큰 차이가 나지 않을 수 있다.

정치학자가 뛰어난 정치가가 된 것을 본 적 있나? 경제정책을 만드는 사람은 경제학을 안하면 안된다. 경제정책을 여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맡길 수 있나? 경제학은 전문가가 있어야 된다. 정치학자가 뛰어난 정치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정치학자들이 왜 정치를 안했겠나? 뛰어난 정치가가 되는 것이 뛰어난 정치학자가 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그만큼 정치가 어떻게 해야된다는 행위존칙이 분명치 않다. 누군가에 의해서 계도되거나 교육받아서 하기 어려운 상당정도는 그 사람의 뛰어난 감수성과 다른 사람의 필요를 느낄 수 있는 자질이 필요하다. 정치의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특히 정치학자들이 말하는데 그 중에 7~80%는 틀린 얘기를 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이 주제와 관련되서는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차이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
 
오바마가 거쳐 온 '과정'과 '방식'에 관심가져야
 
박상훈 : 민주주의가 되었다는 얘기는 가장 좋은 매력은 보통사람들이 큰 일을 칠 수 있는 게 가장 좋은 정의라 본다. 누가 정의했는 줄 아나? 민주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이 비범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버락 오바마 책에 보면 있는데 아주 좋은 정의라 본다.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정치체제의 이상형이라 하면 모든 갈등이 사라진 어떤 곳이 아니라 아주 기본적인 필요와 지식의 자각만 있어도 공동체 속 다수를 소외시키지 않을 수 있으면 된다고 본다. 이번에 오바마는 잘 실현시켰다.
 
정치학을 배우고 싶다면 나는 오바마에 관심을 가지라고 하고 싶다. 오바마의 사례나 쓴 책 두 권은 좋은 정치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어떤 것보다도 훌륭한 교재가 될 것이다. 이상하게 우리나라에서는 미국과의 관계나 한국정치에 미치는 방식 등 좋지 않다보니 경시하는 면이 있는데 어느 사회나 통치와 피지배로 설명할 수 없는 다소 그런 게 정치의 현실이기 때문에 오바마의 사례는 매우 보편적인 정치를 다루고 있다고 보고 보통의 사례가 아니라고 본다. 우리나라에선 소개가 잘 안돼서 오바마의 승리를 많은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는데 이번 대선에서 흑인 유권자 비율이 몇 %인지 아시는가. 13%다. 오바마는 그 어느 민주당 후보가 얻은 표보다도 많이 얻었을 뿐만 아니라 백인 민주당 후보들이 백인들에게 얻은 표보다도 더 많이 얻었다. 히스페닉을 합쳐도 22%다. 아시아는 2%밖에 안된다. 73%에 이르는 백인 유권자 속에서 당선된 건 쉬운 게 아니다. 오바마의 이번 성과는 격렬함만 동반하지 않았을 뿐 사실상 혁명적인 일이다.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 목적이 하나인데 표를 많이 얻으면 된다. 통치는 다르다. 목적이 수만가지가 되고 전선도 수천가지가 된다. 우리가 기대한 만큼 오바마는 좋은 성과를 못 거둘 가능성이 훨씬 많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기까지 과정은 우리에게 경험적인 현실이고 배울 게 많다. 몇 가지만 더 본다면 오바마가 당선된 뒤 가장 먼저 한 게 무엇인줄 아는가. 시카고에서 직장 폐쇄에 공장 점거한 노조원들에 대해 당선자 신분으로 기자회견에서 뭐라고 했을까. 오바마는 단호하게 점거한 노동자들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했다. 친노동자여서?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해서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권리를 희생시키는 방향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것은 나름대로 진보적이어서가 아니고 경제에 대한 특별한 해석이 있는 것이다. 그럼 가장 먼저 사인한 법안은 무엇일까? 남녀임금고용평등법이다. 그 다음 법안은 관급공사에 노동자 탄압 등의 기업엔 배제한다는 것이다.
 
막스 베버 "정치는 '매우 위험한 것'이자 '인격화'가 중요"
 
박상훈 : 베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막스 베버를 이해하기 굉장히 어렵다. 막스 베버가 1920년에 죽는데 죽을 때 마스 베버는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말년에 가서 훨신 진보적이었다. 1919년에 뮌헨 대학에서 당시 군국주의자들이 베버에게 시위를 많이 하고 했는데 베버는 당시 군국주의자들의 과도함에 대해 많이 비판했고 가장 완숙적인 모습을 보였다.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1919년 가을에 나왔는데 1919년 1월달 강연을 책으로 옮긴 것인데 레디컬한 이들의 봉기 등으로 고조되는 민주화의 열망 속에서 진보적인 자유주의 성향의 학생들의 정치에 대한 강연 요청을 거절했다가 아주 진보적인 정치학자에게 강연 섭외 소식에 베버가 말려서 한 것이다.
 
막스 베버는 정치는 매우 위험한 직업이다는 게 그의 원칙이다. 합법적인 폭력을 누가 독점할 것인가에 따르는 경쟁이다. 그렇지만 본질은 '폭력'이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라는 것은 좋은 뜻으로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가지는 파괴적인 속성이라거나 정치란 선한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으로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의 정치의 세계로 과도하게 뛰쳐나가서 혁명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게 학생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대로 실현되지 않을 것을,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데 강연문 제일 마지막에 보면 학생들에게 제안을 한다. 10년 뒤에 다시 이 주제를 가지고 논해보자. 여러분들은 내가 말한 것에 대해서 실망할 것이고 왜냐면 정치를 통해서 사회, 경제를 많이 바꾸고 싶어하는 학생들에게 그것만으로는 왜 부족한지, 그래서 신중함이 필요한지에 대해 한참 얘길했으니 10년 뒤에 얘길해보면 내가 왜 이렇게 얘기했는지 알 거라는 내용이다.
 
막스 베버가 정치에 대해서 두 가지 메시지를 줬는데 하나는 방금 말한대로 정치는 폭력이라는 아주 위험한 무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정치는 단순한 것만으론 곤란하고 한 정치가가 내 행동의 결과가 어떨지에 대해 충분하게, 신중하게 해서 책임을 져야 된다는 것이다. 10년 뒤에 옳다는 것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이런 정치를 하겠다고 강요해선 안되며 다른 한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정치가 왜 중요하냐. 리더십에 대한 것이다. 베버는 이 책에서는 충분히 다루지 않았지만 베버의 사회학에서 중심적인 테마는 인간사회는 근대화라는 충격을 흡수하면서 필연적으로 사회는 관료화되고 제도화되고 체계화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한다. 그 결과는 어떻나, 매우 비관적이다. 인간이 이성에 천착하면서 합리적인 개성이 발휘되기보다는 체제 한 부분으로 작동하면은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그럼 뭘로 바꿀 수 있을까. 그걸 변화시키는 걸로 생각한 게 정치다. 막스 베버에게서 정치는 합리화다. 이성이 중심인 곳이 아니고 충돌, 열정, 지배욕구가 이뤄지는 곳이다. 인간의 불확정적인 힘들이 쏟아져나오는 것이 정치의 세계다. 그러면 이 정치의 세계가 그렇다면 그러면 정치 안에서도 질서가 있어야될 거 아닌가? 그것이 리더십이다. 베버는 체계적으로 얘기하지 않고 카리스마라는 것으로 말했다. 카리스마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합리적이고 토착해서 이론화할 수 없는 것인데 이성의 반대 개념으로 불러들인 신화적인 용어다. 베버가 말하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정당이 될 수도 있고 리더가 될 수도 있으며 어떤 조직이 될 수도 있다. 정치의 특징을 말하는 개념으로 쓰인 것이다. 우리 정치에 무언가를 제도화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은 베버다운 게 아니다. 베버는 여전히 가장 큰 특징은 인격적인 것이다. 정치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법을 어떻게 만들고 제도를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실천하느냐라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막스 베버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이 지겹도록 물고 늘어지는게 결국 나치즘을 전파한 거 아니냐고 할만큼 막스 베버에 있어 리더십이나 정치적인 것의 핵심은 '인격적'이다. 개인이 갖고 있는 탁월함이 막스 베버에서 리더십이 핵심이다. 이것이 없으면 정치질서? 글쎄. 베버는 내각제, 비례대표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대게 정치를 제도나 추상적인 것에 의해 비유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요소가 작동되는 정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말할 수 없는 현 정부의 정치와 리더십은 바뀌어야
 
▲ 지난 25일 서울 동교동 소재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위기를 극복한 리더십"을 주제로 발제하고 있는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     ©대자보
박상훈 : 그래서 막스 베버는 민주주의는 두 가지밖에 없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나는 리더십 없는 민주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 있는 리더십이다. 그런데 이걸 체계적으로 자세히 하지 않았다. 다만 막스 베버는 리더십 있는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말한 것은 인격적 요소의 내용, 윤리성, 끌리는 힘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그것이 정치체제에서 작동하지 않으면 남은 것은 파벌의 득세라 봤다. 전체적인 질서를 운영할 수 있는 리더십이 작동하지 않으면 결국 남는 건 부분적인 것들, 파벌과 이해관계, 권력추구 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묻고 싶은 건 리더십이라는 것이 없이 합리적인 제도와 규범으로 정치를 할 수 있을까?
 
막스 베버는 책에서 마지막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증명할 수 있는 요인, 그것이 리더십이라고 했다. 이명박 정부로 하자면 진보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를 평화의 비용으로 생각하고, 기업을 돕는 것도 좋지만 IMF 이후 지난 10년동안 불평등이 심화되었고 일자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의 경제적 위기가 크다고 생각하는 게, 보수에게 사회통합이 가장 중요한 가치인 만큼, 여러 주장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이익만이 아니라 보통의 일하는 사람들의 권익도 생각하자고 하면 리더십이 작동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이것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본다.
 
기득세력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회전체적인 것을 그대로 수용한다면 리더가 있을 필요가 없다. 리더십이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말할 수 있는 것이고 막스 베버의 관점에서 파당적인 요소를 뺄 수 없지만 사회전체적인 이익을 병행할 수 있는 사회전체적인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사회의 중상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부정적이지 않은 공익적인 요소를 병행시킬 수 있는 일을 지도자라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이다. 보수세력이 집권했다고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듯 보수적이어서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거기서도 좋은 가치가 있고 병행할 수 있는데 그런 게 없이 생으로 보수라면 문제다. 진보도 마찬가지다. 사회전체의 지도자로서는 부족한 것이다. 사회전체적인 것이 병행될 수 있는 것을 기대했던 거지 지금대로라면 보수가 갖고 있는 나름대로의 가공할만한 긍정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우리사회의 적나라한 이익들이 관철되어도 좋다고 해석하는데 이건 문제가 있다. 사회 부분 이익을 전체 이익으로 강요하는 것이 나타난다. 이명박 정부는 정치와 리더십에 대한 기본원리와 배치되는 현실이기 때문에 수정되거나 교정될 필요가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다시 ‘정당의 귀환’을 말하다 / <절반의 인민주권> 서평

다시 ‘정당의 귀환’을 말하다
갈등, 이익, 정당, 민주주의가 만들어내는 '최대의 인민주권'

E.E 샤츠슈나이더의 「절반의 인민주권」은 정당론 고전으로 갈등, 이익, 정당, 민주주의가 이 책의 키워드다. 첫 키워드 ‘갈등’에는 가담자와 구경꾼이 있고 이 구경꾼이 늘어날수록 갈등의 성격은 크게 변하며 갈등의 사회화가 이뤄진다. 이러한 갈등은 파당적인 성격을 갖고 중립적일 수 없으며 균형은 언제든지 변한다. 여기서 정치역할은 이러한 갈등을 관리하는 것이다.

 

   
  
갈등의 종류를 줄이거나 혹은 바꾸거나 배제하는 등 갈등을 이용하려는 것이 정치다. 저자는 “대안을 정의하는 것이 최고의 권력수단”이라 말한다. 그 이유는 “대안의 정의는 갈등의 선택을 의미하고 갈등의 선택이 권력을 배분하기 때문”이라고.

갈등을 관리하거나 대안을 정의할 이로 ‘정당’과 ‘이익집단’을 상정할 수 있겠다. 저자는 이익집단 체제를 말하는 다원주의자들을 비판한다. 여기서 두 번째 키워드 ‘이익’이 등장한다. 이익집단의 편향성은 상층계급적 성향을 보이고 농촌 지역 조직에 참여하지 않은 농민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들임을 보여주면서 책에서 그는 대략 인민의 90% 정도는 이익집단 체제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다원주의자들 주장처럼 이해관계자 개념이 강조될 경우 갈등은 협소해질 것이고(가담자와 구경꾼의 관계에서 구경꾼은 배제될 것이며)다수의 지배와는 멀어진다. 그러나 저자는 이익집단 정치의 종말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익집단 정치를 갈등의 사회화 중 하나로 보며 특수(사적)이익을 형성하고 약자들의 작은 이익들은 갈등의 사회화와 힘의 균형을 변화시키기 위해 공적 권위를 기대한다. 공적 권위의 기능은 갈등의 범위를 넓혀 사적 권력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세 번째 키워드 ‘정당’은 이익집단 정치의 대안카드로 나타난다. 저자의 관점에서 정당의 역할은 유권자들이 선택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정부를 제대로 운영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정당정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보통 사람들로 구성된 정치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해야 보통사람들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느냐고 묻는 저자의 네 번째 키워드 ‘민주주의’로 넘어온다.

 

그는 “민주주의에서 강조해야 할 것은 리더십과 조직의 역할이며 대중이 개입할 수 있고 공공정책 대안들이 부상하게 하는 갈등이 근간”이라 말한다. 민주주의 이론에서 현명한 출발은 보통 시민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데 있다. 민주주의 정치에 있어 갈등ᆞ경쟁ᆞ리더십ᆞ조직이 핵심이며, 정당과 정치지도자가 사회화된 갈등과 좋은 대안들을 가지고 경쟁하는 것이 최대의 인민주권이다.

한국의 ‘정당없는 민주주의’에 대한 샤츠슈나이더의 고언

이 책은 현 정치이슈 측면에서나 민주화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에서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갈등은 없애야 할 것이며 정당정치는 패거리 정치란 주류정치담론이 팽배한 지금, 갈등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고 정당 없이는 민주주의가 없다는 정당론 고전을 대표하는 한 학자의 주장에 이목이 집중되지 않을 수 없다.

 

다원주의의 영향에 의한 이익집단 중심의 정치에 대해서는 소수의 상층계급집단과 친기업 집단만 체제에 들어갈 수 있다고 비판한다. 이는 10%에도 미치지 못할 수준의 노조 조직률(한국의 노조조직에는 상층노동자 중심으로 기층노동자들은 배제되어있다)과 한 재벌경제연구소의 보고서에 의해 정책을 집행하는 대비되는 두 현실의 암울함을 잘 설명하고 있다.

 

정당을 멀리하고 이익집단 정치를 활성화하는 것이 답이라는 이들에게 저자는 “이익집단 정치의 영향력 행사 범위는 정당정치에 비해 제한되어있고 규모가 작아 정치적 동원 효과도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선거에서 기업가는 공화당을 지지하고 노동자는 민주당을 지지할 수밖에 없듯 이익집단의 힘만으로는 선거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

저자가 강조하는 경쟁의 측면에서도 정당이 이익집단보다 더 경쟁적이며 선거에서 유일하게 승리할 수 있는 조직이다. 기업과 정당의 관계에서 미국의 공화당이 이익집단에 ‘압력’받는 게 아니라 먼저 친기업적 태도를 취했을 뿐이며 ‘압력’이 아니라 이익집단이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는 노무현 정권의 열린우리당이 삼성공화국을 만든 것도 총선 직후 내걸었던 ‘기업하기 좋은 나라’란 친기업적 태도에 적용할 수 있다. 기업계 역시 한나라당에 ‘압력’을 넣는 것으로 보이지만 저자의 관점대로 전경련과 같은 기업집단들은 한나라당이 자신들과 다른 정책을 추구하더라도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정당은 이익집단의 지지를 얻으려고 경쟁하는 게 아니라 다른 정당과 경쟁하기 때문이자 미국의 기업과 공화당의 관계, 조직 노동과 민주당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역적 정당체계와 전국적 정당체계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지역주의와 전국정당화가 민주화 이후 정치담론 전면에 나타났던 한국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역주의가 정당조직의 약화와 억압을 가져온다면 정치의 전국화는 전국적인 정치조직 수요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갈등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전국적인 차원의 정치가 발전함으로써 나타난 결과 가운데 하나는 “특정지역에 편향되지 않은 전국적인 유권자와 전국적인 다수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정당들의 짧은 수명과 허약한 정당체제, 민심과 괴리되면서 다수의 지지에 기반하지 않은 한국 정당들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정치체제의 한계로 ‘투표 불참’ 문제를 제기한다. 투표율이 나날이 낮아지는 한국에서 그가 제기하는 ‘투표 불참’ 문제는 시대적인 시사성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높아지는 투표 불참에 대해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하는데 시민들의 상당수가 정치체제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며 정치 세계의 확장을 제한하는 투표불참이 큰 영향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어디서 이 원인을 찾아내는가. 정치, 정당, 정치인에 대한 공격에서 찾았다. 미국에서는 저자가 평소 비판해왔던 1920년대 진보주의 운동이자 지난 10년간 한국정치에 팽배한 반 정치담론을 투표불참의 원인으로 지적한 것이다. 저자는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의 경쟁이 정부와 기업간 균열이란 균열AB를 대표하고 지배담론이 됨에 따라 대안적 균열이자 억압된 균열인 CD를 원하는 사람들이 투표불참 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여기서 투표불참 한 이들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이다. 한국의 균열에는 민족문제가 대표균열이 되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문제, 사회경제적 문제에 의한 균열은 한국의 기존정당에 의해 억압된 현실과 다르지 않다. 미국에서는 오바마 당선자가! 배제된 이들을 일정부분 동원해냈지만 새로운 종류의 정치적 노력 통한 억압된 균열을 발전시키지 않는다면 이들은 배제될 것이며, 한국은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한 균열을 발전시키지 않는다면 보수적인 유권자들만 행복한 선거가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정치의 역할이 중요하다.

2008년의 절반의 인민주권, 다시 ‘정당의 귀환’을 말하다

「절반의 인민주권」은 인민주권이 직접민주주의와 같은 방식으로 혹은 새로운 민주주의의 태동의 관점에서 보장되는 게 아니라 대안과 갈등을 제시할 수 있는 정당에 의해서 최대의 인민주권을 이뤄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저자의 관점은 촛불집회에 많은 교훈을 준다.

 

지금과 같이 시민이 정부를 통제하지 못하는 데는 갈등이 제대로 조직되지 않아서라는 그의 지적은 현재 한국의 현실에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으며 정당의 역할로 경쟁하고 갈등을 관리하며 유권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들을 제시한 것은 현 한국정당들의 과제를 제대로 지적했다. 정당의 이러한 역할을 통해 배출한 지도자나 정부는 ‘제 갈 길 가는 대통령’이 아니라 ‘인민의 동의에 의한 정부’가 될 것이다.

내가 저자와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기업국가의 결정타 ‘삼성공화국’ 문제와 현재 한국에서의 이익집단 정치, 론스타와 같은 외국 투기자본, 다국적기업과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고언을 듣고 싶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