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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정치야! 그런데...

—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




에잇. 찾아보려다가 포기했다. 하지만 또렷하게 기억한다.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선진국의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정치는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맡기고 국민들이 열심히 생업에 종사할 때
우리나라는 선진국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구의 말이었을까? 지금 “정치하는 사람들”의 정점에 있는 이명박 씨의 말이다. 2007년 여름, 그가 후보 시절 한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저 사람이 말실수를 했으려니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국민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와 인터넷의 발달로 대의정치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정부와 국회는 능동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디서 한 말이었을까? 무려 “국회 시정연설”(2008.7.12)에서 공식적으로 내뱉은 말씀이시다. 이런 연설은 대통령 혼자 쓰는 것도 아니고, 여러 사람이 같이, 그것도 여러 번 검토하고 또 검토해서 최종원고가 나오는 법이다. 그런 원고에 국민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하나의 “위협”으로 간주하는 내용이 실린 것이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말했던 것이다. 국민 여러분, 정치에 관심 좀 끄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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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 중인 이명박 대통령. 국민의 정치참여는 대의정치에 대한 도전?
이명박 자신에 대한 도전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명박이 대의정치체의 정체였던가?

이런 대통령이니, 촛불집회가 그에게 얼마나 황당했었겠는가? 우리는 그에 대해 좀 더 연민을 가져야 한다. 그는 무척 마음 아파했을 것이다. “아, 우리나라가 저 눔의 데모 때문에 후진국으로 가는쿠나!” 청와대 뒷산에서 <아침이슬>을 안주로 해서 소주를 마시며 한탄했을 그를 떠올리면 내 가슴이 다 저민다. 우리에게도 있지 않은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 내 앞에 성큼성큼 다가오는 순간 말이다.(이를테면 지난 대선 같은...) 그때 우리는 얼마나 아파했던가?


명바기즘, 그리고 자유주의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기자는 이명박 대통령. 그렇다면 다른 것은? 시장에 맡긴다. 이것이 MB노믹스다. 정치는 줄이고 줄이고 또 줄이고, 시장의 자율은 늘리고 늘리고 또 늘리는 것이 그 핵심이다. 결국 정치는 시장이 결정한 것을 승인하는 역할만을 맡게 된다. 장관: “시장이 한미FTA를 원한답니다.”, 대통령: “어, 그래? 그럼 FTA 합시다.” 국회의원1: “FTA로 농가는 심한 위협을 받게 됩니다. 재고해야 합니다.”, 국회의원2: “그럼 정부에 농민을 위한 대책을 요구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국회의원1: “그럼 농민에 대한 지원을 정부에게 요구하도록 하고, FTA 비준합시다.” 국회의원2: “그럽시다.” 아, 이명박이 꿈꾸는 알흠다운 정치.

그러나 이 알흠다운 정치는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다. 다른 말로 “신자유주의”라고도 부르는 이 알흠다운 정치의 원조인 “자유주의”가 있었으니 역시 해 아래 새것은 없는 법이다. “자유주의”는 계몽주의 시대에 이미 그 씨앗이 있었지만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확장되어 가던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이르러서 만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자유주의는 이 당시에 “진보”와 “저항”의 가치를 대변한 이론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비스마르크 시대의 독일을 떠 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국가는 너무도 강했다. 온갖 것을 다 법으로 규제했고, 국민에게 항상 이래라 저래라 했던 것이다. 마음 놓고 장사 좀 하려는데 온갖 규제에 묶여서 제대로 하지를 못했고, 그래서 정부 비판 좀 해보려는데 그것도 심하게 제약했던 것. 자유주의는 “개인”혹은 “시민사회”(혹은 시장)에 대한 국가의 불간섭과, 국가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한 비판담론이었다.


정치적인 것의 개념

그런데 이런 “자유주의”가 어떻게 오늘날의 명바기즘으로 이어질 수 있었을까? 그 신비를 일찌감치 간파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칼 슈미트”다. 조금 길지만 그의 비판을 인용해보자.

…이 경우에 <법치>국가, 즉 <私法>국가라는 개념이 지레의 역할을 하며, 사유재산의 개념이 이 지구의(地球儀)의 중심을 구성하며… 물질적․경제적 사물성은 전형적으로 자유주의적인 모든 언설에서 결합하며, 모든 정치의 개념을 변용시켜 버린다. 예컨대 ‘투쟁’이라는 정치적 개념은 자유주의적 사고에 있어서는 경제적 측면에서의 ‘경쟁’으로… 국가는 사회, 즉 통일적인 생산과 교통체계라는 경제적, 기술적 통일체가 되는 것이다… ‘국민’은 변하며, 한편으로는 문화적 관심을 가진 ‘공중’이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종업원과 노동자 또는 소비자 대중이 된다. ‘지배’와 ‘권력’은 정신적 극에서는 ‘선전’과 ‘대중의 암시’로, 경제적 극에서는 ‘통제’가 되는 것이다.
(칼 슈미트, 『정치적인 것의 개념』, 법문사, 1992년, 86쪽)

슈미트가 묘사하는 자유주의, 명바기즘과 흡사하지 않은가? “국민 여러분, 정치에 관심 끄고 생업에 열심히 종사하세요. 아, 물론 법대로 사는 거, 잊지 않으셔야겠죠?” 그러나 우리가 모두 다 알다시피 이런 주장은 결코 정치에 대한 시민사회, 혹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돌아오는 것은 더욱 가혹한 “지배”일 뿐이다. 슈미트는 자유주의 논리가 결코 국가와 정치를 근절하거나 세계를 탈정치화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정치가 사라졌다고 믿는 그 시점에 도래하는 것은 “경제적인 권력적 지위”일 뿐이다. 슈미트는 경제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더욱 가혹한 지배의 극단을 19~20세기의 제국주의에서 발견한다. 자유주의와 제국주의는 쌍둥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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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의 극단
그들이 뻗은 손은 식민지를 수탈하는 손이면서, 근대화의 이름으로 '자유주의'를 수출하는 손이었다.

“문제는 정치야, 이 자유주의자들아!” 그런데 정치가 대체 뭘까? 그것이 뭐길래 이명박은 그토록 정치를 싫어하고, 슈미트는 중요하다고 호통을 치는 걸까? 슈미트에게 있어 정치, 혹은 “정치적인 것”은 “적과 동지의 구별”이었다. 도덕적인 것이 미와 추를 구별하고, 경제적인 것이 수익성과 비수익성을 구별한다면 “정치적인 것”은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것을 그 근본으로 한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인 것의 구별을 다른 구별(도덕, 경제, 예술, etc.)들로부터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적이라고 해서 그가 “악”하거나 “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적은 경쟁상대나 상대방 일반이 아니다. 또 어떤 혐오감 때문에 증오하는 사적인 개인도 아니다. 적이란 항상, 혹은 때에 따라서 현실적으로 ‘투쟁하는’ 인간의 전체, 즉 ‘공적인 적’이며 정치란 그런 전체와 대립하는 것이다.

한 정치집단과 다른 정치집단의 현실적 대립이 있는 곳, 그곳에 정치가 있다. 여기에는 전제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전쟁”이다. 전쟁은 결코 정치의 목표나 목적이 아니며, 그 내용도 아니다. 하지만 전쟁은 현실 가능성으로서 항상 존재하는 전제로서, 이 궁극적인 가능성으로부터 인간의 생활은 특수한 정치적 긴장을 획득하는 것이다. 슈미트는 “전쟁은 있어서는 안 된다”, “인류는 서로의 자유를 인정하며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이 오히려 전쟁을 더욱 잔인한 것으로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테러와의 전쟁”을 보자. “테러리스트”는 미국의 “적”이 아니다. 그들은 평화로운 세계를 위협한 “범죄자”, “악당”들일 뿐이며, 따라서 “절멸해야 할 존재”가 되고 만다. 동지와 적의 대립이 세상에서 없어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없다고 여기는 세계는 훨씬 더 무서운 세계인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에서 공안 탄압과 자유주의가 공존하는 이유이다.

자유주의 대 자유주의

그러므로 슈미트의 논의를 따라간다면 이명박의 공안 탄압에 대해 자유주의적 다원론으로 응수하는 것은 무력하다. 이것은 동전의 앞면이 동전의 뒷면을 반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자유주의는 19세기에 진보 이념이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날 이 “진보적” 형태로서의 자유주의 역시 반복되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이명박 정부를 언론탄압 정부라고 명명할 때 우리는 국가에 대항해서 언론의 자유,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로서 발언하는 것이다. 또한 “여성의 권리”, “노동자의 권리”, “성소수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정체성의 정치 역시 어떤 측면에서는 19세기의 진보적 자유주의의 반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 주장이나 자유의 옹호가 실정적인 대립, 즉 정치적인 것으로 수행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하나의 시민사회 안에서 몫을 분배하는 문제에 그치고 말 것이다. 오히려 이런 자유주의는 지배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 뿐이다. 소수자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좋은 ‘법’을 가진 알흠다운 대한민국. 이것은 이명박의 알흠다운 대한민국(법치국가)과 얼마나 다른 것인가?


문제는 정치야, 그런데...


그런데 바로 앞 절에서 내가 열심히 떠든 내용은 사실은 슈미트에 대한 심각한 오독(誤讀)에 기인한 것이다. 슈미트 자신이 자유주의의 다원론을 비판하는 맥락은 사실 앞 절의 서술과 사뭇 다르다. 그는 자유주의의 다원론이 근본적으로 정치적 통일체여야 할 국가를 흔들고, 강한 국가를 약한 국가로 만들기 때문에 비판한다. 그에게 국가는 최고의 정치적 통일체였다. 그가 자유주의를 비판하고, 동지의 결속과 적에 대한 적대로서의 정치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가 겪은 1차 대전의 충격적인 패배와 그 뒤를 이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혼란스런 정치 환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강력한 통일체로서의 국가를 옹호했던 그는 실제로 나치의 계관법학자로서 일했고, 죽을 때까지 역사상 유래없는 악마적 독재를 옹호했다는 불명예를 안고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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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파울 클레 <새로운 천사>
폭풍우를 뒤로 하고 미래를 바라보는 천사. 텍스트 독해는 텍스트가 가진 '폭풍'에 몸을 싣는 것이다. 그래서, 텍스트가 일으키는 바람을 온 몸으로 느끼는 것, 그것이 아닐까?

그러나 독서란 게 꼭 저자의 생각을 그대로 정리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비판하는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서술된 것을 넘어 저자의 사유를 아예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실험을 감행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슈미트의 “문제는 정치야”라는 호통에 한마디를 더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꼭 국가는 아니야”라고 말이다. 슈미트는 정치적 다원론을 일소하고 타국(적국)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주권적 통일체를 내세우지만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것이 국가 간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고말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갈등의 경우이다.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인 대항 세력이 중대한 사태에 대한 결정을 주체적으로 내릴 만큼 강력한 경우에는 그러한 세력은 바로 정치적 통일체의 새로운 실체가 되는 것이다.”(47쪽) 여기서 슈미트가 말하는 것은 흔히 법에서 “반국가 단체”라고 말하고 있는 그것이다. 그리고 반국가단체와 국가가 벌이는 전쟁을 그는 내란이라고 말한다.

물론 슈미트에게 내란은 매우 불행한 예외 상태겠지만, 우리는 반대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명박의 지배에 맞서서 자유주의만으로 충분한가? 국가에 대항하는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것만으로 이명박의 지배를 넘어설 수 있는가?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국가를 적으로 선포하는 “정치”, 혹은 “내란”이 아닐까? 그리하여 슈미트가 정치적인 것의 전제로 내세운 “전쟁”이라는 예외 상태를 “혁명”이라는 예외 상태로 대치할 수는 없는가?

그런 질문 속에서 우리는 ‘전쟁’ 대신 “혁명은 현실 가능성으로서 항상 존재하는 전제로서, 이 궁극적인 가능성으로부터 인간의 생활은 특수한 정치적 긴장을 획득하는 것이다.”(cf. 43쪽)라고 바꾸어 써 볼 수 있다. 국가와 개인, 국가와 여러 단체를 매개하는 ‘시민사회’나 ‘법’을 동력으로 하는 초월적인 자유주의의 사회운동과 혁명을 전제로 하여 국가와의 분명한 적대를 구성하는 내재적인 사회운동. 나는 후자의 손을 들어 주고 싶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더해야 한다. “동지는 누구인가?” 슈미트에게 있어 동지는 적 앞에서 결정된다. 동지의 성격은 불분명하거나, 아니면 굳이 말해질 필요가 없는 존재다. 어차피 주권적 통일체가 될 테니까. 하지만 과연 주권적 통일체인 국가에 맞서는 적이 반드시 또 하나의 주권적 통일체여야만 할까? 오히려 그들은 국가와는 다른, 즉 주권적 통일체와는 다른 성격을 가진 집단일 수는 없는 걸까? 자유주의의 탈정치성도, 그렇다고 국가의 주권도 받아들일 수 없는, 반-주권적 정치주체를 우리의 “동지”로 사유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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