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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10대 정책뉴스, 북핵 실타래 푼 9.19 공동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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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정책뉴스' ⑧] 북핵 실타래 푼 '9·19 공동성명'
한국 주도로 핵 없는 '한반도 평화 시대' 열어야
“북핵 6자회담 타결”
지난 9월 19일 베이징에서 낭보가 들려왔다.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있던 국민들의 눈과 귀는 온통 언론에 집중됐다. 전 세계 언론들도 ‘북한 완전한 핵 포기 결정, 미국 대북 불가침 약속’이라는 내용을 일제히 보도했다.

2002년 10월 미국이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핵프로그램 의혹을 제기하면서 시작된 북핵 위기가 35개월 간의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된 것이다. 특히 제4차 6자회담은 북핵문제 해결이란 대전제 못지않게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목소리가 반영된 회담이라는 점에서 더 빛을 발했다.

우리측 수석대표인 송민순 외교통상부 차관보는 회담 타결 후 “근세 100년 동안 우리 입장이 반영된 역사는 없었다”며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를 우리를 위한 역사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길을 연 회담”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북핵문제는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6자회담은 2004년 6월에 개최된 3차 6자회담 이후 전혀 진전되지 못하고 있었고 오히려 조문 위기, 탈북자 대량입국 사태 등으로 남북관계는 꼬여만 갔다. 그런 와중에 올 1월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북한을 향해 ‘폭정의 전초기지’라며 공격했고 북한은 2월 10일 ‘핵보유’ 선언으로 응수했다. 이어 5월에는 영변 원자로에서 폐연료봉 8000개를 인출했다고 발표했다.

"거봐, 북핵협상이 성공했다네" 6자회담 타결 소식에 기쁨을 나누는 노인들.


북한의 이러한 발언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으로 "더 이상 못 참는다. 북한을 안보리에 회부하라“는 미국내 강경파들에게 힘을 실어줬고 ‘한반도 제2의 전쟁 가능성’이 공공연하게 유포될 만큼 살벌한 상황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정부는 2004년 11월 노무현 대통령의 ‘LA발언’에 입각한 ‘북핵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스탠스에는 변화가 없었고 오히려 외교적 창의력을 기반으로 하는 전방위 외교를 적극적으로 펼쳐 나갔다.

북핵문제는 북·미 간의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에 살고 있는 국민 전체의 생사가 달린 문제인 만큼 우리가 주도적 역할을 감당해야 하며, 평화적이고 외교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노 대통령의 입장은 단호했다.

북 설득과 미 강경파 진정에 외교적 역량 총동원

정부는 북한을 회담 테이블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한 설득에 나서는 한편 북한을 안보리에 회부하겠다는 강경파들의 주장을 누그러뜨리는데 외교적 역량을 총동원했다.

우리측 수석대표인 송민순 차관보는 “벼랑끝 전술은 다 같이 떨어질 수도 있지만 혼자 떨어질 수 도 있다”며 북한의 전략적 결단을 촉구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길을 걷다 지쳤다고 해서 택시로 갈아타선 안된다”며 유엔안보리 회부 등 이른바 ‘다른 정책’을 차단하고 나섰다.

하지만 한반도 핵문제를 둘러싼 북·미 간의 긴장 국면이 좀처럼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 당시 부시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을 ‘위험한 사람’ ‘폭군’ 으로,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부시 대통령을 ‘불망나니’ ‘도덕적 미숙아’ 등으로 지칭하며 설전을 펼친 것은 양측의 갈등국면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댜오위타이에서 열린 6개국 수석대표.대사 참석 만찬에서 남북한 수석대표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편 제3차 6자회담 개최후 1년이 되는 올 6월이 되자 6자회담에 대한 회의론과 함께 참여정부 외교정책에 대한 불신의 화살들이 무섭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이를 진화하기 위해 노무현 대통령이 나섰다. 6월 11일 워싱턴을 방문,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지 부시 대통령과 마주 앉았다. 두 정상은 회담에서 한·미 동맹의 공고함과 북핵의 평화적 해결원칙을 재확인하고 6자회담 재개를 위한 외교적 노력을 더욱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 ‘미스터 김정일’이란 호칭을 사용, 북한을 주권 국가로 인정한다는 점을 나타내 북한이 회담에 복귀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

정부는 이와 비슷한 시기에 북핵 해결을 위한 또 다른 채널을 가동했다.  6·15 5주년 행사기간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북한에 특사로 파견했다. 정 장관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전격면담(6.17)에서 전력 200만 Kw 직접송전을 골자로 하는 ‘중대한 제안’을 설명했고 김 위원장으로부터 ‘7월중 복귀용의’라는 답변을 받아냈다. 용도폐기의 기로에 놓여있던 6자회담이 다시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결국 대북 송전이라는 중대제안과 의장국인 중국과 함께 북·미 양국을 오가며 협상의 간격을 메워온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중재역할이 효력을 발휘해 제3차 회담이 열린 이후 13개월 만인 6월 26일 오전 10시 베이징 다오위타이에서 제4차 6자회담이 개막됐다.

제4차 6자회담은 ‘이번에도 성과를 내지 못하면 판이 깨질지 모른다’는 위기감과 절박함 속에서 열린 만큼 참가국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남북 대표단은 급진전된 남북 관계로 형성된 신뢰를 바탕으로 회담 기간 동안 수시 양자접촉을 갖고 의견을 교환했다. 북·미 간에 이견이 있는 6자회담에서의 한국의 역할이 조명을 받는 순간이었다. 우리 정부는 미국의 안과 북한의 안 가운데 합리적인 부분을 조합한 중재안을 만들어 주변국 설득에 나섰다.

쉼없는 물밑작업으로 미국 양보 이끌어 내 공동성명 탄생

그러나 7월26일 시작된 제4차 6자회담은 결국 북한의 평화적 핵이용권과 경수로 문제에 막혀 8월 7일 ‘휴회’에 들어갔다. 송 차관보는 공동문건 내용을 놓고 북·미 간 이견 차로 진통을 겪어야했던 아쉬움을 “우리가 이번에 과일을 담으려고 광주리를 준비해왔는데 과일도 상당히 모았지만 광주리에 담을 수 없는 물까지 담으려고 과욕을 부린 것이 아닌가 ”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정부는 평양 지도부의 결단을 위해 서울, 베이징, 워싱턴, 평양을 찾아 쉼없는 물밑작업을 진행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8·15 행사 때 서울을 방문한 북측 단장 등 북한 고위대표단에게 정부의 입장을 지속적으로 설명했고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중국, 미국을 방문해 북·미간 핵심 쟁점인 북한의 핵 평화적 이용권에 대한 미국측의 양보를 협의했다.

이 결과 9월 13일 2단계 회담이 다시 시작됐다. 2단계 회의는 초반부터 경수로 문제로 북·미가 격돌했고 북한 대변인은 미측에  "경수로를 줄테면 주고 말테면 말라"고 최후 통첩성 성명을 발표하면서 회담이 결렬 위기까지 몰렸다. 그러나 이번 회담 결렬은 파국이라는데 북·미가 인식을 같이하면서 결국 6개 참가국들은 북핵 해결의 목표와 원칙을 담은 9·19 공동성명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공동성명은 회담의 목표와 지향점을 담은 대원칙 선언문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많다.

북한측 수석대표인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은 “6자회담은 이미 큰 방향이 명확해졌으며 공동성명은 6자가 끊임없이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하는 등대와 같다”고 말했다.
지난 11월 9일 베이징에서 공동성명의 구체적 이행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제5차 1단계 6자회담이 재개됐지만 북한이 돌연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 문제를 들고 나와 북·미 간 긴장의 파고가 높아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정부는 북·미 간 달러 위조 공방에도 불구하고 차기 6자회담 개최를 위한 관련국 간 물밑작업을 꾸준히 이어나가고 있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도 6자회담 개최 전망과 관련, "낙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직 기회는 있으며 우리는 조건 없이 회담에 복귀할 준비가 돼 있다"며 “회담 복귀는 북이 세계에 주는 새해 선물”이 될 것이라며 내년 초 6자회담 개최를 희망했다.

당장은 금융제재라는 암초가 있지만 이는 북·미 간 대화를 통해 순차적으로 풀어나가야 하는 문제인 만큼 북핵문제의 실타래를 풀고 2단계 5차회담 개최 등을 논의하기 위한 정부의 발걸음은 연말연시에도 분주히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최강 (ckang@news.go.kr) | 등록일 : 2005.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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