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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투]한국이 국제 노동계에서 차지하는 위치

   

세모에 생각하는 노동조합의 국제사업

한국이 국제 노동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독특하다. 식민지와 내전을 경험했으며, 급속한 산업화와 군사독재를 겪었다. 그 과정에서 한국 경제는 주도적인 신흥공업국의 위치를 차지면서 세계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깊숙이 편입되었다. 무엇보다 경제활동인구에서 노동자계급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히 높아졌다.

이것은 한국에서 노동조합운동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구조적 환경이 되었다. 그리고 급기야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경제는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다. 2차 대전 이후 독립한 식민지 국가 가운데 경제적 발전, 정치적 민주주의, 노동운동의 성장 모두에 성공한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연결고리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은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독재국가에서 민주국가로, 국가가 통제하는 취약한 노동운동을 가진 나라에서 정치적으로 대단히 역동적인 민주적 노동운동이 성장한 나라로 전환하였다. 한마디로 한국의 노동운동은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의 경험과 동시에 선진국의 환경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국제 노동계에서 선진국 노동운동과 개발도상국 노동운동의 연결고리(link)라는 역사적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한국 노동운동이 한국 사회의 정치적 민주화에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민주화 항쟁을 촉발시키는 데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 역사적 한계는 이후의 민주화 이행 과정에서 ‘재야와 보수야당’으로 대변되는 중간계급이 주도권을 쥐면서 노동운동의 영향력을 제한하는 족쇄로 작용했다.

이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독자적 모색이 2000년 1월에 이르러서야 민주노동당의 출범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이것은 민주화 투쟁은 물론 그 이행 과정을 주도하면서 집권세력의 일부가 된 남아프리카나 브라질의 노동운동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경험은 아직 정치적 민주화에 성공하지 못한 개발도상국 노동운동에 소중한 교훈을 주고 있다. 권위주의 정권과 노동을 배제한 급속한 경제발전이라는 악조건 속에서 주요한 사회세력으로 자리잡은 한국 노동운동의 경험은 비슷한 조건에 있는 개도국 노동운동에 많은 함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노동운동은 지난한 투쟁과 성장의 과정에서 동원(mobilization) 전략과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 전략을 구사한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1세계 노동운동과 3세계 노동운동의 다리 역할이라는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적 임무의 중요성을 읽을 수 있다.

아시아 노동운동에 관심을

한국 노동운동에 대한 기대는 국제적으로 대단히 높다. 특히 우리나라가 위치한 아시아 태평양 지역 노동운동들이 한국 노동운동에 거는 기대는 우리의 상상을 넘는 수준이다.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대만, 홍콩, 네팔 등 아시아 각국의 많은 노조간부들이 한국의 노조원들을 만나길 원하며, 한국의 경험에서 배우고 싶어 한다. 조직·교육·교섭 등 노조의 일상 활동에서부터 산별노조 건설, 그리고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에 이르기까지 한국 노동운동이 지나온 발자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노동운동에게 좋은 참고서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한국 노동운동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다. 솔직히 말하면,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축적된 부에서 기인하는 경제적 우월감을 뺀다면, 우리나라 노조원들은 물론 간부들조차 아태 지역 차원의 국제연대와 관련해서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는 게 현실이다. 특히, 현대, 대우, 기아, 삼성 등 한국의 다국적기업들이 이 지역에서 차지하는 경제적 비중을 감안한다면, 지역노동운동에 대한 한국 노동운동의 관심과 기여는 이제 걸음마 단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국 정부가 참가하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공동체(APEC)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3 회담을 비롯해 각종 경제회담들이 지역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데도 한국 노동운동은 별다른 역할을 못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아시아통화기금(AMF) 창설을 비롯해 지역 차원에서 이뤄지는 각종 경제적 담론의 논의 과정에 대해서는 대안을 제시하기는커녕 관심조차 없다.

1987년 이후 한국의 노동자들이 이뤄온 수많은 성과들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한국 노동운동을 지도적 위치에 올려놓았다. 지역의 많은 노동조합운동이 한국 노동운동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한국 노동운동의 한 걸음이 단순히 한국만의 그것인 시절은 지났다. 18년에 걸친 지난한 투쟁의 성과와 세계화의 확산에 따라 한국 노동운동은 이제 아태 지역은 물론 세계의 노동운동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국제자유노련 아태지역본부(ICFTU-APRO)에의 적극적인 개입과 개혁 요구를 비롯해 지역 노동운동과의 연대 틀을 만들려는 노력을 시급히 전개할 시점을 맞이한 것이다.

한편으로 중국이 미국에 맞먹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면서 한-중 노동운동 교류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아직은 초보적인 수준인 중국총공회와 한국노총간 정기교류의 형식과 내용이 한 단계 발전함과 동시에 민주노총 역시 중국총공회와의 관계를 트는데 관심을 보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일자유무역협정 등 한일 사이에 발생하는 여러 현안과 관련하여 한국노총, 민주노총, 일본노총(連合) 사이에 3자 협의 테이블을 설치하는 것도 적극 고민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국제사업에 더 많은 자원 투자해야

모든 일이 그렇듯이 노동조합운동의 국제사업 역시 올바른 사업 내용과 더불어 조직적 결의와 재정적 뒷받침이 뒤따라야 제대로 이뤄질 수 있다. 우선 대중운동으로서의 노동운동에 걸맞은 국제사업의 내용과 형식을 마련해야 한다. 국제사업은 이데올로기나 정파적 편향을 배제하고 폭넓은 연대를 조직하려는 관점이 중요한데, 이것은 조직, 교섭, 교육, 선전, 홍보 등 노동조합 일상 활동의 활성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 동안 한국의 노동조합들이 전개한 국제사업을 돌아보면, 여행성 회의 참가의 성격이 짙거나 아니면 특정 이데올로기 성향을 가진 회의 개최에 편중된 측면이 없지 않다. 조직, 교섭, 교육 같은 노동조합 일상 활동, 그리고 산별노조 건설과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경험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국제 사업을 통해 다른 나라의 모범 사례를 우리가 배우고, 우리의 모범 사례를 다른 나라에 알리는 기회를 넓혀야 하며, 나아가 공식 노동조합 조직 간의 교류를 강화함으로써 국제 사회에서의 정치적 신뢰를 확보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예산 배정을 확대함으로써 관련 경비를 외국에 의존하는 관행을 점차 줄여나가면서 한국 노동운동의 국제적 기대에 부응하는 자주적이고 역동적인 국제연대를 전개해야 할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노동조합운동은 인적 자원의 부족으로 고통 받고 있다. 지도부와 간부, 그리고 활동가들의 역량이 날로 고갈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시대는 빠르게 변해 가는데 노동운동가들의 관념과 활동방식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노동운동과 사회 발전 사이의 간극이 점점 커지고 있다.

이런 문제점은 노동조합의 국제사업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양대노총 모두 국제사업 담당자는 한두명에 불과하다. 산하 가맹조직들 가운데 담당자를 둔 조직은 몇개 안 된다. 많은 산별 조직들이 작은 조직 규모와 재정 부담을 이유로 국제 담당자를 두지 못하고 있다. 사람이 없는데 사업이 잘 될 수 없다.

‘세계 최고의 전투적 노동운동’을 운운해 왔지만, 세계 수준은커녕 기초 수준의 국제 인력을 키우려는 투자에 인색했다. 이제는 발상을 전환하고 조직의 사업 작풍을 변화시켜야 한다. 노동조합운동의 모든 사업 영역에서 엄청난 속도로 바뀌는 시대적 상황에 발맞추려는 노력을 전개해야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국제사업에 대한 기존의 인식과 태도를 바꾸고, 사람과 자원의 투자를 배가해야 할 것이다.

절실한 양대 노총의 연대와 공조

한편으로 국제사업의 활성화를 위해 노동조합운동은 국제노동재단(KOILAF)과 한국노동교육원(KLEI) 등 정부 산하에 있는 노동 관련 기구들과의 네트워크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이와 더불어 국제 사업을 위한 재정 확보와 관련해서 정부개발원조(ODA)를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다. 정부는 1991년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설립하고 ‘개발원조’라는 명목으로 개발도상국의 경제 사회 발전을 지원하는 활동을 해오고 있다. 여기에 노동조합이 적극 개입하여 자금의 지출을 감시하고 노동운동의 국제사업을 위한 재원을 확보하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양대노총의 연대와 공조도 대단히 중요하다. 앞서 지적했지만, 안타깝게도 국제사업 차원에서 양대노총의 협력은 아직 활발한 수준이 아니다. 국제노동기구(ILO)나 국제자유노련(ICFTU) 총회를 위한 공동 대응을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 국제산별노련(GUFs)과 관련해서도 국제 상급단체는 같이 하나, 국내 상급단체는 달리하는 산별 조직들 사이의 교류와 협력도 한층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국제사업을 둘러싼 양대노총 조직들 사이의 과당 경쟁이나 과도한 견제를 제어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국제사업에서 선의의 경쟁을 격려하고 공동 사안에서는 상호 협력하는 노동운동 내부의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향한 작은 실천들이 새해에는 꼭 이뤄져 한국노동조합이 국제노동운동계에서 자기 역할을 다할 수 있기를 한해가 저무는 세모(歲暮)에 소망해본다.
윤효원 국제담당 객원기자 
2005-12-23 오후 3:58:10  입력    ⓒ매일노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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