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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4/06
    정신현상학 서론 §12
    ou_topia
  2. 2010/04/05
    정신현상학 서론 §11
    ou_topia
  3. 2010/04/04
    정신현상학 서론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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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0/04/03
    정신현상학 서론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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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0/04/02
    정신현상학 서론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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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0/04/01
    정신현상학 서론 §7
    ou_topia
  7. 2010/03/31
    정신현상학 서론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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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0/03/30
    정신현상학 서론 §2
    ou_topia
  9. 2010/03/30
    정신현상학 서론 §5
    ou_topia
  10. 2010/03/29
    정신현상학 서론 §4
    ou_topia

정신현상학 서론 §12

(§12) 지야 <네 잣대와 내 잣대는 틀리다>라고 하고, 아니 법리와 같이 눈부신 논증을 가지고 위와 같은 분절과 그 전제를 논할 수야 있겠지만 그러나 [1]  우리의 대상이 되는 지의 본질은 우리가 이런 분절논리에 걸리지 않게 한다. 조금만 더 파헤쳐보면 의식은 자신과 씨름 하는 가운데 매번 필요한 잣대들을 스스로 마련한다는 사실이 금방 드러난다 [2]. 그렇기 때문에 이 조사는 의식이 자기자신을 자기와 비교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진리와 지간의 구별은 의식 내부에서 벌어지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의식 내부를 살펴보면 한편으로 뭔가가 타자에 대해서 있음으로써 어떤 형식이든지 의식 그 자체가 지로 향하는 규정성을[3] 지니게 되며, 동시에 이 타자가 의식에 대하여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관계 밖에서도 존재하는 것으로, 즉 불변하는 즉자적인 것으로[4] 의식에 나타나기 때문에 의식은 진리로 뻗어가는 방향성이[5] 있다. 그래서 의식이 자기 내부에 있는 것 중에서 불변하는 즉자적인 것, 달리 표현하면 참다운 것이라고 선언하고 또 그렇게 드러난 것에서[6] 우리는 의식이 스스로 내세운 척도를 얻고 이 척도를 바탕으로 하여 그의 지를 재보는 것이다. 여기서 지를 개념이라고 부르고 본질 또는 참다운 것을 존재자 또는 대상이라고 부른다면 진위를 가르는 우리가 하는 일이란 단지 개념이 대상과 일치하는지 그냥 바라보기만[7] 하는 것이다. 반대로 대상의 본질 또는 불변하는 즉작적인 것을  개념이라 하고 타자에 대해서 있는 대상을 말 그대로[8], 달리 표현하면 의식에 대해서 있는 대상이라는 의미로서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이때 진위를 가르는데 우리가 하는 일이란 역시 단지 대상이 그의 개념과 일치하는지 그냥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양쪽이 다 똑같다는 것은 누구나 볼 수 있겠지만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양대 요소가[9], 이것을 개념과 대상으로 표현하든 아니면 대타존재니[10]  즉자존재니[11] 하는 것들로 표현하든, 하여간 양대 요소 모두 우리가 조사하고자 하는 지 그 자체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조사가 끝날 때까지 견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척도를 마련할 필요가 없고, 우리에게 언뜻 떠오르는 착안이나 생각을 조사에 적용할 필요도 없다. 이런 것들을 다 잘라 내야만[12] 비로소 우리는 사태 그 자체의 운동을 허심탄회한 [13]  마음가짐으로 관찰하는 경지에 들어서서 사태를 온전히 인식하게 된다.



[1] 원문 . <대화체 불변화사>로서 는 기대에 어긋한 것을 표현하기도 한다.

[2] 원문 ßstab an ihm selbst.> 정말 머리 아픈 문장에다 머리 아픈 전치사 이다. 위 문장은 사실, 문법상 틀린 문장이다. 은 여기서 이 주어인 을 가리키기 때문에[재귀하기 때문에] 사실 가 와야 한다. 그러면 ßstab an sich selbt.>가 된다. 이렇게 하면 당시에 흔히 쓰이던 하고 혼동될 우려가 있어서 문법상 틀린 표현을 헤겔이 쓴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무슨 말을 하려고 헤겔은 이렇게 문법상의 오류를 무릅쓰고 이렇게 표현했을까? 위 문장은 간단하게 ßstab.>(의식은 스스로 척도를 마련한다.> 이러면 충분하지 않았겠는가? 아니면 혹시, 문법상 틀린 문장이 사태의 실재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그렇다면 문법상 틀린 문장이 올바른 문장이고 또 문법상에도 맞는 문장이 아니겠는가? 정말 그렇다면 위 문장의 주어인 <의식>이 재귀의 대상으로서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사이 움직이고 이동해서 그전과 달라져야 하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주어인 <의식>은 자기소외(Sebstentfremdung) 운동을 하는 것일까. 그럼 운동하는 것을 어떻게 주어가 고정되어 있는 한 문장에 담을 수가 있단 말인가. 빙글 돌게 머리가 아프지만 참고 함께 춤추면서 이 문장이 무슨 춤을 추는지 살펴보자. 의식이 추는 이 춤을 헤겔이 이 문단에서 전개하는 것 같다. 일단 이라는 전치사만 살펴보고 넘어가자.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an ihn?> 할 수도 있고 ihm nicht einfach?> 할 수도 있다.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익히 알고 있듯이 <접촉>을 표현하는 전치사다. 그래서 전자는 교제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편지를 쓴다는 의미가 있고, 반면 후자는 돌아오는 것을 바라지 않고 그에게 마음을 쏟는 편지를 쓴다는 의미가 있다. (Harald Weinrich, 2007, 622f 참조.) 그래서 여기서 에는 <다리를 놓다/중개하다/매개하다>라는 의미가 묻어있다. 이렇게 보면 위의 추측, 즉 주어로 사용된 <의식>이 자기소외운동을 통해서 자기와 멀어지고 이렇게 멀어진 자기와 다시 소통한다는 추측이 그다지 틀린 추측이 아닌 것 같다. 은 또 <어떤 것의 표면에>라는 의미가 있는데 하면 표면적으로 붓을 들고서 그림을 그린 때는 언제였나 물어보는 질문이다. 반면 하면 목적의식적 행위의 대상으로서의 그림을 언제 완성했느냐의 의미가 있다. 이런 자기소외적인 관계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프로세스를 <조금만 더 파헤쳐보면 의식은 자신과 씨름 하는 가운데 매번 필요한 잣대들을 스스로 마련한다는 사실이 금방 드러나는데>라고 옮겨보았다.

[3] 원문 는 나중에 따로 고찰해 보겠다, 여기서는 이정도로 번역하고 넘어가면 될 것 같다.

[4] an sich

[5] 원문 . 여기서도 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아주 쉽게 물리적인 돌리는 힘으로 이해하고 <어디로 향하게 하는 힘>이라는 의미로 옮겼다.

[6] 원문 . 역자주 참조

[7] 원문 . 정말 바라보기만 하는지 강제하는지 나중에 엄밀하게 살펴봐야 할 문제다.

[8] 원문 .

[9] 원문

[10] 원문 üreinanderessein>

[11] 원문

[12] 원문 . 역자는 훗셀의 의 의미에 주목한 것 같다.

[13] 원문 ür sich>. ür sich>는 자기자신을 완전히 전개하고 정신으로 승화된 것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지를 관조하는 우리가 취해서 하는 마음가짐(Verhaltungsweise)에 더 주목하는 것 같다. 이 추측을 뒷받침하는 것은 헤겔이 대신에 를 사용한데 있다. 그래서 ür sich>을 옮기는데 <무엇> 초점을 맞추지 않고 <어떻게> 해야 의식을 온전히 인식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의식이란 운동하는 것이라는 면을 부각시키고, 그 운동을 따라 잡는 우리의 마음가짐을 조명해서 <허심탄회>란 낱말을 사용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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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론 §11

(§11) 우리가[1] 이와 같이 준비하고 난 다음[2] 지의 진리를 조사하는 일은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의식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또 지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즉자적으로[3] 있는 것이 무엇인지[4] 조사하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태는 그리 간단하지 않고, 또 우리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5] 즉, 이 조사에서는 [우리가 잣대로 사용하려고 하는 진리로서의] 즉자적인 것이 우리의 대상, 즉 우리에 대해서 존재하는 것이[6]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의 조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즉자는 [지에 대한 즉자가 아니라] 우리에 대하여 있는 지의 모습이다[7]. 우리가 지의 본질이라고[8] 주장하는 것이 지의 진리이기보다는 어디까지나  그 본질에 관한 우리의 지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9] 이러면 본질 또는 척도는 [지를 관조하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 되므로 이 잣대와 비교되고 또 이 비교에 의해 진위여부가 결정되는 대상으로서의 지는 그런 잣대를 꼭 인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1] 누가 조사를 진행하는가가 중요한 문제이다. 자연적 의식을 비판하는 우리인가 아니면 자연적 의식이 스스로 조사를 진행하는가의 문제다.  

[2] 원문

[3] 원문

[4] 원문 . 이 질문은 §1 같은 것처럼 보인다. 역자는 당시 이것을 소크라테스의 질문방식 의 종속절로 처리하고 넘어갔는데 여기에 와서 보니 철학이 해야 하는 일, 즉 를 실지로 인식하는 일이 여기의 를 알아보는 일을 훨씬 더 뛰어넘는 일로 드러난다. 숙고해야 문제가 되었다.

[5] 원문 . 이하 토론은 <정황적 대인 논증>(argumentum ad hominem)을 사용하는 법적논쟁과 유사하다. <정황적 對人 논증>으로는 예를 들어 <너도 역시>(tu quoque)라는 법리가 있는데 <너는 그러면서 나는 왜 못해>라는 정황에 기대어 상대방에게 논박하는 것이다.

[6] fuer uns

[7] 원문 ür uns>. 여기서 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모습>으로 옮겼다.

[8] 원문

[9] 지를 관조하는 우리의 지나 자연적인 인식의 지나 법리에 입각하여 보면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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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론 §10

(§10) 이렇게 꽉 막힌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먼저 진리와 지에 대한 추상적인 규정이, 추상적이지만, [자연적인] 의식자체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상기해보면 위의 모순의 실상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고 또한 그 모순을 째내는 일에서도 그 모순만을 도려내는 정확성이 주어질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1], 의식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뭔가를 구별함과 동시에 그것과 관계한다. 이 관계는 뭔가가 의식에 대하여[2] 존재한다는 식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런 의식 행위가 다다르는 한계[3], 달리 표현하면 [뭔가를 규정하는데 있어서] [단지] 의식에 대하여 존재하는 뭔가를 규정하는 것이 바로 지다. 그런데 우리는 뭔가를 이야기 할 때 그 뭔가가 타자에 대해서 존재하는 것과는 따로 그 자체대로 존재하는 것을[4] 구별한다. 이렇게 자체대로 존재하는 것에서도 지와 관계하는 측면이 있겠는데, 이 측면도 [의식의 행위에서와 같이] 지로부터 구별되어서 자체대로 존재하는 것과 지간의 관계 밖에서도 존재하는 것으로 명시되어[5] 있다. 이처럼 그 자체로 있는 것의 언저리에[6] 진리라는 이름표가 붙어있다. 이와 같은 규정이 실지로 함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일은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대와 올라와 운동하는 지가 우리의 대상이므로 지를 서술하는 것은 일단 그의 규정을 [아무런 양념을 치지 않고][7] 우리에게 나타나 있는 그대로 받아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틀림이 없어야 하는 것은[8] 기술한 바와 같이 [지를 눈여겨보는] 우리에 의해서 파악된 지에 대한 규정이 지에 의해서 스스로 우리 앞에 나타나 있는 규정과 일치해야 하는 것이다.



[1] 원문 <nämlich>. §2에서 지적되었던 내용, 즉 의식은 의식 이편과 저편을 구분하여 절대자는 의식 저편에 있는다는 것.

[2] 원문 ür dasselbe>. <의식>이라고 번역해 놓았지만, 뭔가 걸려 시원하지 않다. 그냥 이라고 하지 않고 무엇 때문에 ür dasselbe>라고 했는가. 전문용어로 사용되었다면 그냥 이라고 하는 것보다 더 내포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8 ür sich sein Begriff.> ür sich>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가? 거기서 ür sich>, 명확하지는 못했지만, <행위>(Akt)라고 어렴풋이 파악하고 지나갔는데, ür dasselbe>도 의식의 행위면에 주목하고 있는 것인가. 의식이 <관계하다>로 재현된 다음 문장을 보면 의식의 행위면에 주목하고 있다는 추측이 맞는 것 같다.

[3] 원문 . 여기서 그리스어 (둘레/테두리를 만들다) 의미로 옮겨서 의식행위의 한계성을 주장하는 자연적인 의식의 발상을 담음.

[4] 원문

[5] 원문

[6] 원문

[7] 원문 . 적당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아서 [양념을 치지않고]라고 우선 옮겨놓았다. 아무튼 생으로 먹는다는 이야기다.

[8] 원문 을 이렇게 풀어 옮겨 보았다. 독어를 번역하는데 있어서 여기의 과 같은 <대화에 쓰이는 불변화사>(Dialogpartikel)가 애로사항이 된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이 함축하는 대화를 전개해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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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론 §9

(§9) 지가 이렇게 앞으로 끌려 나아가는 양식과 그 필연성에 관하여 예비적이고 일반적인 차원에서 할말을 다한 마당에, 서술의 전개방법에 관해서도 미리 몇 가지 사항을 상기시키는 것이 쓸모 있을 것 같다.

학문이 지와 다투는 일은 보류하고 무대에 등장해서 운동하는 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취지아래 이루어지는 이 서술은 점진적으로 나타나는 지에 대한 학문이 취하는 일정한 태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때 학문이 취하는 태도는 인식의 실재성을 조사하고 그의 진위를 가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뭔가를 전제하고 이를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 척도를 마련하지 않고서는 이와 같은 서술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진위를 가르는 조사는 척도로 삼은 잣대를 조사 대상에 갖다 대어 재보는 것으로서 조사 대상과 잣대가 서로 맞아떨어지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따라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척도라는 것은 본질 또는 불변하는 그 무엇으로[1] 여겨지기 때문에 학문이 척도가 된다면 학문이 또한 그런 본질 또는 불변하는 그 무엇이 되겠다. 그러나 학문이 갓 등장하는 이 마당에선 학문이든 그 무엇이든지 간에 아무것도 본질이나 불변하는 그 무엇으로 정당화될 수가 없다. 사태가 이렇게 본질 또는 불변하는 그 무엇을 기준으로 택할 수가 없다면 허실을 가르는 조사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그럴듯한 질문이다.



[1] 본문 . <본질>이라고만 하지 않고 머리 아프게 라는 말을 삽입했는가? 살펴보자. Wesen(본질)은 우선 고대 그리스어 ousia의 번역이다. Ousia의 번역 역사를 보면 라틴어로 substantia 또는 essentia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ousia가 갖는 바탕에 깔린 것(hypokeimenon, 아리스토텔레스 범주론 참조.)이라는 의미와 우리가 무엇을 무엇으로 알아보는데 그 무엇을 그 무엇으로 알아보는 속성으로서의 근거 (to ti en einai: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7(Z)에서 토론됨.)라는 의미가 전자는 substantia, 후자는 essentia로 옮겨진 것이다. 독일에서는 라틴어 substantia essentia의 변형인 Substanz Essenz라는 낱말이 사용되기도 하지만 지금은 지배적으로 이라는 낱말이 ousia의 번역으로 사용된다. 이라는 동사의 어원인 인도게르만 낱말 <머무르다> (Verweilen), <어디에 입주해 있다, 살다>(wohnen)라는 의미가 있다. 은 이런 의미로 18세기까지 사용되어 오다가 이라는 동사로 대치되고 이 지녔던 뜻은 이라는 동사가 물려받게 된다. 그래서 은 그리스어 ousia 또는 라틴어 substantia essentia보다 훨씬 더 동사적인 의미, 즉 능동적인 의미를 갖고 있고 이라는 동사의 명사형 이라는 동사가 갖는 의미를 물려받아 <한때 존재하다> <한때 어디에 입주하여 존재하다>라는 의미가 강하고 <영원히 그렇고 또 지금 그렇다>라는 의미는 뒷편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그리고 의 개념은 바탕에 깔려있는 것 이라는 의미와 함께 자연이 부여한 속성이라는 의미로 동시에 사용된다 (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 Bd. 12, 622쪽 참조). 본문의 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를 형식적으로 (peri autou/수박겉핥기와 같이 사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사물 주변을 맴돌면서) 보면 본래적인 속성이라는 혹은 자연이 부여한 속성이라는 의미의 auto>와 같은 의미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7 4 1029b11 이하 참조). 그리고 잣대는 변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불변하는 그 무엇>으로 옮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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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론 §8

(§8) 지에게는 필연적으로 그 도정에서 이정표와 같이 달려있는 일련의 형태를 모두 통과해야 하는 끌려나아감이[1] 있을 뿐만 아니라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그 목적지도 이미 요지부동하게 정해져 있다. 이런 목표가 되는 지점은 지가 자신을 딛고 뛰어넘어[2]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필요가 없는 지점, 달리 표현하면 지가 자기자신을 완전히 발견하는 지점, 즉 개념이 대상과 같아지고 대상이 개념과 같아지는 지점이다. 그래서 이 목표를 향한 끌려나아감은 막을 수가 없고, 목표에 도달하기 이전의 그 어떤 단계에서도 만족을 느낄 수가 없다. 자연의 울타리에 갇혀 살아가는 것들은, 자신의 힘으로, 그 울타리에 그저 붙들려 존재하는 존재양식에서 한치도 떨어져 나올 수 없고 단지 타자에 의해서 그런 존재양식의 울타리 밖으로 내몰리게 되는데, 이렇게 타자에게 붙들려 밖으로 질질 끌려가면 찢겨 죽음을 맞이한다. 반면 의식이란 스스로 자신을 이런 울타리 밖으로 붙들어 내는 것으로서[3], 의식하는 순간 붙들려 있는 상태를 초월하는 것이며, 그리고 붙들려 있는 상태가 의식에 속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자신을 뛰어 넘는 것이다. 의식에게는 의식 안에 있는 개별적인 것과[4] 동시에 의식의 뒤면이[5], 비록 의식의 이런 관계를 공간화하여 의식뒷면을 개별적인 것과 같은 옹졸한 것 옆에 나란히 자리잡게 할지언정,  하여간 의식뒷면의 것이 설정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의식은 이와 같은 옹졸한 만족감을 망치는 폭력을[6] 자기 자신으로부터 당한다. 이와 같은 자신을 향한 폭력을 어렴풋이 느끼는 의식은 불안에 쌓인 나머지 의식뒷면에 있는 진리로 향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서 상실될 위험에 처해 있는 옹졸한 만족을 건져내보려고 애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번 불안에 빠진 의식은 편안을 찾을 수가 없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흘러가는 데로 살아가는 나태함에 머물러 있으려고 해도, 아니면 모든 것을 긍정하고 만물이 그 나름대로 적절하다고 단언하는 감상주의라는 성을 쌓고 거기서 은신해도 편안을 찾을 수가 없다. 사상 앞에 무사상은 자취를 감추고, 쉬지 않고 운동하는[7] 사상이 나태함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그리고 바로 나름대로밖에 적절하지 않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보는 이성이 감상주의적 긍정에 폭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혹은 또 의식 뒷면에 있는 진리를 보고 겁에 질린 나머지 의식은 자기가 진리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은 그럴듯한 생각으로 은폐하여 자신과 남을 속일 수도 있겠다. 즉 진리에 대한 불 같은 열의 때문에 바로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 어렵고, 아예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열의에 차 있기 때문에 자기의 사상이건 타인의 사상이건 하여간 어떤 사상보다 더 앞서가는 사상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허영심으로 가득찬 이 진리 외 다른 진리를 발견하기란 결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허영심은 온갖 진리를 모두 다 물리치고 의기양양하게 아성으로 입성하는데 도가 텄다[8]. 이렇게 온갖 사상을 항상 다 갈기갈기 찢어버리고[9] 일체의 내용 대신 무미건조한 나만을[10] 찾는 지성에[11] 흐뭇해 하는데 이런 만족은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런 허영심은 보편적인 것은 멀리하고 오직 홀로 우쭐해[12] 하기 때문이다.



[1] 원문 . 에 스며있는 강제적인 요소를 이렇게 옮겨보았다. 이 도정은 지가 행진가를 부르면서 의기양양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전진>은 아닌 것 같다.

[2] 원문 <über sich>

[3] 본문 ür sich selbst sein Begriff.>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의식이란 스스로 자신을 이런 울타리 밖으로 붙들어 내는 것으로서>라고 번역한 것은 문맥의 흐름상 이렇게 번역한 것이지 원문의 이해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삭제 줄을 그어 놓았다. 원문은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다. 지금까지는 꼼꼼히 읽으면 헤겔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금방 알아먹을 수 있었는데 ür sich selbst sein Begriff.>는 뜽금없이 나타난 괴물 같다. 이 문장의 내용이 뭔가 중요한 것 같은데... 우선 눈에 띄는 것부터 살펴보자. 지금까지는 자연적인 의식에 관한 이야기가 진행되었는데, 이 문장에서 이야기되는 의식은 자연적인 의식하고는 뭔가 좀 다른 것 같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지금까지는 인식론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었는데 여기선 좀 존재론적인/실존적인 이야기가 되고 있는 것 같다. 동물은 이렇게 사는데 사람은 이렇게 산다는 식으로. 그 다음으로는  이 문장의 내용이 <정신현상학>의 엔진이 된다는 느낌이다. 앞 문단에서부터 계속 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자력으로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힘은 어디서 오는가? 여기에 대한 답이 아직 없다. 이 본문에 그 답이 있지 않는가 한다. 본문을 다시 살펴보자. ür sich selbst sein Begriff.> 여기서 ür sich>눈 뭐고 는 뭐고 는 또 뭔가. 이렇게 한번 읽어보자. ür sich.> 그리고 이렇게 해놓고 보니 아리달송한 것이 좀 사라지고 뭔가 이해되는 것 같다. ür sich>§2에서 <따로>라는 의미로 접한 적이 있다. 그럼 <의식은 왕따>라는 말인가? 어원사전을 뒤적거려보니 하고 아주 가까운 친척 관계란다. 와 같이 공간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이런 공간적인 사용은 가 다 차지하고 는 이젠 거의 전의적인 의미로만 사용된다고 한다. 이런 전의적인 의미로는 <규정>, <목적>, <보호>등이 있는가 하면 <대신>이라는 의미도 있단다. 예를 들어 하면 <너보다 가지라고 네 앞에 놓여진 책>이라는 것이고 하면 <기침이 나오지 못하게 그 앞에 세워진 것>이라는 의미란다. §2에서 <따로>라고 번역한 을 자세히 살펴보니 의식이 자기는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절대자와 어떤 막연한 관계 안에서 이렇게 자기는 <따로>라고 하는 것 같다. 반면, 에서는 이와 달리 의식이 이런 어떤 것과의 막연한 관계 안에서의 가 아니라 뭔가 정확하게 자기 앞에 두고 있는 것 같다. 달리 표현하면 자연적인 의식은 뭔가에 대한 의식으로서(Bewusstsein von etwas) 의식 밖의 뭔가와 막연하게 관계 짖고 있는데, 는 자기 안에, 즉 의식 내부에서 일어나는 뭔가와 정확한 관계를 갖고 있고, 바로 이 관계가 가 아닌가 한다. 그럼 이젠 을 살펴보자. 이 문장에는 혹은 이라는 부사가 빠진 느낌이다. 이렇게 해 놓고 보니 좀 쉽다. §6의 첫 문장 에서 자연적 의식에 대한 평가와는 정반대인 것 같다. 자연적인 의식은 껍데기개념 뿐이다. 반면 는 스스로 개념이 된다고 하는데 여기서 <개념>은 애초부터 <알차고 완성된> 개념인 것 같다. 왜 그런가? 이것은 의식이 애초부터 자기 안에서 자기자신에 대한 의식이기 (Bewusstsein von sich) 때문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으로 바꾸면 <의식은 애초부터 자아의식이다.>라고 옮길 수가 있겠다. 이렇게 해놓고 보니 별거 아니다. 동의어의 반복이다. 이런 동의어의 반복이 어떻게 에너지의 흐름이 되어 <정신현상학>의 엔진이 될 수 있을까?  란 말은 더 살펴보자. 이 문장을 우선 데카르트를 따라 <의식은 자기가 의식하는 있다는 것을 의식한다> (cogito cogitans cogitum) 정도로, 즉 뭔가를 의식하는 행위에 자아의식이 같이 실려있다는 (con-scientia) 정도로 이해해 보자. 이렇게 하면 진리의 개념이 변하여 진리의 핵심요소가 <확신>이 된다. 칸트에 이르면 가 선험적(transzendental) 인식으로서 모든 경험적 인식의 바탕이 되고 이것이 <근원적 통각> („ursprüngliche Apperzeption“), 즉 모든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transzendental) „의식내부에서 일어나는 상태를 자각하는 것“ („qui est la conscience ou la connaissance réflexive de cet état intérieur“, Leibniz, zit. nach 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 Bd. 1, S.449)이 되어 모든 표상이, 표상이 되려면, 관계해야 하는 것이 된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A 117). 이런 선험적(transzendental) 통각이 바깥세상에 대한 오성의(sinnlich) 모든 관계를 제쳐놓고 의식의 자기자신에 대한 관계로 제한해서 피히테는 <지적직관>(„intellektuelle Anschauung“)이란 개념을 도입하고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는 나로 인한 나의 행위>(„absolute Selbsttätigkeit des Ich“)로 철학의 출발점을 삼는다. 이렇게 해놓고 보아도 본문이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정신현상학>의 엔진이 되는 부분이 아직 확실하지 않다. 이 부분을 실존적으로 이해해서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으로 가는 병>, 혹은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렇게 이해가 다 안됨 점을 머리에 간직하고 헤겔을 더 따라가 보자.

[4] 이것은 Bewusstsein von etwas 이해해야 같다.

[5] 원문 . 의식의 저편이나 의식 밖의 것이 아니라 의식의 뒷면, 즉 의식의 자각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한다. 이것은 역자주 66과 함께 역자가 더 숙고해야 할 문제다.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원문 ösen>

[10] 원문 .

[11] 원문

[12] 원문 ürsichs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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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론 §7

(§7) 알없이 겨만 있는 의식이 이렇게 회의주의를 고수하고 꼼짝달싹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의식이 여러 형태를 취하게 되고 더구나 의식이 취해야 하는 형태를 하나도 빠짐없이 취한다고 할 수 있는지의 문제와 또 그 모든 형태를 서술하는 문제는[1] 의식이 어떤 형태에도 머물러 안주할 수 없고 필연적으로 거기를 떠나 다른 형태를 취해야 하며[2], 또 이 모든 형태들 간에 필연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점을 통해서 자연적으로[3] 해결될 것이다. 이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임시로나마 일반적인 차원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고 넘어갔겠다. 즉, 참답지 않는 의식에게 그가 비진리라고 보여주는 서술이 단지 부정적인 운동만이[4]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운동에 관하여 자연적인 의식은 아무런 다른 이해가 없고 위와 같이 오로지 부정하는 단편적인 입장만을 취한다. 이렇게 단편적인 입장을 본질로 만들어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지는 불완전한 의식의 한 형태다. 의식은 도정에서 반드시 이 형태를 취하게 되는데, 그때 가면 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다. 언급하자면 이 형태가 바로 어떤 결과에서든지 단지 순순한 무(無)만 바라볼 뿐 그 밖의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는 회의주의다. 이 회의주의는 이와 같은 무가 어떤 것으로부터 나타나는 결과로서[5] 밑도 끝도 없이 막연하지 않고 그 어떤 특정한 것을 부정한다는 것이 새겨져 있는 무라는[6] 사실을 지워버린다. 그러나 무는 어떤 것으로부터 유래되고 이 어떤 것을 부정하는 무라고 받아들여질 때만 비로소 참다운 결과가 된다. 이렇게 무는 제한성을 갖는 어떤 것이며[7] 이와 함께 또한 어떤 내용을 갖게 된다. 그러나 회의주의는 아무런 내용이 없는 막연한 무와 공허로 끝나기 때문에 이런 추상을 떠나 다른 데로 나아갈 수 없고, 다만 뭔가 새로운 것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 도사리고 있다가 나타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간에 이전과 다름없는 공허한 심연에 내던져버린다. 이와 달리 결과를, 결과가 참으로 그런 것처럼, 제한된 부정으로 이해하면 결과와 동시에[8] 새로운 형태가 발생한다. 이렇게 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과도(過渡)를 통해서 의식이 일련의 행태들을 빠짐없이 취하고 통과하는 전진이 자력으로 이루어진다.



[1] 본문 ändigket der Formen des nicht realen Bewusstseins>를 이렇게 풀어 옮겼다. 회의주의를 고수하는 의식을 거기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 사실 『정신현상학』에겐 가장 골치 아픈 일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매번 등장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가 있을 수 없다.

[2] 본문 . 여기서는 이란 동사가 갖는 <고향을 떠나다, 지금까지의 삶의 터전을 떠나다>라는 의미를 살렸다. 고향을 떠나는게 쉽지 않고 그것이 경제적이든지 다른 이유이든지 상당히 강제된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에는 강제적인 요소가 스며있다.

[3] 본문

[4] 본문 ß negative Bewegung>

[5] 본문

[6] 본문 . <제한된 부정>으로 번역되겠다. 역자는 아마 데리다의 에 더 주목하는 것 같다.

[7] 이러한 제한된 무는 <아무런 제한이 없는 무한한 무>가 아니다. 이런 <아무런 제한이 없는 무한한 무>는 경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동시에 <무한>이라는 의미와 <경험이 대상이 되지 않는>이란 의미를 갖는다. 고대 그리스는 apeiron이라면 아연실색한다. Horror vacui의 겁보다 한층 더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정해진 것(Horizont)이 있어야 좋다고 했는지 모른다. 

[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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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론 §6

(§6) 자연적인 의식은 단지 지의 껍데기[1]일 뿐이지 실제적인 지가 아니라는 것이 자연스럽게[2] 입증될 것이다. 그런데 자연적인 의식은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부터[3] 자기 자신 그대로가 오히려 실제적인 지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에게 이와 같은 도정은 부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며, 개념을 실현해 나가는 것이 그에게는 오히려 자기상실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자연적인 의식은 이 도정에서 자기가 주장하는 것이 진리라는 논증의 힘을[4]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길을 회의에 빠지는 길로[5] 볼 수 있겠는데, 더 엄밀하게 살펴보면 사실 절망에 빠지는 길이다[6]. 그 이유는, 의식의 도정에서 일어나는 회의는 사람들이 흔히 이해하는 회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회의란 보통 진리하고 여겼던 것을 이러 저리 한번 흔들어 본 다음 <어 진짜네>하고 회의를 걷어버리고 다시 착실하게 원래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되돌아가 사태를 처음과 다름없이 다루는 것이다. 이와 달리 의식의 도정에서 일어나는 회의란 현상뿐인 지가 사실[7] 실현되지 않은 껍데기[8]뿐인 것을 가장 알찬[9] 것으로 여겼던 자기 자신을 알아차리고 자기가 진리가 아니다라고 뼈저리게[10]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회의의 본질까지 파고드는 회의주의는[11] 진리와 학문을 놓고 분주하게 떠드는 자가 진리와 학문의 무기로 마련했다고 자부하는 회의주의와는  다르다. 이런 회의주의는 학문하는데 있어서 권위에 눌려 타인의 사상에 항복하지 않고, 대려 모든 것을 스스로 따져보고 자신이 확신하는 것만 따른다는, 더 신랄하게 표현하자면 모든 것을 스스로 재현.창출하고 오직 자기가 직접 주도하는 행위만을 진실된 것으로 여긴다는 결단과 같다. 그리고 이런 회의주의는 이런 결단을 통해서 자신을 충분히 가다듬어 진리와 학문에 적합한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회의주의는 나중에 더 자세히 보겠는데 의식의 도상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의식은 그 형태 하나하나를 두루 거치면서 학문으로 자기 자신을 다듬어 나아가는데, 이런 모든 형태를 모아 논 것이 의식이 교양을 쌓아가는[12] 상세한 역사다. 그런데 의식은 위와 같은 결단만을 가지고 자기자신을 학문하기에 알맞게 다듬는 일을 단번에 해결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식이 들어서는 도정은 이와 같이 한자리에 한가하게 머물러 있을 수 있다는 자기착각에[13] 반하여 길에 올라 실질적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 길이다. 자신의 확신을 따른다는 것은 물론 권위에 의존하는 것보다는 뭔가 좀 다른 것이 있다. 그러나 권위에 눌린 판단을 자신의 확신에 따른 판단으로 교체했다고 해서 꼭 판단의 내용이 달라지거나 오류가 있던 자리에 진리가 들어선 것은 아니다. 타인의 권위에 눌려서 사념과 편견의 체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든 아니면 스스로 확신하여 그렇든 양자간의 차이에는, 자신의 확신에 기초해 있는 편이 좀 우쭐거린다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 이와 반대로 현상뿐인 의식 전반에 회의의 화살을 돌리는 회의주의는[14] - 의식 스스로가 그렇든 아니면 타인이 그렇든지 - 자연적인 것이라고 내세워지는 관념, 사상, 사념에 대한 절망감을 일으켜서 정신이 비로소 진리가 무엇인지 진위를 가름하는데 도전하게[15] 한다. 사태가 이러한데 의식은 앞서 언급한 결단만을 가지고 진위여부를 따지려 든다. 그러나 위와 같은 관념, 사상, 사념으로 가득 차 있고 또 거기에 얽매여 있는 의식은 사실 그가 하려고 하는 일, 즉 진위여부를 따질 능력이 없다.



[1] 본문 . 여기서 <개념>보다는 <이름>, <>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알맞겠다. 예를 들어 Begriff Havelland.> <나는 Havelland라는 것에 대해서 그 말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정도로 번역되겠다.

[2] 본문

[3] 본문

[4] 본문 . <진리>가 갖는 주장하고 논증하는 힘에 초점을 맞춰 옮겼다.

[5] 본문 . 보통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라고 한다. 데카르트의 도 번역해서 진보넷에 올릴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6] 본문 . 우리는 을 보통 <절망>, 즉 희망을 그만두다, 끊는다라는 의미로 번역하는데 사실 의 의미가 완전히 옮겨진 것은 아니다. 14세기에 들어와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 라틴어 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기대고 있는 개념은(Bezugspunkt) 에서와 같인 <희망/speratio>이 아니라 이고, 에서와 같이 뭔가 긍정적인 것이 감소되는 것이 아니라 뭔가 부정적인 것이 더없이 첨예화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헤겔을 거쳐 키에르케고르에 이르면 존재 전체를 사로잡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회의>(Zweifel der Persönlichkeit)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 Bd. 11, 1028). 자연적인 의식의 도정이 반듯한 길인지 아니면 미로와 같은 인생의 어지러운 길(Des Lebens labyrinthisch irren Lauf; 파우스트, 헌사)인지 모르겠다. 헤겔과 키에르케고르가 길을 달리하는 대목인 것 같다. 

[7] 본문 .

[8] 본문 .

[9] 본물 .

[10] 본문

[11] 본문

[12] 본문

[13] 본문

[14] 본문

[15] 본문 . 역자의 귀엔 에서 동사 이 갖는 의미가 더 들려서 <재치 있다>라는 의미로 번역하지 않고 과 같이 뭘 정면으로 하게 하는 의미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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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론 §2

(§2) 오늘날에 와서는 오류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근심걱정이 이런저런 점에 주의해야 한다고 아는 체 하고 무게를 잡는 일 없이[1] 바로 철학이 해야 하는 일에 착수하고[2] 실질적으로 인식하는[3] 학문을 불신으로 대하기까지 이르렀는데, 사태가 진정 이렇다면 이건 눈뜨고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일로서 이젠 역으로 이런 불신을 불신으로 대하고 오류를 범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이미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맞섬과 동시에 이에 대한 구제책을 강구하지[4] 않을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사실 이런 근심걱정은 뭔가를 전제할 뿐만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그것의 이런저런 변형을 내놓고 그것에 기반하여 이리저리 몸을 사리는 궁리들을 짜내고 어떤 바라짐하지 않는 결과에 귀착하게 되는지 보여주기 일상인데, 그런 식의 전제가 정말 올바른 것인지 먼저 조사해봐야 할 일이다. 이 근심걱정이 전제하는 것을 말하자면 인식을 도구나 매체로 보는 생각이며 또한 이와 같은 인식과 우리 자신은 별다른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가장 어처구니 없는[5] 것은 절대자는 이편에 서 있고 인식은 따로[6] 저편에 서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 인식이 절대자와 단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식이 실재적인 것을 담은[7] 것이라는 주장과 다름이 없다. 달리 표현하면, 절대자의 외곽을 맴도는 인식은 당연히 진리밖에 있을 수 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다운 것이라고 전제하는 짓이다. 인식에 대하여 근심걱정하는 자들이 전제하는 것을 겨우 이런 가정으로서 거기서 드러나는 것은 오류를 두려워 한다는 거창한 이름표를 붙이고 나오지만 알고 보면 사실 진리에 대한 두려움에 가깝다는 것이다.



[1] 원어 . 어떤 일을 하는데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서 일을 방해하는 사람을 독일에서는 폄하하여 äger>라고 부른다. 특히 사회개혁안을 둘러싼 논쟁에서 이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거의 직업적으로 소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를 놓고 이렇게 부른다. 정신현상학 때문에 쉘링과 헤겔이 절교하게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정신현상학이 쉘링의 기분을 상하게 한 모양이다. 이런 점에서 역자는 정신현상학을 번역하면서 기분을 상하게 하는 헤겔의 말투(Tonlage)를 살리려고 노력한다.

[2] 원어 . 이것은 §1 와 똑 같은 내용이다. §1의 역자주 2번 참조.

[3] §1의 역자주 4번 참조

[4] 원어 . §1의 역자주 11번 참조. 헤겔은 여기서 이런 구제책을 마련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고 약속하는데(Versprechen), 정말 약속을 지켜 그런 구제책을 제시하는지는(einlösen) 두고 볼 일이다. 정신현상학이 바로 이 구제책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헤겔이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정신현상학도 역시 그가 비판하는 잡다한 것이 될 것이다. 여기서 헤겔이 어떻게 할 것인지 미리 내다보는 것 같은데(vorgreifen) 한번 믿고 따라가 보자.

[5] 원어 <vorzüglich>. <으뜸가는>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는데, 여기서는 상당히 빈정대는 투로 사용되고 있다.

[6] 원어 ür sich>

[7] 원어 . (사실을 담은/실재를 담은)라는 의미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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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론 §5

(§5) 그러나 이 서술은 단지 무대에 올라와 뭐가 뭔지도 모르고 몸부림하는 지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학문의 모양, 즉 학문 특유의 형태 안에서 온갖 요소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는 모양을 갖추고 있지 않고 또 학문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완성된 학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서술은 참다운 지를 향해 몸부림치는[1] 자연적인 의식이 거쳐가야 하는 길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고 할 수가 있겠다. 또는 혼이 거쳐가야만 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혼은 이 도정에서 그 본성이 미리 예비한 일련의 형태를 하나하나 취하고 두루 거치면서 [2],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경험함으로써 본래적인[3] 자신을 알게 되고 마침내 정신으로 순화된다.



[1] 본문 . 아리스토텔레스의 oregesthai (형이상학, 980a 21), ephiesthai (니코마코스 윤리학 1094a)의 <무엇을 향해 뻗어 나가다>의 의미로 번역했다.

[2] 플라톤의 국가 10권 마지막 부분 에르 신화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에르는 아르메니오스의 아들로서 어떤 전투에서 전사한다. 전사 후 10일째 되는 날 다른 전사자들은 이미 부패한 상태였는데 에르는 그렇지 않게 온전하게 집에 안치되었다. 12일째 되는 날 화장하려고 나무장작위에 갖다 올려놓았더니 다시 살아나고 저승에서 경험한 것을 보고한다. 이 보고내용이 플란톤의 에르 신화다. 주요 내용은 혼이 죽은 후 지옥과 천당에 간다는 것과, 너무 악해서 영원히 타타로스에 던져지지 않은 이상 혼은 다시 이승으로 온다는 이야기다. 재미있는 것은 혼이 다시 이승으로 오는 과정인데 제비 뽑기로 순서를 정하고 차레대로 삶의 기본모형(bion paradeigmata, 국가 617d)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재수가 있고 없는 문제는 떠나서 운명은 이렇게 선택의 여지라는 것이다. 쉴러의 발렌슈타인에서 피콜로미니가 발렌슈타인에게 라고 말한 것과 유사하다. 하늘이 아니라 <네 가슴속에 네 운명의 별이 있다>라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자업자득이라는 것이다. 플라톤도 모든 것이 원칙적으로 자업자득이라는 면을 강조하는데 <다이몬이 너희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 자신이 [너희 삶을 주관하는 신인] 다이몬을 선택한다.>(국가, 617e). 결국 선택한 삶을 선택한 다이몬의 주관아래 살게 된다는 것이다. 선택이 다 끝나면 혼은 모든 것을 잊게 하는 레테 강물을 마시고 새 몸으로 이승에 다시 오게 된다.    

[3] an s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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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론 §4

(§4) 절대적인 것에서 분리된 인식, 그리고 인식에서 분리된 절대적인 것이라는 관념의 연장선에 인식은 절대적인 것을 손에 쥐기 위한 도구라거나 또는 우리가 그것을 통해서 진리를 가려내는 매체라는 등의 관념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식의 입에 베인 말을 하는 학자를 상대해 주는 대신에, 아니 사태가 이렇다는 전제아래 학문의 무능력을 운운하면서 학문의 노고를 부정함과 동시에 자기자신을 학문의 노고에서는 해방시키지만 진지하고 열의에 찬 노력을 기울이는 듯한 외관은 걸치고 그에 따르는 존경은 마다하지 않는[1] 학자가 끊임없이 내놓는 이런 저런 구실을 받아주는 대신에, 정말 그런 따위에 답하는 일 때문에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애쓰는 대신에 그와 같은 관념은 우발적이고 자의적인 것이라고 정면으로 논박하고, 나아가서 이런 관념과 함께 절대자, 인식이라는 낱말에 그치지 않고 대상과 주체 등외 무수히 많은 낱말을 그 의미가 이미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다고 전제하면서 사용하는 학자를 존경하기 보다는 그 행위를 기만으로까지 평가해 볼만 하다.[2]  왜냐하면, 이와 같은 낱말들의 의미는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고 또 보통사람이면 누구나[3] 그 개념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내세우는 것은 가장 핵심적인 작업, 즉 그와 같은 개념을 제시하는 일을 어떻게 든 면해보려는 구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학문을 가로막는 관념과 입에 베인 말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 어쩌면 더 현명할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등장하는 학문 앞에 곧바로 수그러지는 지의 텅 빈 현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갓 등장하는 학문 역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등장했다고 해서 학문이 벌써 진리 안에서 속속들이 전개해 놓은 완성된 자기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학문이 다른 지와 나란히 등장하는데 있는데, 이때 등장하는 학문이 자기만이 완성된 학문의 정통현상이[4] 된다고 하든 아니면 그 다른 참답지 않는 지를 돈독하여 학문의 발현이라고[5] 하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 중요한 것은 학문은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챙기는 행동에서[6] 자신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해방은 오로지 학문이 그런 겉치레와[7] 대결함으로써만 가능하다. 학문은 어떤 지를 대할 때 그것은 사물에 대한 참답지 않고 비속한 견해라고 깔아뭉개고, 자신은 그와 전혀 다른 인식이고 또 그런 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단언만을 일삼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비속한 지일지라고 그 안에 그보다 더 나은 뭔가를 향해서 꿈틀거리는 것이 있다고 하면서 이 점을 지를 논박하는 근거로 삼을 수도 없는 일이다. 단언만 한다면 학문도 역시 자신의 존재가 논증의 힘이라고 내세우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참답지 않는 지 역시 자신의 존재를 내세워 학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지 않는가? 메마른 바탕에서 밑도 끝도 없이 단언만 일삼는다면 이것이나 저것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이 통용될 수 있는 것이다. 학문이 해서는 더더욱 안될 일은 참답지 않는 인식일지라고 그 안에 보다 나은 지를 향한 꿈틀거림이 있고 이것이 바로 자기자신을[8] 지향하는 것이라고 하여 비속한 지를 추켜세우면서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도 역시 위와 마찬가지로 존재를 진위여부의 증인으로 내세우기 때문인데, 더 중요한 것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학문이 참답지 않는 지 안에서 존재하는 양식, 즉 학문 존재의 그릇된 양식과 학문의 완성된 모습[9]보다는 학문의 현상을 논박의 근거로 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문이 지를 보는 시각은 일단 제쳐놓고 우선 지가 무대에 올라와 어떤 운동을 하는지 그대로 서술하는 일에 도전함이 마땅하겠다.



[1] 원어 . <외관>과 <존경>으로 옮겼다.

[2] Ansehen (외관, 존경)과 als Betrug angesehen werden (기만으로 간주하다)의 Wortspiel에 초점을 맞췄다.

[3] 원어

[4] 원어 . 정관사를 <정통현상>으로 옮겼다.

[5] 원어 . <발현>이라 하여 동사적 의미를 부각시켰다.

[6] 원어

[7] 원어

[8] 학문을

[9] 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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