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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7/05
    주고받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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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1/03/31
    품질관리매니저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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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1/03/25
    놈들의 명단이라도 확보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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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1/03/22
    생태학은 새로운 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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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1/03/21
    일본 사태관련 독일 언론-FA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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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1/03/20
    더 이상 거짓말은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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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1/03/19
    살아남는 최후 수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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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1/03/19
    지저분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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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1/03/19
    후쿠시마 원전사태의 독일에서의 파급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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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1/03/18
    후쿠시마 II - 이성과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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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받기

얼마 전 아주 대조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서)베를린 비텐베르크플라쯔 근방에 있는 베트남 수퍼 <빈로이>에 시장 보러 가다가 눈에 띈 광경이다.

 

초여름이지만 햇살이 따가운 토요일이다. 정오의 햇빛을 피해 60이 훨씬 넘어보이는 노숙자가 모자를 앞에 놓고 나무그늘아래 편히 앉아있다.

 

<빈로이>는 현찰거래만 하는데, 그날도 현찰이 없어서 KDW 백화점 맞은 편 길 모퉁이에 있는 <도이춰 방크>에서 현금을 뽑으러 가다가 무심코 본 광경이다.

 

길을 돌아서자 토요일이면 항상 은행 문 앞에서 동냥하는 아저씨가 문을 열어 재키고선 4번째 자동인출기는 고장이 났으니 다른 인출기를 사용해야 한다고 고객서비스(?)를 한다. 휠체어에 앉아서 업무시간외에는 카드로 문을 따야 하는 번거러움을 덜어주는 서비스를 하는 아저씨다.

 

순간 동냥하는 두 모습이 아주 대조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한 사람은 주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편히 앉아있는데 다른 사람은 뭔가를 제공하면서 그 대가를 바란다.

 

마음이 불편하다. 주든 말든 내 맘인데 원하지 않는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뭔가를 바라는 다소 적극적인 동냥방법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아니 이런 마음의 불편을 노린다는 생각이 들자 화도 좀 난다. <Do ut des/너에게서 받으려고 [먼저] 준다>라는 거래의 논리가 거래의 영역이 아닌 곳에까지 침투해 있다는 생각이 들자 주고싶은 마음이 싹 사라진다.

 

그냥 주고 그냥 받을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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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질관리매니저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옛날에 한적한 산야에서 양치는 목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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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먼지를 일으키며 공장에서 막 뽑은 체로키 짚차가 달려와 급 브레이크를 걸더니 양치는 목자 옆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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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오니 양복에  체루티 구두를 신고 레이 밴 썬글라스에다가 YSL 넥타이를 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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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청년이 차에서 내리더니 “당신이 치고 있는 양이 몇 마리인지 알아 맞추면 양 한 마리를 내게 주겠소?” 한다.

 

양치는 목자는 그 젊은 청년과 평화롭게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양들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해보소” 한다.

 

젊은 청년은 노트북을 꺼내 스마트폰에 연결시켜 NASA 홈페이지에 접속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리고GPS 인공위선 네비게이션시스템으로 양치는 지역을 스캔하고사용자 삽입 이미지

 

엑셀파일을 열어 무수한 공식으로 뭔가를 만들더니

 

소형 최첨단 프린터에 150페이지나 되는 보고서를 출력시킨다.

 

 

 

 

 

그리고 양치는 목자에게 “당신이 치고 있는 양은 정확하게1586마리다”라고 한다.

 

양치는 목자가 말하기를: “맞다. 한 마리 골라라.”

 

젊은 청년은 양 한 마리를 골라 차에 싣는다.

 

양치는 목자가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묻는다.

 

“내가 당신의 직업이 뭔지 알아 맞추면 그 양을 다시 돌려 주겠소?”

 

젊은 청년이 대답하기를: "기꺼이”

 

양치는 목자가 말하기를: “품질관리매니저”

 

“맞아요. 근데 어떻게 알았어요?”라고 젊은 청년이 의아해 한다.

 

“아주 간단해.”라고 양치는 목자가 대답한다.

“첫째, 아무도 부르지 않았는데 여기에 왔고, 둘째, 당신의 도움 없이도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알려주고 나서 그 대가로 양 한 마리를 달라고 했고, 셋째, 내가 여기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오.”라고 하고 나서

 

“이젠 내 강아지를 다시 내려 놓으시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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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들의 명단이라도 확보해야겠다

사회주의법규라면 어떻게 처리했을지 모르겠다.

 

지금 일본원전사태수습에 죄 없는 노동자를 투입하여 죽게 만드는 일을 그냥 두고 봐야만 하는가? 왜, 그런 원전을 가동하기로 결정한 역대 사장 및 이사진, 주주, 그리고 그렇게 하게 내버려둔 정부인사들을 잡아다가 투입하지 않는가?

 

저들이 멀쩡하게 뒤편에서 떠들게 내버려두는 법규체제는 도대체 어떤 것인가? 일본인민을 죽게 만든 저놈들을 왜 가만 놔두지. 내 머리론 이해가 안 된다. 자동차 사고와 같은 과실? 지랄... 인민을 죽이겠다고 위협한 카다피와 저들이 결과적으로 뭐가 다른가? 물론, 다를 것이다. 그래서 카다피는 폭탄세례를 받고 있는 것이고, 멀쩡한 정신으로 원전사고를 계산에 집어 넣은 저놈들을 잡아다가 전기선 달고 물 붓게 하라는 것이다.

 

놈들의 명단이라도 작성해서 띄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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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학은 새로운 이성이다

FAZ를 자주 보게 되네… (조선일보가 이 정도 되었으면 좋겠다.  한국 = 조선일보, 독일 = FAZ 란 공식을 자랑스럽게 내놓는 기자를 지나가다 보긴 했지만 ...)

 

자연환경의식의 역사를 다룬 빌레펠트대 요하힘 라드카우 역사학교수와의 인터뷰 일부를 소개한다.(www.faz.net/s/RubB08CD9E6B08746679EDCF370F87A4512/Doc~E0C5D44D762214964A29F1C72C163EC83~ATpl~Ecommon~Scontent.html, 2011.3.22)

 

(중략)

 

FAZ: 환경보호의식이 오늘날 독일 문화의 한 부분인가?

라드카우: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독일 정체성의 매우 긍정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 원자력 비판에서 독일이 선두주자이며, 여기서 녹색운동뿐만 아니라 재생에너지부분에서 독일이 선두주자가 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앞에서 이야기된 독일의 원전에 대한 반응을 ‚German Angst‘라고 폄하하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FAZ: 이런 의식이 각계각층에 존재하는가?

라드카우: 아주 많은 사회영역에 이미 존재한다. (…)

FAZ: 환경활동가들이 지구 전체에 대한 책임을 걸머지고 자신을 희생해가며 운동하는 타입인가? 아니면 그들도 역시 자신들의 사생활영역만을 염두하는 사람들인가?

라드카우: 다수의 학자들이 "Not in my backyard"-인티시어티브는 참다운 환경운동이 아니라고 한다. 나는 그런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본다. 특히 활기찬(vital) 반대운동에서 흔히 개인적인, 아니면 집단적인 이기주의가 일정한 역할을 한다. 자신의 건강 혹은 살아온 환경보존 등 말이다. 나아가 환경보호가 장기적으로 성공하려면 인간의 되먹음(Natur)과 조율되어야 한다는 테제를 세우고 싶다. 이기주의가 한술 떠 있어야 한다.

FAZ: 일본에서 일어나는 일을 놓고 체르노빌을 상기하는 사람은 역사가 반복된다는 생각할 수 있겠다. 역사학자로서의 생각은?

라드카우: 다수의 자연환경보호문제가 최종적으로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가 반복하는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오일페스트문제는 이미1920년대에 국제연맹의 자연환경보호 이니시어티브에서 테마가 되었다. 그래서 이런 문제는 오래 전에 뿌리 채 해소되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해상 오일 채취가 확대되면 될수록 이 문제는 항상 새롭게 대두한다. 다이옥신도 마찬가지다. 80년대에 속한 문제라고 생각하겠지만 눈깜짝할 사이에 지금의 문제로 우리 앞에 와 있다. 자연환경보호문제에 최종적인 대응(Antwort)이 없었기 때문에 매번 다시 데자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

FAZ: (…)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태학 시대“를 계몽의 시대라고 높이 평가하시는데.

라드카우: 생태학은 세상을 총체적으로, 다른 눈으로 보게 만들었다. 생태학은 정치, 경제, 그리고 일상생활에 새로운 이성을 도입하려는 시도를 포함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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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태관련 독일 언론-FAZ

현재 진행중인 일본사태관련 이런저런 논설을 찾아 다니는데, 뼈아픈 논설이 하나 있다. 독일을 대표한다고 자부하는 <프랑푸르트 알게마이네 짜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의 발행인 프랑크 쉬르마허(Frank Schirrmacher)의 글이다.

 

지난 목욕일 독일 제2국영방송 ZDF의 뉴스 <Heute Journal>에서 방영된 일본사태관련10분짜리 영상보도를 극찬하는 글이다. “아포칼립스적인 [상황에나 어울리는 말들이 난무하는] 라이브 티커 앞에서 모든 집중력을 상실하고 그저 멍하게 바로 보고 있는 우리에게” 뭔가를 명료하게 해주는 보도였다는 것. 그 영상보도가 보여준 것은 다른 보도와 다를 바가 없는데, 영상에 겹치는 일본특파원 게르트 안할트(Gert Anhalt)의 잔잔한 말의 내용이 달랐다는 것.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난 폐허 한가운데에 멍하니 서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여주는 장면에 “그들이 예전에 일으켜 세운 나라가 이젠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더 이상 도울 수가 없게 되었다. … 이들이 바로 예전에 일본을 재건했던 세대다. 대참사가 가져다 준 폐허에서 비극적으로 그들의 생이 지금 원점으로 되돌아 가고 있다.”

 

쉬르마허는 이 코멘트가 심금을 울린다고 한다. 재앙이 이토록 크면 망가진 자기 삶을 더 이상 회복할 수 없기 때문에, 한 생을 지배해 왔던 논리가 한 순간에 산산조각이 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게르트 안할트가 보여준 것은 우리가 어쩌면 머리로만 알고 있는, 인간의 삶이 “공기, 물, 먹을 것, 그리고 열이란 원초적인 조건”에 달려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재앙을 당한 일본사람들의 삶이 물리적으로 그런 원초적인 상황으로 떨어졌다는 것. 그리고 앵커맨 클라우스 클레버(Klaus Kleber)의 “구조는 어떤 수단보다 더 오래된 수단, 즉 물로 한단다.”라는 코멘트는 이런 뼈아픈 통찰에 도장을 찍는 말이라는 것. 자연의 힘이 나중에 일어날 일에 절대 자신하는 기술과 함께 우리가 의지하는 것, 이념 혹은 신념을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삶과 살아온 발자취를 몽땅 부정했다는 것이다.

 

이어 프랑크 쉬르마허는 이런 통찰이 그저 “분위기”로만 지나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일본에서 일어나는 일을 라이브 티커와 실시간 동영상에 매달려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식으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전개하는 법에 따라 소비하는 것을 겨누어 원전은 과도가 아니라 끝장이 나야 한다고 (“Kein Übergang, ein Ende”) 한다.

 

후쿠시마와 같은 사태와 마주하는 지금 „과도“니 „가교기술“이니 하는 것은 진부한 것이라는 것.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는지 안 하는지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두려워하고,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실재하고 현실적인 것이라는 것. 지난 목요일 <heute-journal>이 이런 진리를 증명했다는 것. 즉 „실수했다고 말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강제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과 „재앙을 불러일으키고 일으키는 순환을 스스로 중단하여 끝장을 보는 것“이 필수라는 것을  증명했다고 한다. 이런 실수는 업데이트나 차후보안으로 지양되지 않는다는 것. 우리에게 남은 일은 이제 원전이 „더 이상 과도가 아니라 끝장“이라고 종지부를 찍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글에 메르켈 정부가 견딜 수 있을까 한다.

 

자료출처:www.faz.net/s/RubB08CD9E6B08746679EDCF370F87A4512/Doc~E3C3F2F3178964159AC700871C7415730~ATpl~Ecommon~Sconten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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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거짓말은 안돼

7-80년대에 비해 많이 우경화된, 소위 고등교육을 통해서 부르주아가 된 “교양부르주아(Bildungsbürger")가 애용하는 독일 주간지 “Die Zeit”지의 이번 목요판 1면.

 

“더 이상 거짓말은 안돼!”

 

“일본이 세계에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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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는 최후 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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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www.faz.net/s/RubD5CB2DA481C04D05AA471FA88471AEF0/Doc~E1F2B6933CDD443C391748D5D60C69526~ATpl~Ecommon~SMed.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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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저분한 말

우리 정서는 말에 신경을 쓰는 전통으로 다져진 것 같다. ‘말을 아끼다”란 표현과 같은 표현이 다른 말에도 있는지 모르겠다. 서양언어에 익숙한 사람이 우리말을 배울 때 적절한 존칭을 사용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울 게다.

 

마음의 여유를 가질 나이가 되었는데도, 일본 대지진과 관련해서 조용기란 목사와 같은 발언을 들으면 막 패주고 싶은 생각에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잠을 설친다.

 

이렇게 잠을 설치면서 떠오르는 생각.

 

제1명제: 일본대지진에 하나님이 있다. (조용기란 목사발언 참조)

반론: 야훼는 일본대지진에 없다.

근거: 열왕기상 19장11-1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크고 강한 바람이 주님 앞에서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그 바람 속에 주님이 계시지 않았다. 그 바람이 지나가고 난 뒤에 지진이 일었지만, 그 지진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일어나고 난 뒤에 불이 일어났지만, 그 불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불이 난 뒤에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

 

제2명제: 하나님은 자연의 힘을 동원해 그를 멀리한 사람을 벌한다. (다시 조용기란 목사발언 참조)

반론: 야훼는 계시의 하나님이지 자연의 뒤에 숨어서 벌하는, 그런 치사한 짓은 하는 분이 아니다.

근거: 구약성서 이곳 저곳. 대표적인 예: 요나, 소돔과 고모라 등.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기 때문에 자연현상을 읽는 점쟁이 짓을 하는 목사가 필요 없다. ‘계시’란 어려운 말이 아니라 야훼는 스스로 오거나 사자를 보내거나 아니면 3자에게 이렇게 저렇게 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일을 하는 인격체란 말이다. 그래서 흥정도 가능하다. 야훼가 조용기란 목사의 꿈에 찾아가 ‘내가 일본을 이렇게 저렇게 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조용기란 목사는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야훼와 흥정했기를 바란다. 안 그랬으면 목사란 옷을 벗고 점쟁이 점을 차리기 바란다.

 

말이 지저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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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원전사태의 독일에서의 파급효과

여론조사기관 여론조사실시일 기민당  사민당 녹색당 자민당 좌파당 기타

Forschungsgruppe

Wahlen  

2011-03-18 38 22,5 25 5 4,5 5
Infratest dimap 2011-03-17 39 22 24 5,5 4,5 5
Infratest dimap  2011-03-14 42 22 21 6 4 5
Emnid  2011-03-12 39 24 20 7 5 -
Forsa  2011-03-11 40 26 20 5 4 5
Emnid  2011-03-04 38 25 21 8 4 4
Forsa  2011-03-02 39 26 19 6 4 6
Emnid 2011-02-27 40 23 22 6 4 5
Emnid  2011-02-20 40 20 23 7 5 5
Emnid  2011-02-13 40 19 25 7 4 5

Forschungsgruppe

Wahlen     

2011-02-04 41 19 25 6 4 5
Infratest dimap  2011-02-03 39 21 24 6 5 5
Emnid  2011-01-29 40 20 27 5 4 4
Emnid  2010-12-19 41 19 29 4 4 3
Infratest dimap  2010-12-02 39 18 28 5 5 5

Forschungsgruppe

Wahlen    

2010-11-26 39 19 26 5 4 7
Allensbach  2010-11-19 38 22 26 5 5 4
TNS Forschung    2010-10-09 34 19 32 6 5 4
Infratest dimap   2010-09-08 35 21 27 5 5 7

Infratest

Politikforschung  

2010-07-27 37  25 20 7 5 6
Infratest dimap  2010-02-28 43 20 17 11 4 5
2006년 총선 결과   44.2 25.2 11.7 10.7   6.1

출처: www.landtagswahl-bw.de/wahlumfragen.html

 

오는 2011년 3월 27일에 있을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총선 여론조사동향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녹색당 지지율의 변동이다. <슈트트가르트21> 중앙역 신설계획에 반대하는 주민운동이 정점에 다다랐을땐 녹색당 지지율이 32%까지 올라갔다. 이후 소위 <중재절차/Schlichterverfahren>란 과정을 거치고 녹색당 지지가 수그러지는듯 하고 기민당이 정권을 사수할 수 있을 것 같이 보였으나, 이번 후쿠시마 원전사태로 상황이 돌변하고 있다. 문제되는 원전 가동을 일단 중지한다는 메르켈의 정치적 제스쳐와 원전가동을 적극적으로 밀어부치고 심지어 EnBW라는 독일 4대 전력회사의 지분을 사들여 원전가동 연장에 중추적 역할을 했던 마푸스 주총리가 카노사행을 방불케하는 친원전하차발언을 함에도 불구하고 기민당 지지율이 하향세로 치닫고 있다. 3월 18일 여론조사결과라면 녹색당이 사민당을 주니어파트너로 하여 연정을 구성하고 독일연방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주총리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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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II - 이성과 겸손

횡설수설하는 인간이 어찌 유럽 정신사의 중심에 놓여 있는 이성에 관하여 이러쿵저러쿵 할 수 있겠소만, 그래도 답답한 마음에 키보드를 두드려본다. 게다가 겸손까지 곁들어 놓고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본인도 알송달송하다.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 전에 오래된 노트를 뒤적거리다가 어딘가에서 베껴다 놓은 한 구절이 생각나서 중이 목탁 두드리듯 키보드를 두드려본다.

 

“… quantum ipsa lux quae iluminat cor quaerentium se nobis aditum rerum quas ingredi conamur aperuit ostendemus.”

 

알고보니 9세기에 살았던 아일랜드 출신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Johannes Scottus Eriugena)의 <예정론>(De praedestinatione)의 1장 2절 첫 문장이다.

 

“우리는 [여기서] 빛이, 궁금해서 안절부절 하는 사람의 마음을 밝혀주는 빛이, 우리가 애써 파헤쳐보려는 노력하는 사물로 들어가는 문을, 자발적으로, 우리에게 이미 얼마나 열어 제켜놓았는가를 보여줄 생각이다.”

 

이 구절을 음미하면서 떠오른 생각이 이성과 겸손이었다. 여기에 유럽에서 말하는 이성의 본질이 있지 않는가라는 생각도 들었고. 이미 이해의 장에 들어가 있다는 해석학적 이성 혹은 아프리오리나 존재적/존재론적 아프오리 말이다. 헤겔의 <정신 현상학>은 물론이고.

 

후쿠시마 사태를 보면서 이건 합리성으로 추락한 이성의 결과물이라고 비약해본다. 이성이 합리성으로 추락하면서 교만한 것이 되었다고.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예수가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예수가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를 매우 사랑하고, 나사로를 일러 친구라고 하고, 그 죽음을 애도하는 누이들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41절 이하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의 자세다. 예수가 “나사로야 일어나라” 해서 나사로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나사로는 이미 일어나 있는데, 다만 자기가 하나님과 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께 양해를 구하고 그렇게 소리질러 명했다는 것이다. 에리우게나의 자세가 구조적으로 이런 예수의 자세와 비슷한 것 같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모세는 이 부분에서 실수를 저질러 가나안 땅을 보긴 했지만 들어가진 못했다.

 

그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이성이란 무엇인가? 물론 무엇이라고 들어올려 보여줄 수 없지만 달리 할 수 없어 무엇인가라고 질문해 본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지만 아픔과 아픔의 기억이 발하는 빛에 기대에 “그건 아니다”라고 싸우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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