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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때

 

‘삶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때

연일 이어지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 대한민국 국민이 바라는 삶이란 무엇인가?

 
왜 사람들은 광장으로 모여드는가?

 

 매일 시청광장이 뜨겁다. 어린이고 어른이고 간에, 여자든 남자든지 간에 ‘대한민국 국민’들이 말 그대로 ‘남녀노소’ 구분 없이 매일 광화문으로 모여들고 있다. 6월 첫째주 주말 내내 진행된 72시간 릴레이 집회에서는 대책회의 추산 22만명의 시민들이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광장에서 청소년들은 공부하는 기계가 아닌 ‘사람’이고 싶다고 소리쳤고, 어린이들은 광우병으로 인해 죽고 싶지 않다고 ‘살고 싶다’고 울부짖었다. 매일 밤 대한민국 국민들은 ‘사람’처럼 ‘살고 싶다’고 촛불을 들고 외치고 있다. 이렇게 몇 주째 광화문과 시청광장에서는 미국쇠고기 수입반대 집회가 열리고 있다. 집회에서는 수만 명의 국민들이 생존에 직결된 먹거리에 대한 공포를 토로하며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의 외침 속에서 무언가가 아쉽다. 단지 광우병 쇠고기 수입‘만’으로, 이명박정부에 대한 불신'만'으로 이렇게 국민들이 뿔이 난 것일까?


 2008년 신정부가 들어선 후 서울시의 뉴타운 및 재개발 사업과 부동산 규제 완화에 대한 기대로 벌써 몇 달째 계속해서 전세와 월세는 오르고 있다. 쌈짓돈 쪼개어 전세금 걸고 달달이 월세내며 사는 사람들은 올해 들어 재계약을 하는데 있어 마음이 묵직하다. 최소한 천만원에서 이천만원 이상의 전세금을 더 내야 하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가와 밀가루 값 상승 등으로 신정부가 잡겠다던 생필품의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고 있다. 정부의 공기업들에 대한 민영화를 빗댄 민간투자  정책으로 물세, 전기세도 앞으로 더 오를 것이 예상된다. 어디 이뿐인가? 의료 질 향상을 위한 의료보험의 민영화 방안이 논의되고 있고 교육 질 향상을 위한 학원자율화 정책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여기 대한민국의 현재 상황이 ‘이명박’ 정부‘만’의 성과일까? 아쉽지만 그렇지 않다. 단지 이명박 정부, 그들만의 리그만으로 보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 2008년 한국에서의 현실은 그들 때문만이 아니다. '이명박'때문에 모든 것이 나빠진 것은 아니다. 지금 이곳 대한민국에서는 국민들이 바랐던 ‘삶’이 전개되고 있을 뿐이다. 3개월 전까지만 해도 당신이 물러나기를 바라는 이명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민’이 뽑았고, 그는 대한민국 국민의 ‘비전’이었다.

 

왜 국민들은 이명박을 뽑았는가?

 

 속았다고 외치기에 앞서 왜 국민들은 ‘이명박’을 뽑았을까? 당신이, 바란 것은 무엇이었나? 대한민국 국민들은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아마도 경제성장을 기치로 내건 이명박을 뽑은 국민들이 바란 것은 더 잘 먹고 잘사는 것이었다. 그들의 바람은 경제성장을 통해 더 많은 돈을 벌어서, 더 좋은 것을 먹고, 더 좋은 곳에서 사는 것이었다. 돈으로 환산되고, 숫자로 설명할 수 있는 성장, 효율, 실용의 가치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가? 더 잘 먹기를 원했으나, 광우병의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와 안정성이 확인이 되지 않은 GMO가 우리의 식탁을 위협하고 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생명과 동물과 자연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또한 더 좋은 곳에서 살고자 진행된 뉴타운과 재개발 사업은 보상 받은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내지 않으면 한 개인의 인생과 역사가 담겨있는 삶의 터전을 떠나 더 많이 가진 자들에게 내어주어야만 하는 실정이다. 도대체 무엇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인가?  누구를 탓하는가?  이 모든 것이 이명박 정권의 문제인가?


 단기간의 고도의 경제성장, 한강의 기적, 아시아의 다섯 마리의 용, 한국 전쟁 이후 쉬지 않고 달려온 대한민국에 붙는 이름들이다. ‘좀 더 많이, 좀 더 빨리, 조금만 더’를 외치며 살아온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잘사는 것인지에 대해 물을 겨를이 없었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그 누구도 ‘어떻게’ 사는 것이 삶인지, ‘무엇이’ 삶의 가치인지 묻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스스로의 삶에 대해 물어야 할 때이다. 지금 이곳, 대한민국에서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자본의 극대화된 이윤추구 등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땅에서 자라고 키운 곡식으로 밥을 먹는 것이 위협받고 있다.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위협받고 있다.


 지금 이곳에서 수만 명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단지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기 위해서 거리로 모여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의 ‘삶’에 대해 외치고 있다. 무엇이 살만한 삶인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말해왔던 ‘경제성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때이다. 나의 삶의 가치에 대해, 우리의 삶의 가치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보아야 할 때이다

 

 

 글쓴이 : 지구

 20080609

 photo by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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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31일. 당신은 이날을 어떻게 기억하실껀가요?

 

 

오늘도 촛불집회를 다녀왔다. 친구들과 끝까지 함께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다.

 

오늘, 우리는 주황색 터널을 지나고, 장미덩쿨 담을 너머 겨우 도착한 경복궁 옆에서 사람들과 몇시간을 목청터지게 '이명박'을 외쳤다. 도로를 걷고 걷는 내내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가도, 다시금 가슴이 어느 순간 먹먹해지기를 여러번 반복했다. 밤 11시가 넘어 경찰들로부터 물대포가 사람들에게 쏘아졌고, 지금 이곳이 대한민국인지, 서울인지 도저히 분간이 되지가 않았다. 사람들 틈에 끼여서 앞으로 가지도 뒤로 가지도 못하는 생지옥에서 하늘을 쳐다보니, 별이 반짝인다. 파랗게 초록빛이 그득한 나뭇잎사귀가 까만 밤하늘에 빼곡하다. 수백년 전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오늘과 같은 밤을보내었을까?

 

대체 이곳은 어디인가? 이곳은 누구를 위한 땅인가?

 

오늘도 사람들은 길 위에 있다. 돌아갈 곳이 없다. 사람들은 희망을 찾기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여기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면, 우리에겐 돌아갈 곳이 없다. 다행히도 우리가 모인 이곳에는 좌파나 우파와 같은 전선도 없고 모두가 동지가 되어 한 목소리를 외칠 수 있다. 희망을 느낄 수가 있다. 그래서 살아있음을 느낄 수가 있다.

 

 "독재타도, 이명박타도"참 대단하다. 취임 100일을 맞아, 시민으로부터 진심으로 대통령 퇴진을 외치게 만들었으니.

 

87년 민주항쟁 때도 그랬을까? 아니 더 무서웠겠지. 나는 오늘 나에게 익숙한 이 공간에서

무한한 공포와 두려움에 직면했다. 내 앞에 무장을 한 경찰이 계속해서 나와 사람들을 제지하였다.

 길은 계속해서 막혔다. 평화롭게 걸어다녔던 서울의 거리는 새까만 전경들에 의해 거리 곳곳이 막혔다.

그러나 우리는 전경차에 의해 도로가 완전히 봉쇄되어 통과를 못하게 되면 골목으로 돌아가고,

시장을 지났다. 담을 넘고 가드레일을 뛰어넘었다.  전경이 다른 곳에 집중을 하는 동안 생긴 틈으로

사람들을 뛰고 또 뛰었다. 친구가 담을 건너고 있는데, 전경 한명이 미친듯이 달려와 소리를 지르며

친구의 앞에 있던 한 시민을 끌어내려 잡아 당겼다. 사방에 전경들이 에워싸 가슴이 먹먹하였다.

그리고 무서웠다. 잡혀갈지도 모를 두려움, 커다랗고 단단한 방패에 의해 찍힐지도 모른다는 공포.

함께 있던 친구들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절대 놓치면 안돼"

 

온통 초록빛이 가득한 5월의 서울에서 우리는 새까만 전경들을 피해 뜨거운 아스팔트 도로를 뛰고 또 뛰었다. 친구의 손을 붙잡고 있어 다행이었다. 눈물이 쏟아지려하였지만, 꾹 참았다. 우리는 뛰어야 했기 때문이다.  전경과 대치하며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친구에게 물었다. "우리 한 10년 후에 오늘 5월 31일을 어떻게

기억할까? 사람들은, 저 아이들은 어떻게 오늘을 기억할까?" 우리는 그냥 씨익 멋쩍게 웃기만 한다.

 

그러나 아마도, 2008년 5월 31일, 오늘을 기억한다면 희망을 기억하지 않을까.

이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뒤섞여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살아낼 것이라는 희망을 떠올리지 않을까.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고 있다.

오늘은 뛰다 넘어져서 긁힌 손등과 손목, 팔꿈치가 유난히도 쓰라린다.

오늘 맨 몸으로 경찰의 폭력과 물대포에 다치신 분들의 쾌유를 진심으로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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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군복입은 예비군들에게 제지당했다.

                                                                                    

 

나는 오늘 군복입은 예비군들에게 제지당했다.

왜 그들은 군복을 입고 어머니의 은혜를 부르는가?

 

 

 오늘도 촛불집회에 다녀왔다. 그러나 나는 오늘 전경들에게, 경찰들에게 제지당하지 않았다. 나는 오늘 군복을 입은 예비군들에게 제지당했다. 시청에서 출발한 거리행진은 자유롭게 구호를 외치며 진행되었다. 그러나 갑자기 군복을 입은 자들이 도로의 중앙선에 일렬로 줄을 섰다. 중앙선에 서려하자, 위험하다는 이유로 그들은 나를 제지하였고 그들이 만든 대열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군복을 입은 자들이 만든 대열안에 들어가기 싫어 앞으로 가고 또 갔다. 가다보니 그들이 일렬로 지켜주지 않는, 그들이 서있지 않은 곳인 선두에  어느새 있게 되었다. 명동과 남대문을 지나 시청광장에 다시 도착하였을 때, 전경들과 맨 앞에서 대치를 하게된 나는 갑자기 일렬로 나타난 군복을 입은 자들에게 제지당했다. "위험하다, 여성과 어린이는 뒤로 가라"고 외치는 그들에게 나는 "나도 앞으로 가겠다"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들은 꿈쩍하지 않았다. 대화를 하기 위해 어깨를 두드려도 군복을 입은 그들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앞으로 가려고 하여도 그들은 스크럼을 풀지 않았다. 기자나 언론사들에게는 스크럼을 풀어 길을 내주었지만, 군복을 입지 않은 자들에게는 스크럼을 풀지 않았다. 물론, 내가 굳이 맨 앞에 갈 이유는 없다. 그리고 한번도 맨 앞에 있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오기가 생겼다.  왜  군복입은 자들과 함께 서거나, 앞에 서지 못하는가? 왜? 군복을 입지 않아서인가?

 

사람들은 왜 그들에게 박수치며 환호하는가?

 

 나도 군복을 입은 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과거 민주화 항쟁 때 시민들을 핍박하였던 자들이 군인들이었다면, 지금은 함께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도 자신의 시간을 내어 품을 팔아 이 곳에 왔고 사람들을 위해 수고하고 있음을, 고생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촛불 집회와 평화시위에 참여한 다른 많은 시민들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우리는 다같이 함께 수고하고 있고 고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함께 시청 앞 젖은 잔디밭에 몇 시간동안 쪼그리고 앉아 목청껏 고시철회를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함께 도로에서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시민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우리는 자율적으로 질서를 지키고 있고, 서로를 믿고 의지하고 지켜내고 있다. 군복을 입은 자들이 나타나기 전에도 우리는 우리의 대열을 잘 지켜나갔고, 군복을 입은 자들이 우리들을 사수하지 않아도 우리는 자발적으로 스크럼을 짰다. 그러나 며칠 전부터, 그리고 오늘 군복을 입은 자들이 시민을 보호하기를 원한다.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행동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왜 그들은 형광쪼끼를 입지 않고 군복을 입어야 하는가? 왜 그들이 만들어낸 질서 속에 시민들이 따라야만 하는가? 왜 그들이 맨 앞에서서 시민들을 사수하는가? 왜 어린이와 여성들을 그들이 보호해야 하는가? 유감이다. 군복입은 자들의 군사주의 문화에 유감이다.만약 군복을 입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 군복을 입더라도 일사분란하게 일렬로 맨 앞에서 스크럼을 짜거나 도로의 중앙선에 서서 시민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커피나 차를 타서 시민들에게 따뜻함을 전했더라면 어땠을까? 군복을 입고 유모차를 끌며 시위를 하였다면 어떠했을까? 그들은 지금 이곳에 시민으로 왔는가, 예비군으로서 왔는가?

 

 

오늘 집회에서 외쳤던 구호들에 '유감'

 

 "여성과 어린이들을 지켜주는 예비군들께 응원의 함성을.." "쟤들도(군복입은 자들) 우리편인데, 도와주려고 하는데 싸우지 마라" "어청수 아들 군면제, 이명박 군면제" 앞의 구호들은 오늘 집회에서 사람들이 외쳤던 구호들이다. 왜 군복입은 자들에게 여성과 어린이들을 지켜달라 하는가? 우리는 평화시위를 하고 있다. 그들이 우리를 지켜주지 않아도, 괜찮다. 물론, 지켜달라고 한적도 없다. 나는 오늘 군복입은 자들의 뒤에서 군복을 입지 않은 자들은 앞에 설 수 없는가라고 외쳤다. 그러나 옆에 있던 한 남성분이 다들 같은 편인데 왜그러느냐고 물었다. 물론 우리는 이명박 정권에 대해 비판을 하기 위해 모였다. 미국 쇠고기 수입 철회를 위해 한날 한시에 한 곳에 모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목소리를 내는 방식은 다를 수 있다. 여성도 어린이도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동성애자도 이성애자도 그 누구라도 시민들의 맨 앞에 서서 소리를 낼 수 있다. 왜 위험한가? 평화시위인데 무엇이 위험한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대체 어떠한 시위를 생각하고 있는가?

 

 

군가와 어머니의 은혜 사이

 

 

 전경과 군복을 입은자, 그리고 군복을 입지 않은자가 대치를 한 시청광장 옆 도로에서는 사람들은 군가를 불렀다. 그리고 군가를 부른 후 누군가 전경들에게 소리쳤다. 너네들 어머니도 미국산 쇠고기를 먹지 않느냐라고. 그리고는 전경들의 감수성을 자극하기 위해 어머니의 은혜를 불렀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왜 그들의 어머니를 이용하는가? 왜 아버지는 말하지 않는가? 여성과 어린이들은 뒤로 빠지길 원하면서 전경들을 자극하기 위해 왜 모성을 이용하는 것인가? 더욱이 그들이 외치는 구호 속의 모성은 은혜로움과 퍼킹(fucking:어머니가 아들과 붙어먹는다는 어원) 외엔 들리지가 않는다.

 

 우리는 지금 2008년 봄, 대한민국에서 수많은 시민들을 만나고 있고 수많은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10대 청소녀들에게서 시작된 촛불집회에서 우리는 연령과 계층, 전선을 넘어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들의 삶을 위해 한날 한시에 모여서 소리치고 있다. 또한 우리는 똘레랑스를 실천하며 함께 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정말 멋지다. 수고가 많다. 마음 깊숙히 진심으로 박수와 사랑을 보낸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왜 이곳에 함께 모였는가를 생각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어떻게 함께 해나갈 것인가를 이해와 배려에 바탕하여 고민하는 것이다. 다음 집회에서는 군복을 입은 자도 입지 않은 자도 함께 질서를 만들어가고, 함께 서로서로를 지켜나갈 수 있길 바란다. 누가 누군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평화시위를 경찰들과 정부의 위협에도 어떻게 평화적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린 이제 시작했다.

 

 

photo by 유성호(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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