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06/05/02 00:01
Filed Under 내 멋대로 살기

이번 메이데이 기획안을 보면서 기대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다.

 

'서울시민한마당'류의 기가찬 기획안을 보고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블로그에서 논란이 되었던 포스터를 보아서 더 기대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비정규법안 '통과'시 국회앞이라는 지침에서 이미 실망할 만큼 실망 했었다. 531 지방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선거 분위기가 휩쓸고 있을 거라는 예상도 충분히 했다.

 

굳이 왜 가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오래간만에 여러 동지들 얼굴도 보고 노동절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판이 맘에 안 든다고 안 가는 것도 웃기다 싶었다. 한노보연의 선전물도 있고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블로거들의 선전물도 있었는지라 참석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별 기대 없이 갔다.

 

사실 작년 노동절의 충격이 워낙에 커서리 더 이상의 충격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작년에 독도문제에 대해 '일심으로 대동단결'류의 남북노동자가 합심으로 싸우겠다는 특별결의문의 충격이 난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

 

설렁설렁 유인물 돌리고 동지들 만나서 이런 저런 일 얘기도 하고, 약속도 잡고, 살던 이야기들도 하면서 연단의 이야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수도권 문화패 동지들은 배제된채 자신들의 색깔에만 맞는 '우리나라'류의 이름부터 맘에 안 드는 노래패가 나온것까지도 뭐.. 그냥 그렇다고 생각했다. 어짜피 소위 '좌파'가 민주노총을 잡았을 때도 우파들의 노래패는 중앙단상에 못 섰으니 그냥 그런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충격을 또 경험하고야 말았다.

 

어린이들이 나와 율동을 하는 그 순간... 처음에는 '아빠'만을 부르는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슬슬 짜증이 나며 귀에 꽂히기 시작했다. '쟤네들은 엄마가 없나?' 그리고 '아빠가 아닌 나같은 사람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열번에 엄마 한번쯤 나오는(사실 나는 나오는거 몰랐는데 다른 동지들이 '엄마'가 나오긴 나왔다고 했다.)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노동절 포스터와 엮이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렇지... 도대체 언제 바뀌냐'는 생각을 하면서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사실 그때까지도 단상에는 시선을 두고 있지 않았다.

 

그러던 내가 단상을 쳐다보게 된 것은 두 번째 노래부터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북쪽스러운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을 때였다. 단상을 바라본 나는 짜증과 경악을 넘어 허탈해지고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손과 머리에 꽃만 달면 북한 방송을 보는 줄 알았을 거다.

 

일요일 아침 우연히 튼 TV에서 '통일전망대'류의 프로그램을 발견했을 때의 호기심도 아닌 당혹감 그 자체였다. 흰색 상의에 검은색과 빨간색 하의를 받쳐 입은 아이들의 모습은 정말 당혹스러웠다. 정말... 이게 노동절이 맞나 싶었다.

 

기가 차서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리에 앉을 무렵 시청 광장 하늘에 떠 있는 에드벌룬 두개가 눈에 들어왔다. 난 에드벌룬과 플랑이 두개 걸려 있길래 당연히 '비정규직 차별철폐'와 '로드맵 분쇄' 같은게 걸려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노동절 에드벌룬은 '승'자와 '리'자가 새겨져 있었고 각각의 플랑에는 '정치세력화'와 '보수양당심판'이 달려 있었다.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여기저기 민주노동당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선거에 맞춰 주황색이 들어간 옷을 입고 넥타이를 한 사람들... 몇 년만에 만난 학교 선배는 출마를 했다며 그 지역에 아는 사람이 없냐고 묻는다. 언제부터 민주노동당이 '아는' 사람으로 선거했냔 말이다!

 

집회가 끝나갈 무렵 환한 얼굴로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민노당 사람들을 보면서 허탈해졌다. 얼마전 하이텍 연대주점에 '하이텍'이 뭔지도 모르고 나타났던 그 지역 후보를 바라볼때의 씁쓸함이 고스란이 되살아 났다. 일상적으로 연대는 못 하더라도, 선거운동을 하러오더라도 그곳이 왜 싸우는지 뭔가 쟁점인지는 알고 와서 동지들과 교감이라도 하고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그날의 기억이 겹쳤다.

 

민노당이 너무 안타깝다. 아니 가슴이 아릴 정도로 아쉽다. 정말 잘 되기를 바랬는데, 가능한 희망이라고 생각했었던 적도 있었는데... 이건 좀 심하다 쉽다.

 

집회가 끝난후 터벅터벅 서부역으로 향했다. KTX 동지가 수배중인데 팔을 들지도 못한다는 연락을 받아서였다. KTX 농성장에서 만난 동지를 간단히 진료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회의를 하러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나마 크게 다친것은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먹으라고 도시락까지 챙겨주는 그 동지들의 따뜻한 마음에 괜시리 미안해졌다.

 

멀지도 않은 거리인데... 사진찍은 사람들 여기에 모여서 힘이나 북돋아 주고 갔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굳이 격렬하게 물리적으로 싸우는 것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노동절은 정말 '노동절'스러웠으면 좋겠다. 노동자들이 발언하고 소통하고 이야기하는 광장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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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02 00:01 2006/05/0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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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 차라리 하루 쯤 '해방'을 즐기자

    Tracked from / 2006/05/03 02:48  삭제

    차라리 하루 쯤 '해방'을 즐기자. 평소에 못해본 거 해보고 못해본 말 해보고. 주관자가 할 말 다 정해놓고 모여든 사람들에게 훈시하듯 지껄이고 노래하고 춤 추는 건 아주 오래 전에 '해방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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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윤영 2006/05/03 17: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그 노래에 엄마도 나왔구나, 하며 안심해야 하나..큭
    정말 어이상실의 날이었음! ㅠㅠ

  2. 행인 2006/05/03 21: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노래에서 엄마는 1절 맨 앞에 한 번 나왔어요. 엄마는 모르실거야던가... 거의 같은 생각을 하는 분들이 많았군요. 이게 통일축전인지 민주노동당 전당대횐지 구분이 가지 않는 것이 저만 그런 건가 하고 의아했는데, 이런... 벌써 몇 년째 내년엔 안 간다 그러면서 가고 있는데, 정말 내년에 또 가야할지 걱정이네요... 쩝...

  3. 해미 2006/05/04 11: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윤영, 행인/ 엄마가 나온거 저는 몰랐습니다. 나왔다길래 내용이 '아빠'랑 같은 건지 알았습니다. 근데 알고보니 '엄마'와 '아빠['의 가사가 완전이 달랐더군요. 저두 계속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지만 그럴수록 자꾸 가서 그거 틀렸다구 이야기라두 해주고 우리하고 싶은 얘기라도 자유롭게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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