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04/12/15 20:33
Filed Under 내 멋대로 살기

풀무원 투쟁이 끝났다. 오늘 오후 남은 약속 시간을 때우기 위해 서점 근처에서 얼쩡거리던 나의 전화가 드르륵... 울린다.두터운 겨울옷을 통해진 진동... 풀무원 춘천공장 위원장님이었다. 몇일전 파업즈음부터 아프기 시작하던 허리가 너무 아프다고, 병원에서 MRI를 찍자고 그러는데 투쟁기금도 없는 마당에 산재신청을 하면 어떻겠냐고 전화를 하셨었다. 2000년 조합이 만들어질 때부터 조합 상근이셨으니, 사측은 당근 신청서에 도장을 안 찍어 줄 것이고, 요즈음 근로복지공단의 짜증나는 자세를 생각하면 승인날 가능성이 매우 희박했다. 법정에 가면 한가닥 머리카락 같은 희망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나긴 어려웠다. 이런 나의 대답에 위원장님은 '그럼 어쩔 수 없죠. 투쟁하고 있는데 소송을 할 수도 없고...그냥 참아봐야죠.'라고 하셨다. 최근에 조합원들 중 일부가 현장으로 복귀하면서 힘 빠지기 시작한 목소리가 더 작아진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오늘... 그것보다 100배는 더 작아진 목소리로, 그리고 힘 없는 목소리로 전화가 온 것이다. 내가 위원장님을 알아온지 2년이 넘었건만... 그 동안 엄청나게 전화 통화를 주고 받고 춘천에서 술도 여러번 먹었건만... 그런... 그런, 힘 없는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어젯밤, 타결을 보셨다고 한다. 화섬연맹이 교섭권을 넘겨 주지도 않고, 조합원들도 많이 지쳐가고, 정말로 '이젠 끝내고 싶다'는 생각외에는 머릿속에 남은게 없더라는 위원장님의 말에 나까지 다리에 힘이 빠져 서점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어떻게 합의 하셨는데요?' '처참하죠.뭐... 휴...' '조합원 동지들은 어떠세요?' '울음바다죠.뭐...' 아프고, 죄송스럽다. 한게 없어서, 많이 가보지도 못 해서, 칫솔도 열심히 팔아보지 못 해서, 선전작업하나 도와드리지 못해서... 아프고, 죄송스럽다. 공공연대 집회에서, 노동자 대회 주점에서 오래간만에 만나 맑은 눈빛에 웃음 가득 띄고 반갑게 인사를 건내주시던 조합원 동지들과, 작년 겨울 위원장님의 삭발식에서 '저희만 믿으세요'를 외치면서 통곡하시던 아주머니 조합원들과, 남자처럼 짧아진 머리 허허로이 쓰다듬으면서, 아들 걱정하시면서도 눈빛은 살아있던 사무국장님과, 칫솔들고 집회판을 다니다가도 나랑 눈이 마주치자 두팔 크게 벌려 인사를 건내시던 아주머니 조합원과, 춘천에서 농성하고 있으니 끝나기 전에 한번 놀러오라던 눈매 서글서글한 조직부장님과, 주점에서 육계장 한 그릇 가득 담아 주시던 총무부장님... 많은 동지들의 얼굴이 스쳐갔다. 죄송스러웠다. 그리고 아팠다. 결국 졌다. 많이 아프고 다쳤을 그 동지들의 맑은 눈빛이 안타깝다. 조직부장님한테, 위원장님한테, 강원본부 동지한테... 전화를 했다. 가겠다고, 무조건 갈테니 술이나 푸지게 마시자고 말씀드렸다. 작년 12월... 1년 가까이 진행된 근골투쟁에서 합의하시고, '제대로 못 싸워서 따낸게 없어요. 미안해서 어쩌죠?'라던 분들이다. 그런 분들이다. 이번 주말, 중증장애인 요양원 건설을 위한 우아한 연주회에서 김광민의, 노영심의, 불독맨션의 공연을 편안하게 보고 오랜만에 만날 선후배들과 즐거운 술자리를 할 예정이었으나... 가야겠다. 춘천으로... 동지들의 다쳤을 눈을 마음으로 감싸앉고, 그 동안 한번 가보지 못함을 사죄해야겠다. 졌지만, 여전히 맑을... 그리고 또 새싹을 틔우듯 일어나 다음 투쟁을 준비하실 동지들하고 술이라도 먹어야 겠다. 그 동안의 힘듦을, 들어드리지 못한 얘기들을 밤을 새서라도 몽창 다 듣고 와야겠다. 오늘, 내 눈가에 고이는 눈물을 삼키고... 동지들하고 부둥켜 안고 대성통곡이라도 하고 와야겠다. 그렇게... 다시 내년을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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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15 20:33 2004/12/15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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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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