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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9/03

뒤르까임(E.Durkheim), 150년 (+audio)

모르고 지나갔더니만, 작년이 뒤르까임*(Emile Durkheim, 1858~1917) 탄생 150년 기념해 였다는군. 그래서 작년 말에 빠리에서 어떤 학술 대회가 있었던 모양이고(2009/11/4~5), 그것을 녹음해서 아래의 '방송아카데미'(canal academie)라는 곳에서 들려준다(49분14초). '펌'은 안되는 듯하고, 함께 있는 텍스트와 링크만 옮겨온다. 녹음이 약간 늘어지는 부분도 있으나 듣는데 큰 지장은 없다. 찾아보니 국내기사로는, 역시나 뒤르까임 탄생 150 주년을 기념하는 민문홍의 지난 글(2008/1/29)이 교수신문에 있다. 기고자께서 뒤르까임의 <사회학과 철학>(1951)을 지금 번역 중이고, 거기서 뒤르까임의 "새로운 도덕적 이상의 탄생을 엿보"(제목)는 모양이다. 밑에 옮겨다 둔다.

(*) 아래의 민문홍 글에서는 "뒤르케임"으로 표기가 돼 있으나 나는 '뒤르까임'으로 한다. 물론 한글표기법에서는 'ㄲ' 류 보다는 'ㅋ' 류를 따른다고('빠리'보다는 '파리'를) 하는 모양인데, 나야 뭐, 이 블로그 내용이 출판될 것도 아니니 한글표기법 보다는 실재발음에 충실한 표기를 선택한다. Paris에서는 아무도 '빠리'를 '파리'라고 하는 사람은 없고, '뒤르까임'을 '뒤르케임'이라고 하지도 않는다. 단지 내게 문제는 '까임'이냐 '께임'이냐 였는데, 다시 아래 녹음물을 자세히 들어보니, 이건 '까임'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한 '께임'도 아닌 중간 쯤인 것으로 들린다. 물론 이름 스펠링의 기억을 돕기 위해서는 '뒤르께임'이 낫겠으나, 살아있는 발음을 다시 확인해보니 '뒤르까임므'에 가까운 '뒤르까임' 이다. 

 

Emile Durkheim et les philosophes de son temps [뒤르까임과 당대의 철학자들] 

par Bertrand Saint-Sernin, de l’Académie des sciences morales et politiques
A l’occasion du 150 ème anniversaire de l’un des plus grands sociologues français, Emile Durkheim, l’Académie des sciences morales et politiques a tenu un colloque à l’Institut de France, les 4 et 5 novembre 2008. Ecoutez ici le philosophe Bertrand Saint-Sernin qui s’attache à saisir le « métaphysicien » qui se cache derrière la figure du fondateur de la sociologie française, Émile Durkheim. Il le situe dans la philosophie de son temps.
Référence : col531; Date de mise en ligne : 25 janvier 2009
Adresse de cet article : http://www.canalacademie.com/Emile-Durkheim-et-les-philosophes.html
Emile Durkheim  
Le philosophe Saint-Sernin tente de comprendre les bouleversements qu’a connus la philosophie à la fin du XIXème siècle à partir de l’émergence de toutes les sciences humaines et sociales. Il décèle ainsi l’originalité de Durkheim qui place son analyse au cœur de sa nouvelle science des religions. La science selon ce dernier « doit prêter main forte à la philosophie », en sorte qu’il n’y a pas de « dissociation » entre les deux. Mais pour y réussir, il s’avère nécessaire pour le sociologue de travailler collectivement. Comment édifier une science du social ? Comment fonder une morale sans transcendance ? Telles sont les questions modernes qui préoccupent Durkheim. Mais d’un point de vue méthodologique Durkheim selon Saint-Sernin s’en remettrai à la lecture de Platon... En effet, la réalité « doit être découpée » comme le ferait un bon boucher.

Puis dans une deuxième partie, Bertrand Saint-Sernin s’interroge : Quelle fut la participation de Durkheim à la philosophie de son temps ? Durkheim en parle très peu, il évoque rarement ses contemporains philosophes. Cependant, il conseille aux écrivains de lire les philosophes afin de déceler les idéologies qu’ils véhiculent. Par ailleurs Durkheim a présidé le jury de l’agrégation de philosophie de 1895 et a fait partie de nombreux jurys de thèses. Il a même donné deux conférences à la Société française de Philosophie, participé au congrès de Bologne en avril 1911 avec Bergson et rendu compte de sa conférence. Enfin, dans une troisième partie, Bertrand Saint Sernin évoque plusieurs philosophes qui ont donné leur témoignage sur Durkheim : Gilson (qui fut son élève) dans Le Philosophe et la philosophie ; Bergson dans Les deux sources, Blondel, Lévy-Brühl et même l’historien des religions Loisy. Bertrand Saint-Sernin détaille donc la manière dont chacun d’eux a évoqué Durkheim, en positif ou en négatif. 

Ecoutez aussi sur Canal Académie :

- Emile Durkheim : comment il ne fut pas élu à l’Académie ! par Michel Albert
- Emile Durkheim et Friedrich Ratzel : frontières disciplinaires par Bernard Valade

 

참 재밌게도, 위의 글은 뒤르까임의 사회학이 얼마나 긴밀히 철학과의 연관 속에 있는지를, 결국 그 둘은 결코 분리될 수가 없다는 것을(노란 밑줄 부분), 그리고 뒤르까임은 사회학자이면서도 계속 철학자였다는 것을 말하는데; 반면, 아래 글은 뒤르까임을 통한 뭔가 새로운 사회학이 철학이 못한 부분을 대체하고, 나아가서는 "기존의 철학을 새롭게 갱신하고", 그 독보적 위상을 사회 속의 구체적 실천과정에서 확보할 수 있다는 듯하다. 글쎄, 판단은 독자의 몫!

 

 

새로운 도덕적 이상의 탄생을 엿보다 
[지금 번역중입니다] 에밀 뒤르케임의 Sociologie et philosophie(PUF, 1951) 
2008년 01월 29일 (화) 13:44:16 민문홍 / 서강대·사회학 ⓒ 교수신문

 

 
   

올해는 뒤르케임이 탄생한지 150주년이 되는 해이다. 같은 해에 또 다른 사회학의 거장 게오르그 짐멜이 태어났다. 올해에 필자가 번역을 준비하는 뒤르케임의 저서는 『사회학과 철학』이다. 뒤르케임을 읽는 사회학도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 책은 뒤르케임이 1898년부터 1906년 사이 출간한 몇 편의 논문들을 수제자인 소르본 대학의 정치사회학자 쎌레스텡 부글레가 그의 서문과 함께 새로 편집해 프랑스 대학출판사에서 1951년 출간한 책이다.
부글레가 뒤르케임의 사후 이 책을 출간한 이유 중 하나는, 프랑스 사회학사를 되돌아 볼 때, 어떤 의미에서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 사회학이 기존의 철학을 새롭게 갱신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는 같은 맥락에서 프랑스 3공화정 당시에 왜 철학보다 사회학이 중ㆍ고등학교에서 청소년의 가치관 정립과 관련해 더 큰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데 이 책에 선별된 뒤르케임의 논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뒤르케임이 이 책에 실린 자신의 논문들을 통해 일관성 있게 주창한 것은, 향후 사회학이 국민들의 정신을 계도할 학문으로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계량적 연구에만 만족하지 않고 특수한 분야의 연구들을 다양하게 하고 그것을 종합함으로써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연구한 사회학 선구자들의 연구방식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뒤르케임이 첫 번째 착수한 작업은 도덕에 관한 과학적 연구였다. 뒤르케임은 이 당시 가톨릭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서 도덕에 대한 과학적 논의가 금기시되는 분위기 속에서 과감하게 도덕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다루어야 하고, 기존 도덕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새로운 도덕성의 원리를 사회학이 새로운 학문의 이름으로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새로운 학문인 사회학이 다루는 주제는 다음의 몇 가지 항목들이었다. 도덕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이 사회에서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뒤르케임의 잠정적 해답은, 도덕은 사회의 열망을 해석하면서 해당 사회가 형성되고 발전되는 방식을 일반 시민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의 평생을 통한 연구 프로젝트의 주제는 도덕사회학이다.

 

도덕을 신앙으로 보는 지적 풍토 비판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뒤르케임은 실증과학으로서의 사회학을 주창했다. 특히 그가 1906년에 특별히 정성을 기울여 쓴 논문인 ‘도덕적 사실의 결정’은 1893년에 쓴 ‘사회분업론 서문’에서 미처 다하지 못한 논의를 정리한 글로, 뒤르케임의 도덕사회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커다란 학문적 의의를 지닌다. 이 논문에서 뒤르케임이 보여주는 학문적 관심은 도덕의 문제를 과학의 주제로 생각하는 것을 터부시하고 신앙의 문제로만 여기는 당시의 지적 분위기를 비판하면서, 후기 기독교 시대에 어울리는 도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선행돼야 하는 작업은 도덕의 문제와 관련해 실증적 관찰에 의해 확립된 토대를, 더 이상 어려운 철학적 용어가 아닌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과학적 권위를 가진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이름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뒤르케임은 사회학이 이러한 작업을 하기 위해 선행 조건이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사회학이 자신의 실증적 연구업적뿐만 아니라, 이 새로 태어나는 학문의 원칙에 대한 성찰적 토론을 통해 왜 이 새로운 학문이 필요한지 다른 과학자들과 일반 시민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철학과 차별화된 문제제기를 함과 동시에, 사회학과 기존의 다른 학문들과의 관계, 방법의 차이점, 그리고 학문의 위계질서 등에 대한 체계적 성찰을 통해 전문가들과 시민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뒤르케임은 기존의 학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의식 및 이성이 자연과 맺고 있는 관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특히 그 과정에서 인간의 이중성(인간의 인간다운 본성과 동물적인 본성)을 인간관으로 강조함으로써, 도덕교육의 핵심을 ‘인간 본성의 귀한 인간적 이상을 격려하고, 동물성을 훈련을 통해 억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도덕과학과 도덕교육의 기초를 확립했다.
한편, 뒤르케임이 여기에 쓴 논문들은 『사회학 방법의 규칙들』(1895)처럼 그의 사회학 방법론을 사회학주의(sociologism)라고 비판하는 논평에 대한 명쾌한 답을 주는 저작들이기도 하다. 뒤르케임은 새로 태어나는 학문의 일반 공중에 대한 설득력을 얻기 위해 곳곳에서 은유적ㆍ상징적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게다가 그의 사회학 이론은 종종 몇 가지 애매모호한 부분을 가지고 있어서 다양한 학문적 분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 비판들의 핵심은 뒤르케임을 유물론, 유기체론, 사회적 공리주의로 분류하고, 이러한 판단에 입각해서 그의 학문적 입장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때 그의 비판자들은 이러한 주장이 나오게 된 앞뒤 맥락과 뒤르케임의 전체적 연구의도를 무시했다. 이들이 뒤르케임을 공격한 주된 대목은 그가 『사회학 방법의 규칙들』에서 “사회적 사실을 사물들로 다뤄야 한다”고 한 주장이었다.  

물론, 당시에 뒤르케임이 다양한 상징적 문구로 표현하기를 원했던 진정한 의도는, 특정 대상을 연구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모든 편견들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과, 특히 도덕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할 때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과 자신의 감정 확인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제도에 대한 연구가 자연과학이 사물을 연구하는 경우처럼 학문적 권위를 갖기 위해서는, 인간의 심리적ㆍ주체적 반응을 고려하고, 모든 것을 외부의 요인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회를 구성하는 작은 단위인 개인들만으로 사회와 같은 특수하고 우월한 존재를 설명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개인의식-집단의식이 구성하는 문화에 주목해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뒤르케임은 슬그머니 오늘날 현대 사회학자들이 주목하는 문화사회학적 문제의식을 끌어들인다. 그것은 “사회는 무엇보다도 사상의 총합”이라는 표현이다. 뒤르케임이 살아 있었던 당시에는 문화라는 표현도 프랑스에서는 생소했다. 따라서 그는 그 대신에 ‘집단표상’ 또는 ‘집합적 가치의식(conscience collective)’이라는 표현을 맥락에 따라 자유롭게 바꿔 썼다. 그의 주장을 현대사회학식 용어로 표현하면, 사회학은 인간이 살고 있는 물질적 기반과 그 유형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심리, 영혼 및 정신 상태에 주목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도덕과학으로서 사회학의 핵심적 연구대상의 하나는 특정 사회의 여론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의식을 통해 서로 연결돼 있으며, 집단신앙은 모든 사회의 살아있는 연결고리이기 때문이다. 이때 사회학자들이 고려해야 할 특정한 연구대상은, 인간들의 정신과 의식의 만남이라는 생화학적 결합과 종합을 통해 원래의 개별적 인간 의식 속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개인들로서는 예측할 수도 없는 새로운 사회현상들의 우발적 탄생에 주목하는 것이다.

즉, 사회구성원들 간의 격렬한 만남을 통해 만들어진 집단표상은 일단 형성되면, 서로 결합되고 배척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고유한 정신적ㆍ심리학적 법칙을 지닌 전체를 만들어 낸다. 이것을 현대적 용어로 표현하면 문화이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집단생활의 표상들은 인간 정신의 권리를 보존하기 위해 필요하고 충분한 상대적 자율성을 지니게 된다.

결국 뒤르케임에 의하면 집단표상으로서의 종교적 신앙과 과학 사상들은 그것이 활동하고 있는 사회의 단순하고 순수한 반영이 아니라, 자체만의 힘으로 존재하는 특별한 형식을 가지며, 인간의 공동체적 삶이 있는 곳에서 그 구성원의 속성을 뛰어넘는 종합적ㆍ창조적 결과물이다. 따라서 특정 사회의 도덕은 개인의식이 집단의식과 연결됨으로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렇게 보면, 사회는 조직과 기능체계가 아니라 도덕적 생활의 근원이다. 그리고 사회의 진정한 기능은 그 안에서 기존의 사회적 이상을 극복하는 새로운 이념을 찾아냄으로써 새 시대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도덕적 이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칸트의 관점을 빌리면 사회는 개인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단체일 뿐만 아니라, 개인을 더 인간답게 고양시켜주는 수단이기도 하다. 집단생활이 개인들에게 강요하는 도덕적 훈련을 통해 개인의 영혼은 도움을 받는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도덕적 훈련 없이 발전할 수 없다. 인간은 사회의 도덕적 권위에 복종함으로써만 해방되는 것이다. 이때 집단표상으로서의 문화는 공동체 생활을 발전시키고, 인간을 더 인간답게 완성하는 데 필요한 도구이다.

그리고 문화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정신적 생활의 조건들을 준비하면서 인류의 장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결국 그의 사회학의 목표는 일부 학자들이 성급하게 비판한  조악한 형태학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론과 방법론으로 세기말적 전환의 시점에 당시의 정신문명의 흐름들을 포착하고 분석할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고, 그러한 작업을 하는 학문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비록 한 세기 전에 논의된 논문들이지만, 뒤르케임의 이러한 학문적 논의들은 오늘날 뒤르케임의 문화사회학에 관심을 갖는 사회학도들에게 커다란 시사점을 준다. 그가 세기말의 혼란한 시점에서 다양한 사회주의 이론과 혁명적 이론들이 조악한 방식으로 프랑스 사회의 문화적 대안을 마련하고 있을 때, 학자로서 차분하고도 냉정한 자세를 잃지 않으면서, 다양한 분야의 경험적 연구의 뒷받침을 받아 도덕사회학 작업을 완성함으로써 프랑스 사회의 새로운 정신문화적 기초를 마련하고, 새로운 학문인 사회학이 소명의식과 사회적 유용성을 인정받고 출범할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이것은 21세기 초반 탈냉전ㆍ세계화의 시대에 10여 년간 네오 마르크스주의을 부둥켜안고 한국사회의 문화적 대안을 마련하려 했던 지식인들과 그 와중에서 심각한 문화적 정체성의 위기와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했던 한국의 시민들에게 작지만 소중한 이론적 발상의 계기를 제공해 줄 것이다.

 

민문홍,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대우교수·사회학 / 필자는 프랑스 소르본느대에서 ‘사회주의 운동, 노동조합운동, 카톨릭 사회운동을 보는 에밀 뒤르케임의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맏았다. 현재 국제 비교사회문화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 『에밀 뒤르케임의 사회학』, 『사회학과 도덕과학』 등의 저서가 있다.

 

[참고]

민문홍 :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Paris-Sorbonne(파리 4대학) 대학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대학원 강사, 서울 신학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현재 국제비교사회문화정책연구소 소장으로 인문사회학 분야의 저술 및 번역활동을 하고 있으며, 서강대 대우교수로 있다. 문화사회학회와 한국이론사회학회 이사로 있으며, 1998년부터 구세군 사관학교에서 사회학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사회학과 도덕과학>, <한국인의 일상문화>가 있으며 역서로는 <무질서의 사회학적 위치>가 있다.

1. 사회학과 도덕과학, 민문홍 (지은이), 민영사, 1994년 10월, 10,000원

2. 에밀 뒤르케임의 사회학, 민문홍 (지은이) | 아카넷 | 2001년 7월, 20,000원 [이 책은 1988년 프랑스 쏘르본느 대학교 사회학과 박사 학위논문인 「사회주의 운동, 노동조합운동 카톨릭 사회운동을 보는 에밀 뒤르케임의 사회학」의 후속편이다. 필자는 이 학위논문의 중심이 되는 내용인 뒤르케임 사회학의 지성사적 맥락을 사회학과 도덕학에 소개한 바 있다. 그 이후 10여 년 간 필자는 프랑스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 사회학 공동체에서 나온 뒤르케임의 사회학에 관한 연구작업들을 정리해서 한국의 사회학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본격적인 뒤르케임 연구서를 쓰고 싶어했다. 이러한 작업은 당연히 뒤르케임의 현대성론과 탈현대성론 그리고 동양사회론을 포함해야 했다. 이러한 작업을 하는 데 10년 가까운 독서와 학문적 토론이 필요할 줄은 필자 자신도 몰랐다. - 민문홍(지은이)]

3. 유럽연합의 공무원연금제도 연구, 민문홍 (지은이) | 공무원연금관리공단 | 2005년 6월, 10,000원
4. 현대사회학과 한국 사회학의 위기 - 한국 사회의 인문사회학적 대안을 찾아서, 민문홍 (지은이) | 길 | 2008년 4월, 25,000원 [이 책은 다음의 세 가지 관심을 복합적으로 담고 있다. 첫째, 나는 30년 넘게 복음주의적 신앙을 가지고 사회학도의 길을 걸어온 사람으로서 넓은 의미의 기독교 세계관을 가진 사회학자의 입장에서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진단하고 해결해가는 방법을 검토해보았다. 둘째, 유럽의 중도 우파적 전통을 가진 대표적 사회학자의 이론을 소개한 후에 그 이론적.방법론적 시각을 중심으로 한국의 몇 가지 주요한 사회문제들을 분석해보았다. 셋째, 이러한 문제들을 중심으로 지금 한국 사회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 한국의 사회학자들이 중점을 두어서 탐구해야 할 전략적 연구 영역과 연구 주제의 이론적 틀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서문 | 21세기 한국 사회학은 어디까지 왔는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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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noza & Anthropologie économique (F.Lordon,06)

<최상의 이욕: 스피노자의 경제학적 인류학에 대한 시론>(F.Lordon,2006)라는 책에 대한 서평이다. 스피노자를 경제학적으로 해석해 보려는 시도라니 제목부터 흥미롭다. 물론 '코나투스' 개념에서 충분히 이런 시도의 가능성을 엿볼 수는 있겠지만, 조금은 새롭고 신선한 것은 사실이다. '코나투스'(Conatus)가 "각 사물이 스스로의 역량 속에서 자기 존재를 보존하기 위하여 들이는 노력"(l’effort que fait chaque chose dans la mesure de sa puissance, pour persévérer dans son être -본문에서 발췌)을 의미하니까, 작금의 시대에 '자기보존 노력'이란 쉽게 경제적 국면으로 연계되겠기에 가능한 시론이지 싶다. 참고로, 이 글의 서평자는 빠리 1대학의 스피노자 전공 교수이고, 그가 뽑은 서평 제목은 "[스피노자의] 증여 [개념]에 대항하는 시론" 이다. 두 제목을 언듯 보기에, 스피노자 철학의 두 주요 개념인 '이욕'(사적 이익에 대한 욕망, intérêt)과 '증여'(호의적 기부-선물, don)가 배치를 이루는 것으로 봐서, 상당히 비판적인 서평이 아닐까 싶은데, 더 자세한 것은 본문을 마저 정독한 후에 평가하기로 한다. [웬만하면 불어원문으로 된 포스트는 블로그 홈에 안 보내려고 하는데(이유는..), 이 서평은 링크된 곳에 영어로도 번역돼 있기에(괜찮은 서평이라는 증거가 되려나!), 이번에는 예외로 한다.]

 

[영어] http://laviedesidees.fr/Essay-against-giving.html (Translated from french by Catherine Rushton)

[불어] http://laviedesidees.fr/Essai-contre-le-don.html

 

[서평] Essai contre le don / par Pascal Sévérac [26-03-2008]
[분야] Domaine : Philosophie ; Mots-clés : anthropologie | intérêt | don

[대상] Recensé : Frédéric Lordon, L’intérêt souverain. Essai d’anthropologie économique spinoziste. La découverte, 2006, 235 p., 23 euros.

En utilisant le concept spinoziste de conatus pour analyser la structure intéressée de toutes les figures du don, F. Lordon nous offre une belle alliance de philosophie et de sciences sociales. Grâce au conatus, le don apparaît comme la fiction d’un désintéressement, intéressé en vérité à conjurer la violence originaire des rapports humains. Mais le conatus, tel qu’il est déployé dans la philosophie de Spinoza, ne définit-il qu’une anthropologie guerrière ?L'intérêt souverain : Essai d'anthropologie économique spinoziste 귀여운 스피노자

 

La philosophie spinoziste fait depuis quelques années l’objet d’un vif intérêt, non seulement dans la sphère restreinte de l’histoire de la philosophie, mais aussi, plus largement, dans des champs disciplinaires proches ou éloignés : dans le domaine de la philosophie de l’esprit (autour du fameux mind-body problem), dans le domaine de la psychothérapie (psychanalyse, psychomotricité, pédopsychiatrie…), dans le domaine de la biologie (avec les réflexions de neurobiologistes comme J.-P. Changeux en France ou A. R. Damasio aux Etats-Unis), dans le domaine des sciences humaines enfin, et en particulier des sciences sociales [1]. S’agit-il d’une simple mode ? Il est en tout cas des travaux qui ne trompent pas : le livre de Frédéric Lordon est de ceux-là, par la pertinence de son utilisation des idées spinozistes, par la précision de ses références au texte de Spinoza – en l’occurrence à son ouvrage maître, l’Ethique, achevée en 1675. Le projet général de Frédéric Lordon, directeur de recherche au CNRS, membre du Bureau d’économie théorique et appliquée, est d’élaborer un programme de recherche qui envisage la possibilité de sciences sociales spinozistes : L’intérêt souverain en constitue une étape importante. Non pas la première étape, car Spinoza était déjà la référence centrale de plusieurs de ses articles, et d’un ouvrage sur le capitalisme financier, La politique du capital (Odile Jacob, 2002) ; mais sans aucun doute une étape décisive, en ce qu’elle fait du concept spinoziste de conatus le principe fondamental d’intelligibilité des relations sociales.

[1] Vient de paraître un recueil d’articles, introduit par une riche préface, sous la direction de Yves Citton et Frédéric Lordon : Spinoza et les sciences sociales. De la puissance de la multitude à l’économie des affects, Editions Amsterdam, 2008.


1*/ Le conatus comme intérêt à soi-même
Qu’est-ce que le conatus chez Spinoza, et en quoi son importation dans les sciences sociales est-elle pertinente ? Le conatus désigne chez Spinoza l’effort que fait chaque chose dans la mesure de sa puissance, pour persévérer dans son être. Frédéric Lordon lit le conatus dans le sens de l’intérêt que chacun prend à soi-même : « si le conatus est effort, il est aussi fondamentalement intérêt – l’intérêt de la persévérance dans l’être, c’est-à-dire du maintien dans l’existence et dans l’activité. Le conatus est l’intérêt à effectuer ses puissances et à les augmenter. Il est intérêt parce qu’il est l’expression d’une chose impliquée dans son existence même » [2]. Inutile, comme le précise F. Lordon, d’expliquer ce conatus à partir de l’ontologie de l’activité causale que déploie la première partie de l’Ethique : retenons simplement qu’il peut servir de principe premier à une anthropologie des sciences sociales, et que cette « conation » essentielle qui caractérise chaque chose, et donc chaque individu humain, ou même chaque groupe humain suffisamment soudé pour constituer comme un individu, est un principe de détermination causale, rendant raison des activités multiples et variées d’affirmation de sa propre puissance d’agir et de penser. Parmi ces activités, F. Lordon, dans le premier chapitre de son ouvrage (« Le problème des choses ») en distingue une, qui est logiquement première : l’activité de « pronation », de prise directe – et la plupart du temps violente – sur les choses. Prendre est l’acte premier par lequel s’affirme la puissance égocentrée de chaque conatus : prendre les choses matérielles pour se nourrir, pour se protéger, pour se conserver. On voit dès lors sous quel horizon se déploient les relations inter-individuelles : si de la conation essentielle dérive la pronation caractérisant chaque existence, c’est sur la scène agonistique des rapports de force, et de la violence avant tout physique, que les conatusse rencontrent et partant se combattent. Mais alors, comment comprendre dans cette perspective l’activité qui paraît comme l’envers de la pronation, tant elle paraît pacifique et altruiste : l’activité de donation ? [2] p. 34.

 

2/ L’utilité du don
C’est à cette question centrale qu’est consacré tout l’ouvrage de F. Lordon : le conatus y a une fonction essentielle, montrer en quel sens même le don, dans ses diverses configurations, est l’expression de l’intérêt que chacun prend d’abord à soi-même. L’usage du conatus comme principe d’intelligibilité du monde social permet du coup de marquer sa distance non seulement avec la théorie du choix rationnel, tirée de la science économique utilitariste, largement dominante dans les sciences sociales, mais surtout avec le courant sociologique qui lui fait face et qui, prenant appui sur la pensée de Marcel Mauss, s’est incarné dans une école de pensée éponyme, le Mouvement Anti-Utilitariste en Sciences Sociales, le MAUSS, mené notamment par A. Caillé et J. Godbout. D’un côté, F. Lordon, qui se reconnaît dans l’école dite de la régulation, rejette la fiction de l’homo œconomicus, c’est-à-dire d’un sujet égoïste et calculateur, maître de ses décisions et des mobiles qui les justifie : certes, une telle fiction affirme le caractère intéressé de tout choix, mais la conception de l’intérêt qu’elle sollicite est trop réductrice – intérêt transparent à lui-même, envisagé toujours rationnellement, de manière froide et maîtrisée. Cependant, la véritable cible de l’ouvrage de F. Lordon n’est pas celle-ci ; c’est de l’autre côté qu’il faut se tourner, du côté de ceux qui imaginent des relations sociales « vraies », entre des donateurs altruistes plutôt que des calculateurs égoïstes, œuvrant à une société de solidarité plutôt que de marché : car si l’homo œconomicus est une fiction qui ne prend pas en compte toute la charge passionnelle du conatus, qui en vérité ne raisonne que sous l’affect, la fiction de l’homo donator quant à elle, après avoir comme la première réduit l’intérêt au calcul conscient et méthodique, se présente comme une dénégation pure et simple de ce qui est – selon F. Lordon – au principe du don : l’intérêt lui-même, qui justement ne s’avoue pas comme tel.

 

Il n’est bien évidemment pas question de reprocher à ceux qui donnent d’enchanter leur geste en croyant, ou en faisant croire, au désintéressement des relations qu’ils tissent avec autrui ; mais il est plus étonnant de voir une école de pensée succomber, selon l’auteur, aux sirènes de la wishfull thinking, en estimant que ces relations sont effectivement telles que les acteurs souvent se les représentent. F. Lordon va chercher dans M. Mauss lui-même les premiers arguments pour contester cette position théorique : certes, le don demeure pour l’anthropologue ce roc de la morale éternelle [3] ; mais il affirme également qu’ « au fond, de même que ces dons ne sont pas libres, ils ne sont pas réellement désintéressés » [4]. L’intérêt que vise l’institution du don/contre-don analysée par Mauss et Sahlins est avant tout un intérêt pour la paix : ainsi, chez les Trobriands, comme le rappelle F. Lordon dans son deuxième chapitre (« L’économie : dangereuse et ignoble »), le kula, échange cérémoniel mettant en relation des groupes par la médiation de leur chef, vient pacifier la violence brute de l’échange marchand, le gimwali, face-à-face entre deux individus mus par l’âpreté au gain, et dont l’échange « ne se distingue pas significativement de la prise sauvage » [5]. Le don/contre-don comme refoulement et sublimation du donnant-donnant : le kula déplace le gimwali à la marge du groupe, et ainsi domestique l’activité de pronation, en substituant à la centralité de la chose matérielle à acquérir l’obtention symbolique de prestige. L’échange cérémoniel demeure agonistique, puisqu’il s’agit par le don d’écraser le rival ; mais cette compétition réglée civilise les conatus, en les détournant vers des profits d’honneur.

[3] Essai sur le don, « Conclusions de morale », PUF, « Quadrige », p. 263-264.

[4] Op. cit., p. 268. Cité par Lordon, p. 96.

[5] Lordon, p. 78.

 

F. Lordon distingue, à la fin du chapitre 2, « trois configurations historiques du “prendre” » : l’échange symbolique, qui vise à la perpétuation des relations sociales par l’alliance, et n’autorise le « prendre » que sous la forme du « recevoir » ; l’échange marchand, qui est au plus près de la pronation directe et brutale, même s’il requiert des médiations institutionnelles (la monnaie, le droit…) ; et enfin une figure intermédiaire de l’échange qui, associant les deux premiers, se caractérise par une individualisation et une moralisation des rapports entre donateur et donataire. Le don/contre-don détournait la violence physique vers une violence symbolique, plus pacificatrice ; désormais, par la morale du désintéressement, sont intériorisés un discours et une pratique qui voilent la violence originaire des conatus jusque dans les intentions de la conscience individuelle. Les chapitres 3 et 4 sont alors consacrés à l’examen de ce dernier type d’échange. Dans le chapitre 3 (« Les jeux de l’intérêt »), F. Lordon se démarque de la lecture que propose Bartolomé Clavéro du don [6] : celui-ci nomme antidora la pratique du contre-don conçue, à partir du Moyen Age, en réaction à l’usure, trop visiblement intéressée. L’argent doit être prêté non par calcul mais par amitié ; il doit être rendu non par obligation juridique mais morale – l’antidora relevant d’une morale de l’honneur et de la gratitude, et le surplus éventuellement accordé au donateur par le récipiendaire étant nommé bénéfice, c’est-à-dire originairement bienfait (beneficium) rendu par grâce. [6] Lordon, p. 78.

 

De cette première figure de dénégation collective destinée à recouvrir les échanges intéressés du voile pudique de l’amitié pure, F. Lordon approfondit la logique par l’étude, dans le chapitre 4, « La tragi-comédie des bienfaits », de la doctrine des bienfaits élaborée quelques siècles plus tôt par Sénèque. Pourquoi « tragi-comédie » ? Il s’agit là d’une comédie sociale car, à travers l’hypocrisie de la reconnaissance, qui consiste à « payer d’affect » le donateur, tout est fait pour adoucir la violence symbolique du recouvrement de dettes (l’exaction). Contre l’ingratitude, Sénèque élabore une morale pour le donateur et le donataire ; mais ce faisant, il se montre sensible à ce qui menace de l’intérieur les rapports sociaux : « on peut donc parfois rire du bienfait mais ce contre quoi il tente de se battre n’est pas drôle. Ce que Sénèque veut tenir au loin, c’est le déchaînement des conatus pronateurs, cet état de catastrophe du social […]. Derrière la première obsession, qu’on aurait pu trouver superficielle, de l’ingratitude, il y en a une seconde, autrement plus profonde, celle du chaos social » [7] – la comédie comme antidote au tragique de la situation. [7] p. 145.

 

3/ Le conatus, force antisociale ?
Par cette insistance sur la rémanence du conflit dans le rapport social, le propos de l’auteur est encore plus spinoziste qu’il ne le dit. Spinoza en effet l’affirmait à sa manière, lorsque dans l’une de ses lettres, il définissait ainsi sa différence avec Hobbes : pour moi, il n’y a pas rupture, mais continuité entre l’état de nature et l’état social. Mieux : il y a continuation, persévérance, de l’état de nature à même l’état social. Ce qui signifie, puisque prévaut dans l’état de nature le droit de guerre, c’est-à-dire le conflit des puissances, que la société ne rompt jamais avec cette espèce de « guerre silencieuse », pour employer un mot de Foucault [8], qui caractérise les rencontres passionnelles entre les hommes. Les institutions diverses du monde social (comme la morale ou le droit) ne mettent pas fin aux logiques passionnelles à travers lesquelles s’affirme la puissance de chaque conatus ; elles les expriment de telle sorte que les hommes parviennent plus à se convenir qu’à s’opposer. Les consensus qui forment les communautés ne naissent donc pas moins des affects que les dissensus : une norme, morale ou politique, n’est suivie que par crainte des châtiments qu’encourt la désobéissance, ou par espoir des récompenses que promet l’obéissance. Mais alors, si les consensus comme les dissensus sont affectifs, si le droit positif comme le droit naturel sont des expressions avant tout passionnelles de la puissance de la multitude, on ne saurait réduire le conatus – comme l’auteur le fait parfois pourtant – à une « force fondamentalement antisociale » [9]. Une telle réduction reviendrait à flirter avec une conception qui devrait peut-être plus à Hobbes qu’à Spinoza : ce serait penser la nature humaine comme ce qui nécessairement nous divise et jamais ne peut nous unir ; ce serait penser l’artifice pacificateur du pouvoir du Léviathan comme l’envers de la puissance de division des passions naturelles. Chez Spinoza, la nature des hommes, c’est-à-dire la logique affective des conatus, ne conduit pas seulement au conflit : elle mène aussi à des concordes, à des unions, passionnelles souvent, rationnelles parfois. L’une des grandes difficultés de la pensée spinoziste, qui est aussi l’un des grands foyers d’interprétation de cette pensée aujourd’hui, est de saisir alors cette double articulation entre désunions et unions passionnelles d’une part, et entre compositions passionnelles et possibilité de leur rationalisation d’autre part.

[8] « Il faut défendre la société », Cours au Collège de France, Seuil/Gallimard, 1997, p. 16. Idée que Foucault exprime également en renversant la célèbre formule de Clausewitz : la politique, c’est la guerre continuée par d’autres moyens.

[9] p. 83.

 

Frédéric Lordon, cependant, n’est pas aveugle à ces problèmes, qu’il aborde à sa façon lorsqu’il entreprend la critique de la morale du désintéressement dans les deux derniers chapitres de son ouvrage (chapitres 5 : « Conatus, interesse, timesis  » et chapitre 6 : « Structures sociales et structures mentales de l’intérêt au désintéressement »). Cette critique convoque notamment la proposition 27 de la partie III de l’Ethique, qui porte sur l’imitation des affects : lorsque nous imaginons, dit Spinoza, qu’une chose semblable à nous, à l’égard de laquelle nous n’éprouvons aucun affect, est touchée par un certain affect, nous sommes alors déterminés à éprouver un affect semblable. Cette contagion des affects explique notamment le don charitable, qui provient non pas d’un élan de pur altruisme, mais de phénomènes passionnels qui dérivent directement de l’effort que chacun fait pour persévérer dans son être. Elle naît par exemple de la pitié, par laquelle nous éprouvons la tristesse que nous imaginons autrui éprouver, et qui nous pousse à la chasser – en autrui comme en nous-mêmes, en autrui parce qu’en nous-même. Le conatus affecté est un effort pour détruire toutes nos diminutions de puissance (nos tristesses) et conserver toutes nos augmentations de puissance (nos joies). Mais à cette forme passive de la bienveillance s’ajoute, comme le montre F. Lordon, une forme active : car il existe une véritable générosité, rationnelle, qui n’est autre qu’un intérêt à soi-même bien compris. A l’illusion d’une générosité désintéressée, il oppose les intérêts d’une générosité rationnelle. Le spinozisme est pour lui est un « utilitarisme de la puissance » [10], qui ne nie pas la réalité du don, mais distingue un « don de servitude », qui n’est qu’un marché de dupes, d’un « don de fortitude » [11], fondé sur l’idée qu’il n’y a rien de plus utile à l’homme que l’homme. Être autant que possible utile aux autres pour l’unique et bonne raison d’être le plus utile à soi, telle est la perspective éthique de la philosophie spinoziste. Il serait d’ailleurs intéressant de confronter cette finalité éthique avec celle du stoïcisme, que l’auteur évoque peu lorsqu’il examine la théorie des bienfaits de Sénèque : n’y a-t-il pas également dans cette conception de l’usage réglé du bienfait la recherche d’une certaine coïncidence à soi-même ? La distinction entre d’une part ce qui relève de notre propre liberté et qui seul doit être recherché (l’accord avec autrui pour être en accord avec soi) et d’autre part ce qui est certes préférable mais jamais ne dépend vraiment de nous (la gloire, la reconnaissance) ne fonde-t-elle pas l’éthique stoïcienne des bienfaits ? Il y aurait là quelques pistes de discussion à ouvrir. [10] p. 158. [11] p. 157.

 

Reste toutefois, comme le montre l’auteur, que la plupart des activités donatrices relèvent de mouvements passionnels plutôt que rationnels, en quête de profits de moralité qui tiennent le plus souvent au contentement obtenu par l’approbation du groupe. Comme le rappelle l’auteur à la suite de Bourdieu, « la reconnaissance du groupe va d’abord à ceux qui reconnaissent le groupe » [12] : le conatus individuel participe d’un conatus collectif, d’un effort de persévérance du groupe qui nous permet d’interpréter le don moral à sa juste mesure : ce don unilatéral (sans attente de retour) est non pas la scène où disparaît le public pour faire triompher l’intention pure, comme le pense par exemple M. Hénaff [13] ; mais le résultat d’un travail d’intériorisation des exigences de la société en une conscience morale individuelle. « La coïncidence du payé et du payeur n’est possible que par le branchement de son petit circuit de paiement sur la grande banque centrale du collectif moral. Et les affects de contentement dont il se rémunère en apparence lui-même ont en fait pour condition d’être tirés sur une ligne de crédit abondée par le groupe comme pool de ressources affectives. Le groupe oublié ou passé sous silence, la conscience morale peut se raconter tous les mensonges de l’autonomie et se donner toutes les fausses impressions de la souveraineté judiciaire. Ou bien se contenter de baigner sans autre interrogation dans la félicité des affects joyeux » [14].

[12] p. 82.

[13] Le prix de la vérité. Le don, l’argent, la philosophie, Seuil 2002.

[14] p. 189-190.

 

Qu’il s’agisse de don de pacification (don cérémoniel), de don de coopération (don de sociation) ou de don unilatéral (don de charité), la structure qui se déploie dans l’histoire du don est pour Frédéric Lordon toujours identique : il s’agit d’intéresser le conatus individuel au désintéressement, de le plier aux normes d’un conatus social par un processus qui équivaut – pour reprendre le vocabulaire d’une certaine veine psychanalytique qui irrigue tout l’ouvrage – à une « sublimation » de la violence pronatrice originaire et à une « dénégation » des profits de prestige, extériorisé ou intériorisé. Ce processus, plus que d’une décision individuelle ou collective, relève d’un « procès sans sujet » : il se manifeste, en chaque individu, par une forme mentale de sens pratique, de timesis dit l’auteur, qui est aptitude à apprécier ce qu’il faut donner, recevoir et rendre, et comment il faut le faire, sans avoir à le mesurer. Ainsi est mise au jour, par cette anthropologie spinoziste du don, une rationalité collective sans calcul rationnel : un procès de civilisation du groupe par lui-même.

 

4/ Contre-lecture, par Lorenzo Vinciguerra
Sous l’égide de la définition du conatus spinoziste, le livre de Frédéric Lordon entend établir les fondements scientifiques d’une anthropologie économique. C’est aussi un essai remarquable sur le don, soutenu par une argumentation rigoureuse et cohérente, servie par une écriture vigoureuse et brillante. Proche de la pensée bourdieusienne d’une économie générale des pratiques, sensible aux lectures de Spinoza faites par A. Matheron et par L. Bove, le conatus est ici redéfini comme intérêt, compris comme radical intérêt à être et à persévérer dans son être. De cette forme « matricielle », peuvent alors être tirées comme on le ferait d’une définition adéquate toutes les propriétés de l’intérêt, les figures du calcul utilitariste comme celles du don en apparence désintéressé. Se trouve dès lors reconduite à une seule et même racine la fausse antinomie entre homo economicus et homo donator. C’est le premier apport de ce livre : renvoyant dos-à-dos deux paradigmes anthropologiques, il se dégage d’une polémique destinée à rester sans vainqueurs ni vaincus entre les tenants d’une « anthropologie enchantée du don » et les défenseurs d’une anthropologie utilitariste qui a servi de fondement à théorie standard de l’économie dominante. J’éviterai ici de répondre à la question de savoir si les positions défendues par certains représentants du M.A.U.S.S. ont été bien comprises ou bien caricaturées, d’une part parce que ce débat a déjà eu lieu au sein du M.A.U.S.S. lui-même, d’autre part parce que tel n’est pas l’enjeu principal du livre. Car s’il accepte de se situer dans ce débat, ce n’est pas pour s’y épuiser. Son intention est différente. Il s’agit plutôt de repenser les principes de l’anthropologie à partir de ce lieu théorique, où l’anthropologie prête ses concepts à la sphère des pratiques économiques. Le but est donc de réorienter la pensée économique à partir des principes que celle-ci emprunte à une autre science. Tel est bien l’intérêt proprement philosophique de cet ouvrage qui a attiré à juste titre l’attention autant des anthropologues, des économistes que des philosophes. Je vais donc porter l’accent sur la partie plus conceptuelle de l’essai, le premier chapitre intitulé « le problème des choses ».

 

5/ Le concept de conatus-intérêt
« Chaque chose, autant qu’il est en elle, écrit Spinoza, Ethique III, proposition 6) s’efforce de persévérer dans son être ». C’est en ce lieu que vient s’ancrer le noyau théorique du livre. Si le conatus est essentiellement effort, il est aussi fondamentalement intérêt, au sens d’un intérêt à se maintenir dans l’être, intérêt à effectuer ses puissances et à les accroître. Pour Lordon on ne sort de l’alternative des figures de l’« intérêt utilitaire » et du « désintéressement », du calcul intéressé et de l’altruisme, que par un recentrage métaphysique sur la notion d’intérêt comprise comme égocentrisme radical, au sens où exister c’est être foncièrement intéressé à soi et pour soi (p. 34-35). L’approche est classique : il s’agit de repenser l’articulation entre le plan de l’essence et celui de l’existence. Plongée dans le bain de l’histoire, l’essence métaphysique du conatus-intérêt livre sa première propriété : la pronation violente sans frein ni limites. Mouvement brut de l’intérêt à l’état de nature, le prendre pour soi, conçu ici sur le modèle de l’ingestion, du métabolisme ou de l’égoïsme de la survie, est élu à fondement de tout échange marchand. Aussi, l’effort et le processus de civilisation ne feraient que découler de cette nécessité bien humaine de juguler, aménager, détourner, éduquer cette expression primordiale du prendre, qui risque à tout moment d’éclater en violence. Don et contre-don répondent à ce même impératif de réfrènement, de domestication et de sublimation de la pulsion prédatrice, antidote à une économie générale de la violence, dans laquelle les relations des hommes aux choses précèdent les relations des hommes entre eux. Aussi est-on conduit à admettre que « le problème civilisationnel n’a pas de tâche plus urgente que la mise en forme du prendre » (p. 39), et que « le don ne pas être premier », dans la mesure où le problème primitif c’est le prendre, et que le don est une institution qui suit d’une nécessité antécédente (p. 42). Le cadre théorique s’énonce ainsi clairement : « l’anthropologie historique précède toute praxéologie sociale ».

 

6/ Une perspective spinoziste ?
On peut se demander toutefois si derrière les intentions affichées d’un recours à Spinoza, ce n’est pas plutôt la pensée de Hobbes qui travaille en sous-main la partie plus théorique de l’essai. Notamment par l’idée que la dispute anarchique des choses serait au fondement de la relation entre les humains, autrement dit que « la première réciprocité négative ». Pour Frédéric Lordon c’est l’échange de coups autour d’un objet que deux puissances pronatrices se déchirent, qui inaugure tragiquement la rencontre entre deux individus (p. 52). On retrouve ici dans l’expérience de pensée imaginée pour concevoir l’entrée en société la fiction propre à la pensée politique classique qui va de Hobbes à Rousseau. Sont perceptibles aussi la veine « marxiste » et l’influence de lectures qui dans le sillage de Matheron ont voulu lire dans le conflit passionnel la constitution principielle du lien interhumain. Si l’investiture du prendre pour soi comme attribut principal de l’intérêt a bien le mérite d’indiquer les limites d’une position consistant à élire naïvement le don et la donation comme élan premier (sur cet aspect critique, on ne peut qu’être d’accord avec l’auteur), elle en paye le prix. Affirmer en effet que « dans le monde humain, le problème du social naît au moment où deux conatus se rencontrent et s’affrontent pour la capture d’une proie » (p. 51), c’est décider aussi que la rencontre est d’abord dispute de choses. C’est inévitablement concevoir la nature de la co-existence sur le seul modèle de la concurrence et de la lutte. Il ne s’agit pas de sous-estimer les réalités dramatiques des réciprocités négatives, mais plutôt de se demander si le lien social est pensable à partir de cette seule négativité, autrement dit si l’existence des intérêts individuels est elle-même pensable indépendamment d’un ordre de « relations aux autres », où la « relation aux choses », avancée comme première par Lordon, se trouve toujours déjà prise. Entendons-nous bien : il ne saurait être question d’aller dans le sens de ce dont l’auteur montre parfaitement les limites chez un hégélien comme Kojève, à savoir d’une primauté anthropologique des relations symboliques (le prestige) sur les rapports physiques (la relation aux choses), mais peut-être tout simplement de considérer qu’il n’y a pas l’un sans l’autre, c’est-à-dire que le moment symbolique n’est à penser ni après ni avant, mais avec celui des choses. Ici se joue l’un des enjeux majeurs du livre, qui affecte directement les destins d’un programme spinoziste en sciences humaines, ainsi que Frédéric Lordon entend ambitieusement le développer. Elle concerne la manière de comprendre ce que Spinoza appelait individuum, dont la première particularité est de ne pas être substantiel. Cette question nous ramène à cœur même de la notion d’intérêt individuel. Or, peut-on vraiment s’aider de Spinoza, pour soutenir avec Lordon que « l’intérêt à soi et pour soi » est encore envisageable isolément, c’est-à-dire abstraction faite de la multitude humaine dans laquelle il est non seulement historiquement, mais aussi ontologiquement inséré ? Puisqu’il n’est pas substantiel, ne faut-il pas penser plutôt que chaque conatus individuel se trouve toujours déjà pris et compris dans une vie-à-plusieurs qui en conditionne l’existence jusqu’à celle de son « soi » ? Plutôt que cette chose qui a des relations avec des choses, l’intérêt-conatus ne désigne-t-il pas plutôt un être de relations (inter-esse), notamment avec celles et ceux qui permettent d’en définir l’individualité ? Que l’on relise la définition de l’individuum, on n’y trouvera aucune substance qui précède les relations dont il se constitue, et qui le font tenir à soi comme aux autres. Dans ces conditions, ne faut-il pas penser la multitude comme ce sol d’immanence soutenant l’être des self-interests ? Dès lors il n’y aura plus motif de se demander si le conatus-intérêt est pré- ou a-social (telle est en effet la problématique hobbesienne), car l’individu ne précède pas la multitude. Ce qu’il peut y avoir d’antisocial dans les passions prédatrices et destructrices des conatus-intérêts ne remet pas en cause ses conditions de possibilité au sein d’une vie commune. Au contraire, même l’antisocialité la plus insupportable ne fait que réaffirmer les liens essentiels qui lient les individus entre eux. Quoi qu’il fasse et pense, l’individu humain a beau être de toutes ses forces contre les autres, il ne l’est jamais que tout contre eux. Telle est la condition de son être mode. Il reste que c’est avec une grande cohérence que les figures de l’intérêt sont poursuivies par Lordon jusque dans leurs derniers retranchements, là où, dans les profits déniés de la morale et dans le mensonge à soi-même du désintéressement, elles finissent par se cacher à elles-mêmes. Comme naguère La Rochefoucauld et les moralistes du grand siècle, Lordon démasque avec talent les faux-semblants de la comédie sociale (cf. le chapitre consacré aux Bienfaits de Sénèque), au risque cependant de masquer à son tour la réalité d’un être qui n’est rien sans les autres. Nous sommes singuliers parce que nous sommes plusieurs. La singularité de chacun n’existe que dans le champ d’une vie commune. La multitude est la condition et la limite de notre vouloir être absolument. (par Pascal Sévérac [26-03-2008])

 

* 각 항목에 붙인 번호는 펌자의 것임.

 

Aller plus loin / Cet article est publié en partenariat avec le Collège international de philosophie, qui organise dans le cadre des Samedis du Livre, une matinée sur l’ouvrage de F. Lordon le samedi 29 mars (9h30-12h30). Amphi Stourdzé, Carré des Sciences, 1 rue Descartes, 75005, Paris, sous la responsabilité de Pascal Sévérac. Intervenants : Sophie Audidière, Bernard Gazier, Frédéric Lordon, Pascal Sévérac, Lorenzo Vinciguerra.

Si vous souhaitez critiquer ou développer cet article, vous êtes invité à proposer un texte au comité de rédaction. Nous vous répondrons dans les meilleurs délais : redaction@laviedesidees.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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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 & 자유주의 (김지석 서평)

기독교-개인주의-자유주의 / 과학-성장-낙관주의

 

"(...) 서구문명의 핵심은 무엇이며 그것은 얼마나 큰 잠재력을 갖는가 (...). 다른 문명과 구별되는 서구의 정체성은 기독교, 낙관주의, 과학, 성장, 자유주의, 개인주의 등 독특한 여섯 가지 사상의 공동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고 <서구의 자멸>(아래 참조)은 말한다. 이 가운데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가장 중요하다. 모든 개인에게 개성과 깊은 내면, 확고한 자아가 있다는 생각은 서구 정체성을 이루는 기본 요소다. 개인주의의 상승은 기독교에서부터 르네상스, 종교개혁, 현대 경제·사회의 성장에 이르기까지 서구 역사를 관통하는 모티프다. 기독교는 개인의 헌신을 요구하고 개인 책임을 물은 첫 종교라고 한다. 기독교가 보편화시킨 영혼이라는 개념은 세속화해 자아 개념이 됐으며, 이는 노력·자기개발·자기책임 등 개인주의 핵심 요소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개인주의를 사회적 차원에서 실현하는 유력한 방법이 민주주의에 기초한 자유주의다. 이런 사회는 종교의 자유, 양심, 관용, 협동력,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려는 시민들의 의지 등을 특징으로 갖는다. 자유주의가 그냥 생겨난 건 아니다. 어느 정도 교육 수준과 독창력, 독립심을 갖춘 자유롭고 자치적인 시민은 자유주의 사회의 결과물이라기보다 전제조건이다. 또한 자유주의는 그에 걸맞은 경제·정치 체제를 요구한다. 과학·성장·낙관주의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찬란한 승리다. 처음에는 성장이 과학을 이끌어내는 데 도움을 줬으나 지난 3세기 동안은 과학이 성장의 주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18~19세기에는 서구의 과학적 주도권이 경제 주도권으로 이어졌고, 경제성장은 낙관주의자들의 힘을 키웠다. 계몽사상가들은 개인의 자율성과 진보를 옹호하면서 낙관주의를 뒷받침했다.

 

하지만 개인주의·자유주의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개인화한 사회는 공동체를 약화시키고 개인의 중압감을 증가시킨다. 한편으로는 사회의 분열, 사회자본과 공동체의식의 붕괴가 나타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의 책임과 근심이 엄청나게 높아진다. 서구의 자유주의도 도덕적 기반으로부터 분리, 공동체에 대한 헌신 약화, 열정 부족 등의 문제에 부닥치고 있다. 서구 문명이 앞날은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고 개인주의·자유주의의 활력을 되살릴 수 있을지에 달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국가·종교 권력의 억압에 맞서는 해방의 이념으로 출발한 개인주의와 민주적 자유주의는 자신감과 신뢰, 평등과 솔선, 책임감을 기반으로 아래에서부터 솟아나는 문명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서구의 위기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이런 장점이 침식되고 보수적 성격이 강해졌음을 뜻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아직 개인주의·자유주의의 진보적 성격(*)을 충분히 맛보지 못한 상태다. 문명 패권의 향방을 가름할 중요한 열쇠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김지석 논설위원, "보수화한 자유주의의 운명은"[일종의 서평], 기사등록 : 2009-03-20 오후 07:25:45 ⓒ 한겨레)

 

(*독자註) "개인주의·자유주의"를 아직 우리가 제대로 체험하지 못한 것은 맞지만, 그것이 어떻게 바로 "진보적 성격"이 되는지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아마도 우리가 못 가진 서구적인 것은 다 '진보적'일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적 발상이 낳은 실언이 아닐런지... 물론 여기서 또 '진보'의 개념에 대한 왈가왈부가 필요한 시점인데, 거듭 말하지만 진보란 '진보=좌파이념'이지 '전진하는(개혁) 우파'의 그것까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좌파가 '개인'과 '자유'를 말살하고자 하는 이념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는 우파-자본주의에 충실히 복무해 온 가면 쓴(거짓으로-빈말로 위장한) '주의'일 뿐이고, 진짜 "개인주의·자유주의"는 좌파와 통하는 것이라는 이해에 기초한다면, 상기 발언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겠다. 부연하자면, 원래가 "개인주의·자유주의"는 인간의 가치와 존엄을 중세적 종교와 지배의 틀로 족쇄 채운 기존의 시스템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해방을 낳은 개인과 자유에 대한 존중의 이념이 다시 인간을 자본주의의 틀에 묶어버리는 과업에 복무했으니, 여기서 개인과 자유에 대한 왜곡이 있었다는 말이다. 고로, 다시 '해방'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 개인과 자유에 대한 재 점검이 필요하다는 것.

 

서구의 자멸 | 원제 Suicide Of The West 
리처드 코치, 크리스 스미스 (지은이), 채은진 (옮긴이), 말글빛냄, 2009-01-02, 양장본 317쪽, 15000원
Richard Koch &, Suicide of the West (Paperback), Continuum Intl Pub Group, 2007-ix.

 

여섯 가지 키워드 [출판사 책소개 -약간 우습지만-]

 

1. 크리스트교 : 서구의 성공과 부절제, 실패에 있어서 크리스트교만큼 중요한 요인도 없다. 크리스트교는 고대 세계를 세우고 천상과 지상의 관계를 변화시켰으며 현재까지 서구인의 생활양식과 인격을 정의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크리스트교는 세계 최초의 개인화되고 행동주의적인 자기수양 운동이었다. 모든 서구인들이 크리스트교도나 불가지론자, 무신론자 심지어 다른 종교 신자들도 비서구인들과 다르게 세상을 보고 행동하는 주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또한 이는 서구가 지구상의 다른 40∼50개 문명보다 성공한 이유이기도 하다. 크리스트교는 몇 가지 행동효과를 남겼다. 1)개인의 책임, 2)그리스도의 힘을 통한 변화, 3)약자에 대한 원조, 4)저주받은 이들의 구원 또한 변화와 개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근세기 들어 “신은 죽었다”는 사상이 출현했으며 크리스트교 내의 분열은 오늘날 서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분열의 축도라고 볼 수 있다. 초기 크리스트교의 자유로운 정신, 내적 자아라는 개념의 도입, 개별화와 권력에 대한 거부와 개인 관계에서의 사랑을 강조하는 태도, 학대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과 평등 요구, 자기수양과 자기개선 장려 등은 서구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 서구를 분열시키고 나아가 세계를 분열시켰다. 그리하여 내부에 더욱 강하게 존재하는 위협으로 남아 있다.

 

2,3,4: 낙관주의, 과학, 성장 [생략]

 

5. 자유주의 : 모든 서구사회는 자유주의 원칙과 제도에 따라 구성되어 있다. 비서구사회에서는 이런 경우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서구사회가 자유주의적인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며, 자유주의는 서구의 고유 역사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자유주의 사회는 민주적일 뿐만 아니라 자유정신과 공평함, 모든 시민에 대한 존중이 있는 사회다. 자유주의 문명은 다른 문명에 비해 인간 생명의 신성과 존엄, 모든 구성원의 교육, 기회의 균등, 개인의 자유, 과학과 예술 장려, 모든 인류동포의 본질적 평등을 훨씬 더 중요시한다. 이처럼 서구 자유주의 문명은 다른 문명에 비해 훨씬 큰 이익을 시민들에게 제공해준다. 20세기에 서구 자유주의는 서로 경쟁하는 세 가지 이데올로기(민족주의, 파시즘, 공산주의)의 도전으로 거의 사멸할 뻔했다. 현재 자유주의에 대한 외부의 위협들 -이슬람 혁명주의와 수많은 형태의 테러리즘- 은 서구에서 대중적인 호소력을 거의 지니고 있지 못하며 군사적으로도 약하다. 그러나 자유주의 문명은 그 성공과 외부의 적의 약세에도 불구하고 무시무시한 위협을 받고 있다. 가장 심각한 위험들은 모두 자유주의 문명이 자초한 것이다. 20세기 자유주의 어젠다가 서구 시민들의 안전과 복지, 자유를 놀랍도록 효과적으로 증가시켜주었지만 현재 자유주의는 과거에 비해 훨씬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지속적인 실천과 개선이 필요한 것이다.

 

6. 개인주의 : 서구의 중심적 특징은 개인주의다. 개인주의는 크리스트교에서부터 르네상스, 종교개혁, 현대경제 및 현대사회의 성장에 이르기까지 서구 역사를 관통하는 모티프다. 서구의 개인주의와 비슷한 뿌리는 다른 어떤 문명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개인화된 사회의 문제는, 공동체를 약화시키고 개인의 중압감을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전통적이고 중앙집권화된 사회는 제도와 권력 관계, 뚜렷한 역할,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 정체성을 통해 움직인다. 개인화된 사회는 전혀 다르다. 사회가 개인화되고 우리가 가족, 친구, 이웃, 클럽, 교회, 조합, 공동체집단 등과 단절될수록 ‘사회 자본’이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보여준다. 정신적 건강과 경제적 성공의 중요한 요소인 신뢰는 우리가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 되어갈수록 붕괴된다. 개인화된 사회는 자유를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예전에는 지시되거나 자동으로 결정되던 어려운 선택을 우리에게 요구하기도 한다. 개인주의는 서구의 성공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였고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그렇다. 개인주의는 서구의 도덕적 가치관과 낙관주의, 과학, 정치적 안정, 경제적 성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주의의 위험요소들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 계급사회에서 개인화된 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개개인은 개인적인 상호관계와 지역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계급사회의 종말이 개인적 성공에 대한 피해의식과 냉소주의로 귀결된다면 서구는 더 이상 서구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세계의 미국화 :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미국의 활발한 국제적 지휘와 개입이 더 필요한가? 전 세계의 맥도널드화가 더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때때로 세계의 미국화는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만한 방식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보스니아 사람들을 집단학살로부터 구하기 위해 개입한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세계의 미국화는 인도주의적인 중재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세계은행, GATT, IMF 등 미국이 주도하는 수십 개의 국제기구들이 그리는 것은 대체로 미국의 양식을 따르는 경제적·정치적·인도주의적 세계 질서다. 미국은 세계의 미국화를 위한 기반과 힘을 가지고 있다. 세계의 완전한 미국화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미국의 경제적·문화적 영향력이 계속해서 널리 퍼져나간다고 생각해보라. 필연적으로 강자에게 유리한 자유무역이 전 세계에 보편화된다고 생각해보라. 군사적·과학적·경제적 주도권을 바탕으로 미국은 새롭고 영속적인 문명을 이루게 될 것이다. 미국은 제국주의 로마만큼이나 무자비하게 세계의 대부분 혹은 전체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자멸은 불가피한가? : 지난 2세기 사이 서구문명은 다른 어떤 문명도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었다. 바로 풍요로운 사회와 문화다. 생활수준이 향상되어 모든 세대가 그 부모 세대보다 풍요로운 생활수준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중요한 자유의 풍요도 이루게 되었다. 서구문명은 많은 것을 소망했고 많은 것을 이룩했다. 그러나 서구문명은 막대한 성공을 가져다준 사상을 이제 단념해버린 것일까? 서구문명은 스스로 만든 한계에 부딪혀 실패하고 말 것인가? 서구문명은 훨씬 덜 매력적인 문명으로 변하기 시작하여 머지않아 훨씬 덜 성공적인 문명이 되고 말 것인가? 서구문명은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걸어가기가 좀 더 쉬운 한쪽 길을 따라 내려가면 냉소주의와 지독한 이기주의, 무관심, 권력의 재집중, 공격성 등이 놓여 있다. 이 길은 무정부주의에서부터 신파시즘, 환경 파괴, 새로운 미제국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이러한 형태들은 모두 서구문명을 종말로 인도할 것이다. 다른 한쪽 길을 따라 내려가면 용기의 회복, 서구인들 스스로와 서구 문화에 대한 확신, 미국 내와 유럽 내, 유럽과 미국 간, 다른 유럽인 정착지들과의 감정적 단결, 책임감 있는 수많은 개인들이 권력이나 맹목적인 전통 신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인의 노력, 낙관주의, 이성, 연민, 평등, 개인주의, 상호 동일성 등 스스로 발견하고 스스로 인정한 속성들을 통해 한데 뭉친 사회와 문명이 기다리고 있다. 이 길을 걷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 여행을 위해서는 혁신적인 방향의 전환이 필요하다. 서구의 숙명은 모든 서구인들의 소망과 잠재력과 도덕성을 발휘함으로써, 그리고 인류를 매혹시킬 만한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인도적이고 자유롭고 풍요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것이다.

 


리처드 코치 (Richard Koch) - 기업가이자 투자가, 경영컨설턴트. 컨설팅, 개인업묵관리, 호텔에서 레스토랑과 주류사업, 변화관리 교육과 같은 다양한 분야의 사업을 하고 있다. 베인&컴퍼니(Bain&Company)의 창립 멤버이자 파트너였으며, 엘이케이컨설팅(LEK Consulting)을 공동 창립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oston Consulting Group)의 컨설턴트로도 활동했다.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 등이 있으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80/20 법칙>의 저자다. 최근에는 영국의 전 문화부장관 크리스 스미스와 <서구의 자살(Suicide of the West)>을 공저했다. 필로팩스, 벨고, 플리머스 진, 캡스톤 등을 운영하며 기업가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현재 룩셈부르크와 영국의 상장 벤처 캐피탈 회사 등을 포함한 몇 개 기업의 사외 이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강의와 방송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크리스 스미스 - 최근까지 영국 하원의원이었고 문화언론체육부 장관을 지냈다. 그는 케임브리지대학교 펨브로크 칼리지의 명예연구원으로, 여러 개의 주요 미술 단체를 이끌고 있다.
채은진 - 서울여자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다 빈치의 유산> <권력과 광기> <천재 파티시에, 프랑스 요리의 왕; 앙토넹 카렘 평전> <아인슈타인, 신이 선택한 인간> <누가 달을 만들었는가> <인류의 조상을 찾아서>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 등이 있다. 또한 <여성에게 물어라> <변호사처럼 설득하라> <그레이 매터스> <먹히는 말> 등을 공동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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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ussell Tribunal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건)

지난 3월 4일 벨기에 브뤽셀에서 '국제전범재판소'(일명 '러셀재판소')에서 기자회견이 열렸고,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사태에 대한 '전범재판'을 2010년(확인요망)에 연다는 발표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지금 '스테판 에셀'이라는 프랑스 대사가 재판소의 대표인 모양인데, 그래서인지 브뤽셀이라서인지 원래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래 동영상에서 그가 불어로 발표를 한다(노인의 독특한 발음을 아래의 텍스트에서 따라가면 아주 재미있다). 다음에 링크된 '국제 전범재판소' 사이트에 가면 다른 사람들의 영어 발표문 등도 있음. 지나는 길에 간단한 '러셀재판소'에 대한 소갯글은 위키페디아에서 도입부만 잘라왔다. 우리는 '전범재판소'라는 명칭에 익숙하지만, 이 사람들은 흔히 '러셀재판소'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이 재판소는 1966년 러셀(B.Russel,1872~1970)과 사르트르(J.-P. Sartre,1905~1980)에 의해서 창설됐다고 함. 기타 자세한 내용은 불어판보다 훨씬 상세한 영어판을 참조할 것:
Tribunal Russell // Le tribunal Russell, aussi désigné par Tribunal international des crimes de guerre et Tribunal Russell-Sartre, était un tribunal d'opinion fondé par Bertrand Russell et Jean-Paul Sartre en novembre 1966 suite à la publication du livre de Russell, War Crimes in Vietnam. (...)
Russell Tribunal // The Russell Tribunal, also known as the 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 or Russell-Sartre Tribunal, was a public body organized by British philosopher Bertrand Russell and hosted by French philosopher and playwright Jean-Paul Sartre. Along with Ken Coates, Ralph Schoenman, and several others, the tribunal investigated and evaluated American foreign policy and military intervention in Vietnam, following the 1954 defeat of French forces at Dien Bien Phu and the establishment of North and South Vietnam. (...) http://en.wikipedia.org/wiki/Russell_Tribunal.

Le tribunal Russell pour la Palest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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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소외를 넘어 소비의 주체로? (박노자)

아래에 옮기는 글에서 박노자는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사람들(노동자)이 갖는 '소비 욕망'을 야구에서부터 섹스투어까지 어디서나 찾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 상품의 생산자로서의 노동자가 --맑스의 말처럼-- 자기가 만든 상품에서 소외되고 소비의 주체에서 멀어지는 것이 이제는(21세기에는) 아니라, 더 많은 외적 대상을 소비 품목(상품)으로 삼음으로써 --심지어는 스스로도 계급시스템의 상위그룹에 소비대상으로 노출하면서 동시에 하위그룹을 상품으로 소비하는--, 자본주의가 기획하고 조장하는 "분리통치"와 '소비-욕망-시스템'에 깊숙히 빠져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본주의의 창궐에 충실히 복무한다는 것. 그러므로 "자본이 없을 때에 앎이란 얼마나 맛이 있게 되는지", 즉 인간의 이런 욕망 시스템에 부응할 새로운 세상은 무엇일지, 이런 것을 "자본주의 '이후'"의 그림으로 한번 고민해 보자는 것인 듯하다. 물론 각자가 저열한 본능적 욕망을 제어하여 엄숙한 성인군자가 되자는 도덕적 훈계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호-분리-지배-시스템'에 사람들이 익숙해지거나 그것을 즐기는 경향성을 갖게 된 원인은, 물론 자본주의 시스템에 의해 그런 경향성이 더 노골화 되고 강화되도록 함으로써 자기(자본주의) 시스템의 작동을 원활하게 하려는 자동적이고 구조적인 동력에 있는 건 사실이겠지만, 어쩌면 사람들의 이런 경향성 자체가 본연적으로 자본주의에 더 잘 조화되고 그래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이끈 때문은 아닌지 하는 의심도 든다. 만약에 이런 의심이 조금이라도 사실이라면 인위적으로 꾸미고 제시될 '자본주의 이후' 시스템의 모습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사람들에게 먹혀들지(잘 적용될지) 약간은 의문이다. 여기서 인류학적 인간 개조론이나 교육론이 나오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이 인간을 개조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 신의 몫이다.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면, 다만 그 본능적 욕망에 충실한 인간을 가둘 다른 류의 감옥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예컨데, 도덕 말고, 나를 나의 존재론적 가치로부터 소외시키는 족쇄로서의 감옥이 아니라, 나의 욕망을 '무사히'(타인과의 충돌없이) 실현시키기 위한 인위적 틀로서의 감옥 같은 것...

 

 

[펌] 박노자, 한일야구부터 섹스투어까지

 

"What constitutes the alienation of labour? Firstly, the fact that labour is external to the worker – i.e., does not belong to his essential being; that he, therefore, does not confirm himself in his work, but denies himself, feels miserable and not happy, does not develop free mental and physical energy, but mortifies his flesh and ruins his mind. Hence, the worker feels himself only when he is not working; when he is working, he does not feel himself. He is at home when he is not working, and not at home when he is working. His labour is, therefore, not voluntary but forced, it is forced labour"

"노동의 소외란 무엇인가? 첫째, 노동이 노동자에게 외재적이라는 사실이다. 즉, 노동자의 실존적 존재에 속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노동자는 그 노동에서 자신을 확립시키지 못하는 것이고 그 반면에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 노동자는 노동 과정에서 불행하고 불쾌하게 느끼고, 유쾌한 심신의 기운을 발산하지 못하는 반면 그 심신을 파괴시킨다. 노동자는 노동하지 않을 때만 행복감을 느끼고 노동할 때에 불행감을 느낀다. 노동하지 않을 때에 집과 같은 느낌이고 노동할 때에 '바깥'이다. 즉, 그의 노동이란 자원적이지 않은, 강요받은 노동이다." (『경제-철학 초고』(1844))

 

 (...)『경제-철학 초고』에서 마르크스가 "노동자가 많이 생산할수록 덜 소비한다"고 적고 있을 만큼 생산자를 소비자로 보지 않았는데, 21세기 벽두 자본주의의 제1철칙은 바로 생산자와 소비자의 '不二'입니다. 자본주의가 바뀌었다면 그게 바뀐 것이지요. 노동자가 5주 휴가 동안 그리스에서의 호텔과 각종의 휴양 서비스를 소비할 수 있는 유럽은 그렇다 치고도, 5주 휴가가 없는 이 '중간적' 준주변부의 대한민국에서마저도 노동자가 '노예 노동'의 8~10시간을 꾹 참고 견디고 나면 소비할 수 있는 것은 소주와 삼겹살 이외에도 많습니다. '한일전'에서 우리의 위대한 대한민국이 쪽바리들을 깨부셨다는 국민적 승리감, 텔레비전 드라마에서의 유명 연예인의 표정연기와 예쁜 하얀 살갗의 이미지, 달콤한 유행가의 소리, 그리고 백화점에서의 판매원 아가씨의 친절한 웃음과 존대말….

 

(...) 착한 사람 마르크스는, '완성된 인간'이 되기를 지향하는 노동자가 당연히 자기 상품화를 거부하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믿었던 모양입니다. 그 상품화를 노동자가 즐길 수도 있다는 걸, 아직 원시적 축적 상태인 그 당시의 영국 자본주의를 보고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지요. 그러나 노동자 밑에도 노동자가 있고, 노동자 위에도 노동자가 있는 오늘날의 완숙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위에 있는 노동자에게 밑에 있는 노동자의 자기 상품화란 '즐거움' 그 자체가 될 수 있지요.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가는 전문직 남성 정규직 노동자가 여승무원의 섹시한 외모와 상냥하고 친절한 말투, 매너 등 강요받은 그 친절을 안 즐기나요? 은행에 들르는 정규직 노동자는, 창구에서 노동하면서 그 친절도의 평가를 손님한테 받아야 하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무조건적 친절'을 안 즐기나요?

 

사진 편집: 레디앙

 

(...) 복합화된 자본주의 사회라는 피라미드에서는, 약간이라도 높은 위치를 점한 노동자는 거의 당장에 그 생활 양식/성향상 '새끼 자본가'로 둔갑되지요. 부동산과 주식 투자 등을 통해서 자본의 세계와의 연계를 모색해도 그 밑에 있는, 보다 가난한 여성/저숙련/외국인/청년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꺼립니다. 분리통치가 지금처럼 완벽해질 수 있다는 걸 마르크스가 예측할 수 있었나요? 자본주의의 주기성 - 필수적 공황의 도래, 이윤율저하 원칙 등 때문에 노동자들이 구조적 고통을 받게 돼 있지만, 약간이라도 체제 속에서 안정된 위치를 갖게 되면 그 체제의 아주 보수적일 일부분이 되고 맙니다. 감옥이 즐겁고 달콤하기만 하면 인간이라는 동물은 그 감옥의 종신 수인을 자청할 확률은 매우 높지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비자본주의적 대안의 매력을 보여주자면 (...) 자본이 없을 때에 앎이란 얼마나 맛이 있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게 더 효율적일 걸요. (...) 다른 차원에서 자본주의 '이후'를 '가시적으로' 준비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  한일야구부터 섹스투어까지-[나의 혁명론⑦] 맑스의 꿈…현대 노동자들이 누리는 것, 레디앙,  2009년 03월 19일 (목) 09: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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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300만명이 거리로..

약속대로(*), 어제, 3월 19일 전국단위의 파업이 프랑스에서 성공적으로 실행됐다는 소식이다. 지난 1월 29일 총파업(**)에서 250만 명이 파업에 동참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규모가 조금 더 늘어난 300만 명이라고 한다. 물론 사르코지 정부는 '국민의 목소리에 귀는 기울이겠지만 더 이상의 양보는 있을 수 없다'며 버티고, 노동조합 측은 '승리의 그날까지 투쟁은 계속된다'며 결의를 재확인 했다는데... 학교도 문을 닫고 교통도 절반 이상이 멈춰섰고, 심지어는 신문도 배달이 불가능하므로 인터넷에서 공짜로(원래 PDF 판은 유료) 보라는 다음과 같은 안내문을 르몽드(석간)는 대문에 걸어두기도 했다.  

(*) 2009.02.19 | 26억euro, 부족하다, 3월 19일 다시 보자!  http://blog.jinbo.net/radix/?pid=87
(**) 2009.01.30 | 20년만에 거리로 나선 프랑스 봉급쟁이들  http://blog.jinbo.net/radix/?pid=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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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déo
Colères de cadres dans le cortège parisien
LEMONDE.FR | 19.03.09 | 20h39  •  Mis à jour le 19.03.09 | 20h53

Durée : 2:40  |  Images : Le Monde.fr
Les cadres, parmi lesquels beaucoup n'avaient jamais manifesté, étaient au rendez-vous du défilé entre la place de la Bastille et la Nation, à Paris jeudi 19 mars.
Reportage réalisé par Stéphane Mazzorato et Jonathan Parient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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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트로스 1 (탄생 100돌-2008/11/28)

1/3. 레비스트로스 탄생 100돌 ‘구조주의 학술 파티’

‘구조·탈구조와 우리’ 주제, 김형효·최용호 교수 등 인류·철학자들 논문 발표, “구조주의 영향 되짚을것”

 
대표작 <슬픈 열대>와 <야생의 사고>로 친숙한 프랑스 구조주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1908~·사진)가 28일 100번째 생일을 맞는다. 신화·결혼규칙·요리체계 같은 사회문화적 현상의 심층에는 ‘형제와 자매’ ‘구운 것과 끓인 것’ ‘손님과 친족’ 같은 이원적 대립의 구조가 자리잡고 있음을 밝혀낸 레비스트로스는 언어학의 로만 야콥슨, 정신분석학의 자크 라캉과 함께 구조주의 시대를 열어 젖힌 20세기 지성계의 거목으로 꼽힌다. 인간의 의식이나 사회 제도가 생물학이나 개인 심리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차이의 관계망’ 속에서 구성된다는 구조주의의 발견에 대해 20세기 지성사는 “데카르트 이래 인류가 자부해 온 주체의 존엄성을 영원히 사라지게 만든”(푸코) 혁명적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993년 <보기 듣기 읽기>라는 비평집을 낸 뒤 모든 대외 활동을 접었던 까닭에 레비스트로스의 존재는 15년 가까이 사람들 기억에서 잊혀져 있었다. 그사이 프랑스에서는 지난 5월 그의 저술 7편이 갈리마르출판사의 ‘플레이아드 총서’로 묶여 나온 것을 계기로 <누벨 옵세르바퇴르> 등의 매체가 ‘레비스트로스 특집’을 대대적으로 다루기도 했다. 하지만 100번째 생일을 일주일 남짓 앞둔 19일 현재까지도 프랑스를 제외한 서방 언론의 반응은 조용하기만 하다.  

이런 상황에서 ‘구조주의의 변방’ 한국에서 그의 탄생 100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학술대회가 열린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에 가깝다. 한국의 인문사회과학계에서 레비스트로스는 헤겔·하이데거로 상징되는 독일 철학과, 미드·래드클리프브라운 등의 영미 인류학에 밀려 변변한 학맥조차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기호학회가 22일 서울 덕성여대에서 ‘레비스트로스 탄생 100주년-구조·탈구조와 우리’라는 주제로 개최하는 학술대회에선 원로 학자인 김형효·임봉길 교수의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10편의 논문이 발표된다. 최용호(한국외대)·박여성(제주대)·김기국(경희대)·윤성노(숭실대) 교수 등 인류학·철학·불문학·국문학계에서 구조주의 방법론을 통해 레비스트로스와 관계를 맺은 학자들이 총출동한다.

 

 

 » 1981년 10월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초청으로 방한한 레비스트로스(오른쪽에서 두번째) 부부가 경북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해 전통 한옥구조를 둘러보고 있다. 한길사 제공 
  
사실 레비스트로스와 한국의 인연이라면, 그가 1981년 10월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초청으로 방한해 20일 가까이 머물며 경주와 통도사 등을 방문한 뒤 돌아갔다는 것 정도다. 그의 존재가 알려진 것도 1968년 방한한 프랑스 문학비평가 질베르 뒤랑이 강연을 통해 그의 이름을 언급한 뒤, 같은해 잡지 <사상계>에 3회에 걸쳐 ‘레비스트로스 기획’이 연재되면서부터다. 개인적 친분을 유지하는 학자도 그의 대표작 <신화학> 1·2권을 번역한 임봉길 강원대 교수가 유일하다. 임 교수는 프랑스 인류학의 대가 마르셀 모스 밑에서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수학한 조르주 콩도미나스 교수에게서 인류학을 배웠다. 임 교수는 “3년 전 번역한 <신화학> 1권을 레비스트로스 교수에게 보냈더니 ‘표지 디자인이 좋다. 한글도 아름답다’는 내용의 친필 답장을 보내왔다”며 “지난해부터 기력이 쇠해져 파리의 집에서 칩거 중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1989년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이라는 책을 통해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사상을 국내에 본격 소개한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한국에서 구조주의의 ‘학문적 시민권’ 획득이 지연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프랑스어를 모르고, 또 구조주의 이론 자체가 워낙 난해하니까 철학이나 인류학 쪽에서는 제대로 소화를 못했다. 게다가 감정으로 모든 것을 결단내는 한국 같은 나라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선험적 구조’를 중시하는 구조주의가 설 자리가 있었겠는가.” 송효섭 기호학회장은 “포스트모던과 탈구조가 논의되는 21세기의 시점에서 그의 이론과 방법론은 아직도 달성해야 할 목표이자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며 “구조주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국내의 석학과 중진, 신진기예를 망라해 그의 탄생 100년이 던지는 의미와 공과를 짚어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기사등록 : 2008-11-19 오후 07:36:24 ⓒ 한겨레)

 

 

2/3. 위의 기사에서 <누벨 옵세르바퇴르>를 언급해준 덕분에 찾아보니 이런 게 있다.

Le centenaire de Lévi-Strauss : Un Indien dans le siècle

Nº2269 / SEMAINE DU JEUDI 01 Mai 2008 < Le Nouvel Observateur < Un Indien dans le siècle
Père tutélaire du structuralisme, à la fois philosophe et ethnologue, l'auteur de «Tristes Tropiques» va avoir 100 ans et entre en Pléiade. Il est l'auteur d'une oeuvre considérable dont la portée est universelle

 

Cent ans de solitude à travers un âge contemporain qu'il n'aura guère aimé. Cent ans d'une vie sereine et discrète, indifférente à tous les projets de récupération, à contre-courant de toutes les modes. Si Claude Lévi-Strauss a profondément marqué la pensée de son temps, jamais ce dernier n'a recueilli le moindre éloge de la part du grand ethnologue, qui lui a toujours préféré la compagnie des mythes bororo, des opéras de Wagner ou de la prose dix-huitiémiste de Rousseau, le seul maître-penseur qu'il se reconnut vraiment, à l'exception peut-être de l'auteur des «Mémoires d'outre-tombe».


«Il n'y a plus rien à faire : la civilisation n'est plus cette fleur fragile qu'on préservait, écrivait-il dans «Tristes Tropiques» en 1955, le livre unanimement salué par Bataille, Aron ou Blanchot, et qui le révélera au public. L'humanité s'installe dans la monoculture; elle s'apprête à produire la civilisation en masse, comme la betterave.» Emprise totale de l'homme sur une nature massacrée, destruction accélérée de toute diversité culturelle à travers le globe, ainsi le chercheur désenchanté, qui n'avait jamais envisagé sérieusement de transformer politiquement le monde, a-t-il aussi fini par renoncer à le sauvegarder. «Ce n'est pas pour perpétuer cette diversité que je lutte, déclarait-il ainsi dès 1967, à la parution du deuxième volume des «Mythologiques», mais pour en préserver le souvenir.»(*) Conserver la mémoire sensible d'une danse nambikwara ou le geste d'une main qui allume le feu, contre une barbarie technicienne et marchande en passe d'imposer partout sa paix blanche et de stériliser tout germe de création spirituelle à venir, c'est ainsi que Lévi-Strauss a modestement conçu son travail. Curieuse situation à cet égard que celle des ethnologues, qui ne doivent l'existence de leur discipline qu'à un colonialisme destructeur de «tout ce à quoi nous attachons du prix», soulignait-il lors de son premier cours au Collège de France en 1959. C'est sur le conseil de Paul Nizan que le jeune agrégé de philosophie affirmera avoir choisi cette voie, comme porte de sortie à l'enseignement. En 1935, à 27 ans, il se retrouve ainsi au Brésil, découvrant la vie d'«épuisement physique et mental constant» de l'ethnologue de terrain. Un certain absolutisme l'y poussera également. Avec la philosophie occidentale, il aurait eu l'impression de «s'arrêter à mi-chemin», dira-t-il, de se borner aux enceintes mentales bâties par la Grèce et par Rome, à cette civilisation à la fois très tardive et très circonscrite dans l'espace qui, depuis des milliers d'années, s'était servie de la pensée dite «primitive» comme d'un paillasson. Avec l'ethnologie, au contraire, il ambitionne d'embrasser la totalité des expériences humaines connues ou possibles, et ainsi d'«aller jusqu'à l'extrême limite de ce qui était le but même de la philosophie».

[대충 요약하면] 레비스트로스는 문화 다양성을 파괴하는 행위들의 가속화에 반감을 갖지만, 그렇다고 (거창하게 맑스처럼) '세계를 변혁하기'에 심각한 정치적 고려를 한 것은 전혀 아니다: 그는 말하길, "내가 투쟁하는 것은 문화 다양성을 보존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문화 다양성의) 기억을 간직하기 위함이다."(*) 기술과 상품이 갖는 야만의 (문화에) 대항하는 그런 기억 말이다. 아마도 이런 야만은 우리 모두를 가격에 옭아매게하는 파괴적 식민주의의 결과일 것이다. -하여튼 아주 겸손한 투쟁목표다, 이게 누군가에게는 더 거창한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겠지만.

 

A ce donquichottisme revendiqué, Lévi-Strauss, issu d'une lignée juive d'origine alsacienne, consentira parfois du bout des lèvres une autre explication. Comme tant d'autres, ce petit-fils de rabbin versaillais expérimente l'antisémitisme des années 1930. «On m'a traité de sale juif dès l'école communale...» Et encore au lycée, où il répond par le coup de poing. «Se découvrir subitement contesté par une communauté dont on croyait être partie intégrante peut conduire un jeune esprit à prendre quelque distance à l'égard de la réalité sociale, contraint qu'il est de la considérer simultanément du dedans où il se sent et du dehors où on le met.» Une situation qui, si elle le mènera d'une certaine façon au «regard éloigné» de l'ethnologue, ne le poussera jamais au rejet d'une identité française que Lévi-Strauss revendiqua toujours «intégralement et exclusivement». «Je me sens concerné par le sort d'Israël, affirmera-t-il des années plus tard, de la même façon qu'un Parisien conscient de ses origines bretonnes pourrait se sentir concerné par ce qui se passe en Irlande : ce sont des cousins éloignés...»

레비스트로스는 어릴 적부터 '나쁜 유대인'이라고 놀림과 배척을 당했고, 이런 경험이 그가  "동화-통섭-합류 / 배제-배타-거부" 등의 어휘를 인류학 연구에 꾸준히 적용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Revenu du Brésil, le jeune chercheur ne prend pas tout de suite la mesure du danger hitlérien. En septembre 1940, il a même la ferme intention d'occuper le poste au lycée Henri-IV où il vient d'être nommé. «Avec le nom que vous portez, aller à Paris ? Vous n'y pensez pas ?», l'avertit le fonctionnaire de Vichy chargé d'examiner son dossier. Ce sera donc l'embarquement sur un vieux rafiot pour New York, Lévi-Strauss bénéficiant du plan de sauvetage des savants européens menacés par les nazis initié par la Fondation Rockefeller. Arrivé sur place, son nom pose encore problème... mais cette fois c'est à cause des fameux blue-jeans. On lui conseille de le changer sans quoi les étudiants «would find it funny» -, et on lui confie sans tarder un cours de sociologie contemporaine de l'Amérique du Sud, dont il ignore alors presque tout.

 

Ces années new-yorkaises seront d'une fécondité exceptionnelle. C'est là qu'il s'attelle à la rédaction des «Structures élémentaires de la parenté», dépouillant des monographies ethnologiques du monde entier. C'est là aussi qu'il côtoie les surréalistes, Breton, Ernst ou encore Duchamp, qui lui communiqueront le goût des rapprochements abrupts et imprévus, procédé esthétique qu'il transformera en méthode d'analyse. «Nos soirées me faisaient penser, toutes proportions gardées, aux précieuses ou à l'Hôtel de Rambouillet», dira-t-il en 1985, au moment de la parution de «la Potière jalouse». C'est aussi à New York, pendant ces années de guerre, qu'il fera la rencontre intellectuelle décisive, celle du linguiste Roman Jakobson. «Je faisais du structuralisme sans le savoir. Jakobson m'a révélé l'existence d'un corps de doctrine déjà constitué.» C'est une illumination. Une dizaine d'années après son retour en France en 1945, Lévi-Strauss sera devenu la figure emblématique de ce mouvement aujourd'hui encore mal compris.


Le «structuralisme», pour dire les choses simplement, est avant tout une façon de ne pas se laisser duper par le sentiment de l'identité personnelle. A rebours de l'existentialisme sartrien, Lévi-Strauss entre en guerre contre le «sujet», «cet insupportable enfant gâté qui a trop longtemps occupé la scène philosophique, et empêché tout travail sérieux en réclamant une attention exclusive». Ainsi se place-t-il résolument du côté de la «rationalité sans sujet» contre les tenants du «sujet sans rationalité». Du marxisme, sa pensée hérite l'idée que toute conscience sociale est trompeuse et que l'existence pratique des hommes conditionne leurs productions psychiques. Du freudisme, celle que même les expression!s en apparence les plus arbitraires voire absurdes de l'esprit peuvent être déchiffrées. Ainsi Lévi-Strauss se lance-t-il dans un inlassable décryptage des invariants et tracés obligatoires qui se dissimulent derrière l'apparente infinité des mythes et autres faits culturels.

레비스트로스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반대하여 주체에 대항(한겨레 기사의 푸코 발언 참조)하는 전쟁에 돌입하며 이렇게 말한다 : "이 참을수 없는 응석받이 아이(사르트르)가 너무 오랫동안 철학 무대를 장악했고, (실존주의에) 일종의 배타적 주목을 주창하며 모든 진지한 연구를 가로막았다."

 

Claude Lévi-Strauss / né en 1908, Claude Lévi-Strauss est le fondateur de la théorie structuraliste française. Philosophe de formation, il devient ethnologue au Brésil dans les années 1930. Elu en 1959 à la chaire d'anthropologie sociale du Collège de France, il y enseignera jusqu'en 1982. Académicien depuis 1973, il est notamment l'auteur de «Tristes Tropiques» (1955), de «l'Homme nu» (1971) et de «Regarder, écouter, lire» (1993), tous publiés chez Plon.

Aude Lancelin / Le Nouvel Observateur

  

 

3/3. 탄생 100 주년 기념 신문 기고문 3편


Lévi-Strauss depuis le temps / par DENIS KAMBOUCHNER

Le philosophe en rupture de philosophie et anthropologue aura 100 ans le 28 novembre

On dira «le siècle de Lévi-Strauss». Lui n’en croit rien. «Le siècle de…», quelle présomption ! Cela ressemble à tout ce qu’il faut fuir, formules, slogans et hyperboles. La moindre décence l’indiquera : un siècle n’est à personne. Et d’abord, quel siècle ? Quand on a commencé sa vie dans le Paris de Proust, avec ses restes de campagne et ses voitures à chevaux, et qu’on l’achève à l’âge d’Internet, cela fait bien trois siècles en un.

Et puis, songez à l’héritage : un monde si dévasté. Laideur industrielle, océans de déchets, espèces et cultures éteintes en nombre, et l’agressivité démultipliée par le numérique… Non, pas son siècle. Le siècle qui aura été le sien, de cœur, s’il y en eut un, c’était il y a longtemps, disons : pas après les années 60. La «civilisation mondiale» qu’annonçait la fin de Race et histoire, nous y sommes, et elle n’est, comme prévu, «civilisation» que par antiphrase.

Pas le sien, donc - et pourtant le siècle est là, qu’on ne franchit pas par hasard. Sans une rare endurance doublée d’un régime de chaque jour, impossible d’y compter. Était-ce un but ? A soi seul, non bien sûr. Regarder, écouter, persévérer dans sa propre veille, la parfaire encore, oui, si l’on veut, c’est là le but. Mais dans le cas de Lévi-Strauss, longueur de vue aura rimé avec longévité.

Lettres. Depuis longtemps, sans pose aucune, cet homme s’est installé dans une forme d’intemporalité. N’imaginez pas une absence. Retiré, oui, il l’est depuis longtemps, sortant fort peu, ne se mêlant à rien qu’il n’ait choisi. Mais le fait provient d’avant la retraite, et va de pair avec une merveille d’attention : à preuve ses lettres toujours si exactes, dans leur belle encre terre de Sienne. Tout est là, dans ce sens de la correspondance, ce juste emploi du temps et cette très ancienne courtoisie.

 

De même pour l’œuvre. Quand donc Lévi-Strauss s’est-il, à sa manière, installé dans l’intemporel ? Lui le sait peut-être, nous non. Mais on peut répondre : quand son style a été formé. Ce style se reconnaît, comme celui des plus grands, à quelques mots. Voyez le début des Structures élémentaires de la parenté (1947) : «De tous les principes avancés par les précurseurs de la sociologie, aucun n’a, sans doute, été répudié avec autant d’assurance…». Ou sur un autre registre celui, si fameux, de Tristes tropiques (1955) : «Je hais les voyages et les explorateurs. Et voici que je m’apprête à raconter mes expéditions. Mais que de temps pour m’y résoudre !» Rien ne fut jamais mieux frappé. C’était l’autorité d’un Descartes ou d’un Bergson (pour lui deux figures adverses), ou encore celle d’un Bach, d’un Poussin, d’un Montaigne, avec une extrême ouverture du champ, et le soin apporté à chaque nuance.

Masques. Grand style classique ? Bien sûr. Poli dans le solide lycée des années  20, mais surtout nourri de toutes sortes d’expériences : société, conversations, paysages, peinture, musique, littérature, philosophie, histoire et politique - action comprise, comme de rigueur à l’époque. Le fruit, en somme, d’une culture intensive et très tôt plurielle dans un esprit d’avance indépendant. De quoi nous renvoyer tous à notre éducation bancale, et à nos ignorances, qui sont légion. Pourquoi le nier ? L’œuvre de Lévi-Strauss a eu d’emblée quelque chose à voir avec le musée. Ainsi au départ de la Voie des masques (1979). Le musée : non simple collection publique ou privée, mais conservatoire d’une multiplicité rendue sensible et lisible. Pourtant, le musée n’est pas son espace : ce que cette œuvre donne à voir est tout en extérieur. Ouvrez au hasard le même livre : «Il n’est donc pas dépourvu de sens, ni de portée, qu’une version kwakiutl du mythe de l’amant-chien s’achève sur un repas de Scorpénidé rouge» (p. 212). Cette poésie du symbolique est partout, et avec elle toute une nature et toute une vie de peuples presque disparus. L’intemporel ne tient pas simplement ici au style ni à l’espace : tout autant à la substance, immémoriale, et au regard qui distingue tout.

Philosophe en rupture de philosophie («la pensée» s’enivre si souvent de son verbe…), Lévi-Strauss avait fait une exception pour Spinoza. De la connaissance la plus haute, Spinoza dit qu’elle est «éternelle». Et donc, quiconque a cultivé ce genre de connaissance, «la plus grande partie de son esprit est éternelle». L’idée a sa tradition, qui remonte aux Grecs. Ses objets étaient tout autres. N’empêche : aux prises avec une complexité chatoyante et condamnée, les grands livres de Lévi-Strauss, dont ses Mythologiques, réalisent quelque chose de cette éternité.

Lévi-Strauss, dernier stoïcien ? néoplatonicien dissident ? Non, s’il vous plaît, pas de formules. Et quant au «siècle», oui, il s’y est mesuré. Mais pour la profondeur du temps, c’est encore peu. (Liberation Culture 13 nov. 6h51)

 

 

Il nous a anticipés / par Patrice Maniglier 

Quand je suis entré à Normale-Sup, au début des années 1990, Lévi-Strauss était complètement absent du paysage philosophique. Il y avait un repli de la philosophie sur elle-même, et ceux qui, dans ma génération, s'intéressaient au monde contemporain, étaient nourris par des auteurs comme Deleuze, Foucault, Derrida, voire Wittgenstein. Le structuralisme passait pour une théorie des systèmes immobiles, que ces philosophes-là avaient dépassée en faveur d'une pensée du changement.

Or quand j'ai lu Lévi-Strauss, j'ai eu la surprise de découvrir un penseur fasciné par la variabilité des cultures humaines, et qui considére que rien n'a de sens sinon ce qui est en train de se transformer. Au moment des débats sur le pacs, et alors que certains utilisaient Lévi-Strauss pour justifier le refus d'accorder des droits aux couples de même sexe, j'ai eu l'impression que ses textes étaient au contraire un instrument propre à éclairer ce qui avait changé pour que le mariage ou l'adoption par des couples de même sexe deviennent soudain au moins pensables, alors qu'ils ne l'étaient pas vingt ans auparavant.

Dans un autre domaine, il permet de comprendre comment la philosophie peut se nourrir d'un film pour teenagers comme Matrix : non pas en proposant une interprétation profonde, mais en acceptant qu'un film hollywoodien, comme le mythe selon Lévi-Strauss, n'a pas un sens figé, et qu'il en produit en combinant des aspects de la culture très éloignés les uns des autres, la religion et la bande dessinée, le cinéma et la métaphysique. Bref, qu'on se veuille "post-moderne", "queer" ou "pop", Lévi-Strauss nous a anticipés, il nous a situés ; et il nous a justifiés mieux que nous ne l'avions fait. (Article paru dans l'édition du 26.11.08. LE MONDE | 25.11.08 | 10h28  •  Mis à jour le 27.11.08 | 10h03 / Patrice Maniglier est philosophe, professeur à l'université d'Essex (Grande-Bretagne). Propos recueillis par Jean Birnbaum)
  

 

L'absolue fragilité des sociétés / par Stéphane Breton   

Que découvre-t-on lorsqu'on lit Lévi-Strauss pour la première fois ? L'existence d'une chose que l'on a pourtant sous les yeux, "la société", que tout dans nos habitudes modernes conspire à dissimuler ou à juger scandaleuse, aliénante, contraire à notre frénésie d'émancipation. Et cette société, qu'on trouve aussi bien chez les Indiens du Mato Grosso que chez les habitants des pays industrialisés, en elle tout se tient, c'est cela qu'on lit dans Lévi-Strauss. Bouger une pièce change l'équilibre général.

C'est pourquoi elle est si fragile : pas tant sous le coup des crises que dans l'érosion désinvolte des habitudes et des valeurs qui vont de soi et sur lesquelles repose notre vie la plus simple. C'est cette éblouissante fragilité des sociétés lointaines ou proches qu'après être devenu ethnologue j'ai voulu peindre dans mes films documentaires : en recréant une totalité, en saisissant une atmosphère plus vaste que les personnages.

L'homme à la caméra et l'ethnologue ont au moins une chose en commun. Ils savent que ce qu'ils observent, ce ne sont pas seulement des "agents", mais une société. Ce n'est pas de manière neutre qu'ils voient ce qui leur est étranger, mais selon leurs propres habitudes de pensée. Ils savent aussi que lorsqu'ils regardent quelqu'un, celui-ci les regarde en retour, équipé de "sa" culture. C'est toujours une société qui en regarde une autre. (Article paru dans l'édition du 26.11.08. LE MONDE | 25.11.08 | 10h28 / Stéphane Breton est ethnologue et cinéaste au Musée du quai Branly, où il dirige la collection de films documentaires "L'usage du monde". Propos recueillis par Patrick Kéchichian)

 

 

[기타] 

Lévi-Strauss a 100 ans / A l'occasion du centenaire de l'anthropologue, aujourd’hui, le musée parisien du Quai Branly organise une série de manifestations en son honneur. DOMINIQUE POIRET, http://www.liberation.fr/culture/1101216-levi-strauss-a-100-ans:i-2 [사진모음] 

Lévi-Strauss, l'éternel retour / L’anthropologue et philosophe a cent ans aujourd’hui. L’Humanité de vendredi rend hommage avec quatre pages spéciales à l’inventeur du structuralisme, qui a parcouru les sociétés humaines pour en faire surgir les rationalités ancestrales. Avec entre autres un entretien avec Vincent Debaene, qui a coordonné et préfacé le volume des Œuvres de Claude Lévi-Strauss dans la Pléiade. Ainsi que des points de vue de Emmanuel Terray, Christian Bromberger, Marc Augé, http://www.humanite.fr/Levi-Strauss-l-eternel-retour [뤼마니떼에는 특집으로 신문 네 면을 할애했다는 말만 있고 내용은 아직 안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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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트로스 2 (저작,영상인터뷰,etc.)

1/3. 쁠레이아드(Gallimard-Pleiade)의 레비스트로스

레비스트로스(*)가 살아서 작년에(2008-05-01) 갈리마르출판사의 '쁠레이아드' 판에 들어갔다기에 찾아다 옮긴다. 과연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있는 이 꼴렉시옹(총서)에 살아서 들어간 자가 누가 있을지 궁금하다 (이건 조사를 할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생략). 이러다가 어쩌면(조금만 더 오래 살면) 살아서 빵떼옹(Phantheon-만신전: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자들의 공동묘지)에 자리를 예약해 두는 아마도 최초의 산 자가 되지 않을는지도 모르겠다는(유네스코 건이라는 아주 큰 물건도 있고 하니) 무례한 상상을 해본다.

(*) 어떤 사람들은 '레비'가 이름이고 '스트로스'가 성인 양 둘을 띄어쓰는 경우도 있는데, '레비-스트로스'(Lévi-Strauss)는 전체가 성이고 그의 이름은 '끌로드'(Claude) 이다. 비슷한 예로 메를로-뽕띠(Merleau-Ponty)의 성도 뽕띠나 퐁티가 아니라, 이 전체이고 그의 이름은 '모리스'(Maurice) 이다.

   

Résumé - Oeuvres // Alliant le classicisme du style et la modernité de la méthode, l'oeuvre de Claude Lévi-Strauss est à la fois pensée du monde, expérience de soi, et expérience sur soi. « Pourquoi et comment devient-on ethnologue ? » « Qu'est-ce qu'un style ? » « Que peut-il y avoir de commun entre un oiseau - l'Engoulevent -, l'art de la poterie, et la jalousie conjugale ? » En quoi la mythologie indienne a-t-elle favorisé la conquête de l'Amérique par l'homme blanc ?... Questions surprenantes, mais qui sont pourtant à la source des enquêtes menées par Lévi-Strauss. Le ton est donné. Son oeuvre relève à la fois de la science et de la littérature, dirait-on, si de telles catégories pouvaient rendre compte de la singularité de son propos. Mais chez Lévi-Strauss, le cloisonnement n'est pas de mise, et le penseur fait « flèche de tout bois ». Ainsi le souvenir d'un tableau de la Renaissance sert-il de point de départ à une théorie de la structuration du sensible. Ainsi peut-on retrouver Totem et tabou dans un mythe jivaro. Ainsi la métaphysique bororo éclaire-t-elle d'un jour nouveau la figure de notre Père Noël. Lévi-Strauss est à la recherche des correspondances, au sens baudelairien du terme, entre l'esprit et sa manifestation matérielle. Il met en scène les affinités qu'il perçoit entre les différents objets, le fil caché qui les relie. L'objet de l'analyse se dérobe ; il ne contient aucun message qui soit immédiatement communicable. Car un objet, mythe ou autre, n'existe pas en soi mais dans le rapport, les correspondances, qu'il entretient avec les autres objets. Passerelles, rapprochements inattendus, résurgences, tels sont les jeux d'esprit auxquels invite la lecture de ces oeuvres, qui ébranlent notre vision du monde. 

La présente édition réunit sept ouvrages choisis par l'auteur : Tristes tropiques, remémoration des expériences de terrain de la fin des années 1930 qui resurgiront dans toute l'oeuvre à venir ; Le Totémisme aujourd'hui et La Pensée sauvage, charnières entre la réflexion sur la parenté et l'étude des mythes ; La Voie des masques, La Potière jalouse et Histoire de Lynx, les trois « Petites mythologiques » qui, sur le ton de l'énigme, proposent une version accessible de l'analyse structurale ; Regarder écouter lire, enfin, poursuite de la réflexion anthropologique sur le terrain esthétique. Des textes inédits sont proposés en appendice. Au-delà de leur fonction figurative et documentaire, les illustrations, environ deux cents, en noir et blanc et en couleurs, donnent une forme visuelle à la pensée.  

Livre - Oeuvres

Détails / Auteur : Claude Lévi-Strauss 
Editeur : Gallimard, Collection : Bibliotheque De La Pleiade, Date de parution : 2008-05-01 
EAN13 : 9782070118021, Genre : Ethnologie, Langue : français, Format : 170x105x0, Poids : 760g 

 

 

2/3. 위키페디아의 레비스트로스 (항목 중 특이사항 몇 가지만 발췌) 

Claude Lévi-Strauss, issu d'une lignée juive d'origine alsacienne, est né à Bruxelles de parents français. Son père était un peintre de portrait, qui fut ruiné par l'arrivée de la photographie et son grand-père était le rabbin de la synagogue de Versailles. Il fait ses études secondaires à Paris aux lycées Janson de Sailly et Condorcet ; puis des études supérieures à la faculté de droit de Paris (licence) et à la Sorbonne (troisième à l'agrégation de philosophie en 1931, doctorat ès lettres en 1948). Il est pendant cette période, brièvement engagé à gauche.

할아버지가 유대교 목사였고, 그렇게 LS의 근본은 유대인이다. 놀랍게도 LS는 프랑스 대가들이 다 나오는 고등사범학교를 안(못) 나오고 일반대학인 소르본느 출신이라 함 (고로 아주 드문 '비 고등사범계 대가'는 들뢰즈와 LS 정도. 또 누가 있을까?). 1931년에 철학 교사자격시험(아그레가씨옹)에 합격하고, 박사학위는 40세인 1948년에 획득.

 

1/ La rébellion contre la sociologie durkheimienne [뒤르까임 전통의 사회학에 반발]

2/ L’introduction de la linguistique structurale en anthropologie [소쉬르의 언어학이론을 인류학에 도입(접목)]

3/ Dialogue et rivalité avec la psychanalyse freudienne [프로이드 심리학과의 교감(대화)과 경쟁]

* 위의 세 항목 정도가 아주 흥미롭고 유익한 것이 되겠는데 모두 한참 길고, 기타 참고할만한 자료도 많기에 직접 링크된 곳을 방문하는 게 낫겠다 : http://fr.wikipedia.org/wiki/Levi-Strauss  

 

 

3/3. 인터뷰 (1972년 'arte'라는 불-독 합작 방송국에서 레비스트로스를 인터뷰한 영상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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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x] Macherey,08) Thèses sur Feuerb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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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x] Thesen über Feuerbach

a d   F e u e r b a c h
[Thesen über Feuerbach]
Frühjahr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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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Feuerbach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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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 Hauptmangel alles bisherigen Materialismus (den Feuerbachschen mit eingerechnet) ist, dass der Gegenstand, die Wirklichkeit, Sinnlichkeit, nur unter der Form des Objects oder der Anschauung gefasst wird; nicht aber als sinnlich menschliche Thätigkeit, Praxis; nicht subjectiv. Daher die thätige Seite abstract im Gegensatz zu dem Materialismus von dem Idealismus - der natürlich die wirkliche, sinnliche Thätigkeit als solche nicht kennt - entwickelt. Feuerbach will sinnliche - von den Gedankenobjecten wirklich unterschiedene Objecte: aber er fasst die menschliche Thätigkeit selbst nicht als gegenständliche Thätigkeit. Er betrachtet daher im «Wesen des Christenthums» nur das theoretische Verhalten als das echt menschliche, während die Praxis nur in ihrer schmutzig jüdischen Erscheinungsform gefasst und fixirt wird. Er begreift daher nicht die Bedeutung der «revolutionären», der «praktisch-kritischen» Thätigkei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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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Frage, ob dem menschlichen Denken gegenständliche Wahrheit zukomme - ist keine Frage der Theorie, sondern eine praktische Frage. In der Praxis muss der Mensch die Wahrheit, i. e.. Wirklichkeit und Macht, Diesseitigkeit seines Denkens beweisen. Der Streit über die Wirklichkeit oder Nichtwirklichkeit des Denkens - das von der Praxis isolirt ist - ist eine rein scholastische Frage.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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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materialistische Lehre von der Veränderung der Umstände und der Erziehung vergisst, dass die Umstände von den Menschen verändert und der Erzieher selbst erzogen werden muss. Sie muss daher die Gesellschaft in zwei Theile - von denen der eine über ihr erhaben ist - sondiren.
Das Zusammenfallen des Ändern[s] der Umstände und der menschlichen Thätigkeit oder Selbstveränderung kann nur als revolutionäre Praxis gefasst und rationell verstanden werden.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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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uerbach geht von dem Factum der religiösen Selbstentfremdung, der Verdopplung der Welt in eine religiöse und eine weltliche aus. Seine Arbeit besteht darin, die religiöse Welt in ihre weltliche Grundlage aufzulösen. Aber dass die weltliche Grundlage sich von sich selbst abhebt und sich ein selbständiges Reich in den Wolken fixirt, ist nur aus der Selbstzerrissenheit und Sichselbstwidersprechen dieser weltlichen Grundlage zu erklären. Diese selbst muss also in sich selbst sowohl in ihrem Widerspruch verstanden als praktisch revolutionirt werden. Also nachdem z. B. die irdische Familie als das Geheimniss der heiligen Familie entdeckt ist, muss nun erstere selbst theoretisch und praktisch vernichtet werden.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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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uerbach, mit dem abstracten Denken nicht zufrieden, will die Anschauung; aber er fasst die Sinnlichkeit nicht als praktische menschlich-sinnliche Thätigkeit.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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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uerbach löst das religiöse Wesen in das menschliche Wesen auf. Aber das menschliche Wesen ist kein dem einzelnen Individuum inwohnendes Abstractum. In seiner Wirklichkeit ist es das ensemble der gesellschaftlichen Verhältnisse.
Feuerbach, der auf die Kritik dieses wirklichen Wesens nicht eingeht, ist daher gezwungen:
1. von dem geschichtlichen Verlauf zu abstrahieren und das religiöse Gemüt für sich zu fixiren und ein abstract - isolirt - menschliches Individuum vorauszusetzen.
2. Das Wesen kann daher nur als «Gattung», als innere, stumme, die vielen Individuen natürlich verbindende Allgemeinheit gefasst werden.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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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uerbach sieht daher nicht, dass das «religiöse Gemüth» selbst ein gesellschaftliches Product ist und dass das abstracte Individuum, das er analysirt, einer bestimmten Gesellschaftsform angehört.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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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es gesellschaftliche Leben ist wesentlich praktisch. Alle Mysterien, welche die Theorie zum Mysticism[us] veranlassen, finden ihre rationelle Lösung in der menschlichen Praxis und im Begreifen dieser Praxis.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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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s Höchste, wozu der anschauende Materialismus kommt, d. h. der Materialismus, der die Sinnlichkeit nicht als praktische Thätigkeit begreift, ist die Anschauung der einzelnen Individuen und der bürgerlichen Gesellschaft.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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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 Standpunkt des alten Materialismus ist die bürgerliche Gesellschaft; der Standpunkt des neuen die menschliche Gesellschaft oder die gesellschaftliche Menschheit.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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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Philosophen haben die Welt nur verschieden interpretirt, es kömmt drauf an, sie zu verändern.



 

 

 

D e r   A u t o r
Karl Marx wird 1818 in Trier geboren. 1824 tritt die jüdische Familie zum Protestantismus über. Ab 1835 studiert Marx in Bonn und ab 1836 in Berlin Jura, später unter dem Einfluß Hegels Philosophie und Geschichte. Er promoviert 1841 in Jena. 1842/43 ist er Redakteur bei der «Rheinischen Zeitung». Nach der Heirat mit Jenny von Wetphalen geht er nach Paris, wo er 1844 zusammen mit Arnold Ruge die «Deutsch-Französischen Jahrbücher» herausgibt. Auf Anregung von Friedrich Engels beschäftigt er sich mit dem ökonomischen Werk von Adam Smith und David Ricardo und studiert die Theorien der Frühsozialisten. Gemeinsam mit Engels setzt er sich in der «Heiligen Familie» und der «Deutschen Ideologie» mit den Linksheglianern und den Theorien Feuerbachs auseinander und veröffentlicht mit Engels 1848 das «Kommunistische Manifest». Im gleichen Jahr gibt er in Köln die «Neue Rheinische Zeitung» heraus. Nach deren Verbot geht er 1849 nach London ins Exil. Hier entstehen unter schwierigen Lebensbedingungen seine ökonomischen Hauptschriften. In zahlreichen politischen Schriften und Artikeln beeinflußt er in den folgenden Jahren maßgeblich die sich entwickelnde Arbeiterbewegung. 1883 stirbt er im Exil in London.




 
 
 
D a s   W e r k
 
 
Betrachtung eines Jünglings bei der Wahl eines Berufs (Abituraufsatz 1835)
An principatus Augusti merito inter feliciores
reipublicae Romanae aetates numeretur?
 (Lateinabitur 1835)
De Hemsterhusii moribus (Lateinabitur 1835)
Gedichte (1835/39)
Oulanem. Trauerspiel (Fragment 1837)
Scorpion und Felix. Humoristischer Roman (Fragment 1837)
Brief an den Vater (1837)
Volksliedersammlung (1839)
Über die Differenz der Demokritischen
und Epikureischen Naturphilosophie (Dissertation 1841)
Kritik des Hegelschen Staatsrechts (1843)
Die Judenfrage (1843)
Zur Kritik der Hegelschen Rechtsphilosophie (1843/44)
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1844)
Die Heilige Familie (zusammen mit Engels 1845)
ad Feuerbach [Thesen über Feuerbach] (1845)
Die deutsche Ideologie (zusammen mit Engels 1846)
La misère de la philosophie (1847)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zusammen mit Engels 1848)
Rede vor den Kölner Geschworenen (1849)
Lohnarbeit und Kapital (1849)
Die Klassenkämpfe in Frankreich (1850)
Der achtzehnte Brumaire des Louis Bonaparte (1852)
On British elections and parties (1852)
Über den Kommunistenprozeß zu Köln (1852)
On China and India (1859)
Zu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1859)
The civil war in the United States (1861)
Inauguraladresse der Internationalen Arbeiterassoziation (1864)
Lohn, Preis, Profit (1865)
Das Kapital (1. Band) (1867)
Das Kapital (1. Band) (2. veränderte Auflage 1873) nach der Internet-Ausgabe von Michio Akama
Randglossen zum Programm der deutschen Arbeiterpartei (Kritik des Gothaer Programms) (1875)
Das Kapital (2. Band) (posthum 1885)
Das Kapital (3. Band) (posthum 1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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