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사회임금 확대로 노동운동 전환을..(오건호)

아주 중요한 연구이고 지적으로 보여진다, 단순한 임금인상이 아닌 '사회임금의 확대'를 노동운동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사회임금'이란 "노동자가 기업에서 받는 임금(시장임금)과 대비되는 용어로 실업급여, 보육지원금, 기초노령연금 등 사회적으로 얻는 수혜 ; 아동수당과 같이 현금으로 지급되는 현금급여와 의료서비스와 같이 서비스로 지급되는 서비스급여 ; 사회임금 확대는 노동자내부의 소득격차를 완화하고 노동자 내부의 분할을 극복하는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는 만큼 노동운동이 본격적으로 사회임금을 내걸어야..." (오건호)

 


사회공공연구소 사회임금 최초 추정...7.9% 불과해
안보영 기자 coon@jinbo.net / 2009년04월16일 16시01분

 

한국가계운영비 중 사회임금은 7.9%인 것으로 드러났다. 오건호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이 15일 발표한 이슈페이퍼에 따르면 한국 가계운영비 중 사회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7.9%로 이는 OECD 평균 31.9%의 4분의 1, 북구 복지국가인 스웨덴 48.5%에 비해 6분의 1에 불과한 수준이다. 스웨덴 노동자가 기업에서 얻는 시장임금 만큼을 사회에서 제공받고 있는 반면, 한국 노동자는 가계운영비를 거의 시장임금에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사회임금은 노동자가 기업에서 받는 임금(시장임금)과 대비되는 용어로 실업급여, 보육지원금, 기초노령연금 등 사회적으로 얻는 수혜를 말한다. 지금까지 기업에서 얻는 시장임금과 대비해 사회임금이 개념적으로 사용되긴 했지만, 국제통계자료를 활용하여 사회임금 수준이 추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회임금은 아동수당과 같이 현금으로 지급되는 현금급여와 의료서비스와 같이 서비스로 지급되는 서비스급여, 두 형태로 구분된다. 외국 현금급여의 대표적 예는 아동수당인데 스웨덴, 프랑스 등 유럽의 노동자는 정부로부터 임금의 6~7%에 해당하는 금액을 아동수당으로 받는다. 한국은 하위 70% 이하소득 가구에 영유아 1인당 최고 38만 원까지 보육료가 지원된다. 만약 노동자가 월 20만 원의 보육료를 지원받는다면 이는 시장임금이 20만 원 인상된 것과 동일한 효과를 지닌다. 서비스급여는 현물 방식으로 지원되는데 가장 대표적 예는 의료서비스다. OECD 국가들이 의료서비스에 지출하는 재정은 GDP 약 6%에 달한다. 우리나라에선 건강보험공단이 환자에게 부과된 진료비 중 일부를 지불해 준다. 직접 현금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건강보험 서비스를 통해 동일한 금액을 지원받은 것과 같다. 건강보험의 급여 적용이 확대되어 서민들이 민간의료보험에 10만 원을 내야 받을 수 있는 혜택을 건강보험에 4만 원만 더 내 얻을 수 있다면 가계소득을 6만 원 늘린 것과 같다.

사회임금은 OECD 국가 중 미국과 영국이 상대적으로 낮고 유럽대륙 국가들은 높은 수준을 보인다. 비서구 국가 중에선 유일하게 일본의 사회임금 비중이 30.5%로 OECD 평균에 도달해 있다. 이는 일본이 고령화가 상당부분 진전되어 연금급여가 발달해 있기 때문이다. 서구 노동자들이 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그들의 임금이 많아서가 아니라 상당한 금액의 사회임금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실업, 의료, 주거, 보육 등을 사회임금으로 제공받다보니 경제위기 시 구조조정이 진행돼도 기본적 생활의 영위는 가능하다. 그러나 시장임금만으로 살아야 하는 한국에서 구조조정은 ‘가계파탄’을 의미하고 그만큼 사회적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다.

 

"사회임금을 늘리는 투쟁이 시급"
오건호 연구실장은 그간 한국의 노동운동이 ‘시장임금 인상’에 치우쳤다. 정규직/비정규직 간 시장임금 격차가 현격한 한국에서 사회임금 확대는 노동자내부의 소득격차를 완화하고 노동자 내부의 분할을 극복하는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는 만큼 노동운동이 본격적으로 사회임금을 내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오건호 연구실장은 “OECD 평균만큼 사회임금을 확보하는 중기 목표를 세워 이를 위한 ‘재정요구안’을 마련하고, 올해 정기국회부터 ‘진보재정요구안’을 내걸고 국가재정의 혁신과 사회임금 확대를 위한 운동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사회임금 추정은 가처분소득 대비 현금급여 비중(OECD FACTBOOK, 2009)과 GDP 대비 현금급여 및 서비스급여 지출 비중(OECD의 StatExtracts 수치), 가처분 소득(OECD StatLink 수치), 서비스복지(OECD StatExtracts 수치 재구성)등의 자료를 활용했다.

 

 


 

연간 휴가일 수에서 프랑스가 38일로 세계 1위라는 조사가 있다. 이러한 사실도 위에서 본 '사회임금'이라는 보장장치와 어느정도 상관이 있겠다. 물론 그들 중에는 휴가를 즐길 여유가 없는 사람들도 많고, 그 반대 부류에 대해서는 휴가를 위해 일하는 놈들이라는 나무람도 더러 있는 줄로 안다. 그러나 노동이 단순한 돈벌이 수단에 불과하고(안 그런 분도 많겠지만) 그래서 휴가도 자진 반납하는 분들이, 돈도 돈이지만 노동과 휴가가 삶의 일환으로 스스로의 존재확인과정으로 여기는(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자들을 나무랄 처지는 아닐 듯하다. 지금 우리의 험한 시국에 너무 한가한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프랑스-38일, 이태리-31일, 스페인-30일, 호주-19일, 일본-15일, 미국-13일 순이다 (사회임금 비중이 일등인 스웨덴은 조사대상에서 빠진 듯; 꼴등인 우리는?).

Les Français champions du monde des vacances
Avec 38 jours de congés accordés par an, les Français sont en tête du classement mondial. (15 AVRIL 2009)
Ils arrivent loin devant les Américains qui ne soufflent que 13 jours par an et les Japonais (15 jours). L'enquête -  présentée mercredi 15 avril par Expedia.fr et Harris Interactive- démontre que les touristes français ne sont pas prêts à renoncer à leurs vacances malgré la crise.

Modèle anglo saxon contre douvceur latine. Les Français, Italiens et Espagnols sont donc les plus chanceux avec respectivement 38, 31 et 30 jours de congés par an. Les Américains, Japonais et Australiens ont de quoi les envier car ils ne profitent que de 13, 15 et 19 jours de repos par an.

Le contexte économique incite 20% des personnes interrogées pour ce sondage à renoncer à une partie de leurs congés cette année. 22% des Français renonceront à prendre l'intégralité de leurs vacances alors que les Japonais sont 92% à s'être déclarés en ce sens.

Mais là encore, les Français s'affichent comme la population tenant le plus à ses vacances. Les Français, comme les Allemands, Britanniques et Canadiens, ne sont prêts à renoncer qu'à deux jours de congés cette année. D'ailleurs, deux Français sur trois ont déclaré qu'ils partiraient au moins deux semaines d'affilées cette été.
A l'inverse, les Japonais, qui figurent pourtant parmi les moins bien lotis en termes de vacances, pourraient abandonner sept jours de repos et les Italiens six jours.

Cette étude a été réalisée en ligne par Harris Interactive entre le 5 et le 12 mars 2009 auprès d'échantillons nationaux représentatifs, dont 483 personnes âgées de 16 ans et plus en France.
http://voyages.liberation.fr/actualite/les-francais-champions-du-monde-des-vacances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빈곤과 관심(조순경) - Attention(S.Weil)

조순경: 빈곤의 비가시화, 빈곤소탕작전(도시위생 처리), 남성노숙자의 가시화/빈곤여성의 비가시화, 주의와 관심.

시몬 베이여(S.Weil): Misere(pauverete) invisible, Attention oubliee(perdue).

 

 

빈곤과 관심 / 조순경 강의(여정민 정리)  

 

'고용'이 화두다. 실업급여 수급자는 매월 최대 규모를 갱신하는데 새 일자리는 생길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실직자가 늘어나니 자연스레 '먹고 사는 일'이 고민이다. '빈곤의 확대'가 우려되는, 유례없는 전 세계적 경제 위기다. 그 첫 피해자가 여성과 비정규직 등 사회적 약자임이 확인되고 있다. 정부가 이런 저런 대책들을 내놓지만, '부자 감세' 규모에 비하면 턱없다는 비판이 곳곳에서 쏟아진다. 복지 등 사회 안전망 확충에 대한 요구가 빗발치지만, 정부는 일단 기업을 살려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대체 이 위기를 우리는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조순경 이화여대 교수는 14일 "빈곤이 우리의 시야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며 "빈곤 극복을 위한 일차적인 과제는 빈곤하고 차별받는 현실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자리를 잃고 "우리에게도 착취당할 기회를 달라"고 호소하는 이들의 참혹한 현실이 사람들의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조 교수는 이날 이화여자대학교 국제교육관 LG컨벤션홀에서 '지구화 시대 빈곤과 여성 노동'이라는 주제로 열린 제1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국제학술회의에서 "빈곤은 친밀한 관계의 결핍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며 이 같이 주장했다. 조순경 교수의 이 같은 문제 제기는 그간 이뤄졌던 빈곤 연구와 전혀 다른 차원의 접근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

조 교수는 1980년대 중반,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공장에서 해고당한 노동자가 한 이 이야기로 실업의 공포를 명료하게 설명했다. 조 교수는 "일본 등 외국에서 수입된 자동차로 미국의 자동차 산업이 경쟁력을 잃으면서 자동차 산업의 메카인 디트로이트 거리는 실업자로 넘쳐났고 이들에게 일자리를 갖는다는 것은 임금 수준과 근로 조건을 떠나서 특혜로 보이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금융의 세계화는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 불안정성을 심화시켜 왔다." 특히 "그 불확실성은 일차적으로 저임금 근로자와 저소득층에 피해의 부담이 전가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국가가 전혀 이들을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 교수는 "그동안 연구자들이 가졌던 환상 가운데 하나는 국가 혹은 시장이 노동여성 빈곤의 문제를 일정 정도 해결해 줄 것이라는 사실"이라고 단언했다. "어쩌면 우리는 국가에 대해 지나치게 과도한 기대를 해 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난 20년간의 경험을 통해 볼 때 국가와 시장은 일하는 여성들의 빈곤을 해결하는 주체가 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거는 국가가 주도하는 빈곤의 비가시화다. 북경 올림픽을 치르기 위해 중국 정부가 치른 대대적인 빈민 소탕 작전은 단적인 예다. 조 교수는 "이런 방식으로 도시들이 '위생 처리'되면서 시민들의 시야에서 빈곤한 현실은 멀어져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정은 우리도 다르지 않다. 조 교수는 이화여대 정문 앞의 '달동네'가 고층 아파트로 재개발되면서 매일 등하교 길에서 마주치던 "빈곤의 현실은 학생과 교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토로했다. 그 가운데서도 이미 10년 전 외환 위기 때, "'자발성'으로 포장된 강요에 의해 대규모로 퇴출당했던" 여성은 최근에도 1차 피해자가 되고 있지만, 그들의 빈곤은 "더 더욱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거주할 곳이 없는 남성은 거리의 노숙자로 가시적으로 드러나 보인다. 여성에게 노숙은 성폭력 위험에 노출되는 것과 같기에 머물 곳 없는 여성들이 가게 되는 곳은 숙식을 '보장'해 준다는 티켓다방, 성매매 업소다."

지난 2월 통계청 조사 결과 1년 전에 비해 여성 취업자는 13만9000명이 줄었다. 같은 기간 남성 취업자는 2000명 줄어 남녀 취업자 감소폭의 차이는 무려 70배나 된다. 그러나 그들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조차 없다."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줄 노동조합도 대외적 힘의 여부와 별도로, 여성 조직율 자체가 하락하고 있다. 여성 노동자의 노조 조직율은 지난 1997년 19.5%에서 2005년 5.1%로 늘기는커녕 오히려 14.4%포인트나 감소했다.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유다. 여기에는 언론 등 미디어도 한 몫 하고 있다. 조 교수는 "전 세계적으로 주요 미디어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존재와 이미지가 사라져 가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며 "빈곤한 이미지의 제거는 마치 지구상에서 빈곤이 사라져 가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고 말했다. "빈곤이 일상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특별한 사건이 없는 한 보도 가치가 있는 뉴스 거리가 되지 않는다. 사회에서 배제되고 소외된 집단이 그들의 소리를 들리게 하기 위한 방법은 평상시와 다른, '특별한 행동'을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죽음을 각오한 단식, 삭발, 쇠사슬로 온 몸을 감기 등등의 퍼포먼스는 그들의 소리를 사회에 알리기 위한 수단이다."

 
"빈곤은 친밀한 관계의 결핍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는 조 교수의 지적은 통계나 과학, 논리를 통해서 빈곤 문제를 해석하는 기존의 연구와는 또 다른 발상의 전환이다. 조 교수는 "관심과 보살핌이 있는 관계에서 빈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즉, 공동체의 해체가 빈곤을 확대시키는 또 한 축이라는 얘기다. "전체 인구의 5분의 1이 빈곤하다는 것은 5분의 4는 빈곤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빈곤하지 않은 사람들이 빈곤한 사람들의 삶에 지속적 관심을 가지고 공동체적 의식으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빈곤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효용과 효율의 가치가 지배해" 이미 원자화, 개별화된 사회에서도 특히 실업과 고용불안은 더 넓은 관계의 결핍을 초래한다. "일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나의 삶에 타인이 부재하다는 의미"이며 "고용의 임시성은 노동현장에서의 사회적 관계의 형성 및 노동공동체 형성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노출되지 않은 소위 '미개 사회'에서는 한 사회 공동체가 통째로 빈곤한 상황에 빠지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의 개인들은 굶어죽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가 "관계의 부재가 빈곤을 야기하는 하나의 원인이라면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은 공동체적 관계의 부활, 나눔과 돌아봄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그리고 그는 "나눔을 '선한 마음'으로 가능한 도덕적 행위나 개인 차원의 구도행위"로 생각하는 것을 벗어나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나눔의 의미가 무엇인지,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무엇인지, 활성화시킬 제도적 장치는 무엇인지, 정규직은 왜 비정규직의 삶에 무심한지, 빈곤 해결과 차별 해소의 방법으로서의 관계 형성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등은 연구가 필요한 과제다." 물론 조 교수의 이 같은 고민이 당장 눈앞에 닥친 경제 위기의 해법은 될 수 없다. 정부는 오직 '가진 사람'의 세금을 깎아주는 데만 혈안이 돼 있고 관계조차 결핍된 이들을 위한 현실적 생존 방안에는 큰 관심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나눔'이라는 화두는 '꿈같은' 얘기로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우선 학계를 향해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고 요구하는 조 교수의 질문은, 어쩌면 점점 더 각박해지는 사회를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지구상의 빈곤은 지식의 부재로 인한 것이 아니다. 직접 겪을 때까지 아무리 알려주고 말해도 못 알아듣는 인간 인식 능력의 한계가 하나의 원인이라면, 다른 하나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인간의 복잡한 욕망 구조, 그리고 다양한 이해관계에 의해 움직이는 정치 때문일 것이다. 교육자로서, 그리고 연구자로서 대학에 있는 나 자신의 이해와 관심, 내가 있는 자리,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거리두기를 하고 냉정하게 돌아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정민 기자, "사라지는 목소리…'착취 당할 기회를 달라'": 조순경 교수 "국가가 빈곤 해결? 그건 환상이다", 프레시안 기사입력 2009-04-14 오후 6:53:07)


 

An Interview with Simone Weil trailer

 

 

ATTENTION / Simone Weil (Paris, le 3 février 1909 - Ashford, le 24 août 1943)

 

L’attention est un concept clé de l’anthropologie philosophique de Simone Weil, depuis les premiers écrits philosophiques (à partir de 1925) jusqu’aux grands textes des années 1942 et 1943. Dans son « autobiographie spirituelle », elle écrit au père Perrin : « À quatorze ans je suis tombée dans un de ces désespoirs sans fond de l'adolescence, et j'ai sérieusement pensé à mourir, à cause de la médiocrité de mes facultés naturelles. (…) Je ne regrettais pas les succès extérieurs, mais de ne pouvoir espérer aucun accès à ce royaume transcendant où les hommes authentiquement grands sont seuls à entrer et où habite la vérité. J'aimais mieux mourir que de vivre sans elle. Après des mois de ténèbres intérieures j'ai eu soudain et pour toujours la certitude que n'importe quel être humain, même si ses facultés naturelles sont presque nulles, pénètre dans ce royaume de la vérité réservée au génie, si seulement il désire la vérité et fait perpétuellement un effort d'attention pour l'atteindre. (…) Plus tard, quand les maux de tête ont fait peser sur le peu de facultés que je possède une paralysie que très vite j'ai supposée probablement définitive, cette même certitude m'a fait persévérer pendant dix ans dans des efforts d'attention que ne soutenait presque aucun espoir de résultats » « Attente de Dieu, pp. 38-39 ; Œuvres, pp. 768-769 ».

La philosophie de Simone Weil n’est pas d’abord une philosophie de la condition humaine (des conditions d’existence), ni une philosophie du travail, ni une critique des idéologies, ni une philosophie de l’histoire, ni une métaphysique du don, ni une doctrine politique et sociale (bien qu’elle soit tout cela), c’est d’abord une interpellation. Un appel adressé à tout homme, quels que soient ses aptitudes intellectuelles, « n'importe quel être humain, dit Simone Weil, même si ces facultés naturelles sont presque nulles ». En cela, elle est restée cartésienne. La philosophie de Simone Weil est fondamentalement une éthique – non pas une loi, car le bien véritable est au-delà de l’opposition entre le bien et le mal, mais un travail de transformation, ou de conversion de soi, qui suppose un effort d’attention.

 

Qu’est-ce que l’attention ? L’attention est un effort, mais n’est pas un effort de la volonté, encore moins une espèce d’effort musculaire, car il n’y a pas d’attention véritable qui ne soit portée par le désir et l’amour. « L'attention est un effort, le plus grand des efforts peut-être, mais c'est un effort négatif » [14]. Il ne s’agit pas de faire quelque chose, mais bien plutôt de se retenir de faire, de renoncer à exercer une emprise, de laisser être autre chose que soi, et c’est pourquoi faire attention est si difficile : « L'attention consiste à suspendre sa pensée, à la laisser disponible, vide et pénétrable à l'objet (…). La pensée doit être vide, en attente, ne rien chercher, mais être prête à recevoir dans sa vérité nue l'objet qui va y pénétrer » [15].

L’attention véritable suppose que je renonce à moi et à « mes » pensées. Renonçant à moi, à mes pensées, à ma perspective, j’accède à la vérité. Car, c’est lorsque « moi » je ne suis pas là que la vérité se manifeste. Lorsque « moi », je laisse des traces, c’est qu’il y a erreur. Prenons un exemple. Dans une opération aussi simple que « 7 + 8 = 15 » : si je pense « 7 + 8 = 16 », c’est moi qui me trompe, il y a trace de ma personne dans l’opération. Mais lorsque je pense « 7 + 8 = 15 », il n’y a pas trace de ma personne, ce n’est pas « moi » qui fais que « 7 + 8 = 15 ». Ainsi, la personne s’efface pour autant que l’intelligence s’exerce. Penser consiste à établir des relations, mettre des termes en rapport, s’extraire de tout ce qui singularise un individu et que Simone Weil nomme « la personne ». L’exercice de l’intelligence est éminemment impersonnel. La vérité et la perfection sont impersonnelles. Penser signifie accéder à l’universel. La vérité n’est pas faite par la pensée ; au contraire, c’est l’âme, lorsqu’elle renonce à la perspective qui est la sienne, c’est-à-dire à ses intérêts, qui s’ouvre à la vérité et au réel : « Tant que l'homme tolère d'avoir l'âme emplie de ses propres pensées, de ses pensées personnelles, il est entièrement soumis jusqu'au plus intime de ses pensées à la contrainte des besoins et au jeu mécanique de la force. S'il croit qu'il en est autrement, il est dans l'erreur. Mais tout change quand, par la vertu d'une véritable attention, il vide son âme pour y laisser pénétrer les pensées de la sagesse éternelle » [16].

[14]↑ Attente de Dieu, p. 92 [관심이란 어떤 노력이고 어쩌면 가장 크다란 노력이다, 그러나 부정적 노력이다.]
[15]↑ Attente de Dieu, pp. 92-93 [관심이란 자기 생각을 중지시키는 것에서 이뤄진다. 즉, 생각이 대상에 대하여 텅빈 상태로 파고들도록 스스로의 처분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은 비워져야 하고 기다리지만 아무것도 찾지 않는, 그러나 스스로가 파악한 사물을 가식없는 진리 속에서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16]↑ L'Enracinement, p. 366 ; Œuvres, p. 1211

 

La vie de l’esprit consiste à faire attention. Et cela à tous les niveaux. Résoudre une équation mathématique ou traduire un vers grec suppose de faire attention. Aimer signifie renoncer à soi et faire attention à autre chose que soi. Cela vaut inséparablement pour l’amour de Dieu et pour l’amour du prochain. Qu’est-ce que prier, sinon faire attention à celui qui se donne, qu’est-ce qu’aimer, sinon faire attention : « Ce n'est pas seulement l'amour de Dieu qui a pour substance l'attention. L'amour du prochain, dont nous savons que c'est le même amour, est fait de la même substance. Les malheureux n'ont pas besoin d'autre chose en ce monde que d'hommes capables de faire attention à eux. La capacité de faire attention à un malheureux est chose très rare, très difficile (…). Presque tous ceux qui croient avoir cette capacité ne l'ont pas. La chaleur, l'élan du cœur, la pitié n'y suffisent pas. La plénitude de l'amour du prochain, c'est (…) savoir que le malheureux existe, non pas comme unité dans une collection, non pas comme un exemplaire de la catégorie sociale étiquetée ‘malheureux’, mais en tant qu'homme, exactement semblable à nous, qui a été un jour frappé et marqué d'une marque inimitable par le malheur. Pour cela il est suffisant, mais indispensable, de savoir poser sur lui un certain regard » [17].

 

L’attention est une disponibilité, une orientation de la pensée qui écarte toutes les pensées particulières (personnelles), qui fait le vide et attend. Car le bien réel ne peut venir que du dehors. Nous ne pouvons pas fabriquer quelque chose qui soit meilleur que nous. Ainsi, l’effort tendu véritablement vers le bien ne doit jamais aboutir et se termine en désespoir. C’est alors, lorsque nous n’attendons plus rien de notre attente que, du dehors, don gratuit, merveilleuse surprise, vient le don. La vérité n’est pas essentiellement l’objet d’un discours, mais d’une expérience qui suppose une transformation à la racine même de notre sensibilité : « Nous sommes dans l’irréalité, dans le rêve. Renoncer à notre situation centrale imaginaire, y renoncer non seulement par l’intelligence, mais aussi dans la partie imaginative de l’âme, c’est s’éveiller au réel, à l’éternel, voir la vraie lumière, entendre le vrai silence » [18a].

 

Il faut « se vider de sa fausse divinité, se nier soi-même, renoncer à être en imagination le centre du monde, discerner tous les points du monde comme étant des centres au même titre et le véritable centre comme étant hors du monde »[18b]. C’est à un décentrement de soi qu’appelle Simone Weil. Renoncer à soi-même, renoncer à toutes nos idoles, que ce soit notre « moi » ou notre prestige social, pour consentir au réel et désirer un bien qui n’est pas de ce monde. Cette manière de vivre, Simone Weil n’a cessé de l’indiquer par sa vie et son œuvre, de multiples façons et en s’y reprenant à chaque fois. Peu avant de mourir, elle confie à Maurice Schumann : « En mettant à part ce qu’il peut m’être accordé de faire pour le bien d’autres êtres humains, pour moi personnellement la vie n’a pas d’autre sens, et n’a jamais eu au fond d’autre sens, que l’attente de la vérité »[19].

[17] ↑ Attente de Dieu, pp. 96-97
[18] ↑ a  b  Attente de Dieu, p. 148 [a. 우리는 비실재 속에, 꿈 속에 있다. 우리가 상상적 자기중심성을 포기한다는 것, 단순히 지적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영혼의 창발적 부분까지도 포기한다는 것, 그것은 실재에, 영원에, 아니 차라리 참된 여명에 눈뜨는 것이고 참된 침묵(무언의 진리)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b.(나의 생각이) 스스로의 거짓 신성성을 버리고, 스스로를 부정하고,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상상을 포기하고, 세상의 모든 것이 똑같은 자격으로 중심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세상의 바깥에 있는 것과 같은 진짜 중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19] ↑ Ecrits de Londres, p. 213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무엇을 하는 것이 내게 합당할 지에 대해서 잠시 접어둔다면, 개인적으로 내게 있어서 삶이란 '진리에 대한 기대' 외의 다른 의미를, 아니 심연에서는 그 어떤 다른 의미도 갖지 않는다.]

 

Dernière modification de cette page le 29 mars 2009 à 15:53.
Wikipedia® http://fr.wikipedia.org/wiki/Simone_Weil#cite_ref-15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런던-G20] 출구없는 자본주의-세상을 바꾸자!

À la une dans l'Humanité >>>>>>>>>> ---- >>>>>>>>>>>>>>>>>PDF

 

 "출구없는 자본주의" >>--- >> "세상을 바꾸자"
어제 오후에 런던 G20 모임에 항의하는 시위(규모는 경찰 집계로 3000~4000 명 선)가 있었고 그 와중에 한 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이다. 정확한 사인은 아직 안 밝혀졌다는데, 사건은 영국은행 근처에서 일어났고 다친 사람도 여럿이라고 함. 아래 비디오에는 잘 안보이지만 어제 텔레비젼에 나오는 뉴스 장면을 보니 경찰놈들이 물불 안 가리고 마구 방망이를 휘둘던데, 자본주의 수호자들에 의한 무고한 시민의 타살이 아닌가 싶다.

La City prise d'assaut

Un mort lors d'une manifestation anticapitaliste à Londres
Le Monde 02.04.09 | 00h20
LONDRES (Reuters) - Un manifestant est mort au cours d'une manifestation anticapitaliste mercredi à Londres, à la veille du sommet du G20 qui regroupe les dirigeants des grandes puissances de la planète, a rapporté la police britannique.
Dans la soirée, la police britannique anti-émeute avait chargé plusieurs centaines de manifestants qui s'étaient massés devant la Banque d'Angleterre, au terme d'un après-midi d'échauffourées dans la City de Londres, à la veille de l'ouverture officielle du G20, dont les dirigeants ont pris part mercredi à un dîner.
 
Version française Eric Faye 
Manifestation contre le G20: mort d'un manifestant
Le Monde 02.04.09 | 00h09
Un manifestant qui prenait part au rassemblement de milliers de personnes contre le G20 mercredi à Londres est mort, ont annoncé les services hospitaliers londoniens.
Les circonstances de la mort n'étaient pas élucidées. Plusieurs personnes avaient été blessées lorsque des manifestants contenus par un cordon de police s'étaient massés contre des barrières de sécurité, près de la Banque d'Angleterre.
A Londres, échauffourées entre la police et les manifestants au G20, le 1er avril.
Liberation Monde 01/04/2009 à 15h31 (mise à jour à 17h47)
G20: ça chauffe à Londres
Vitres cassées, brèves échauffourées avec la police: la tension est montée d'un cran mercredi après-midi, quelques heures avant le sommet du G20.
A Londres, échauffourées entre la police et les manifestants au G20, le 1er avril. (Reuters)
Plusieurs milliers de manifestants protestant contre le sommet du G20 à Londres se sont rassemblés mercredi dans la City, le quartier des affaires de la capitale où des vitres de la banque RBS ont été brisées.
Selon la police, 3.000 à 4.000 personnes ont manifesté dans la City pour faire pression sur les dirigeants du G20.
Après des débuts calmes, des échauffourées parfois violentes ont opposé des manifestants à la police. «Un certain nombre d'objets ont été lancés sur des policiers», a confirmé Scotland Yard dans un communiqué.
Une vingtaine d'interpellations
Quelques protestataires encagoulés ont brisé des vitres de la banque Royal Bank of Scotland (RBS), symbole de la crise financière aux yeux des manifestants. Certains ont réussi à pénétrer dans la banque avant d'être refoulés par les manifestants.
Autrefois un des établissements les plus prestigieux de la City, la banque RBS est détenue majoritairement par l'Etat britannique depuis l'automne, après avoir reçu une vingtaine de milliards de livres d'aides publiques. Son ex-patron, Fred Goodwin, est au coeur d'un scandale depuis la révélation qu'il s'est vu octroyer une retraite dorée de 700.000 livres par an, à l'occasion de son départ en octobre.
Vers 15 heures, 19 personnes avaient été arrêtées, selon la police, un chiffre s'ajoutant aux quatre arrestations effectuées la veille.
Une autre manifestation à l'appel de l'organisation Stop The War s'est réunie dans le calme devant l'ambassade des Etats-Unis, plus à l'ouest de la capitale, avant de rejoindre Trafalgar Square, où devait se tenir un sommet alternatif au G20, en présence notamment de l'ancien maire travailliste de Londres, Ken Livingstone.
Plus de 10.000 policiers ont été mobilisés mercredi et jeudi pour faire face aux nombreuses manifestations prévues en marge du sommet, et pour assurer la sécurité des nombreuses délégations officielles.
(Source AFP)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개인주의 & 자유주의 (김지석 서평)

기독교-개인주의-자유주의 / 과학-성장-낙관주의

 

"(...) 서구문명의 핵심은 무엇이며 그것은 얼마나 큰 잠재력을 갖는가 (...). 다른 문명과 구별되는 서구의 정체성은 기독교, 낙관주의, 과학, 성장, 자유주의, 개인주의 등 독특한 여섯 가지 사상의 공동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고 <서구의 자멸>(아래 참조)은 말한다. 이 가운데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가장 중요하다. 모든 개인에게 개성과 깊은 내면, 확고한 자아가 있다는 생각은 서구 정체성을 이루는 기본 요소다. 개인주의의 상승은 기독교에서부터 르네상스, 종교개혁, 현대 경제·사회의 성장에 이르기까지 서구 역사를 관통하는 모티프다. 기독교는 개인의 헌신을 요구하고 개인 책임을 물은 첫 종교라고 한다. 기독교가 보편화시킨 영혼이라는 개념은 세속화해 자아 개념이 됐으며, 이는 노력·자기개발·자기책임 등 개인주의 핵심 요소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개인주의를 사회적 차원에서 실현하는 유력한 방법이 민주주의에 기초한 자유주의다. 이런 사회는 종교의 자유, 양심, 관용, 협동력,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려는 시민들의 의지 등을 특징으로 갖는다. 자유주의가 그냥 생겨난 건 아니다. 어느 정도 교육 수준과 독창력, 독립심을 갖춘 자유롭고 자치적인 시민은 자유주의 사회의 결과물이라기보다 전제조건이다. 또한 자유주의는 그에 걸맞은 경제·정치 체제를 요구한다. 과학·성장·낙관주의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찬란한 승리다. 처음에는 성장이 과학을 이끌어내는 데 도움을 줬으나 지난 3세기 동안은 과학이 성장의 주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18~19세기에는 서구의 과학적 주도권이 경제 주도권으로 이어졌고, 경제성장은 낙관주의자들의 힘을 키웠다. 계몽사상가들은 개인의 자율성과 진보를 옹호하면서 낙관주의를 뒷받침했다.

 

하지만 개인주의·자유주의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개인화한 사회는 공동체를 약화시키고 개인의 중압감을 증가시킨다. 한편으로는 사회의 분열, 사회자본과 공동체의식의 붕괴가 나타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의 책임과 근심이 엄청나게 높아진다. 서구의 자유주의도 도덕적 기반으로부터 분리, 공동체에 대한 헌신 약화, 열정 부족 등의 문제에 부닥치고 있다. 서구 문명이 앞날은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고 개인주의·자유주의의 활력을 되살릴 수 있을지에 달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국가·종교 권력의 억압에 맞서는 해방의 이념으로 출발한 개인주의와 민주적 자유주의는 자신감과 신뢰, 평등과 솔선, 책임감을 기반으로 아래에서부터 솟아나는 문명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서구의 위기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이런 장점이 침식되고 보수적 성격이 강해졌음을 뜻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아직 개인주의·자유주의의 진보적 성격(*)을 충분히 맛보지 못한 상태다. 문명 패권의 향방을 가름할 중요한 열쇠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김지석 논설위원, "보수화한 자유주의의 운명은"[일종의 서평], 기사등록 : 2009-03-20 오후 07:25:45 ⓒ 한겨레)

 

(*독자註) "개인주의·자유주의"를 아직 우리가 제대로 체험하지 못한 것은 맞지만, 그것이 어떻게 바로 "진보적 성격"이 되는지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아마도 우리가 못 가진 서구적인 것은 다 '진보적'일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적 발상이 낳은 실언이 아닐런지... 물론 여기서 또 '진보'의 개념에 대한 왈가왈부가 필요한 시점인데, 거듭 말하지만 진보란 '진보=좌파이념'이지 '전진하는(개혁) 우파'의 그것까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좌파가 '개인'과 '자유'를 말살하고자 하는 이념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는 우파-자본주의에 충실히 복무해 온 가면 쓴(거짓으로-빈말로 위장한) '주의'일 뿐이고, 진짜 "개인주의·자유주의"는 좌파와 통하는 것이라는 이해에 기초한다면, 상기 발언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겠다. 부연하자면, 원래가 "개인주의·자유주의"는 인간의 가치와 존엄을 중세적 종교와 지배의 틀로 족쇄 채운 기존의 시스템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해방을 낳은 개인과 자유에 대한 존중의 이념이 다시 인간을 자본주의의 틀에 묶어버리는 과업에 복무했으니, 여기서 개인과 자유에 대한 왜곡이 있었다는 말이다. 고로, 다시 '해방'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 개인과 자유에 대한 재 점검이 필요하다는 것.

 

서구의 자멸 | 원제 Suicide Of The West 
리처드 코치, 크리스 스미스 (지은이), 채은진 (옮긴이), 말글빛냄, 2009-01-02, 양장본 317쪽, 15000원
Richard Koch &, Suicide of the West (Paperback), Continuum Intl Pub Group, 2007-ix.

 

여섯 가지 키워드 [출판사 책소개 -약간 우습지만-]

 

1. 크리스트교 : 서구의 성공과 부절제, 실패에 있어서 크리스트교만큼 중요한 요인도 없다. 크리스트교는 고대 세계를 세우고 천상과 지상의 관계를 변화시켰으며 현재까지 서구인의 생활양식과 인격을 정의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크리스트교는 세계 최초의 개인화되고 행동주의적인 자기수양 운동이었다. 모든 서구인들이 크리스트교도나 불가지론자, 무신론자 심지어 다른 종교 신자들도 비서구인들과 다르게 세상을 보고 행동하는 주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또한 이는 서구가 지구상의 다른 40∼50개 문명보다 성공한 이유이기도 하다. 크리스트교는 몇 가지 행동효과를 남겼다. 1)개인의 책임, 2)그리스도의 힘을 통한 변화, 3)약자에 대한 원조, 4)저주받은 이들의 구원 또한 변화와 개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근세기 들어 “신은 죽었다”는 사상이 출현했으며 크리스트교 내의 분열은 오늘날 서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분열의 축도라고 볼 수 있다. 초기 크리스트교의 자유로운 정신, 내적 자아라는 개념의 도입, 개별화와 권력에 대한 거부와 개인 관계에서의 사랑을 강조하는 태도, 학대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과 평등 요구, 자기수양과 자기개선 장려 등은 서구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 서구를 분열시키고 나아가 세계를 분열시켰다. 그리하여 내부에 더욱 강하게 존재하는 위협으로 남아 있다.

 

2,3,4: 낙관주의, 과학, 성장 [생략]

 

5. 자유주의 : 모든 서구사회는 자유주의 원칙과 제도에 따라 구성되어 있다. 비서구사회에서는 이런 경우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서구사회가 자유주의적인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며, 자유주의는 서구의 고유 역사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자유주의 사회는 민주적일 뿐만 아니라 자유정신과 공평함, 모든 시민에 대한 존중이 있는 사회다. 자유주의 문명은 다른 문명에 비해 인간 생명의 신성과 존엄, 모든 구성원의 교육, 기회의 균등, 개인의 자유, 과학과 예술 장려, 모든 인류동포의 본질적 평등을 훨씬 더 중요시한다. 이처럼 서구 자유주의 문명은 다른 문명에 비해 훨씬 큰 이익을 시민들에게 제공해준다. 20세기에 서구 자유주의는 서로 경쟁하는 세 가지 이데올로기(민족주의, 파시즘, 공산주의)의 도전으로 거의 사멸할 뻔했다. 현재 자유주의에 대한 외부의 위협들 -이슬람 혁명주의와 수많은 형태의 테러리즘- 은 서구에서 대중적인 호소력을 거의 지니고 있지 못하며 군사적으로도 약하다. 그러나 자유주의 문명은 그 성공과 외부의 적의 약세에도 불구하고 무시무시한 위협을 받고 있다. 가장 심각한 위험들은 모두 자유주의 문명이 자초한 것이다. 20세기 자유주의 어젠다가 서구 시민들의 안전과 복지, 자유를 놀랍도록 효과적으로 증가시켜주었지만 현재 자유주의는 과거에 비해 훨씬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지속적인 실천과 개선이 필요한 것이다.

 

6. 개인주의 : 서구의 중심적 특징은 개인주의다. 개인주의는 크리스트교에서부터 르네상스, 종교개혁, 현대경제 및 현대사회의 성장에 이르기까지 서구 역사를 관통하는 모티프다. 서구의 개인주의와 비슷한 뿌리는 다른 어떤 문명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개인화된 사회의 문제는, 공동체를 약화시키고 개인의 중압감을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전통적이고 중앙집권화된 사회는 제도와 권력 관계, 뚜렷한 역할,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 정체성을 통해 움직인다. 개인화된 사회는 전혀 다르다. 사회가 개인화되고 우리가 가족, 친구, 이웃, 클럽, 교회, 조합, 공동체집단 등과 단절될수록 ‘사회 자본’이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보여준다. 정신적 건강과 경제적 성공의 중요한 요소인 신뢰는 우리가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 되어갈수록 붕괴된다. 개인화된 사회는 자유를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예전에는 지시되거나 자동으로 결정되던 어려운 선택을 우리에게 요구하기도 한다. 개인주의는 서구의 성공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였고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그렇다. 개인주의는 서구의 도덕적 가치관과 낙관주의, 과학, 정치적 안정, 경제적 성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주의의 위험요소들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 계급사회에서 개인화된 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개개인은 개인적인 상호관계와 지역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계급사회의 종말이 개인적 성공에 대한 피해의식과 냉소주의로 귀결된다면 서구는 더 이상 서구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세계의 미국화 :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미국의 활발한 국제적 지휘와 개입이 더 필요한가? 전 세계의 맥도널드화가 더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때때로 세계의 미국화는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만한 방식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보스니아 사람들을 집단학살로부터 구하기 위해 개입한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세계의 미국화는 인도주의적인 중재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세계은행, GATT, IMF 등 미국이 주도하는 수십 개의 국제기구들이 그리는 것은 대체로 미국의 양식을 따르는 경제적·정치적·인도주의적 세계 질서다. 미국은 세계의 미국화를 위한 기반과 힘을 가지고 있다. 세계의 완전한 미국화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미국의 경제적·문화적 영향력이 계속해서 널리 퍼져나간다고 생각해보라. 필연적으로 강자에게 유리한 자유무역이 전 세계에 보편화된다고 생각해보라. 군사적·과학적·경제적 주도권을 바탕으로 미국은 새롭고 영속적인 문명을 이루게 될 것이다. 미국은 제국주의 로마만큼이나 무자비하게 세계의 대부분 혹은 전체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자멸은 불가피한가? : 지난 2세기 사이 서구문명은 다른 어떤 문명도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었다. 바로 풍요로운 사회와 문화다. 생활수준이 향상되어 모든 세대가 그 부모 세대보다 풍요로운 생활수준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중요한 자유의 풍요도 이루게 되었다. 서구문명은 많은 것을 소망했고 많은 것을 이룩했다. 그러나 서구문명은 막대한 성공을 가져다준 사상을 이제 단념해버린 것일까? 서구문명은 스스로 만든 한계에 부딪혀 실패하고 말 것인가? 서구문명은 훨씬 덜 매력적인 문명으로 변하기 시작하여 머지않아 훨씬 덜 성공적인 문명이 되고 말 것인가? 서구문명은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걸어가기가 좀 더 쉬운 한쪽 길을 따라 내려가면 냉소주의와 지독한 이기주의, 무관심, 권력의 재집중, 공격성 등이 놓여 있다. 이 길은 무정부주의에서부터 신파시즘, 환경 파괴, 새로운 미제국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이러한 형태들은 모두 서구문명을 종말로 인도할 것이다. 다른 한쪽 길을 따라 내려가면 용기의 회복, 서구인들 스스로와 서구 문화에 대한 확신, 미국 내와 유럽 내, 유럽과 미국 간, 다른 유럽인 정착지들과의 감정적 단결, 책임감 있는 수많은 개인들이 권력이나 맹목적인 전통 신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인의 노력, 낙관주의, 이성, 연민, 평등, 개인주의, 상호 동일성 등 스스로 발견하고 스스로 인정한 속성들을 통해 한데 뭉친 사회와 문명이 기다리고 있다. 이 길을 걷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 여행을 위해서는 혁신적인 방향의 전환이 필요하다. 서구의 숙명은 모든 서구인들의 소망과 잠재력과 도덕성을 발휘함으로써, 그리고 인류를 매혹시킬 만한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인도적이고 자유롭고 풍요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것이다.

 


리처드 코치 (Richard Koch) - 기업가이자 투자가, 경영컨설턴트. 컨설팅, 개인업묵관리, 호텔에서 레스토랑과 주류사업, 변화관리 교육과 같은 다양한 분야의 사업을 하고 있다. 베인&컴퍼니(Bain&Company)의 창립 멤버이자 파트너였으며, 엘이케이컨설팅(LEK Consulting)을 공동 창립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oston Consulting Group)의 컨설턴트로도 활동했다.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 등이 있으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80/20 법칙>의 저자다. 최근에는 영국의 전 문화부장관 크리스 스미스와 <서구의 자살(Suicide of the West)>을 공저했다. 필로팩스, 벨고, 플리머스 진, 캡스톤 등을 운영하며 기업가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현재 룩셈부르크와 영국의 상장 벤처 캐피탈 회사 등을 포함한 몇 개 기업의 사외 이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강의와 방송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크리스 스미스 - 최근까지 영국 하원의원이었고 문화언론체육부 장관을 지냈다. 그는 케임브리지대학교 펨브로크 칼리지의 명예연구원으로, 여러 개의 주요 미술 단체를 이끌고 있다.
채은진 - 서울여자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다 빈치의 유산> <권력과 광기> <천재 파티시에, 프랑스 요리의 왕; 앙토넹 카렘 평전> <아인슈타인, 신이 선택한 인간> <누가 달을 만들었는가> <인류의 조상을 찾아서>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 등이 있다. 또한 <여성에게 물어라> <변호사처럼 설득하라> <그레이 매터스> <먹히는 말> 등을 공동 번역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노동자, 소외를 넘어 소비의 주체로? (박노자)

아래에 옮기는 글에서 박노자는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사람들(노동자)이 갖는 '소비 욕망'을 야구에서부터 섹스투어까지 어디서나 찾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 상품의 생산자로서의 노동자가 --맑스의 말처럼-- 자기가 만든 상품에서 소외되고 소비의 주체에서 멀어지는 것이 이제는(21세기에는) 아니라, 더 많은 외적 대상을 소비 품목(상품)으로 삼음으로써 --심지어는 스스로도 계급시스템의 상위그룹에 소비대상으로 노출하면서 동시에 하위그룹을 상품으로 소비하는--, 자본주의가 기획하고 조장하는 "분리통치"와 '소비-욕망-시스템'에 깊숙히 빠져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본주의의 창궐에 충실히 복무한다는 것. 그러므로 "자본이 없을 때에 앎이란 얼마나 맛이 있게 되는지", 즉 인간의 이런 욕망 시스템에 부응할 새로운 세상은 무엇일지, 이런 것을 "자본주의 '이후'"의 그림으로 한번 고민해 보자는 것인 듯하다. 물론 각자가 저열한 본능적 욕망을 제어하여 엄숙한 성인군자가 되자는 도덕적 훈계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호-분리-지배-시스템'에 사람들이 익숙해지거나 그것을 즐기는 경향성을 갖게 된 원인은, 물론 자본주의 시스템에 의해 그런 경향성이 더 노골화 되고 강화되도록 함으로써 자기(자본주의) 시스템의 작동을 원활하게 하려는 자동적이고 구조적인 동력에 있는 건 사실이겠지만, 어쩌면 사람들의 이런 경향성 자체가 본연적으로 자본주의에 더 잘 조화되고 그래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이끈 때문은 아닌지 하는 의심도 든다. 만약에 이런 의심이 조금이라도 사실이라면 인위적으로 꾸미고 제시될 '자본주의 이후' 시스템의 모습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사람들에게 먹혀들지(잘 적용될지) 약간은 의문이다. 여기서 인류학적 인간 개조론이나 교육론이 나오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이 인간을 개조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 신의 몫이다.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면, 다만 그 본능적 욕망에 충실한 인간을 가둘 다른 류의 감옥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예컨데, 도덕 말고, 나를 나의 존재론적 가치로부터 소외시키는 족쇄로서의 감옥이 아니라, 나의 욕망을 '무사히'(타인과의 충돌없이) 실현시키기 위한 인위적 틀로서의 감옥 같은 것...

 

 

[펌] 박노자, 한일야구부터 섹스투어까지

 

"What constitutes the alienation of labour? Firstly, the fact that labour is external to the worker – i.e., does not belong to his essential being; that he, therefore, does not confirm himself in his work, but denies himself, feels miserable and not happy, does not develop free mental and physical energy, but mortifies his flesh and ruins his mind. Hence, the worker feels himself only when he is not working; when he is working, he does not feel himself. He is at home when he is not working, and not at home when he is working. His labour is, therefore, not voluntary but forced, it is forced labour"

"노동의 소외란 무엇인가? 첫째, 노동이 노동자에게 외재적이라는 사실이다. 즉, 노동자의 실존적 존재에 속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노동자는 그 노동에서 자신을 확립시키지 못하는 것이고 그 반면에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 노동자는 노동 과정에서 불행하고 불쾌하게 느끼고, 유쾌한 심신의 기운을 발산하지 못하는 반면 그 심신을 파괴시킨다. 노동자는 노동하지 않을 때만 행복감을 느끼고 노동할 때에 불행감을 느낀다. 노동하지 않을 때에 집과 같은 느낌이고 노동할 때에 '바깥'이다. 즉, 그의 노동이란 자원적이지 않은, 강요받은 노동이다." (『경제-철학 초고』(1844))

 

 (...)『경제-철학 초고』에서 마르크스가 "노동자가 많이 생산할수록 덜 소비한다"고 적고 있을 만큼 생산자를 소비자로 보지 않았는데, 21세기 벽두 자본주의의 제1철칙은 바로 생산자와 소비자의 '不二'입니다. 자본주의가 바뀌었다면 그게 바뀐 것이지요. 노동자가 5주 휴가 동안 그리스에서의 호텔과 각종의 휴양 서비스를 소비할 수 있는 유럽은 그렇다 치고도, 5주 휴가가 없는 이 '중간적' 준주변부의 대한민국에서마저도 노동자가 '노예 노동'의 8~10시간을 꾹 참고 견디고 나면 소비할 수 있는 것은 소주와 삼겹살 이외에도 많습니다. '한일전'에서 우리의 위대한 대한민국이 쪽바리들을 깨부셨다는 국민적 승리감, 텔레비전 드라마에서의 유명 연예인의 표정연기와 예쁜 하얀 살갗의 이미지, 달콤한 유행가의 소리, 그리고 백화점에서의 판매원 아가씨의 친절한 웃음과 존대말….

 

(...) 착한 사람 마르크스는, '완성된 인간'이 되기를 지향하는 노동자가 당연히 자기 상품화를 거부하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믿었던 모양입니다. 그 상품화를 노동자가 즐길 수도 있다는 걸, 아직 원시적 축적 상태인 그 당시의 영국 자본주의를 보고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지요. 그러나 노동자 밑에도 노동자가 있고, 노동자 위에도 노동자가 있는 오늘날의 완숙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위에 있는 노동자에게 밑에 있는 노동자의 자기 상품화란 '즐거움' 그 자체가 될 수 있지요.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가는 전문직 남성 정규직 노동자가 여승무원의 섹시한 외모와 상냥하고 친절한 말투, 매너 등 강요받은 그 친절을 안 즐기나요? 은행에 들르는 정규직 노동자는, 창구에서 노동하면서 그 친절도의 평가를 손님한테 받아야 하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무조건적 친절'을 안 즐기나요?

 

사진 편집: 레디앙

 

(...) 복합화된 자본주의 사회라는 피라미드에서는, 약간이라도 높은 위치를 점한 노동자는 거의 당장에 그 생활 양식/성향상 '새끼 자본가'로 둔갑되지요. 부동산과 주식 투자 등을 통해서 자본의 세계와의 연계를 모색해도 그 밑에 있는, 보다 가난한 여성/저숙련/외국인/청년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꺼립니다. 분리통치가 지금처럼 완벽해질 수 있다는 걸 마르크스가 예측할 수 있었나요? 자본주의의 주기성 - 필수적 공황의 도래, 이윤율저하 원칙 등 때문에 노동자들이 구조적 고통을 받게 돼 있지만, 약간이라도 체제 속에서 안정된 위치를 갖게 되면 그 체제의 아주 보수적일 일부분이 되고 맙니다. 감옥이 즐겁고 달콤하기만 하면 인간이라는 동물은 그 감옥의 종신 수인을 자청할 확률은 매우 높지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비자본주의적 대안의 매력을 보여주자면 (...) 자본이 없을 때에 앎이란 얼마나 맛이 있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게 더 효율적일 걸요. (...) 다른 차원에서 자본주의 '이후'를 '가시적으로' 준비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  한일야구부터 섹스투어까지-[나의 혁명론⑦] 맑스의 꿈…현대 노동자들이 누리는 것, 레디앙,  2009년 03월 19일 (목) 09:31:39)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펌] '가족서사' 한국 (여성)문학의 함정

‘엄마의 위로’가 문학의 보수화 부른다
계간 문예지들 ‘가족서사의 부활’ 비판적 분석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로 시작하는 신경숙의 장편소설 <엄마를 부탁해>. 소설 속 주인공들은 엄마를 잃어버렸지만, 한국 문학은 엄마를 되찾았다. 지난해 11월 초 출간된 소설은 4개월간 50만부가 팔렸으며 현재 한국출판인회의 집계 베스트셀러 순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최근 한국 문학의 큰 흐름 중 하나는 ‘가족 서사’의 귀환이다. 공지영의 <즐거운 나의 집>, 서하진의 <착한 가족>, 2009 현대문학상을 받은 하성란의 ‘알파의 시간’ 등 가족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소설들이 잇달아 출간·발표돼 인기를 끌고 있다. 이 같은 ‘가족 소설’의 인기는 경제위기 속에서 지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문학에서 감동과 위로를 얻고자 하는 심리 때문으로 풀이된다. 1998년, 외환위기 속에서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가 인기를 끌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이 같은 ‘감동’과 ‘위로’가 마냥 좋기만 한 것일까. 문예지들은 봄호에서 문학계의 ‘엄마 열풍’에 대해 ‘문학의 보수화’를 가져오고 있다며 비판적 분석을 내놨다.

 

계간 문예지 ‘세계의 문학’ 봄호는 우리 사회의 보수화를 각 분야별로 진단하는 특집을 마련했다. 문학평론가 강유정씨는 가족서사의 부활이 그동안 ‘가족 이데올로기’를 해체해오던 한국 문학의 시계추를 되돌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강씨는 문학에서 모성의 귀환을 2007년 출간된 공지영의 <즐거운 나의 집>에서부터 읽어낸다. 90년대 공지영, 은희경 등의 여성작가들은 가부장제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기존의 가족 서사를 파괴하며 집 밖으로, 길 위로 나갔다. 그런데 그녀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강씨는 “그들이 박차고 나왔던 이데올로기이자 폭력과 억압의 장소였던 가족은 가장의 모습이 바뀌자 모성의 신화적 공간으로 재탄생했다”고 지적한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더욱 전통적이고 완벽한 어머니상을 구현해낸다. “<엄마를 부탁해>에 그려진 가족에는 생산, 재생산, 계급의 문제는 빠져 있다. 여기서 가족은 엄마를 위시로 한 숭고한 치유의 공간”이라며 “우리는 실종된 ‘엄마’ 그리고 엄마의 신화적 가치를 추억하며 잠시 현실의 고달픔을 잊는다”고 분석했다. 강씨는 지난해 각종 서점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황석영의 장편소설 <개밥바라기 별>의 인기 역시 “향수를 자극하는 낭만적 회귀로서의 성장소설”이라는 점에서, 관객 200만명을 돌파한 독립영화 <워낭소리>는 “현실의 폐부를 짚어 내는 사실주의가 아니라 부재하는 향수를 환상적으로 찾아 보여주는 측면”에서 문화적 보수화의 한 징조라고 말한다.

 

‘문학수첩’ 봄호에서 문학평론가 고봉준씨도 “IMF 이후에 집약적으로 드러난 가족 서사의 변형은 경제적 위기에 의해 허물어지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줬다”며 최근 가족서사가 보수적인 방식으로 귀환하고 있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그는 “가족 서사가 일률적으로 갈등을 봉합하고 상처를 치유하려는 노력에 충실할 뿐”이라며 “가족은 해체나 재구성, 혹은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상처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견뎌야 하는 것”이 되고있다고 말한다. 고씨는 “가족과의 ‘소통’이나 엄마에 대한 ‘이해’를 내세워 모든 가족 구성원들에게 죄책감을 전가하는 지금의 가족 소설은 추구가 아니라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문학은 바야흐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들은 가능성을 2000대 이후 젊은 작가들이 벌여온 작업에서 찾는다. 강씨는 “젊은 작가들은 위기나 불황 속에서도 가족·과거·모성의 신화를 무너뜨리느라 바쁘다”며 김숨·정한아와 같은 작가들이 위로가 아닌 균열의 근원인 가족을 묘사하며, 김애란·황정은·박민규 등의 작가들이 아버지는 사물이나 동물 등 사소화된 존재로 그려내는 것을 예로 들었다. (이영경기자 @ kyunghyang 입력 : 2009-03-05 18:34:06)

 


cf.) '가족'을 지양하는 국가(공동체-정치)로의 몸부림 [김상봉 편지8] http://blog.jinbo.net/radix/?pid=95
"(...) 가족공동체를 지양하지 못하는 사회에 참된 의미의 국가란 있을 수 없습니다. 가족은 자유로운 만남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내가 내 부모를 선택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족은 자유의 현실태일 수 없습니다. 참된 자유와 보다 더 큰 만남을 위해 우리는 가족을 벗어나 더 큰 전체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자기를 실현해야 합니다. 국가는 그처럼 보다 더 확장된 만남 속에서 개인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인간이 창안한 공동체인 것입니다.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선망의 북유럽? (박노자 글 중 4문장)

그냥 한번 읽고 버리려고 했는데, 글의 마지막 문장들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아 퍼다 둔다. 우리의 선망의 대상(부자들에게는  여전히 미국이겠지만, 가난한(!) 진보들의)인 북유럽에 대해 그곳의 소속인인 박노자가 알려주는 실상의 묘사가 아주 흥미롭다('흥미'보다 더 적절한 단어 -'분노' 이런 거 말고- 가 필요하겠는데, 생각이 안 남). 이하, "맑스주의는 개무시"되고 그들만의 "민주주의"는 "초선진"이라는 해설의 부제를 달고있는 박노자 글의 마지막 네 문장 : 

 

사회적 갈등들이 잘 봉합되고 만족감이 만연한 곳에서는

우민화되는 게 (...) 훨씬 더 쉽지요.

그리고 남은 것은 '향유'지요.

1년에 3~4번이나 남유럽에 가서 좋은 피자와 좋은 섹스를 즐기고,

정기적으로 운동을 잘하고, 아이와 웃으면서 같이 자주 놀고,

그리고 물건을 고르는 재미를 천천히 즐기고….

공황이다 뭐다 하는데 노르웨이 소매업 매상고가 높아지기만 합니다!


출처)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 "민주주의 초선진의 노르웨이, 맑스주의 '개무시'도 초선진", 레디앙, 2009년 02월 20일 (금) 10:40:28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2725

 

 

뱀발) "1년에 3~4번이나 남유럽"으로 바캉스를 떠나는 능력있는(?) 북구인들이라니 놀랍다. 내가 아는 파리에 사는 친구는 유학생활 5~6년 동안에 파리를 벗어나 본 것이라고는, 한국에서 손님이 와서 함께 베르사이유궁전에 간 게 가장 먼 여행이었다는데... 그리고 여름철이면 파리 쎈느강변에 해수욕장을 흉내 낸 '빠리쁠라즈'라는 것을 해마다 만든다는 사실은 하도 소문을 들어서 이제 우리도 잘 안다. 그런데 그 낭만적 시설이라는 것의 이면에는 경제적 여유가 없어 바캉스를 떠날 수 없는 48%(작년통계)의 시민들을 위한 위안처로서의 음모(?)가 숨어있다니,  겉으로는 여유로운 '파리의 낭만'일지 몰라도 속으로는 만성화된 '선진 불평등'의 가면이겠다. 또, 그 친구의 이웃에는 직업도 없이 매일 수퍼마켙만 다니는 게 일과인 한 부부(한국인 아줌마와 돈많은 프랑스 할-아저씨)가 사는데, 그들에게는 사시사철이 바캉스임에도 불구하고 꼭 학기중에 3번 정도 있는(긴 여름바캉스 빼고 주로 '스키바캉스'로 불려지는) 학생들 바캉스 때만 되면 알프스나 따뜻한 남불로 여행을 떠난다고 한다. 부럽다고 해야할지 억울하다고 해야할지 냉정히 감수해야 할지는 그 친구의 몫이겠으나, 아주 '아그레아블'(agreable-유쾌)한 동네와 시절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펌] 일본공산당, 당원이 급증한다는데...

“청년 공산당원 급증 비결? 비정규직 문제 파고든 덕”
[뉴스 쏙] 한겨레가 만난 사람 시이 가즈오 일본공산당 위원장 
 
지역별 상담망 통해 사회 취약층 밀착 활동 / 생활보호 신청·채무 해소 도우며 당세 약진
“파견노동 확대로 일회용품 노동자 양산 / 최소한 ‘룰 있는 자본주의’ 전환 꾀해야”

 

세계 2위 자본주의 대국 일본에서 요즘 공산당이 주목받고 있다. 최근 1년 사이 1만5천명이 당원으로 가입했다. 같은 기간 외국 언론 스물두곳이 일본공산당을 취재해 갔다.

자민당 등 일본 주요 정당들의 당원이 줄고, 무당파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일본 공산당만 유독 약진하는 까닭은 뭘까?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식 구조개혁과 규제완화의 부작용으로 비정규직과 ‘워킹 푸어’(일을 해도 가난을 벗어나기 어려운 계층)가 늘어난 것이 요인으로 꼽힌다. 또 공산당의 풀뿌리 활동이 호소력을 얻었기 때문으로도 풀이된다. 그러나 다른 두가지 요인도 거론되고 있다. 열악한 노동현실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를 그린 프롤레타리아 작가 고바야시 다키지의 80년 전 소설 <게공선>이 최근 다시 각광받으며 50만권이나 팔려나가 공산당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나머지 요인은 바로 일본 공산당 최고책임자 시이 가즈오(55) 위원장의 활약이다. 지난해 2월 일본 정기국회에서 시이 위원장이 날품팔이 파견노동자의 노동 실태를 지적하는 동영상이 인터넷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그는 스타가 됐다. 당시 인터넷 댓글에 올라온 ‘잘했어, 시이’라는 뜻의 시지제이(CGJ, ‘시이 good job’)란 신조어까지 생겼다. 시이 위원장은 이달 열린 올 정기국회에서도 막대한 흑자로 돈을 쌓아놓고도 비정규직을 잘라내는 대기업의 행태를 지적하며 ‘룰 있는 자본주의’를 주창해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다.

시이 위원장은 도쿄대 물리학과 1학년 때 일본 공산당에 입당해 1990년 35살에 당 중앙위 서기국장에 취임하는 등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2006년 일본 공산당 당수로는 처음 한국을 방문해 서대문형무소 터를 찾아가 헌화했다. 지난 1월에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신년모임에 참석해 재일 외국인에게 선거권·피선거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지지 발언을 하기도 했다. 13일 도쿄 요요기의 일본공산당 당사에서 만난 시이 위원장은 시종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 시이 가즈오 일본공산당 위원장

 

-일본공산당의 당세가 크게 신장되고 있습니다. 이유가 뭔가요?
“일본의 노동조건은 심각한 상황입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전체의 40%까지 늘었습니다. 1999년 파견노동 금지를 풀어 2004년 제조업까지 확대하는 등 노동을 완화시킨 결과입니다. 젊은이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워킹 푸어를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일본 사회의 미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고, 열악한 노동조건에 괴로워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당에 들어왔습니다. 20~30대의 젊은층이 20~30%쯤 됩니다. 20대 커플이 나란히 입당한 경우도 있습니다. 젊은 세대들이 당에 활력을 주고 있습니다.”

 

-일본공산당은 지금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에 주력하고 있나요?

“저희는 각 지역에서 생활 노동상담 활동을 펼칩니다. 어떤 노동 상담도 가능합니다. 생활보호 신청에 대한 지식부터 다중채무자를 위한 노하우까지 공산당만큼 생활문제에 대한 지식이 축적된 곳이 없습니다. 구청이나 경찰서에 도움을 청하면 ‘정말 생활이 곤란하면 공산당과 의논하라’고 할 정도입니다.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우리 당을 창당한 근본 이유입니다. ”

일본 공산당은 전국 40만 당원들과 2만여 지부로 거미줄 같은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다. 한때 ‘1억 총중류’라고 할 정도로 중산층 평등사회였던 일본 사회의 사회안전망이 신자유주의 구조개혁으로 허술해지면서 공산당이 구축한 전국 조직망이 사회적 약자를 위한 안전망 구실을 하고 있다.

 

-일본에서 왜 이렇게 빈곤 문제가 심각해졌다고 보는지요?

“노동정책의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규제 완화를 극단적으로 진행하면서 ‘일회용품 노동’이 급속도로 확대됐죠. 연수입 200만엔(한화 3170만원 정도) 이하 저임금 노동자가 1천만명이 넘는 사태가 확대되고 있습니다. 가장 불행한 것은 경비절감을 위해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대기업들이 한때 유례없는 흑자를 올렸는데도 일본 사회 전체를 보면 빈곤화되는 구조입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를 보면 일본이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상대적 빈곤율이 높은 빈곤대국이 되었습니다.”

 

-일본공산당은 어떤 해법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비정규직 노동을 규제하는 제도가 필요하고, 파견노동은 전문직 말고는 금지해야 합니다. 유럽에선 비정규직도 같은 임금을 받기 때문에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바꿔도 기업으로선 비용절감 혜택이 별로 없어요. 비정규직이 10% 정도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휴업수당도 넉넉합니다. 반면 일본의 자본주의는 노동자와 중소기업, 환경을 지키려는 룰이 없어요. 사회보장 제도도 선진국 중 가장 빈약합니다. 일본 실업자의 20%에게만 고용보험에서 실업급여가 나옵니다. 일본처럼 룰이 없는 자본주의에서는 세계적 불황이 오면 문제점들이 ’노숙자 양산’ 등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대기업이 내부유보금을 조금만 풀어도 고용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요.

“지난 10년간 제조업 대기업들의 내부유보금은 88조엔에서 120조엔으로 늘었습니다. 그중 1%만 풀어도 비정규직 40만명의 고용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불경기에는 배당을 동결하고 고용을 유지했는데 지금은 미국식 경영 방식으로 주주 배당을 중시합니다. 소니의 경우 1만6천명 해고를 발표해놓고 이번 회계연도 주주배당을 늘리고 있어요. 이런 기업이 적지 않습니다.”

 

-일본공산당이 주장하는 파견노동 금지 요구에 대해 여당과 경제계는 일본 기업의 국제경제력을 갉아먹는다며 반대합니다.

“단기적으로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늘리는 것이 경비를 줄여 경쟁력을 높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 보면 정말로 우수한 인재를 잃어버리고 기술향상과 새 분야 개척 역량을 기업 스스로 떼어내는 게 될 수 있습니다. 인재, 인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기업은 진정한 의미의 경쟁력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적 금융위기로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현재의 자본주의는 어디가 잘못됐다고 보십니까?

“저희는 지금 사태를 공황의 표면화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이른바 ‘카지노 자본주의’는 미국을 중심으로 금융자유화를 극단적으로 진행시켜 1929년 공황의 교훈으로 만든 금융과 증권의 분리를 1999년 폐지했습니다. 그 결과 전세계 자본을 버블처럼 부풀려 각종 금융투기를 확대시켰죠. 가장 심한 예가 신용이 낮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서브프라임론입니다. 서브프라임론이 다른 증권과 섞여 금융 파생상품을 만들어 우후죽순처럼 전세계에 퍼져나갔습니다. 그 도박이 파탄난 것이 리먼 브러더스 파산입니다. 그러나 실물경제를 파괴하는 것은 현상적인 면에 불과합니다.”

 

-더 심각한 이면이 있는 건가요?

“그 근본에는 상품의 과잉생산이란 문제가 있습니다. 일본은 2002년부터 6년 동안 수출이 1.6배가량 늘어났습니다. 외주 덕분에 기업은 엄청나게 돈을 벌었지만 근로자의 급료는 2조엔이 줄었습니다. 생산은 늘어나도 소비는 점점 줄어든 거죠. 그런 자본주의의 모순이 아래에 깔려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사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특징인 이윤제일주의가 생산을 위한 생산, 곧 과잉생산을 일으켜 노동자의 빈곤와 소비저하가 드러난 게 공황이라는 거죠.”

차분하게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그의 모습은 정치가가 아니라 마치 경제학자처럼 비쳤다. 실제 그는 12권의 저서를 낸 지식인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을 분석하고 타파하는 데 공산주의가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요?

“자본주의 안에서는 공황은 피할 수 없지만 적어도 ‘룰 없는 자본주의’에서 ‘룰 있는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 저희 입장입니다. 투기자본이나 공황을 해결하려면 이윤제일주의, 곧 자본 이익을 위한 생산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한 생산으로 사회경제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를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라고 부릅니다.”

-자민당이 독주하는 일본에서 정권 교체가 가능할까요?

“이번 선거에서 정권 교체 여부를 떠나 공산당의 약진 여부가 최대 초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요타나 소니 같은 대기업에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 파견해고 그만두라’고 말할 수 있는 정당인가가 중요하죠. 이런 말을 할 수 있고 실제 하는 당이 공산당입니다. 자민당과 민주당은 매년 일본 경단련(일본경제단체연합회)으로부터 성적표를 받습니다. 이런 정당은 국민의 생계를 지킬 수 없다고 봅니다.”

 

-진전이 없는 북-일 국교 정상화에 대한 돌파구는 있습니까?

“역시 6자 회담 틀 안에서 핵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북-일 국교정상화는 평양선언에 근거해서 해야 합니다. 고이즈미 총리가 한 일 중에서 가장 평가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사일 핵문제,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 과거청산 문제 등 두 나라 현안을 포괄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선 북핵 문제가 진전되면 납치 문제가 방치되는 것 아니냐는 시각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어느 한쪽이 먼저 해결되는 것은 다른 문제 해결을 방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촉진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공산당은…

지부 2만곳…지방의원 3천여명 / “가장 강력한 풀뿌리 정당” 평가

    

“일본 공산당은 전세계에서는 아니지만, 아시아에서 가장 성공적인 비집권 공산당이다.” “일본 공산당은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풀뿌리 조직을 갖고 있는 유일한 정당이다.”

2007년 미국 시사잡지 <타임>에 실린 내용이다. 얼핏 ‘정말 그런가’라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할 만한 내용이지만 일본 공산당을 들여다보면 결코 과장된 표현은 아니다. 1991년 옛 소련 붕괴와 소련 공산당 해체 이후에도 일본 공산당이 허물어지지 않고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1922년 창당)으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소련 및 중국 공산당과 일정한 선을 긋고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기 때문이라는 평이 많다. 몇 해 전에는 ‘천황제’도 인정했다.

여기에 40만명이 넘는 당원, 2만개가 넘는 지부, 3천명 이상의 지방의원 등 하부조직도 튼튼하다. 전성기 때 40명이 넘던 의원 수는 비록 16명(중의원 9명, 참의원 7명)으로 줄었지만 지난 총선거에서 7.25%의 득표율을 과시했다. 궁극적인 목표로 ‘사회주의·공산주의’ 실현을 내걸고 있지만 당면 목표로는 자본주의 틀 안에서 대미 종속과 대기업 지배 타파를 지향하고 있다.

 

도쿄/글 김도형 특파원, 사진 황자혜 <한겨레21> 전문위원, 기사등록: 2009-02-19 19:45, 기사수정: 2009-02-20 08:46 ⓒ 한겨레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혁명과 예술 [서평/이순예,'예술,서구를 만들다']

지금은 괴롭지만 어딘가에 행복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환기시키고, 이 믿음을 결속력 삼아 사회를 통합한다는 ‘유토피아 기획’은 이렇게 예술과 사이좋게 만났다. -부르주아혁명가들-

예술은 현상계가 아닌 물자체의 존재, 곧 또다른 세계가 존재함을 보여줌으로써 전복적인 힘을 지닌다. -저자 이순예-
자본주의의 병폐가 극에 달한 21세기야말로 예술이 지닌 전복성과 사회통합력을 절박하게 불러내야 하는 시기. -"-

문명화 과정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폭력을 내부로 흡수해 들이면서 문명에 대한 안티테제로 자신을 정립하는 예술. -"-

 

» 에두아르 마네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1882. 전통적으로 남성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역할을 담당해온 여성들이 대중사회에서 주로 서비스업을 담당하게 됐다. 여급의 처지로는 세상에 온전한 자리를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림 속 여자는 “술과 더불어 여자를 눈으로 마시겠다고 나선 남자”가 아무리 수작을 걸어와도 무표정하게 있어야 한다.  


 
혁명 부르주아는 왜 모나리자를 사모했나

한겨레 김일주 서평, <예술, 서구를 만들다>, 이순예 지음/인물과사상사·2만5000원

 

<라 조콘다>. <모나리자>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은 프랑스 파리 시내 한복판에 자리잡은 루브르 박물관의 독방에서 방탄 유리를 쓴 채 오늘도 조용히 미소짓고 있다.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으로 왕궁을 접수한 부르주아는 왕궁을 박물관으로 탈바꿈시키고 약탈도 서슴지 않고 수집·분류한 수많은 예술품과 함께 <라 조콘다>를 걸었다. 관람자 자신만을 특별히 응시한다는 리자의 눈빛과 영혼이 깃든 듯한 얼굴의 생동감은 자기소외라는 근대적 병폐를 앓고 있던 이들을 어루만졌다. 물질에서 영혼을 제거해 분석 대상으로 삼고 생산성 극대화를 향해 내달리던 근대 시민은 잠시나마, 박물관이라는 공적인 장소에서 ‘영혼과 물질의 조화’를 내밀하게 맛보았다. 지금은 괴롭지만 어딘가에 행복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환기시키고, 이 믿음을 결속력 삼아 사회를 통합한다는 ‘유토피아 기획’은 이렇게 예술과 사이좋게 만났다. 새로운 시민사회를 건설하는 데 예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부르주아의 생각을, 박물관 속 모나리자의 미소는 오롯이 실현한 것이다.

 

<예술, 서구를 만들다>는 예술이 ‘서구 근대의 꽃’으로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빛나며 ‘삶의 의지’와 ‘내면의 소통’을 담당할 사회적 기관으로 떠오르는 과정과, 이를 뒷받침하거나 이끈 철학적 미학의 성립, 그리고 오늘날까지 변함없는 예술의 중요성을 성찰한 결과를 담은 책이다. 인류 최초의 예술로 꼽히는 알타미라 동굴 벽화와 그리스·로마 신화부터 현대 미술, 얼마 전 개봉했던 영화 <다크 나이트>까지, 시공간과 형식을 불문한 방대한 예술 작품들을 성찰의 대상으로 끌어들였다. 독일에서 18세기 칸트에서 20세기 아도르노에 이르는 독일 ‘철학적 미학’을 연구한 지은이 이순예(빌레펠트대 박사)씨가 이를 통해 내리는 결론은 자본주의의 병폐가 극에 달한 21세기야말로 예술이 지닌 전복성과 사회통합력을 절박하게 불러내야 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라 조콘다>로 서구의 근대 시민사회 형성에서 예술이 한 역할과, 시간이 흘러 오늘날 사진 한 장으로 그 아우라를 간단히 구매하는 현실까지 상황의 변화를 일별한 지은이는 알타미라 동굴 벽화로 시선을 돌려 자연과 인간의 통합과 동화(Mimesis)를 읽어낸다. 인간의 정신능력이 도구의 발달, 특히 언어의 발달과 함께 발전하자 “의사소통은 합리적 분석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 문명의 미신이 들어섰고, 미메시스는 우스꽝스러워지고, 분석은 전지전능해졌다.” 문명인은 주체와 타자를 구분하고, 자연을 분석해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을 기른 대가로 필연적으로 ‘분열’됐다. 정신능력, 곧 이성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은 땅에 발을 딛고 있는, 들끓는 살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계몽된 일상의 삶과 삶의 궁극이 분리되는 ‘분화’가 근대인의 조건임을 제일 먼저 밝히고 이 둘이 다시 합치되는 영역으로 예술을 발견한 이가 칸트라고 설명한다. <판단력 비판>에서 칸트는 인간이 감각적 지각을 통해 인식으로 경험할 수 있는 세계인 ‘현상계’와 인식 가능성과 경험을 초월한 현상의 참 실재인 ‘물자체’가 합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미적 통합’에서 찾았다. 통합의 지점은 인간이 아름다움을 느끼는 곳이었으며, 허구일지언정, 예술은 물자체가 실재함을 증명해줬다.

 

 
» 〈예술, 서구를 만들다〉
 

예술은 현상계가 아닌 물자체의 존재, 곧 또다른 세계가 존재함을 보여줌으로써 전복적인 힘을 지닌다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모순과, 결코 자율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자유를 향해 구성원을 채찍질하는 시민사회의 당착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은이는 예술에서 찾는다. “문명화 과정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폭력을 내부로 흡수해 들이면서 문명에 대한 안티테제로 자신을 정립하는 예술은 미래지향적이다. 예술을 통해 우리는 문명비관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지은이의 여성학자적 시각은 예술과 근대성의 관계를 서술하는 내내 곳곳에서 빛을 발하며 서술의 깊이를 더한다. 서구 근대화의 주체인 ‘생각하는 남자’의 기획 아래 탄생한 근대 가족 구성과 성매매라는 부르주아 가족제도의 보충물을 에드가 드가의 <벨렐리 가족>과 에두아르 마네의 <나나>를 통해 설명할 때 이는 특히 도드라진다. “일부일처제 가족을 중심으로 추진된 정서 계발 기획은 자연을 인간의 필요에 알맞게 가공하는 기교가 최고조에 달한 결과였다.” ‘기획의 입안자’가 아닌 엄마와 딸들에게는 조신함을 가장한 딱딱함을 내면화시키는 일에 탈출구가 없었지만, 이 기획을 입안하고 실행한 남자들은 내부 자연을 욕구의 형태로 내장했다. 따라서 남성들은 다스려지지 않는 본성을 타자를 통해 확인할 필요가 있었고, 이는 성매매가 마네의 그림에서처럼 또다른 일상으로 굳어진 이유라는 것이다. (김일주기자, 그림 인물과사상사 제공, 기사등록 : 2009-02-06 오후 08:47ⓒ 한겨레)

 

 

* 혁명과 예술에 대한(여성까지는 힘들겠고) 생각은 나중에 천천히....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펌]반인권적 도시개발 굴레 벗자/조명래

누구나 분노할만한 용산참사 이겠기에(그래도 국민의 40%는 경찰의 잘못이 없다고 한다지만(*1)), 여기서 차분한 성찰적 해결책을 주문하다가는 반동으로 몰리기가 십상이겠고, 그래서그런지 온통 -내가 보는- 신문들의 사설이나 글들이 정부의 블도저 정책을 비롯하여 경찰의 충성경쟁이나 개발업자를 낀 용역들의 횡포 등으로 촛점을 맞춘 감성적 도덕성에 기초한 비판으로 도배되는 듯하다. 물론 때로는 감성과 도덕이 이성과 논리 보다 더 절실히 요청될 때도 분명히 있겠고(혁명기 정도가 될려나?) 지금이 바로 그런 때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자들이 문제를 추동하는 동력이라면 후자들은 문제를 추스려 담고 발전시키는 힘일 것이다. 오랫만에 후자적인 글을 하나 발견하여 모셔온다. 글쓴이는 문제의 핵심을 "반인권적 도시개발방식"에서 찾고, 이러한 철저한 자본주의적 개발방식이 철거촌 주민들의 "생명을 건 극한 투쟁" 방식을 불러왔으며, 급기야 경찰의 폭력적 작태와 참사를 낳았다고 진단한다. 그러므로 경찰이나 국가의 폭력적 대응에 대한 비판도 필요하겠지만, 거기에만 "매몰"되지말고 문제의 발단이 된 기존의 도시개발방식을 "공영개발방식" 등으로 바꾸는 것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반인권적 도시개발 굴레 벗자 / 조명래 단국대 교수 - 거주권 부당한 박탈 ‘위헌소지’

‘목숨을 걸지 않으면 서민들은 목소리를 내기가 힘들다.’ 6명의 생명을 앗아간 용산참사의 진실은 바로 여기에 있다.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목숨마저 내걸어야 하는 한국적 도시개발의 굴레가 6명의 아까운 생명을 삼켜버린 것이다. 60년대부터 시작된 이 굴레는 지금도 도시개발의 현장마다 약자인 철거민들의 생명과 생존권을 위협하면서 돌아가고 있다. 말하자면, 세입자인 철거민의 권리를 지켜주지 않은 한국의 반인권적 도시개발방식이 이번 용산참사의 근본 원인인 것이다.

우리의 도시개발 과정에서는 토지 및 건물 소유주의 소유권만 기본적으로 보장되고 있다. 하지만 토지에 대한 권리는 소유권만 아니라 사용권(거주권 포함)도 포함돼 있어, 토지의 가치를 형성할 때는 소유자와 사용자(혹은 거주자)가 함께 기여한다. 그래서 보상시엔 소유권에 대한 것만 아니라 사용자가 땅값 형성에 기여한 부분도 보상을 받게 된다. 이는 일본을 포함한 선진국들이 운용하는 제도다. 사용자로서 세입자의 권리는 비단 경제적 보상에 대한 것만 아니라 기본권의 일환인 거주인권 요소도 포함돼 있다. 철거과정에서 거주권을 부당하게 박탈하는 강제철거는 이런 점에선 헌법상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과 진배없다. 우리나라에 거주권 개념이 원론적으로는 인정되고 있지만, 실제의 권리관계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를테면, 재개발·재건축 과정에서 세입자들의 주거 및 생계의 안정을 배려해 적정 보상을 하도록 관계법(예,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사업법)에 규정돼 있지만, 실제 운영에선 형식적인 절차를 통해 최소한의 보상만 해주는 것으로 끝난다. 이 상황에서 강제철거는 생존권 박탈이란, 당사자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가하게 되고, 이는 곧 생명을 건 극한 투쟁의 빌미가 된다.

한국의 재개발·재건축 사업은 막대한 개발이익을 보장해주고, 이는 곧 도시환경을 바꾸는 힘이다. 이 때문에 당국도, 소유주(조합)도, 개발업자도 모두 최단시일에 사업을 추진하려는 관성을 만들어낸다. 이번 용산 재개발 지역은 어느 곳보다 개발이익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도시계획 당국의 암묵적 동의 아래서 개발업자는 무리한 속도전을 감행했다. 통상 3~4년의 사업인가 기간이 4개월로 단축된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2) 속도가 빨랐다는 것은 소유주와 개발업자의 욕심이 컸다는 것이고, 이는 곧 세입자들의 권리가 그만큼 억압됐다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수익성이 높은 상업지역의 세입자들은 길게는 수십 년 동안 자기자본을 투자해 상가의 부동산적 가치를 높게 형성해 놓았지만, 턱없이 낮은 보상가로 평생 일군 재산을 잃게 되자, 폭력적 저항을 통해 스스로의 생존권을 지키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경찰은 마땅히 이 약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권력의 눈치를 살피는 경찰은 새 정부가 내세운 법질서 확립을 명분으로 ‘본보기’ 강경 진압을 했고, 그 결과 예방할 수 있는 비극적 참사를 스스로 불러왔다. 약자를 지켜주어야 할 경찰은 마지막 생존수단으로 드러난 폭력만 문제 삼아 이들의 권리를 무자비하게 억누르는 것을 넘어 생명까지 앗아가는 ‘국가폭력’을 저지른 것이다. 경찰이 권력의 파수꾼으로서 역할을 하는 동안 반인권적인 도시개발의 굴레는 이렇게 해서 다시 한 번 돌아갔다.

금번 사태의 원인을 진단함에 있어서, 우리는 세입자들의 폭력적 저항이나 경찰의 폭력적 진압이란 현상에만 매몰돼선 안 된다. 세입자의 권리와 권익을 보장하지 못한 한국적 도시개발제도, 나아가 약자의 권리적 요구를 호도하거나 물리력으로 막으려는 정권의 권력 사용방식에 눈을 먼저 돌려야 한다. 반인권적인 도시개발의 굴레를 멈추기 위해선 기본권의 일환으로 주거권이 보상과 철거과정에서 경제적 가치와 인권으로 올곧게 반영돼야 한다. 아울러 도시개발 과정에서 세입자의 입장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는 긴 호흡의 절차가 강화돼야 하고, 갈등이 발생할 때는 공권력 투입에 앞서 이해당사자 간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 상설화돼야 한다. 이번 참사지역과 같이 갈등이 첨예한 경우엔 공영개발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하는 것도 검토돼야 한다. (경향 입력 : 2009-01-23-17:07:07ㅣ수정 : 2009-01-23 17:07)


(*1) 성인 60% “용산참사에 경찰 책임 더 크다” -사회동향연구소 긴급 전화 여론조사 // 서울 용산의 재개발 현장에서 농성 중이던 철거민 등이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사망한 사건에 대해 경찰 책임이 더 크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민간조사기관인 사회동향연구소는 전국 성인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22일 벌인 긴급 전화여론조사에서 60%가 이번 사태와 관련, `무리한 진압을 강행한 경찰'의 책임이 더 크다고 답했다고 23일 밝혔다. 응답자의 31%는 그러나 `과격시위를 벌인 철거민'에 책임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 사건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응답자는 57%였으며, 35%는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답했다. `책임을 물어 내각이 총사퇴해야 한다'는 야당 측 주장에 대해서는 50%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답했으며, 37%는 이 주장에 찬성했다. `대통령의 밀어붙이기식 통치가 사건의 본질적 원인이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는 68%가 `그렇다'고 말했고, `그렇지 않다'고 밝힌 응답자는 28%였다. 응답자들의 정당별 지지 분포는 한나라당 25%, 민주당 15%, 민주노동당 8%, 자유선진당 6%이고,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고 밝힌 사람이 34%였다고 사회동향연구소는 전했다. (서울=연합뉴스) 기사등록 : 2009-01-23 오후 01:34:01 ⓒ 한겨레)

 

(*2) 윤증현, 노회찬, 철거민: 용산 참사 뒤에는 무엇이? 삼성의 돈벌이! // 2009년 1월 19일과 20일은 삼성의 나날이다. 민주주의라는 이 멀쩡한 사회를 실제 지배하는 게 누구인지, 그리고 그 지배 아래에서 우리의 삶이 어떠한지를 숨김없이 보여준 이틀이다. 일주일 전쯤, 어느 술자리에서 누군가가 ‘고위관료’라는 출처를 달며 강만수가 물러나고 윤증현이 등용될 것이라 전했고, 나는 별 생각없이 또 다른 술자리에 그 소식을 옮겼다. 아마도 정보 보고를 위해서인 듯 대기업의 후배 하나가 “윤증현이 맞냐?”고 되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내가 ‘윤증현’이라 생각한 것은 그리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명박 정권으로서는 윤증현을 최선의 카드로 여길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난 국회에서의 충돌이 경제실적을 보이지 못한 이명박 정권의 초조함에서 비롯되었고, 재벌투자를 끌어내기 위해 금산분리를 완화하겠다는 나름의 계산에 의한 것이었음은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윤증현은 노무현 정권 당시 대표적인 금산분리 완화론자였을 뿐더러 삼성에버랜드, 삼성생명을 위해 물불 안 가리는 충성을 과시했었다. 청와대가 개각을 발표한 19일 삼성은 구조조정본부 재무 출신자들과 삼성생명, 삼성카드 등의 파이낸셜 담당자들을 승진시키는 사상최대의 사장단 인사를 실시했다. 삼성은 21일 사장단협의회를 열어 투자조정위원회 구성 등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19일, 노회찬 전 의원은 피고로, 이학수 삼성 고문은 증인으로 재판정에 섰다. 검찰은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을 구형했다. 범죄를 모의한 삼성 재벌 일가와 도청한 안기부 직원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지만, 범죄를 폭로한 노회찬에게는 징역형이 구형됐다. 2005년 노회찬 폭로 한 달 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삼성경제연구소 이언오 전무를 국가정보원 최고정보책임자(CIO)로 임명해 삼성이 도청당할 위험을 원천봉쇄했고, 이명박 대통령은 아예 처음부터 김앤장의 삼성 담당 변호사를 국내 총책인 국가정보원 차장에 앉혔다. 이제 마무리 수순이다. 담당 판사는 촛불시위자들에게 실형을 선고한 강경 판결로 유명해진 사람이고, 서울시장 선거를 준비한다는 노회찬은 피선거권을 박탈당한 위기에 처하게 됐다.
용산 4구역은 삼성 땅이다. 삼성 땅에서 사람들이 죽었다. 삼성은 용역깡패 전문회사고, 대한민국 경찰은 언제나 용역깡패들의 앞잡이였고,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는 촛불 강경진압의 빛나는 위훈으로 영전한 인물인데, 참사 아닌 다른 무엇을 기대했단 말인가? 결국 책임은 폭력시위자들과 강경진압자들에게 돌아가고, 삼성은 영원할 것이다. 들끓을 여론도, 사람의 생명도 돈보다 길거나 귀하지 않다. 태안 앞바다에 기름을 쏟아 부었어도 삼성은 무사하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까. 용산 4구역 116,591평이 평당 3,800만 원에 분양된다면 그 총액은 4조 4천억 원에 이르고, 그 중 삼성물산 지분은 40%다. (레디앙 2009년 01월 20일 (화) 16:35:37 이재영 기획위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