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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가족서사' 한국 (여성)문학의 함정

‘엄마의 위로’가 문학의 보수화 부른다
계간 문예지들 ‘가족서사의 부활’ 비판적 분석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로 시작하는 신경숙의 장편소설 <엄마를 부탁해>. 소설 속 주인공들은 엄마를 잃어버렸지만, 한국 문학은 엄마를 되찾았다. 지난해 11월 초 출간된 소설은 4개월간 50만부가 팔렸으며 현재 한국출판인회의 집계 베스트셀러 순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최근 한국 문학의 큰 흐름 중 하나는 ‘가족 서사’의 귀환이다. 공지영의 <즐거운 나의 집>, 서하진의 <착한 가족>, 2009 현대문학상을 받은 하성란의 ‘알파의 시간’ 등 가족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소설들이 잇달아 출간·발표돼 인기를 끌고 있다. 이 같은 ‘가족 소설’의 인기는 경제위기 속에서 지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문학에서 감동과 위로를 얻고자 하는 심리 때문으로 풀이된다. 1998년, 외환위기 속에서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가 인기를 끌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이 같은 ‘감동’과 ‘위로’가 마냥 좋기만 한 것일까. 문예지들은 봄호에서 문학계의 ‘엄마 열풍’에 대해 ‘문학의 보수화’를 가져오고 있다며 비판적 분석을 내놨다.

 

계간 문예지 ‘세계의 문학’ 봄호는 우리 사회의 보수화를 각 분야별로 진단하는 특집을 마련했다. 문학평론가 강유정씨는 가족서사의 부활이 그동안 ‘가족 이데올로기’를 해체해오던 한국 문학의 시계추를 되돌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강씨는 문학에서 모성의 귀환을 2007년 출간된 공지영의 <즐거운 나의 집>에서부터 읽어낸다. 90년대 공지영, 은희경 등의 여성작가들은 가부장제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기존의 가족 서사를 파괴하며 집 밖으로, 길 위로 나갔다. 그런데 그녀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강씨는 “그들이 박차고 나왔던 이데올로기이자 폭력과 억압의 장소였던 가족은 가장의 모습이 바뀌자 모성의 신화적 공간으로 재탄생했다”고 지적한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더욱 전통적이고 완벽한 어머니상을 구현해낸다. “<엄마를 부탁해>에 그려진 가족에는 생산, 재생산, 계급의 문제는 빠져 있다. 여기서 가족은 엄마를 위시로 한 숭고한 치유의 공간”이라며 “우리는 실종된 ‘엄마’ 그리고 엄마의 신화적 가치를 추억하며 잠시 현실의 고달픔을 잊는다”고 분석했다. 강씨는 지난해 각종 서점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황석영의 장편소설 <개밥바라기 별>의 인기 역시 “향수를 자극하는 낭만적 회귀로서의 성장소설”이라는 점에서, 관객 200만명을 돌파한 독립영화 <워낭소리>는 “현실의 폐부를 짚어 내는 사실주의가 아니라 부재하는 향수를 환상적으로 찾아 보여주는 측면”에서 문화적 보수화의 한 징조라고 말한다.

 

‘문학수첩’ 봄호에서 문학평론가 고봉준씨도 “IMF 이후에 집약적으로 드러난 가족 서사의 변형은 경제적 위기에 의해 허물어지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줬다”며 최근 가족서사가 보수적인 방식으로 귀환하고 있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그는 “가족 서사가 일률적으로 갈등을 봉합하고 상처를 치유하려는 노력에 충실할 뿐”이라며 “가족은 해체나 재구성, 혹은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상처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견뎌야 하는 것”이 되고있다고 말한다. 고씨는 “가족과의 ‘소통’이나 엄마에 대한 ‘이해’를 내세워 모든 가족 구성원들에게 죄책감을 전가하는 지금의 가족 소설은 추구가 아니라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문학은 바야흐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들은 가능성을 2000대 이후 젊은 작가들이 벌여온 작업에서 찾는다. 강씨는 “젊은 작가들은 위기나 불황 속에서도 가족·과거·모성의 신화를 무너뜨리느라 바쁘다”며 김숨·정한아와 같은 작가들이 위로가 아닌 균열의 근원인 가족을 묘사하며, 김애란·황정은·박민규 등의 작가들이 아버지는 사물이나 동물 등 사소화된 존재로 그려내는 것을 예로 들었다. (이영경기자 @ kyunghyang 입력 : 2009-03-05 18:34:06)

 


cf.) '가족'을 지양하는 국가(공동체-정치)로의 몸부림 [김상봉 편지8] http://blog.jinbo.net/radix/?pid=95
"(...) 가족공동체를 지양하지 못하는 사회에 참된 의미의 국가란 있을 수 없습니다. 가족은 자유로운 만남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내가 내 부모를 선택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족은 자유의 현실태일 수 없습니다. 참된 자유와 보다 더 큰 만남을 위해 우리는 가족을 벗어나 더 큰 전체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자기를 실현해야 합니다. 국가는 그처럼 보다 더 확장된 만남 속에서 개인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인간이 창안한 공동체인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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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지양하는 국가(공동체-정치)로의 몸부림 [김상봉 편지8]

"(...) 가족공동체를 지양하지 못하는 사회에 참된 의미의 국가란 있을 수 없습니다. 가족은 자유로운 만남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내가 내 부모를 선택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족은 자유의 현실태일 수 없습니다. 참된 자유와 보다 더 큰 만남을 위해 우리는 가족을 벗어나 더 큰 전체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자기를 실현해야 합니다. 국가는 그처럼 보다 더 확장된 만남 속에서 개인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인간이 창안한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혈연관계가 자동적으로 사람들을 묶어주는 가족과 달리 국가는 사람들이 공유된 뜻과 이상을 통해 결속할 때만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런 국가가 없습니다. 2000년 전의 성씨가 아직도 이어지는 이 나라에서 국가는 여전히 씨족연립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단 국가기구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사회적 공동체들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재벌이나 학벌에서 보듯 가족주의 또는 족벌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곳이 한국사회입니다. 차이라면 과거의 벌열가문이 지금은 ‘고소영’ ‘강부자’ 등으로 옷을 갈아입은 것뿐, 이 나라가 우리 모두의 나라가 아니라 소수 족벌의 나라인 것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결과 국가기구는 평소에는 소수의 집단에 의해 사적으로 장악되고, 위기에 처하면 모래성처럼 해체되어 버립니다. 모두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 국가가 민중의 비판과 저항에 직면하는 것은 정해진 순서인데, 국가기구가 비판하고 저항하는 민중을 서슴없이 적으로 간주해 공격할 때 전쟁상태를 종식시켜야 할 국가가 도리어 민중을 적으로 삼아 전쟁상태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註1]

 

(...)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지배의 종류를 나누면서 정치가가 시민을 지배하는 것은 동등한 사람들 사이의 지배라는 점에서 주인의 노예지배나 가부장의 가족지배와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간단히 말해 정치적 지배란 동등한 친구들 사이의 지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국가권력을 장악한 자들은 동료 시민을 친구로 보지 않는 것은 물론, 아예 사람으로도 보지 않습니다. 용산 철거민들이 사람으로 보였다면 시너통이 가득한 농성장을 무차별 공격할 수 있었겠습니까? 철거민뿐입니까? 이 나라의 권력자들은 자기들에게 반대하는 모두를 무조건 적으로 만듭니다. 수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교육은 크게 다를 수 없으므로 어디서나 교육자들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데, 한국의 권력자들은 그런 교사들을 싸잡아 적으로 만듭니다. 평교사도 모자라 이제는 일제고사를 통해 교장들까지 줄을 세우겠다고 나섰으니 대다수 교장들이 반정부집단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저들의 탐욕과 미련함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일제고사다 언론법이다, 그렇게 부지런히 모두를 적으로 만들면서 그들은 한 줌의 지배세력으로 고립되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무르익으면 폭풍이 몰려오고 저들은 썩은 과일이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듯 몰락할 것입니다. 겨울이 가고 봄입니다. 그렇듯 우리 역사에도 머지않아 봄이 올 것입니다. 우리의 일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조용히 그 때를 기다리며 새 시대를 준비하는 것이겠지요. (...)"

 

출처: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4) 정부 수립 60년,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였나<下> [편지-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3011730275&code=210000&s_code=af078

 

[註1]-본문에서 발췌-
1811년 홍경래의 반란 이래 이 나라의 역사는 이미 왕조시대부터 민중봉기와 항쟁의 연속이었습니다.
1862년 이른바 진주민란을 효시로 삼남지방을 뒤흔든 농민항쟁이 일어났고,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터졌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있었고, 10년 뒤 광주학생운동은 이름과 달리 함석헌이 가르치던 평안북도 오산학교까지 번진 전국적 봉기.

1948년 제주 4·3사건과 여순반란사건에 이어 1950년 비극적인 전쟁이 있었고,
1960년 4·19혁명으로,
1979년 부산과 마산에서 예고 없는 지진처럼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그 직접적인 결과로 박정희의 독재가 종말.
1980년 5월 부마항쟁에 응답하듯이 광주항쟁이 터졌고,

1987년 길고 고통스러운 투쟁 끝에 마침내 우리는 민주주의를...

그리고 20여년 동안 이제 과거와 같은 대규모 민중봉기나 항쟁은 더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더니, 지난해 아무도 예상 못한 촛불항쟁이 백일 이상 계속되었습니다. 역사에 눈 밝은 사람이라면 이것이 오랜 고요 뒤에 찾아올 새로운 봉기의 전조라는 것을 모를 수 없을 것입니다.

 

 

* 윗 글은 박명림이 묻거나 문제를 제안하고, 김상봉이 답하거나 철학적으로 풀어내는 서간대화의 여덟번째 편지이다. 둘의 역할 분담의 성격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김상봉의 글이 더 많은 유익한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게 사실이다. 참고로 그의 편지 2와 4는 여기(http://blog.jinbo.net/radix/?pid=59)에 옮겨다 뒀고 6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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