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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 할머니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인가.

 

 

  공지영의 소설을 오랜만에 손에 집었다. 난 공지영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공지영 뿐 아니라 은희경, 신경숙, 하성란 등으로 이어지는 90년대를 풍미한 여류 작가들의 소설을 그닥 즐겨읽지 않는 편이라 해두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다. 진보의 물결에 잠깐 발을 담갔던 것 처럼 묘사되는 공지영의 글이나, 중년 여성의 사랑과 삶을 그려내 읽는 이로 하여금 허무를 느끼게 하는 은희경이나, 따라 잡을 수 없는 생각의 묘사로 문장과 문장의 사이에 존재하는 사고의 간격을 허벌나게 따라 잡아야 하는 신경숙도 싫었다.

 

 더 사실대로 말하면 그녀들이 그려내는 자신의 일부인 그녀들의 삶이 싫었던 것 같다.

그녀들의 모습은 내 어머니의 모습이었고, 미래의 나의 모습인 것도 같았으며, 현재의 내 모습이기도 했다. 그래서인가, 나 역시 그녀들의 삶이 그려진 소설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푸념을 늘어놓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동조하는 남성이 있으면 이상하게 벨이 꼴렸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점점 아해가 가는 표현들이 생기는 것이 진절머리가 났다. 정말 이상한 심보다.

 

 

[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는 소설은 내게는 너무나도 공지영스러운 소설이었다. 짧은 단편 소설이라 내용의 긴밀도는 좀 떨어지는 편이지만, 그래도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대략 말해놓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골똘히 생각했다. 과연 죽지 않는 할머니를 위해 내가 알려 줄 수 있는 완벽한 살해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이 할머니를 과연 죽여야 할까?

나는 이 할머니를 과연 죽일 수 있을까?

 

 

  주인공 '나'는 현재의 나에게 짧은 편지 형식으로 조언을 구하고 있다. 나는 17세의 소녀인데, 스스로의 표현에 의하면 강남에서 좀 놀았다는 정도로 순순한 성격은 아니다. 나에게는 몇 해 전부터 죽을 것 처럼 앓고 있으면서 죽지 않는 할머니가 있다. 가족 모두는 할머니의 유산을 탐내며 할머니를 정성껏 간호하는 척 나서지만, 나는 할머니를 증오한다.

  나에겐 할머니를 증오할만한 이유가 존재하는데, 그건 내가 지켜야만 하는 존재인 -어린 나이에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스스로도 어리둥절하다고 말하는데- 장애를 가진 동생이 할머니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우리집 상황에 대해 알아야 한다.

할머니가 아플 때마다 이상하게 누군가가 죽어나간다. 처음엔 갓 결혼한 막내 외삼촌이었다.

외삼촌이 죽자 식도암 말기로 죽어가던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 미음을 가져오라고 소리친다. 그걸로 성이 차지 않는 할머니는 비쩍마른 손마디로 기름기 뚝뚝 떨어지는 갈비살을 뜯어먹는다.

 

 그 다음 해 되찾은 할머니의 건강이 다시 시들해질 무렵, 큰 외숙모가 죽자 할머니는 다시 일어난다. 그 다음 차례는 우리집에서 10년간 일하신 불쌍한 가정부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가 죽자 자리에서 일어난 할머니는 그녀가 그렇게 죽은 건 지탓이라며 보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가족들 모두 할머니의 의견에 동조했지만, 나는 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무슨 주문을 외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탐욕과 몰인정함에 치를 떤다.

 

  죽을 것 같으면서도 죽지 않으면서 이젠 내 생명과 내가 지켜야할 동생의 목숨까지 위협하는 할머니. 사실 할머니에게는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 뱃속에 아이를 가졌어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지경을 넘어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먹어야 했던 과거가 있다. 그래서 부뚜막에서 발견한 새끼를 배고 있는 고양이를 삶아 먹었던 이야기를 우연히 털어놓는다.

어쨌든 지금의 할머니가 죽어갈 때마다 이웃집 개, 쥐, 참새들 무언가가 죽어나가는 것을 발견한 나는 할머니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안다면 가르쳐 달라며 끝을 맺는다.

 

 

 

할머니는 누구일까? 작가는 끝끝내 밝히지 않고, 이상한 분위기만 풍긴 채 독자의 몫으로 돌린다. 보다 정확하게는 할머니의 정체는 중요하지 않으며, 할머니가 보이는 행동과 이것을 막을 방법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할머니가 죽지 않기 위해 했던 행동들의 원인을 따라가면 그건 환경에 따른 것이었다. 악착같이 보존하려는 재물에 대한 탐욕 이전에 살기 위한 본능을 따랐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고민이 들었다. 할머니는 죽어야만 할까.

 

처음엔 할머니의 존재를 자본가라고 생각했었다. 생각하는게 늘 이런식이라, 바라보는 시각도 한정되어 있다. 본질을 분명하게 파악하는 것과 편협한 생각으로 다양하게 사고를 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요즘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하면서 느끼는 건 내가 후자에 더욱 가깝다는 사실이다.

 

이 소설에 대한 평론을 잠깐 읽어보니, 그 평론가는 할머니의 존재를 탐욕이라고 해석했다. 틀린 해석은 아닌 것 같다. 할머니는 죽을 것 같으면서도 식지 않는 탐욕스러운 모습이니까 말이다. 탐욕은 과연 죽어야만 하는 존재일까? 내가 지켜야할 그 무언가의 존재를 위해서?

그렇다면 과연 죽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해답이 없는 것 같은 소설하나를 읽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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