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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1/16
    잡다한 이야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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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01/16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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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5/01/16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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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5/01/16
    왜 사회주의인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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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5/01/16
    강경애 (1부) - 원고료 이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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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5/01/15
    이거? 앞으로 내가 '기본적으로' 봐야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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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5/01/15
    오늘도 끝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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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5/01/14
    오늘 하루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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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5/01/14
    블로그 폐인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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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5/01/12
    조맹씨 이야기1-쪼맹씨의 잠버릇(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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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이야기3

#1.

일요일이다. 밖에 나갈까 하다가, 오늘 하루는 좀 쉬기로 했다.

오늘은 책들을 좀 읽어야겠다. 2005년이 시작되면서 나와 함께 하는 것들이

책들이긴 한데, 그래도 오늘은 좀 여유있게 살고 싶다.

이상하지? 하루 24시간 시간은 대단히 많고 여유로운데, 전혀 여유롭지가 않았으니...

오늘은 또 일주일을 살 계획 하나를 짜야겠다.

 

 

#2.

시집을 한 권 빌렸다. 기형도 시집이다.

그냥 허한 마음을 달래려 시집 한 권을 빌렸는데, 선택이 잘못됐다 싶다.

읽고 나니까 마음이 더 허해지는게, 조용한 노래를 함께 듣고 있으면

세상이 모두 끝나버린 것 같다.

 

그래서 읽다가 그냥 던져버렸다.

 

 

 

#3.

요즘 내가 왜 이렇게 블로그에 빠졌는지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본다.

그러려면 내 평소의 일상을 다시 점검해봐야 한다.

내가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은 그냥 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언어를 토해내는 수준이다.

꾹 참고 있는 말들을 꾸역꾸역 토해낸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사람을 만나면 좀 달라질 것 같다.

하지만 사람을 만나고 싶지는 않다.

 

이 생활을 꽤 즐기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블로그는 슬슬 자제해야겠다.

 

 

 

#4.

난 생각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생각이 많은 것과 깊이 있는 생각을 하는 것은 다르기에

생각을 깊이 있게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그러다보니 많은 생각들중에서 한동안은 멍하니 앉아만 있을때도 있다.

오늘은 밥 먹다가 그냥 멍하니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이러면 안되지 싶었다.

 

시를 다시 써보기로 했다.

대단히 유치한 작업이라고 생각해서 그만뒀었는데,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언어들을 기록해둘 작업이 필요한 것도 같다.

노트도 하나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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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기형도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여섯 개의 줄이 모두 귾어져 나는 오래전부터 그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때 나의 슬픔과 격정들을 오선지 위로 데리고 가 부드러운 음자리로 배열해주던)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가끔씩 어둡고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기타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경악한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기타 소리가 멎으면 더듬더듬 나는 양초를 찾는다. 그렇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대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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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형도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와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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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회주의인가?

예전에 읽었던 글인데, 웹서핑하다가 발견해서 블로그에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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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user.chollian.net/~marishin/eco/hesocial.html

강조는 밥이조아.

이 글은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1949년 5월 미국의 독립계 좌파 월간지 먼슬리리뷰 창간호에 쓴 것이며, 이 잡지는 창간특집호에 이 글을 종종 다시 싣습니다.


왜 사회주의인가? (WHY SOCIALISM?)

알버트 아인슈타인 (by Albert Einstein)

 


경제나 사회 문제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사회주의에 대한 견해를 표현해도 되는 걸까? 나는 몇 가지 이유로 그렇다고 믿는다.

Is it advisable for one who is not an expert on economic and social issues to express views on the subject of socialism? I believe for a number of reasons that it is.

먼저 과학적 지식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 방법론상으로 천문학과 경제학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두 분야의 학자들은 모두 많은 현상들의 관계를 가능한 한 명확하게 하기 위해 현상들의 일반적인 법칙을 찾으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방법론 차이가 분명히 있다. 경제학에서 일반 법칙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따로 떼어내서 정확하게 평가하기 어려운 많은 요인들이 경제 현상들에 종종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른바 인류의 문명사가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축적된 경험은, 잘 알려진 대로 본질적으로 경제적이지 않은 원인의 영향을 받았고 또 이것의 제약을 받아왔다. 예를 들어, 역사상 대부분의 나라들은 정복 덕분에 존재했다. 정복하는 이들은 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점령지에서 특권층이 됐다. 그들은 땅 소유권을 독점했고 자기 계급 사람을 성직자로 임명했다. 교육을 통제한 성직자들은 계급 구별을 영원한 제도로 정착시켰고 사람들이 사회행동을 할 때 (상당 부분 무의식적으로) 따르게 되는 가치체계를 창조했다.

Let us first consider the question from the point of view of scientific knowledge. It might appear that there are no essential methodological differences between astronomy and economics: scientists in both fields attempt to discover laws of general acceptability for a circumscribed group of phenomena in order to make the interconnection of these phenomena as clearly understandable as possible. But in reality such methodological differences do exist. The discovery of general laws in the field of economics is made difficult by the circumstance that observed economic phenomena are often affected by many factors which are very hard to evaluate separately. In addition, the experience which has accumulated since the beginning of the so-called civilized period of human history has--as is well known--been largely influenced and limited by causes which are by no means exclusively economic in nature. For example, most of the major states of history owed their existence to conquest. The conquering peoples established themselves, legally and economically, as the privileged class of the conquered country. They seized for themselves a monopoly of the land ownership and appointed a priesthood from among their own ranks. The priests, in control of education, made the class division of society into a permanent institution and created a system of values by which the people were thenceforth, to a large extent unconsciously, guided in their social behavior.

그러나 말하자면 역사적 전통은 과거의 이야기다. 토르스테인 베블린이 인간 발전의 "약탈 단계"라고 부른 것을 우리는 진정으로 넘어서지 못했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경제적 사실들은 이 단계에 속한다. 또 여기서 추출한 법칙을 다른 단계에 적용할 수도 없다. 사회주의의 진정한 목적이 인간 발전의 약탈 단계를 극복하고 전진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 단계 경제학은 미래 사회주의 사회에 빛을 제시하기 어렵다.

But historic tradition is, so to speak, of yesterday; nowhere have we really overcome what Thorstein Veblen called "the predatory phase" of human development. The observable economic facts belong to that phase and even such laws as we can derive from them are not applicable to other phases. Since the real purpose of socialism is precisely to overcome and advance beyond the predatory phase of human development, economic science in its present state can throw little light on the socialist society of the future.

둘째로, 사회주의는 사회윤리적 목적을 향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과학은 목적을 창조할 수 없다. 이것을 사람에게 주입시키는 것은 더군다나 못한다. 기껏해야 과학은 이런 목적을 이루는 도구를 제시할 뿐이다. 목적을 인식하는 것은 높은 윤리적 이상을 갖춘 사람들이며, 이 목표가 사산한 것이 아니라 활력 있는 것이라면 이를 입양해서 키우는 것은 사회의 점진적인 진화를 결정하는 많은 사람들이다.

Second, socialism is directed towards a social-ethical end. Science, however, cannot create ends and, even less, instill them in human beings; science, at most, can supply the means by which to attain certain ends. But the ends themselves are conceived by personalities with lofty ethical ideals and--if these ends are not stillborn, but vital and vigorous--are adopted and carried forward by those many human beings who, half unconsciously, determine the slow evolution of society.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사람 문제에 관한 한 과학과 과학적 방법을 과대평가하지 않아야 한다. 또 우리는 사회 조직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대해 의사 표시할 수 있는 사람이란 전문가들뿐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인간 사회가 위기를 겪고 있으며 안정성이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수없이 많다. 개인들이 크든 작든 자신 스스로가 소속된 집단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 이런 상황의 특징이다. 내가 말하는 뜻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개인적인 경험을 소개한다. 나는 최근에 지식인이며 인격자인 사람과 또 다른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다시 전쟁이 난다면 인류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을 것이라고 생각돼, 초국가 조직만이 이런 위험에서 우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내 손님은 냉철하게 말했다. "인류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왜 그렇게 반대하십니까?"

For these reasons, we should be on our guard not to overestimate science and scientific methods when it is a question of human problems; and we should not assume that experts are the only ones who have a right to express themselves on questions affecting the organization of society. Innumerable voices have been asserting for some time now that human society is passing through a crisis, that its stability has been gravely shattered. It is characteristic of such a situation that individuals feel indifferent or even hostile toward the group, small or large, to which they belong. In order to illustrate my meaning, let me record here a personal experience. I recently discussed with an intelligent and well-disposed man the threat of another war, which in my opinion would seriously endanger the existence of mankind, and I remarked that only a supra-national organization would offer protection from that danger. Thereupon my visitor, very calmly and coolly, said to me: "Why are you so deeply opposed to the disappearance of the human race?"

한 세기 전만 해도 이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하는 이들이 없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발언은 자신의 평정을 찾는 데 실패하고 성공에 대한 희망조차 잃어버린 이들이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통스런 고독과 고립의 표현인데, 요즘 많은 사람이 이런 고통을 겪고 있다. 원인이 뭘까? 탈출구는 있는가?

I am sure that as little as a century ago no one would have so lightly made a statement of this kind. It is the statement of a man who has striven in vain to attain an equilibrium within himself and has more or less lost hope of succeeding. It is the expression of a painful solitude and isolation from which so many people are suffering in these days. What is the cause? Is there a way out?

이런 질문을 제기하기는 쉽지만 어느 정도라도 확실한 답을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해볼 작정이다. 물론 나는 우리의 감정과 시도가 종종 서로 모순되고 모호하며 그래서 쉽고 간단한 수식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It is easy to raise such questions, but difficult to answer them with any degree of assurance. I must try, however, as best I can, although I am very conscious of the fact that our feelings and strivings are often contradictory and obscure and that they cannot be expressed in easy and simple formulas.

사람은 언제나 고독한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다. 고독한 존재로서 사람은 자신과 자기 주변 인물들의 존재를 지키려고 하고, 개인적인 요구를 만족시키려 하며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계발하려고 한다. 사회적 존재로서는, 주변 인물들에게서 평가받고 사랑을 받으려 하며 그들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위로하며 그들의 생활여건을 개선하려고 한다. 종종 모순적인 이런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만이 사람의 특징을 설명한다. 또 사람의 심리적 평정은 이 두 가지 유형의 노력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이 노력은 사회의 복지에도 기여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 고독한 존재라는 측면과 사회적 존재라는 측면 가운데 어느 면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나타나느냐는 주로 유전에 의해 결정될 여지가 크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발현되는 인간의 개성은 대개 그가 자란 환경과 사회 구조, 그 사회의 전통, 그리고 특정 행위들에 대한 그 사회의 평가에 따라 형성된다. 개인에게 "사회"의 추상적 개념은, 자신의 동시대인 및 이전 세대 사람 전체와 맺는 직접, 간접적인 관계의 합이다. 개인은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노력하고 일할 수 있다. 그러나 물질적이고 지적이며 감성적인 존재로서 개인은 또한 많은 부분을 사회에 의존한다. 그래서 사회의 틀 밖에서 사람을 생각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에게 음식, 옷, 집, 도구, 언어, 생각의 형태, 생각의 내용 대부분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사회"이다. 사람이 생을 유지하는 것은 "사회"라는 간단한 단어 뒤에 숨어있는 현재와 과거의 수많은 사람들이 한 일과 성과 덕분이다.

Man is, at one and the same time, a solitary being and a social being. As a solitary being, he attempts to protect his own existence and that of those who are closest to him, to satisfy his personal desires, and to develop his innate abilities. As a social being, he seeks to gain the recognition and affection of his fellow human beings, to share in their pleasures, to comfort them in their sorrows, and to improve their conditions of life. Only the existence of these varied, frequently conflicting, strivings accounts for the special character of a man, and their specific combination determines the extent to which an individual can achieve an inner equilibrium and can contribute to the well-being of society. It is quite possible that the relative strength of these two drives is, in the main, fixed by inheritance. But the personality that finally emerges is largely formed by the environment in which a man happens to find himself during his development, by the structure of the society in which he grows up, by the tradition of that society, and by its appraisal of particular types of behavior. The abstract concept "society" means to the individual human being the sum total of his direct and indirect relations to his contemporaries and to all the people of earlier generations. The individual is able to think, feel, strive, and work by himself; but he depends so much upon society--in his physical, intellectual, and emotional existence--that it is impossible to think of him, or to understand him, outside the framework of society. It is "society" which provides man with food, clothing, a home, the tools of work, language, the forms of thought, and most of the content of thought; his life is made possible through the labor and the accomplishments of the many millions past and present who are all hidden behind the small word "society."

그래서 명백한 사실은, 개인이 사회에 의존하는 것이 개미나 벌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사라질 수 없는 본성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개미와 벌의 삶 전체가 세세한 부분까지 유전적 본능에 따라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과 달리, 인간 사회의 형태와 상호관계는 아주 다양하며 변화할 수 있다. 기억, 새로운 조합을 할 수 있는 능력, 언어라는 선물이, 사람에게 생물적 요구와 무관한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발전은 전통, 조직, 문학, 과학기술적 성과, 예술작품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고 이 과정에 의식적인 생각과 요구가 개입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해준다.

It is evident, therefore, that the dependence of the individual upon society is a fact of nature which cannot be abolished--just as in the case of ants and bees. However, while the whole life process of ants and bees is fixed down to the smallest detail by rigid, hereditary instincts, the social pattern and interrelationships of human beings are very variable and susceptible to change. Memory, the capacity to make new combinations, the gift of oral communication have made possible developments among human being which are not dictated by biological necessities. Such developments manifest themselves in traditions, institutions, and organizations; in literature; in scientific and engineering accomplishments; in works of art. This explains how it happens that, in a certain sense, man can influence his life through his own conduct, and that in this process conscious thinking and wanting can play a part.

 


사람은 유전을 통해 태어날 때 생물학적 특성을 갖춘다. 여기에는 인류를 특징짓는 자연적인 요청도 포함되는데, 우리는 이를 고정되고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게다가 사람은 사는 동안 의사소통을 비롯한 다양한 통로를 통해 사회가 제시하는 문화적 특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문화적 특성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뀔 수 있는 것인 동시에, 상당한 정도까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이다. 현대 인류학의 원시문화 비교연구 덕분에 우리는 사람의 사회적 행위가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적 유형, 조직 형태에 따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됐다. 사람의 운명을 개선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람은 인류의 생물학적 특성 때문에 서로를 멸망시키거나 잔인한 자기 파괴적인 운명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저주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Man acquires at birth, through heredity, a biological constitution which we must consider fixed and unalterable, including the natural urges which are characteristic of the human species. In addition, during his lifetime, he acquires a cultural constitution which he adopts from society through communication and through many other types of influences. It is this cultural constitution which, with the passage of time, is subject to change and which determines to a very large extent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individual and society. Modern anthropology has taught us, through comparative investigation of so-called primitive cultures, that the social behavior of human beings may differ greatly, depending upon prevailing cultural patterns and the types of organization which predominate in society. It is on this that those who are striving to improve the lot of man may ground their hopes: human beings are not condemned, because of their biological constitution, to annihilate each other or to be at the mercy of a cruel, self-inflicted fate.

인간의 삶을 만족스럽게 하기 위해 사회구조와 문화적 태도를 어떻게 바꿔야하는가 하고 자문할 때는, 사람이 바꿀 수 없는 특정한 조건이 있다는 점을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생물학적 본성은 바꿀 수 없다. 게다가 지난 몇 세기동안 이룩한 기술적, 인류통계적 발전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조건들을 만들어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람이 많기 때문에, 노동과 고도로 중앙집중적인 생산 설비의 극단적인 분리는 전적으로 피할 수 없다. 개인이나 작은 집단이 자급자족할 수 있던 목가적인 시대는 영원히 사라졌다. 인류가 생산과 소비의 지구촌을 구성했다고 말하는 것은 약간 과장된 이야기일 뿐이다.

If we ask ourselves how the structure of society and the cultural attitude of man should be changed in order to make human life as satisfying as possible, we should constantly be conscious of the fact that there are certain conditions which we are unable to modify. As mentioned before, the biological nature of man is, for all practical purposes, not subject to change. Furthermore, technological and demographic developments of the last few centuries have created conditions which are here to stay. In relatively densely settled populations with the goods which are indispensable to their continued existence, an extreme division of labor and a highly-centralized productive apparatus are absolutely necessary. The time--which, looking back, seems so idyllic--is gone forever when individuals or relatively small groups could be completely self-sufficient. It is only a slight exaggeration to say that mankind constitutes even now a planetary community of production and consumption.

나는 이제 우리 시대 위기의 본질을 간략하게 지적할 수 있는 단계에 왔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개인은 자신이 사회에 의존한다는 점을 어느 때보다 더 잘 인식하게 됐다. 그러나 개인은 이 의존성을 긍정적인 자산이며 유기적 연관이며 보호해주는 힘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연적인 권리,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제적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느낀다. 게다가, 개인적인 욕구는 갈수록 강조되는 반면 원래 이보다 약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욕구는 갈수록 황폐해지는 상황이다.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간에 모든 사람은 이런 황폐화에 시달리고 있다. 이기주의의 포로가 된 인간은 불안해지고 외로우며, 순진하고 단순하며 세련되지 못한 삶의 쾌락을 추구하고 있다. 사람이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면 사회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밖에 길이 없다. 비록 이 의미가 짧고 위험한 것이기는 하지만.

I have now reached the point where I may indicate briefly what to me constitutes the essence of the crisis of our time. It concerns the relationship of the individual to society. The individual has become more conscious than ever of his dependence upon society. But he does not experience this dependence as a positive asset, as an organic tie, as a protective force, but rather as a threat to his natural rights, or even to his economic existence. Moreover, his position in society is such that the egotistical drives of his make-up are constantly being accentuated, while his social drives, which are by nature weaker, progressively deteriorate. All human beings, whatever their position in society, are suffering from this process of deterioration. Unknowingly prisoners of their own egotism, they feel insecure, lonely, and deprived of the naive, simple, and unsophisticated enjoyment of life. Man can find meaning in life, short and perilous as it is, only through devoting himself to society.

오늘날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적 무정부 상태가 악의 진정한 근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앞에는 큰 생산자 집단이 존재한다. 이들은 총체적인 노동의 과실을 강제가 아니라 법적으로 확립된 규칙에 충실해서 빼앗아내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생산 수단 곧 추가적인 자본재 뿐 아니라 소비재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총체적인 생산능력은 대부분 합법적으로 개인의 소유물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The economic anarchy of capitalist society as it exists today is, in my opinion, the real source of the evil. We see before us a huge community of producers, the members of which are unceasingly striving to deprive each other of the fruits of their collective labor--not by force, but on the whole in faithful compliance with legally established rules. In this respect, it is important to realize that the means of production--that is to say, the entire productive capacity that is needed for producing consumer goods as well as additional capital goods--may legally be, and for the most part are, the private property of individuals.

단순화를 위해 앞으로 나는 생산수단을 나눠 갖지 못한 이들을 "노동자"라고 부르겠다. 이것이 일반적인 용어사용법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은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사는 위치에 있다. 생산수단을 사용해서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재산이 될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낸다. 이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점은 실질 가치로 따진 상품과 임금의 관계다. 노동계약이 "자유롭게" 이뤄지는 한, 노동자가 받는 것은 자신이 생산한 상품의 실질 가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최소한의 필요와 자본가의 노동력 수요에 따라 결정되는데, 이는 일자리를 원하는 노동자 숫자와 관련된다. 이론적으로도 임금은 생산한 것의 가치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은 꼭 이해해야 한다. (자유 경쟁시장에서는 임금도 일반적인 상품가격과 마찬가지로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된다는 뜻: 번역자)

For the sake of simplicity, in the discussion that follows I shall call "workers" all those who do not share in the ownership of the means of production--although this does not quite correspond to the customary use of the term. The owner of the means of production is in a position to purchase the labor power of the worker. By using the means of production, the worker produces new goods which become the property of the capitalist. The essential point about this process is the relation between what the worker produces and what he is paid, both measured in terms of real value. Insofar as the labor contract is "free," what the worker receives is determined not by the real value of the goods he produces, but by his minimum needs and by the capitalists' requirements for labor power in relation to the number of workers competing for jobs. It is important to understand that even in theory the payment of the worker is not determined by the value of his product.

사적인 자본은 소수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자본가들의 경쟁 때문이다. 부분적으로는 갈수록 심해지는 노동의 분리와 기술개발이 적은 비용으로도 더 많은 생산단위를 만들도록 유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발전의 결과는 사적 자본의 과두정치(독재정치)다. 이는 민주적인 정치사회에서조차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이다. 실질적인 목적 때문에 유권자를 입법부에서 분리시킨 사적 자본가들의 재정지원을 받거나 영향을 받는 정당이 의회를 구성하게 된 이래로 이는 명백한 진실이다. 이 결과는 시민의 대표가 특권 없는 다수의 이해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현재의 조건에서는 사적 자본가들이 피치 못하게 주요 정보원(언론, 라디오, 교육 등)을 직접, 간접적으로 지배한다. 그래서 시민 각자가 객관적인 결론을 얻어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현명하게 활용하기는 너무나 어렵고, 대부분의 경우 불가능하다.

Private capital tends to become concentrated in few hands, partly because of competition among the capitalists, and partly because technological development and the increasing division of labor encourage the formation of larger units of production at the expense of the smaller ones. The result of these developments is an oligarchy of private capital, the enormous power of which cannot be effectively checked even by a democratically organized political society. This is true since the members of legislative bodies are selected by political parties, largely financed or otherwise influenced by private capitalists who, for all practical purposes, separate the electorate from the legislature. The consequence is that the representatives of the people do not in fact sufficiently protect the interests of the underprivileged sections of the population. Moreover, under existing conditions, private capitalists inevitably control, directly or indirectly, the main sources of information (press, radio, education). It is thus extremely difficult, and indeed in most cases quite impossible, for the individual citizen to come to objective conclusions and to make intelligent use of his political rights.

자본의 사적인 소유에 기초한 경제가 지배하는 상황의 특징은 다음 두 가지다. 첫째로 생산수단(자본)을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하며 소유자는 자신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처분한다. 둘째로, 노동계약은 자유롭게 이뤄진다. 물론 이런 관점에서 완전한 자본주의 사회는 없다. 특히 오랜 힘겨운 정치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이 조금은 개선된 "자유 노동계약"을 특정한 노동자 집단에 적용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로 보면, 현재 경제는 "순수한" 자본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The situation prevailing in an economy based on the private ownership of capital is thus characterized by two main principles: first, means of production (capital) are privately owned and the owners dispose of them as they see fit; second, the labor contract is free. Of course, there is no such thing as a pure capitalist society in this sense. In particular, it should be noted that the workers, through long and bitter political struggles, have succeeded in securing a somewhat improved form of the "free labor contract" for certain categories of workers. But taken as a whole, the present day economy does not differ much from "pure" capitalism.

생산은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익을 내기 위해 이뤄진다. 일할 능력이 있고 의사도 있는 사람이 모두 일자리를 얻는 장치는 없다. "실업자 군대"는 언제나 존재한다. 노동자는 상시적으로 실업을 걱정한다. 실업자나 저임 노동자는 이익을 내는 시장을 형성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소비재 생산은 제한되고 그 결과는 엄청난 곤궁이다. (물건을 살 능력이 없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그만큼 자본가는 생산을 줄이고, 이는 또 다시 가난한 이들이 물건을 사기 어렵게 만든다는 뜻: 번역자) 기술 진보는 노동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실업만 증가시키는 결과를 종종 낳는다. 자본가들의 경쟁과 연관된 이윤 동기야말로, 자본 축적과 활용의 불안정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심각한 경기 침체의 원흉이다. 무한 경쟁은 노동의 엄청난 낭비를 유발하며, 내가 위에서 언급한 개인들의 사회의식을 불구로 만든다.

Production is carried on for profit, not for use. There is no provision that all those able and willing to work will always be in a position to find employment; an "army of unemployed" almost always exists. The worker is constantly in fear of losing his job. Since unemployed and poorly paid workers do not provide a profitable market, the production of consumers' goods is restricted, and great hardship is the consequence. Technological progress frequently results in more unemployment rather than in an easing of the burden of work for all. The profit motive, in conjunction with competition among capitalists, is responsible for an instability in the accumulation and utilization of capital which leads to increasingly severe depressions. Unlimited competition leads to a huge waste of labor, and to that crippling of the social consciousness of individuals which I mentioned before.

개인을 불구로 만드는 것은 내가 보기에 자본주의의 최대 악이다. 이 악 때문에 우리의 교육체계 전반이 고통을 겪고 있다. 과장된 경쟁을 벌이는 태도가 학생들에게 주입됐고, 그래서 학생들은 미래 직업을 위한 성공을 숭배하게 됐다.

This crippling of individuals I consider the worst evil of capitalism. Our whole educational system suffers from this evil. An exaggerated competitive attitude is inculcated into the student, who is trained to worship acquisitive success as a preparation for his future career.

이런 악을 제거하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것은 사회적 목표를 추구하는 교육체계를 동반한 이른바 사회주의 경제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런 경제에서는 생산수단을 사회 전체가 소유하며 계획된 방식으로 이를 활용한다. 생산을 사회의 필요에 맞추는 계획경제는 일감을 일할 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분배할 것이고 모든 사람(남자든 여자든 어린아이든)에게 생활을 보장할 것이다. 개인의 교육은, 현재 우리 사회의 힘과 성공을 칭송하는 대신에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신장하고 동료들에 대한 책임감을 자신 속에 심으려 시도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I am convinced there is only one way to eliminate these grave evils, namely through the establishment of a socialist economy, accompanied by an educational system which would be oriented toward social goals. In such an economy, the means of production are owned by society itself and are utilized in a planned fashion. A planned economy, which adjusts production to the needs of the community, would distribute the work to be done among all those able to work and would guarantee a livelihood to every man, woman, and child. The education of the individual, in addition to promoting his own innate abilities, would attempt to develop in him a sense of responsibility for his fellow men, in place of the glorification of power and success in our present society.

그럼에도, 계획 경제가 아직은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식의 계획경제는 개인을 완전히 노예화함으로써도 달성할 수 있다. 사회주의를 달성하려면 아주 극도로 어려운 사회-정치적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 문제란, 정치, 경제적 힘의 광범한 중앙집중화를 고려할 때, 관료들이 모든 힘을 장악하고 자만해지는 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또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보호하고 이를 바탕으로 관료의 권력에 맞서는 민주적인 평형추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Nevertheless, it is necessary to remember that a planned economy is not yet socialism. A planned economy as such may be accompanied by the complete enslavement of the individual. The achievement of socialism requires the solution of some extremely difficult socio-political problems: how is it possible, in view of the far-reaching centralization of political and economic power, to prevent bureaucracy from becoming all-powerful and overweening? How can the rights of the individual be protected and therewith a democratic counterweight to the power of bureaucracy be assured?

사회주의의 목표와 문제를 분명히 하는 것은 지금 이행의 시기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자유롭고 허심탄회한 토론이 강력한 금기사항 아래 억압되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기 때문에, 이 잡지(먼슬리리뷰 = 옮긴이)의 창간은 공공에 대한 중요한 서비스라고 나는 생각한다.

Clarity about the aims and problems of socialism is of greatest significance in our age of transition. Since, under present circumstances, free and unhindered discussion of these problems has come under a powerful taboo, I consider the foundation of this magazine to be an important public service.


한글로만 된 번역본도 있습니다. 원문은 먼슬리리뷰 (www.monthlyreview.org/598einst.htm) 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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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애 (1부) - 원고료 이백원

 

  요즘 문학작품들을 찬찬히 훑고 있는 중인데, 기호상 1920년대, 30년대 작품을 다시 보는 중이다. 대부분 교과서에 많이 실린 작품들로 중요하게 평가받는 작품들인데, 김유정, 이상, 김동인 등이 이 시대 대표적 작가들이다. 그런데 이런 -유명하다고 분류되는- 작가들 말고 당시 사회주의 사상을 문학이념에 걸고, 계급문학을 옹호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던 문인들도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작가들은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트예술동맹)문학'으로 문예사조사에서 따로 분류하여 교육받았다.

 카프문학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해보도록 하고, 여기에서는 카프계열, 보다 엄밀히 말해서 계급문학을 표방하는 문인 가운데 여성작가를 살펴보려고 한다.우리나라 문학사에서는 여성의 문학작품에 대한 연구가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내 생각엔 여성의 문학작품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연구가 되는건 90년대에서야 인 것 같다.

 

 오늘은 우선 강경애란 여성 작가에 대해 짤막하게 서술해보고자 하는데, 강경애는 1930년대 활발하게 활동을 했던 여성 문인이다. 여성요절작가라는 수식어가 간혹 붙고는 하는데, 38세라는 짧은 생애로 살다갔기 때문이다. 강경애는 당시 조선에서 문인활동을 하던 작가는 아니었고, 간도에서 작품활동을 했던 작가이다. 당시 사회주의 사상-더 자세히 말해서는 계급문학-의 형태가 여러가지로 분류될 수 있는데, 그 분류 중 한가지로 국내에서 문학활동을 하지 않고, 국외에서 활동했던 작가와 그렇지 않은 문인으로 분류하는 가운데, 강경에는 전자에 분류된다. 그래서 연구 성과가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기도 하다.

 

 강경애의 작품에서는 대부분 유년시절을 비롯해 삶에서의 가난, 빈궁이라는 내용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뒷부분에 전문을 실어놓은 '원고료 이백원'이라는 작품에서도 작품 전반부에서 쉽게 이러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원고료 이백원은 생활의 어려움을 도와 줄 이백원을 타고 이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 편지글의 형식으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어려서 겪었던 가난의 설움을 되씹는 이야기와 자라면서 겪었던 수모를 현실의 문제와 연결시키는 이야기 전개되는데 작품 전반에서 빈궁으로부터 느껴지는 상대적 박탈감이 묘사되어 있는 편이다. 강경애의 또다른 면에서는 이러한 것이 여성인 스스로의 위치에서 느껴지는 것들로 서술된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여성해방의 입장에서 글을 서술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성인 자신의 시각에서 사회를 보고, 문제를 보며 그것을 계급의 입장에서 풀어나가려 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강경애는 아래의 원고료 이백원의 글보다는 지하촌, 인간문제 등의 작품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지하촌'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 빈민촌을 배경으로 궁핍한 서민의 참담한 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 식민지시대의 암울한 사회현실을 날카롭게 고발한 현실참여적인 작품이다. 예전에 읽었던 작품이라 정확하게 기억은 안나는데, 작품 첫 시작에 지렁이가 강렬한 햇빛에 수분이 짜이고 짜여져서 괴롭게 비틀어지는 모습이 처절하게 묘사되었던 작품이었던 것 같다.(아닌가?ㅡ.ㅡ;;뭐더라...) '인간문제'의 경우에는 좀 더 작품성이 뛰어나다고 볼 수 있는데, '원고료 이백원'보다 여성문인으로서의 작품 서술이 더욱 두드러지는 작품인 것 같다. 이 두 작품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서술하는 것으로 하겠다.

 

                                  

> 작가소개

  강경애(姜敬愛 1907-1943)

 여류소설가. 황해도 장연 출생. 1925년 평양 숭의여전에서 수학하였다.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후에 간도로 이주, 중앙 문단과 떨어져서도 꾸준히 창작활동을 계속하여 "부자(父子)"(1932), "채전(菜田)"(1932), "소금"(1932) 등을 발표했다. 1933년 <동아일보>에 장편 '인간문제'를 연재했다. 1942년에 귀국, 병사(病死)했다. 작품의 성격은 밝은 면보다 어두운 면, 상류사회보다는 하층 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데 뛰어나다. 이외에 "지하촌"(1936), "해고"(1936), "산남(山男)"(1936) 등이 있다. 불우한 어린 시절과 문학 수업기에 받은 양주동의 복고적, 중도적 국민문학론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이 맞물려 당대 식민지 사회의 모순에 민감하게 눈을 떴고 간도 체험, 각종 사회운동의 체험이 현실 인식을 역사 의식으로 상승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여류작가로서의 독특한 시선으로 식민지의 질곡 속에서 이중으로 수탈 당하던 하층 여성의 문제를 작품화하는 등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였다. 대표작 "인간 문제"에서는 농민에서 노동자로, 노동자에서 다시 각성된 노동자로, 그리고 결국은 조직적 활동가로 변모해 가는 식민지의 투쟁적 인간상을 그렸고 카프의 노동소설을 능가하는 생생한 묘사와 역사 의식을 보여 주었다. 강경애의 현실 대응 양상의 변모 과정은 30년대 사회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즉 미래에 대한 전망을 지닐 수 있을 때는 현실을 극복하여 새로운 전체적 삶을 추구하려 하였으며 정세가 악화되어 전망을 상실한 경우에도 혼돈이나 불안 상태에 빠지지 않고 현실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력을 발휘한 비판적 리얼리스트라고 할 만하다.

 

 

 

 

 

 

 

원고료 이백원(原稿料 二百圓)

                                                                                            강 경 애

 

친애하는 동생 K야.
간번 너의 편지는 반갑게 받아 읽었다. 그리고 약해졌던 너의 몸도 다소 튼튼해짐을 알았다. 기쁘다. 무어니무어니해도 건강밖에 더 있느냐.
K야 졸업기를 앞둔 너는 기쁨보다도 괴롬이 앞서고 희망보다는 낙망을 하게 된다고? 오냐 네 환경이 그러하니만큼 응당 그러하리라. 그러나 너는 그 괴롬과 낙망 가운데서 당연히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기쁘고 희망에 불타는 새로운 길을 발견해야 한다.
K야 네가 물은 바 이 언니의 연애관과 내지 결혼관은 간단하게 문장으로 표현할 만한 지식이 아직도 나는 부족하구나. 그러니 나는 요새 내가 지내는 생활 전부와 그 생활로부터 일어나는 나의 감정 전부를 아무 꾸밀 줄 모르는 서투른 문장으로 적어 놀 터이니 현명한 너는 거기서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하여 다고.
K야 내가 요새 D신문에 장편소설을 연재하여 원고료 이백여 원을 받은 것은 너도 잘 알지. 그것이 내 일생을 통하여 처음으로 많이 가져 보는 돈이구나. 그러니 내 머리는 갑자기 활기를 얻어 공상을 다하게 되더구나.
K야 너도 짐작하는지 모르겠다마는! 나는 어려서부터 순조롭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고 또 커서까지라도 순경에 처하지 못한 나는 그나마 쥐꼬리만큼 배운 이 지식까지라고 우리 형부의 덕이었니라. 그러니 어려서부터 명일 빔 한 벌 색들여 못 입어 봤으며 먹는 것이란 언제나 조밥이었구나. 그러고 학교에 다니면서도 맘대로 학용품을 어디 써 보았겠니. 학기초마다 책을 못 사서 울고 울다가는 겨우 남의 낡은 책을 얻어 가졌으며 종이와 붓이 없어 나의 조고만 가슴은 그 몇 번이나 달막거리었는지 모른다.
K야 나는 아직도 잘 기억한다. 내가 학교 일년급 때 일이다. 내일처럼 학기시험을 치겠는데도 종이 붓이 없구나. 그래서 생각다 못해서 나는 옆의 동무의 것을 훔치었다가 선생님한테 얼마나 꾸지람을 받았겠니. 그러구 애들한테서는 애! 도적년 도적년 하는 놀림을 얼마나 받았겠니. 더구나 선생님은 그 큰 눈을 부라리면서 놀 시간에도 나가 놀지 못하게 하고 벌을 세우지 않겠니. 나는 두 손을 벌리고 유리창 곁에 우두커니 서 있었구나. 동무들은 운동장에서 눈사람을 맨들어 놓고 손뼉을 치며 좋아하지 않겠니. 나는 벌을 서면서도 눈사람의 그 입과 눈이 우스워서 킥하고 웃다가 또 울다가 하였다.
K야 어려서는 천진하니까 남의 것을 훔칠 생각은 했지만 소위 중학교까지 오게 된 나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그러한 맘은 먹지 못하였다. 형부한테서 학비로 오는 돈은 겨우 식비와 월사금밖에는 못 물겠더구나. 어떤 때는 월사금도 못 물어서 머리를 들고 선생님을 바루 보지 못한 적이 많았으며 모르는 학과가 있어도 맘놓고 물어 보지를 못했구나. 그러니 나는 자연히 기운이 죽고 바보같이 되더라. 따라서 친한 동무 한 사람 가져 보지 못하였다. 이렇게 외로운 까닭에 하느님을 더 의지하게 되었으니 나는 밤마다 기숙사 강당에 들어가서 목을 놓고 울면서 기도하였다. 그러나 그 괴롬은 없어지지 않고 날마다 털목도리 자켓을 짠다 시계를 가진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것이 우습게 생각되지마는 그때는 왜 그리도 부러운지 눈물이 날 만큼 부럽더구나. 그 푹신푹신한 털실로 목도리를 짜는 동무를 보면 나도 모르게 그 실을 만져 보다는 앞서는 것이 눈물이더구나. 여학교 시대가 아니구서는 맛보지 못하는 이 털실의 맛! 어떤 때 남편은 당신은 왜 자켓 하나 짤 줄을 모루? 하고 쳐다볼 때마다 나는 문득 여학교 시절을 회상하며 동무가 가진 털실을 만지며 간이 짜르르하게 느끼던 그 감정을 다시 한 번 느끼곤 하였다.
K야 어느 여름인데 내일같이 방학을 하고 고향으로 떠날 터인데 동무들은 떠날 준비에 바쁘구나. 그때는 인조견이 나지 않았을 때이다. 모두가 쟁친 모시 치마 적삼을 잠자리 날개처럼 가볍게 해 입고 흰 양산 검은 양산을 제각기 사더구나. 그때에 나는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더라. 무엇보다도 양산이 가지고 싶어 영 죽겠더구나. 지금은 염집 부인들도 양산을 가자지만 그때야말로 여학생이 아니구서는 양산을 못 가지는 줄로 알았다. 그러니 양산이야말로 무언중에 여학생을 말해 주는 무슨 표인 것같이 생각되었니라. 철없는 내 맘에 양산을 못 가지면 고향에도 가고 싶지를 않더구나. 그래서 자꾸만 울지 않었겠니. 한방에 동무 하나가 이 눈치를 채었음인지 혹은 나를 놀리느라구 그랬는지는 모르나 대 부러진 낡은 양산 하나를 어대서 갖다 주더구나. 나는 그만 기뻤다. 그러나 어쩐지 화끈 달며 냉큼 그 양산을 가질 수가 없더구나. 그래서 새침하고 앉았노라니 동무는 킥 웃으며 나가더구나. 그 동무가 나가자마자 나는 얼른 양산을 쥐고 펴 보니 하나도 성한 곳이 없더라. 그때 나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울분과 슬픔이 목이 막히도록 치받치더구나. 그러나 나는 그 양산을 버리지는 못하였다.
  K야 나는 너무나 딴 길로 달아나는 듯싶다. 이만하면 나의 과거 생활을 너는 짐작할 터이지.... 나의 현재를 말하려니 말하기 싫은 과거까지 들추어 놓았다. 그런데 K야 아까 말한 그 원고료가 오기 전에 나는 밤 오래도록 잠을 못 이루고 그 돈으로 무엇을 할까? 하고 생각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말이지만 위선 겨울이니 털외투나 하고 목도리, 구두, 내 앞니가 너무 새가 넓으니 가늘게 금니나 하고 가늘게 금반지나 하고 시계나.... 아니 남편이 뭐랄지 모르지. 그래두 뭘 내 벌어서 내 해 가지는데야 제가 입이 열이니 무슨 말을 한담. 이번 기회에 못하면 나는 금시계 하나도 못가지게― 눈 딱 감고 한다. 그러고 남편의 양복이나 한 벌 해 줘야지, 양복이 그 꼴이니. 나는 이렇게 깡그리 생각해 두었구나. 그런데 어느 날 원고료가 내 손에 쥐어졌구나. K야 남편과 나와는 어쩔 줄을 모르게 기뻐했다.
그날 밤 나는 유난히 빛나는 등불을 바라보면서
"이 돈으로 뭘 하는 것이 좋우?"
남편의 말을 들어 보기 위하여 나는 이렇게 물었구나. 남편은 묵묵히 앉았다가 혼자 하는 말처럼
"거참 우리 같은 형편에는 돈이 없는 것이 오히려 맘편하거던.... 글쎄 이왕 생긴 것이니 써야지. 위선 제일 급한 것이 응호 동무를 입원시키는 게지...."
나는 이같이 뜻밖의 말에 앞이 아뜩해지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더구나. 그러고 나를 쳐다보는 남편의 그 얼굴이 금시로 개 모양 같고 또 그 눈이 예전 소눈깔 같더구나.
"그러고 다음으로는 홍식의 부인이지. 이 겨울 동안은 우리가 돌봐야지 어쩌겠수?"
나는 더 이상 남편의 말을 듣고 싶지 않더라. 그래서 머리를 돌려 저편 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구나. 물론 남편의 동지인 응호라든지 혹은 같은 친구인 홍식의 부인이라든지 나 역시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는 배는 아니오 그래서 이 돈이 오기 전까지는 우리의 힘 미치는 데까지는 도와주고 싶은 맘까지 가졌지만 그러나 막상 내 손에 이백여 원이라는 돈을 쥐고 나니 그때의 그 생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더구나. 어쩔 수 없는 나의 감정이더라. 남편은 대답이 없는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약간 거세인 음성으로,
"그래 당신은 그 돈을 어떻게 썼으면 좋을 듯싶소?"
그 물음에 나는 혀를 깨물고 참았던 눈물이 샘솟듯 쏟아지더구나. 그 순간에 남편이야말로 돌이나 깎아논 듯 그렇게도 답답하고 안타깝게 내 눈에 비취어지더구나. 무엇보다도 제가 결혼 당시에 있어서도 남들이 다하는 결혼반지 하나 못해 주었고 구두 한 켤레 못 사주지 않었겠니. 물론 그것이야 제가 돈이 없어서 그리한 것이니 내가 그만한 것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돈이 생긴 오늘에 그것도 남편이 번 것도 아니오 내 손으로 번 돈을 가지고 평생의 원이던 반지나 혹은 구두나를 선선히 해 신으라는 것이 떳떳한 일이 아니겠니. 그런데 이 등신 같은 사내는 그런 것은 염두에도 먹지 않는 모양이더라. 나는 이것이 무엇보다도 원망스러웠다. 그러고 지금 신는 구두도 몇 해 전에 내가 중이염으로 서울 갔을 때 남편의 친구인 김경호가 그의 아내가 신다가 벗어 논 구두를 자꾸만 신으라구 하더구나. 내 신발이 오죽잖아야 그리했겠니. 그때 나의 불쾌함이란 말할 수 없었다. 사람의 맘은 일반이지 낸들 왜 남이 신다 벗어논 것을 신고 싶겠니. 그러나 내 신발을 굽어 볼 때는 차마 딱 잘라 거절할 수는 없더구나. 그래서 그 구두를 둘러보니 구멍난 곳은 없더라. 그래서 약간 신고 싶은 맘이 있지만 남편이 알면 뭐라고 할지 몰라 그 다음으로  남편에게 편지를 했구나. 며칠 후에 남편에게서는 승낙의 편지가 왔겠지. 그래서 나는 그 구두를 신게 되지 않았겠니. 그러나 항상 그 구두를 볼 때마다 나는 불쾌한 맘이 사라지지 않더구나. 그런데 오늘밤 새삼스레 그 구두를 빌어 신던 그때의 감정이 목구멍까지 치받치며 참을 수 없이 울음이 응응 터지는구나. 나는 마침내 어린애같이 입을 벌리고 울지 않었겠니. 남편은 벌덕 일어나며 윙 소리가 나도록 나의 뺨을 후려치누나. 가뜩이나 울분에 못이겨 울던 나는 악이 있는 대로 쓸어나더구나.
"왜 때려 날 왜 때려!"
나는 달려들지 않었겠니. 남편은 호랑이 눈 같은 눈을 번쩍이며 재차 달려들더니 나의 머리끄댕이를 치는 바람에 등불까지 왱그렁 쨍 하고 깨지더구나. 따라서 온 방안에 석유내가 확 뿜기누나.
"죽여라. 죽여라."
나는 목이 메어 소리쳤다. 이제야말로 이 사나이와는 마지막이다― 싶더라. 남편은 씨근벌덕이며
"응 너 따위는 백 번 죽여 싸다. 내 네 맘을 모르는 줄 아니. 흥 돈푼이나 생기니까 남편을 남편같이 안 알구. 에이 치사한 년 가라! 그 돈 가지고 내일 네 집으로 가. 너 같은 치사한 년과는 내 못 살아. 왼 여우 같은 년.... 너도 요새 소위 모던껄이라는 두리홰눙년이 되고 싶은 게구나. 아 일류 문인으로서 그리해야 하는 게지. 허허 난 그런 일류 문인의 사내 될 자격은 못 가졌다. 머리를 지지고 볶고, 상판에 밀가루 칠을 하구 금시계에 금강석 반지에 털외투를 입고 입으로만 아! 무산자여 하고 부르짖는 그런 문인이 되고 싶단 말이지. 당장 나가라!"
내 손을 잡아 끌어내누나. 나는 문밖으로 쫓기어 났구나.
  K야 북국의 바람이 얼마나 찬 것은 말할 수 없다. 내가 여기 온 지 사개성상을 맞이했건만 그날 밤 같은 그러한 매서운 바람은 맛보지 못하였다. 왼 세상이 얼음덩이로 된 듯하더구나. 쳐다보기만 해도 눈등이 차오는 달은 중천에 뚜렷한데 매서운 바람결에 가루눈이 씽씽 날리누나. 마치 예리한 칼끝으로 내 피부를 찌르는 듯 내 몸에 부딪치는 눈발이 그렇게 따갑구나. 나는 팔장을 찌르고 우두커니 눈 위에 서 있었다. 그때에 나의 머리만 너무나 많은 생각으로 터질 듯하더구나. 어떻게 하나? 나는 이 여러 가지 생각 중에서 어떤 결정적 태도를 취하려고 이렇게 중얼거리며 머리속에 돌아가는 생각을 한 가지씩 붙잡아 내었다. 제일 먼저 내달아오는 것이 저 사나이와는 이젠 못 사는 게다. 금을 줘도 못 사는 게다. 그러면 나는 어떻거나. 고향으로 가나? 고향... 저 년 또 다 살았나, 글쎄 그렇지 며칠 살겠지 저런 화냥년, 하고 비웃는 고향 사람들의 얼굴과 어머니의 안타까워하는 모양! 나는 흠칫 하였다. 그러면 서울로 가서 어느 신문사나 잡지사에 취직을 해? 종래의 여기자들이 염문만 퍼친 것을 보아 나 역시 별다른 인간이 어떻거나, 동경으로 가서 공부나 좀 해봐. 학비는 무엇이 대구 내 처지로서는 공부가 아니라 타락 공부가 될 것 같다. 나는 이러한 결론을 얻을 때 어쩐지 이 세상에서 버림을 받은 듯 나는 여기를 가나 저기를 가나 누가 반가이 맞받아 줄 사람이라구는 없는 듯하구나. 그나마 호랑이같이 씨근거리며 저 방안에 앉아 있을 저 사나이가 아니면 이 손을 잡아 줄 사람이 없는 듯하구나.
  K야 이것이 애정일까? 무엇일까. 나는 그때 또다시 더운 눈물을 푹푹 쏟았다. 동시에 그 호랑이 같은 사나이가 넙쩍넙쩍 지껄이던 말을 문득 생각하였다. 그리고 홍식의 부인이며 그 어린것이 헐벗은 모양, 또는 뼈만 남은 응호의 얼굴이 무시무시할이만큼 떠오르누나. 남편을 감옥에 보내고 떠는 그들 모자! 감옥에서 심장병을 얻어가지고 나와서 신음하는 응호! 내 손에 쥐어진 이백여 원... 이것이면 그들을 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 몸이 성하다. 그러고 헐벗지는 않았다. 이 위에 무엇을 더 바라는 것이 허영 그것이 아니냐! 나는 갑자기 이때까지 어떤 위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K야 나와 같은 처지에서 금시계 금반지 털외투가 무슨 소용이 있는 게냐. 그것을 사는 돈으로 동지의 한 생명을 구원할 수 있다면 구원하는 것이 얼마나 떳떳한 일이냐. 더구나 남편의 동지임에랴. 아니 내 동지가 아니냐. 나는 단박에 문앞으로 뛰어갔다.
"여보 나 잘못했소."
뒤미쳐 문이 홱 열리드구나. 그래서 나는 뛰어들어가 남편을 붙들었다.
"여보 나 잘못했소. 다시는 응."
목이 메어 울음이 쓸어 나왔다. 이 울음은 아까 그 울음과는 아주 차이가 있는 울음이었던 것만은 알아다고. K야 남편은 한숨을 푹 쉬면서 내 머리를 메만진다.
"당신의 맘을 내 전연히 모르는 배는 아니오. 단벌 치마에 단벌 저고리를 입고 있으니.... 그러나 벗지는 않았지. 입었지. 무슨 걱정이 있소. 그러나 응호 동무라든가 홍식의 부인을 보구려. 그래 우리 손에 돈이 있으면서 동지는 앓아 죽거나 굶어 죽거나 내버려 둬야 옳단 말이오.... 그러기에 환경이 같아야 하는 게야. 환경이. 나부터라도 그 돈이 생기기 전과는 확실히 다르니까."
남편은 입맛을 다시며 잠잠하다. 그도 나 없는 동안에 이리저리 생각해 본 후의 말이며 그가 그렇게 분풀이를 한 것도 내게 함보다는 자기 자신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쾌한 생각을 제어하고저 함이었던 것을 나는 알 수가 있었다. 나는 도리어 대담해지며 가슴에서 뜨거운 불길이 확 일어나더구나.
"여보 값 헐한 것으로 우리 옷이나 한 벌씩하고 쌀이나 한 말 나무나 한 바리 사구는 그들에게 논아 줍시다! 우리는 앞으로 또 벌지 않겠소."
남편은 와락 나를 끌어 안으며
"잘 생각했소!"
  K야 네가 지루할 줄도 모르고 내 말만 길게 늘어놓았구나. 너는 지금 졸업기를 앞두고 별의별 공상을 다할 줄 안다. 물론 그 공상도 한때는 없지 못할 것이니 나는 결코 너의 그 공상을 나무라려고 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공상에서 한 보 뛰어나와서 현실에 착안하여라.
  지금 삼남의 이재민은 어떠하여? 그리운 고향을 등지고 쓸쓸한 이 만주를 향하여 몇 만의 군중이 달려오고 있지 않느냐. 만주에 와야 누가 그들에게 옷을 주고 밥을 주더냐. 그러나 행여 고향보다는 날까 하고 와서는 처자는 요릿간에 혹은 부호의 첩으로 빼앗기우고 울고불고하며 이 넓은 벌을 헤매이지 않느냐. 하필 삼남의 이재민뿐이냐. 요전에 울릉도에서도 수많은 군중이 남부여대하여 원산에 상륙하지 않었더냐. 하여간 전조선의 빈한한 군중은 아니 전세계의 무산 대중은 방금 기아선상에서 헤매이고 있는 것을 너는 아느냐 모르느냐.
  K야 이 간도는 토벌단이 들어밀리어서 지금 한창 총소리와 칼소리에 전 대중이 공포에 떨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농민들은 들에서 농사를 짓지 못하였으며 또 산에서 나무를 베이지 못하고 혹시 목숨이나 구해 볼까하여 비교적 안전 지대인 용정시와 국자가 같은 도시로 몰려드나 장차 그들은 무엇을 먹고 살겠느냐. 이곳에서는 개목숨보다도 사람의 목숨이 헐하구나.
K야 너는 지금 상급학교에 가게 되지 못한다고 혹은 스위이트 호움을 이루게 되지 못한다고 비관하느냐? 너의 그러한 비관이야말로 얼마나 값없는 비관인가를 눈 감고 가만히 생각해 보아라. 네가 만일 어떠한 기회로 잠시 동안 너의 이상하는 바가 실현될지 모르나 그러나 그것은 잠깐동안이고 너는 또다시 대중과 같은 그러한 처지에 서게 될 터이니 너는 그때에는 그만 자살하려느냐.
  K야 너는 책상 위에서 배운 그 지식은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 이제야말로 실천으로 말미암아 참된 지식을 얻어야 할 때이다. 그리하여 너는 오직 너의 사회적 가치(社會的價値)를 향상시킴에 힘써야 한다. 이 사회적 가치를 떠난 그야말로 교환가치(交換價値)를 향상시킴에만 몰두한다면 낙오자요 퇴패자이다. 이것은 결코 너를 상품시 혹은 물건시 하는 데서 하는 말이 아니오. 사람이란 인격상 취하는 방면도 이러한 두 방면이 있다는 것을 네게 알려 주고자 함이다.        (193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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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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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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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기 장수 설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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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귀 설화(1)

  지하국 대적 퇴치 설화(1)

  해명 태자 설화(1)

  호원(1)

  화왕계(1)

 

 ■ 패관 문학

  경설(6)

  이옥설(2)

  슬견설(2)

  차마설(1)

  청학동(1)

  토실을 허문 데 대한 설(1)

 

 ■ 가전체

  공방전(5)

  국순전(4)

  국선생전(2)

  

 ■ 민속극

  양주 별산대 놀이(6)

  봉산 탈춤(6)

  통영 오광대(2)

  꼭두각시 놀음(1)

  동래들놀음(1)

  송파 산대놀이(1)

  수영야류(1)

  하회 별신굿 탈놀이(1)

 

 ■ 판소리

  박타령(11)

  심청가(4)

  열녀 춘향 수절가(2)

  수궁가(2)

  적벽가(1)

  토별가(1)

  ■ 고대 비평

  도산십이곡 발(1)

  서포만필(1)

 

 ■ 고대 소설

  이생규장전(12)

  양반전(9)

  구운몽(6)

  박씨전(5)

  사씨남정기(5)

  춘향전(5)

  홍길동전(5)

  유충렬전(3)

  심청전(3)

  임진록(3)

  장끼전(3)

  토끼전(2)

  호질(2)

  광문자전(1)

  만복사저포기(1)

  명주보월빙(1)

  민옹전(1)

  서동지전(1)

  숙영낭자전(1)

  숙향전(1)

  예덕선생전(1)

  용부전(1)

  운영전(1)

  임경업전(1)

  전우치전(1)

  조웅전(1)

  콩쥐팥쥐전(1)

  화사(1)

  허생전(1)

 

 ■ 고대 수필

  규중 칠우 쟁론기(3)

  조침문(3)

  주옹설(3)

  한중록(3)

  언간(2)

  계축일기(1)

  곡목설(1)

  김백곡의 '독수기'(1)

  병자일기(1)

  산성일기(1)

  수염 잡고 손 맞는 주인(1)

  수오재기(1)

  예성야기화(1)

  왕오천축국전(1)

  이야기꾼(1)

  초조장서(1)

  추재집(1)

  토황소격문(1)

  통곡할 만한 자리(1)

 

개화 가사

 애국하는 노래(4)

 동심가(2)

 애국가[김철영](1)

 애국가[최돈성](1)

 가요풍송(1)

 보강결(1)

 오라 오라 창의소로 돌아오

라(1)

 

창가 가사

 권학가(1)

 경부철도노래(1)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10)

 

민요

 아리랑 타령(1)

 

현대 시조

 난초(3)

 개화(2)

 달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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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오라(1)

 단란(1)

 동백(1)

 매화(1)

 백자부(1)

 박연폭포(1)

 벽공(1)

 봉선화(1)

 사향(1)

 살구꽃 핀 마을(1)

 서해상의 낙조(1)

 소경 되어지이다(1)

 조국(1)

 황진이 별곡(1)

 

현대시

 껍데기는 가라(10)

 절정(10)

 귀천(9)

 님의 침묵(9)

 향수(9)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8)

 그 날이 오면(7)

 바다와 나비(7)

 꽃[김춘수](6)

 농무(6)

 우리가 물이 되어(6)

 유리창-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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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5)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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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경의 밤(3)

 깃발(3)

 꽃덤불(3)

 꽃을 위한 서시(3)

 나비의 여행(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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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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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란이 피기까지는(3)

 목계 장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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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 수 없어요(3)

 엄마 걱정(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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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께서 부르시면(3)

 장수산-1(3)

 저녁눈(3)

 저녁에(3)

 저문 강에 삽을 씻고(3)

 참회록(3)

 청노루(3)

 초혼(3)

 푸른 하늘을(3)

 피아노(3)

 휴전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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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백석](2)

 고향[정지용](2)

 고향의 감나무(2)

 귀촉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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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2)

 김광섭 시인에게(2)

 길[김기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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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왕이로소이다(2)

 나비와 철조망(2)

 남으로 창을 내겠소(2)

 너에게 묻는다(2)

 논개(2)

 달·포도·잎사귀(2)

 동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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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슴 대길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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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은 간다(2)

 봄은 고양이로다(2)

 불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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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평역에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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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이 기쁨에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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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야 누나야(2)

 여승(2)

 오감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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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음이 타는 강(2)

 윤사월(2)

 접동새(2)

 찬송(2)

 청포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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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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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강에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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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의 손을 놓고(1)

 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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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렌지(1)

 오매 단풍 들겄네(1)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1)

 와사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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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십리(1)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1)

 우리가 눈발이라면(1)

 우리 집(1)

 운동(1)

 웃은 죄(1)

 유월[김달진](1)

 유월[박태일](1)

 은수저(1)

 의자-7(1)

 이 가문 날에 비구름(1)

 이 사진 앞에서(1)

 이중섭-2(1)

 일월(1)

 자수(1)

 자화상[노천명](1)

 젊은 손수 운전자에게(1)

 정념의 기(1)

 조그만 사랑 노래(1)

 종소리(1)

 진이의 노래(1)

 채석장에서(1)

 청솔 그늘에 앉아(1)

 춘신(1)

 춘향유문(1)

 타고르의 시 'Gadenisto'를 읽

고(1)

 파랑새(1)

 파장(1)

 파초(1)

 폭포[김수영](1)

 폭포[이형기](1)

 폭풍(1)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1)

 풍장-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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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숙(1)

 한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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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1)

 

신소설

 금수회의록(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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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국부인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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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두, 아름다운 이미지의 변주(1)

 도상의 문학-출발의 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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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학적 상상력의 명암(1)

 상이 군인에게서 얻은 영감과 외나무

다리의 결합(1)

 생태학적 상상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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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3)

 토지(3)

 화수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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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염 소나타(2)

 나목(2)

 논 이야기(2)

 눈길(2)

 닳아지는 살들(2)

 모래톱 이야기(2)

 모범 경작생(2)

 목넘이 마을의 개(2)

 뫼비우스의 띠(2)

 바비도(2)

 배따라기(2)

 복덕방(2)

 봄 봄(2)

 사평역(2)

 산(2)

 소나기(2)

 수난 이대(2)

 수라도(2)

 술 권하는 사회(2)

 옥상의 민들레꽃(2)

 압록강은 흐른다(2)

 요한 시집(2)

 중국인 거리(2)

 징소리(2)

 한계령(2)

 홍염(2)

 감자 먹는 사람들(1)

 건방진 신문팔이(1)

 검은 상처의 블루스-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

 고향[이기영](1)

 관촌수필-화무십일(1)

 그 섬에 가고 싶다(1)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1)

 금 따는 콩밭(1)

 김 약국의 딸들(1)

 꿈 하늘(1)

 나무들 비탈에 서다(1)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1)

 너와 나만의 시간(1)

 독짓는 늙은이(1)

 등신불(1)

 땡볕(1)

 물레방아(1)

 미스터 방(1)

 민족의 죄인(1)

 임꺽정(1)

 돌다리(1)

 배반의 여름(1)

 봄바람(1)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1)

 북간도(1)

 B사감과 러브레터(1)

 비 오는 날[이연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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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수(1)

 삼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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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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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한 날의 행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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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십시오(1)

 들국화(1)

 마고자(1)

 매화(1)

 매화찬(1)

 멋(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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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없는 세상 멋있는 사람(1)

 목마른 계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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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망이 깎던 노인(1)

 백범일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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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남꽃(1)

 설해목(1)

 세기가 닫히는 저 장려한 빛에 잠겨-

 석모도(1)

 쇠붙이와 강철 시대의 봄을 맞으면서(1)

 수필의 철학성(1)

 슬픔에 대하여(1)

 시골 한약방(1)

 아리랑과 정선(1)

 여성이여, 테러리스트가 되라(1)

 영혼의 모음-어린 왕자에게 보내는 편지

(1)

 오월의 낙화암(1)

 외갓집 가는 길(1)

 외할매 생각(1)

 욕설의 리얼리즘(1)

 잃어버린 동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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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화(1)

 중국 견문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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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조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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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로 걸어온 길(1)

 

희곡 / 뮤지컬 대본

 토막(12)

 원고지(9)

 동승(8)

 만선(5)

 파수꾼(5)

 불모지(4)

 맹 진사 댁 경사(3)

 새야 새야 파랑새야(3)

 산불(2)

 성난 기계(2)

 소(2)

 결혼(1)

 국물 있사옵니다(1)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1)

 명성황후(1)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1)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1)

 제향날(1)

 춘풍의 처(1)

 태양을 향하여(1)

 

시나리오 / 드라마 대본

 서편제(7)

 오발탄(5)

 공동 경비 구역 JSA(3)

 시집 가는 날(3)

 유관순(2)

 날아라 병아리-학교Ⅳ 14회(1)

 내 마음의 풍금(1)

 미술관 옆 동물원(1)

 서울의 달(1)

 아버지의 바다(1)

 아리랑(1)

 어디로 가나(1)

 오늘 너에게 세상을 읽어 준다(1)

 우리는 지금 반란을 꿈꾼다(1)

 이수일과 심순애(1)

 천둥 소리(1)

 태조 왕건(1)

 8월의 크리스마스(1)

 편지(1)

 

 가지 않은 길(7)

 수선화(7)

 가을날(6)

 아프리카(6)

 시(5)

 기탄잘리(4)

 황무지(3)

 가을의 노래(2)

 검은 여인(2)

 바닷가에서(2)

 오디세이아(2)

 일리아드(2)

 가을의 흥취-1,2(1)

 고향(1)

 동방의 등불(1)

 무지개(1)

 알바트로스(1)

 애너벨 리(1)

 이니스프리의 호수의 섬(1)

 이 밤 나는 가장 슬픈 시를 쓸 수 있으리(1)

 장미의 속(1)

 켄터베리 이야기(1)

 풀벌레(1)

 

설화 / 소설

 아큐정전(10)

 돈키호테(6)

 변신(6)

 노인과 바다(5)

 목걸이(5)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5)

 삼국지연의(3)

 아라비안나이트(3)

 어떤 날(3)

 그리스 로마 신화(2)

 프로메테우스(2) 

 가르강튀아의 팡타그뤼엘(1)

 걸리버 여행기(1)

 고리오 영감(1)

 로데시아 발 기차(1)

 백 년 동안의 고독(1)

 산문으로 쓴 환상시(1)

 수레바퀴 아래서(2)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2)

 의사 지바고(1)

 쥘르 삼촌(1)

 테스(1)

 

희곡

 햄릿(9)

 인형의 집(6)

 세일즈맨의 죽음(4)

 고도를 기다리며(3) 

 베니스의 상인(2)

 안타고네(1)

 파우스트(1)

 

수필 / 평론

 우리는 결국 모두 형제들이다(4)

 모자 철학(3)

 슬픔에 관하여(2)

 대화에 대하여(1)

 시간을 아껴라(1)

 아버지의 뒷모습(1)

 안네의 일기(1)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1)

 우리 손으로 만든 영화(1)

 유리창 안에서(1)

 이탈리아 기행(1)

 진주만의 수업(1)

 

 

하아...문제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할꺼냐는거지...

이건 정말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거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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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끝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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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는

별 다를 거 없이 살았다.

 

 

일상이 매일 별 다를게 없으니 날짜 가는줄도 잘 모른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주말이 다 되었다니...쩝

 

 

일주일동안 책 한권 붙들고 종이가 뚫어져라 쳐다봤더니

눈에서 물이 죽죽 나온다.

눈물을 흘리는게 아니라 가만히 있으면 눈에서 물이 짜지는(?) 소리가 난다.ㅋㅋㅋ

난 처음엔 코가 막혀서 잘못 들리는 건가 싶었는데

이게 웬일. 코는 멀쩡한데 눈에서 막 물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

쿠헬헬...이러다 눈알이 빠지거나 급기야 눈에서 빔을 쏘지 않을까?

 

아...금방 블로그를 쓰다가 이도 아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별로 먹는 것도 없는데 왜 이랴...

 

 

거의 하루종일은 아니고^^;; 열 두시간 가량을 대부분 움직이지 않고 한 자리에 앉아

책을 보고 있으니까 체력소모도 크지 않고

그러니까 배도 고프지않는다.

 

헐...평소 내가 먹는 양을 아는 사람들은 이 말을 들으면 기절초풍할지 모른다.

요즘엔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거 아니야?하고 ㅋㅋ

하루에 두끼? 이건 정말 꼭 꼭 챙겨먹는거다.

위가 한번 아파보고 난 이후로는 밥 먹는 시간은 잘 챙기는 편이다.

 

대신 입안이 텁텁해지기 때문에 양치질은 자주 하게 됐다.

눈이 피로하거나 공기가 탁하다고 느껴질 때엔 벌떡 일어나

양치질을 하고 오니까 하루에 네 다섯번은 양치질을 하게 된 것 같다.

조그만 치약을 들고 다녔었는데,

벌써 한 통 다썼다.

제길...이걸 다시 채워서 써야하나, 큰걸 들고 다니기엔 민망하고 새걸 사기엔 돈 아깝고.ㅋㅋ

 

아...그리고 엉덩이에 진물이 나지 않을까 심히 염려되어

방석을 구입해볼 생각이다.ㅋㅋㅋ

호오...거의 고시원에 들어가야 할 수준이구먼.

 

 

하루동안 내가 먹는 것은 밥 두 그릇, 반찬, 그리고 커피 한잔, 물 두컵 정도.

흐음...근데 지금 몸 상태를 보니 운동을 좀 해야겠단 생각을 했다.

하루종일 내가 운동하는 양을 생각해보니

버스정류장까지 3분, 버스에서 10분 앉아있거나 서있기, 버스정류장에서 도서관까지5분

잠깐 잠깐 화장실에 왔다가거나 도서관 로비 걸어다니기 10분정도,

도서관 계단 오르내리기 이게 다다.헐...

 

아침에 운동을 좀 하거나

아니면 간장공장 말대로 자전거를 좀 구입해봐야겠다.

흐미...근데 요즘엔 날씨가 추워서 ㅠ.ㅠ

 

 

 

 

p.s)

아...오늘 기록해 둘 일이 또 하나 있다.

ㅎㅎ 계절학기 점수가 드뎌 나왔는데. 세상에 세상에 B를 받았다. 푸하하!!!!

상대평가로 바뀐 개같은 계절학기. 그래그래...하긴 예전보다 세 번이나 많이 들어가서

여섯번이나 들어갔으니 B정도나 나온게 아닐까?ㅋㅋㅋ

F만 아니길 간절히 기도했는데 ㅋㅋㅋ 덕분에 올해 졸업이 가능하게 됐다. 야호~

 

부모님 아시면 돈 쳐들이고 웬 생지랄이야 하시겠지만,

대학 생활 몇 년동안이 이래왔으니,

돈 들이고 데모질 하는 내 생활에 부모님 모르시는게 백번 나은 듯.ㅎㅎㅎ

이게 다 선배들때문이야. 일학년땐 졸라 범생이었는데 맨날 술만 먹이고...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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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폐인기

싸이질을 하다가 블로그로 이사온지 한 3개월이 된 것 같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뭐가 뭔지도 잘 모르게 시작해서는 자꾸 싸이와 비교했다.

메뉴 및에 방문자의 수가 1000명이 넘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며

나는 순간 싸이에서처럼 누가 내 블로그에 방문을 했는지

기록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을 보면

지금도 약간 그러한 것 같다.

 

싸이에 익숙해진 나는 공짜로 얻은 도토리로 꾸미는 '만들어진 스킨'에

좀 더 새로운 것, 좀 더 깜찍한 것을 취사선택하는 재미에 길들여졌던 것 같다.

물론 바쁜 일상 속에서 만나기 힘든, 연락이 끊겼던 친구들과

다시 만나 일상을 나누고 이야기하는 재미에 더 끌렸던 것도 같다.

 

(싸이가 지닌 자본주의적 속성을 제외하고는)

지극히 내 개인적인 일상과 사생활들이 점차로 공개되는 폐해도 물론 있었지만,

초기 단계만 해도 그것은 기꺼이 밝히는 내 일상과 사생활로 가득했다.

일상과 일상을 나누는 것은, 대상과의 친밀감과 신뢰성을 기본으로 했던 것이었으니까.

자주 함께 하지 못했던 주변인들과 내 생각과 감정, 그리고 하루 일과를

공유하는 것은 또 다른 면으로는 나에게 사람과 대화하는 것과 같은 기쁨을

안겨주었다.

 

물론 그것은 정말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은 아니었다.

일상과 생각들을 공유했던 것은 상당히 유의미했지만,

인터넷이 지닌 속성 상 간략성과 빠른 의사소통은 동시에

개인과 개인을 오프에서만 만족시킬 뿐 온라인에서의 만남을 단절시키는

지경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싸이를 그만두고 블로그에 이사오면서 덕분에 난 싸이를 통해 연락하던 사람들과

인터넷에서 만나는 일은 그만두었다.

대개 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동기,동창들이다.

대신 나에게 연락처가 남아있는 친구에 한해서 생각날 때마다 전화하고 만나는

횟수가 늘어나긴 했다.

예전엔 "방명록에 글 남겨~"라고 했던 것이 이제는 "생각나면 전화해서 목소리나 듣자"라고

바뀌게 된 것이다.

여전히 면대면으로 만나지는 못하고 기계를 통해 목소리만 전해듣는 수준이긴 하지만

좋아진 것인가?란 생각을 하곤 한다.

 

블로그에 접속하면서 메뉴를 새로 다시 정리했는데,

개편된 블로그의 기능에 박수를 아끼지 않으며!!

나는 이제 '만들어진 스킨'보다는 내가 직접 '만들어가는 스킨'에

쏠쏠한 재미를 느끼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글을 쓰는 대상이 바뀌었음도 발견했다.

이 생각은 방문자 숫자 중에 절반은 내가 들어왔다고 쳐도 나머지 절반은 누굴까라는

생각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난 여전히 내 개인적 일상과 감정과 생각들을 나의 블로그에 옮겨 적지만

다른 면으로는 내 개인적 친분이 아니라

비슷한 사고와 가치관을 지녔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무차별 대상을 향한 글쓰기를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상대적으로 내 블로그의 글을 읽는 누군가 역시

비슷한 사고와 가치관을 지닌,

동시에 익명성을 지닌 누군가의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생활이 공개되고,

또 다른 한편으로 좁은 바닥이라는 특성상

생활이 공개되면 누구인게 바로 드러나는^^;;; 블로그에 빠져드는 내 생활.

 

이게 과연 좋은걸까?란 생각이 들긴 하는데...

 

 

뭐...아직까지는 무한정 빠져들만 한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먹고 공부하고, 저녁먹고 공부하는 일상에

블로그하는 시간 하나 정도는 끼어들어도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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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맹씨 이야기1-쪼맹씨의 잠버릇

우리집 개 이름은 쪼맹이이다. 이 개가 우리와 함께 살기 시작한 때에 개그 프로그램 중,

'쪼매난 이쁜이'가 한참 유행이었는데, 거기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쪼맹이가 어렸을 때에는 세상에 그렇게 이쁠 수가 없었다.

이리와보라면 덜덜덜 떨면서 한발씩 뒤뚱거리며 오는데,

세상에나...눈에는 한가득 불쌍한 듯이 측은한 눈빛을 발산하는 것이 아닌가.

 

<쪼맹씨 어렸을 적...아, 저 우수에 찬 눈빛과 각도!!!>

 

 

그러나 이 녀석은 점점 자라면서 무대포가 되어갔다.

식구들 중에는 내가 제일 만만한지, 자기에게 무언가 아쉬운 것이 있을때면

내 옆에와서 캉캉 짖는다.

배고프다며 캉, 밖에 나가자며 캉, 물 먹고 싶다며 캉

예전에는 내가 말을 잘 들어주고, 누군가 쪼맹씨에게 소리를 지르면 혼내지 못하게

감싸주니까 그런가보다하면서 해달라는데로 잘 해줬는데...

요즘에는 무언가 요구하는 목소리가 앙칼진 것이 듣고 있자면 기가 막힐 정도다.

우씨...내가 개 먹을 물까지 떠다 바쳐줘야하나...

 

 

줄곧 풀어놓고 키우는 편인데, 저녁만 되면 이 녀석은 제 집을 놔두고 내 이불 옆자리로 온다.

그것도 내가 따뜻하게 데워놓은 자리를 골라 파고들면서 나를 옆으로 밀쳐내곤 한다.

한참 자다가 추워서 일어나보면 어김없이 쪼맹씨가 정 중앙에 베개로 머리를 받치고는

곱게 대자로 누워 자고 있다. 정말 가관이다.

 

쪼맹씨는 가끔 꿈을 꾸는 모양이다. 코도 골고, 잠꼬대도 한다.

한참 자다가 소리에 깜짝 놀라서 일어나보면 쪼맹씨가 잠꼬대하느라고 괴상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는 중이다. 웃긴다.

 

<가녀린 팔떨림...공중에 팔을 휘저으며 잠을 자고 있는 쪼맹씨>


 

사실은 이렇게 자고 있는 중이다.

 

 

<대자로 뻗어 자고 있는 쪼맹씨>



 

이렇게 자고 있는 쪼맹씨를 건드리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예전에 뭣 모르고 건드렸다가 물려서 손에 멍이 든 일이 한 두번이 아니라서

그 다음부터는 그냥 조용히 밀어내든가, 아니면 이불로 돌돌말아 저 구석에

던져버린다.

 

엊그제는 드디어!!! 어머니가 쪼맹씨의 간악한 잠버릇을 알게 되셨다.

다른 식구들에게는 그런일이 없었는데,

아침에 나를 깨우러 방에 들어오신 어머니가 내가 잠결에 쪼맹씨를 건드렸다가

무차별 공격을 받는 모습을 목격하신 것이다.

그 순간 어머니는 소리를 지르며, 쪼맹씨를 나무라셨다. 호호...

 

난 너무 억울해하면서 이전에 물린 자국들을 보여주고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 쟤 누구닮아서 저렇게 못됐지?"

사실...개가 닮아봤자 누구를 닮겠는가. 그냥 살다보니 생활습관이 비슷해진건가??

그런데 이 시덥잖은 질문에 어머니의 답은 명쾌하다.

"너"

 

 

후후...이런 쪼맹씨가 지금 컴퓨터 책상 아래에 앉아 놀아달라고 나를 쳐다보고 있다.

우린 유유상종이니까...아...놀아줘야하나...

 

 

 

p.s) 다음에 시간나면, 쪼맹씨 술먹은 이야기랑, 약먹이는 방법, 싸우고 온 이야기 등등을

적어놔야겠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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