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만의 새 책 <쓰레기가 되는 삶들>이 나왔는데,

이것도 꼭 함께 읽어봤음 좋겠다 싶어 소개할까 해요.


이전에 나온 책인 <자유>나 <지구화, 야누스의 두 얼굴>을 읽어보심 아실 텐데요,

이 할배의 미덕은 (월러스틴 옹도 얼추 비슷한 평가를 받지만)

당최 “두려움”을 모른다는 점이 아닌가 합니다.

 

홀로코스트라는 일견 불가사의한 사건이,

유럽권 특유의 문화이자 지구화한 역사적 문명/사회체제로서

근대성이 마침내 다다르게 된 막다른 골목였음을 빼어나게 보여줬어서일까요?


당면한 현실 내지 문제의 “근본”에 다가가는 듯 싶다가도,

더럭 겁이 난다 싶으면 곧잘 ‘무난한 결론’과 얄팍한 희망이 섞인 정리 정도로

한 발 빼려 들기 십상이건만, 이 할배는 설사 절망적인 결론에 이르더라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길 주저치 않는 듯해요.


(월러스틴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정치사회학, 아프리카대륙 연구로 지적인 첫발을 내디뎠던 것처럼) 폴란드 출신으로 유럽권에선 주변부인 곳에서 지적 이력을 밟아서 그런지, 중심부 권역, 그러니까 구미권 국가소재 지식인들을 내심 몹시 불편케 하는 입지를 잡고 있잖나 싶더군요.

 

(물론 한국이란 데가 그렇듯, 거꾸로 주변부 출신이라는 이유로,더더욱 강자와의 동일시를 무슨 지적 소명인 양 여기는 이들이, 실은 더 많다지만요.ㅋ)


하긴, 그리 거북해 하는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닙니다.


아무리 비판적이어도,

홀로코스트는 근대적 문명화가 독일권역에 "본의 아니게 드리운 그늘"이라고,

그렇게 수습하고 넘어갔으면 좋겠다는 데다가,


그건 구미권 주류 지식인들 절대다수가 (심지어 적잖은 좌파(지식인)까지도)그토록 자부해 마지 않는 "근대적 문명화"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수행된 문명화 프로젝트의 일부이자 더 없이 끔찍한 근대유럽의 자화상이었다고, 찬물 끼얹듯 결론을 내리니 말예요.ㅋ


그렇게 거북해하는 게 지적으로, 그러니까 역사적 자본주의 문명의 궤적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지성’을 벼린다는 측면에서과연 옳은 태도냐와는 일단 별개로 말입니다.

 

아무튼 이런 사람이 쓴 책인데요..아래는 뒷표지에 소개된 본문 내용입니다.

 

이른바 ‘선망의 삶’과 ‘절망의 삶’이 (아마 ‘계급적 분할선’을 사이에 놓고 구분되면서도)

어떻게 표리관계를 이루는지 보여주고 있네욤.

 

최첨단 테크놀로지의 본산이자 현대판 멋진 신세계의 전진 기지인 실리콘 밸리에서 평균 고용 기간은 직종을 불문하고 약 8개월이다. 이것이 바로 지구촌 시민 누구나가 부러워하고 열심히 모방하려고 애쓰는 더없이 행복한 삶이다. … 옛날의 빅브라더는 포함(다시 말해, 사람들을 대열에 정렬시키고 그곳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통합)하는 데 열중했다. 오늘날 새로운 빅브라더의 관심은 배제다. 그들이 있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을 골라내, 거기서 쫓아내면서 ‘그들에게 어울리는 곳’으로 추방하거나 (더욱 바람직한 것은) 아예 처음부터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하는 것.

 

아래는 보도자료 내용 중 일부입니다.


기회 될 때마다 입버릇처럼 하는 소리기도 한데 뭐 적어도 제 눈에는,

'국가개입'(혹은 이보다 더 좁은 의미의 정당-선거정치에 기반한) 전략이

(그 일정한 유효성을 제대로 살리려면) “국가통치술의 정상화”에 머무를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되리라는 점을 보여주는 걸로 읽힙니다만.. 

 

근대화 과정의 초기에는 ‘인간 쓰레기 생산’이 일부 선진 국가들에 한정되었다. 그 국가들은 자국의 잉여 인간들을 ‘저발전’ 지역으로 내보냄으로써 인간 쓰레기 처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식민화와 제국주의적 정복의 가장 밑바닥에 놓인 목적”이었다. 바우만은 “근대화된 지역은 지역에서 발생한 ‘과잉 인구’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지구 전역에서 찾으려 했고 또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지구는 만원이다.” 더이상 자국의 ‘인간 쓰레기들’, ‘잉여 인간들’을 보낼 수 있는 지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선진국들은 그동안 축적한 부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지만 뒤늦게 근대화에 뛰어든 이른바 ‘개발도상국’들은 그 어떤 외부적인 해결책도 찾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전지구적 차원에서 발생한 문제에 대한 지역적 차원의 해결책”이 요구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문제가 아직까지 해결책을 찾지 못한 난제aporia라는 사실이다. 국민 국가는 한편으로 자국 내 잉여 인간들을 각종 게토로 몰아내 격리하고, 자국으로 유입되는 이주민들을 통제하는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영토를 ‘요새화’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국민들이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일을 대신, 그것도 저렴한 가격으로 해주는 노동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아래는 “독특”하다는 바우만의 국가론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

 


인간 쓰레기 문제와 관련해 바우만이 주목하는 또 하나의 지점은, 그것이 산재해 있는 다른 사회 문제를 감추어버리는 눈가리개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우만의 독특한 ‘국가론’이 등장한다. 공산주의 몰락 이후 자본주의가 전지구적으로 승리의 깃발을 휘두르고 있으며 그에 따라 각종 복지 제도가 해체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국가’의 역할은 과연 무엇인가?

 

신자유주의, 자유경쟁, 각종 유연화 정책이라는 명목 아래 국민국가는 갈수록 국민복지에대한 책임, 사회 안정화에서 손을 떼면서 시장과 기업활동의 자유, 즉 부유한 자들의 자유를 수호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국가는 잉여 인간들을 위험한 자들로 포장하고 그들을 통제하는 데 주력한다. 사회 내부의 잉여 인간들은 사회의 안정을 해칠 가능성이 있는 자들로, 이주자들은 잠정적인 테러리스트로 간주된다.

 

이러한 전략으로 국가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을 철저히 관리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구실로 미약해져만 가는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려 한다. 서구 국가들에게 광기에 가까운 대외정책 추진을 강제하는 건, 단순히 9.11 이후 테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만이 아니다. 그 저변에는 국가 구성원들이 안정적으로 삶을 향유할 해결책을 내놓으려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다.

 


보도자료에선 바우만이 이론화하려는 국가 동학을 “독특”하다 했지만,, 글쎄요.


포스트-유.에스. 국면(혹은 그 이후 어떻게든 재편이 불가피해진 국가간의 지정학적 변동 속)에서 국민국가가 때로는 수줍게, 때로는 보란 듯이 보여줬거나 보여주게 될 괴물성 내지 숭악함은미국 헤게모니가 득세하던 시절, 실제로든 환상으로든 그나마 발려 있던 “화장빨 혹은 도금박”이벗겨질 대로 벗겨진 데 따른 결과에 가깝다고 보는지라서.

 

외려 바우만의 국가론은 미완(혹은 불완)으로 남았던 맑스의 “국가 분석”을,지구적 스케일에서 비판적으로 다시 쓰는 쪽에 가깝잖나 합니다.


그렇다고,‘거봐, 맑스가 맞다니까’ 뭐 그런 건 아니구용. 그렇다기보다는, 맑스가 미처 못 보고 아직 몰랐던, 그래서 제한적이었건만 그의 입론이 마치 "궁극의 이론"인 양 간주된 통에 "잔여적인 것"으로 치부됐던 경험들까지 아울러 제대로 이론화하려 했달까요.

 

요컨대, ‘역사적 (국민)국가 체제의 존재방식’이 한눈에 잡히게 된 거라 해야지 않겠냐는 거지요.

 

이런 바우만의 국가론은 한편으론 예컨대

(그 탁월한 역사적 분석과는 별개로) 장하준 식 ‘국가의 역할’ 론이

극히 제한적일 뿐 아니라, (국가를 '해결의 주체'로 인식하는 한)

그 실현부터가 난망한 규범론이기 십상임도 보여주잖나 합니다.

 

요는, 장하준이 요청하고 있는 이런저런 “국가의 역할”이란,

실제로는 국가의 몫일 수가 없겠다고 할까요? 역설적이지만,

국가가 외견상 당장은 일단 그런 역할을 수행하게 될

(이행)주체의 하나로 떠오를 때조차 말이죠.

 

이 국가(장치)를 한시적으로나마 이행의 주체이게 만드는

‘주체화한 집합적 힘’을 뭐라 명명해야 할진 아직 일러 보입니다.

당장 절박해 보이지도 않구요.

 

다만 그 힘이,

영토적·지구적으로 ‘요새형 유한계급공동체’로 수렴(더 엄밀히 말하잠 “정상화”ㅋ)중인,

공식적으로야 “국민국가”임을 고집스레 천명할 게 뻔한,

이 희한한 역사적 화폐공동체가 명시적·잠재적으로추방한 사람들,

나아가 이들 스스로 조직한 ‘정치공동체’로부터 나오리라는 건 분명하겠지요.

 

물론, 그런 힘이 커져 이내 들끓케 하는ㅋ ‘정치(적 삶)의 기예’란 뭘지,

중지를 모으지 않으면야 이 또한 수다했던 모름지기론이나 정치신학에 그치고 말 테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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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1 22:01 2008/10/21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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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빨간거북 2008/10/24 17: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케~! 흥미가 생기네요. 꼭 읽어 볼께요~!

  2. 들사람 2008/10/24 22: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1장 갓 읽기 시작한 참이네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