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섭 <한겨레> 논설위원의 글.

김강기명님의 글과 섞어 읽으면 일종의 상승효과를 기대해볼 수 있잖을까 싶다.

 

촛불집회의 역동성을 둘러싸고 보이는 자족적 낭만화를 경계하는 글이랄 수 있겠는데,

역시나 신 위원 스스로 언급했듯이 포인트는

작금의 역동성에는 그 진보적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잘나가는 세계 속의 대한민국 정부'를 욕망하는,

이른바 (엔엘스런 민족주의와는 대별되는) '대한민국주의'로 수렴할 계기들이 내재하고 있다는 거다.

 

달리 말해, 미친소 유통 문제로 생성된 작금의 흐름이 지닌 역동성은 어디까지나

지난 세기 초중반, 그니까 일본령 조선기 때 형성된 근대국가(!)를 원형으로,

1945년 이후 지정학적 재편 속에서 단속적 변주를 이뤄온

저 대한민국 국가/정부에 대한 "전면 포맷"의 열망이 발현됐다는 한에서만

진보적이라는 얘기가 되겠다.

 

이런 대한민국의 유구한 연륜과 내력에 기대

참 조야하게 삐대온 한국의 부르주아지들에게야,

그 요구만으로도 (특히나 결과의 불확실성이라는 측면에서)

몹시 성가시고 언짢으며, 어떤 본능적 공포를 유발하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중요한 건, 이런 열망이 그 자체로는 더 나은 상황을 보장하진 못한다는 데 있다.

전면 포맷에 대한 열망은 공화주의적 요구를 고리로 한다 해도

"제대로된 자유(민주)주의 정부"의 창출이라는 고루한 전망에 갇힐 수 있다는 얘기다.

포맷의 잠재력이 결국엔 리셋 수준으로 오그라들고 마는 거랄까?

 

따지고 보면 30년 가까이 굴러먹어온 소위 "세계화 체제"의 동요가,

자본운동의 자유방임이 부른 지랄 같은 패악에 대한 반발인 동시에,

자유(민주)주의적 통치술에 대한 신뢰 내지 지구문화적인 합의가

사실상 넝마 수준으로 너덜해졌음을 시사하는 징후라는 데 유념한다면

 

"대한민국주의"로 촛불의 열망이 오그라드는 상황은,

외려 그 열망의 "순수성"으로 인해 자기부정적, 자기파괴적 결과를 초래할 공산이 크다.

 

더구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형태의 "역사적 업"을 고려한다면

사실 큰 정도가 아니라, 필시 그런 결과를 초래하게 될 거다.

이쯤 되면 순수가 아니라 순진에 가까운 게 되겠지만.

 

이러하니,

현재의 역동적 흐름이 얼마든지 반동적인 방향으로 귀착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염두에 두자는 얘기로 읽힌다. 내가 보기에, 신위원의 논지인즉슨.

 

다른 한편으론,

소위 "좌파"를 자처해왔던 이들이 지적, 이론적 무기로 활용해온

"국가/정부론"을 "진정 좌파적인"ㅋ; 시각에서 전면 갱신해야잖겠냔 얘기로도 읽히고..

 

아닌 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정부-국가에 대한 열망과 사회적 합의는

사실 역사적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늘상 불거져 나오기 마련인

정치적 필요조건이자 세속화된 종교처럼 일상화돼 있는데도,

이런 "생동하는 조건"으로서 근대국가-정부를 이론화하려는 노력은 별로 없었지 싶다.

 

풀란차스니 그람시, 알튀세르 얘기 좀 나오다,

누다 만 똥처럼 "진전된 논의"가 개운찮게 중단된 느낌이랄까?

 

 

***

 

 

올바른 정세 분석을 위하여: 대중은 진보적인가?

 

신기섭(언론인) / 2008년06월18일 11시17분

 

 

 

미합중국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 반대로 시작된 지금의 정국이 어디로 발전할지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다. 촛불집회와 시위만으로 보면 상황이 더 진전될 기미는 별로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노조와 같은 조직적 세력들의 참여 측면, 조선 따위의 극우신문 광고주 압박 운동과 한국방송 지키기 운동 따위로 쟁점이 계속 확대되는 점 등은 최근 2주 사이 변화된 모습이다. 촛불집회에 온갖 깃발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주목할 변화라면 변화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것은 정세를 제대로 분석하는 일이다. 정세 분석하자고 하면, 행동 능력 없는 좌파들이 그럴듯한 말만 늘어놓겠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세 분석이 없이는, 앞으로 무엇을 할지 결정할 수 없다. 정세 분석은 전술과 전략을 세우는 데 아주 중요한 것이다.

 

'촛불 집회, 시위 정국'이 길어지면서, 이런저런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어떤 이가 정리한 것을 보니, 이명박 이후를 논의할 '진보진영 협의체'를 만들자는 주장, '제헌'이 필요하다는 주장, '제헌'에 앞서 주민소환제를 실시하자는 주장 따위가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노조가 총파업을 벌임으로써 전선을 한층 확대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모두 나름대로 의미 있는 주장들일 수도 있지만,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은 과연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제대로 정세를 분석하고 하는 소리인가 하는 의구심이다. 객관적인 정세 분석이 없는 당위적인 주장은 심각한 해악을 끼친다.

 

위에 거론한 주장들은 공통적으로 지금의 시위 대중이 '진보적' 또는 '급진적'이라고 보는 듯하다. 이명박 퇴진을 전제로 한 이후 체제 논의로 옮겨가도, 제헌 목소리를 높여도, 노조가 총파업을 벌여도, 시위 대중이 강하게 호응할 것이라고 전제하지 않으면 현실성이 없는 주장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정말 그렇다면 문제가 전혀 없겠지만, 아니라면 정세에 혼란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정세를 너무 앞서가는 주장은 현실에 유효한 도움을 주지 못하고 기껏 자기만족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제대로 된 정세 분석이 필요한데, 그 이전에 짚고 넘어갈 일들이 있다.

 

대중은 진보적인가?

 

나는 촛불집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온갖 목소리를 쏟아내는 장면이 착시 현상을 일으키기 쉽다고 본다. 그들이 굉장히 급진적이고 진보적이라는 착각 말이다. 대중은 현재 단지 미합중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에만 공명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보험 민영화, 물 산업 민영화 따위의 민영화(사유화) 반대 목소리에도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게다가 극우신문들의 해악을 깨닫고 공영방송의 중요성까지 인식하기 시작했으니, 놀라움을 넘어 감탄과 희망에 빠져 바라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몇달 전까지는 보수화로 치닫던 사람들이 어떻게 갑자기 진보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가? 대통령 선거에서의 압도적인 승리는 논외로 하더라도, 얼마 전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승리를 그저 '낮은 투표율' 탓으로 돌리고 말 수는 없다. 한국 사회가 보수화하고 있다는 것은 그저 표면만 본 착각에 불과했단 말인가? 이런 질문에 설득력 있게 답하지 못한다면, 현재 대중이 진보적이라는 생각은 기각되어야 마땅하다.

 

그럼 지금의 이 모습이 진보적, 급진적인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현재의 모습은 첫째 모든 권위의 거부이다. 이 거부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고 적어도 2000년 이후 한국 사회를 가장 확실하게 특징짓는 현상인 '불신'이 계속 쌓이다가, '기존 정치 일반의 무능', 특히 '나의 생존과 안전에 대한 위협'에조차 반응하지 못하는 '정치의 총체적인 무능'에 대한 폭발적인 분노로 터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한국의 시민들은 '지배층의 부도덕'(땅 투기, 병역 기피, 학력 위조, 거짓말)부터 '경제 침체'로 대표되는 '무능력'에 이르기까지 가지가지로 질리다 못해, 이제 그들의 부도덕과 무능 때문에 '생명의 안전'까지 위협받는다고 느낀다. 쇠고기 이외의 문제들 가운데 건강보험 민영화 문제가 가장 먼저 부각되고 대중의 큰 호응을 얻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안전'이라는 측면에서 긴밀하게 얽히는 문제다. 물 문제, 전기 문제도 이와 비슷하게 생존과 안전이라는 측면에서 '피부에 와 닿는' 문제들이다.

 

하지만 대중의 급진성은 딱 여기까지다.

 

대중은 국가에 무엇을 요구하는가?

 

대중의 급진성을 따지려면, 그들이 국가를 어떻게 보는지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60년 동안 한반도 남쪽에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파들에게 국가는 곧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정부였고, 좌파들에게 국가는 '폭력적인 억압 기구'일 뿐이었다. 이렇게 국가가 없으니, 시민도 없었다. 우파나 좌파나 모두 '민족'에 집착한 것은 이 때문이다. 국가와 국가를 구성하는 시민을 민족이 대체했고, 그래서 이 '민족'은 보수적이고 진보적인(또는 저항적인)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지녔다.

 

하지만 언제인가부터 이 땅에도 '국가' 개념이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는데, 그건 '시민'의 발견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한국'에 대한 자부심에서 비롯됐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 대신 '대한민국'이라는 호칭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이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내세울 만한 나라다. 정보통신 강국, 세계 10권에 육박하는 경제 대국이다. 게다가 이런 경제력은 월드컵 축구 4강, 박세리를 중심으로 한 골프 강국,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박태환과 김연아로 대표되는 수영과 피겨스케이팅의 성과까지 가져다줬다. 가짜로 귀결되고 말았지만 황우석도 있었고, 할리우드와 겨루겠다는 심형래도 빼놓을 수 없다.

 

반면에 정치 현실은 이런 자부심에 전혀 걸맞지 않았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자랑스런 대한민국'에 걸맞은 정치를 보여주지 못하긴 마찬가지다. 외교 또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다. 효순-미선 사건에 뒤늦게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해 거리로 나온 것도 바로 '자랑스런 대한민국'에 걸맞지 않은 '굴욕적 대미 관계'와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반미라기보다, 이제 우리도 '미국'에 좀 더 당당해지고 싶다는 의지의 표시다.

 

그런데 이런 대중의 요구와 기존의 국가관은 어울리지 않는다. '자랑스런 대한민국'은 '무능한 정부'로 대표될 수 없고, '폭력적 억압 기구'의 틀 안에 가둬둘 수도 없는 개념이다. 이런 불일치가 해소되지 않고 지속되는 가운데 '국민의 생명'을 아랑곳하지 않는 '굴욕적 쇠고기 협상'이 터져 나왔다.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은 '자랑스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은 '국가'를 다시 구성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경제 강국은 '삼성'으로 대표되는 기업이 이뤄냈고, 세계에 내세울 스포츠 강국은 '박태환'과 '김연아'가 이뤄냈다면, 정치(또는 민주주의)와 외교는 누가 맡을 것인가? '우리가 바로 민주주의'라는 구호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날로 커져가고 있는 '기존 권위에 대한 거부'도 '국가의 재구성'을 부추기고 있다. 그동안 꾸준히 자라오던 '시민'이 불려나올 수밖에 없다.

 

이제 한국인들은 진정 근대적 의미에서의 '국민국가'와 '시민'에 눈을 뜨고 있다. 그리고 이 '국가'는 '모든 권위에 대한 거부' 끝에 발견한 '해법'이다. 그 자연스런 귀결은 이 '국가'가 우선 광우병 쇠고기를 저지해야 하며 이어서 '시민'의 건강을 지켜줄 건강보험을 제공해야 하고, 물과 전기를 안정되게 공급해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지속적인 경제 성장'도 제공해야 한다. 그래야 '자랑스런 대한민국'이 계속 유지될 수 있다.

 

이런 결론은 다시 첫 번째 질문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대중은 진보적인가? 대중은 새로운 '국가의 구성'을 요구하는 한에서 '진보적'이지만, 그 진보는 '국가'로 귀결되는 한에서 아주 반동적이고 권위적이며 보수적이다. 결국 이제 좌파 또는 진보 세력은 '탈 계급적 국가주의' 아니 '비계급적 국가주의'(사실 언제 한국의 사회 인식 일반이 계급적인 적이나 있나?)를 직시해야 할 때가 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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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1 23:32 2008/06/21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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