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기관지 <노동과 세계>에 보낸 청탁원고.

 

지난 9월 17일 민주노총 미조직특위+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마련한 워크숍

"민주노조 운동이 청년들과 만나는 길"에 대해 촌평한 글이다.


보내구 나서 그쪽서 따로 별 말 없는 걸로 보건대, 실릴 모양이다.

 

***

 

 


‘호오’는 짧고, ‘글쎄’는 길다. 지난 달 민주노총, 아니 엄밀히 말해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특위와 한국비정규센터가 함께 ‘청년 조직화’ 워크숍을 가졌다는 소식에 스스로 보인 반응은, 돌이켜보건대 이랬다. 왜냐고? 좀 있어 보시라. 안 그래도 대체 왜 그런 건지 써 볼 참이니까. 쓸 참이라고 했지만, 길 것 없이 한방에, 이렇게 갈 수도 있다. ‘미심쩍으니까!’

 

이렇게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어 주길 바라는 하는 맘이야 사실, 뻑하면 ‘오해’라고 뭉개기 바쁜 이명박 대통령 뺨을 후려치고도 남을 정도다. 헌데 진짜 이러고 말면 스스로도 미심쩍은 게, 왠놈의 국외자가 흘린 냉소로 치부할까 싶어 그렇다. 달리 보면 주류/비판 진영할 것 없이 만연한 바, 당치 않은 허세로 요행이나 바라는 이른바 ‘한방주의’에 본의 아니게 일조하는 건가도 싶고. 그럼, 지면 제약상 ‘호오’한 이유로서 워크숍의 취지를 먼저 짚고, 그와는 별개로(아니, 어쩌면 그 덕에) 떠오른 몇 가지 질문들을 ‘글쎄’ 차원에서 던져보는 것으로 갈음해 볼까 한다.

 

이른바 민주노조운동이 (이런 뭉뚱그림이 좀 거슬린다 해도) ‘청년’들과 만나는 길을 터보자 했다. 만나는 일 자체야 하등 토달 게 없다. 에둘러서 만나자고 한 거지, 내심 ‘통’했으면 좋겠다는 문제의식까지 나름 갖췄다. 특히 실업 여부나 취업의 질을 막론하고 자본의 욕망만큼 출렁대는 불안의 너울에 휘둘리기 십상인 오늘날, 이 따위 삶의 조건에서 빠져나올 ‘작당모의’를 당사자인 청년들과 함께 해보겠다는 것이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물론, 듣기에는 일단 그렇다는 얘기다. 민주노조운동이야 청년들과 무려 통하고 싶다 치고, 청년들은 어떨까? 계속 만나고 싶어 할까? 행여, 이게 다 반공 이데올로기와 그 변주들의 내면화, 조중동 류가 일삼는 악의적 왜곡 탓이라고 둘러대진 말자. 일정 정도 분명 그렇겠지만, 그게 다는 아닌 것 역시 분명하니까. 길트기가 당연히 집체동원형 삽질이 아닌 한, 기존 활동가와 청년들 간에 형성될 ‘연합의 힘’은 그저 물리적 산술합일 리 없다. 연합이란 공통된 실천감각을 상호되먹임하는 과정으로, 바로 이런 연합이 이뤄질 때 길트기는 삶의 불안을 잠재우는 긍정적 ‘문화형성의 정치’가 되는 셈일 게다. 민주노조운동은 과연 스스로 이런 정치의 당사자로 거듭날 수 있을까? 이런 정치를 ‘잔여’적인 것으로 여기는 조직적 관성, 청년들을 상대로 연대 아닌 하대의 문화가 공공연한 일상문화와는 단절할 수 있을까?

 

좀더 근본적으로, 스스로든 활동가들과의 연합으로든 집단적 조직화가 필요해졌다 할 때, 그 연합 경로가 왜 꼭 ‘민주노조’라야 할까? 똑같이 탁자라 불려도 쓰임새나 제작방식은 사용당사자의 필요나 감성에 따라 각양각색 아닌가? 조직화도 이런 발상이 필요한 건 아닐까? 더구나 프롤레타리아트들의 집단적 대응/조직화 필요와는 별개로, 적어도 ‘민주노조’식 조직화가 사실상 정세적으로 유효성을 다했다고들 한 지 오래인 마당에 말이다. 우리, 프롤레타리아트들의 진정한 힘과 응집력은 어쩌면, 무작정 하나 되고 보는 데서가 아니라, 상이한 조직화 형태들이 ‘생성하는 차이들의 네트워크’를 이루는 데서 비로소 형성되는 것 아닐까?

 

이런 의문들이, 워크샵 취지에 일부 공감하나 크게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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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6 09:19 2009/10/16 09:19

 

Commentary No. 265, Sept. 15, 2009


미국 정치와 군사적 개입

("U.S. Internal Politics and its Military Interventions")





지난 몇 주 사이, 자유(민주)주의적인 민주계와 보수적인 공화계 인사 양쪽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의 “출구 전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주아프간 미군 사령관 스탠리 맥크리스탈 장군과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이 아프간 병력 증파를 오바마 대통령에게 공식 제의하려던 바로 그때부터다.


확실한 건 아무 것도 없지만, 일반적인 기대에 비춰 보건대 오바마는 이 제의를 받아들일 것이다. 즉, 대선을 치르던 당시 오바마는 미국의 이라크 개입이 실수이며 조속한 철군을 원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발언에 대해 그가 밝힌 이유 중 하나는, 이라크 개입으로 아프간에 충분한 병력 투입이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나쁜 전쟁, 좋은 전쟁”이란 개념의 특정 판본이었다. 이라크 전쟁은 “나쁜” 것, 아프간 전쟁은 “좋은” 것이었던 셈이다.


아프간에서 임무수행중인 미군을 늘리자는 지혜를 놓고서 오바마계 인사들 간에 크게 논쟁이 있었던 건 분명하다. 보도에 따르면 대아프간 병력 증파에 대해 주도적으로 반대하는 인사는 다름 아닌 조지프 바이든 부통령이다. 바이든은 민주당 내에서 매파 쪽으로 늘상 분류돼온 인물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병력 증파에 반대하고 있는 걸까? 언론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바이든이 보기에 아프간 전쟁은 희망 없는 수렁과도 같으며, 대아프간 병력 증파가 이뤄질 경우 진정 중요한 지역인 파키스탄에 집중할 수 없게 돼서다. “나쁜 전쟁, 좋은 전쟁”이란 강령의 새 판본이 나온 셈이다. 아프간 전쟁은 “나쁜” 것, 파키스탄 개입은 “좋은” 것이다.


패배가 그렇게도 명백한 군사적 개입 상황에서 발을 빼는 일이 미국에선 왜 그리 어려운 걸까? 미국과 다른 지역의 좌파 분석가 상당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건 미국이 제국주의 권력이며, 따라서 정치경제적 권력을 세계적으로 유지하는 데 필요한 군사적 개입에 나서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이같은 설명은 대단히 불충분한데, 왜냐하면 1945년 이후 일어난 주요한 군사적 충돌에서 미국은 이긴 적이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특정한 제국주의 권력으로서, 미합중국은 자신의 목표 달성과 관련해 굉장한 무능력을 보여주었던 셈이다.


1945년 이후 미국이 대규모로 병력을 투입했던 5번의 전쟁을 상기해 보라. 파병 규모와 경제적 비용, 정치적 파장 면에서 으뜸이었던 건 베트남 전쟁이다. 나머지 네 전쟁으로는, 한국전쟁과 1차 걸프 전쟁,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2차 이라크 침공이 있었다. 한국전쟁과 1차 걸프전은 정치적으로 무승부였다. 이 두 전쟁은 전쟁이 발발한 바로 그 지점에서 정확히 종료됐다. 지금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명백히 패퇴중이다. 내가 믿기로는, 2차 이라크 침공 역시 나중에 무승부로 기억되지 싶다. 전쟁에서 나가떨어질 때, 미국은 정치적 위세 면으로 개입 당시보다 확실히 더 나빠지면 모를까, 더 나을 게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럼 무엇이 미국을 정치적으로 그토록 자기파괴적인 행동으로 내모는 걸까? 특히나 미국이 자신의 이익에 걸맞게 전 세계를 통제하려는 헤게모니 권력이라고들 생각한다면 말이다. 여기에 답하려면, 우린 미국 내부의 정치를 들여다봐야 한다.

 

모든 열강이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헤게모니 국가들은 유별나게 국민/민족주의적이다. 자기확신으로 충만한 이들 헤게모니 국가에서는 이른바 국(가이)익을 옹호할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권리가 자국에 있다고 믿는다. 헤게모니 국가의 시민들 중 압도적 다수는 스스로 애국자라 여기는데, 이들에게 애국적이란 건 그들의 정부가 세계 무대에서 필요하다면 군사적으로라도 자국을 실로 굳건히 앞세워야 한다는 뜻이다. 1945년 이후 미국에서, 반反제국주의를 신조로 삼는 이들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정치적으로 변변치 못한 수준이다.


미국 정치는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 간의 분할 구도를 따르지 않는다. 그간 미국 정치는 강성 개입주의자들과 미합중국을 “요새”라 믿는 이들을 사이에 두고 분할돼왔다. 후자의 경우, 고립주의자라 불리곤 했다. 고립주의자들은 무력을 반대하는 게 아니다. 정말이지 이들은 군사력 증강에 필요한 재정투자를 강력히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원거리 지역에서 이같은 군사력을 사용하는 데 대해 회의적이다.


물론, 이같은 (개입주의와 고립주의라는) 분할의 양 극단을 사이에 두고 이 둘을 매개하는 온갖 입장들이 자리하고 있다. 중요한 건, 미국 군사비 지출의 대폭 삭감을 요구할 채비가 돼 있는 정치인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그토록 많은 정치인들이 “나쁜 전쟁, 좋은 전쟁” 식 구별짓기에 나서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군사력이 “나쁜” 전쟁에 쓰이지 않도록 정당화하기 위해, 그 군사력을 다르게, 더 좋은 데 쓸 수 있다고 제안하는 셈이다.


이쯤에서, 공화계와 민주계는 이들 문제에 대해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분석해야 한다. 공화당에서 고립주의 노선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아주 강력했지만, 1945년 이후 상대적으로 사그라들었다. 1945년 이후 공화당계 정치인들은 군사부문에 대한 투자비 증액을 요구하는 경향이 뚜렷했고, 민주계가 군사문제에 대해 너무 “물러터졌다”고 곧잘 주장해왔다. 


이 문제와 관련해 공화계 정치인들이 꽤나 일관성이 없었다는 사실은 그들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클린턴 대통령이 발칸 반도에 파병하고 싶어했을 때, 공화계 인사들은 파병을 반대했다. 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공화계 정치인들이 뭘 하든 간에, 미국 대중은 그들이 내뱉는 말만으로 그들을 애국적 매파로 간주한 듯싶다.


민주계 정치인들에겐 정반대의 문제가 있다. (예컨대 한반도와 베트남의 경우처럼) 대외적인 군사개입 면에서 역대 민주계 행정부가 공화계 행정부보다 더 기민하게 움직였다고 주장하는 책들은 확실히 차고 넘친다. 그런데도 공화계 쪽에선 민주계가 군사적 견지에서 “비둘기”파라며 비난을 가했다. 소수파로서 민주당을 지지한 다수의 유권자들이 실제로 “비둘기”파인 건 사실이지만, 민주계 정치인들 대다수는 그렇지가 않다. 민주계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이 자신을 “비둘기”파로 여기고선 그 이유로 자신한테 등을 돌리지는 않을까 늘상 노심초사해왔다.


이에 따라 민주계 인사들은 거의 항상 “나쁜 전쟁, 좋은 전쟁” 노선을 활용해왔다. 이 노선이 그들 모두에게 아주 크게 이로웠던 건 아니다. 민주계 정치인들한테는 공화계 정치인들보다 덜 마초스럽다는 딱지가 따라다녔던 듯싶다. 그런 만큼 상황은 아주 단순하다. 오바마가 이들 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릴 때, 아프간 병력 증파 여부가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합당한지를 따지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한테, 그리고 좀더 크게 보면 민주당한테 “겁쟁이”, “비둘기”, 그러니까 옛날엔 소련이었다면, 오늘날엔 “테러리스트”인 적들에게 조국을 “팔아먹는” 것들이란 식의 딱지가 또다시 붙진 않을지 걱정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오바마는 십중팔구 병력을 증파할 것이다. 그리고 아프간 전쟁은 베트남 전쟁의 전철을 밟을 것이다. 미국에게 남는 건 악화일로뿐일 텐데, 전쟁을 패배로 내몬 데 대해 그에 상응하는 합리적 반대를 천명할 그룹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미군 헬기가 자국 병사들한테 기총 소사하는 일 없이 병력을 철수시킬 수 있게 할 그런 그룹 말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공산주의 정권들에게 냉소 혹은 분노를 표할 때, 그는 인민들이 정권에서 마련한 지혜에 맞서 들고 일어난다면 정권은 “인민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오바마가 해야 할 건 아마 이런 일, 즉 인민을, 자국 국민을 바꾸는 일일 게다. 안 그러면, 모르긴 몰라도 어느 때가 됐을 때, 인민들이 스스로 바뀌게 될 것이다. 미국이 너무나 많은 전쟁에서 또다시 진다면, 각성한 미국 시민들은 자국 행정부의 군사적인 대외개입과 터무니없는 자국의 군사비 지출이 그들이 겪고 있는 여러 문제의 해법이 아니라, 미합중국 자체의 생존과 삶의 질을 위협하는 최대 장애물임을 깨닫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원문보기 http://fbc.binghamton.edu/265e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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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3 06:35 2009/09/23 06: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