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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호>공공의 적2, 우리 사회의 진정한 공공의 적은 누구인가?

노동해방학생연대 회원 영현

 

 

공공의 적2, 우리 사회의 진정한 공공의 적은 누구인가?

 

 얼마 전 극장에서 영화 <공공의 적2>를 보았다. 천만 관객을 불러 모았던 <실미도> 이후, 강우석 감독이 자화자찬하며 내놓은 신작이다. <공공의 적1>에서 꼴통형사로 출연하였던 설경구가 이번에는 대한민국 정의 검사 강철중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동창생이기도 했던 사학재단 이사장 한상우(정준호 분)에게서 수상한 냄새를 맡고 그를 잡아들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것이 영화의 줄거리 전부이다. 전작에서 그러했듯이 권선징악을 메시지로 전개되는 스토리도 변함이 없었다.

 

 

보여주지..법보다 돈이 세단 걸..

 내 영화 평을 딱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국정홍보처 제작영화’ 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결코 과한 평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옆을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근데 저런 사람(강철중 같은..) 없잖아.” 그렇다. 관객이 바보가 아닌 이상 국정홍보처 광고에나 나올법한 강철중식 정의검사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왜냐하면 한상우의 말처럼 세상은 ‘법보다는 돈이 세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자기 밥줄을 내놓으면서까지 사회정의를 추구하려는 검사가 도대체(!) 어디 있다는 말인가.
 뭐...설사 그런 사람이 몇몇 있다고 가정을 해 보자. 부패한 법조계를 개혁하고, 정말로 신심에서 검사의 본분을 다하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영화에서처럼 돈이 아닌 정의를, 권력이 아닌 서민을 위한 공권력이라는 환상은 결코 현실이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기구는 결코 중립적인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국가기구, 공권력은 철저히 자본을 위해 움직이며 노동자민중을 탄압하는 곳이다. 때문에 강철중 같은 검사가 수십 명이 있다고 해도 이러한 본질은 결코 변할 수가 없다. 영화에도 나오듯 평검사는 부장검사, 검사 출신 변호사, 검찰로 수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하여 검찰, 국회, 법원, 정부, 군대까지..이들의 끈끈한 커넥션은 결국 자본가들과 연결이 된다. 뭐든 돈이 제일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결국 국가기구는 이 한국 사회가 자본을 위한 사회가 되어 더 잘 굴러가도록 작동을 하는 곳이며, 만약 이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불순분자(속칭 빨갱이들)가 있을 때는 총출동해서 때려잡게 된다. 

 

 

진짜 공공의 적은 누구인가

 어쨌든 정의의 검사 강철중은 공공의 적 한상우를 때려잡기 위해 노력한다. 한상우가 ‘그냥 나쁜 놈’보다 한 수 위인 ‘공공의 적’인 이유는 아버지가 평생 일구어놓은 사학재단을 매각해서 해외로 돈을 빼돌리는 미국 시민권자이기 때문이다. 즉, 강철중이나 관객들은 돈에 눈이 멀어 부모형제 몰라보고 패륜아 짓을 서슴지 않는 것에 한 번 분노하고, 조국을 배신하고 저 하나 잘 살자는 이기적인 인간임을 보고 민족적 감정에 욱하여 또 한 번 분노한다. 이런 점에서 <공공의 적2>는 현 사회체제를 제대로 비판하지 못한다. 그리고 ‘진짜 공공의 적’을 겨냥하지도 못한다. 오히려 비난의 화살을 한상우 개인에게 몰아가면서 사회의 모순들과 진짜 공공의 적들을 은폐시키고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한상우의 계략에 당하는 그의 아버지는 평생 교육을 위해 헌신한 캐릭터(선)로 나오며, 이에 대비되어 한상우는 교육자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돈에 눈이 먼 이사장(악)이다. 고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학생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 한국의 사학재단의 현실인데 말이다. (이런 면에서는 ‘두사부일체’가 차라리 낫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볼까, 여기서 강철중 검사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돈 없는 것들은 자격지심 때문에 부자는 다 때려잡으려고 한다는 한상우의 말에, 강철중은 “너같이 나쁜 놈(악)때문에 착한 부자들(선)까지 욕을 먹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니, 강철중 검사님! 몰라도 한참을 모르십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한 자본가가 어디 있답니까. 착한 자본가는 곧 경쟁에서 밀리게 되고, 그것은 곧 파산을 의미 할 뿐이다. 경쟁과 이에 따른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는, 자본가 개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자본의 본능적인 생리에 따른 것이다.

 

 

관객 여러분, 어디를 향해 분노하고 있으십니까?

 <실미도>가 국가주의를 공격하는 듯하면서도 오히려 강하게 그것을 호소했던 것처럼, <공공의 적2> 역시 관객들에게 정의로운 국가와 강력한 공권력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또, 비판의 화살을 ‘부도덕한 개인’에게 모음으로써 자본가들과 그에 붙어먹는 국가기구라는 진정한 공공의 적을 은폐시킨다.
 혹자는 이런 나의 영화 평을 보고 너무 과도하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재미로 보는 건데 말이다. 그렇다. 본인도 영화를 재미로 본다. 하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재미로 본 영화들이 의도한대로, 흘러가는 대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공공의 적2>를 보며 다시 한 번 대중문화에 무의식적/무비판적으로 동의하고 있지는 않는지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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