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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노동해방학생연대 회원 김진태
‘인분 사태’만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 국민을 경악하게 만든 일도 없을 것이다. 사실 예비역들과 함께하는 술자리에서는 공공연하게 들어볼 수 있는 얘기였지만 언론에 공개적으로 폭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 말이다. 이번 사건으로 인하여 대한민국 육군은 그야말로 ‘개망신’당했다. 그런데 그렇게 욕을 먹어놓고선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사람이 있더라.
“실제 중대장이 한 행위는 오른손에 잔변을 묻혀서 두 차례 입에 넣었다 빼게 시킨 것이고 … 분명한 것은 삼킨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안다.” <육군훈련소 소장 허평환>
이런 사람들을 제외하면 군대에 다양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유쾌한 정치>는 그 중에서도 불필요하게 군력을 증가시키는 정부를 문제 삼고 있다.
「하지만 군력을 증가시키는 것으로는 평화를 유지할 수 없다. 모두가 군비를 증강시킨다면 그 결과는 누구도 보장 할 수 없으며 이러한 경쟁은 또 다른 폭력을 야기할 뿐이다. 한국군은 국방의 의무를 빌미로 개인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무의미한 군력증강을 그만 두어야 한다.」
자,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군대는 왜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는 10여 년 전 강제징집과 의문사를 보았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인분사태도 봤고, 공익요원 얼차려 사망사건도 봤다. 이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모두 다 봤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군대를 별 말 없이 인정해왔다. 왜? 국방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국방은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대가 외침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 뿐일까? 그 뿐인데 사람이 인분도 먹어야 되고 심지어 죽기까지 해야 되나.
우리 주변에서 지겹도록 듣는 ‘군대를 갔다 와야 사람 된다.’는 말과 함께 답을 구해보자. 애초에 비장애인 남성을 제외한 여성, 장애인은 인간이 될 가능성이 없는 존재로 못 박고 있는 이 말은 군대의 성격이 어떤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사람들은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군대를 다녀와야 일도 걱실걱실 잘하고 쓸데없는 말썽을 안 일으킨다.’ 하지만 레드타임즈는 이렇게 해석한다. ‘군대를 다녀와야 위에서 시키는 대로 군말 없이 잘 따르고, 나라 중요한 것도 알게 돼서 감히 장성백 같이 설치지 않는다. 물론, 군대를 다녀온 남성이 여타 인간들 보다 우월하다.’
군대는 수많은 20대 남자들에게 상명절대복종정신을 불어 넣는다. ‘군대에서 한 일 중에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한 것이 무엇입니까?’ ‘삽질이요.’ 하지만 중공업이 발달한 우리나라에서 굴삭기를 사용하지 않고 왜 하필 삽질을 해야 했는지를 아는 사람을 만나보지는 못했다. 심지어 아침에는 땅을 파게 하더니 밤에는 다시 묻으라는 명령까지 수행한다고 한다. 위에서 시키는 것은 군말 없이 해야 된다는 이러한 철칙은 직장, 학교 등에서 재생산된다. 학교에서는 ‘선배의 키스는 후배의 원 샷’이라는 둥, FM못하는 후배에게 ‘군기가 빠졌다’는 둥의 얘기들이 비일비재하다. 힘들고 꼴 보기 싫어서 도저히 사랑해줄 수 없는 이 회사를 그래도 사랑하게 만들고, 매한가지로 돌아버리게 만드는 이 나라를 ‘애국’하게 된다. 그리고 군대 내에서 한 해 100~200여명 건의 자살사건과 3000명 정도의 정신이상발생이 보여주듯이 이를 이겨내지 못하면 군대에서건 사회에서건 살아가기 힘들다.
이렇게 대다수 20대 남성들에게 국가에 대한 충성과 위계질서를 불어놓는 것과 함께, 반체제적인 움직임을 직접적으로 억압하는 도구로써 군대는 존재해왔다. 80년 광주에서 있었던 노동자민중들의 해방을 향한 움직임을 총칼로 잔인하게 짓밟은 것은 바로 한국군이었다. 이라크에 파병된 한국군을 봐도 알 수 있다. 한국군은 자본가들의 이윤을 지켜내고, 독립을 원하는 이라크 민중들을 살육하기 위해 파병되었다.
군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국내외에서 이윤이 최고인 현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수단으로 존재한다. 그 앞에서는 인권도 소용없고 생존을 위한 몸부림도 소용없다. 군대가 더 이상 자본가들의 이윤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를 한번 꿈꿔보는 것은 어떨까.
노동해방학생연대 회원 영현
공공의 적2, 우리 사회의 진정한 공공의 적은 누구인가?
얼마 전 극장에서 영화 <공공의 적2>를 보았다. 천만 관객을 불러 모았던 <실미도> 이후, 강우석 감독이 자화자찬하며 내놓은 신작이다. <공공의 적1>에서 꼴통형사로 출연하였던 설경구가 이번에는 대한민국 정의 검사 강철중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동창생이기도 했던 사학재단 이사장 한상우(정준호 분)에게서 수상한 냄새를 맡고 그를 잡아들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것이 영화의 줄거리 전부이다. 전작에서 그러했듯이 권선징악을 메시지로 전개되는 스토리도 변함이 없었다.
보여주지..법보다 돈이 세단 걸..
내 영화 평을 딱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국정홍보처 제작영화’ 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결코 과한 평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옆을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근데 저런 사람(강철중 같은..) 없잖아.” 그렇다. 관객이 바보가 아닌 이상 국정홍보처 광고에나 나올법한 강철중식 정의검사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왜냐하면 한상우의 말처럼 세상은 ‘법보다는 돈이 세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자기 밥줄을 내놓으면서까지 사회정의를 추구하려는 검사가 도대체(!) 어디 있다는 말인가.
뭐...설사 그런 사람이 몇몇 있다고 가정을 해 보자. 부패한 법조계를 개혁하고, 정말로 신심에서 검사의 본분을 다하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영화에서처럼 돈이 아닌 정의를, 권력이 아닌 서민을 위한 공권력이라는 환상은 결코 현실이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기구는 결코 중립적인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국가기구, 공권력은 철저히 자본을 위해 움직이며 노동자민중을 탄압하는 곳이다. 때문에 강철중 같은 검사가 수십 명이 있다고 해도 이러한 본질은 결코 변할 수가 없다. 영화에도 나오듯 평검사는 부장검사, 검사 출신 변호사, 검찰로 수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하여 검찰, 국회, 법원, 정부, 군대까지..이들의 끈끈한 커넥션은 결국 자본가들과 연결이 된다. 뭐든 돈이 제일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결국 국가기구는 이 한국 사회가 자본을 위한 사회가 되어 더 잘 굴러가도록 작동을 하는 곳이며, 만약 이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불순분자(속칭 빨갱이들)가 있을 때는 총출동해서 때려잡게 된다.
진짜 공공의 적은 누구인가
어쨌든 정의의 검사 강철중은 공공의 적 한상우를 때려잡기 위해 노력한다. 한상우가 ‘그냥 나쁜 놈’보다 한 수 위인 ‘공공의 적’인 이유는 아버지가 평생 일구어놓은 사학재단을 매각해서 해외로 돈을 빼돌리는 미국 시민권자이기 때문이다. 즉, 강철중이나 관객들은 돈에 눈이 멀어 부모형제 몰라보고 패륜아 짓을 서슴지 않는 것에 한 번 분노하고, 조국을 배신하고 저 하나 잘 살자는 이기적인 인간임을 보고 민족적 감정에 욱하여 또 한 번 분노한다. 이런 점에서 <공공의 적2>는 현 사회체제를 제대로 비판하지 못한다. 그리고 ‘진짜 공공의 적’을 겨냥하지도 못한다. 오히려 비난의 화살을 한상우 개인에게 몰아가면서 사회의 모순들과 진짜 공공의 적들을 은폐시키고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한상우의 계략에 당하는 그의 아버지는 평생 교육을 위해 헌신한 캐릭터(선)로 나오며, 이에 대비되어 한상우는 교육자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돈에 눈이 먼 이사장(악)이다. 고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학생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 한국의 사학재단의 현실인데 말이다. (이런 면에서는 ‘두사부일체’가 차라리 낫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볼까, 여기서 강철중 검사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돈 없는 것들은 자격지심 때문에 부자는 다 때려잡으려고 한다는 한상우의 말에, 강철중은 “너같이 나쁜 놈(악)때문에 착한 부자들(선)까지 욕을 먹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니, 강철중 검사님! 몰라도 한참을 모르십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한 자본가가 어디 있답니까. 착한 자본가는 곧 경쟁에서 밀리게 되고, 그것은 곧 파산을 의미 할 뿐이다. 경쟁과 이에 따른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는, 자본가 개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자본의 본능적인 생리에 따른 것이다.
관객 여러분, 어디를 향해 분노하고 있으십니까?
<실미도>가 국가주의를 공격하는 듯하면서도 오히려 강하게 그것을 호소했던 것처럼, <공공의 적2> 역시 관객들에게 정의로운 국가와 강력한 공권력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또, 비판의 화살을 ‘부도덕한 개인’에게 모음으로써 자본가들과 그에 붙어먹는 국가기구라는 진정한 공공의 적을 은폐시킨다.
혹자는 이런 나의 영화 평을 보고 너무 과도하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재미로 보는 건데 말이다. 그렇다. 본인도 영화를 재미로 본다. 하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재미로 본 영화들이 의도한대로, 흘러가는 대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공공의 적2>를 보며 다시 한 번 대중문화에 무의식적/무비판적으로 동의하고 있지는 않는지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된다.
노동해방학생연대 회원 영현
“이 땅의 노동자로 태어나~자랑스런 딸로 태어나~
사랑도 행복도 다 빼앗겨 버리고 참아왔던 그 시절 몇몇 해~
나가자 깨부수자 성차별 노동착취~ 뭉치자 투쟁이다 여성해방 노동해방”
(민중가요 ‘딸들아 일어나라’ 중)
3.8 세계 여성의 날의 유래
산업혁명 이후 많은 여성들이 가정 밖으로 나와 임금 노동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너무나도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착취당하였고, 가정에서는 여전히 가사노동과 육아를 떠맡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성노동자들은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단결하고 싸우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 역사적인 3.8 투쟁이 있었다. 1908년 3월 8일 1만 5천명의 방직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미국 뉴욕 룻저스 광장에 모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공황으로 인한 경제 침체기 속에서, 당시 여성 노동자들은 하루에 12-14시간씩 먼지를 마시며 노동을 했다. 급기야 트라이앵글이라는 한 피복회사의 여성 노동자 146명이 불에 타죽는 참혹한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에 분노한 여성 노동자들은 들불처럼 일어나 거리로 나왔던 것이다. 그녀들은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달라’ ‘10시간 노동제를 보장하라’ ‘노조 결성의 자유를 보장하라’ ‘안전한 작업환경을 제공하라’ 라고 외치며 무장한 군대에 맞서 싸웠다.
2년 후, 1910년 제 2인터내셔널의 노동여성회의에서 독일 사민당(SPD)의 지도자이자 국제 여성노동운동의 지도자였던 클라라 체트킨은 3월 8일을 기념하며 세계 여성의 날로 조직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이후 매년 3월 8일 전세계 각국의 여성 노동자들이 집회를 갖고 거리를 행진하며 3.8 투쟁을 기념하고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위해 싸워오고 있다. 이와 같이 3.8 여성의 날은 성차별과 노동착취에 시달리던 여성노동자들 스스로가 싸움을 통해 쟁취한 날이다.
2005년, 여성 노동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530만 여성노동자 중에서 380만명, 10명중 7명이 비정규직, 기혼여성의 80%가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임금은 남성노동자의 62%,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임금은 전체 정규직의 43%, 100만여명에 달하는 특수고용노동자의 대다수가 여성. 정리해고 1순위.
이것이 바로 2005년 한국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이다. 성차별과 노동탄압에 항거하며 미국의 여성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선지 벌써 100여년 가까이 흘렀지만, 여성 노동자들의 처지는 여전히 열악하기만 하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능력보다는 외모를 중시하는 사회 속에서 받는 고용차별에서부터, 여성 노동자들의 대다수는 비정규직으로 채용된다. 그리고 언제 해고 될지 모르는 불안감과 저임금,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노동을 해야만 한다. 겨우 최저임금을 받는 비정규직 시설관리 노동자들의 대다수는 여성 노동자이다. 특히 골프장 경기 보조원과 같은 특수고용노동자들의 경우에는 노동자성이 인정 되지 않아 노조를 만들어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는 일조차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출산휴가나 생리휴가를 요구하는 것은 해고를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더군다나 그녀들이 여성으로서 겪는 성희롱과 성폭력, 그리고 가정에서 도맡아 하고 있는 가사노동은 여성 노동자들에게 이중의 억압을 가하고 있다.
딸들아 일어나라!
이렇게 여성 노동자들이 겪는 성폭력과 노동착취는 극심하지만, 아직 많은 여성 노동자들은 싸우고 있지 못하다.집회에서 심심찮게 들리는 ‘노동형제’라는 표현처럼 진보 진영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에서도, 가부장적 행태들은 만연해 있어, 그녀들을 투쟁의 주체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더욱 힘들게 한다.
그러나 100여년전 미국 여성 노동자들의 역사적인 투쟁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스스로 싸우지 않으면 스스로의 권리를 쟁취할 수 없다는 점이다. 3.8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는 그 날의 정신을 기리며,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거리로 나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노동자가 여/남 성별을 뛰어 넘어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하여 자본에 맞설 수 있도록, 여성을 억압하는 성차별/성폭력 그리고 가부장적 행태들과 철저하게 싸워나가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남성들과 동등한 일을 하고 같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면,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조직을 만들어 노동조합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리고 산전산후 휴가와 탁아소 시설에 어린아이를 맡길 수 있다면,
오늘 날 우리가 모든 투표에 참여할 수 있다면,
우리가 우리의 성(Sexuality)과 수태를 조정할 결정권이 있다면,
이것 모두는 바로 우리들의 어머니와 할머님들의 피나는 투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코펜하겐 3.8세계여성의날 기념 대회 연설 중에서 -
노동해방학생연대 회원 김성렬
2003년 8%, 2003년 6.9%, 그리고 올 해는 5%
“인구율이 줄어든다고 해서 절대 속지 마세요. 절대 인구수는 계속 증가합니다. 알았지요?” 누구나 한창 수능 공부할 때, 이런 퍼센트 문제에 속은 경우가 있을 것이다. 교묘하게 그래프와 퍼센트로 우리 눈을 현혹시켰던 바로 문제. 그럼에도 어쨌든 대학에 온 우리는 다시금 퍼센트 문제로 고민하게 된다. 바로 매년 반복되는 등록금 인상률 때문이다. 어김없이 올 해도 올랐다. 무려 5%나 말이다. 말이 5%이지, 그 동안 인상률을 고려해 봤을 때, 우리가 실제로 납부해야 하는 금액은 이제 인문계 등록금만 300만원이 넘는다. 이공계는 말할 필요도 없이 그 이상이다. 부푼 마음으로 입학한 05학번 새내기들은 일단 등록을 해야 입학을 하게 되어 있으니, 입학금에 등록금까지 포함한 금액은 인문계의 경우 400만원을 훌쩍 넘기고 말았다.
“누가 고대에 오라고 했는가. 아무도 고대에 오라고 한 사람은 없다.”
등록금이 오르면서 학생들은 휴학에,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이러한 학교 측의 대답은 그 어이없음에 오히려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여기에 “고대가 연대를 이기는 것은 연대보다 등록금 인상을 높이는 것이다.”라고까지 말하는 학교 측의 대답은 과연 온전히 정신을 갖고 사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그렇다면 학교 측에서 내세우는 근거는 무엇일까? 바로 100주년이다. 올 해 고대는 건학 100주년을 맞는다. 그래서 중앙광장 옆의 으리으리한 100주년기념관은 5월 5일 완공을 목표로 거의 다 지었으며, 각종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러한 사업에 올 해 등록금 인상분 115억 중에서 53억이 쓰인다고 한다. 하지만 곰곰이 따져 보자. ‘이제 곧 완공되는 100주년기념관에는 우리가 마음 놓고 24시간 사용할 수 있는 ‘자치공간’이 있는가? 각종 행사를 한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행사는 과연 몇이나 될까? 있기나 할까?‘하고 말이다. 그 어디에도 학생들을 위한 것은 없다. 다만 학교 측의 입장, 재단 측의 입장만 있을 뿐이다.
‘합리적으로 대화로 풀어내자!’ vs ‘오직 우리의 실질적인 대중행동이 필요하다’
과연 어느 것이 더 옳은 말일까? 요즘 사회적으로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를 풀어나가자고 난리가 아니다. 신문 사회면에 가끔씩 ‘노동’이란 말이 들어간 기사가 나오기만 하면 어김없이 사설에는 ‘이제는 대화와 타협으로’하는 글이 실릴 정도다. 하긴 장구한 12년간의 제도권 교육에서 우리는 항상 배워오지 않았는가? ‘사회적 갈등은 구성원들의 대화를 통해 서로간의 입장을 고려하여 타협해야 한다’고 말이다. 학생들 사이에 등록금 인상 반대 목소리가 커지면 학교 측에서도 이러한 ‘대화와 타협’을 강조한다. 여기에 ‘합리적’이라는 말이 덧붙여진다. 학교 측에서 대화와 타협을 강조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저들은 학생들이 하나로 뭉쳐있지 않고 개별화 되어 있는 한 힘에서 결코 밀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대화라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바로 학생들이 하나로 단결하여 뭉치는 것이다. 학교 측의 논리에 말로만 대항해 봤자 학교 측은 당황한 기색은 전혀 없이 속으로 애써 웃음을 참으며 ‘합리적’으로 자신의 논리를 반복할 뿐이다. 이제 말이 아닌 행동이 필요할 때이다. ‘부당한 등록금 인상 반대한다’라고 말만 외칠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피부로 와 닿는 등록금 문제를 이제 결코 좌시할 수는 없다. 앞서 언급했듯 퍼센트 문제를 풀듯 머리로 푸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으로 행동으로 풀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시작이다!
노동해방학생연대 회원 김성렬
1500만 노동자들 중 800만이 비정규직!
2003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한 남성노동자가 월차휴가를 내겠다고 하자 회사 관리자가 와서 식칼로 아킬레스건을 잘라버린 사건. 2004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한 영세한 공장에서 일하던 태국 출신의 여성노동자들의 하반신이 마비가 된 사건. 이렇게 굵직굵직하게 얘기된 사건 외에도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건들은 잠시 잠깐 신문의 한 귀퉁이에서 기사로 나타났다가 어느 새 잊혀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당사자들의 고통 역시 나 몰라라 잊혀질 뿐이었다. 바로 누구의 얘기인가? 누구의 고통인가? 하루하루 열악한 작업환경에 치를 떨며 살아가고 있는, 아무리 일해 봤자 한 달 월급이 백만 원이 채 안 되는, 그야말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이는 누구인가? 바로 우리 주변에 있는 이 땅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지난 98년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급격히 많아지더니 이제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섰다. 노동자들의 실태에 관해서는 그렇게 인색해 하는 정부조차도 인정하고 있을 정도다. 말이 800만이지 그야말로 엄청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이제 그 어디에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시대, 비정규직 800만 시대가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이다.
‘비정규직보호입법’이면 비정규직을 보호하는 건가?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현재 정부가 내놓은 법안을 보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사업주가 2년 동안 마음껏 부려먹을 수 있는 기간이 오히려 3년으로 늘어난다. 비정규직으로서 2년 동안 갖은 설움과 고통으로 살아가는 것도 억울한데 3년이라니. ‘비정규직을 보호하겠다는 것’은 기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고용에 대한 불안감을 줄이고 잘 살 수 있도록 ‘정규직화’ 한다는 것 아닌가? 상식이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 법안은 오히려 비정규직을 양산하려고 안달이 났다. 그렇다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를 보고만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 확산되고 더욱더 열악한 처지로 전락하고 마는 이 법안에 대해 모든 것을 걸고 싸우고 있다. 그들에게는 그만큼 절박한 것이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원칙’, 그 훌륭한 원칙만이 있을 뿐이다. ‘서로 싸우지 말고 대화로 해결하자. 하지만 우리가 정한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불법적으로 행동할 경우 가만있지 않겠다!’하는 그 원칙을 말이다. 하지만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실질적인 힘이 있어야 대화를 통해 뭐라도 따낼 수 있지 않은가? 아무런 힘이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불법행동 하지 말고 대화를 통해 (그것도 정부가 자초한) 문제를 해결하자고 하는 것은 이 법안을 통과시키겠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 목소리로 이 법안을 반대하자!
더 이상 비정규직이 양산되는 것을 이제는 눈 뜨고만 볼 수 없다. 이윤을 위해서라면 일하고 있는 노동자의 손가락이 잘려나가든, 하반신이 마비가 되든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자본가들을 위해 만든 이 법안에 대해 한 목소리로 반대해야 한다. 이 땅 모든 노동자들을 비정규직으로 만들고 노예와 같은 삶을 강요하는 것에 반대하여 우리는 힘차게 싸우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지지와 박수를 보내야 한다. 이는 책 속의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함께 바라보자!
-2004년 10월에 발행된 레드타임즈 3호에 실린 글입니다.
Q. 국가보안법은 유엔인권헌장에도 위배되는 법인만큼 ‘인권’의 차원으로 반대하는 게 옳은 거죠?
A. 물론 국가보안법은 유엔인권헌장에서 말하고 있는 인간의 존엄한 권리인 ‘인권’을 유린하고 있는 법이 맞습니다. 그래서 열우당을 비롯한 정치권의 개혁세력들도 한나라당과 논쟁을 할 때, 이제는 군부독재시절의 악습을 버리고, 자유민주주의체제의 본연에 맞는 새로운 마인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을 정도니까요. 그리고 시민단체들도 정치권에서 말하는 ‘인권’이란 개념으로 국가보안법의 완전폐지를 주장하고 있지요. 그런데 여기서의 문제점은 ‘인권’이란 무기로 국가보안법의 개정 혹은 폐지를 주장할 때, 정치권의 개혁세력이나 시민단체의 주장이 결국은 대동소이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국가보안법이 그 동안 노동계급에게 ‘친북-좌익-용공’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직접 탄압을 가했다는 것은 은폐한 채 어디까지나 현재의 ‘자본주의체제’가 용인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사회’에서 ‘악업이다/아니다’로 생각이 모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권’이 아닌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국가보안법 폐지에 관련한 논란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인권’이라는 것도 먼 옛날부터 인간에게 있어 주어져 있던 ‘보편적 권리’가 아니라 만들어진 것입니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체제로 이행되는, 즉 1789년의 프랑스대혁명처럼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과정에서 새롭게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를 관철시킴에도 불구하고 신분제폐지를 가지고 ‘전 인류의 보편적 해방이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당시 이러한 흐름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진보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부르주아지가 말하는 인권이란 그리고 평등이란 어디까지나 경제적 불평등을 전제로 한 정치적 자유만을 의미했기에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노동계급에게 있어서 이러한 ‘인권’적인 측면으로 숨을 쉴 수 있는 자유, 즉 정치적 자유를 얻을 수는 있었지만(사실 이 과정도 노동계급이 그만큼 싸워서 쟁취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냥 주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자신을 착취의 올가미로 쥐고 있는 자본주의 그 자체를 폐기하기 위해서는 ‘인권’이란 측면에서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르주아지도 인정하는 ‘인권’이 아닌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Q. 그렇다면 현재의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A. 현재 국가보안법 폐지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논란의 핵심은 부르주아 정치권입니다. 여기에 시민단체에서도 국가보안법 완전폐지를 주장하며 개입하고 있는 상황이지요. 앞서 계급적인 관점에서 국가보안법을 바라봐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정작 노동계급은 이 논란에 실질적으로 반대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한국사회에서 노동계급의 힘이 조직적으로 강하게 결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체 진보진영에서도 노동계급은 주도적인 역할을 아직은 하지 못하고 있지요. 이런 상황에서는 사실상 우리가 할 수 있는 활동이란 그다지 많지는 않아 보입니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며 가시화되고 있는 반대흐름은 분명 민주주의투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흐름은 자칫하면 형법으로 대체입법을 한다든지 일본의 예를 따라 파괴활동금지법을 도입한다든지 등의 불완전한 폐지로 멈출 수 있는 한계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완전한 폐지를 요구하고 실제로 이를 힘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계급은 오직 노동계급뿐인데, 아직 조직적인 강한 힘을 갖추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계급이 싸울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태도 역시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학생으로서 노동계급의 투쟁에 힘차게 연대하면서 그 속에서 국가보안법에 대해서 토론할 수도 있으며, 학우들과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자리를 더욱더 만들어 나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작지만 의미있는 실천을 우리 주위에서 하나씩 만들어가는 게 현재 우리가 해야 할, 그리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지난 2004년 10월에 발행된 레드타임즈 3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성매매 특별법은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성매매는《매춘의 역사》라는 책이 있을 만큼 기나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그리하여 인류에게 있어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서 너무도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그리고 오늘도 역 근처만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월수입 몇백, 숙식제공’이라는 조그만 종이들과, 아슬아슬한 옷차림의 여성들이 나와있는 업소 광고지들이 여성과 남성들에게 성을 팔고 또 사도록 유혹하고 있다.
전 국민의 70%가 법의 존재여부도 모른채, 지난 9월 23일 ‘성매매 특별법’이 시행되었다. 성매매 특별법은 ‘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과 ‘성매매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로 제정되어 04년 3월 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이 법은 '윤락', '매춘' 등과 같이 성매매 여성을 도덕적으로 문제삼거나 성을 '파는 것'에만 초점을 두는 용어 대신 '성매매'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윤락행위 등 방지법'에 비해 분명히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 또한 성매매특별법에는 성매매 여성들에게 '피해자'라는 개념을 도입하였고, 성을 거래하도록 알선하는 업주와 중간업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조항도 들어있다.
그렇다면 성매매 특별법은 성매매피해여성들을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는가? 그러기에는 이 법은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성매매특별법에 따르면 ‘성매매피해자’는 위계, 위력 등으로 성매매를 강요당한 자, 마약등에 중독된 자, 장애가 있는 자, 청소년, 그리고 성매매 목적의 인신매매를 당한 자로만 한정되어 있다. 애초 02년 발의되었던 안에 포함되어 있었던 ‘선불금 등 채무의 이용에 의하여 성을 파는 행위를 한 자’는 누락되었고, 피해자임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여전히 동의의 문제가 구성요건으로 남아 있어 이른바 ‘자발적 성매매’를 한 여성들은 성매매피해자의 대상에 속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발적 성매매...라는 말은 언제나 꼬리표처럼 성매매피해여성들을 따라다닌다. 하지만 무엇이 그녀들을 ‘자발적이게’ 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본주의 사회이다. 성매매피해여성들의 대부분은 경제적 이유(가정형편, 빚 등)로 인해 성매매에 유입되고 있다. (물론 자신이 처하게 될 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고 성매매를 택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성매매에 한 번 유입된 여성은 탈성매매를 하기가 너무나 힘들다. 그녀들을 옭아매고 있는 선불금은 월수 몇백으로 갚아지기는커녕, 말도 안되는 명목들(지각비 시간당 1만원, 결근비 20만원 이상, 몇백만원이 넘는 화장품과 옷값)의 강요를 통해 더욱 더 강하게그녀들의 발목을 잡아두는 족쇄가 된다. 설사 힘들게 탈성매매에 성공한 여성들이라 할 지라도 그녀들이 쉽게 그 족쇄를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만났던 한 탈성매매 여성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업주들은 사회에서의 성매매여성에 대한 인식을 무기로 가족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하는 것은 물론 실제 거대한 조직력과 폭력성으로 그녀들을 끊임없이 위협한다고 한다. 이러한 협박과 위협들은 탈성매매 이후 생계유지방도를 찾기 어려운 여성들을 다시 ‘자발적으로’ 재유입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대한 성산업과 결탁한 자본과 경찰은 그녀들의 탈성매매를 돕기는 커녕, 오히려 도망쳐나온 성매매여성들을 다시 업주의 손을 잡고 돌아가게 하는 행태까지도 서슴치 않고 있다. 얼마 전, 성매매피해여성들이 성매매를 방조했다는 이유로 ‘국가’를 상대로 집단 소송하는 일까지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노동자민중과 자본의 화해자, 중재자가 아니라 오로지 자본의 이해만을 대변하는 집행기구일 뿐이다. 국가와 공권력은 성매매피해여성이 아니라 성산업 자본의 손을 들어줄 뿐이다.
그렇다면 성매매의 진정한 해결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성매매특별법보다 진일보한 법을 만드는 것인가? 앞서 이야기했듯이 성매매를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 있다. 소수의 자본가를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살 수 없도록 하는 이 사회, 비정규직에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점점 더 밀어내어 자신의 ‘성’까지도 팔도록 강요하는 이 사회, 국가란 탈을 쓴 총자본이 어떤 수단을 통해서든지 몸집을 불리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이 사회, 바로 자본주의 사회를 끝장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우리의 대안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이 자본가 세상을 뒤엎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과 함께 싸워나가야만 한다.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 그리고 우리 모두의 해방을 위해서 말이다.
성매매는 도덕적으로 타락해서 성을 자발적으로 팔고 싶어하는 소수의 여성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참을 수 없는 욕구가 남성들의 유전자 속에 있기 때문에도 아니다. 성매매를 조장하고 여성억압을 유지시키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 맞서 함께 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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