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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4/25
    유물론으로 역사보기
    레드타임즈
  2. 2005/03/31
    변증법에 대하여
    레드타임즈

유물론으로 역사보기

 

김성렬 tjdfuf@jinbo.net

(노동해방학생연대 고대모임 회원)


“마르크스가 말한 것은 이제 틀렸어요.

한 때 유행했으나 이제는 아니지”


  우리가 수업 시간에 종종 듣는 말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여기서 놀라운 것은 대부분 이의 제기 없이 수업은 그냥 진행된다는 것이죠. 만일 80년대 같았으면 어땠을까요? 어느새 우리에게 ‘변혁’이란 말은 80년대 선배들이나 가슴에 품었던 애틋한 것으로 전락한 듯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해체론과 같은 서구의 학문적 풍조마저 유행이 끝났으니. 그럼 이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적 목표란 과연 없는 걸까요? 우리는 지금‘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나 걱정입니다.

  하지만 예전에 배운 역사교과서를 보면 영 이상합니다. 교과서는 분명히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에 대한 서술을 시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즉 당시 사회 발전에 획기적인 역할을 했던 도구를 중심으로 시대구분을 해 놓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고대 그리스를 설명하며 ‘노예제 사회’라고 하고, 중세 유럽을 ‘봉건제 사회’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이란 큰 축을 바탕으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자본주의 사회’라고 합니다. 이상합니다. 하루하루 일상의 연속이기만 하고, 무료한 나날에 질리기도 하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했던 것이죠. 정말 신기합니다. 우리가 부딪치고 있는 현실은 마치 정지한 것처럼 보이지만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는 변화의 과정일 테니까요.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이 말은 프랑스철학자인 파스칼이 한 유명한 말입니다. 이 말은 아무리 사소한 현상이라도 세계사적으로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런데 한 번 곰곰이 생각해봅시다. 과연 개인적 혹은 우연적인 사건들로 역사가 발전하고 지금껏 이어져 온 것일까요? 물론 몇몇 사건들의 경우에는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예를 들어 역사를 ‘두꺼운 책’이라고 했을 때, 이러한 요소들은 때때로 단어와 구절을 구성할 수는 있어도 문맥상의 의미를 나타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편 역사 발전의 동력을 ‘운명․섭리․세계정신’ 등 초자연적인 관념에 두는 의견도 있습니다. ‘관념이 역사발전의 동력이라?’ 언뜻 봐서는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밥상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서는 밥을 먹을 수 없듯이 뭔가 행동이 필요할 테고, 기본적으로는 밥을 먹을 수 있는 조건이 필요하겠죠.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두뇌는 동물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지만 주변에 어떤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이 조건이 갖추어져야 뭔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많은 분들께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을 수학공식도 사람의 두뇌에서 나왔지만 그 공식들이 순전히 생각에 의해서만 나온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고대부터 건축을 통해 원리를 하나하나 깨우쳐 갔고 기하학과 같은 학문을 시작으로 공식이 나온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역사발전의 동력을 ‘관념’으로 말하는 것은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방향입니다. 만약 관념을 통해 역사가 발전한다면 저는 당장 산 속으로 들어가 수십 수백 번 생각에만 열중하겠습니다. 이 땅의 가난과 고통이 없어지는 그 날까지 말입니다.

 

여러분 금난전권을 아십니까?


  중학교 국사시간부터 시작해서 고등학교 때까지 우리는 무수히 많은 핵심 단어들을 외우고 또 외워야 했습니다. ‘태정태세문단세...’는 기본이죠. 금난전권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금난전권’이냐고요? 바로 여기에 그토록 궁금한 역사 발전의 동력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난전이라 함은 후에 사상으로 발전하는 개인상인들의 상행위를 말합니다. 금난전권은 바로 이러한 난전을 금하는 법입니다. 조선 정부는 생필품을 판매하는 도성 앞 6개의 시전상인들을 제외한 잡다한(?) 상거래를 금하기 위해 이러한 조치를 취한 것이지요. 상업이 아닌 농업이 최우선이었으니 어쩌면 당시 판단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모습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농업기술의 발전으로 농업 생산력이 크게 향상되었고 상품작물이 재배되었습니다. 이제 사회 전반에 걸쳐 단순히 개인적으로 소비하기 위해서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교환하기 위한 ‘상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지요. 하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정부에서는 수백 년 째 지속된 금난전권을 유지하기를 바랐으니까요. 그런데 웬걸요. 금난전권을 폐지하라는 대신들과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쳤고 백성들도 시전상인들의 독점횡포로 인해 자유로운 상거래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정조 때 금난전권은 폐지되고 말지요.

  하나의 예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요즘 필수품이 돼버린 MP3를 한 번 볼까요. MP3를 이용하면 정말 편리합니다. 굳이 음반을 사지 않아도 인터넷에서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자유롭게 다운 받아 들을 수 있으니까요. 놀랍지 않습니까? 직직 늘어나기 일쑤였던 테이프에서 변치 않는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CD로, 이제는 다운 받는 시대가 왔으니까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적재산권이다 뭐다 해서 음악을 공유하고 다운 받는 것에 대해 제재 조치를 취한다고 하니까요. 정보통신 기술은 이미 ‘미래를 향해’ 앞질러 가고 있는데, 우리의 법제도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역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와 같은 예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감이 오지 않습니까? 바로 날이 지나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발전하고 있는 ‘생산력’과 이와 관계되어 있는 ‘생산관계’의 모순입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라. 생경한 단어들이지요. 하지만 앞의 예를 보면 의외로 간단합니다. 농업기술의 발달을 시작으로 사회 전반에 걸친 ‘생산력’의 향상은 예전에는 정당하기까지 했던 금난전권이라는 ‘생산관계’와 모순을 일으켰죠? 그래서 결국 금난전권은 폐지되었고, 조선 후기 시장은 급속도로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이 생동하며 끊임없이 발전하는 생산력에 대해 기존의 생산력에 적합했던 생산관계가 서로 공존할 수 없기에 마찰을 일으키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이 과정 속에서 사람들의 역할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기존의 생산력에 적합한 생산관계 속에서 자신의 기득권을 충분히 가진 사람들은 과거에 안주하게 됩니다. 변화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한테 발전하고 있는 새로운 생산력에 맞는 사회를 만들어가자고 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이들은 당연히 자신이 가진 힘을 이용하여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온갖 탄압을 서슴지 않을 것입니다. 뺏기기 싫을 테니까요. 따라서 새로운 방향으로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능동적인 역할이 필요합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속에서 이처럼 사람들의 의식적인 노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는 어디까지나 인류가 살아온 발자취, 즉 인간의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발전해 온 것이지 다른 무언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역사를 어떠한 관점에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역사의 장구한 세월을 보면 결코 정체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자본주의는 인류의 역사 속에 자기 얼굴을 드러낸 지 200~300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결코 자본주의라고 해서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자본주의 역시 모순이 있을 것이고, 이제 그 모순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추천도서]


독일이데올로기: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함께 쓴 이 책은 사적 유물론의 기본 입장이 훌륭하게 잘 서술되어 있습니다. 시간을 갖고 천천히 읽어보세요.


민중의 세계사: 크리스 하먼이 쓴 이 책은 무려 900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방대한 분량을 자랑합니다. 계급 발생 이전부터 현대에 이르는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요. 세계사를 우리가 그동안 접해보지 못한 민중의 시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신선한 충격을 받을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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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에 대하여

 

현서 minx@jinbo.net

(노동해방학생연대 고대모임 회원)


  변증법이라..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나요? 대부분 교과서에서 제대로 배운 적은 없을 테고, 헤겔을 배울 때 ‘정-반-합’에 밑줄 한 번 치고 넘어갔을 거라 예상됩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변증법에 대해 ‘하나가 맞는 게 있으면(정) 틀린 것도 있고(반) 각각의 장단을 모아 중립(합)이 있다.’고, 변증법이 마치 ‘중용의 도덕’이라도 되는 듯 잘못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변증법은 복잡하게 움직이는 세계를 명확하게 바라보기 위한 과학적 방법이랍니다. 자, 이제 제대로 알아봅시다.


변증법과 형이상학


  변증법은 소박하게는 ‘만물은 변화한다.’ 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스토스는 “만물은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만물이 끊임없는 변화와 생성과 소멸의 과정에 있다.” 라고 말했죠. 그리고  더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이라면 불교의 삼법인설 중 제행무상(‘모든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변화한다.’), 제법무아('모든 현상적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므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변증법의 기본은 세계를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 또 영원히 운동하고 발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죠. 이와 대비되어 세계를 고정불변의 것, 정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형이상학적 관점이 있습니다. 즉, 자연 및 인간 사회 모든 것들은 그 자체가 어떤 방식으로 성립되었든 간에 일단 존재하기 시작한 이상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죠.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A 아니면 B, 긍정 아니면 부정, 삶 아니면 죽음’, 이와 같은 고정불변의 대립이죠. 그렇기 때문에 ‘A는 A인 동시에 A가 아니다’고 말하는 변증법적 사유방식은 생뚱맞게, 또 비과학적으로 느껴집니다. 하지만 오히려 지질학, 생물학, 물리학, 천문학 각 분야에서 과학의 발전은 자연이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 변화와 운동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주었죠. 예를 들어 다윈의 진화론이 발표되기 전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도대체 원숭이랑 인간이 어떻게 같은 부류일수 있다는 말이냐, 원숭이나 인간은 신이 만들어 준 그대로다”라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이제 유인원에서부터 인간으로 진화과정을 통해 발전되어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은 어떠한가요?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는 ‘정확하게 어떤 시점’에서부터 생명의 시작으로 볼 수 있을까요? 또 죽음은? 대략적인 합의조차 힘들 정도로 여기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합니다. 왜냐하면 생명도, 죽음도 끊임없는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이죠. 자연 뿐 아니라 인간 사회의 도덕, 가치, 진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모든 시대에 보편타당한 진리는 있을 수 있을까? 형이상학적 관점에서는 그렇다고 생각을 합니다. ‘인간은 원래 이기적인 존재이다.’ 과연 그럴까요? 오히려 인류 역사를 보면 함께 소유하고 함께 분배했던 계급 발생 이전의 역사가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변증법적으로 보자면 진리라는 것 또한 상대적이며, 시대에 따라 다른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기에 ‘이것이 절대 진리이다’라고 외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죠. 이와 같이 변증법은 자연과 인간 사회의 역사로부터 도출되는 ‘끊임없는 연관, 연쇄, 운동, 생성과 소멸’의 사유방식입니다. 변증법을 하나의 사유방식으로 체계화 한 것이 헤겔의 위대한 공로이긴 하지만, 변증법 자체는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처럼 헤겔 머리 속에서 나온 발명품은 아니라는 것이죠. 


변증법의 세 가지 법칙들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

  모든 자연과 인간 사회의 모든 사물들은 내부에 서로 대립하는 측면들을 갖고 있으며, 그것들은 서로 배척(투쟁)하는 것, 즉 모순을 원동력으로 하여 변화 발전하고 있습니다. 쉽게 예를 들기 위해 우리 인간의 역사를 한 번 봅시다. 중세 봉건제 시대에 봉건영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대립물, 농노가 있었죠. 그리고 잘 알겠지만 농노제 하에서 신음 받던 농민들과 영주 사이의 격렬한 계급투쟁이 있었고,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통일관계, 체제가 생겨나게 된 것이죠. 그리고 자본주의 역시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대립 관계를 갖고 있죠..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전화의 법칙(양질전화)

이것은 단순한 양적 변화가 일정한 시점에 도달하면 질적 차이로 전도된다는 법칙입니다. 쉽게 말하면 만약 머리카락이 많은 어떤 사람의 머리카락을 하나씩 뽑아낸다면 처음에는 별 차이가 없지만 계속 뽑다보면 어느 시점에 도달해서 질적 변화를 가져와 대머리가 된다....이런 것이지요.^^ 예를 들어볼까요? 물의 온도를 계속 높이면 처음에는 별다른 의미 있는 변화가 보이지 않다가, 100도에 이르면 증발하기 시작하면서 액체였던 물이 기체로 질적 변화를 보이게 되죠. 온도를 낮추어도 마찬가지구요. 이렇게 질적 변화가 이루어진 후에는, 새로운 질적 상태에 맞는 법칙들에 의해서만 올바르게 파악이 될 수가 있게 되죠.


-부정의 부정의 법칙

한 번 부정하고, 또 부정한다. 그러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에는 부정의 부정을 긍정으로 돌아오는 것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변증법적 부정은 단순한 이중 부정이 아닌 나선형적 구조로의 ‘지양’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낡은 것이 단순히 파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상태가 극복이 되면서 긍정적인 측면들은 보존되면서 ‘발전’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 하나의 보리낟알을 심는다면 조금 있다가 싹이 트겠지요. 즉, 처음의 낟알은 부정이 되면서 식물이 자라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보리는 자라면서 꽃이 피고, 또 열매를 맺으며 계속해서 부정을 거듭하다가 끝에는 다시 보리 낟알을 생산하게 되죠. 하지만 이 보리 낟알은 처음의 그 낟알이 아니라, 수백 배에 달하는 것이지요. 식물에 따라서 부정의 부정의 과정에 의해 빠르게 질적 개량이 되기도 하죠.


  헤겔이 완결된 체계로 정리했던 변증법을 맑스는 유물론적으로 재정립하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 인간의 역사를 분석하게 되는데요, 아마 다음 레드 타임즈에서 만나시게 될 겁니다. 변증법에 대해 더 궁금한 분들은 아래 책들을 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조지노백,《새롭게 보는 논리학》

  우리에게 익숙했던 형식 논리학과 변증법을 대비하면서 쉽게 변증법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새내기 여러분께 추천^^


-프리드리히 엥겔스,《자연변증법》

  19세기의 자연과학적 발견들을 통해 자연과 사회에 변증법적 법칙이 통용된다는 것을 증명한 책입니다. 과학의 제 분야들에 대한 무수한 예들이 많아요.


-프리드리히 엥겔스,《반듀링론》중 제 1편 철학

  맑스주의를 왜곡했던 오이겐 듀링에 대한 반박을 통해 맑스주의 세계관을 총정리 한 책입니다. 그 중에서 철학 파트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잘 설명해주고 있지요. 레드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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