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드려요! 2015/02/05 13:22

전태일, 순교자

*혁명기도원은 2015년 2월 4일 수요일 저녁예배 시간 한국보건복지정보개발원 해직자들과 함께 전태일 이콘을 축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래 글은 축복식에 앞서 기도원 내부에서 공유했던 내용입니다.

 

 

1. 순교자의 정의
 

'순교자'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마르튀스(μάρτυς)의 번역어이다. 이 단어는 증인이라는 뜻인데, 교회는 말이나 글로 복음이나 하느님의 말씀을 증언한 이들을 부를때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증언들은 많은 경우에 목숨을 잃는 결과로 이어졌기에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는 죽음과 동일시 되었다. 현재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신앙을 이유로 목숨을 잃는 이들을 순교자(Martyr)로 부른다.

 


2. 전태일의 신앙
 

1) 신앙적 배경
전태일과 그의 어머니 이소선은 독실한 신앙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소선은 기도를 통해 시력을 회복하는 체험을 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에 깊이 헌신하기 시작하였고, 자녀들을 위한 기도를 그치지 않았으며, 매일 개인기도 시간을 가졌다. 전태일 역시 일기와 편지 곳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헌신의 고백을 표현하였다. 그는 하느님의 피조물로서의 자신의 지위에 대해 고백하였으며(1970년 3월 중앙일보에 보낸 편지), 하느님의 계명인 안식일을 준수할 수 없게 만드는 환경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있었고(1969년의 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구원의 길임을 고백하였다(임마누엘 수도원에서 쓴 메모). 또한 그는 마지막 일기에서도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잊지 않았다.

 

2) 교회 생활
전태일은 어머니 이소선과 함께 창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기도 했다. 그가 자신의 목숨을 내 놓기로 결심한 장소도 창현교회 임마누엘 기도원 건설 현장에서였다. 그는 언제나 교회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3. 죽음의 계기

 

1) 작은 자들을 향한 사랑
'시다'로 불리던 여공들을 향한 전태일의 사랑은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증언에서 일관적으로 나타난다. 전태일이 자신의 차비를 아껴 여공들을 위한 풀빵을 샀던 상징적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바보회'를 만들어 근로기준법을 공부한 것도, 이상적 회사를 구상했던 것도 그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일기에서 평화시장의 노동자들을 '형제', '마음의 고향', '이상의 전부'로 불렀다.

 

2) 타인을 위한 죽음
1970년 8월, 삼각산에서 결심을 굳힌 전태일은 자신이 사랑하던 이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한다. 그는 자신의 결단이 갖는 이타적 성격에 대해 이렇게 썼다.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그가 마지막으로 펼치려 했던 현수막 역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같은 내용들로,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구원의 길이며, 인간의 힘으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하느님의 법도를 행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임마누엘 수도원에서 쓴 노트)라고 배웠던 전태일은 이미 나눔과 섬김을 통해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죽음에서도 그와 같은 원칙이 관철되기 원했다. 그는 자신의 헌신으로 인해 하느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존엄한 삶을 누리게 되기를 바랬고, 자신의 운동이 "나를 아는 모든 나"는 물론 "나를 모르는 모든 나"들을 통해 계속되기를 바랐다.

 


4. 죽음의 결과

 

1) 그리스도에 대한 재발견
전태일의 죽음 이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는 고백을 했다. 안병무는 전태일을 통해 가난한 이들 사이에서 살았던 예수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고백하였으며, 문익환은 그의 모습이야 말로 이웃을 사랑하는 예수의 모습 그 자체라고 고백하였다. 복음서에 기록되었으나 추상적 신앙고백에 가려져 빛을 잃고 있었던 예수의 행적들이 그를 통하여 생생한 의미로 다가온 것이다.
오재식은 전태일의 죽음 이후에 쓴 "어떤 예수의 죽음"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천민의 친구로, 그들의 무리로, 그들의 아들로 그렇게 장터에서 뒹굴고 거리에서 서성대고, 들에서도 다짐했었다. 눈이 먼 자를 고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상한 자를 만지고, 찢긴 자를 위로하고, 억울하고 지치고 병들어가는 이웃을, 그들을 생각하다가 그만 사랑에 빠졌었겠지."
이처럼 전태일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이 가진 의미를 풍성하게 하는 사건으로 작용했다.

 

2) 헌신된 신자들을 일으킴
전태일의 요청에 따라 어머니는 그의 마지막을 지켰으며, 그가 못다이룬 일을 이루어 달라는 유언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실천했다. 이소선은 이후 청계피복노조 설립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2011년 별세하기까지 평생을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 헌신했다.
전태일의 죽음은 어머니 외에도 여러 사람에게서 인간의 존엄함과 약자 보호에 대한 성소(聖召, 부르심)를 불러일으켰다. 그의 죽음 직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추도식에 참여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재확인 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노동조합 설립 운동에 참여하였다.

 

3) 부활 신앙이 확산됨
전태일의 순교적 죽음은 인권을 위한 헌신을 불러일으킨것 외에 중요한 특징을 하나 더 가지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교 전통의 핵심인 부활 신앙을 널리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민종덕은 전태일의 죽음 뒤에 이소선에게서 싹튼 부활에 대한 신앙을 이렇게 표현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으니 너의 그 사랑이 충만한 죽음이 어찌 헛될 수 있단 말이냐. 진리는 끝내 승리한다는 생각을 할 때 너의 죽음은 반드시 부활할 것을 확신한다. 나는 그것을 오늘 사람들의 가슴마다 확인할 수 있었고 앞으로 그것이 더욱 강렬하게 꽃 피어나갈 것을 확신한다."(민종덕, "어머니의 길")
부활에 대한 믿음은 오재식, 문익환, 안병무 등의 글에서도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그의 죽음이 목격자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서 신앙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은 성령께서 그의 생전과 별세 후에 그를 통해 일하셨다는 증거이다.

 


5. 결론


전태일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졌을 뿐 아니라 가시적 교회에 깊이 헌신했고, 신앙의 기초적 가치인 창조주에 대한 경외와 이웃 사랑을 마음에 품고 몸으로 행한 신실한 신앙인이었다. 그의 죽음 또한 신앙적 결단에 의한 것이었고, 그 결과로 많은 사람들에게서 그리스도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구체적 실천을 불러일으켰으므로 우리는 그의 삶과 죽음이 삼위일체 하느님께 이끌린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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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콘 <순교자 전태일>, 조아라(미카엘라)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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