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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자본주의 세계의 두가지 과제

현금 우리가 살고있는 최대의 과제는
공산주의이념이 붕괴된 이 마당에
최소한 그 이념에 권위를 주고있는 실험의 장이 사라지고 있는 이 마당에,
자본주의라는 유욕의 체계를 억제시킬수 있는 공산주의에 상응하는
새로운 조직화된 힘(organized curbing power)을
어디에 어떻게 확보하느냐 하는 그 일점에 모아진다.
공산주의의 기권은 자본주의라는 인간본연의 주류(主流)에대한 지류(支流)로서의
억제기능,인간본연에 대한 인간당연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또다시 그러한 기능의 회복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본주의는 문명의 자연이로되 <자연의 자연>은 아니다.
인간이 자연과의 관계를 떠나 생존할 수 없다면
자연의 자연을 파괴하는 문명의 자연은 방치되거나 방임될수 없다.
인간의 욕망을 억제시키는 궁극적 힘은 욕망을 발생시키고 있는 몸
그 자체로부터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지만
욕망을 억제시킬수 있는 힘이 나오기 전에
욕망 그 자체의 오판에 의하여 몸을 파멸시키는데까지 이를 수 있다는데
문명속의 인간의 비극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현상을 우리는 "질병'이라고 부르며,
그 질병의 종국은 "죽음"이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두가지 문제를 생각해 볼수있다.
그 첫째는,자본주의라는 인간세의 현상 그 자체의 인식을 순화시키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여태까지의 자본주의의 인식이 오로지 공산주의와의 대결속에서대자적으로 설정되어왔던 그러한 측면들을 과감히 털어 버리는 것이다.
여태까지의 자본주의의 인식이 오로지 공산주의에 대립되는 그 무엇으로서,공산주의와 대결키위하여 자기동일성을 유지 존속되어야만 하는 그 무엇이라는 생각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자본주의라는 기존의 이념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렇게되면 자본주의는 자신의 인식체계를 위하여 또다시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으면 안될 것이므로
그결과는 자본주의 자체의 근본적 수정 내지는 다양성의 확보라는 방향으로 발전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키워나가야 할것은 결코 자본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건간한 사회며 보람있는 인간상이며,
그 사회를 구성하고있는 개개 모두의 건강(health)이다.
이 건강을 위하여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행위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라는 과제만을 철저히 점점해 봐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경제적 행위방식이 반드시 파괴적인 집약적 도시화나 막중한 자본의 투자,대량생산,고도의 테크날로지,개발주의 통제 플래닝 등으로 특징지워지는 기존의 모델에 순종해야만 할 필요가 있는가?
인간의 형이상학적 본질이나 본성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도시 문화의 효용증대만을 꾀하는 현금의 경제학에 자본주의 혹은 경제현상의 미래를 맡길수 있겠는가?
과연 경제현상을,인간이라고 하는 토탈한 걸작품과 생명없는 아톰의 법칙과를 동일시 하려고하는 과학성에 의거하여 법칙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생각해야 할것은 우리 삶의 경제 현상일 뿐이며,자본주의가 아니다.
공산주의가 없어지면 자본주의도 없어져야 마땅하다.
자본주의가 없어진 경제에 남는것은
오로지 인간의 과제일 뿐이다.

둘째,자본주의의 독주나 독선을 막는 힘은 궁극적으로 자본의 논리 그 자체에 의하여 나올수 밖에 없다.
이것은 칼 맑스가 자본주의는 자본의 확대재생산이라는 잉여가치창출의 법칙 그 자체에 의하여 필망할수 밖에 없다는 논리와도 상통하는 것이지만,
여기에 우리는 필망이라는 한 시점적 묵시성을 설정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볼때 지금 자본의 논리를 제어할수 있는것으로서
인류에게 싹트고 있는 가장 근원적 공통의식을 묶는 개념이 바로 "에콜로지"라는 것이다.
현금 에콜로지에 대한 관심은 인간이라는 유기체와 그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에 영향을 미치는 문명의 구조에대한 관심으로까지 확대되었고,
또 모든 유기체의 스스로 그러함에 폭력을 가하는
모든 문명의 폭력에대한 자성의 공동체의식 내지는
그 폭력을 관장할수 있는 정치,사회적 역량의 증대를 꾀하는 민권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에콜로지의 미래적 가능성을 극대화 시킴으로써 매우 총체적인 문명의 억제기능을 강화하는데 과감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현재 에콜로지운동의 비극은
첫째,그것이 아직까지는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요,
둘째 그것이 공산주의와 상응하는 조직력(일례를 들면 공산당 조직과도 같은)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극의 해결도 일시에 이루어질 수있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정치조직 형태와는 다른 의미에서
지구촌적 공동체 의식이 확산되어 가면서,
그리고 소국과민(p.s작은정부,소화小化,아나키즘등을 의미하는듯함)의
제도적 변혁이 초래되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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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은 김용옥의 생태공동체운동에관한 언급이 나온 부분을 읽다가 발췌한겁니다.씌여진 때가 1991년 소련의 공산주의의 붕괴라는 시점중이라 그무렵의 사회적 분위기도 읽을수 있게되더군요...

생태공동체운동은 과거 공산주의 사상을 뛰어넘는
더욱 근원적이고 절대절명의 시대의 요청입니다만...
현재의 이 운동의 한계성을 뛰어넘을수있는
개인들과 조직의 역량을 키워나가야 하는데...
암튼 포기하지말고 멋지게 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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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폭력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삶은 폭력이다."
"사회는 폭력이다."
"생물 개체간의 의사소통방식은 폭력이다."

...중략...


이처럼 폭력은 우리 일상의 한 부분이고 때로는 언어로서, 때로는 물리력으로, 때로는 침묵적으로 행사되며, 행사주체의 기득권의 유무에 따라 은폐되거나 제도화된 폭력으로 합리화 되기도 하고 원시적인 폭력으로 저주받기도 한다. 따라서 '폭력 없는 세상의 염원'은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며,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은 폭력의 소멸이 아니라 정당한 폭력만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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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은 공동체 게시판의 김완진님의 칼럼에서 발췌한 겁니다.
어젯밤 갑자기 이 글이 생각이났는데...
제작년 읽을때보다 지금은 더욱 절감하게 되는군요!

삶은 폭력이다....
삶은 결국 폭력을 밑받침으로 지탱되는거다.

흔히 무신론자들은 종교가 선교를 강조한다고하여 폭력적이라고 하는데
현대의 종교의 역량을 볼때
종교는 더이상 폭력성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는 선택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이 삶은 다분히 폭력적이라는것.
내가 이세상에 태어났다는것 자체가 나의 의지와 무관한 폭력인거고
가족이라는 관계도...
사랑도...마찬가집니다.
(사랑은 특히 폭력적입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또한 아이들의 저에대한 사랑역시

가히 폭력적일수 있다는거죠~!

삶 자체가 폭력성을 지니는데
그안의 사랑이 폭력적인건 당연한건가!


아뭏든 삶 자체가 폭력이란 생각에
갑자기 담~담해 집니다.
제가 그리도 고민하고 괴로와하던 고민들도
한순간 풀리는것 같기도 하구요...

삶은 폭력이다.
삶 자체가 폭력인데
무어가 특별히 아쉽고 서럽고 괴로운게 따로 있겠는가?
나뿐 아니라 세상의 삼라만성이 다 괴로운것을...
저 풀도 괴롭고 저 꽃도 벌레도 병아리도 다 괴롭다 하쟎습니까?

오호라...
그렇구나...

어차피 삶은 폭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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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란게 무엇일까?

측은지심인가...?

 외로움과 외로움이 만나는 그것일까?

 

그는

나를 필요치 않는다는걸 안다.

그는

나없이도 잘 살고있다.

그가 원하는 행복은

내가 아닌것이다.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그는 잘 알고있기에...

그는 정확하고

그는 냉정할줄 알기에...

나는 그것을 알기에...

씨익~

웃고마는 것이다.

 

사랑을 느끼지만

 

그게 사랑은 아닌걸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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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다워지는것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내가 정말
나 다워질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몽테뉴-





 
 
 

쇼팽-왈츠 NO.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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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음...
기사에서

우울증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한 일을 멈추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가슴에 서늘하게 다가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맞는 말이라는거!

실천이 문제겠지요!

형 말씀이
운동을 하라고 하는디...
그것만으로는 부족한듯 합니다.
무언가 총체적인 부정과 변화가 필요하다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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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에서 벗어나는 방법

짝사랑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한가지 뿐이다.

직접 만나 털어놓고

거절당하는거다!

 

한번으론 부족하고

경험상

한 세번 거절당하면 된다.

 

근데!!!

난 그를 사랑하자는 것도 아닌데...

그의 사랑을 원하는 것도 아닌데...

단지 보고싶을 그뿐인데...

그 거절의 쓰디쓴 물을 왜 마시겠다는건가?

너무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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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인생은 비극일까...?
아님 희극인가...?

비극인가?
희극인가?

비극인가...
희극인가...

비극적이기두한데
희극적이기두한...

그런데 일단
이 보고싶은 마음은
비극적이다...

암만 뜯어봐도 비극인듯하다.

보고싶고 보고싶어서
보기도전에 미치는건 아니겠지...

 

이렇게 그를 그리워하게될 줄이야!

참내~!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천하의 정희영이...

이 콧대높은 정희영이...

어찌 이럴수 있단말인가!

그는 아니였쟎나!

그냥 소통의 통쾌함과 즐거움 아니였니?

그것만 즐기면 되는 거였쟎아!

그랬쟎아...

 

도대체 이건 뭐여????

대체 그가 왜 보고싶은거니?

응????
하필 그가!!!!

 

보고싶은것도 욕망이던가?

보고싶은것도 욕심이던가?

이게 이리도 괴로운 감정인줄은 정말 몰랐다!

난 정말 몰랐다!

난 나를 몰랐다!

 

이럴줄 알았으면

미리 마음 단속을 했어야 했는데...

이미 마음을 빼앗겨 버린후이니...

어쩌란 말인가/

이대로 괴로와 해야 한단 말인가?

 

짝사랑은 이제 지긋지긋 하쟎냐?

이제 졸업했다고 믿었는데...

졸지에 재수하고 있는건가?

 

 

사랑하고 싶은것도

사랑받고자 하는것도

무얼 하자는것도

선택하자는 것도 아닌데

왜 보고싶냐구~!

앙???????

 

이 시점에서

그를.

 

에잇~!

정말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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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오늘,내일...

아니 이번주도 볼수 없는걸까...

후후...

다음주면 볼수 있다는겐가...

 

보고싶다.

그 뿐이다.

진짜 보고싶을 그뿐이다.

슬프다.

어쩌다 그에게 필이 꽂힌건지...

하필이면 그에게...

그오랜 시간 눈길한번 주지않았는데...

어느날 갑자기...

마음을 접고 피기도전에

마음의 흐름을 간파하기도전에

마음을 단속할 고민을 하기도전에

내 마음을 빼앗긴건 암만해도 억울하다.

참내...

이게 사랑인지 아닌지 그건 중요칠않고 관심도 없다.

그가 날 사랑하거나 말거나 그게 중요한게 아니란말이다.

문제는,

그를 보고싶어 하는 나의 이 마음이다.

이것이 문젠거다.

 

난 그의 사랑을 원하는것도

그와 연애하겠다는것도 아닌데

참내,,,

보기만하면 좋겠는데

나의 이 타는듯한 그리움의 갈증만 해소하면 되는데..

참내...

이것도 욕심인가보네...

이것도 내 분수에맞질않는 욕심이던가...

 

그와 나는 너무 일찍 만난게 틀림없어!

많이 늙어 만났으면 좀더 여유로왔을텐데...

지금은 삶이 너무 팍팍하기만 하다.

사랑따위에 연연할 여유도없다.

 

에잇~!

도대체 뭐하자는건지..

 정신좀 차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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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결과를 기다리는...

의사의 검사결과를 기다리는 이 심정...

 

덜덜 떨려온다.

내 몸뚱아리가 오직 그의 말 한마디에 달려있단 말인가?

처참한 좌절이다...

 

제발 별일 없기만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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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에대한 변명

나는 그를 사랑한다는게 아니다.

그의 사랑이나 관심을 얻고싶은 마음따윈 없다.

나는 그와의 사랑도 연애도 꿈꾸지조차 아니한다.

그와 나의 관계의 어떠한 진전도 없으리라.

 

그런데!!!

그런데 나의 이 마음은 어인일인까?

온통 그를 향하는 이 마음은?

그가 미치도록 보고싶은 이 마음은?

드문이라도 만나면 조금이라도 오래

그의 곁에 머물기를 원하는 이 욕망은 뭐란 말인가?

보고싶어도 보고 싶다고 말할수없고...

그가 보고싶어 달려왔지만

그는 내곁에 없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

그가 내앞에 나타나기도 전에

내가 먼저 미쳐 돌아버리고 말것만같은

이 괴로움은 뭐란 말인가?

 

마음 단속을 잘 했어야 했거늘...

내가 방심했나보다.

정말 그에게 마음을 뻇겨버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어찌하여 하필 그란 말인가?

그 오랜시간...

나의 안중에도 없던 그를...!

그 변변찮은 인물에 어찌 내가....!

(원래 난 남자의 훤칠한 외모부터 보는 사람이다.)

 

아뭏든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는 나를 거절할것이고

나또한 그를 거절할것임을 안다.

 

포기하는것도 사랑이라면서...

상대의 행복을위해 물러나주는것도 사랑이라면서...

꽤나 고상하고 지적인 인품에

스스로 나름 흡족해하며...

오~~!

게다가 둘다 촘촘하고도 두터운 현실을

자각해버린 사람들인지라

섣부른 사랑은커녕 만남조차 조심스러울밖에!???

결국 서로가 서로를  정중히 거절하고말

교양있는 사람들이란걸 안다.

 

그와 만나 조심스레 그의 생각을 알아내고

그의 말에 눈 반짝이며 경청하다

맞받아치는 짜릿함...

감히 사랑은 아닐진대...

사랑보다도 더 강렬한 소통의 매력이 있다.

그가 준책,

그가 한 이야기,

그가 부른 노래,

그와 나눈 실없는 농담과 진담들이

어찌나 즐겁고 정다운지...!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게서 얼른 떠나질 못한채

내 온 영혼에 녹아내리고 있나보다.

 

그는 양의 품처럼 따스하고

정다운 목소리이지만

냉정할땐 엄청 냉정하고

잘라야할땐 과감히 자르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자르고 뒤돌아보지않는 사람.

그 단호함은 남자다운 매력이기도하다.

 

그의 생각의 폭과 깊이는 넓고 깊다는것도 맞다.

창조적인 감수성과

생활의 단단함

둘다 지닌 남자다.

 

더 중요한건

그와의 소통이

리듬을타며 빠르고 강렬하게 흐른다는것도 느낀다.

다 아는데...

나는 그를 선택할수없다.

그도 나를 택하지 않는다는것도 알고있다.

 

찰라의 느낌도

사랑이라고 쳐주다면

내가 느낀건 소통이며...

사랑이었다.

그러나 느낌!

그뿐이다.

더이상의 전진은 없다.

애틋한

그 느낌만 간직하겠다.

소통의

그 강렬한 순간만을 기억하겠다.

그러면 성공이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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