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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지하생활자의 수기

 

서울 봉천동 반지하방에 사는 ㄱ씨 오늘도 늦잠을 잤다. 텔레비전 두 개 크기만 한 창문으로 겨우 기어들어오는 햇볕으로는 시간을 가늠하기도 힘들거니와 자고 난 뒤 목구멍이 칼칼해 아침마다 일어나는 게 고역이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대충 씻은 뒤 빨래건조대에 널린 셔츠를 집는 순간, 쉰내가 코끝을 찌른다. 마땅히 둘 데가 없어 거실에 빨래를 너는데 반지하라 그런지 잘 마르지 않는다. 방향제를 듬뿍 뿌린 뒤 서둘러 가방을 챙겨 지하철역으로 뛰어 가는데 쉰내와 화학약품 냄새가 섞여 더 고약했다.

 

지하철역 입구로 들어서면서 ㄱ씨는 호흡을 가다듬는다. 얼마 전 이 전철역에서 석면가루가 환경기준치 넘게 검출되었다는 기사를 본 뒤 되도록 다른 역을 이용하려고 하지만 이렇게 늦잠 잔 날은 어쩔 수 없다. 승강장으로 내려와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천장 환풍기에서 쾨쾨한 바람이 쏟아진다. ‘아차!’ 하고 옆으로 비켜서서 환풍기를 올려다보니 철망 사이에 먼지뭉치가 너덜너덜 달려 있다. 다행히 때마침 지하철이 도착해 객실로 몸을 밀어 넣었다.

 

출근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라디오를 들으려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아침마다 시사뉴스를 정리해주는 방송을 들어두면 거래처 사람들을 만날 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끼-익’ 하는 지하철 소음과 안내방송 탓에 중요한 내용을 놓치고 말았다. 지하철 내부를 불연재로 마감한 뒤로 소음이 더 심해졌다는 기사를 언뜻 봤던 기억이 떠올라 라디오 듣기를 포기하고 다음 역에서 내렸다.

 

대형서점에서 근무하는 ㄱ씨는 일하는 곳이 지하철역과 붙어있어, 출구로 나갈 필요 없이 연결된 지하통로를 걸어서 회사에 도착했다. 아침회의를 끝낸 뒤 난방시설에 문제가 있다는 보고를 받고 지하2층에 있는 기계실에 들렀다. 기계실 문을 열자 뜨거운 열기가 후끈 올라왔다. 집채만 한 보일러와 수없이 많은 파이프가 서로 얽혀 있는 기계실을 처음 가본 ㄱ씨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로 같은 곳을 지나 반대편에서 작업하던 보일러 관리인을 불렀다. 한참을 불러도 대답이 없다.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러워 못 들었나 싶어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기계실을 빠져나왔다.

 

주문물량 점검하고 나니 벌써 점심시간. 오랜만에 밖으로 나가서 점심먹자고 얘기했지만 추운 걸 죽도록 싫어하는 후배 녀석 탓에 날마다 가던 지하 식당코너에서 간단히 해결했다. 점심 먹은 뒤 요새 잇몸이 계속 붓는 것 같아 후배에게 가까운 치과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얼마 전 지하상가 안에 새로 치과가 들어섰는데 몰랐냐고 되묻는다. 요샌 병원까지도 지하로 들어오는구나 하고 신기해하며 서점으로 돌아왔다.

 

오후에 신간이 들어오기 때문에 재고정리를 위해 창고에 쌓인 책들을 한곳으로 옮겼다. 먼지가 풀풀 날리지만 지하라 딱히 환기시킬 방법이 없어 다들 마스크를 썼다. 관리팀에 근무하는 동기한테 내년엔 공기정화기를 꼭 설치해달라고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이 신간을 실은 트럭이 들어왔다. 창고 옆문이 바로 지하주차장과 연결돼 있어 책 나르는 게 그리 힘들진 않지만 지하주차장 가득한 매연이 갑자기 밀려들어왔다. 더구나 주차장 한쪽 구석에서 다른 부서 직원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어 숨이 턱까지 막혀온다. 원래 금연구역이지만 밖에 나가는 게 귀찮아서 그런지 다들 이곳에서 담배를 피운다. 이젠 ‘금연’이라는 팻말이 무색할 정도로 이곳은 공공연한 흡연 장소가 돼버렸다. 

 

신간정리까지 마치고 책상에 앉은 ㄱ씨는 한숨 돌리며 퇴근 준비를 했다. 거울을 보며 흐트러진 머리를 빗는데 셔츠 소매와 옷깃에 때가 묻어 새카맣게 변해있었다. 오늘 새로 입은 셔츠인데 하루도 못 가서 이렇게 때가 타곤 한다.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문득 모니터 옆에 놓여 있는 라벤더가 오늘 따라 무척 시들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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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1 17:38 2009/03/01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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