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10/05/03

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5/03
    작은 용산 두리반
    씨앗(산길)
  2. 2010/05/03
    단편선...
    씨앗(산길)
  3. 2010/05/03
    소히-한강 송전탑 위엔 사람이 살았어(1)
    씨앗(산길)
  4. 2010/05/03
    두리반
    씨앗(산길)
  5. 2010/05/03
    김반장
    씨앗(산길)
  6. 2010/05/03
    싱어송라이터 소히
    씨앗(산길)

작은 용산 두리반

'아리랑'은? '분홍신'은?…'홍대 앞 잔혹사'

[여기가 용산이다] '작은 용산' 두리반을 지키자!

기사입력 2010-03-26 오전 10:22:24

 
버스에 오른다. 10분도 채 달리지 않아 누구를 위한 개발이냐고 육두문자로 적힌 펼침막이 펄럭이는 게 눈에 띈다. 벌써 반 년 넘게 내걸린 절규다. 눈을 감는다. 홍대입구역 근방에도 저렇게 절규하는 '사람'이 있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부터 불합리한 재개발에 맞서 처절하게 농성하고 있는 식당 두리반의 소설가 유채림!

한참 동안 침묵하고 달리던 버스가 홍대입구역을 알린다. 눈을 떠보니 공항철도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공사장이 시야에 잡힌다. 차창에 바짝 달라붙자 가림막 너머로 유채림의 농성장인 두리반이 겨우 보인다. 못 와본 사이 '토지는 10배 매입했는데 세입자는 알거지'라고 쓰인 펼침막 네댓 개가 내걸려 있다.

무사하구나. 그래도 잘 버티고 있구나.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미 지나친 두리반 쪽을 돌아보니 공항철도공사 현장이 길게 이어져 있다. 2010년 말 개통 예정인 공항철도 역사와 2호선 홍대입구역 사이에 환승 통로를 시설하는 것이란다. 2006년 3월 16일, 마포구청은 공항철도 역사가 들어설 인근을 '지구 단위 계획' 지역으로 발표했고, 그로 인해 이곳 상가 세입자들은 '도시 및 주거 환경 정비법'이나 '상가임대차보호법'의 보호도 전혀 받지 못하고 알몸으로 쫓겨난 터다.

세계 경제 대국 11위니 뭐니 떠벌리는 나라의 수도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만행이다. 투기 자본을 규제하고 서민을 보호해야 할 행정관청이 오히려 투기 자본을 부추겨 서민을 알거지로 내모는 형국이다. 우리 사회는 왜 이토록 잔인한가. 이런 작태가 언제까지 용인되어야 하는가. 묵묵히 일하는 것으로 이 사회를 떠받쳐온 민초들을 보듬기는커녕 왜 자꾸 벼랑으로만 내모는가.

볼일을 끝내고 서둘러 홍대입구역 두리반으로 향한다. 꽃피는 춘삼월에 칼끝 같은 황사바람이 몰아친다. 이쯤이야 별것 아니지. 농성장에서 기나긴 겨울을 난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바삐 걸음을 놓는다. 철거 현장 안쪽을 따라 두리반으로 가는 동안 '아리랑'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장사했던 갈빗집 한옥이 눈에 들어온다. 텅 빈 한옥은 문짝이 덜렁거리고 쓰레기가 쌓여 있다. 작년 이맘때쯤 보았던 용산의 스산한 풍경을 다시 보는 듯하다.

유채림이 농성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남아 있던 신발 가게 '분홍신'은 그새 사라지고 없다. 돈만 된다면 어떤 짓도 서슴지 않는 자본에 밀려 억울하게 쫓겨난 '분홍신' 주인은 어디로 갔을까.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자행되는 투기성 강한 이권 사업으로 서민들은 수없이 거리로 쫓겨나고 있는데, 이 참혹한 현실을 개선할 방도는 없는 걸까. 막개발로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지고, 그 대가로 민간 건설 업자들만 막대한 개발이익을 챙기는 부조리를 어떻게 하면 바로잡을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두리반에 들어선다. 먼저 와 있던 목사들과 이곳을 드나들며 안면을 튼 이들이 나를 반긴다.

▲ 홍익대학교 앞 '두리반' 식당은 그곳에 존재해야 한다. 누구도 '여럿이 둘러앉아 먹을 수 있는, 크고 둥근 상'을 의미하는 두리반을 걷어찰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다. ⓒ프레시안(최형락)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유채림이 이윽고 얼굴이 벌게진 채 투기꾼들을 앞세워 한국토지신탁이 행한 짓거리에 대해 성토하기 시작한다. 지금은 공터로 남은 자리에 원래 4층 건물이 있었고, 지하에 라틴댄스학원이 세 들어 있었다. 한국토지신탁은 1층부터 4층까지 모든 유리창을 박살내고, 건물 벽에는 '철거' '위험'이라는 글자를 써갈겨대 아예 정상 영업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라틴댄스학원은 끝까지 싸워야 했으나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냥 알몸으로 쫓겨나는 길을 택하고 말았다. 꽃집은 수도를 끊어 영업을 방해했고, 두리반과 다모아주점은 에어컨 실외기냉매를 빼내는 방법으로 영업을 방해했다.

사람의 생명만 그렇게 짓밟아댄 것이 아니다. 두리반 뒷마당에 있던 100여 년 된 느티나무를 보라. 건물과 토지를 매입하기 바쁘게 한국토지신탁은 느티나무부터 베어버렸다. 기존의 모든 생명을 가차 없이 쓸어버리겠다는 선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용산에서 그랬듯 생명이 붙어 있는 모든 것은 죄다 쓸어버리겠다는 선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 쫓겨나고 다 베어버린 자리에 두리반만이 남아 있다. 유채림은 투쟁할 수밖에 없어 투쟁하는 거라고 말했다. 먼저는 자신을 위해서지만, 줄줄이 계속되고 있는 재개발 지역의 상가 세입자들을 위해서라도 기어이 이겨야 한다고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네 식구의 생계가 달린 문젠데 달랑 이사비용 300만 원만 받고 길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질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재개발 시행사인 한국토지신탁과 시공사인 GS건설, '지구 단위 계획' 지역이라는 행정 카드로 이들 자본의 반사회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를 합법화시켜준 마포구청을 상대하는 투쟁이기에 버거워 보인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 그와 같을까.

늦은 밤, 두리반을 나설 때는 철늦은 눈이 내린다. 버스를 타고 서울을 벗어난다. 길을 덮은 눈 때문에 버스는 엉금엉금 기어간다. 그 와중에도 내 머릿속은 두리반 생각으로 꽉 차 있다. 90여 일의 농성으로 수척해진 유채림과 그를 돕는 이들의 얼굴이 차창에 어린다. 그런대로 마음은 좀 놓인다. 유채림과 손을 잡고 이 사회의 불의, 부정과 맞장 뜨고자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록 다윗의 작은 주먹이지만 골리앗에게 돌을 던져보겠다는 그들의 의지가 결연하기 때문이다.

눈보라를 헤쳐 나온 버스가 몇 시간 전에 보았던 육두문자 펼침막 앞을 천천히 지나간다. 이 척박한 현실에서 가장 가능성 있는 대안이란 강력한 연대밖에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그 연대에 나도 기꺼이 어깨를 걸리라 다짐한다. 부디 유채림의 네 식구가 벌어먹고 살 수 있을 만큼 생활 터전이 주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반드시 봄이 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단편선...

 

퍼온 글^^

단편선이라고 아주 매력적인 음악을 하는 친구를 봤다. 두리반에서

연주하면서 긴장된다고 막걸리를 들이키길래 나도 두 모금 얻어마셨다.

하여간 재밌는 친구다. 병신같지만 멋있어^^;; 요런 느낌 ㅋㅋ

 

Q: 고황 : 필명이 특이하다. ‘회기동 단편선’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됐나?
A: 회기동 단편선(이하 단편선) 전엔 친구들이랑 다른 이름으로 밴드를 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이 하나 둘 씩 군대에 가고 혼자 남은 거다. 새로 이름을 짓는데 일단 회기동은 들어가야 할 것 같더라. ‘청량리 브루스’, ‘서교동 하이에나’이런 것처럼. 그리고 05년도부터 소설을 많이 봤는데, 특히 단편소설을 많이 봤다. 단편선이라는 어감도 좋고. 그래서 회기동 단편선이 된 거다. 삶의 단편들을 음악으로……뭐 이런 의미는 차후에 부여했다. [녀석다움을 보여주는 추임새죠. 종윤이는 가식도, 허울도 없는 매우 진솔한 녀석입니다. 덕분에 녀석의 겸손한 얼굴과 스타일이 한껏 빛을 발하는 것인가봐요]

Q: 고황 음악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A: 단편선 중 3때 일렉트로니카에 빠져있었다. 그러다 고1때 밴드 <미선이>의 음악을 듣고 모던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같이 컴퓨터 게임하고, 오락실 다니던 친구들 모아서 시작했다. 기타는 고3때, 공부하기 싫어서……

Q: 고황 뮤지션으로 꽤 유명한 것 같더라. 공연도 많이 하고, 싸이월드에 음원도 있고.
A: 단편선 아, <초콜렛>. 그 곡은 군대 가기 전에 술값 벌려고 과감히 판 곡이다. 내 스타일과도 많이 다른 곡이다. 원래 내 스타일은 아방가르드한 포크다.  [아방가르드한 포크라니! ^^ 이종간의 배합을 통한 언어유희! 이러한 놀라운 재주는 종윤이의 트레이드마크죠. ]

Q: 고황 웹진 <보다>에는 음악 평론도 올리던데, 바쁘겠다.
A: 단편선 바쁘다. 녹음도 해야 하고, 공연도 해야 하고, 글도 써야하고, 빨갱이 짓도 해야 하고. 잠 잘 시간도 없다. 그래도 재밌으니까 한다. 행복하다.

Q: 고황 바쁜 와중에 대자보도 썼다.
A: 단편선 너무 화가 나서. 열폭했다고 보면 된다. 사실 나는 지금 총학생회를 지지하지 않는다. 또 고재석과도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다. 인사도 하고. 그런데 그건 사적인 관계인 거고, 이건 공적인 이야기다. (고재석이 붙인)대자보를 봤는데 이건 너무 뻘글인거다. 내가 언론정보학 전공이라 사진을 이용하는 것에 민감한데, 공개한 사진이 증거로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진이더라. 일반학우 운운하는 것도 황당하고. 아침에 고재석이 붙인 대자보를 보고 수업도 빠지고 글을 썼다. 점심 값 들고 가서 출력해다 붙인 거다.  고황 그게 참 특이하다. 화가 나서 자비를 들여서 자보를 썼다는 게. 더 특이한 건 그 글에 학우들이 반응을 보였다는 거고. 학교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올린 자보는 조회 수가 1500건 가까이 되더라. 직접 쓴 그 글에 대해 얘기를 좀 해보자. 글에 ‘정치 좀 하자’라고 썼다. 단편선 말 그대로다. 사실, 정치 좀 하자는 건 다른 게 아니고, 호구가 되지 말자는 거다. 후배들한테 정치얘기 하면 부담스럽다고 하는데, 그러다가 호구되는 거다. 외면하면 당장은 마음이 편할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그게 정말 마음이 편한 길인가. 우리가 고등학생은 아니잖나. 집돈 받아쓰는 나이도 아닌데, 자기한테 뭐가 유리한지는 따질 줄 알아야 한다. 잇속 챙기고, 사리사욕 챙기자는 거다.

Q: 고황 우리학교 학생들이 좀 착한 편이긴 하다.
A: 편선 맞다. 화도안내고, 순하고……. 예를 들어, 남학생 휴게실만 해도 그렇다. 물론 여학생휴게실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여학생 휴게실을 먼저 만들었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신축건물에도 남학생 휴게실이 없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어제도 나는 청운관 빈 강의실에서 자다 나왔다. 사실, 그래서 남학생 휴게실을 요구하는 투쟁을 계획했다. 완전히 필요에 의한 투쟁. 한 스무 명이 중앙 도서관 벤치에 자리 잡고 누워있는 거다. 음악도 듣고 잠도 자고. 앞에는 남학생 휴게실 만들어 달라고 팻말 세우고. 시간이 없어서 실행하지 못했지만, 이정도 요구는 정당하지 않나.

Q: 고황 같이 행동하는 것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글에도 연대하자고 썼다.
A: 단편선 당연하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 보다 세 사람이라도 모였을 때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원래 진리는 평범한 언어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고, 대개의 평범안 언어는 당연해서 평범해 보입니다. 그래서였는지 종윤이가 늘 말하는 '연대'나 참여'라는 문제를 직면할 경우 사실 저는 방관자의 자세로 대처한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부분이 바로 제가 더 종윤이를 좋아하게 된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전태일 추도 공연 중 사진


Q: 고황 실제로 모이는 사람들이 있나?
A: 단편선 전에는 한예종 다니는 친구들이랑 작업을 많이 했다. 대학생 예술행동이나 희망콘서트 같은 것. 요즘은 ‘좌익’을 마케팅 포인트로 잡고, 인디 레이블을 하나 만들려고 계획 중이다. 사실 나도 혁명을 얘기하는 극좌파는 아닌데, 극좌파를 콘셉트로 잡을 생각이다.

Q: 고황 표현 방식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보통 대자보는 정색하고 쓴 글이 많은데, 이번에 올린 대자보는 무엇보다 글이 재밌었다.
A: 단편선 이번 자보는, 사실 내가 좋아하는 문체에 대한 오마주 같은 것이다. 원래는 따뜻한 글을 쓰는 남자다. 다만, 최대한 어떻게 재밌게 쓸까 고민했다. 전에 술 먹다가 갑자기 만든 모임이 하나 있다. 실제로 모인적은 없는데, 플래카드를 재밌게 써보자고 의기투합한 모임이었다. 그때 얘기한 게 이런 거였다. 예컨대, 보통 ‘등록금 동결하라’고 플래카드를 쓴다면, 우리는 ‘교수님, 등록금 인상되건 말건 우리는 A+주실 거죠? - 개념녀들’ 이런 식으로 써보자는 거다. 역설적으로.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환기시킬 수 있는 플래카드를 써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종윤이는 음악보다는 정치가 어울린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바로 이런 점이죠. 남들이 생각할 수 없는 창의적인 해결 솔루션을 내어놓는 당돌함!]

Q: 고황 목표했던 대로 블로그에 여학우들이 많이 들렀나?
A: 단편선 전혀. 오히려 남학우들 유입수가 늘었다.

Q: 고황 그래도 성과가 있다면?
A: 단편선 경자네(경희 자유창작자 네트워크)라는 사조직을 하나 만들려고 준비 중인데, 이번 일로 뜻이 맞는 친구를 만났다.  

Q: 고황 사조직이라면 어떤 건가?
A: 단편선 대단한 건 아니고, 열흘에 한번 정도 정문에서 공연하고, 수공예품을 팔아볼 생각이다. 학교의 구성원이 생산하고 판매하는 거다. 학교가 너무 조용하고 재미가 없으니까 뭐라도 만들어 보려고 계획한 거다.

Q: 고황 맞다. 학교에 이슈가 없다. 왜일까.
A: 단편선 일단, 전에는 학교 안에서 학생운동권이 이슈를 만들어왔다. 이젠 그게 안 된다. 나는 학생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측면에서는 학생운동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다.

Q: 고황 어떤 측면을 말하는 건가. 왜 학생운동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나?
A: 단편선 일종의 시스템문제다. 학생운동은 아직 중앙집권적인 시스템인데, 요즘 학생들은 어떤 구심점이 있는 세대가 아니다. 자기 영역에서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세대다. 여기에 맞춰서 권력을 해체시키는 방향으로 운동의 방식이 변화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생운동은 미래가 없다.

Q: 고황 자기 영역에서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세대라고 했는데, 20대론을 말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20대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사람도 있다. 그 글 봤나.
A: 단편선 봤다. 그냥 뭐, 그 분에게 희망이 안 보인다. 희망을 어디서 찾나. 그야말로 ‘너나 잘하세요’다. 일단, 세대론을 말할 때, 단순히 ‘20대’로 뭉뚱그리지 말고 신자유주의의 직격탄을 맞은 세대로 보는 게 맞다. 90년대 말 학번까지 포함해서 포스트 IMF 세대로 봐야 한다는 말이다. IMF 전후로 사회 전반이 완전히 달라졌으니까. 그리고 이 세대에서 더 세분화 하면 X세대와 구심점이 없는 N세대(우리 세대)로 나눌 수는 있다. 우리 세대에는 2002년 월드컵 이후로 문화적 중심축이 없었다. 마지막 국민가요가 에스지워너비 정도니까. (소녀시대, 원더걸스는 아이돌 씬이 새로 만들어졌다고 봐야한다. 하다못해 이 아이돌 씬도 한 가지 특징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소녀시대와 투애니원을 비슷하다고 말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더 이상 문화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하나의 보편성으로 설명이 안 되는 세대다. 누굴 깎아내릴 것이 아니라, 이 세대의 연대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인지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Q: 고황 그래도 그 글에 일견 맞는 말도 있다. 목소리를 안 내는 세대라는 말은 맞다.
A: 단편선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도 인정하면 지는 거니까. 그리고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활발히 목소리를 내는 20대도 많다.

Q:고황 맞다. 표현욕구가 없는 것 같지는 않다.
A: 단편선 그래서 매체를 하나 만들어 봤으면 좋겠다. 학교의 정책을 세부적이고 논리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매체. 그리고 이 지역, 회기동에 사는 분들의 생활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접목시킬 수 있는 매체.  

Q: 고황 잘 진행되면 근사할 것 같다.
A: 단편선 큰 걸 바라는 건 아니다. 그저 뜻 맞는 사람들 열 명, 열다섯 명 정도 모여서 놀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재밌게. 운동이, 정치가 사실은 대단한 게 아니다. 이번 대자보사건에서 ‘운동권’과 ‘정치적 활동’이라는 단어가 도발적으로 사용 됐다. 이 공격이 유효할 것이라고 생각한 글쓴이도 애석하지만, ‘학우의 정치적 활동’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가 오고가지 않은 것도 애석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운동이 뭐 별건가. 정치가 뭐 별건가. 그야말로, ‘합법적으로’ 정의된 기본권 아니었나? 마음 맞는 친구들이 모이면 그게 정치의 시작이고, 노는 것이 운동의 시작 아닐까. 정말이지, 정치 좀 하자. 기왕이면 제대로.
 

 

 

 P.S) 그가 04년 08년에 각각 작곡한 '안녕'과 '초코렛'을 첨부합니다.

       편의상 곡 전체가 아닌 일부만 게재함을 밝힙니다.

       [상단 우측 클릭]

 

 P.S) 그의 블로그입니다: http://danpyunsun.egloos.com/ (여자친구 없어요)

 

[출처] 회기동 단편선|작성자 여뱅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소히-한강 송전탑 위엔 사람이 살았어

"조깅하는 사람들은 여기 사람 사는지도 몰라"

[RevoluSong] 소히의 <한강 송전탑 위엔 사람이 살았어>

기사입력 2010-01-14 오후 4:56:08

  • 크게보기
  • 작게보기
  • 기사스크랩
  • 바로가기 복사
  • 프린트
10년 뒤 한국사회는 또다시 두 개의 국가로 나눠질지 모른다.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격차는 엄격한 계급사회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같은 인종적 특징을 타고 났을 뿐, 먹고 마시고 입고 살고 교육받고 놀고 즐기는 문화가 완전히 다른 한국 사회의 상위 10%와 나머지 90%의 삶은 너무나 견고한 벽으로 둘러쌓여 형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벽을 뚫기 어렵다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하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스스로 하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이 노동자이면서도 노동자라고 불리기를 꺼려하고, 노동조합의 파업에 적대적이며, 자신이 사는 아파트 값이 오르기만을 열망하는 사람들은 결국 주류의 패러다임에 경도되어 승자독식의 체제를 끊임없이 강화시켜줄 뿐이다.

가령 서울의 서북부나 동북부에 사는 사람들이 강남의 부동산 가격이 오를 때마다 자신이 사는 아파트 값이 덩달아 오르기를 바란다고 치자. 그래서 자신들이 사는 변방의 아파트 가격이 올라간다 한들 그 결과는 참혹하다. 왜냐하면 다함께 급등한 아파트 가격으로 인해 결국 그들의 자녀들은 서울에서 아파트를 구하지 못하는 미래를 맞아 변두리 도시로 쫓겨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문화평론가 L의 주장처럼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과 이를 뒷받침하는 신화, 그것은 어쩌다 길거리에서 정치적 유인물을 나눠 줄때도 금세 확인된다. 유인물을 가장 받지 않는 부류는 바로 20대와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다. 자신은 비정규직 문제와 관계없고, 용산참사와 무관하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이들의 오해와 그 오해를 작동시키는 사회정치문화의 패러다임은 한국 사회에서 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지에 대한 답변을 완성시켜준다.

밴드 잠에서 활동하다 솔로로 독립해 활동중인 잔뼈 굵은 인디 뮤지션 소히의 곡 <한강 송전탑 위엔 사람이 살았어>는 바로 이러한 한국사회의 모순같은 현실을 자신의 생생한 체험으로 담아낸 곡이다. 지난 해 초봄 억울하게 직장에서 쫓겨난 콜트콜텍기타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이 한강 양화대교 옆 고수부지 송전탑에 올라가고 그 곁에서 작은 공연을 했을 때, 그들의 절박함과는 무관하게 어떤 사람들은 그저 조깅을 하며 지나가는 모습을 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든 사회적 문제에 다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안간힘을 다해 자신들의 삶을 지키려 싸우는데 어떤 사람들은 무심하게 지나가는 풍경을 지켜보며 그녀는 송전탑에 올라간 사람과 용산참사의 피해자들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동시에 사람들의 무심함과 외면에 깊이 상처 받은 것이다.

그러나 분명 이것이 우리의 현실일것이다. 민중가요 음악인은 아니지만 지난 2년동안 촛불집회와 용산참사, 콜트콜텍기타 노동조합의 활동현장 등에 기꺼이 달려와서 자신의 1집에 담긴 따뜻한 노래들을 부르곤 했던 뮤지션 소히는 바로 이러한 현실을 놓치지 않고 노래함으로써 2009년의 한국사회를 아프게 증언해냈다. 누군가가 해고당하고, 보금자리에서 쫓겨났다는 것보다 더 슬픈 것은 그 일을 받아들이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다.

그런데 민중가요 음악인들이 현실에 대한 분노와 승리에 대한 다짐에 주로 매달림으로써 말하지 못한 사람들의 오늘을 오히려 이념적으로는 덜 철저하고 경험도 더 적을지도 모르는 그녀가 더 정확하게 기록해낸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그녀가 지난 2년동안 이런 저런 문제적 현장에 자주 와서 소박한 마음 하나만으로 노래하고 가면서 현실을 가감없이 들여다보았기 때문일것이다.

그리하여 어쿠스틱 기타와 미디로 찍은 드럼과 이펙트 사운드가 만들어 낸 투명하면서도 다소 몽롱한 사운드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리얼한 그녀의 시선이다. 바로 그녀가 절감한 현실 인식의 차이와 무심함과 얄팍한 사회적 연대에 대한 탄식과 비애이다. 이처럼 현실을 냉정하게 기록하고 진심을 다해 표현해내는 것은 우리 시대 예술가들이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역할이며 존재의 이유일 것이다. 싸움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해도 좋은 노래는 다시 우리를 멈추지 않게, 아니 멈출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노래의 힘이다. 뮤지션 소히가 보내온 편지를 덧붙인다.

"작년 봄, 겨울이 채 끝나기 전의 싸늘한 날씨에 양화대교 옆 한강 고수부지 송전탑에서 조그마한 공연이 하나 있었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부당 해고한 회사에 맞서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고자 고압전류가 흐르는 송전탑 위에 올라갔고 그 탑 옆에서 작은 공연과 다큐멘터리 상영회를 가진 것이다. 내게 그 광경과 기억은 참 특별했다. 서늘한 날씨였는데, 위에 올라간 분들의 마실 것과 먹을 것을 긴 줄을 이용해 공급했고 나머지 분들은 옆의 큰 천막에서 생활하고 계셨다.

내 노래를 듣는 이는 서너 명만 빼고는 모두 콜트 노동자들이었고, 공연 하는 곳 옆을 동네 주민들이 조깅이나 산책을 하며 지나갔다. 그렇게 답답한 일을 겪은 사람들은 어디든 위로 올라가야 했다. 콜트콜텍 노동자뿐만 아니라 용산도 그랬고 쌍용자동차도 그랬다. 그래야 사람들이 봐주니까. 관심 가져주니까.

▲ ⓒ프레시안
송전탑 위에서 용산을 바라보는 걸 상상해 보았다. 점점 더 욕심내는 사람들 때문에 삶이 서글퍼진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울고 있는 것을…. 부자든 해고당한 사람이든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든 모두 한강을 보며 살게 되었지만 참 다른 삶이다. 우리는 마치 각자의 삶인 양 살고 있지만 교묘하게 뺏고 빼앗기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교묘함을 가리고 있는 것이 사회와 정부다. 그리고 가려진 장막 사이로 유유히 한강변을 운동하며 지나는 사람들 또한 존재한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재판에서 작은 승리를 거뒀지만 아직도 그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자신이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에게 못할 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긴 시간 지나지 않아도, 법이 재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인간성 회복의 시대가 어서 열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에 짜투리 마음이라도 내어 줄 수 있는 공존의 시대도 어서 열리길 빈다."



<한강 송전탑 위엔 사람이 살았어>

작사/작곡/노래/연주 소히

한강 송전탑
위엔 사람이 살았어
그 위에선 누굴 위한건지
폐허들이 보였어
폐허 속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어
법 앞에서만 고갤 떨구는
사람들도 보였어

우리는 이렇게
같은 한강을 바라보며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한강 송전탑
위엔 사람이 살았어
송전탑 옆을 지나 조깅하는
사람들도 보였어
그들은 여기
사람 사는지도 몰라
죽을 것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는데

우리는 이렇게
같은 한강을 바라보며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내가 받은 상처
시간 지나가도
잊혀질 수 없어
긴 시간 정말 힘들었으니까

우리는 이렇게
같은 한강을 바라보며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홍대 앞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들이 2009년 대한민국의 현실을 음악으로 표현한다. 매주 화, 목요일 <프레시안>을 통해서 발표될 이번 릴레이음악 발표를 통해서 독자들은 당대 뮤지션의 날카로운 비판을 최고의 음악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관련 기사 : "다시 음악으로 희망을 쏘아 올리다") <편집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두리반

2010.03.13 14:03 프린트기사 원본복사가 가능한 심플모드입니다.
“두리반이 싸워야 투기꾼들이 함부로 못한다”
철거 투쟁 중인 홍대 앞 식당 ‘두리반’
박종주 기자 메일보내기
 

서울 홍대입구역 인근, 동교동 삼거리에 있는 식당 ‘두리반’을 찾은 것은 금요일 저녁 여섯 시 반 쯤이었다. ‘대강 그 때 쯤 가겠다’고만 잡아 둔 인터뷰 약속은 마침 두리반 식두들의 식사 시간과 겹쳤다. 두리반의 사장인 안종려 씨는 “밥이 없다”며 곤란해 했고, 결국 함께 간 친구와 함께 근처의 다른 식당을 찾아야 했다. 그래 봐야 똑같은 사람이 사는 동네인데도, 홍대역 근처의 식당은 비싸기만 했다.

명색이 ‘식당’인 두리반이 찾아 온 손님에게 줄 밥이 없는 곳이 되어 버린 것은 지난 해 크리스마스 이브의 일이다. 2006년, 두리반이 위치한 동교동 167번지 일대가 ‘지구단위 계획’ 지역으로 지정되고 건물 바로 앞에 공항 철도 공사가 시작되면서 치솟기 시작한 땅값은 두리반의 운명을 뒤흔들어 놓았다. 두리반이 세 들어 있던 건물은 남전디앤씨라는 회사로 넘어갔고, 이내 한국토지신탁으로 다시 넘어 갔다. 2008년 2월에는 가게를 비우라는 명도 소송장이 날아 왔고, 2009년 겨울에는 가게 집기가 들려 나갔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결국 가게 앞에 펜스가 둘러졌다.

이틀 뒤인 26일, ‘두리반 식구’들은 절단기를 들고 식당을 찾았다. 굵은 철사를 끊고, 양철 판을 들어내고 다시 들어온 두리반. 그들은 그곳에 침낭을 깔고, 휴대용 버너를 설치해 농성장을 꾸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80일 가까이 농성을 해 오고 있다. 기자가 두리반을 알게 된 것 역시 그 즈음의 일이다. 하지만 오며 가며 밖에서 보기엔 어두컴컴하고 흉흉하기만 할 뿐 인기척이 없어, 안에 사람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 안에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된 지난 11일 불쑥 찾아가 인터뷰 약속을 잡고, 다음날인 12일 저녁, 인터뷰를 고사한 사장 안종려 씨 대신‘두리반 사장의 남편’ 소설가 유채림 씨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은 ‘들은 일’일 뿐

 

안종려, 유채림 씨 부부가 두리반을 연 것은 2005년 3월의 일이었다. 딱 일 년만인 이듬해 3월, 두리반이 위치한 동교동 167번지 일대는 마포구의 ‘지구단위 계획’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그건 농성 하면서 최근에 알게 된 거고, 그 당시에는 전혀 몰랐죠”라는 유채림 씨는 “2007년에 개발 이야기가 떠 돌기 시작하면서 건물이 팔릴까봐 긴장을 하기도 했는데, 건물주들이 ‘쉽게 팔아 넘길 의향을 없으니 안심하라’고 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마음을 놓았죠”라고 말했다.

△ 왼쪽 건물의 일층이 두리반. 맞은 편 도로 한 가운데에는 경전철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 프로메테우스 박종주

하지만 몇 배 씩 치솟는 땅값 앞에서 건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매각되고 말았다. “12월에 건물이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새 건물주는 남전 디앤씨라는, ‘투기꾼들이 급조해서 만든 회사’였죠. 어느 날 와서는 가게를 비우라고 엄포를 놓고 가더라구요.” 유채림 씨의 기억 속에서 모든 것은 ‘들은 일’일 뿐이다. 한 가족이 삶을 꾸려 온 가게 건물이 누군가에게 팔렸다는 사실도, 그와 함께 그 자리를 ‘비워야’ 한다는 사실도 말이다. 세입자가 자신의 사정이나 입장을 이야기할 기회는 단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다.

두리반을 비롯해 건물에 세들어 있던 11 세대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하고 말았다.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 10조는 최대 5년까지 임차인의 영업권리를 보장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철거하거나 재건축하기 위한” 경우는 예외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사하는 기간의 영업 보상금이나, 시설투자비, 권리금 등에 대해서도 아무런 보상을 받을 수 없었다. 공영 개발이 아니라 민간 기업의 사업인 탓에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장치가 사실상 없는 것이다.

재판에서 패소하면서 이들은 한국토지신탁의 재판 비용까지 물어야 하게 되어 보증금마저 돌려 받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4층짜리 건물의 지하에 세들어 있던 댄스 학원은 지상층이 다 빈 후 용역 업체에서 건물의 유리창을 다 깨고 펜스를 둘러 철거, 위험 등의 말들을 낙서 해 놓은 탓에 결국 항소조차 포기하고 가게를 비우고 말았다. “건물을 흉물스럽기 짝이 없게, 곧 무너질 것 같이 꾸며 놓으니까 누가 춤을 배우러 오겠어요,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죠. 결국 1원도 못 돌려 받고 쫓겨난 거에요”라고 유채림 씨는 말했다.

나머지 상가들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결국 항소에서도 패소하고 망연자실해 있던 상가 세입자들이 ‘개별 협상’ 앞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서로 흩어지면 모두가 죽는다, 뭉쳐서 대응하자”고 약속은 했지만 당장 장사를 할 수 없는 처지에서 버티기는 쉽지 않았다. 남은 아홉 세대의 세입자들은 가게 보증금에나 미칠까 말까 한 보상금을 받고 결국 뿔뿔히 흩어지고, 두리반만이 남아 흉흉한 빈 건물을 지키게 된 것이다.

“두리반이 싸워야 투기꾼들이 함부로 못한다”

 

△ ‘두리반 사장의 남편’ 소설가 유채림 씨.
ⓒ 프로메테우스 박종주
아무리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다고는 해도, 혹은 아무리 자신의 가게의 추억이 소중하다고 해도, 이미 펜스로 막힌 문을 뚫고 들어가 농성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되셨나요, 뻔한 질문을 던지자 유채림 씨는 “그 얘기만 하면 눈물이 난다”며 잠시 허공으로 눈을 돌렸다. “24일에 쫓겨 났는데, 용역들이 다 떠나고 나니까 ‘이제 다 끝났구나’하는 절망감이 들었죠. 그런데 집사람(안종려 씨)이 펜스를 두드리면서 대여섯 시간을 가게를 빙빙 돌면서 통곡을 하더라구요. 그날처럼 절망스러웠던 적도 없었죠.”하고 말하는 유채림 씨의 목소리가 조금씩 잠기기 시작했다.

“여섯 시 반쯤 용역들이 떠났는데, 밤 열두 시가 다 돼서 겨우 설득해서 녹번동 집으로 갔어요. 어지어찌 잠이 들었다가 아침에 눈을 떴는데 옆에 집사람이 없더라구요. 부랴부랴 가게로 가 봤더니, 휴일인데도 동네 단골들이 밥을 먹으러 왔다가 그렇게 된 걸 보고는 웬 일이냐고 묻고, 집사람이 울먹거리면서 설명을 쭉 하고는 막 우는데,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운 거에요. 그랬는데 모교 민주동문회 후배 몇 명이 찾아 와서 ‘농성을 하자’고 저를 설득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설득에 나선 민주동문회의 동문들이 두리반 농성의 가장 큰 공신이었다. 유채림 씨를 설득하는 것에서부터 농성 물품을 조달하고, 순번을 정해 날마다 불침번을 서 준 것이다. 거기에 더해 유채림 씨가 속해있는 한국작가회의 회원들 역시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농성을 하자’는 한 마디에 두 부부가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민주화 운동 하면서 감옥에도 갔다 오고, 촛불 집회 때도 연행 돼 가면서 집회에 다닌 사람이 정작 자기 일을 나약하게 포기하느냐, 두리반이 싸워야 투기꾼들이 함부로 못한다, (개발업자들이)세입자들을 존중하고 협상의 파트너로 생각하도록 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런 이야기들에 떠밀리듯이 약속을 했어요. 이대로 물러서고는 집사람이 정말로 못 살 것 같아서, 더더욱 하기로 마음을 먹기도 했죠”라고 유채림 씨는 결심의 계기를 설명했다.

그렇게 시작한 농성이 한 달이 채 되기 전에 두리반의 소식은 마포 곳곳으로 퍼졌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진보정당들과 마포 촛불 연대, 민중의 집 등 마포 지역의 진보단체들의 연대가 시작된 것이다. 협상 타결로 용산 참사 사건이 일단락되자, 용산 현장에서 활동하던 문화예술인들이나 촛불을켜는그리스도인들 등의 종교인들도 두리반을 찾았다. 덕분에 “마음이 많이 편안해 졌다”는 유채림 씨. 지금 두리반에는, 따로 순번을 정하지 않아도 늘 찾아 와서 함께 밤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고 한 주에도 서너번씩 정기적인 문화 공연과 기도회가 열리고 있다.

“마포구 지구단위 계획의 최전방에 두리반이 있다”

 

안종려 씨와 유채림 씨가 식당을 운영한 것은 2001년부터의 일이다. 궁핍하게 살고 있는 소설가 동생에게 보탬이 되고 싶다며, 사촌형이 운영하던 찜질방의 식당코너를 내어 준 것이다. 한창 찜질방 붐이 일어 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도 찜질방에 놀러 오던, 말하자면 ‘호황기’였다. “2년 반을 운영했는데, 24시간 영업이니까 눈코 뜰 새 없이 잠도 못 자며 일을 했다. 집사람이랑 저랑 밤낮 교대로 일하면서 외식 한 번 한 적이 없어요. 그렇게 번 돈에 은행에서 대출도 받고 해서 두리반을 인수했죠. 그게 전부 날아가고 길바닥에 나앉을 상황이 된거에요”하고 말하는 유채림 씨의 표정에서 분통함이 보였다.

유채림 씨는 “길바닥에 나앉는다는 게 다른 게 아니라, 은행 대출은 아직 갚지도 못했거든요. 대출도 못 갚고 빚만 지고 나오게 되는 셈인거죠. 원래 근근히 살던 것보다 더 못한 환경으로 떨어지게 되는 거에요”라며, “지금 가게 반만한 것만 얻어줘도 아무 소리 안 하고 나가서 먹고 살기나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금 가게 반 만한 것’ 역시 ‘철거민’에게는 크기만 한 꿈이다. 지난 해 11월, 다른 세입자들이 다 나갔을 무렵 두리반을 찾아 온 용역 업체에게 안종려 씨는 “두리반 반 만한 곳이라도 얻어 주면 나가겠다”고 말했다.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오자 “그럼 철거하고, 공사 기간동안 함바 식당(건설현장 노동자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가건물 형태의 식당)을 하게 해 달라. 그리고 건물이 완공되면 한 귀퉁이라도 임대해 주면 되지 않겠느냐”고 해 봤지만 역시 소용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애초에 협상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는 게 유채림 씨의 생각이다. 대여섯 평 쯤 되는 작은 규모의 가게가 대부분이었던 터라 크지 않은 보상금으로 대부분 세입자들을 내보낼 수 있었지만 유독 두리반은 서른 평이 넘는 큰 규모였던 탓에 보상금 합의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천 오백이면 이천 오백, 이런 식으로 보상금 상한선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돈으로는 두리반 같은 가게는 해결이 안 되니까, 애초부터 들어 내려고 했던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라고 유채림 씨는 말한다.

식당을 여는 데 들인 권리금만이라도 보상받을 수 있었다면, 그래서 근처에 새로이 두리반을 열 수 있었더라면 상황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을 그렇게 순탄하지 못했고, 어느새 두리반은 마포구의 유명한 ‘접경지역’이 되어 있었다. “어느새 보니까, 홍대입구역에서 신촌역까지, 마포구 지구단위 계획의 최전방에 두리반이 있게 되었더라구요. 우리가 어떻게 싸우느냐에 따라 그나마 다른 영세 세입자들이 다른 곳에서 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라는 유채림 씨는 “지금은 우리 가족 보상도 보상이지만, 쉬쉬하면서 우리끼리 협상하고 할 게 아니라 연대해 준 사람들과 이야기해서 문제를 다중으로서 접근해야 할 것 같아요. 지치고 힘든다고 해서 얼렁뚱땅 끝낼 수 없다는 책임감이 생긴거죠”라고 말했다.

“사람이 정말정말 고마웠다”

 

△ 방문객들이 붙여 놓은 응원의 메세지들이 벽을 덮고 있다.
ⓒ 프로메테우스 박종주
농성이 시작된 이후 아직 물리적인 위협이 닥친 적은 없다. 농성 시작 사흘 째 되던 지낸해 12월 29일, 점심 께쯤 찾아 온 지구대 대원이 오후에 철거가 있을 것이라고 알려 주고 갔지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종교인들과 대마침 발표된 작가회의 성명서 덕분에 실제로 침탈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닌 탓에 하루하루를 긴장 속에서 보내고 있지만, 그래도 날마다 찾아 와 주는 사람들 덕분에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고.

부부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큰 아들은 곧 군대에 가고, 작은 아들은 올해로 고3이 되었다. 수험생 뒷바라지를 하느라 안종려 씨는 두리반 농성장과 인천의 집을 오가며 ‘출퇴근’ 생활을 하고 있고, 유채림 씨는 한 시도 두리반을 떠나지 않고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식당 간판을 달고도 길손들에게 밥 한 그릇 내어주기가 어려운 형편이 되어 버렸지만, 커피 인심, 말 인심만큼은 여전히 후하다.

“농성하면서 사람이 정말정말 고마웠다, 그거 하나―그리고 제 아무리 잘났어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 정직하게 노동하고 더불어 함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삶, 그것 자체가 내 자식에게 물려줘야 할 것이고 나도 평생 그렇게 살아야겠다 하는 것을 이번 농성을 통해서 뼛속 깊이 느꼈다”는 유채림 씨는 인터뷰를 마치며 “사람이 정말로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건물을 둘러 싼 펜스에 온갖 낙서가 되어 있어 겉보기에는 좀 흉흉하지만, 그리고 밖에서 보기엔 마치 불이 꺼진 것 같기도 하지만 두리반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 문을 열고 들어 가면 차 한 잔을 권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시간을 잘 맞추면 멋진 공연이나 소박한 술자리를 즐길 수도 있다. 화려한 홍대 거리, 그 뒤켠에 있는 질박한 삶의 공간 ‘두리반’을 한 번쯤 찾아 보는 것은 어떨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김반장

좋은 인터뷰 내용이 있으면 첨부하기로하고...

김반장은.. 여튼 최고다

소울과 사회적의식,여하튼 거의 모든 면에서...

 

그의 그룹 아이앤아이장단의 공연을 하루에 두번이나 볼 수 있는 영광을 저번 주말에 누릴 수 있었다.

올라가지 않았다면 후회했으리...

그 공연 덕에 나의 춤은 보다 자연스럽게 내 몸속에서 흘러나왔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싱어송라이터 소히

음.. 보사노바를 하는 가수라 한다.

복많게도 이번 두리반 공연에서 소히를 직접 보았다. 아~보사노바 스러운 기타연주도 매력이었다.

 

가수 소히, 그 봄바람을 베낀 노래에 대하여...
 
보사노바 싱어송라이터 소히와의 감성 인터뷰
 
배문희기자
 
ⓒ 배문희 기자

가수 소히는 봄바람같은 목소리를 지녔다. 시린 귀를 부드럽게 스치고 여린 솜털들을 어루만지는 봄바람처럼 그녀의 목소리는 일부러 지어낸 기교가 없이도 사람의 마음을 잔잔히 흔드는 마력을 지녔다.

그런 그녀가 얼마 전 2집 앨범을 들고 왔다. 2집 앨범은 탁월한 송메이커 이한철이 프로듀서를 맡아 제작한 앨범으로 타이틀 곡 '그럼 그렇지'는 발랄한 분위기에 현 세태를 풍자한 가사가 돋보이고, '산책'은 소히의 시적인 감수성이 잘 묻어난다.

그녀는 국내 음악계에서 보기 드문 싱어송라이터다. 보사노바 아티스트가 귀한 국내에서 기존의 보사노바 앨범들이 대부분 카피곡 위주였다면 그녀는 한국과 브라질의 감성을 잘 녹여내 '한국적 보사노바'를 맛깔나게 들려준다.

문화저널21은 합정동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가수 소히를 만나 그녀의 음악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한국적 보사노바'란 어떤 색깔인가.
나라마다 가지고 있는 색깔이 있다. 일본에는 일본만의 감성이 있고, 영국에는 영국 특유의 감성이 있다. 나는 브라질 음악을 하고 있지만 한국만의 감수성과 멜로디 라인을 통해 브라질 음악을 표현하고 있다. 브라질 음악을 어떻게 하면 한국적으로 만들까 생각하며 굿거리 장단, 자진모리 장단 등을 연구하기도 한다.

ⓒ 배문희 기자
노래도 노래지만 가사가 참 시적이다. 평소 책을 많이 읽는가.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예전에는 시와 소설 등 문학을 주로 읽었는데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여성학, 사회학 서적도 즐겨 읽는다. 최근에는 자기계발서도 읽고 있다.

1집과 이번에 발매한 2집 'MIGLE'을 비교한다면?
1집에선 음반사의 의도가 살짝 들어가서 재즈풍의 느낌이 있었다면 2집에서는 보다 내가 하고 싶었던 보사노바 음악을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한강 송전탑 위엔 사람이 살았어'라는 노래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콜트콜텍 기타 노동자들이 양화대교 옆에 있는 송전탑 위에 올라가 투쟁을 할 때 그 아래서 공연을 한 적이 있다. 그 위험한 송전탑 위에 사람들이 있는데도 사람들이 아무런 관심도 없이 자기 할 일을 하면서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다.

한강을 거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이다. 그런 한강에서 목숨을 건 싸움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같은 공간에서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하고 생각했다.

어떤 이들은 그 노래를 듣고 소히씨를 민중가수로 생각하기도 한다.
나의 전체적인 음악을 들어보면 분명 다르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민중가수라고 생각한다해도 나로서는 불만이 없다. 민중가요도 다양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음악적 형식이 비슷한 민중가요를 듣다가 '이런 민중가요도 있네'라고 느낀다면 민중가요가 다양해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평소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많은가.
음악활동을 하면서 사회문제에 자연히 관심을 갖게 됐다. 음악을 통해 소외된 이웃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를 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

1집을 만들 당시 20대였는데 2집을 들고 나온 지금은 30대다. 30대에 들어서 음악적으로 달라진 점이 있다면.
20대 때는 음악이 좋아서 한다는 생각이었지만 30대에 들어서는 음악을 하는 자세가 더 치열해졌다. 좀 더 완벽주의가 되려고 하는 거지. 또 예전엔 음악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했다면 지금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를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음악에서 8~90년대 아날로그 감성이 느껴지는 것 같다.
옛 감성을 좋아한다. 90년대에는 인간에 대한 따뜻함과 그리움의 감성이 있었다. 팝적인 음악과 사회비판적인 노래 등 다양한 음악들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노래들을 공중파에서 들을 수가 없다. 점점 획일화되고 있는 것 같다.

특유의 자연스럽고 깨끗한 창법이 인상적이다. 마치 조미료가 안 들어간 정갈한 음식 같은 느낌이랄까.
기교 섞인 노래보다는 목소리 자체를 깨끗하게 전달하고 싶다. 또 목소리의 모서리를 최대한 없애 좋은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나같은 가수들은 노래를 못 부른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기교와 고음처리를 해야만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참 힘들다. 평가를 그런 식으로 받아야 하니까. 나는 내 목소리를 맑고 깨끗하게 전달하면서 오래오래 노래하는 보컬이고 싶다.

ⓒ 배문희 기자
음악활동을 하면서 아르바이트도 한다고 들었다.

아르바이트를 그만 둔지는 몇 달됐다. 음악활동으로 많은 돈을 벌 수는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행복하다.

좀 더 대중의 입맛에 맞는 음악을 할 생각은 없는지.
대중의 요구를 배제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하면서 최대한 접점을 찾고 싶다.

이번에 나온 음반은 대중들과 충분히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낸 음반이다. 만약에 성과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접점을 찾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 같다.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방송 출연을 할 생각도 있다. 예전에는 얼굴이 많이 보여지는 것이 창피하고 그랬는데 나이가 드니까 용감해지는 것 같다.

앞으로도 보사노바 음악을 할 생각인가.
처음엔 락밴드로 음악을 시작했고 그 다음엔 흑인음악을 했다. 관심이 가는 음악이 계속 변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떻게 변하게 될지는 예측불허다. 보사노바 음악도 워낙 다양해서 지방마다 특색이 다르기 때문에 보사노바 음악만으로 다양한 변화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노래하는 소히 ⓒ그림=배문희 기자
<오프더 레코드 이야기...>

직접 만나본 소히는 모딜리아니 그림에 나오는 여인처럼 목이 길고 신비로운 이미지였다. 속삭이듯 조용한 목소리, 잔잔한 미소. 그녀는 마음이 여려서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때 긴장이 많이 된다고 한다. 모서리 없는 목소리만큼이나 마음에도 모서리가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란성 쌍둥이다. 쌍둥이 남동생과 자주 만나지는 않는다. 그녀는 합정동에 산다. 홍대와도 가깝고 한강과도 지척이다. 동네 카페에서 혼자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녀가 좋아하는 일들 중 하나다. 
 
문화저널21 배문희 기자 baemoony@mhj21.com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