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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의 히스테리 : 조중동 광고 중단 운동 유죄 판결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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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광우병 사태를 계기로 조,중,동 광고 게제 중단 운동을 벌인 네티즌 24명에게 유죄가 선고되었다. 2009년 2월 19일의 일이다. 이 날짜가 놀라운 것은 아직도 기초적인 언론 소비자 운동조차 거부당하고 있는 현재 우리 사회의 지랄 맞은 정치적 수준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날짜는 별로 놀라운 것이 아니기도 하다.


판결의 핵심 근거는 '업무방해’이다. 자본과 국가의 자기 유지 활동을 방해했으니 당연히 업무방해죄 성립이다. 잉여가치 창출과 그를 위한 경제외적 강제 행위는 자본과 국가의 생존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활동이다. 때문에 국가 정책 선동자 역할을 해왔던 언론사의 근간을 흔드는 운동들에 대한 그들의 히스테리적인 반응은 당연한 것이기도 한 것이다.(그들은 이런 반응 자체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히스테리적이다) 이러한 반응은 평상시에 잠재되어 있지만, 위기라고 판단되는 상황에서는 그 존재론적 근원을 드러내고 만다. 그 근원은 바로 자본과 국가의 생존이 시민에 대한 착취와 약탈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히스테리적 판결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착취와 약탈이라는 정치적 실재이다.


그러나 자본과 국가의 히스테리적 반응이 어떤 특정한 위기 상황에서 발현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그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임기응변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위기는 활용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조작될 수도 있)는 상태(state)이다.


언론과 교육은 이 정부가 취임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그리고 노골적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영역이다. 그것들에 대한 지배는 장악 과정에서의 직접적인(그래서 단기적일수밖에 없는) 저항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인 권력 재생산의 자원이 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직접’ 착취하지 않고 그들을 노동자의 자리에 배치함으로써 착취하며, 정치가들은 개별적인 주체들을 민족이나 국가에 소속된 것으로 호명함으로써 지배한다. 즉 그들은 각 개인들이 타자의 그늘 아래에서 정체성을 형성하는 정치적 주체임을 명확히 알고 있다. 물론 이러한 조건들은 억압적 국가장치(구속, 수배, 구타 등의 물리적 폭력)에 기반해서 마련되고 유지되는 것이지만, 그것들을 은폐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이데올로기적 과정을 통해 자체 재생산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요컨대 이번 판결처럼 유치한(이건 논리나 상식 보다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싸움처럼 보인다) 사건조차도 단순히 ‘이 정권이 정말 후지다’고 욕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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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릴적 교과서에서 삼권분립이라는 것을 본적이 있다. 입법, 사법, 행정이 나뉘어져 서로를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독재가 불가능하고 민주적인 질서가 유지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삼권분립이라는 것이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까지는 그리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소한데서 서로를 견제하되 정말 중요한 문제 앞에서는 놀라울 만큼의 단결력을 보여주는 것이 그들이었던 것이다.(그들은 정말로 정치의 전문가들이다. 베버가 말했듯이 전문가란 작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커다란 실수를 범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입,사,행간이건 정당간이건 그들의 견제 시스템에서 발생하는 갈등이나 타협을 통해 정치 활동이 이루어지는데 바로 여기에 현 정치체제의 핵심적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현 정치 시스템에서 발생하는 갈등, 견제, 균형, 타협은 개별적 정치 주체들의 외부에서 일어난다. 그러니까 실제로 정치 행위가 이루어지는 공간은 구속된 24인은 없는 곳이라는 것이다. 정치 시스템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정치적 사안들에 대한 거래는, 실은 소위 신성한 권리를 가졌다고 상정되는 개별적인 정치 주체들을 도매금으로 처리하는 거래이다. 즉, 정치는 갈등, 견제, 균형, 타협이라는 과정을 거쳐 이뤄지는 일종의 거래인데, 문제는 그것이 내가 없는 곳에서 (내 의지와 상관 없이)나를 거래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선거라는 것은 그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에 나를 위치시키는 과정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그것은 내가 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에 도달할 수 없음을 은폐시키는 교묘한 장치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 있으면 다시 포스팅 하도록 하겠다)


나는 지금 현 정치의 문제를 단순히 대중 참여의 문제로 환원하기 위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가들의 정치, 그러니까 정치가(주체)의 진실은 정치가(주체)가 주인의 입장에 있을 때조차 주체 자신이 아니라 대상(구속된 24인 혹은 나 혹은 정치가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정치의 영역에서 소외되어, 대상화되어 있는가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치의 영역에서 주체(정치가) 역시 스스로 존립할 수 없음을, 즉 대상(우리들) 없이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쌩뚱맞게도 오늘은 여기서 끝. 뒷이야기를 하려면  책 좀 더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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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과잉이라고? 과잉의 폭력이 아니고?

   언제부터인가 폭력의 문제가 도덕의 문제로 환원되어 가고 있다. 이번 민노당의 강기갑 의원이 벌인 ‘액션 활극’을 두고 말이 많다. 조선일보는 국회가 “폭력에 굴복”했다고 진술하고 있으며, 자유선진당의 이회창은 “이번 폭력사태를 야기한 행위자”인 강기갑 의원에 대해 “즉각 고발 등의 조치”를 취하여 “엄격한 법적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강기갑 의원만이 문제가 아니다. 한나라당은 민주당의 폭력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규탄하고 있다. 오늘도(1/9) 한나라당의 홍준표는 “민주당이 또 폭력으로 상임위를 틀어막겠다고 하면 국민들도 이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비난했다. 어떤 목표가 있더라도 수단이 정당하지 않으면, 특히 폭력이 그 수단이라면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도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언의 근저에는 폭력은 무조건 도덕적 해악이라는 판단이, 혹은 그러한 판단을 유도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다.

   좀 더 멀리 가서 (벌써 ‘작년’이라고 불러야 하는) 2008년에 있었던 촛불집회를 생각해보자. 생각지 못했던 많은 이슈들을 만들어낸 이 집회에서 별로 다루어지지 않은 중요한 쟁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폭력의 문제이다. 시종일관 비폭력을 외치며 정부에 도덕적 우위를 차지하려했다.(물론 집회 참가자와 경찰들의 잦은 충돌이 발생했지만, 이것이 촛불집회의 비폭력적 경향의 반증이 되지는 못한다) 집회 내부에서는 몇 번의 논쟁이 있었다. 물대포 앞에서, 명박산성 앞에서, 전경에게 구타당한 어느 시민 앞에서 말이다. 그러나 매번 논쟁은 폭력의 의미에 대한 성찰보다는 폭력의 도덕적 결함으로 결론지어졌다. 집회 참가자와 경찰의 충돌이 발생할 때, 누가 더 많은 피해자를 양산했는가? 누가 더 많은 폭력을 행사했는가가 언론의 집중적인 보도 대상이 된다. 정작 집회 참가자와 경찰 신분으로 참여한 사람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폭력은 언론에서 집중적으로 부각되고,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발생한 폭력보다 더 많은 폭력들이 보도 되고, 그 의미도 과잉되어 간다. 이 과잉된 이미지들을 통해 폭력은 그것이 가진 의미를 상실한다. 이 지점에서 타협이 불가능한 윤리의 잣대로 폭력을 재단하고 그 의미를 초월해버리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폭력은 언제나 바로잡아야 할 예외상태로 상정된다. 그것은 정상에서 벗어난 것이고, 포섭되지 않은 낯선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상태, 즉 정상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은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거꾸로 생각해 보자. 지금의 상태(State, 국가/상태)가 온갖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면?

   폭력이 그 모순을 드러내는 적극적인 정치적 역할을 수행한다면? 프로이센의 군사학자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라고 이야기 했다. 아렌트는 이를 역전시켜 “정치는 전쟁의 연속”이라고 주장한다. 정치에 정상 상태란 없고, 일상적인 예외상태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사회나 정치의 안정적인 자기 기반이라는 것은 없고, 이 사회는 오직 예외적 수단, 체제 외적 강제력을 통해서만 유지된다. (때로)폭력이 드러내는 것은 정치의 일상적인 모순 상태(/국가)라는 금지된 실재의 영역이다.

   나는 지금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폭력들은 상처받은 사람들을 양산한다는 점에서 분명 해악이다. 그러나 그 중의 어떤 폭력은 맹목적으로 비난하기(과잉) 보다 그 폭력이 드러내는 의미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종종 언론을 통해 수십 년 간 매맞고 살던 아내가 특정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편을 공격했다는 (결과적으로 남편에게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는) 소식을 접하곤 한다. 누가, 쉽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그 아내에게 절대악이라는 낙인을 찍을 수 있겠는가? 그 아내의 폭력은 공고화된 가부장제에 균열을 내는 폭력은 아니었을까? 이런 일상 속의 폭력 이외에 정치적, 경제적 시스템에 매개된 구조적 폭력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노동자를 노동자로 영구히 호명하는 노동법들 속에 녹아 있는 폭력도 있다. 파업은 이러한 구조적 폭력에 맞서는 다른 방식의 폭력이다.(조르주 소렐에 찬양하는 폭력은 바로 자본주의적 구조에 균열을 내는 총파업이라는 대항폭력이었다.)

   폭력은, 악으로 낙인찍힐 수 없는, 보다 세밀하게 분석되어야할 현상이다. 예를 들어 비비오르카가 제시한 정치이하(infrapolitical)의 폭력과 정치상위(metapolitical)라는 폭력의 구분, 조나단 프리드먼이 제시한 수평적 분단화와 수직적 분극화라는 구분, 마틴 루터 킹의 적대성을 드러내는 것으로서의 폭력, 사르트르나 파농의 적대와 치유로서의 폭력 등 폭력이라는 이름만으로 매도될 수 없는 수 많은 폭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폭력을 거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외치는 비폭력의 의미 역시 좀 더 세밀한 고찰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비폭력은 언론을 통해 자신을 비극적인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발생하는 스펙타클이라는 정치적 계산 없이는 무의미한 희생을 낳을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경우 비폭력은 무폭력의 의미로 쓰인다. 비폭력의 사상적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간디는 비폭력을 무폭력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 간디에게 비폭력은 ‘직접행동’ 없이는 무의미한 것이며, “본질적으로는 피비린내나는 무기의 사용을 동반하는 운동보다도 훨씬 적극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폭력, 혹은 그것이 발생하는 장소는 거부하거나 회피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입해 해석해야 할 정치적 저항의 근원(적 장소)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강기갑 의원, 민주당, 촛불집회에서 폭력이 가진 의미를 초월해 악으로 낙인 찍는 행위야 말로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폭력을 탈정치화 시키는 사건들을 정치적으로 읽어내는 작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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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에 대한 몇 가지 단상

 

몇 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적어 봅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마디 덧붙이자면...

이 단상들이 촛불시위의 정당성이나 필요성을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하고 싶네요.


1.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모일 수 있을까?

- 정치적 의사 결정 방식의 문제 : 형식적 민주주의의 표류가 만들어낸 시민의식의 발로라는 의견도 있지요.

- 모든 사람들에게 직접 해당하는, 가장 보편적인 먹거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겠지요. 우리 정치사에서만 봐도 상당히 중요하고 민감한 정치적인 협상(갈등)들이 있었음에도 이토록 오랜 기간 동안 보편적인 지지를 받으며 확산되어 온 운동은 드물었던 것 같네요. 아무리 중요해도 그것은 정치의 영역이었고 (모두가 공유하는 방식의) 생활로 직접 체험되는 것은 아니었죠. 먹거리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모두가 공유하는 생활로 침투하기 때문이겠죠.

-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것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광우병과 같은 자극적인 언어는 아니었지만 우리나라에서 농산물이나 소고기의 수입에 관한 이야기는 예전부터 계속 있었습니다. UR이니, WTO니, GATT니, FTA니 하는 이름들은 모두 먹거리와 관계된 쟁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광우병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먹거리의 문제는 농민들의 생존권 문제로 치환되어 쟁점화 되곤 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농민분들은 무슨 협상 한 번 하고 나면 쌀이니 솥뚜껑이니 하는 것들을 여의도로 들고 날랐더랬죠. 이번 일 이전에는 이와 유사한 쟁점들이 모두의 먹거리가 아니라 일부 계층의 생존권 문제로 되어 버리곤 했죠. 이번에도 분명 다른 협상 때와 마찬가지로 축산농가의 생존권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상황에 있습니다. 하지만 유독 이번 미국산 소고기 사태는 농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되어 버렸죠. 이런 담론의 변화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예전에 여중생 장갑차 사건 때처럼 이번에도 중고등학교 여학생들이 촛불집회 확산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모두를 대표하지는 않지만, 광장에서 들리던 여리지만 단단한 그 함성이 뉴스나 UCC 등을 통해 계속해서 유포되며 촛불집회가 가진 ‘순수함’의 기호가 되어 버린 것이죠. 여학생들이 하나의 정치적 기호로 작동할 때, 즉 협잡과 음모가 난무하는 정치와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순수함의 기호가 정치성을 띄게 될 때, 그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감정적 울림이 촛불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마음과 고명하고 있는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 촛불집회의 양상들

- 여학생들의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는 좋은 의미로, 예를 들어 촛불집회는 순수한 것이라는 의미로 이야기 한 것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레이 초우가 원시적 열정이라고 불렀던 것이 촛불을 든 여학생들의 모습에서 발견되는것 같아요. 초우는 여성, 아이, 자연이라는 장소에서 발견되는 순수함(원시적 열정이라는 허구적 감상)이 감성을 자극하는 도구로 전락하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했죠. 유모차 부대(아이)와 여학생(아이+여성)들 그리고 먹거리(자연). 그 순수한 이미지가 전형적인 여성상이나 오리엔탈리즘(혹은 내부 식민지화)을 재생산하는 정치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거죠. 그리고 의미가 고정된 이미지는 다른 의미가 유희하며 개입할 여지를 남기지 않기 때문에 소통을 차단하게 됩니다. 아마도 가부장제에서 나타나는 아이나 여성과 관련된 강한 터부가 바로 이 소통의 불가능성에서 나오는듯 합니다. 가부장/아이 혹은 여성의 단절된 소통구조가 정부/시민의 단절된 소통구조와 얼마나 다른 것일까요?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촛불집회가 만약 여학생들의 이미지를 통해 그 정체성의 일부를 획득하고 있다면 그것에는 가부장제의 혐의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 촛불집회는 과연 순수한가라는 문제도 생각해 볼만한 꺼리라는 생각이 드네요. 뭐 당연히 2MB가 말하는 배후세력이니 용공세력이니 하는 것을 말하는건 아니겠죠. 순수함이라는 것은 어떤 무목적성, 무의도성을 일컫는 것이거나 혹은 단 하나의 목적만을 가진, 이면의 의도가 없는, 오염되지 않은 어떤 것을 가리키는 말이니까요. 이런 식의 순수함은 극단적인 쇼비니즘에나 어울립니다. 오염되지 않은 순수는 파쇼가 아닐까요? 촛불집회가 의미 있는 것은 순수함이 아니라 그 많은 오염, 즉 불순에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떤 고결함이나 순수함을 요구하지 않기에 모두가 거부감 없이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전에 열심히 운동하시던 분들이 요구하던 그 숨막히는 고결함이 광장에는 없다는 것이 촛불집회의 불순한 순수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군복 입은 참여자들에 관한 얘기도 빼놓을 수 없죠. 군대는 명분상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군복을 입은 이들은 집회에서 평화 시위를 유도하고 집회에 나온 사람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군대가 진짜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들은 진정한 의미의 군인들일 것입니다. 실제로 얼마나 멋지게 그 역할들을 하고 있습니까. 저도 집회에서 그들을 보니 든든하고 고맙고 그러더군요. 문제는 예비군들이 군복을 입고 집회에 등장한 시점이 경찰들의 집회 탄압이 거세지고, 경찰 폭력에 대항하는 ‘폭력’을 준비해야 한다는 식의 논의가 인터넷에서 급속히 퍼져나가던 시점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군복 입은 참여자들은 폭력을 행사하기 보다는 폭력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시위대들이 겪해지지 않도록 방지하고, 결찰 폭력에 맞서서 시위대를 지킵니다. 그들은 폭력과 비폭력의 경계에서 폭력의 흐름을 조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경계란 언제나 위험천만한 곳입니다. 물들기 쉬운 곳이죠. 군복 입은 이들은 집회 시작 전부터 집회 장소의 한 구석에 모여 앉아 있다가 거리행진이 시작되면 제일 앞에 나와 평화 시위를 이끕니다. 일종의 사수대와 같은 역할이죠. 집회에서 사수대는 다들 잘 아시겠지만, 시위대를 보호하기 위해 잠재적인 대항폭력(젓가락이나 꽃병)을 준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군복 입은 이들이 잠재적인 폭력을 준비 중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그들이 위치하는 장소(경계)는 잠재적인 폭력이 마련되어 있는 장소입니다. 그 장소 속에서 그들의 역할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죠. 병역거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군대란 평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폭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말을 자주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군대의 존재 자체를 반대합니다. 저는 군복 입은 참여자들이 아슬아슬해 보입니다. 그들 각자가 가진 개인적인 비폭력 의사와 무관하게 그들이 입은 옷과 그들이 위치한 장소에는 잠재적인 폭력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만 더 언급하자면, 군복이 가진 의도치 않은 효과. 인터넷 뉴스에 나온 군복 입은 이들의 사진 및에 이런 댓글들이 있었죠. “자랑스런 민중의 지킴이 군복부대를 위해 미니스커트 부대를 꾸리자”, “오빠, 저 이쁘게 하고 나갈께요.”… 물론 소수의 댓글이지만 그 댓글을 보고 나니 마음이 편치 않네요.

- 인터넷 생중계라는 새로운 방식의 디지털 미디어 운동이 등장했습니다. 등장했다기 보다는 대중화 되었다거나 새로운 진지가 구축되었다고 말해야 하나...

이번에는 특히 진보신당 컬러TV, 아프리카TV, 오마이뉴스, 민중의 소리, 라디오21 등이 대대적으로 촛불집회 인터넷 생중계를 했죠. 게다가 인터넷 동호회 등에서 자체적으로 웹 방송을 통해 실시간 중계를 하기도 했습니다. 집회 참가자들은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고, 참가하지 못한 이들은 생중계를 보며 토론 게시판이나 자신의 블로그, 경찰청이나 청와대 홈페이지, 조중동문 같은 언론사 홈페이지를 돌아다니며 사이버 시위를 했더랬죠. 아마 집회 생중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 곳은 아프리카 TV였을 겁니다. 소규모 웹방송이 이번에 2500여개나 개설되었었다고 하네요.

관련글 => http://blog.jinbo.net/sparta/?pid=88

근데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아프리카 TV 운영자측에서 불법집회 중계하지 말라는 메일이 웹방송을 하는 VJ들에게 왔었다고 합니다.

관련 기사 =>http://blog.daum.net/lalala-777/4333164 - 이 기사는 5월 25일 newsnviews에서 김혜영 기자가 쓴 기사인데 왠일인지 기사가 삭제되어 있는 상태네요. 일단 다른 블로그에 스크랩된 기사를 링크 시켰어요.

위 기사에 따르면 인터넷 생중계를 하는 한 VJ는 “인터넷 방송국 아프리카 TV 운영측으로부터 시위 현장을 중계하던 많은 VJ들에게 저작권, 불법집회 선동과 관련된 방송을 중계할 경우 아이디를 정지시키고, 베스트 VJ 자격을 박탈시키는 등의 불이익을 줄 것임을 알려왔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TV 측에서는 이번 생중계를 통해 엄청난 사이트 홍보가 됐을 텐데 이런 메일을 보냈다네요. 혹시 정부측의 압력이 있었던거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거 같네요. 현재 다음의 아고라에서는 인터넷 생중계를 막지 말라는 서명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 http://agora.media.daum.net/petition/view?id=46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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