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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진화의 무지개

Over The Rainbow

 

이 책에서 저자인 조안 러프가든이 궁극적으로 문제삼고 있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분류 체계이다. 무지개는 다양성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자연을 분류하려는 인간의 목표”의 불가능성을 지시하기도 한다. 무지개의 색은 명확한 경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것을 분류하려 할 때 인간은 경계짓기의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무지개가 분류 가능해 지면, 그것은 더 이상 무지개가 아니게 된다. 무지개는 자신의 고유성을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진 화생물학자가 쓴 이 책은 인문학자에게도 상당히 흥미롭다. 조안 러프가든은 동물들의 세계에서 크로스 드레싱, 트랜스젠더, 동성 섹슈얼리티, 성역할 바꾸기가 얼마나 흔하게 일어나는지 방대한 자료와 사례들을 가지고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자연은 곧 선(善)이며, 자연에서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에 동성애나 트랜스 젠더가 인간에게도 그만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오히려 선악을 판단하는 일은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그녀가 성적 다양성을 옹호하는 것은 그것이 동물과 인간의 삶에 필요한 것이며,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동물들의 성행위는 단순한 번식 외에도 재화의 분배, 갈등의 해소, 외부자의 융화, 공동체 형성 등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것들은 이분화된 성 구분을 넘어선 기능들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상당히 새롭게 느껴진다. 우리는(심지어 전문 학자들조차도) 동물계에 존재하는 성적 다양성에 대한 정보를 거의 접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특정한 (이성애중심주의라는) 과학적, 정치적 편견들이 그런 주제에 대한 연구에 제한을 가하기 때문이다. 조안 러프가든은 하나의 사례로 1992년에 있었던 “AIDS 확산을 막기 위해 실시된 미국인의 성 관련 습관에 관한 연구”를 제시하고 있다. 이 연구는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두 명의 상원의원과 하원의원에 의해 중지될 뻔 했다. 그리고 연구는 실제로 그런 검열 때문에 상당히 지연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그 연구를 “동성애 아젠다”로 여기고 “그 연구 대신에 혼전 순결을 장려하는 데에 돈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과학적인 연구 프로젝트가 특성상 상당한 규모의 재정 지원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런 식의 정치나 자본의 개입이 연구의 방향성을 규정하는데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러프가든은 동물 뿐 아니라, 인간의 성에 관한 편견들과도 힘겹게 대결해 나간다. 그녀는 성별적 차이, 즉 뇌의 구조, 호르몬 등에 대한 연구를 검토하며 결코 그 차이들이 사회적 차이를 만들어낼 만큼 대단한 것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녀의 분석 중 흥미로운 지점은 심리학에 대한 부분이다. 그녀는 심리학자들이 “다양성을 병리 현상으로 여기는 의학 모형”에 따라 연구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차이를 병리화하는 경향을 비판한다. 그녀는 성적 다양성이 심리적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치유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 나아가 그것들이 하나의 범주로 분류될 수 없고, 다시 그 내부에서 수많은 개별성들로 분화되기 때문에 자의적인 분류가 불가능하다는 점에 대해 지적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성적 차이가 야기한 적대나 배제가 지극히 정치적인 문제임을 인식하는데까지 나가지는 못했다.

 

책 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스스로 MTF 트랜스젠더이기도 한 그녀는 ‘트랜스젠더 의제’라는 제목을 달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의 목록을 제시한다. 거기에는 다양성에 대한 인정, 사회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리, 품위 있는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권리, 고용, 교육, 결혼, 군복무 등의 영역에 대한 동등한 참여, 그리고 의료보험 혜택 등이 나열되어 있다. 이것들은 새로운 요구라기보다는 ‘다양성에 대한 인정’이나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제안되어 왔던 요구들이다. 그런데 ‘다양성에 대한 인정’이나 ‘관용’은 성적 차이 때문에 발생한 수많은 적대와 불평등, 배제와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그것들을 봉합하고 탈정치화하는 담론이기도 하다.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차이를 가진 자들을 차별해 왔던 이들을 승인하고, (설사 그것이 투쟁의 결과라 할지라도)그들로부터의 시혜를 기다리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다. 자! 진화의 무지개가 있다. 이제, 그 무지개만 보지 말고, 그 너머로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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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모두스 비벤디(지그문트 바우만)

견고한 것에서 유동하는 것으로

 

바우만의 글들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모든 것이 유동한다’가 될 것이다. 그는 유동성에 관한 일련의 연작들을 발표해 왔다. <유동하는 근대>, <유동하는 사랑>, <유동하는 삶>, <유동하는 공포>가 그것들이다. 이 책은 이 시리즈 중 <유동하는 시대>를 옮긴 것으로, <모두스 비벤디>라는 타이틀은 이탈리어판에서 따온 것이다.

 

바우만에게 유동성이라는 개념은 당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처해 있는 삶의 불확실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것은 곧 바로 공포와 결부된다. 부정적 지구화로 인해 위험은 전지구적 수준에서 발생하는데, 개인들은 이 위험을 통제하기는커녕 제대로 인식할 수조차 없다. 불투명한 세상과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개인들은 무기력할 뿐이다.

 

그럼에도 개인들은 편재하는 위험 속에서 그 위험을 최소화시키기 위한 전략들을 수행한다.궁극적으로 통재 불가능한 그런 위험들은 전문가의 지도 아래 몇 가지 회계 기법들과 더불어 계산 가능한 위험, 즉 리스크로 환원된다. 그것들이 계산 가능해 지는 순간, 개인들은 그 위험에 대처할 수 있게 된다. 개인들은 환경오염을 막을 수도, 치안을 강화 할 수도 없지만, 보험을 통해 환경오염이 야기시키는 병에 대처할 수 있고, CCTV를 설치하고 사설 경비업체에 등록함으로써 안전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런 전략들 자체가 공포에 근간을 둔 하나의 상품이라는 점은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개인의 통제를 벗어나 있는 위험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던 것이 국가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변했고, 국가는 더 이상 그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바우만은 국가가 “사회(복지) 국가”에서 “개인 안전 국가”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민족-국가의 “힘은 전지구적 공간으로 증발하고 있으며 … 규모가 작아진 국가는 개인의 안전을 겨우 책임지는 국가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바우만은 여기서 개인화를 재론한다. 그는 “새로운 개인주의의 등장과 인간적 유대의 소멸”을 강조하면서, 과거에는 “공동체와 조합들이 보호의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이 적용되는지 감시하는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개인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살피며, 스스로를 보호하고 구제해야 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고 진술한다. 이를 근거로 바우만은 “공동체라는 말이 이제 점점 공허”한 말이 되어 가고 있으며, 민족-국가 형태에서도 민족과 국가가 결별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자본주의 국가를 유지케 했던 개인들의 공동체로서의 민족이 해체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지구화는 그가 부정적 지구화라고 부른 측면만을 가지고 있는가? 나아가, 진짜 ‘지구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는가?(혹시 지구화라기보다는 일국적 단위를 넘어선 지역적 층위의 문제는 아닌가?) 과연 지구화라는 것은 국가 주권을 침식하고 있는가? 민족-국가라는 기초 단위 없이 지구적 경제나 정치는 불가능한 것은 아닌가? 국가가 변형되고 있을지언정 쇠퇴하기 보다는 어떤 측면에서는 강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국가와 결합되어 있는 민족/국민 역시 해체되고 있다는 주장은 재평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난민은 민족/국민 국가의 쇠퇴나 해체의 징후가 아니라 그것들이 변형/강화되는 과정의 필연적 산물은 아닌가?

 

만약 이런 질문들이 유효하다면, 모든 것이 유동하고 있다는 바우만의 주장은 상당부분 수정 될 수 있을 것이다. 바우만은 이런 질문들을 세밀히 분석하고 평가하기보다는, 어떤 결론들을 미리 가정한 채 자신의 논의를 전개시켜 나가는 듯하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에게 근대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미리 가정된 상상의 대상인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가 탈산업사회론이나 정보사회론 그리고 지구화론과 너무 쉽게 영합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견고한 것들이 유동하는 것으로 대체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견고하다면, ‘유동성’은 현대사회를 설명하는 견고한 보편 개념이 아니라, 특수한 상황의 국면들을 분석할 때 쓰일 수 있는 유동적인 정세적 개념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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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지젝이 쓴 21세기의 공산당 선언!

 

지 젝은 놀라운 철학자다. 쉴새없이 글을 써내는 그의 필력이 놀랍고, 프랑스 혁명과 오바마 정부를 연결시키고, 칸트와 헤겔을 거쳐 빌 게이츠에 다가가는 사유의 폭도 놀랍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의 오지랖이다. 그는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할리우드의 영화부터 사소한 정치적 사건까지 그의 분석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정치철학적 의미가 궁금하다면 조금만 기다려라. 얼마 후 나올 지젝의 책에서 그 의미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농담이 나올 정도다).

 

그런데 그의 편집증적이고 강박적인 분석이 단순한 오지랖은 아닌듯하다. 지젝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어떤 사건들이 그의 사유망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사건들이 있고, 그것을 분석하면서 그의 사유망이 형성되어 간다. 그런데 그가 분석하고 있는 사건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파국으로 향하는 사건들이다.

이 책의 제목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는 비극적 역사가 나중에 희극으로 반복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마르쿠제의 말을 빌려 강조하고 있듯이 희극의 외피를 쓴 반복이 원래의 비극보다 더 끔찍한 파국으로의 초대일 수 있다는 의미이다. 명백한 파국으로의 노정임에도 우리는 그 파국을 인식할 수 없다. 2008년 금융붕괴가 우리에게 “예측불가능한 놀라운 사건”으로 인식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자 본주의는 언제나 현실의 위기를 별거 아닌 것으로 만들고, 발생한 위기도 대처가능한 것으로 둔갑시킨다. 현재의 위기에서 지배이데올로기의 중심과제는 붕괴의 책임을 자본주의 자체가 아니라 느슨한 법적 규제나 거대 금융기관의 타락 등의 부차적인 것으로 만드는 서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데올로기는 또 얼마나 쉽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그래서 지젝은 외친다. “멍청아, 그건 이데올로기야”. 이 말에는 한치의 과장도 없다. 그 외침은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지젝이 감지하고 있는 어떤 절박함이다.

 

그 렇다면 이 혼잡한 이데올로기와 결부되어 있는 파국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가(지젝이 이 책 다음으로 쓴 책이 바로 <종말의 시대에서 살아가기>이다). 지젝은 여기서 다시 공산주의를 해답으로 내놓는다. 그러나 그에게 그것은 위기의 해결책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문제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지젝은 공산주의라는 이념에 충실하기만 한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말한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이 “이념에 실천적 긴박함을 부여하는 적대를 역사적 현실 안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그는 네 가지의 적대―생태적 파국, 지적재산과 관련된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새로운 기술과학적 발전의 함의, 그리고 새로운 장벽(Walls, 월가)의 생성―를 언급한다.

 

이 중 네 번째 적대(배제된 자와 포함된 자를 가르는 간극)가 핵심적이다. 이 네 번째 적대가 없다면 생태학은 지속가능한 발전의 문제로, 지적재산권은 복잡한 법률적 사안으로, 유전자공학은 윤리적 쟁점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직 배제된 자와 관련해서만 공산주의라는 용어의 사용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을 ‘배제된 자’라는 개념으로 대체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의 폐기가 아니라 유지이며, “마르크스의 상상력을 뛰어 넘어” 그 개념을 실존적 차원으로 진화시키기 위한 도약이다(물론 그것이 도약인지 비약인지 평가하는 것은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그리고 지젝에게는 그것이 마르크스를 보다 마르크스적인 방식으로 사유하는 과정이다.

 

이 책은 21세기에 쓰여진 ‘공산당 선언’이다. 이 책은 현재의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이지만, 동시에 비판이며 선언이기도 하다. 지젝은 공산주의 이념이 오늘날 여전히 적실한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곤경이 공산주의 이념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보이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조금 나아 보이는 개혁된, 개선된 새로운 자본주의(사회주의!)에 손쉽게 타협하지 말고 공산주의로 시작하라고 독려한다. 비록 실패할 운명일지라도 “출발점으로 돌아가”라고. 지젝은 베케트의 입을 빌어 말한다.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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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교양으로서의 역사와 정치

 

짧은 한 권의 책에 (세계)역사를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기획이다. 역사가 과거에 대한 기록이라면, 그 과거란 획정될 수 없는 무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역사를 대상으로 하는 수많은 책들을 접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저자가 취하고 있는 독특한 관점이다. 이런 류의 책은 특수한 관점을 매개로 과거의 사건들을 선택하고 배제하는 과정 속에서 완성된다. 이 책에서 저자인 사이토 다카시는 (세계)역사를 관통하는 다섯 가지 힘을 제시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역사를 재구성하고 있다.

 

인간은 역사적 존재다. 인간은 역사적 소여를 준거로 언어를 습득하고, 소통하며, 그 안에서 지식을 얻고, 행위의 근거가 되는 사회적 합리성을 형성시킨다. 다시 말해 특수한 문화적 요소들의 전승을 통해 인간은 역사적 존재가 된다. 이에 반해 사물 혹은 사건 그 자체는 역사를 갖지 않는다. 사물 혹은 사건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지, 스스로는 어떠한 의미도 전달하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적 존재인 인간의 의미망 속에 포착됨으로써, 인간에게 인식되고 언어를 부여받음으로써 ‘역사화’ 된다. 때문에 우리는 역사(라고 불리는 것)와 마주할 때, 그것을 소환한 주체의 의도와 입장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이때 한 가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 의도와 입장의 이면에 직접적인 배후와 음모 혹은 치밀한 이데올로기적 공작이 항상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 책에서 저자가 왜 (세계)역사를 다섯 가지 키워드로 엮어 내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러나 아쉽지만, 저자는 그 키워드를 고도의 정치적 계산 위에 배치시키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이 다섯 가지의 키워드들은 비일관적이며, 우연적인 것처럼 보인다(어떤 일관성을 찾아내기에 이 책은 너무 허술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이토 다카시가 선택한 다섯 가지 키워드 대신, 그 자리에 폭력, 시공간, 혁명, 합리성, 매체, 전쟁 등등 갖가지 키워드를 삽입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전문 학술서가 아니라, 흔한 하나의 교양서일 뿐이라고 말하며 이런 비판을 회피할 수 있을 것이다. 학술서도 아니고 교양서가 이정도면 됐지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건 그리 중요한 변명이 되지 못한다. 교양이라는 것 자체가 근대 부르주아 사회가 만들어낸 정치적 범주이기 때문이다. 교양 있는 사람은 시민(문명)화 되고(civilized), 문화화 되고(cultured 혹은 cultivated), 교육 받은(educated) 사람이다.(civilized, cultured, educated는 모두 '교양있는'이라고 번역되는 언어이며, 이는 부르주아 시민을 구성하는 세 영역, 즉 문명, 문화, 교육을 지시하는 언어들이다.) 교양은 시민사회의 구성원이 받아들여야 하는 미덕인 것이다. 교양은 시민이 당연히 알아야 하는 상식이며, 상식(common sense)은 시민들의 공통 감각(common sense)을 형성함으로써 그들에게 각인된다. 교양이나 상식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지평 위에서 작동하고 있다.

 

사이토 다카시는 자신의 책이 시중에 널려 있는 “통사류의 세계사 책”과는 “차원이 다른” 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역사 기술이나 대안적 역사 인식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기 보다는 보편화된 편견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들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판했던 역사(기술)의 지점들을 반복하고 있다. 이 책은 세계사라는 이름으로 (간혹 일본사가 언급되는 것을 제외하고는)서구의 역사에 대해서만 기술하고 있으며, 제국주의를 남성들의 정복 욕망으로 환원하고 있다. 또한 이 책에서는 “인공적” 사회주의에 대한 “자연 발생적” 자본주의의 궁극적 승리가, 나아가 “자본주의의 미래가 인류 전체의 미래”가 될 것임이 선언되고 있다.

 

일관성 없는 관점이나 치밀하게 계산되지 않은 (역사적)사건들의 나열은 역사 기술에서 가치 개입이 배제되어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것은 교양서의 보편성을 가능케 하는 비정치성(처럼 보이는 것)과 연루되어 있다. 그러나 서구의 역사가 세계의 역사라고 가정하고, 남/여의 성 역할과 특성을 고정시키고, 대체될 수 없는 자본주의의 영속성을 주장하는 것만큼 정치적인 것이 또 있을까. 이런류의 역사 교양서와 마주할 때 우리는 고도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에게 요구되는 교양으로서의 역사, 그 역사 속에서 무엇이 계승되고, 무엇이 반복되고, 그리고 무엇이 망각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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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 대학원 신문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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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샌델의 정의론, 실패한 정치철학

 

정치철학이라는 타이틀을 전면에 내세우고 이처럼 유래 없는 인기를 얻은 책이 또 있을까.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3달 만에 30만부가 팔려 나갔다. 최근에는 그 인기에 힘입어 ‘친히’ 저자까지 초청되어 여기저기서 강연을 하고 있다. 사실 이 책과 관련해서 제기되어야할 질문은 ‘이 책이 가진 가치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이 책이 이렇게까지 유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일 것이다. 그것은 하버드대라는 명함 때문일 수도 있고, 미국의 시각으로 세계를 보아온 우리의 익숙함 때문일 수도 있으며, 한국의 천박한 자본주의 환경에서 일말의 윤리를 찾아내고자 하는 열망일 수도 있다(혹은 또 다른 무엇일 수도 있다).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제공된 이 지면의 목적이 아닐뿐 아니라 필자가 아직 그에 답할 만큼의 통찰을 가지지 못한 관계로 생략하도록 하겠다. 곧바로 책으로 들어가 보자.

 

이 책은 자극적인 사례와 흥미로운 질문들로 독자를 유혹하고, 곧바로 권위 있는 철학자들을 배치시킨 뒤 그 철학자들의 논리적 난점들을 (지나치게)쉽고 통쾌하게 폭로한다. 그리고 그곳의 핵심에는 개인과 사회 그리고 국가의 윤리가 놓여 있다. 샌델은 정의의 문제를 “단지 개인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에 한정된게 아니라 “법은 어떤 역할을 하며, 사회는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지”를 묻는 것으로 확장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샌델은 (그것이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특정한 상황에서 판단해야 하는 개인을 상정한 후, 그 개인의 판단이 가진 윤리적 정치적 함의를 분석한다. 여기서 개인들은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는 독특한 합리성을 가지는 것으로 전제되는데, 그것은 단순한 도구적 합리성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도구적이고 계산적인 합리성이 인간이 가진 보편 윤리에 근본적으로 대립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공리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가진 논리적 결함과 문제점을 상세히 분석하며 논의를 진행시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샌델은 특정한 상황에서 개인의 판단은 공동체 의식에 준거해야 하며, 이를 통해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정의에는 “어쩔 수 없이 판단”의 문제가 제기되며, 그것은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이기도 한데, 여기서 가치 측정의 준거가 바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공동체는 국가와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샌델은 유독 결론 부분에서 공동체 주의에 대한 자신의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해 미국의 대통령들과 정치인들을 자주 언급한다.) 지구화의 흐름과 더불어 민족국가의 경계가 유동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공동체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삶의 위협이 될 수 있는 외부적 환경을 차단하기 위해 공동체의 경계를 강화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정치적 입장과 맞닿아 있다. 또한 샌델의 논의에서 가장 문제적인 것은 그가 분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분석하고 있지 않은 것에서 발견된다. 그는 개인들 간의 관계와 사회, 나아가 국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거기에 계급(class)도, 민족(nation)도, 종족(ethnic)도 없다. 그의 논의에서는 구조적인 층위에서 사회적 적대를 만들어내는 어떠한 심급도 발견되지 않는다.

 

정의란 완성된 하나의 실체가 아니다. (샌델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법의 작동과 사회의 조직 형태와 관련되어있다. 때문에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법의 작동과 사회의 조직에 대한 사유가 선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샌델은 법이나 사회 혹은 국가에 대한 어떤 근본적인 질문도 제기하지 않는다. 그는 정치에 대해 논하지만 정치가 형성되는 근본 조건에 대해 논하지 않으며, 윤리적 사유에 대해 논하지만 그것들을 가능케 하는 인식론적, 존재론적 조건들에 대해 사유하지 않는다. 철학이란, 특히 정치철학이란 현실의 문제를 괄호치고 관념론적 사유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정치)철학은 현실의 문제가 발생하는 핵심에서 그것의 한계 지점을 사유해야 한다. 샌델이 누락시키고 있는 것은 몇 개의 개념이 아니라 우리 삶이 놓여 있는 정치적 현실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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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 대학원 신문사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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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통신운동의 역사와 공공성의 과제 by 황규만, 홍지은

 

정보통신운동의 역사와 공공성의 과제

 

글쓴이 | 황규만, 홍지은

 

 

 

 

1. 통신의 시작- 통신망의 발전과 PC통신의 등장

남한에서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공론의 장은 82년 데이콤의 설립과 함께 시작된 PC통신 서비스에서부터 출발한다. 중화학공업중심이었던 한국경제 구조가 국가주도로 서비스산업 중심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비스 산업의 근간은 바로 통신망의 건설이었다. 생각보다 일찍이 국가와 자본은 통신 산업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고속도로건설처럼 통신망을 국가기간산업으로 육성하기 시작한다.

 

이런 육성책의 일환으로 당시 체신국으로 통합되어 있던 통신기능을 한통과 데이콤으로 전문화시킨다. 이는 각 사업자들에게 독점적 지위를 보장해줌으로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통신망구축의 교과서적인 방식이었다. - 오늘날 KT의 시장지배자적 지위의 근원이기도 하다. - 그 중 데이콤은 통신서비스 중 데이터통신 서비스 영역을 전문화시킨 것이다. 이후 데이터통신 서비스는 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급속도록 자리를 잡으며, 천리안 그리고 하이텔 서비스가 80년대 말-90년대 초에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80년대 PC통신 이용자들은 90년대 말 초창기 인터넷 이용자들과 마찬가지로 선진의식으로 가득 무장되었던 집단이었다. 이들을 매우 기술 중심적인 집단이었으며 향후 인터넷1세대를 이끄는 세력들로 부상한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PC통신 시장이 활성화된 것은 통신망에 경쟁체제가 도입되고 기간망사업자와 별정통신업무가 분리되는 등, 시장에 대한 법제화가 구체화되는 90년대 초반부터이다. 통신에 경쟁이 도입된 것은 국내자본의 요구도 있었겠지만 일차적으로는 80년대 말 미국의 부가통신시장을 개방하라는 압력과 함께 한국을 우선협상대상국으로 지정한 것이나, 93년 UR이후 94년 WTO 기본통신협상이 시작되는 세계 무역질서 변화와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전화사업등 유선망시장이 유효경쟁 모델에 따라 여전히 국가관리형 경쟁체제가 도입된 반면, 진입장벽이 비교적 낮았던 부가통신업에는 94년 나우누리가 등장하면서 PC통신 시장은 본격적으로 무한 경쟁에 돌입하여 바야흐로 전성기를 맞는다. 즉 남한에서 통신망의 활성화는 기본적으로 국가주도 개발사업으로 시작되었지만 개방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와 정확히 궤를 같이해 급속도로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전화와 같이 1대1 통신기능에 머물던 통신망이 PC통신과 같이 사회적 참여의 장으로 확장된 것은 단순히 국가주도의 개발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1가구 1전화라는 발전전략에 따라 망 자체가 서구유럽 부럽지 않게 급속도로 확장되어 그 자체로 엄청난 대중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과 통신비가 일반 전화비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했던 점이 PC통신 확장에 물질적 기반이 되기는 했지만, 90년대 운동이 다양하게 확장되면서 당시의 사회적 의제들을 PC통신이라는 새로운 매체에서 실험하려는 일군의 활동가들의 역할도 매우 컸다.

 

참세상, 하이텔, 나우누리의 진보적인 동호회의 활동을 비롯하여 진보네트워크센터의 전신인 ‘참세상’ 서비스 등 사설BBS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소련이 해체되고 91년 투쟁이후 패배적인 정세와 유럽에서 유입된 포스트 맑스적인 운동의 경향은 새로운 미디어 속에서 꽃피웠고 이후 정보통신운동의 자양분을 제공하였다. 그중 통신연대의 활동은 주목할만한 것이었다. 98년 0141x망의 공공성의 주장하며 요금인상반대 투쟁을 벌여낸 것은 남한에서 망의 공공성을 주장한 최초의 사례라고 평가할 수 있으며, 통신사업자의 검열을 주도했던 윤리위원회폐지 주장했던 통신검열반대운동은 오늘은 인터넷의 표현의 자유 운동의 시발점이었다.

 

또 한편으로 주목할 만한 것은 당시의 사설 BBS 운동이었다. 90년대 초기 BBS서비스는 데이터베이스구축과 같은 매우 기술 중심적인 운동이었지만, 앞에서 언급한 활동가들의 적극적인 활용은 BBS를 단지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라 민주주의적인 소통의 공간이자 이용자가 직접 운영에 참여하는, 생산과 소비 그리고 관리자와 이용자이라는 이분법적인 근대적 사회적 관계에서 쌍방향 적이고 대안적인 사회적 네트워크에 대한 실험의 장이었다. 또한 당시의 소중한 자산은 이후 진보진영의 독립네트워크의 물질적인 자산으로 계승되게 된다.

 

2. 인터넷의 등장 - 신세대 사회운동

80년대 말 90년대 초반 대학 - 특히 서울대학교 전산실과 KAIST - 중심으로 인터넷이 처음 서비스되기 시작하였다. 유선전화망 사업과 달리 우리나라도 초창기 인터넷은 국가주도형이었다기보다는 대학중심의 자율적인 발전과정을 겪었다. 인터넷에 다소 미온적이었던 정부를 상대로 대학에서 연구목적으로 허가 받아 시작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초창기 인터넷 문화는 산업적 측면이 아니라 대안 문화로서 먼저 수용되었다. 인터넷이 대안문화로 대안매체로 인식된 데에는 단순히 대학중심의 학술문화였기 때문은 아니다. 1986년 프랑스 학생 운동가들은 미니텔을 이용하여 신자유주주의적인 대학 개혁 반대운동을 이끌었으며 1993년에는 미국 산타모니카주의 활동가들이 지역 네트워크 PEN을 이용하여 노숙인 편의시설 확충을 요구하는 지역 주민과 노숙인의 주장을 시정부에 관철시키기도 했다. 1996년에는 멕시코 치아파스 지역 농민혁명군 사빠띠스따가 인터넷에 신자유주의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전세계적인 연대를 호소하기도 하였다. 인터넷은 기술의 특성상 그 자체로 전세계적이다. 이런 세계적 경험들은 초창기 인터넷을 통해 한국에 즉각적으로 알려졌으며, 이런 전세계적인 경험들은 남한사회의 선구적인 활동가들 사이에서 인터넷을 ‘아래로부터의 혁명’, ‘전세계적인 연대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운동’의 매체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90년대 인터넷은 미국을 중심으로 단순한 군사기술이나 대안문화를 넘어서 신자유주의의 핵심 기간망으로 성장해가기 시작했다. 클린턴 정부가 정보고속도로사업을 시작하였고 남한정부도 95년 한국통신의 글로벌경쟁력을 갖추게 한다는 명분과 초고속 정보통신사업자의 조속한 추진을 목표로 ‘정보화촉진기본법’이 제정된다. 그리하여 95년에 PC통신 서비스에 인터넷접속 서비스(일명 PPP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서서히 한국에서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시작되었다. 이렇게 인터넷이 신자유주의의 첨병으로 대중화되어가던 시기에, 정보의 상품화에 저항하고 인터넷의 대안적 성격을 사회운동화하려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95년 진보넷의 또 다른 전신이었던 ‘정보연대 SING’이 ‘정보화의 상품화에 반대하고 정보에 대한 평등한 접근’을 주장하며 결성된 것이다. 비록 당시의 한계로 인하여 이슈홈페이지 제작 등 매우 도구적인 활동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지만, 실제 활동가들의 문제의식은 도구적인 활용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정보를 당시대 생산력의 핵심으로 파악하고 단순히 민주주의 문제를 넘어서 소유권과 생산양식의 재편 문제로 이해‘하고, 정보의 독점에 근거한 수직적 권력관계를 수평적 권력으로 대체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정보를 사회재생산을 위한 인류의 공공자산으로 파악하였다. 엔지니어들의 선구자적 자부심에 머물던 정보공유운동을 CopyLeft라는 구호로 대중화시킨 것이 바로 그들이었다.

 

3. 독립네트워크 운동 - 정부와 자본으로부터의 독립과 변혁운동으로서의 정보통신운동

97년 노동법 날치기통과 저지 총파업은 신자유주의저지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투쟁이자, 한국 미디어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다. 97년 총파업 투쟁 시 인터넷을 통한 전세계의 연대를 이끌어낸 것은 인터넷이라는 미디어를 과거 선진적인 활동가들의 무기에서 대중적인 무기로 각인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의 경험은 제1회 노동미디어행사와 그것의 이어진 성과로서 노동네트워크와 진보네트워크센터가 출범할 수 있는 대중적 동력을 제공하였다.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크게 네 가지 지점에서 추상화 시켜보고자 한다.

 

첫째, IMF와 신자유주의의 이식. 그리고 초고속망의 확장. 97년을 기점으로 통신산업에 있어 인위적인 진입장벽은 사라지게 된다. 97년2월 타결된 WTO기본통신협상에 의해 98년부터 통신시장이 단계적으로 개방되기 시작하였으며. 97년 IMF를 통해 한국사회에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전면적인 이식이 이루어진다. 이때 초고속망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와 주식투자열풍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던 묻지마 벤처열풍이 불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90년대 말부터 PC통신은 점차 인터넷에 그 자리를 내주게 된다. 즉 대중성을 획득한 것이다. 더불어 남한에서 통신망과 정보재에 대한 본격적인 자본진출이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둘째, 국가와 통신사업자들에 의한 검열과 내용삭제 행위는 90년대 PC통신 시절부터 이어진 것이었다. 그동안 진보진영에서 줄기차게 주장해왔던 ‘정보통신윤리위원회’는 이미 그 기원이 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민주노총 CUG에 있던 게시물 등이 불온 컨텐츠라는 명목으로, 선거 시기 각 통신망 플라자의 글들이 선거법위반행위라는 명목으로 비일비재하게 검열당하고 삭제당한 것이다. 이런 경험들은 인터넷을 비롯한 사이버스페이스 상에서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감시받지 않는 독립적인 네트워크를 요구하게 되었다. 국가와 자본의 검열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의지는 보수화된 노동조합에서 조차 매우 중요한 의제였다. 이런 대중성을 바탕으로, 인터넷 초창기 진보네트워크센터와 몇몇 지역정보통신단체들이 호스팅사업을 중심으로 독립네트워크 운동은 활발히 전개될 수 있었다.

 

셋째,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은 단순히 망의 확장과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미디어의 발견에만 그친 것은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CCTV, 생체인식등 정보통신 기술은 우리 일상 곳곳에서 감시망을 구축하고 있다. 주민등록증을 전자주민증으로 전환하려는 국가의 시도는 이미 96년부터 시작된 것이었고, 당시 정보통신 활동가들은 다양한 사회 세력들과 연대하여 당시 전자주민증 발급기도를 철회시킨바 있다. 당시 정보통신 활동가들은 정보통신기술이 경찰국가, 감시국가의 근본적인 기술이라는 사실을 일찍이 간파하였다. 그리고 이런 기술을 매개하는 사회적 통제체계로 주민등록제도임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넷째, 당시 노동운동진영은 물론 거의 대부분의 시민사회단체들까지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대안미디어로서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바 있는 97년 총파업의 경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간 지배세력에 철저하게 복무하였던 기존의 미디어(방송, 신문)에 대항할 수 있는 참여적이고 민주적인 미디어로서 주목한 것이다. 또한 기존운동진영의 인터넷에 대한 주목 못지않게, 새로운 미디어를 매개로한 새로운 활동들도 생겨났다. 쌍방향적 미디어이자 진입장벽이 낮은 멀티미디어 기재로서 새로운 미디어운동의 영역으로 주목받았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진보넷이 시작되었다. 진보네트워크센터는 사회운동의 정보화, 정보의 사회운동화를 기치로 독립네트워크를 표방하였고, 사설 BBS서비스 이었던 ‘참세상’, 정보연대 SING의 자원을 기반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진보넷의 의제를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거칠게 말해 ‘국가라는 자본주의의 대리도구를 배제하고 인터넷을 온전히 민중들에 의한 사회공공의 미디어로 쟁취해내려는 변혁운동’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민주노총 그리고 전농 등 기존의 변혁운동의 대중운동조직을 사이버스페이스로 확장하여 대중적 기반으로 삼되 국가로부터 독립을 보장하고, 또한 그것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생산/사회관계 창출을 위한 변혁운동의 무기로 삼는 다는 것이었다. 이는 세부적으로 3가지 운동 흐름으로 표현되었다.

 

1) 정보통신기술과 정보재의 사유화저지

앞에서 우리는 장황하게 PC통신부터 시작된 정보운동의 역사와 남한에서의 통신 산업의 발전을 설명했다. 그리고 가급적 두 가지 맥락을 병렬적이면서 상호대립적인 관계 속에서 서술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통신망이 국가주도로 개발된 공공재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함이며 또 한편으로는 폭력기구인 국가의 감시와 폭력에 저항하면서 운동의 영역을 확장해왔던 운동의 맥락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국가의 공적자원이-세원- 투여된 공공재로서 구축된 통신망이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주의재편과 맞물려 급속히 사유화되어 왔던 과정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진보넷은 이렇게 정보가 사유화되고 자본축적의 도구로 발 빠르게 변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정보재는 기존의 상품과 질적으로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다. 사용할수록 가치가 마모되는 기존의 상품과 달리, 정보재는 사용할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질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정보재는 음악이나 영화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상품으로만 평가될 수 없는 사회/문화적 공유를 전제로 한 사회/문화적인 공공의 자산이기도 하다. 원래 지적재산권은 이런 사회/문화적 가치에 대한 공공의 보상제도였지만, 정보재가 자본축적의 도구로 급속히 변질되면서 지적재산권은 피해보상의 개념으로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진보네트워크는 정보재의 사적소유에 반대하고, 공공재로서 모든 민중에게 공유됨으로써 그 온전한 가치가 드러나는 정보재의 속성에 주목하였다. 정보운동SING으로부터 이어져온 CopyLeft운동으로 시작하여 지적재산권문제에 대하여 전문적으로 연구/활동하기 위한 IpLeft를 1999년 발족시켰다. 이후 1999년 MS독점반대운동, 2000년 삼성 BM특허 반대 기획소송, 소리바다등의 P2P서비스에 대한 과도한 지적재산권반대투쟁, 폭력적 소프트웨어 불법복제 단속 반대, 디콘법 반대운동, 2003년 WTO반대 투쟁을 해왔다. 2004년에는 CopyLeft운동을 보다 체계화시킨 ‘정보공유라이선스’를 발표하였으며 이후 특허법과 저작권법 개정운동 및 개정안 대응운동을 벌여왔으며 2006년부터는 ‘한미FTA 지적재산권 대책위’ 활동을 해오고 있다. 우리가 특히 특허법과 저작권법에 주목한 이유는 이두가지 법 모두 단순한 피해보상이나 권리보장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작권은 매우 한시적인 권리이며, 특히 공정이용이라는 면책사유등을 명시하고 있다. 이는 법의 취지가 지적재산을 사회 공공의 자산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사회의지의 표현이다. 진보네트워크는 애초에 정보공유를 기반으로 한 정보재가 신자유주의의 자본축적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에 반대하고, 정보재의 사회적 공공성에 대해 강조해왔다. 그런 면에서 최근 세계화추세에 맞물려 강화되고 저작권과 특허법은 매우 우려스러운 것이었다.

 

2) 아래로부터의 혁명 인터넷.

90년대 인터넷은 두 가지 점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주목 받아왔다. 첫째는 인터넷은 그 시작부터 민족국가의 틀을 벗어나 그자체로 전세계적인 연대가 가능한 미디어라는 점, 그리고 과거 생산자와 소비자라는 이분법적인 근대적시선과도 구별된다는 점에서 대안미디어로 평가받아왔다. 또한 계급, 성별, 신체적 차별에서 벗어나 모든 민중들의 평등하고 직접적인 참여가 보장된다는 점과, 이를 통해 과거 지배권력의 정보의 독점에 기인한 지배전략을 깨트릴 수 있는 혁명의 무기로 인식되기도 했다.

 

둘째는 자본의 세계화와 관련이 있다. 자본의 세계화는 ‘전세계적인 사회적 관계의 강화’를 의미한다. 즉 세계화는 단순히 자본과 상품 그리고 노동력 이동의 전 지구적 확장뿐만이 아니라 전지구적 커뮤니케이션을 구축하는 것을 지향한다는 의미이다. 자본이동의 시공간 단축이라는 절대 절명의 지상과제는 지역적 한계에 제한받지 않는 상호 커뮤니케이션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정보통신기술이 단순히 정보전달 도구의 지위에서 쌍방소통과 공동체를 지향하는 미디어로 그 지위를 격상된 것은, 자본의 입장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맥락이 상호 공통점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생산관계를 지향하는 모순의 지점으로 보았다. 진보네트워크는 인터넷이 아래로의 혁명의 무기로서 발현되기를 욕망했다. 97년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통과 저지투쟁 당시, 총파업통신지원단은 네트워크가 국가와 자본의 권력외곽에서 기존권력을 전복시킬 수 있는 소통과 연대의 도구임을 보여주었다. 진보네트워크는 이런 네트워크운동의 성과를 바탕으로 98년 시작되었고 크게 세 가지 경향으로 드러났다. 한편으로는 기존의 대중운동조직이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을 자원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인터넷의 멀티미디어적 실험과 대안미디어로서의 모색이었다.

 

초창기 인터넷은 그동안 주류미디어가 애써 외면하던 민중들의 투쟁을 온전히 드러내고 저들이 왜곡 축소하던 사건들에 대한 폭로와 고발에 주력하였다. 1999년 지하철노조 파업 통신지원단 활동과 2001년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반대투쟁’시 공권력에 의한 조합원폭행 사건을 고발하여 대중운동으로 확장시켰다. 이것은 단순히 기존의 대중운동의 효율적인 선전선동의 수단이기도 했지만 당시의 미디어생산 방식은 과거 주류미디어의 생산방식을 극복한 실험이기도 하였다. 과거 생산자-언론/방송사의 기자-와 소비자-시청자/구독자-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를 와해시키고 현장노동자들과 연대하여 아래로부터 컨텐츠를 생산하고 이를 전국적/전세계적으로 유통하는 쌍방향적인 방송과 미디어로서 자신을 증명한 것이다. 이는 과거 지배세력의 독점적 소유였던 정보와 미디어를 민중들이 아래로부터 직접 전취하는 것이다. 이는 과거 대의제적 국가시스템과 공공성을 동일시하던 편협한 공공성의 의제를 민중직접참여적인 공공성으로 확장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초창기 실험들은 2002년을 즈음으로 신자유주의 개혁세력들에게 그 주도권을 넘겨주게 되면서 다시 대의제적질서와 시장질서내로 재포섭 된다. 군부독재시대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언론개혁운동진형은 인터넷의 권력 해체적인 성격에 주목하여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의 온라인신문에 주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2002년 노무현 정권과 2005년 신문법 개정으로 주류미디어로 제도화하는 과정을 겪는다. 이는 한편으로는 인터넷을 대의제적 질서 내에서의 공론장으로 격상시킨 것이자 한편으로는 대중 참여적이고 직접적민주주의의 장이었던 미디어를 대의제적 틀로 다시 제한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2005년 신문법 개정은 한편으로 인터넷언론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가능하게 하여 일면 공공성이 확대된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보다 엄격한 과거 언론의 기준을 강요하여 민중의 자발적인 참여행위에 대한 규제장치를 마련하여 참여 지향적인 공공성을 제한시킨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인터넷언론을 광고시장으로 내몰아 자본주의 일반의 이해에 복속시킨 것이기도 하다.

 

더욱 주목할 점은 2003년을 기점으로 포탈서비스가 급속하게 인터넷을 평정하기 시작한 점이다. 1997년 ‘야후코리아’를 시작으로 초기 포탈은 검색, 메일, 커뮤니티 전문형 사이트들이었지만 2003년 <미디어 다음>의 등장은 포탈에 새로운 성격을 부여하게 된다. 포탈의 강력한 접근성과 집중화 현성에 따라 뉴스의 소비패턴도 포탈로 집중화된 것이다. ‘오마이뉴스’나 ‘프레시안’과 같은 인터넷언론이 온라인 저널리즘에 불을 지폈다면, 포탈은 모든 언론을 모두 불살라먹는 통합적 저널리즘을 완성시켜버렸다. 즉 일반통신사업자인 포탈이 한국에서 중요한 정치, 사회적 의제를 아우르는 미디어 권력의 지위를 획득한 것이다. 포탈의 권력수렴 현상은 단순히 언론시장의 왜곡문제만은 아니다. 포탈은 기본적으로 이용자가 생산한 컨텐츠로 운영되는 서비스이다. 문제는 포탈사업자가 이런 이용자컨텐츠에 대해 일정부분 저작권을 행사한다는 점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온라인상의 모든 컨텐츠에 대한 불공정한 수집행위이자 독점적 권력을 누리는 것이다.

 

당시 진보진영의 대응은 격랑 치는 미디어시장에 지분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004년 총선을 기점으로 진보넷은 미디어의 커뮤니티-언론-개인 트라이앵글 전략을 수립하고, 과거 진보넷의 하나의 서비스였던 뉴스와 방송을 <미디어 참세상>으로 확대하는 한편 시청자지원채널 R-TV에서 방송을 시작하여 방송시장으로의 진출도 모색한다. 그리고 2005년 별도의 법인으로 독립시킨다.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다시 제도화되는 인터넷과 그리고 보수화되는 노동운동진영으로부터 다시 아래로부터의 미디어역량을 창출하고자 모색하기 시작한다. 2004년 블로그 서비스는 개인의 다양성과 조직되지 않는 사회의 공공적 의제와 욕망을 발굴하고 모색하기 위한 네트워크로서 기획된 것이다.

 

초창기 인터넷의 아래로부터의 혁명의 성격과 그것의 직접민주주의적인 공공적 의제에 주목하였지만 오늘날 포탈 중심으로 재편된 미디어환경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늘날 인터넷은 시장 친화적이고 주류 대의제적 정치 질서의 동원시스템이다 못해, 대중들의 민족주의적 욕망이나 성차별적인 성향들을 가감 없이 표출하고 때로는 소수자에 대한 내면의 짐승 같은 폭력성향을 과감하게 배설하는 공간이다. 참여적 미디어의 공공성은 소수자의 목소리가 배제되지 않는 다양한 목소리가 소통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현재 포탈이 수집/편집하는 미디어는 과거 주류미디어의 확대재생산에 다름 아니다.

 

이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17세기 상인들의 자발적인 필요에 의해 사용되던 인쇄매체가 당시 민족국가형성 과정에서 국가와 자본의 적극적인 활용으로 민족국가와 대의제적 틀 내로 수렴되면서도, 한편으로 19세 말~20세기 초 사회주의 혁명의 기운 속에서 대중조직의 자발적인 언론활동으로 활용되기도 했던 것을 상기해보면, 현재 인터넷은 초창기 새로운 매체에 대한 기대 속에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지던 시기를 한참 지났다고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포탈을 비롯한 인터넷을 새로운 주류 미디어로 규정하고 그것에 걸 맞는 전선구축과 대응전략을 논의해야 할 때이다. 과거 진보넷은 새로운 미디어인 인터넷에 대하여 자유주의적인 전략을 취해왔다. 국가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를 주장해왔지만 이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미디어에 대한 기대의 표현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매우 시장친화적인 노선이기도 하였다. 진보넷은 과거 운동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한편으로는 대안미디어로서 진보진영의 튼튼한 진지를 구축해야 하는 것은 과제와 더불어 포탈과 같은 독점미디어 공간에 대한 해체투쟁을, 또 한편으로는 전체 미디어시장의 문제점에 대하여 대안을 제시하는 보다 포괄적인 정책운동이나 대중운동이 필요한 시점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3) 표현의 자유 수호와 국가 및 자본에 의한 감시 강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진보넷 출범의 가장 큰 동기가 과거 PC통신 시절의 정보통신윤리위원회와 사업자에 의한 감시 검열문제였다. 진보넷은 지난 10년 동안 한편으로는 게시판 운영원칙을 제정하고 민주노총 등의 대중조직과의 연계를 통해 진보진영 게시판의 민주적인 운영을 위한 모델을 제시하고자 노력하기도 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지속적으로 국가의 감시와 검열에 저항하고 이용자의 ‘표현의 자유’와 ‘개인정보’를 수호하려는 각고의 노력을 해왔다고 자평한다. CCTV등의 노동 감시 대응, 의료정보화분석, KT 노동 감시 문제, 삼성SDI 위치추적 등의 노동 감시 문제, 전기통신사업법 54조의 폐지운동, 선거 시기 표현의 자유 운동, 통신질서 확립법 반대운동, 정보통신윤리위원회 폐지운동, 청소년유해매체 등급제 대응, 인터넷 실명제 반대운동 및 선거 시기 실명제 반대운동(선거법), 국가보안법 반대 운동, 전기통신망법 반대운동(임시조치, 북한게시물 삭제명령), 통신비밀보호법 대응, NEIS 거부 투쟁, 개인정보보호기본법 입법 운동, 지문날인반대운동, 전자건강카드 반대운동, 전자주민카드반대운동 주민등록법 개정 운동, 생체여권 반대운동 등. 정보인권이라는 기치아래 그동안 셀 수없을 만큼 무수히 많은 전장을 치러왔다.

 

인터넷 초창기부터 국가기구는 이 미디어가 통제하고 감시하기에 용이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간파했다. 과거 전통적인 매스미디어들이 비록 지난한 투쟁을 통해 상대적 자율성과 권력을 확대해왔지만 궁극적으로는 법률과 행정기관들에 의해 효율적으로 통제되어 왔다. 하지만 인터넷은 그자체로 일국적 수준을 벗어난 것이며, 기존의 대의제적 의사결정과정을 무력화 시킬 수 있다는 의구심을 처음부터 받아왔다. 당연한 것이다. 남한에는 이미 1992년에 인터넷 국가감시기구인 정보통신윤리위원회가 설립되었으며, 미국에서도 1996년 인터넷을 방송과 동일하게 취급하고자 하는 취지의 연방통신품위법(the Communication Decency Acc: 일명 CDA)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이런 정부의 노력들은 초창기 대부분의 실패를 경험한다. 1997년 미연방대법원은 연방통신품위법에 대하여 위헌 판결을 하였으며, 2002년에는 한국에서 전기통신사업법 제53조 불온통신 조항도 위헌판결을 받아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존립 근거를 흔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과거의 지난한 싸움은 지속적으로 수세로 내몰리는 싸움의 연속이었으며, 최근 몇 년 동안 포탈에 대한 사회적 논란과 비난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던 국가기구에는 다시 회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해방이후 한국의 주요 사회통제 이데올로기는 반공과 불온이었다. 하지만 87년 민주화투쟁 이후, 과거 반공과 불온의 이데올로기는 점차 축소되고 각 사회분야에서 감시와 검열 그리고 통제의 틀은 느슨해지고 자유는 확대되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 검열을 담당하던 관료조직들은 살길을 모색했고, 사이버스페이스라는 신천지를 발견했고 포탈을 비롯한 인터넷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명분과 악성 댓글로부터 명예훼손피해를 구제한다는 명분으로 신천지에 완전히 자리를 틀었다. 이러한 노력은 눈물나게 가열찬 것이었고 최근의 포탈규제논쟁은 보너스 같은 것이었다. 더군다나 9.11 테러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대테러전쟁을 명분으로 각종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는 법률들은 일사천리로 통과되었다. 이렇듯 인터넷을 둘러싼 대부분의 감시통제 기술과 법제도는 거의 완성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대리인으로써의 국가기구가 일반 민중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국가의 개입은 곧 개인의 프라이버시 침해라는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빌리지 않더라도 충분히 경험적으로 입증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국가와 자본의 관계는 보다 복잡해졌다. 자본의 주도권을 더욱 강화되었으며 국가로부터의 감시문제가 문제가 자본 스스로에 의한 감시와 검열이 더욱 문제가 되고 있다. 최근 다음카페에 개설된 이랜드 비정규직노동조합 카페가 임시 조치된 사건이나, 삼성비자금관련 김용철 변호사 폭로사건으로 전국이 들끓던 당시 네이버 뉴스면 초기화면에서 단 한 줄의 기사도 찾을 수 없었던 일들은 상징적인 사건들일 뿐이다. 또한 국가기구가 국민의 정보를 수집하고 관리하는 것 못지않게 기업들 스스로 수집하는 개인정보와 재판매를 통한 개인정보관리와 통제전략은 향후 방통융합 그리고 유비쿼터스 시대에 자본에 의한 민중들의 직접통제라는 위험을 내포한 것이다. 즉 이제 국가기구가 문제는 아닌 것이다.

 

4. 미디어환경의 변화와 미디어융합

1) 독립네트워크의 위축

1998년경의 독립네트워크는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감시와 통제받지 않는 네트워크라는 정치적 의미뿐만 아니라, 사회운동 정보화의 지원의 의미를 강하게 함축하고 있었다. IT시장의 폭발적인 성장 속에서 사회운동진영 대부분은 시장메커니즘 속에 편입된 최근에도, 독립네트워크는 주로 국가와 자본의 검열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정치적 의지와 표현의 자유, 그리고 검열반대라는 정보인권 담론을 지칭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운동 전반의 변혁운동과 연대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된 독립네트워크운동은 점차 개별화되었다. 이는 첫째로는 IT기술 발전과 시장의 확장, 둘째로는 한국사회의 정상화, 그리고 진보진영의 정치적 분화가 가속화되는 사회적 변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동운동 및 사회운동진영의 인터넷에 대한 관료적 접근 태도들이 맞물린 결과이다. 시민운동진영의 성장과 민주노동당 등 진보정당의 의회 진출 속에서 대다수 주요정치/시민운동진영은 일찌감치 독자서버를 운영해왔으며, 최근 노동운동 내 정치적 분화 속에서 민주노총 등도 독자서버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앞으로 기업별 노조에서 산별로 전환되는 노동운동의 흐름역시 독자서버의 필요성을 증가시키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IP주소를 저장하지 않고 공권력의 개입을 일체 거부해왔던 과거 단일한 전선에서 이탈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특히나 노동운동 진영의 경우 인터넷을 과거처럼 실험적이고 대안적인 미디어로 활용하기 보다는 관리하고 통제해야할 미디어로, 관료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관료주의적인 경향은 한편으로는 홈페이지에 대한 자체 역량을 강화하기보다는 시장에 대한 의존성을 높이고, 또 한편으로는 자유게시판에 대한 통제와 감시기능-IP 주소 저장 등-을 요구하며 결과적으로 국가와 자본에 의한 통제시스템에 편입될 우려도 강화시킨다.

 

2) 인터넷과 통신 시장의 독점과 미디어융합

진보운동진영이 각자의 진지로 해체되고 관료화되는 동안, 자본의 독점과 국가의 통제전략은 통합적으로 구축되어 왔다. 이제 인터넷은 독점 시장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주류 상업 미디어이다. 최근 ‘방통융합’이라 불리 우는 미디어 융합 국면은 이런 경향이 만들어낸 질적 변화이다. 미디어의 융합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IP-TV에서 선보여지는 멀티미디어 기술-다중컨텐츠 전송기술이나 VOD서비스들-들은 이미 인터넷을 통해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진 서비스이다. 방통융합은 기술의 새로움에 대한 표현이라기보다는 새로이 창출되는 시장에 대한 구획 설정과 법제도 정비의 표현이다. 이미 통신망과 인터넷은 KT 등의 망사업자와 포탈 등에 의해 독과점이 형성된 포화시장이다. 지금 방통융합과 관련한 일련의 논쟁에서 새로운 것이라고는 사실상 방송서비스를 하고 있는 통신서비스사업자에게 공식적으로 명함 하나 제대로 파주는 것밖에 없다. 방통융합이 마치 최근의 이슈처럼 다루고 있지만, 사실 정통부나 KT등의 통신사업자들은 NgN, BcN등의 새로운 국가기간통신망 구축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오랫동안 준비해왔다. 이미 2010까지 구축을 완료한다는 구체적인 목표까지 설정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방통융합서비스라 불리는 IP-TV등은 이렇게 새로 구축되는 국기기간통신망건설과 이를 통한 새로운 시장창출이라는 일련의 목표 속에 진행되어 왔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통신과 미디어 산업의 과잉 축적문제를 이야기하지만, 자본은 이미 새로운 시장창출로 그것을 돌파하는 것까지 그려두고 있었던 것 이다. ‘유비쿼터스 시대’와 같은 장밋빛 전망은 단순히 몽상가들의 호들갑이 아니라, 무에서 유를 창조하려는 무모한 도전,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려는 자본가들의 투철한 도전정신이었던 것이다.

 

방송과 통합을 아우르는 독점의 고도화는 결과적으로 자본에 의한 정보와 컨텐츠의 독점을 심화시킬 것이다. 공유에 기반 한 정보재 고유의 대안적 생산관계를 무력화시키고 저작권의 틀 속에서 폐쇄적이고 일방향적인 망으로 다시 회귀하려 하고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이용자의 표현을 제한하고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저해하고 오히려 대중동원의 기재로 회귀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경향은 이미 여러 군데에서 증명되어 왔다. 포탈들이 인터넷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 획득한 이후 나타난 일련의 사례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황우석 사태’나 영화 「디워」 논쟁에서 보듯이 많은 논객들이 포탈을 통한 대중의 자발적인 국가주의에로의 동원, 그리고 소수자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에 너도나도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말들이 많다고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님을 보여준 이런 사례들은 인터넷이 과거보다 빅브라더에 의한 대중동원을 더욱 쉽게 만든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한다. 이는 시장의 독점에 의한 인터넷구조의 왜곡 때문이다. 포탈의 독점적 지위는 결국 인터넷의 다양성을 위축시킨다. 과거 많은 진보진영이 독립적인 홈페이지의 구축과 독자적인 소통공간을 중요히 생각했지만, 이제 대중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모든 온라인 활동이 포탈에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포탈에 집중될수록 정부와 기업에 의한 감시와 통제는 더욱 용이해진다. 망과 플랫폼의 독점의 문제는 단순히 자본에 의한 시장지배라는 문제에 그치지 않고 담론과 문화 그리고 컨텐츠의 다양성을 저해하고 국가와 자본에 의한 감시를 강화하고 결과적으로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를 매개로한 자본의 대중 동원기재로 전락하게 된다.

 

물론 모든 문제를 독점자본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대중 동원의 기재로 작동하는 것이 인터넷이라는 기술과 포탈의 서비스 때문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용자가 참여가 보장된 UCC 서비스를 보자. 과연 그곳은 이용자가 직접 생산한 비판적이고 대안적인 컨텐츠가 유통되는 대안의 공간이던가?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포탈의 UCC 서비스는 크게 세 가지 컨텐츠 시장에 기반하고 있다. 우선은 방송컨텐츠의 2차 소비시장(하이라이트와 스타 컨텐츠), 둘째는 음성적으로 유통되던 불법 영상 컨텐츠를 시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자체시장인 스타 발굴/육성 시장이다. 물론 간간히 주류담론에 균열을 내고 다른 사회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컨텐츠가 올라오고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절대적인 양에서 부족하다. 이는 자본의 전략이기에 앞서 대중들의 상상력과 생산력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빈약한 탓일 것이다. 미디어융합이 우려스러운 점은 바로 이런 독점의 문제를 심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자본과 국가의 통제모델 변화

미디어의 융합은 인터넷을 포함한 미디어의 환경의 변화 크게는 통신자본의 방송진출이라는 자본시장 측면의 의미뿐만 아니라, 방통융합기구로 통합되는 국가기구모델에서도 볼 수 있듯이 방송과 인터넷을 아우르는 통제와 관리시스템을 정비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전통적인 미디어와 예술영역은 과거 군부독재시대에 비하면 상대적인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 강화되고 있는 인터넷의 통제장치들은 과거와 세 가지 면에서 크게 다르다. 첫째는 그것이 기술 중심 적이라는 점이다. 과거 경찰의 수사방식에 비해 인터넷을 통한 수사는 글게시자나 개인정보주체가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루진다. 또한 인터넷을 통한 감시 프로그램의 경우 네트워크 이용자는 전혀 인지하지 못한 체 이루어진다. 둘째는 사업자 중심적이라는 점이다. 정부는 직접 규제보다는 간접 규제의 형태로 사업자로 하여금 직접 감시의 주체로 역할 하도록 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법이나 공권력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사업자 스스로가 더 이상 감시대상자에 대한 감시와 통제활동을 거추장스럽고 귀찮은 절차에 얽매인 공권력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화하려는 경향과도 맞물린 것이다. 이제 기업은 조합원들의 활동을 감시하기 위해 애써 국가기구에 의존하지 않는다. 휴대폰이나 CCTV 그리고 웹의 접근기록을 통해 스스로도 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감시의 사회적 확대, 또는 내면화 과정이기도 하다. 셋째, 인터넷의 특성상 인터넷의 감시체계는 그 자체로 범세계적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이는 감시체계의 세계화를 동반한다. 네트워크 모니터링을 위한 국제적인 기술 표준부터, 각국의 수사공조 체계는 더욱 강화될 것이다.

 

이러한 정세들은 우리로 하여금 총체적인 혼란으로 몰아놓고 있다. 국가의 감시체제 강화는 물론 자본에 의한 민간감시체제의 강화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국가에 의한 정보통제와 대중동원체제보다는 자본의 독점에 의한 정보독점과 대중동원체제가 더 문제시 되고 있다. 그간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너무 추상적으로 다뤄왔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의 도구로서 정보통신기술이라는 설정은 너무 환원론이며, 국가의 감시와 통제에 대한 반대 투쟁은 여전히 ‘국가와 개인’이라는 근대적 시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개별적인 자본의 독점과 감시기능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민중의 총의로서 어떤 공적영역을 통한 견제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한편, 공적 기구의 비대화를 통한 해결은 민중에 대한 국가에 의한 직접적 통제라는 양날의 검을 선택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 인터넷이라는 대안적 미디어를 지켜내고, 정보인권이라는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국가배제적인 노선을 견지해왔지만, 앞서와 같은 여러 정황들은 우리에게 공적 영역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란 해 묶은 질문을 다시 던지게 한다.

 

만일 우리가 근대적 이분법을 잠시 벗어버리기로 하고, 국가/자본/노동/사회운동/공동체/개인 등 보다 구체적이고 다양한 주체들의 운동이라는 관점으로 내려가 보기로 한다면, 이런 다양한 주체들은 비록 상호 계층적이면서도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기는 하지만, 때로는 적대적일수도 있는 매우 정세에 민감한 관계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우리는 한 사회의 운동이 이런 다양한 주체들의 상호 대립적이면서도 상보적인 운동 속에서 진행된다는 사실을 한다면, 자본의 독점과 국가기구의 사이에서 전술적 유연함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국가기구의 개입을 견제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진보적인 의제들을 공적 영역에 확장함으로써 자본의 독점에 저항하고, 자본의 독점에 대한 배타적인 저항을 하면서도 국가기구에 대응하기 위해 그들을 견인할 대안담론과 가치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5. 미디어의 공공성 의제

인터넷이 비록 계속 협소화되고 대안미디어로서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넓게 보자면 여전히 가능성이 충분한 공간이다. 여전히 인터넷은 넓고 대안의 공간도 충분하다. 우리는 초창기 인터넷이 그러하였던 대안미디어로서, 자본주의적인 생산과 소비의 관계에서 쌍방향성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생산관계와 삶의 다양함과 풍부함으로서 인터넷의 가치를 지켜내고, 미디어를 민중의 손으로 끌어내려 ‘아래로부터의 끊임없는 혁명’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를 위해 우리는 앞으로 미디어의 융합과 발전과정에서 지켜져야 할 몇 가지 의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1) 다양성

앞장에서 이야기 했듯이, 포탈의 근본적인 문제는 언론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독점적 지위에 근거한 정보수탈과 정보독점, 그리고 정보배제 문제이다. 방송과 포탈에 정보의 노출빈도를 높이는 것이 대중과의 담론의 소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경로라니, 초기 인터넷이 그 자체로 다양성의 상징이었던 것에 비하면 얼마나 수세적인가?

 

우리는 포탈의 인터넷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해체하고, 정보의 가치와 권력을 이용자에게 되돌려주는 투쟁을 벌여나가야 한다. 포탈이 가지는 정보의 독점권은 부당한 것이다. 포탈에 넘쳐나는 정보는 모두 이용자가 생산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IN의 경우만 보아도 그렇다. 그 공간에서 향유하는 민중이 스스로 창출한 지적 성과물은 온전히 이용자들의 것이다. 따라서 지식IN의 컨텐츠에 대한 지적소유권과 활용에 대한 권리는 온전히 이용자들의 것으로 되돌려져야 한다. 포탈은 단지 그 공간을 임대해줌으로써 얻는 광고수익만으로 초과수익을 얻는 것이다. 또한 현재 수렴형, 폐쇄형인 포탈서비스를 개방형으로 바꿔내어야 한다. 그리고 시장 지배적 사업자인 포탈사업자들은 컨텐츠의 다양성을 보장하기위한 지면배치를 해야 할 사회적 책무가 있다. 이것은 인터넷의 다양한 컨텐츠가 살아 숨쉬도록 하는 것이며, 그것은 인터넷이 다시금 다양한 욕망과 대안의 모색공간으로 만들어내는 일이며 포탈사업자가 이용자들과 공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세상에는 포탈서비스와 같은 단일하고 규격화된 플랫폼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세상에 Window XP만 있는 것이 아니듯이. 그 외에도 다양하고 대안적이며 실험적인 플랫폼은 얼마든지 있다. 오늘날 유명한 구글이나 유투브등이 만들어진 과정은 단순히 그들만의 힘이 아니었다. 오픈소스등의 참여적이고 공유에 기초한 개발환경과 실험들이 없었다면 과연 그들이 가능했을까? 아니 인터넷이라는 것이 가능하기는 했을까? 인터넷의 풍부한 발전은 소통하고 싶은 소박한 욕망들이 담겨있는 다양하고 실험적인 플랫폼과 서비스에 있다. 이런 다양한 플랫폼과 소프트웨어들을 단순히 시장에만 내몰 것이 아니라, 대안적이고 창의적인 욕망과 지적자산에 대한 사회적 지원 체계가 보다 활성화되어야만 한다.

 

2) 문화의 향유권의 보장과 참여보장

둘째는 방통융합국면이라 불리 우는 국면이 단순히 시장의 강화와 활성화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IP-TV등의 새로운 융합서비스가 UCC 서비스처럼 소비지향적인 시장으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2002년 즈음의 대중들의 인터넷에 대한 기대와 열망은 주류미디어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배우고 터득한 기성질서에 대한 모순과 대안적인 가치에 대한 자기표현 때문이었다. 또한 그동안 누리지 못해왔던 다양한 문화적 가치에 대한 향유와 다양한 공동체적 삶에 대한 향유 때문이었다. 멀티미디어컨텐츠가 주류컨텐츠로 떠오른 융합미디어에 대해서도 민중들은 같은 것을 꿈꾼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다양한 컨텐츠를 통한 문화의 다양성을 체험하고 그를 통해 계급, 성별, 신체의 제약 없이 평등하고 다양한 공동체적 경험을 누릴 권리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위협하는 몇 가지 우려 요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 가지만 언급하자면 자본의 세계화와 맞물린 지적 재산권의 강화문제이다. 이는 단순히 초국적 독점자본의 수탈체계이기도 하지만 미디어를 통해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하고자 욕망하는 대다수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에 새로운 것이란 없다. 결국 문화와 역사라는 토대위해 재구성되는 것이고 그것의 공유야 말로 창조의 기반이다. 앞으로 지적재산권이 강화되면, 어쩌면 우리는 게시판에 글을 쓸 때마다 영상을 편집할 때마다 저작권자에게 저작권료를 지불해야만 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지적재산권의 강화는 모든 생산활동을 자본주의적인 관계로 재구성해내려는 신자유주의의 또 다른 얼굴일 뿐이다. 이런 위협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지적재산권이 적절한 수준에서 제한적일 필요가 있다. 원래 특허권과 지적재산권은 피해보상이나 배타적 정보독점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이는 원래 지식을 널리 공유하도록 장려하고, 창조적인 활동에 대한 적절하고 제한적인 사회적 보상을 해주기 위함이다. 즉 사회의 지적 자산을 공유하기 위한 공공의 목적을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초국적 자본의 논리에 개인들의 지적공유와 향유의 권리가 제한되어서는 안된다. 둘째는 이런 지적재산권이 사회적 자산으로 활용되기 위한 공정이용이 확대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언론사나 방송사는 공정이용이라는 명목으로 많은 경우 지적재산권의 예외적 활용으로 혜택을 입고 있다. 하지만 실제 컨텐츠의 생산자인 시민운동진영이나 다수의 대중은 해당 방송과 기사를 활용할 수 없다. 심지어 자기 홈페이지에 퍼 나를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비영리적이고 사회의 공적인 목적으로 생산된 컨텐츠에 대해서 사회적 지원을 확대하고 공정이용으로 다수의 대중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정보와 지식의 공유를 장려하는 대안적인 생산시스템에 대한 사회적 고민과 실험들이 필요하다. 사실 대부분의 지적생산물은 사적소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애초에 민중의 것이었으며, 민중들의 세금에 의한 공적자원의 지원을 받은 것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러한 컨텐츠들, 예를 들어 공영방송의 컨텐츠나 공적지원에 의한 공공의 컨텐츠들은 반드시 사회의 공공의 자산으로 활용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대안라이센스 운동이 보다 확장되어야 한다. 이는 사회운동 진영도 마찬가지이다. 근시안적인 자기생존 논리 속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3) 표현의 자유와 익명성

=대테러전쟁을 빌미로 강화되는 국가기구에 의한 통제와 감시의 강화는 매우 우려스러운 것이다. 이는 단순히 일국적 수준의 문제가 아니며 최근 전자여권문제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전 세계를 나와 적으로 구분하고 전세계적 수준에서 자본과 노동력 그리고 정보의 이동을 통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이는 단순히 국가 검열기구의 강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결국 자본에 의한 민중의 직접 통제를 강화하려는 자본의 욕망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과거 CCTV나 생체인식과 같이 작업장내에서의 감시문제는 이랜드 노조 사태에서 보듯이 이제 단순히 작업장내에서의 물리적인 통제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인터넷에서의 표현의 자유는 단순히 정치적 입장에 대한 의사표현만의 문제는 아니다. 노동자로서의 자신의 권리에 대한 투쟁인 것이다. 개인들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대의제적 민주주의 틀의 한계를 보안하고 때로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통해 사회가 진보적으로 운동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 조건이다. 또한 익명성도 보장되어야 한다. 익명성은 한 개인이 자신의 계급과 학력 그리고 성별과 신체적 차이를 넘어서 평등하게 의사를 개진할 수 있도록 하는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자행되고 있는 실명제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 악성 댓글을 차단하겠다는 하지만 실제 차단되고 있는 것은 개인의 정치적 의사표현이지 연예/스포츠 면에 실리는 악성댓글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이러한 실명제의 폐해가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이번대선에서의 선거법이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에서 오히려 국민의 발언을 제한하는 관료적인 접근이오,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퇴행적인 악법이다. 한국에서 실명제가 위력적인 이유는 주민등록번호라는 전 국민 단일 인증체계 때문이다.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이 시스템은 과거 오프라인에서의 유사시 신분증명과 이동통제의 기능을 뛰어넘어 온라인에서의 실시간 감시가 가능하게 하는 진정한 빅브라더이다. 우리는 주민등록번호제도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최소한 그것의 사용은 감시가 아니라 유사시 신분증명과 같은 소극적 의미로만 사용되어야 하며, 온라인에서의 단일한 개인증명도구로 활용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표현의 자유를 불가피하게 제한하여야 할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반드시 사법적 판단에 의한 엄격한 것이어야 한다. 행정기관에 사법권을 부여하거나 포탈사업자에게 임시조치를 강제하는 것은 현행 헌법상 명백히 삼권분립의 위반이며 전국가적인 감시체제에 대한 용인에 다름이 아니다. 물론 모든 미디어에 적용되기는 힘들 수도 있다. TV등의 지상파 방송은 미디어의 특성상 일정정도의 심의체계와 행정력이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률적인 규제보다는 각 미디어의 특성에 따라 차별적인 규제가 필수적이며, 심의기관도 국가조직이 아닌 민간자율합의 기구가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4) 개인정보의 자기결정권과 개인정보보호

정보화가 진전된 사회에서 살면서 삶의 이기를 위해 일정정도 개인정보를 주고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내가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해 나의 어떤 정보를 제공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반드시 개인이 인지하고 선택하고 결정할 필요가 있다. 본인의 의사나 동의 없이 수집되거나 재판매되는 일은 개인의 자기결정권에 위배되는 것이고, 개인의 인격을 침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수집된 개인정보는 철저히 관리되어 개인정보유출에 따른 피해를 사전에 철저히 막아야 한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많은 금융피해 중에 하나가 이렇게 함부로 유출된 개인정보에 의한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노력은 기업들에 자율에 맡겨서는 가능하지 않다. 많은 기업들이 고객의 내밀한 정보를 원하고 기업들의 이익만 일치한다면 언제든지 사고파는 행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공적인 기구를 통한 강력한 지원과 규제, 그리고 처벌이 필요하다. 이미 유럽은 오래전부터 독립적인 국가기구를 통해 개인정보관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에 비하여 한국은 모호한 지원체계와 규제 틀에서 머물러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한국은 특히나 주민등록번호라는 치명적인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이다. 하나의 개인정보 유출은 사실상 모든 정보의 유출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정보수집과 관리에 대한 철저한 규제는 그 어느 나라보다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피해를 막기 위한 예방차원이 아니라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국가의 당연한 임무이다. 그런 면에서 개인정보보호는 단순히 민간시장만을 대상으로 해서는 안 된다. 국가정보원같이 국가 행정기관이 통제받지 않고 개인정보에 접근하고. 필요이상으로 국민의 성향을 판단하고 감시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개인정보보호를 위한 기관은 반드시 국가독립기구체제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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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자본주의 이해를 위한 책 목록

마르크스

   - 자본

 

뒤메닐

   - 자본의 반격

   - 현대 마르크스 경제학

 

Henryk Grossmann

   - The law of accumulation and breakdown of the capitalist

 

아리기

   - 장기 20세기

 

수잔 드 브뤼노프의 글들

 

 

'백승욱의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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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편향의 사회 : 영상매체의 발달과 된장녀 논란 - 민호

은수 님의 '고대녀와 네이년은 한끝 차이'를 읽고 예전에 썻던 글이 생각나서 올려본다.  

2006년에 쓴 글이니 벌써 3년이 지난 글이지만... 그래도...

(예전에 문화사회 2호에 기고했었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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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 편향의 사회 : 영상매체의 발달과 된장녀 논란

 

   현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감각기관은 시각이다. 우리는 어딜가든 만들어진 영상들과 대면한다. 거리에서는 만들어진 영상들이 나와 함께 걷고, 집과 사무실에서는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쏟아내는 영상들의 폭격을 받는다. 필자는 현대사회의 주된 특징이 이러한 시각 편향성-그 중에서도 특히 영상매체에 의존한 시각 편향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사회의 시각편향성은 다른 감각을 억압할 뿐 아니라 같은 시각에 의존한 매체인 활자매체마저 배제시킨 채 영상매체를 특권화 시킨다. 영상매체가 특권화되는 과정에서 기술복제가 가능한 사진과 영화 그리고 텔레비전 등의 전자매체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현대사회에서는 디지털 기술이 발달하면서 매체발달의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다. 매체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대상을 재현하고 인식하는 방식의 변화를 수반한다.

   이글은 영상매체의 발달과정을 추적하고 그에 따른 인지방식의 변화(혹은 그 가능성)를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나아가 마지막 사례인 된장녀 논란이 발생하는 과정을 매체의 특성과 함께 분석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머물고 있는 매체발달의 지형을 밝혀보도록 하겠다.

 

# 사례 1. Video killed the radio star

 

   1981년 하나의 살해사건이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범인은 video였고 피해자는 radio star였다. 1981년 개국한 MTV는 그들의 첫 뮤직비디오로 그룹 가 1979년 발표한 앨범에 수록된 'Video killed the radio star'를 내보냈다. 이 곡의 가사를 잠시 살펴보자.

 

“… Video killed the radio star / Video killed the radio star / In my mind and in my car / We can't rewind / We've gone to far / Pictures came and broke your heart / Put the blame on VCR …”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어 / 내 마음, 내 차 속에서 살아 있던 / 되돌릴 수는 없어 / 너무 멀리 와버렸거든 / 영상이 너의 맘을 짓이겼지 / VCR을 원망해라.)

- The Buggles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 중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이건 살해사건이 아니다. 이 사건은 라디오 스타의 청각 중심 음악이 시각성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청각중심의 음악에 시각성을 부여하는데 실패한 몇몇 음악인들은 살해당하기도 했고, 크게 다치기도 했다. 안타깝지만 그것은 청각에만 의존하던 음악인들의 필연적인 퇴화였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길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청각만으로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음악을 만드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VCR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VCR을 활용하는 것이다.

 



# 사례 2. 전화와 카메라

 

   멀리 있는 것을 소리를 통해 가까이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전화이다. 따라서 전화는 청각에 기반을 둔 매체이다. 핸드폰도 전화의 일종이고 당연히 청각에 기반을 둔 매체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청각 장애인은 전화를 사용할 수 없지만 핸드폰은 사용할 수 있다. 2001년 방영된 드라마 <엄마야 누나야>에는 청각 장애인이 주인공으로 나왔으며 핸드폰은 타인과의 중요한 소통수단으로 쓰였다. 핸드폰에는 시각에 기반한 소통 수단인 문자 서비스 기능이 있다. 따라서 당연히 청각장애인도 사용 가능하다. 근래에 나오는 핸드폰에는 문자 서비스 외에 중요한 기능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이 바로 ‘카메라’ 기능이다. 요즘은 카메라 없는 핸드폰은 구하기도 힘들다. 카메라 없는 핸드폰은 잘 팔리지도 않는다니 핸드폰에 카메라는 필수적인 구성요소라 할 수 있다. 핸드폰 기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게임과 인터넷은 기본이고, 작년에는 핸드폰에 텔레비전마저 부착되었다. 이쯤 되면 핸드폰은 더 이상 전화가 아닌듯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핸드폰이 전화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위의 두 가지 사례는 오늘날 시각과 청각이 어떻게 결합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마샬 맥루한에 따르면 (알파벳의 발명과 함께) 인쇄술의 발달 이후 인간의 감각은 시각에 편향되어 왔다. 활자매체를 접하기 위해 인간은 시각을 사용해야 했다. 활자매체를 해독하기위해 시각을 주된 정보 수용 감각으로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경험은 단편적인 것이 되었다. 또한 선형적 문자에 따라 선형적 사고가 복합적인 비선형적(혹은 직물적) 사고를 가로막아왔다.(선형적 사고에 대해 빌렘 플루서는 그의 글 ‘코드화된 세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의 텍스트를 해독하려면(읽으려면) 눈은 행을 따라 미끄러져야 한다. 행의 마지막에 가서 비로소 우리는 메시지를 수신해 그것을 요약하고 종합하도록 해야 한다. 선형의 코드는 그것의 통시성을 동시화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전진적인 수신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결과 새로운 시간 체험이, 말하자면 선형의 시간, 철회할 수 없는 진보의 흐름, 반복 불가능성이라는 극적인 상황, 구상, 간단히 말해 역사라는 새로운 시간 체험이 생겨난다.” 플루서의 이러한 관점은 뒤에서 다시 언급될 것이다.) 맥루한은 이를 시각이 다른 감각을 배제하고 스스로를 특권화시키는 일종의 왜곡이라고 본다. “시각 기능을 강화하고 확장하는 알파벳은 어떤 문자문화에 있어서도 청각, 촉각, 미각과 같은 시각 이외의 감각의 역할을 줄여버린다(맥루한, 미디어의 이해).”

   맥루한은 활자매체 이후 전자매체에 분석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가 보기에 전자매체는 활자매체의 시각편향적인 왜곡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매체였다. 맥루한이 전자매체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텔레비전을 논의의 중심에 둔다. 텔레비전은 시각에 청각을 결합시킴으로써 활자매체에 의해 잠식된 청각을 복원시키는 매체이다. 즉 그에게 텔레비전은 단편적인 경험이 아닌 종합적인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매체이다. 텔레비전을 시각과 청각의 종합적인 매체로 본 것은 어느 정도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맥루한이 텔레비전을 정세도definition가 낮고 참여도participation가 높은 쿨한 미디어로 본 것은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그의 미디어에 따른 지각방식의 변화에 대한 이론이 시대착오적인 것은 단순히 텔레비전에 대한 잘못된 분석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현대사회가 시각 편향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판단 자체가 더 시대착오적이다. 앞에서 제시한 두 가지 사례는 시각과 청각의 결합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은 텔레비전과 다른 결합이다. 두 사례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순수하게 청각에 의존한 예술과 매체가 시각에 의해 ‘흡수’되고 있는 현상이다.

   가장 순수하게 청각에 의존하는 예술인 음악이 시각과 결합하였다. 그것은 청각이 사라질 수 없다는 점에서 보면 결합이지만 현대의 음악 중 어떤 음악들은 시각에 의존하지 않고는 만들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흡수이다. 얼굴과 몸으로 음악을 하는 댄스 가수들과 영화제작비와 맞먹는 물량을 투입해서 만든 화려한 뮤직비디오들을 생각해보라. 음악은 마치 영상의 배경일 뿐인 것처럼 보인다. 또한 벨벳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을 들으면 앤디워홀의 바나나가, 핑크플로이드의 음악을 들으면 베를린 장벽이, 야니의 음악을 들으면 자금성이 떠오른다. 패션을 생각하지 않고 그램록과 힙합을 들을 수도 없다. 음악은 이제 청각만으로는 과거의 영광을 다시 찾을 수 없다. 핸드폰도 마찬가지이다. 통화 기능이 아무리 잘 갖추어져 있다고 해도 카메라가 없는 핸드폰은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활자매체 시대를 지나 전자매체 시대에도 시각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감각 기관이다. 그렇다면 현재도 맥루한이 말한 시각편향의 구텐베르크 은하계에 속해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지금 시대는 활자매체 시대와 다른 시각 편향을 보이고 있다. 활자매체 시대와 다른 지금 시대의 시각편향의 특징을 포착해 내기 위해서는 레이 초우를 따라 루쉰의 사례를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 사례 3. 뉴스영화와 루쉰

 

   루쉰은 의학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에서 유학하던 중 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인이 처형당하는 영화(슬라이드)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충격을 받은 루쉰은 사람들의 병든 몸보다 병든 마음을 개조하는게 더 시급한 일임을 인지하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영화 매체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을 담고 있는 레이 초우의 책 <원시적 열정>은 이처럼 루쉰을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게 만든 (루쉰 자신이 서술한) 에피소드를 분석하면서 시작한다. 레이 초우는 루쉰의 에피소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새롭게 출현하고 있던 ‘근대성’이, 특히 시각에 기초하고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이와 비슷한 에피소드는 세계 곳곳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루쉰의 경험은 마르틴 하이데거와 발터 벤야민과 같은 유럽 지식인들이 근대에 대해 썻던 것을 선취했다. … 잔니 바티모는, 아주 상반된 내용의 하이데거와 벤야민의 두 논문이 같은 해인 1936년에 발표되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그들이 최소한 ‘방향감을 상실했다는 것에 대한 집착’이라는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 루쉰이 충격 속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것이 ‘영화라는 미디어에 의한 확장과 증폭의 과정’이라는 것은 거의 지적된 바가 없다(레이 초우, 원시적 열정).”

 

   루쉰의 에피소드는 영상이 근대인에게 가져온 충격과 그 영향력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다. 여기서 규명되어야 할 사실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루쉰은 영상매체에 충격을 받았는데 ‘왜 활자매체를 병든 맘을 치유하는 수단으로 선택하게 되었는가’하는 것이다. 초우는 이를 ‘전향’-나아가 ‘물러남’과 ‘도피’라고 표현한다. “‘신체’가 아닌 글쓰기를 통해서 중국의 ‘정신’을 치유하겠다는 루쉰의 결심은 일종의 '물러남'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초우는 ‘루쉰의 물러남’을 통해 과거의 활자매체와 현대의 영상매체의 차이를 포착하고 있다.

 

“루쉰이 택한 문학으로의 전향이라는 ‘해결책’은 말의 의의를 계속해서 특권화한다는 오래된 대책이었다. … 루쉰의 이야기에는 의학에서 문학으로의 근본적인 전향말고도 또 하나의 다른 전향, 즉 ‘전통으로의 재전향’이 있다. … 루쉰이라고 하는 박학한 남성 지식인은 ‘문자텍스트로 도피’했는데, 그것은 초국적 제국주의의 한가운데서 학살당하는 중국인 남성이 야비하고 잔혹하게 전시되는 것을 은폐하는 것이 된다(레이초우, 원시적 열정).”

 

   활자매체와 영상매체는 둘 다 시각 편향의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영상매체와 활자매체 사이에는 초우가 문자텍스트를 ‘전통’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것에서 볼 수 있는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 차이는 초우가 루쉰에게 문자 텍스트로 도피함으로써 전시되는 것을 은폐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우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초우는 활자매체가 영상매체가 가진 날것의 느낌과 그것이 보여주는 시선, 다시 말해 영상을 통한 재현의 충격적 사실성과 제 3세계를 대상화하는 제국주의의 시선을 은폐시킨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은폐는 활자매체의 전통이 영상매체의 새로움을 억압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시각은 “억압되어도 반드시 돌아온다. 쓰기와 읽기 개념을 내부에서부터 변화시키기 위해서.” 초우에 따르면 루쉰의 소설은 과거의 소설과 상당히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 “과거 왕조의 전통적인 소설이 장광설이었던 데 비해, 짧은 문학형식은 압축적이고 정곡을 찌르는 촌철살인의 메시지를 전하는 언어텍스트이다.” 초우는 근대의 소설쓰기 방식의 변화를 포착하여 영상문화가 어떻게 전통문화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초우가 보기에 “그것은 그림이 텍스트가 되는 문제가 아니라 언어텍스트가 그림으로 변화하는 문제이다.”

벤야민이 지적했듯이 전통과 구별되는 현대사회의 시각 편향은 사진과 영화로부터 출발한다. 벤야민은 사진과 영화를 찍는 기술적 도구인 카메라를 통해 인간의 지각 방식이 변화할 것이라 예언했다. 카메라는 클로우즈 업과 고속촬영을 통해 시각의 무의식적 세계를 탐구할 수 있게 했고 이는 시각의 변화와 함께 세계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영상매체는 그 기술적 잠재성을 실현하여 활자매체와는 다른 시각 편향을 가져왔다. 카메라로 대표되는 영상매체의 기술적 가능성은 바로 그 새로움에 있다. 활자매체로 만들어진 텍스트는 생각이 고정되고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자기 완결성을 갖는다. 그 자기 완결성은 선형성의 외부를 사유할 수 없게 한다. 활자매체 안에서 우리는 활자매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플루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어는 ‘논리’라고 불리는 규율을 따르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언어는 방언적․상상적 그리고 모든 비언어적인 사고를 비판하는 데 막강한 도구가 되었다. … 문자언어는 탈신비화 및 탈마술화를 위한, 곧 계몽을 위한 도구가 되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논리적 규율을 지키는 문자언어는 서양의 사고에서 강력한 우위를 차지한 나머지, 그 규칙, 곧 논리는 모든 사고규칙과 동일해졌다. 사람들은 우리가 비언어적으로도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하기 시작했다(플루서, 코드전환)."

 

   영상매체는 활자매체가 가진 이러한 한계를 넘어선다. 영상은 자기 완결적 텍스트가 아니다. 우리는 영상을 통해 시각적 무의식을 탐구할 수 있으며, 그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영상은 열린 텍스트이다. 그것은 언어적 사고 능력을 벗어나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영상매체는 복제의 전면성과 전복성을 가지며, 비언어적 사고(선형성을 탈피한 직물적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기존의 시각 체제를 동요시키는 영상매체의 기술적 잠재성은 완전히 실현되지는 못했다. 영상매체의 기술적 잠재성이 실현되지 못한 이유는 “테크놀로지 일반이 그러하듯 정치․군사적, 산업적 논리에 의해 매개되어 제도화됨으로써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기술적 잠재성이 정치경제적 논리에 의해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배태된 영상의 범람 속에서 살고 있다. 주은우가 메츠의 말을 빌어 이야기 하듯 “영화제도란 영화 산업일 뿐만 아니라 영화에 친숙해진 관객이 역사적으로 내면화해 왔고 소비에 자신을 적응시키는 ‘정신적 기계’이기도 하다.” 주은우의 말에서 영화를 영상매체로 바꾼다 해도 아무런 어색함이 없다.

   영상매체의 전면성과 전복성이 활자매체와 다른 현대사회 시각 편향의 내용이다. 우리는 루쉰처럼 영상을 통해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지만 엄청난 정보량을 자랑하는 영상을 '소비'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루쉰처럼 충격을 받지 않는 이유는 이미 영상을 소비하는 능력을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영상매체의 또 다른 기술적 잠재성인 비언어적 사고는 실현되지 못했다. 그것이 가능하게 되기 위해서는 영상을 단지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 사례 4. 핸드폰으로 찍은 영화

 

"세계 최초로,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한 장편영화가 등장했다. <버라이어티>는 남아프리카 출신 감독 아리안 카가노프가 이라는 90여분짜리 장편영화를 100%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 완성했다고 보도했다. 카가노프 감독이 이 영화를 완성하는 데 걸린 시간은 11일, 들인 제작비는 약 16만5천달러다. 감독은 소니 에릭슨 W900i 기종의 휴대폰 8대를 동원해 영화를 찍고 극장 상영이 가능한 버전으로 블로업까지 마쳤다. 카가노프 감독은 '블로업 결과도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좋았다'며 '휴대폰 카메라가 35mm카메라의 독재로부터 영화감독을 해방시켰다. 나는 기술적인 제약없이 정말 마음껏 내가 찍고 싶은 것을 찍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흥분을 감추지 않고 있다(시네21 No. 545, 순도 100% 휴대폰 카메라 영화 등장)."

 

   영상매체의 기술적 잠재성을 포괄적으로 실현할 가능성을 획득하기 시작한 것은 디지털 기술이 발달하면서부터 이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영상매체의 일상화를 가져왔다. 영상을 소비 하던 대중은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함께 영상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핸드폰에는 디지털 카메라가 달려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들은 심지어 영화까지 찍는다.) 반드시 핸드폰이 아니더라도 휴대하기 쉽고 가격도 싼 디지털 카메라나 디지털 캠코더도 이미 널리 보급되었다. 만들 의지만 있다면 비전문가도 영상을 간편하게 찍어 컴퓨터로 편집하여 영화를 만들 수 있다. 위의 사례가 핸드폰으로 장편 극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가치를 가지지만 이미 몇 해 전부터 핸드폰이나 디지털 캠코더로 찍은 다큐멘터리나 간단한 영상물들이 영화제를 통해 소개되고 있다.

   이처럼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영상을 소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영상 생산 과정의 비밀이 대중에게 베일을 벗고 드러난다. 대중은 영상을 생산할 수 있게 됨으로써 비로소 영상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한다. 영상의 생산이 가능해지고 나서 비로소 대중들은 영상을 통해 비언어적(혹은 직물적) 사고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직물적 사고란 창조하는 것이다. 선형적 사고가 우리를 미리 프로그램화된 해석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놓았다면 직물적 사고는 우리를 둘러싼 울타리를 제거하고 마음껏 활개하도록 만들어 준다. 선형적 사고에서는 현재의 원인이 되는 과거-즉 이미 있는 세계-를 인식하게 하는데서 머무른다. 하지만 직물적 사고에서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대안적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주어진 객관적인 세계의 주체가 아니라, 대안적인 세계들의 기획이다.(플루서, 디지털 가상)"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과연 우리는 직물적으로 사고하고 있는가?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함께 누구에게나 영상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부여되었다. 하지만 단순히 영상을 생산해 내는 것이 대안적 삶을 만들어내는 상상력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영상을 생산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문자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원시인들은 영상을 통해 자신들의 상상력을 펼쳤다. 그들이 영상을 통해 사유한 것은 문자와 같은 소통할 수 있는 매체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시시대의 상상력은 자연을 모방하거나 허구적 표상에 염원을 담아두는 "주술적 상상력"이다. 현대사회에서 영상은 문자가 있음에도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그 무엇이다. 오랜기간 문자를 통한 사고와 소통이 이루어지면서, 사람들은 문자로 모든 것을 표현하고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대인은 문자가 내포한 사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영상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현대의 상상력은 문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문자를 타고 넘는 "기술적 상상력"이다. "기술적 상상technoimagination은 그림들을 개념으로 만든 후 그러한 그림들을 개념의 상징으로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이다(플루서, 코무니콜로기)."

 

# 또 하나의 사례. '된장녀' 논란의 발생 과정

 

   몇 해 전부터 여성을 'oo녀'라고 이름붙이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되어버렸다. '개똥녀', '떨녀', '딸녀', '월드컵녀', '덮녀', '괴물녀', '귀족녀' 그리고 '된장녀' 등이 그것이다. 이 수많은 ‘oo녀’들의 탄생은 디지털 카메라와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카메라에 찍힌 여성들에게 누리꾼들이 관심을 보이며 나타나는 현상이 ‘oo녀’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최근에 크게 논란이 되었던 '된장녀' 논란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지 살펴보자.

   된장녀 논란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영상매체 발달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하나의 징후로 포착되어야 한다. 2006년 여름 우리사회는 '된장녀' 논란에 휩싸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된장녀가 논란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과정이다. 사치와 허영을 여성으로 표상하는 문제적 시선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식민지 시기 '신여성(모던걸)'이나 영화 <자유부인>이 일으킨 논란이 대표적인 예이다. 따라서 된장녀 논란은 내용 자체로 보면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또한 '된장녀'라는 말도 이미 오래 전부터 쓰이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된장들의 저녁식사(cafe.daum.net/ihat-edwhenjang)'같은 인터넷 카페 등에서는 한국 여인들을 '된장'으로 표현, 서양 문화를 추종하고 서양 남자라면 맥을 못 추는 한국 여성들을 성토해왔다(월간 말 No. 243, 21세기 된장녀로 부활한 식민지 시대 모던걸)."

   된장녀가 논란이 되기 시작한 시점은 디씨인사이드(www.dcinside.com)에 <된장녀와 사귈 때 해야 되는 9가지>라는 만화가 올라오면서 부터이다. 몇 몇 누리꾼들이 이 만화를 보고 된장녀에 관심을 보이며 널리 퍼져 나간 것이다. 특히 초기에 된장녀는 디지털 카메라에 찍힌 - 특히 스타벅스로 대표되는 외국 브랜드를 소비하는 - 여성들의 ‘사진’과 함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된장녀는 여성주의 관점에서 쏟아진 분석과 언론의 과잉 보도로 하나의 주류 담론이 되었다.

    된장녀가 사회적으로 크게 논란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이다. 첫째, 된장녀는 사치와 허영을 표상하는 (과거부터 있어왔던 문제적 시선의)언표로써만 존재할 뿐 실체가 불분명하다. 둘째, 불분명한 대상이 만화나 사진 등의 영상을 통해서 ‘구체성을 획득’함으로써 명확한 (지배규범을 만들어내는 남성들의)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영상은 대상을 확인 가능한 형태로 재현함으로써 구체성을 부여한다. 또한 영상은 충격적인 사실성과 구체성으로 사람들을 자극한다. 영상을 생산할 수 있게 됨으로써 영상을 통해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한 사람들은 그 가능성을 살해한다. 사람들은 영상의 일차적인 직접성에만 천착함으로써 문자를 타고 넘는 것이 아니라 문자의 프로그램 안으로 흡수된다. 여기서 세 번째 과정이 완성된다. 사람들은 프로그램화된 구조 속으로 그림을 투여함으로써 그림을 보기 ‘전에’ 해석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프로그램을 만드는게 아니라 프로그램된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이처럼 된장녀 사례는 우리 사회가 머물러 있는 기술적 상상력의 단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우리 사회에서 영상은 문자가 내포한 사고의 결핍을 극복하는 기제가 아니라 그 결핍을 강화시키는 보족물로써 사용되고 있다. 이로써 디지털 카메라와 인터넷이라는 최첨단 디지털 매체는 대상에 대한 믿음이나 표피적 재현만을 수행함으로써 ‘주술적 상상력’과 조우한다. 이를 퇴행으로 해석하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며, 필자만의 착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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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 - Linda Nochlin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

 

 

by Linda Nochlin

 

 

 

* Linda Nochlin,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 first published in Art News,Vol. 69, No. 9, (January, 1971). Reprinted in Linda Nochlin, Women, Art and Power and Other Essays (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s, 1988).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 The question tolls reproachfully in the background of most discussions of the so-called woman problem. But like so many other so-called questions involved in the feminist "controversy," it falsifies the nature of the issue at the same time that it insidiously supplies its own answer: "There are no great women artists because women are incapable of greatness."

 

The assumptions behind such a question are varied in range and sophistication, running anywhere from "scientifically proven" demonstrations of the inability of human beings with wombs rather than penises to create anything significant, to relatively open minded wonderment that women, despite so many years of near equality and after all, a lot of men have had their disadvantages too have still not achieved anything of exceptional significance in the visual arts.

 

The feminist's first reaction is to swallow the bait, hook, line and sinker, and to attempt to answer the question as it is put: that is, to dig up examples of worthy or insufficiently appreciated women artists throughout history; to rehabilitate rather modest, if interesting and productive careers; to "rediscover" forgotten flower painters or David followers and make out a case for them; to demonstrate that Berthe Morisot was really less dependent upon Manet than one had been led to think-in other words, to engage in the normal activity of the specialist scholar who makes a case for the importance of his very own neglected or minor master. Such attempts, whether undertaken from a feminist point of view, like the ambitious article on women artists which appeared in the 1858 Westminster Review, or more recent scholarly studies on such artists as Angelica Kauffmann and Artemisia Gentileschi, are certainly worth the effort, both in adding to our knowledge of women's achievement and of art history generally. But they do nothing to question the assumptions lying behind the question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 On the contrary, by attempting to answer it, they tacitly reinforce its negative implications.

 

Another attempt to answer the question involves shifting the ground slightly and asserting, as some contemporary feminists do, that there is a different kind of "greatness" for women's art than for men's, thereby postulating the existence of a distinctive and recognizable feminine style, different both in its formal and its expressive qualities and based on the special character of women's situation and experience.

   

 



This, on the surface of it, seems reasonable enough: in general, women's experience and situation in society, and hence as artists, is different from men's, and certainly the art produced by a group of consciously united and purposefully articulate women intent on bodying forth a group consciousness of feminine experience might indeed be stylistically identifiable as feminist, if not feminine, art. Unfortunately, though this remains within the realm of possibility it has so far not occurred. While the members of the Danube School, the followers of Caravaggio, the painters gathered around Gauguin at Pont-Aven, the Blue Rider, or the Cubists may be recognized by certain clearly defined stylistic or expressive qualities, no such common qualities of "femininity" would seem to link the styles of women artists generally, any more than such qualities can be said to link women writers, a case brilliantly argued, against the most devastating, and mutually contradictory, masculine critical cliches, by Mary Ellmann in her Thinking about Women. No subtle essence of femininity would seem to link the work of Artemesia Gentileschi, Mine Vigee-Lebrun, Angelica Kauffmann, Rosa Bonheur, Berthe Morlsot, Suzanne Valadon, Kathe Kollwitz, Barbara Hepworth, Georgia O'Keeffe, Sophie Taeuber-Arp, Helen Frankenthaler, Bridget Riley, Lee Bontecou, or Louise Nevelson, any more than that of Sappho, Marie de France, Jane Austen, Emily Bronte, George Sand, George Eliot, Virginia Woolf, Gertrude Stein, Anais Nin, Emily Dickinson, Sylvia Plath, and Susan Sontag. In every instance, women artists and writers would seem to be closer to other artists and writers of their own period and outlook than they are to each other.

 

Women artists are more inward-looking, more delicate and nuanced in their treatment of their medium, it may be asserted. But which of the women artists cited above is more inward-turning than Redon, more subtle and nuanced in the handling of pigment than Corot? Is Fragonard more or less feminine than Mme. Vigee-Lebrun? Or is it not more a question of the whole Rococo style of eighteenth-century France being "feminine," if judged in terms of a binary scale of "masculinity" versus "femininity"? Certainly, if daintiness, delicacy, and preciousness are to be counted as earmarks Of a feminine style, there is nothing fragile about Rosa Bonheur's Horse Fair, nor dainty and introverted about Helen Frankenthaler's giant canvases. If women have turned to scenes of domestic life, or of children, so did Jan Steen, Chardin, and the Impressionists Renoir and Monet as well as Morisot and Cassatt. In any case, the mere choice of a certain realm of subject matter, or the restriction to certain subjects, is not to be equated with a style, much less with some sort of quintessentially feminine style.

 

The problem lies not so much with some feminists' concept of what femininity is, but rather with their misconception-shared with the public at large-of what art is: with the naive idea that art is the direct, personal expression of individual emotional experience, a translation of personal life into visual terms. Art is almost never that, great art never is. The making of art involves a self-consistent language of form, more or less dependent upon, or free from, given temporally defined conventions, schemata, or systems of notation, which have to be learned or worked out, either through teaching, apprenticeship, or a long period of individual experimentation. The language of art is, more materially, embodied in paint and line on canvas or paper, in stone or clay or plastic or metal it is neither a sob story nor a confidential whisper.

 

The fact of the matter is that there have been no supremely great women artists, as far as we know, although there have been many interesting and very good ones who remain insufficiently investigated or appreciated; nor have there been any great Lithuanian jazz pianists, nor Eskimo tennis players, no matter how much we might wish there had been. That this should be the case is regrettable, but no amount of manipulating the historical or critical evidence will alter the situation; nor will accusations of male-chauvinist distortion of history. There are no women equivalents for Michelangelo or Rembrandt, Delacroix or Cezanne, Picasso or Matisse, or even, in very recent times, for de Kooning or Warhol, any more than there are black American equivalents for the same. If there actually were large numbers of "hidden" great women artists, or if there really, should be different standards for women's art as opposed to men's--and one can't have it both ways--then what are feminists fighting for? If women have in fact achieved the same status as men in the arts, then the status quo is fine as it is.

 

But in actuality, as we all know, things as they are and as they have been, in the arts as in a hundred other areas, are stultifying, oppressive, and discouraging to all those, women among them, who did not have the good fortune to be born white, preferably middle class and, above all, male. The fault lies not in our stars, our hormones, our menstrual cycles, or our empty internal spaces, but in our institutions and our education-education understood to include everything that happens to us from the moment we enter this world of meaningful symbols, signs, and signals. The miracle is, in fact, that given the overwhelming odds against women, or blacks, that so many of both have managed to achieve so much sheer excellence, in those bailiwicks of white masculine prerogative like science, politics, or the arts.

 

It is when one really starts thinking about the implications of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 that one begins to realize to what extent our consciousness of how things are in the world has been conditioned-and often falsified-by the way the most important questions are posed. We tend to take it for granted that there really is an East Asian Problem, a Poverty Problem, a Black Problem and a Woman Problem. But first we must ask ourselves who is formulating these "questions," and then, what purposes such formulations may serve. (We may, of course, refresh our memories with the connotations of the Nazis' "Jewish Problem.") Indeed, in our time of instant communication, "problems" are rapidly formulated to rationalize the bad conscience of those with power: thus the problem posed by Americans in Vietnam and Cambodia is referred to by Americans as the "East Asian Problem," whereas East Asians may view it, more realistically, as the "American Problem"; the so-called Poverty Problem might more directly be viewed as the "Wealth Problem" by denizens of urban ghettos or rural wastelands; the same irony twists the White Problem into its opposite, a Black Problem; and the same inverse logic turns up in the formulation of our own present state of affairs as the "Woman Problem."

 

Now the "Woman Problem," like all human problems, so-called (and the very idea of calling anything to do with human beings a "problem" is, of course, a fairly recent one) is not amenable to "solution" at all, since what human problems involve is reinterpretation of the nature of the situation, or a radical alteration of stance or program on the part of the "problems " themselves. Thus women and their situation in the arts, as in other realms of endeavor, are not a "problem" to be viewed through the eyes of the dominant male power elite. Instead, women must conceive of themselves as potentially, if not actually, equal subjects, and must be willing to look the facts of their situation full in the face, without self-pity, or cop-outs; at the same time they must view their situation with that high degree of emotional and intellectual commitment necessary to create a world in which equal achievement will be not only made possible but actively encouraged by social institutions.

 

It is certainly not realistic to hope that a majority of men, in the arts or in any other field, will soon see the light and find that it is in their own self-interest to grant complete equality to women, as some feminists optimistically assert, or to maintain that men themselves will soon realize that they are diminished by denying themselves access to traditionally "feminine" realms and emotional reactions. After all, there are few areas that are really "denied" to men, if the level of operations demanded be transcendent, responsible, or rewarding enough: men who have a need for "feminine" involvement with babies or children gain status as pediatricians or child psychologists, with a nurse (female) to do the more routine work; those who feel the urge for kitchen creativity may gain fame as master chefs; and, of course, men who yearn to fulfill themselves through what are often termed "feminine" artistic interests can find themselves as painters or sculptors, rather than as volunteer museum aides or part-time ceramists, as their female counterparts so often end up doing; as far as scholarship is concerned, how many men would be willing to change their jobs as teachers and researchers for those of unpaid, part-time research assistants and typists as well as full-time nannies and domestic workers?

 

Those who have privileges inevitably hold on to them, and hold tight, no matter how marginal the advantage involved, until compelled to bow to superior power of one sort or another.

 

Thus the question of women's equality--in art as in any other realm--devolves not upon the relative benevolence or ill-will of individual men, nor the self-confidence or abjectness of individual women, but rather on the very nature of our institutional structures themselves and the view of reality which they impose on the human beings who are part of them. As John Stuart Mill pointed out more than a century ago: "Everything which is usual appears natural. The subjection of women to men being a universal custom, any departure from it quite naturally appears unnatural."' Most men, despite lip service to equality, are reluctant to give up this "natural" order of things in which their advantages are so great; for women, the case is further complicated by the fact that, as Mill astutely pointed out, unlike other oppressed groups or castes, men demand of them not only submission but unqualified affection as well; thus women are often weakened by the internalized demands of the male-dominated society itself, as well as by a plethora of material goods and comforts: the middle-class woman has a great deal more to lose than her chains.

 

The question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 is simply the top tenth of an iceberg of misinterpretation and misconception; beneath lies a vast dark bulk of shaky idees recues about the nature of art and its situational concomitants, about the nature of human abilities in general and of human excellence in particular, and the role that the social order plays in all of this. While the "woman problem" as such may be a pseudo-issue, the misconceptions involved in the question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 points to major areas of intellectual obfuscation beyond the specific political and ideological issues involved in the subjection of women. Basic to the question are many naive, distorted, uncritical assumptions about the making of art in general, as well as the making of great art. These assumptions, conscious or unconscious, link together such unlikely superstars as Michelangelo and van Gogh, Raphael and Jackson Pollock under the rubric of "Great"-an honorific attested to by the number of scholarly monographs devoted to the artist in question-and the Great Artist is, of course, conceived of as one who has "Genius"; Genius, in turn, is thought of as an atemporal and mysterious power somehow embedded in the person of the Great Artist.' Such ideas are related to unquestioned, often unconscious, meta-historical premises that make Hippolyte Taine's race-milieu-moment formulation of the dimensions of historical thought seem a model of sophistication. But these assumptions are intrinsic to a great deal of art-historical writing. It is no accident that the crucial question of the conditions generally productive of great art has so rarely been investigated, or that attempts to investigate such general problems have, until fairly recently, been dismissed as unscholarly, too broad, or the province of some other discipline, like sociology. To encourage a dispassionate, impersonal, sociological, and institutionally oriented approach would reveal the entire romantic, elitist, individual-glorifying, and monograph-producing substructure upon which the profession of art history is based, and which has only recently been called into question by a group of younger dissidents.

 

Underlying the question about woman as artist, then, we find the myth of the Great Artist-subject of a hundred monographs, unique, godlike-bearing within his person since birth a mysterious essence, rather like the golden nugget in Mrs. Grass's chicken soup, called Genius or Talent, which, like murder, must always out, no matter how unlikely or unpromising the circumstances.

 

The magical aura surrounding the representational arts and their creators has, of course, given birth to myths since the earliest times. Interestingly enough, the same magical abilities attributed by Pliny to the Greek sculptor Lysippos in antiquity--the mysterious inner call in early youth, the lack of any teacher but Nature herself--is repeated as late as the nineteenth century by Max Buchon in his biography of Courbet. The supernatural powers of the artist as imitator, his control of strong, possibly dangerous powers, have functioned historically to set him off from others as a godlike creator, one who creates Being out of nothing. The fairy tale of the discovery by an older artist or discerning patron of the Boy Wonder, usually in the guise of a lowly shepherd boy, has been a stock-in-trade of artistic mythology ever since Vasari immortalized the young Giotto, discovered by the great Cimabue while the lad was guarding his flocks, drawing sheep on a stone; Cimabue, overcome with admiration for the realism of the drawing, immediately invited the humble youth to be his pupil. Through some mysterious coincidence, later artists including Beccafumi, Andrea Sansovino, Andrea del Castagno, Mantegna, Zurbardn, and Goya were all discovered in similar pastoral circumstances. Even when the young Great Artist was not fortunate enough to come equipped with a flock of sheep, his talent always seems to have manifested itself very early, and independent of any external encouragement: Filippo Lippi and Poussin, Courbet and Monet are all reported to have drawn caricatures in the margins of their schoolbooks instead of studying the required subjects-we never, of course, hear about the youths who neglected their studies and scribbled in the margins of their notebooks without ever becoming anything more elevated than department-store clerks or shoe salesmen. The great Michelangelo himself, according to his biographer and pupil, Vasari, did more drawing than studying as a child. So pronounced was his talent, reports Vasari, that when his master, Ghirlandalo, absented himself momentarily from his work in Santa Maria Novella, and the young art student took the opportunity to draw "the scaffolding, trestles, pots of paint, brushes and the apprentices at their tasks" in this brief absence, he did it so skillfully that upon his return the master exclaimed: "This boy knows more than I do."

 

As is so often the case, such stories, which probably have some truth in them, tend both to reflect and perpetuate the attitudes they subsume. Even when based on fact, these myths about the early manifestations of genius are misleading. It is no doubt true, for example, that the young Picasso passed all the examinations for entrance to the Barcelona, and later to the Madrid, Academy of Art at the age of fifteen in but a single day, a feat of such difficulty that most candidates required a month of preparation. But one would like to find out more about similar precocious qualifiers for art academies who then went on to achieve nothing but mediocrity or failure--in whom, of course, art historians are uninterested--or to study in greater detail the role played by Picasso's art-professor father in the pictorial precocity of his son. What if Picasso had been born a girl? Would Senor Ruiz have paid as much attention or stimulated as much ambition for achievement in a little Pablita?

 

What is stressed in all these stories is the apparently miraculous, nondetermined, and asocial nature of artistic achievement; this semireligious conception of the artist's role is elevated to hagiography in the nineteenth century, when art historians, critics, and, not least, some of the artists themselves tended to elevate the making of art into a substitute religion, the last bulwark of higher values in a materialistic world. The artist, in the nineteenth-century Saints' Legend, struggles against the most determined parental and social opposition, suffering the slings and arrows of social opprobrium like any Christian martyr, and ultimately succeeds against all odds generally, alas, after his death-because from deep within himself radiates that mysterious, holy effulgence: Genius. Here we have the mad van Gogh, spinning out sunflowers despite epileptic seizures and near-starvation; Cezanne, braving paternal rejection and public scorn in order to revolutionize painting; Gauguin throwing away respectability and financial security with a single existential gesture to pursue his calling in the tropics; or Toulouse-Lautrec, dwarfed, crippled, and alcoholic, sacrificing his aristocratic birthright in favor of the squalid surroundings that provided him with inspiration.

 

Now no serious contemporary art historian takes such obvious fairy tales at their face value. Yet it is this sort of mythology about artistic achievement and its concomitants which forms the unconscious or unquestioned assumptions of scholars, no matter how many crumbs are thrown to social influences, ideas of the times, economic crises, and so on. Behind the most sophisticated investigations of great artists-more specifically, the art-historical monograph, which accepts the notion of the great artist as primary, and the social and institutional structures within which he lived and worked as mere secondary "influences" or "background"-lurks the golden-nugget theory of genius and the free-enterprise conception of individual achievement. On this basis, women's lack of major achievement in art may be formulated as a syllogism: If women had the golden nugget of artistic genius then it would reveal itself. But it has never revealed itself. O.E.D. Women do not have the golden nugget theory of artistic genius. If Giotto, the obscure shepherd boy, and van Gogh with his fits could make it, why not women?

 

Yet as soon as one leaves behind the world of fairy tale and self-fulfilling prophecy and, instead, casts a dispassionate eye on the actual situations in which important art production has existed, in the total range of its social and institutional structures throughout history, one finds that t he very questions which are fruitful or relevant for the historian to ask shape up rather differently. One would like to ask, for instance, from what social classes artists were most likely to come at different periods of art history, from what castes and subgroup. What proportion of painters and sculptors, or more specifically, of major painters and sculptors, came from families in which their fathers or other close relatives were painters and sculptors or engaged in related professions? As Nikolaus Pevsner points out in his discussion of the French Academy in the seventeenth and eighteenth centuries, the transmission of the artistic profession from father to son was considered a matter of course (as it was with the Coypels, the Coustous, the Van Loos, etc.); indeed, sons of academicians were exempted from the customary fees for lessons. Despite the noteworthy and dramatically satisfying cases of the great father-rejecting revoltes~s of the nineteenth century, one might be forced to admit that a large proportion of artists, great and not-so-great, in the days when it was normal for sons to follow in their fathers' footsteps, had artist fathers. In the rank of major artists, the names of Holbein and Durer, Raphael and Bernim, immediately spring to mind; even in our own times, one can cite the names of Picasso, Calder, Giacometti, and Wyeth as members of artist-families.

 

As far as the relationship of artistic occupation and social class is concerned, an interesting paradigm for the question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 might well be provided by trying to answer the question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artists from the aristocracy?" One can scarcely think, before the anti traditional nineteenth century at least, of any artist who sprang from the ranks of any more elevated class than the upper bourgeoisie; even in the nineteenth century, Degas came from the lower nobility more like the haute bourgeoisie, in fact-and only Toulouse-Lautrec, metamorphosed into the ranks of the marginal by accidental deformity, could be said to have come from the loftier reaches of the upper classes. While the aristocracy has always provided the lion's share of the patronage and the audience for art-as, indeed, the aristocracy of wealth does even in our more democratic days-it has contributed little beyond amateurish efforts to the creation of art itself, despite the fact that aristocrats (like many women) have had more than their share of educational advantages, plenty of leisure and, indeed, like women, were often encouraged to dabble in the arts and even develop into respectable amateurs, like Napoleon III's cousin, the Princess Mathilde, who exhibited at the official Salons, or Queen Victoria, who, with Prince Albert, studied art with no less a figure than Landseer himself. Could it be that the little golden nugget-genius-is missing from the aristocratic makeup in the same way that it is from the feminine psyche? Or rather, is it not that the kinds of demands and expectations placed before both aristocrats and women-the amount of time necessarily devoted to social functions, the very kinds of activities demanded-simply made total devotion to professional art production out of the question, indeed unthinkable, both for upper-class males and for women generally, rather than its being a question of genius and talent?

 

When the right questions are asked about the conditions for producing art, of which the production of great art is a subtopic, there will no doubt have to be some discussion of the situational concomitants of intelligence and talent generally, not merely of artistic genius. Piaget and others have stressed in their genetic epistemology that in the development of reason and in the unfolding of imagination in young children, intelligence or, by implication, what we choose to call genius-is a dynamic activity rather than a static essence, and an activity of a subject in a situation. As further investigations in the field of child development imply, these abilities, or this intelligence, are built up minutely, step by step, from infancy onward, and the patterns of adaptation-accommodation may be established so early within the subject-in-an-environment that they may indeed appear to be innate to the unsophisticated observer. Such investigations imply that, even aside from meta-historical reasons, scholars will have to abandon the notion, consciously articulated or not, of individual genius as innate, and as primary to the creation of art.'

 

The question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 has led us to the conclusion, so far, that art is not a free, autonomous activity of a super-endowed individual, "Influenced" by previous artists, and, more vaguely and superficially, by "social forces," but rather, that the total situation of art making, both in terms of the development of the art maker and in the nature and quality of the work of art itself, occur in a social situation, are integral elements of this social structure, and are mediated and determined by specific and definable social institutions, be they art academies, systems of patronage, mythologies of the divine creator, artist as he-man or social outcast.

 

Extract from Women, Art and Power and Other Essays, Westview Press, 1988 by Linda Nochlin, pp.147-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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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통치성: 푸코의 통치성 개념을 통해 본 대도시 - 임동근

이 글은 지난 2009년 2월 20일에 있었던 '문화/과학' 집담회에서 임동근 선생님이 발표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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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노트] 도시와 통치성: 푸코의 ‘통치성’ 개념을 통해 본 대도시

 

 

“통치불가능한 사회들?” 2005년 11월 푸코의 통치성 강의를 되짚어 보는 『에스프리』 잡지의 권두 제목이다. 2004년 10월 푸코의 강의록 중 『치안, 영토, 인구』와 『생정치의 탄생』의 출간으로, 그 동안 푸코의 저작에서 한발 비켜가 있던 많은 이들이 푸코의 글에 관심을 갖게 된다. 68혁명과 그 이후 전개되던 소비자본주의의 만개, 1970년대 좌파이론의 붕괴와 뒤이어 온 80년대의 신자유주의 출현, 90년대의 사회주의국가의 몰락과 2000년대의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푸코의 강의는 아주 원초적인 부분을 건드린다. “우리를 통치하는 ‘이성’이 있다.” 통치이성은 17세기 이후, 근대라 불리는 현 세상을 지배하며, 다양한 ‘통치 실천들’을 행한다. 이 실천이 사용하는 것이 ‘장치들’이며, 이는 ‘기구’와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순수한” 기계이다.

 

통치이성의 메커니즘은 단순하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통치가능하게 만들기. 통치이성은 통치의 정당성 문제가 아니라 통치의 방식을 따진다.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으며, 오직 계산할 뿐이다’라는 테오도르 슐츠(Theodore W. Schultz)의 인간관처럼 통치이성은 ‘통치’라는 유일한 목적을 위해 작동하는 ‘이성’이다. 통치실천들은 이 이성에 따라 탄생된다/현실화되고, 각각 지배적인 ‘장치’들을 사용한다. 도시정책을 예로 든다면 ‘통치가능한 도시인구’를 위한 각종 ‘실천들’이 있고, 이 실천들을 작동시키는 지배적인 ‘장치들’이 있는 셈이다.

 

 

1. ‘장치’라는 개념

 

푸코가 말하는 ‘장치’(dispositif)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성적장치, 규율장치, 치안장치, 사법장치, 또 가장 일반적으로는 권력장치라는 말을 한다. 이 개념에서의 핵심은 ‘하나의 장치는 하나의 기능을 담당하고, 이를 위해 다양한 선분들이 결합된다’는 점이다. 권력의 장치들은 저마다 맡은 기능을 담당하기 위해 법률, 이데올로기, 물리력, 지식, 기타 등등 무한한 종류의 요소들이 결합된 기계가 된다. 예를 들어 ‘치안장치’는, 경찰의 방패나 재판관의 의자 등, 치안을 위해 사용되는 모든 요소들이다. 이는 알튀세가 말한 ‘국가기구’에서의 ‘기구’와 다르다. 물리력과 이데올로기에 따라 국가의 ‘기구’들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푸코는 이들을 횡단하는 보다 유연한 ‘장치’들이 권력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즉, ‘국가의 기구’가 아니라 ‘권력의 장치들’이 문제가 된다.

 

『말과 사물』에서 선보인 ‘에피스테메’라는 개념 또한 넓은 의미의 ‘장치’가 되고, 『감시와 처벌』의 규율 또한 ‘장치’의 일종이 된다. 푸코는 1976~78년 강의에서 세 종류의 ‘장치’를 설명한다. 사법, 규율, 치안. 각각의 장치들을 범주화하는 기준은 ‘현실’이다. 사법은 현실에 없는 것을 상상해서 처벌규정을 만들고, 규율은 현실에서 부족한 부분을 완성시키고자 하며, 치안은 현실이 있어야만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이 때 권력의 실천들이 이 장치들을 사용하는 기준은 ‘경제성’이다. 흔히 ‘권력의 일반 경제학’이라 불리는 푸코의 이 전제, 이를 통해 우리는 통치는 언제나 ‘통치비용’을 고려하며, 잘못된 통치 실천에 따른 초과 비용이 권력관계들을 뒤집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장치’ 개념은 현실 속에서 모호하다. 예를 들어 도시의 건축행위를 제한하는 법들과 실천들을 장치를 통해 해석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학교를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고 말하며,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들이 은폐된 권력 통치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증명할 수는 없겠지만 받아들이기는 쉽다. 그러나 푸코의 장치로 학교를 설명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는 규율장치인가 아니면 치안장치인가? 푸코의 답은 학교라는 시설 혹은 제도에서 장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장치개념의 한 요소로서 학교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시설 혹은 제도에서 권력을 분석하고자 한다면, 더 나아가 이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제도의 틀을 만든 또 다른 지식-권력 안에 갇힌다. 학교가 교육기관인 것만도 아니고, 교육기관에 학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이들을 지지하는 지식은 이들 외부에서 결정될 수도 있다.

 

이러한 접근방식으로 인해 푸코의 ‘통치성’ 개념은 다른 이가 사용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예를 들어 통치실천들을 말하면서도 자신은 정부의 통치실천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푸코는 통치성을 설명하며 다양한 현실의 제도를 이야기하지만, 현실의 제도를 설명하기 위해 푸코의 통치성을 말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설정이다. 푸코의 전작에서 나타나는 이 난점 때문에,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푸코를 재미있게 읽지만 정작 푸코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지리학 또한 예외가 아닌데, 결국 푸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짝사랑’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리학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주권-영토, 규율-공간, 치안-환경, 푸코가 장치를 설명할 때 시도한 이 세 가지 연결을 발견한다. 주권은 영토의 위계를 생산하고 이를 토대로 주권을 뒷받침해주는 자본을 순환시킨다. 규율은 기능에 따라 공간을 건축하며, 이로 인해 차별화된 공간들이 생산된다. 치안은 다양한 요소들이 만들어 내는 사건들을 조절하며 환경을 관리한다. 푸코는 우리가 사는 공간을 각각의 장치에 조응하는 세 개념, 영토, 공간, 환경을 설정한다. 그러나 문제는 영토의 기의는 권력장치라는 기표를 초월한다는 점, 즉 영토 속에는 사법장치, 규율장치, 치안장치 등이 혼재하며, 영토 또한 치안장치에 의해 통치화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장치들과 공간들을 조합하여 현재의 통치 실천들을 나열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2. 계보학

 

1972년 CERFI의 토론에서 푸코는 ‘집합시설’ 프로젝트 제안서를 읽고 다음과 같은 계보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첫째, 집합시설의 전유와 소유는 다르다. 누구의 소유인가?

둘째, 집합시설의 기능은 누군가에게 서비스하는 것이다. 누구에게? 왜? 사용하는 이들은 왜?

셋째, 집합시설은 생산적인 효과를 갖는다. 그러나 무슨 유형의 생산?

넷째, 집합시설의 존재와 기능을 뒷받침하는 권력관계는?

다섯째, 계보학적인 함의. 이로부터 어떻게 특정 효과들이 달라지기 시작하는가? 이미 있던 다리, 제분소 등 여러 시설들이 집합시설로 변하면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통치 실천들은 이들이 맡은 기능을 보아서는 이해할 수 없다. 도시계획을 분석하고자 할 때 도시계획에 현재 담당하는 기능들, 전체 도시체계에서 수행하는 역할들을 본다면, 우리는 이미 담당하도록 구획된 틀 안에서의 타당성, 실효성 검사만을 반복할 뿐이다. “탄생은 기능으로 환원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도시계획을 만들고, 이를 따르게 억압하고, 또 이를 기꺼이 따르도록 만드는 힘들이다. 바로 이 지점이 ‘장치’가 개입하는 순간이다. 통치실천들, 특정 제도나 기구들의 탄생은 권력 장치의 (구성)변화를 의미한다. 학교라는 시설 혹은 의무교육제도 등을 보기 위해서는 그 탄생의 시점에서 달라진 장치들을 추적해야 한다. 들뢰즈는 이를 ‘현실화’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한때 유행했던 ‘탄생’, ‘발명’ 시리즈의 책들을 떠올려보자.)

 

계보학적인 접근이 가진 매력은 연구의 출발 시점 그 이전에 이미 연구의 목적이 되는 ‘의도’가 먼저 자리 잡아야 한다는 점이다. 막연히 제도의 탄생을 훑는 것이 아니라 제도의 탄생을 야기한 그 ‘무엇’에 대한 동인이 우선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도시 속의 통치실천들을 분석하고자 한다면, 그 출발 이전에 그것이 ‘자본주의 분석’이 되었든 아니면 ‘자유주의 분석’이 되었든, 각 실천들의 영역을 초월하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 자본의 탄생을 보는 것은 ‘자본’의 외부를 보고자 함이며, 도시의 탄생을 보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때 이중의 이질적 결합이 상정된다. 실천들은 이질적인 장치를 가지고, 각각의 장치 내부 또한 이질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바로 이러한 푸코의 접근방법 때문에 통치성 개념을 ‘제도 및 시설 연구’로 한정할 때면 어려움에 처한다. 푸코의 권력 분석이라는 큰 틀에서 나타나는 ‘장치들’, 이를 사용하는 실천들은 외부와 연결을 잃어버리는 순간 실천과 장치들의 스틸사진만을 나열하는 일종의 표로 전락해버린다.

 

 

3. 대도시의 문제설정

 

푸코가 치안장치 개념을 고안한 것은 도시 인구의 통치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18세기 이후 도시, 혹은 영토를 사유할 때의 강박관념은 인구와 재화의 ‘순환’이었다. 이 때 푸코의 관점에서 이동하는 인구를 통치함에 있어서 규율 메커니즘은 효율성이 떨어진다. 즉,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전의 통치술과는 전혀 다른 통치이성이 출현했다. “통치는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절하는 것이다.” 도시의 예를 든다면, ‘도시는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토가 통치의 대상이 되는가의 논의는 잠시 뒤로 미룬다.) 대도시는 이러한 조절, 관리의 문제가 가장 지배적인 장이다. 대도시는 계획인구를 설정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인구가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 대도시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정치경제학에서 제공하는 지식에 따라, 지대, 생산성 등의 지표들에 따라 끊임없이 반응해야만 한다.

 

치안장치가 두드러지는 대도시의 통치실천들을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 우선, 대도시의 계보학이 필요하다. 고대부터 거대도시들은 있었지만, 현재 우리가 메트로폴리스라 불리는 대도시는 어떻게 출현했는가? 누가 만들었는가? 등등의 질문이 뒤따를 것이다. 만일 소련의 모스코바라면 인구를 재배치시키고자 하는 국가기구들을 분석해야 할 것이고, 아나톨 콥(Anatole Kopp)의 ‘혁명도시’가 바로 그런 접근방법을 취한다. 반면 자본주의 도시라면 자본주의가 대도시를 만든 방식들과 그것을 둘러싼 권력관계들을 볼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 대도시가 인구를 흡입하고 난 후에야 통치이성이 작동하여, “어떻게 이 많은 도시인구를 통치하는가?”라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대도시 주변의 공장에 노동자들이 정착한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고, 이때부터 도시의 폭동은 계급투쟁으로 변화한다. 따라서 ‘도시인구를 통치하는가’의 질문 이전에 ‘도시인구들이 왜 정착하게 되었는가’가 앞서 제기되어야 한다. 과잉도시화가 사회의 병폐라고 언급되다가 이후 대도시가 생산기지라고 찬양되는 것에서 보듯이, 대도시라는 장치가 작동하는 효과들이 존재한다.

두 번째로, 통치 대상으로서의 ‘인구’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18세기 이후 통치이성이 출현하게 된 근본적인 토대는 국민국가의 안정된 영토설정이었다. 국민국가간의 외부적 안정성과 내부적 경찰국가화, 이를 통한 인구의 등록 및 생산자원화는 국가자본주의가 기능할 수 있었던 핵심이었다. 반면 대도시는 안정된 ‘인구’를 확보하지 못한다. 따라서 대도시의 통치실천들은 국민국가 영토에서 기능하는 통치실천들과는 다르다. 바로 이 점에서 세계화 이후 국가는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화된다고 논의된다. 즉, 대도시의 통치는 국민국가의 통치실천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더 나아가 대도시권, 크고 작은 자치정부들로 구성된 대도시권 그 자체가 하나의 ‘권력 장치’로 작동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봐야 한다. 여기에 타국적자의 노동이 결합되는 대도시의 기능들이 증가하는 이유, 또 그로인해 국민국가의 통치실천이 변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 또한 주요 이슈들이다.

 

세 번째로, 자유로운 인적 물적 순환 그자체로 대도시 인구는 끊임없이 정상화과정을 겪음에도 ‘사회 질서’가 유지되는 방식들을 보아야 한다. 익명의 도시이지만 이 속에서, 가족과 이웃들, 더 나아가 여러 사회집단들이 통치비용을 낮추는 효과를 담당하는 ‘시민사회’를 만드는 방식은 사회학의 원초적인 질문이었다. “농촌과 다른 방식으로 도시의 사회가 기능하는 양상들은 무엇인가?” 푸코의 질문을 여기에 추가한다면 권력의 장치로서의 시민사회의 계보학이다. 아파트 단지, 교육시스템, 할인점, 자동차도로, 등등 대도시 장치를 분석하지 않으면 ‘재래시장 살리기’ 혹은 ‘재건축 반대운동’과 같은 것들은 결코 발전할 수 없을 것이다. 아파트 단지 내의 ‘4인 가족 이데올로기’는 이 장치의 한 요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또한 기존의 국가-시민사회의 대항을 설정하는 것은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자본의 딱지를 붙은 아파트 단지, 삼성아파트, 여기에 국가 주도의 반상회, 이들이 거부하는 자본가 기업들과 재산증식이 될 수 있는 재건축 반대, 또 소각장 반대와 같은 국가정책에 대한 반대운동, 등등.

 

마지막으로, 대도시를 자연적인 것으로, 그 자연성을 설정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권력-지식들을 살펴봐야 한다. 예를 들어 자유주의의 큰 주제 중 하나가 개인의 욕망이 모여 어떻게 자본의 이익이라는 ‘공익’으로 수렴되는가이다. 일반적으로는 이를 자본-국가-개인-사회라는 네 가지 차원으로 설명한다. 정치경제학이 개인-자본-국가를 연결한다면 사회학은 개인-사회-국가를 담당했다. 정치경제학은 시장이라는 ‘진실체제’를 통해 상품의 가격 조절, 상품의 분배 양태를 정당화시켰다면, 사회학은 ‘시민사회’라는 ‘상식-문화’를 통해 개인의 행동들을 조절했다. 대도시에서는 ‘도시학’이라 부를 수 있는 지식체가 존재하며, 이들은 대도시인구를 통치하는 이성이 끊임없이 참조해야 하는 지식망들을 생산한다. 이 지식망들이 ‘삶의 질’, ‘도시경쟁력’, 등등 지금 현재의 모습이 정상인지 비정상인지를 파악하고 통치실천들이 개입해야 하는 지점을 알려준다.

 

앞선 대도시의 문제설정을 서울에 적용한다면 다음과 같다.

 

1) 대도시화: 서울에 인구가 정착하는 과정들에 대한 연구. 농촌인구의 정착, 이주노동자, 등.

2) 인구: 유동적 인구를 통치하는 방식. 수도권에 거주하는 서울 노동인구를 통치하는 장치들. 광역지하철, 지방자치단체선거, 거버넌스, 등등.

3) 사회운동: 주택단지 내에서의 공동체 형성. 전통적이고 친밀한 공동체가 아니라 시민사회를 형성하고 이를 기능하게 만드는 공동체들. 만일 광우병 반대운동을 거부한 정부는 시민사회를 통한 통치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부당한’통치가 아니라 ‘실패한 통치’가 된다. 따라서 자유주의 통치이성에 대한 비판이 없는 정부에 대한 비판은 자유주의 통치를 강화할 수 있다.

4) 지식: 서울을 연구하는 학문들, 이들이 생산하는 지식들과 통치성간의 관계. 정부가 통치행위를 하지 않음에도 재조정되는 인구들을 뒷받침하는 지식들.

 

 

4. 남겨진 질문들

 

■ 인구와 계급: 통치성의 대상은 ‘인구/사물’이다. 여기에는 인구와 사물은 별 차이를 갖지 않는다. 이를 설명하며 푸코는 맑스의 ‘계급’은 인구가 형성되는 당시의 권력관계를 ‘계급’으로 치환해버렸다고 비판한다. 이를 더 연장하면 인구는 통치이성의 대상으로, 계급은 그 통치실천의 한 양상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구가 계급으로 형성되는 과정은 푸코의 통치성 논의에서 주변부에 위치한다.

 

■ 자본과 통치성: 반면 통치이성의 출현은 ‘생산체제’라는 물적 토대의 변화에서 기인한다. 통치이성은 철저히 자본의 계보학과 연결되어 있다. 푸코는 이를 설명하며 통치는 결코 경제에 종속된 것도 아니고 경제를 종속하는 것도 아닌, 경제와 병렬적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자본과 계급, 그 이전에 자본-통치성-인구라는 계열이 제시된다. 계급은 인구를 통치하는 시민사회의 한 양상인가?

 

■ 국가와 인구: 국가의 위기, 국가주도 발전, 등등 국민국가 담론의 토대는 인구의 포획/기입이다. 통치성 개념에 따르면 국가는 자본주의 발전의 부침 속에서 최종적으로 인구를 포획하게 된다. 즉, 자본의 위기 시 국가자본주의로의 전환을 통해 과잉인구를 흡수하기도, 전쟁을 통해 제거하기도 하는 등, 자본축적을 인구의 측면에서 뒷받침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현재 유럽 연합에서의 국가 위기 담론도 더 이상 국가가 자본의 위기시 인구를 안정적으로 포획하지 못하는 상황(노동력의 자유로운 월경이 자본축적을 방해하는 상황)이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유럽이 하나의 국가가 되는 방식, 이로 인한 인구의 새로운 정착이다.

 

■ 대도시와 장치: 통치화된 국가가 존재하듯이 통치화된 대도시정부 또한 존재하는가? 혹은 대도시는 통치실천의 한 장치인가? 이는 대도시가 있기에 가능한 통치효과들을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 공업도시의 경우 존재하는 통치효과, 실리콘 밸리의 통치효과는 밝히기 용이한 반면, 세계 수위도시들 이외의 대도시들의 효과는 상대적으로 더 어렵다. 국가 내 중소도시가 망하는 방식과 유사하게 세계적 차원에서의 대도시들이 망하는 것을 설정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그렇지 않다면 적절한 규모로 감소하는 대도시들 간의 위계화가 가진 효과는 무엇인가?

 

■ 통치성과 사회운동: 앞서 광우병 반대를 언급했듯이 푸코에게 ‘시민사회’는 기본적으로 반동이다. 사회운동은 정치경제학이 물가 폭등과 같은 ‘비정상’ 신호를 내보내는 것과 같이 정치적 지지기반의 ‘비정상’ 신호를 표출하는 ‘진리체제’이다. 정치경제학이 지식을 동원해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들듯이 ‘시민사회’는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비정상적인 것들의 정상화라는 지식-권력이 시민사회에서 작동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또한 시민사회와 사회운동 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푸코 자신도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했듯이 통치이성을 전복하는 운동의 방식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 새로운 통치: 푸코 말기에 집착했던 ‘자기로부터의 통치’. 자유주의 통치이성의 비판에서 더 나아가 푸코가 주장하는 통치방식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진리’라는 테제를 통해 이를 주장했고, 뒤이어 그리스 철학에서 이를 찾아보고자 했지만 현실에 적용하기는 어렵다. 여기에 덧붙여 계보학적인 접근방법이 가진 효용과 한계를 논할 필요가 있다. 자본의 계보학을 연구한다는 것이 앞으로의 세상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 통치하다 - gouverner / 통치술 art de gouverner

• 통치가능한 - gouvernable

• 통치 - gouvernement / (a) gouvernemental

• 통치성 - gouvernementalité

• 통치화하다/되다 - gouvernementaliser /gouvernementalis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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