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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1/12
    일상의 떨림(동경이야기, 오즈 야스지로)
    와라
  2. 2008/08/04
    무너짐의 사건
    와라
  3. 2008/07/25
    고통과 기쁨, 둘
    와라
  4. 2008/02/22
    고통과 기쁨
    와라
  5. 2008/02/02
    와라
  6. 2008/01/24
    울트라 덕
    와라
  7. 2008/01/17
    가벼운 현기증2
    와라
  8. 2008/01/15
    가벼운 현기증
    와라

일상의 떨림(동경이야기, 오즈 야스지로)

 

 

식상하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자신만의 색을 찾아나가길 원하는 이들(혹은 그를 통해 재미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식상하다는 말은 그리 듣기 좋은 말은 아니다. 식상하다는 말에는 뻔하거나 진부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고 그래서 한마디로 말하면 ‘너는 재미없는 인간이야’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식상함을 저주하는 우리(자주 듣는다고 해서 그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는 직접 겪어 보지 않아도 영화나 드라마, 소설을 통해서 세상의 온갖 충격적인 더러움에 대해서는 모두 알아버렸고, 세상의 운영원리도 대충은 꿰고 있다(딴거 있을까? ‘힘쎈놈이 이긴다 + 인간은 원래 외롭다 = 사는건 꽤나 어려운 일이다’ 정도의 결론만 있으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대충 아는 거다). 이렇게 위대한 진리를 알고 나니 웬만한 일은 재미없고 식상한 일이 되어 버린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더 많은 새로움, 더 많은 자극, 더 많은 특이함, 더 많은...’ 이렇게 살아가게 되는게 아닐까? 정말이지 끝이 없다. 그렇게 끊임없이 감정을 착취하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식상하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들이 정말로 식상한걸까? 혹시 그 식상함들은 언젠가 눈을 돌려 자신들을 봐달라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건 아닐까? 방을 한 번 둘러보자. 책장에 꽂혀 있지만 읽지 않은 책들이 있다. 사놓고 아직 보지 않은 영화들이 있다. 침대 밑에서 구조되길 기다리는 동전과 볼펜들도 있다. 어릴 적 쓴 일기와 고등학교 때 친구와 주고받던 애매한 편지는 책상 서랍 속에 묻혀 있다. 식상함이라는 말로, 너무 익숙해서 재미없다는 느낌으로 버려지고 있는 일상의 흔적들이 우리 주위에 널부러져 있다.


<동경 이야기>에는 버려진 일상의 흔적들이 있다. 일상은 삼각대 다리를 잘라내고 담아낼 사람의 눈높이에 카메라를 맞추면서부터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여행가서 쓸 공기배게를 찾으려고 주고받는 노부부의 대화 속에, 목욕하고, 밥 먹고, 간식 먹고, 잠자는 - 심지어 여관의 시끄러운 유흥 속에서 일상은 발견된다. 일상은 더 이상 식상한게 아니라 발견되길 기다리는 삶의 흔적이 된다. 그렇다고 일상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다. 일상은 삶의 내밀함을 들여다보기에는 너무 얇은 표층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삶에 표층 이외에 무엇이 있는가?) 오즈는 일상을 보여줄 뿐 말하지 않는다. 과도하게 의미 부여된 것은 일상의 모습도 아닐뿐더러, 감정을 착취하는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오즈의 뛰어남이 있다. 표층을 통해서 삶의 내밀함을 보여주는 그의 방식이 그것이다. 내면성이 배제된 상태에서 드러나는 표층의 모습인 일상. 그 일상이 조금씩 쌓여 축적이 이루어질 때, 일상의 농도는 점점 짙어지게 되고, 일상의 농도를 통해 그 삶이 거쳐 왔을 심연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영화 막바지에는 늙은 여인의 죽음이 있다. 스필버그라면 늙은 여인의 죽음을 좀 더 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을 게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죽음이 극화된다면, 바로 그 순간 일상은 그 맛을 잃고 표류하게 되고, 전통적 가족상이 붕괴되어 가는 일본의 모습도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오즈는 죽음을 극화시키지 않는다. 오즈는 편안하게 돌아가셨다는 늙은 여인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즈는 영상이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솔직히 이야기 한다. 대신 오즈는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관객이 스스로 그 죽음의 얼굴을 연상하게 한다. 오즈에게는 관객이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 적극적인 정치적 주체로 발화토록하는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삶과 언제나 공존하지만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회피하고 있는 죽음의 일상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화는 한편의 영화라는 외연을 넘어 관객의 삶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동경이야기>에는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얻게 되는 이 충만함이 있다. 그것은 신선함과 재미, 새로움과 활력으로 삶을 채워나가는 데에만 익숙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솔직히 말하면 나에게) 하나의 울림으로 다가온다. 다시 한 번 그 메시지를 되돌아 본다. (여백이라고 불러야 더 적당할 것 같은) 결여는 그 자신이 결여 되어 있기 때문에 보충할 수 있다. 일상 속의 결여를 채워나가는 것은 누군가 대신해 줄 수 있는게 아니다. 오즈는 나의 결여(나의 결여는 식상함이 아니라 식상함이라는 말로 매도되는 일상에 대한 애정의 결핍이다)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동시에 그 결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자신 밖에 없다고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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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영화이다보니 참 좋은 영화를 낳는 모티브가 되었다.
그 가슴 따뜻한 등 돌린 식사가 나오는 카페 뤼미에르...


세속적 각성이라고 하면 그야말로 남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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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짐의 사건

며칠전 있었던 술자리 이야기다.

우리는 얼큰이 취한 상태에서 허름한 꼬치집에 앉아 영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보면서 눈물을 흘린 영화 이야기...

 

당시 술자리 멤버가 남자 네 명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독특한 화제였던 듯하다.

 

영화나 음악에 별 취미가 없어 보이는 한 사람은 침묵했고,

 

강한 인상을 풍기던 한 사람은 오토모 가츠히로의 <스팀보이>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 사람은 스스로도 다른 사람과 조금 다른 감성을 지닌 것 같다는 이야기와 함께 산업혁명기의 어떤 치열함같은 것이 뜨겁게 밀려왔었다고 했다.

 

나는 왠지 이해하는 바가 있다고 말했다.

 

나는 평소에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려본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기억나는 영화가 하나 있었다. 김동원 감독의 <송환>.

 

그 영화를 처음볼 때는 나도 독립 다큐멘터리계에 살포시 발을 담그고 있던터라 감정적으로 몰입하기 보다 영화를 형식적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한 반년 정도가 지난 후 친구와 그 영화를 다시 보러 갔다.

 

영화 중반 즈음부터 울기 시작한 나는 그 울음을 멈출수가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에 불이 켜졌을 때, 왠지 챙피해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다른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의외의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바로 <쉘 위 댄스>.

 

어디서 그렇게 눈물이 나더냐고 묻자, 그는

 

주인공인 스기야마가 춤을 배우러 다닐 때 그의 부인이 하던 말 때문이라고 했다.

 

스기야마의 부인은 스기야마가 바람난 것인 줄 알고 오해를 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건 혹은 대화로 그 오해는 풀리게 된다. 그러나 그의 아내가 던진 마음속 응어리진 한마디!

 

“분해...”

 

조용히 내뱉은 그 한마디에 그 사람은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고 한다.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쏟아낸 그 사람은 당시 대학생이었고, 아는척 하는 것을 좋아하던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가 하는 세미나에 그의 여자친구는 동참하고 싶다고 했으나, 그 세미나는 대학원생들이 주가 된 세미나였고, 그는 그 세미나에서 별 볼일 없는 일원 중 하나였다.

 

그는 여자친구에게 자신의 별 볼일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 세미나에 나오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와 비슷한 일이 계기가 되어 그 사람은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그 사람은 <쉘 위 댄스>를 보았다고 했다.

 

스기야마의 부인이 “분해...”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은 자신의 여자친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그 사람은 끝내 눈물을 쏟고 말았다.

 

나는 물었다.

 

“혹시 내가 오바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아마 형의 그 울음은 형 안에 남성성이 무너져 내리는 어떤 계기나 사건 같은게 아니었을까요?”

 

그 사람이 대답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런 것 같아. 그 영화, 그 울음 이후로 사람들을 대할 때, 특히 후배들을 대할 때 내 안의 벽이 많이 사라진 것을 느껴.”

 

“그렇군요. 나도 한번쯤 그렇게 울어보고 싶어요.”

 

내 안에는 너무 큰 장벽이 놓여 있다. 아직 깨지 못한 벽.

 

그걸 남성성이라고 칭하든 말든 그런건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히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 혹은 그 이해력 자체, 혹은 배려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나도 무너져야 한다. 무너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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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기쁨, 둘

어떤 수사로 표현하더라도 때로 고통은 그냥 고통이다.

 

그래서 기쁨을 찾으려 노력하는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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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기쁨

고통은 의무를 부과한다. 고통받은 삶은 후회를 불러오고 미래를 위한 계획의 지평을 열어 놓는다. 그것은 현재의 원인이며 미래로의 지향이다. 따라서 고통은 시작이다.

 

기쁨은 무엇의 원인이 아닌 결과이다. 원인이 부과되지 않는 삶이 바로 기쁨이다. 따라서 그것은 끝이다.

 

상상의 공동체가 기쁨이 아닌 고통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차이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만족할 수 없으며 어떠한 긍극적인 기쁨도 불러올 수 없다. 기쁨에 당도하는 순간 상상의 공동체는 유지에의 동기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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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이 하나 있다.  나

 

또 다른 점이 있다. 나와 너

 

 

나와 너 사이에 선을 긋는다. 길

 

그 길 어딘가 쯤에서...

 

만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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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 덕

 

 

눈 굴리는데 만도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물론 화장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소요 됐다.

 

역시 화장의 압권은 스모키 분장이다.

 

두 시간도 못되어 행인의 테러로 생을 마감한 울트라 덕(혹은 치킨)

 

그/녀의 명복을 빌며... goodbye to rom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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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현기증2

한번쯤 배우로 살아보는 것도 좋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모습을 낯선 공간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지 궁굼해져서이다.

 

거울을 봐도, 카메라에 찍힌 내 모습을 봐도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저게 내 모습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화장을 한번 해보는 것도 좋을거란 생각이든다.

아침에 일어나 의식을 치루듯 거울앞에 앉아 자신의 모습을 신중히 바라보것.

기껏해야 지금까지 해본건 로션바르는게 다였다. (이것도 최근 몇 년 전에 시작했을 뿐이다.)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에게 일깨우는 계기가 필요하다.

 

배우 엄태웅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장률의 영화를 찍던 어느날 정성일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걸 해보고 싶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그러면서 카메라 앞에 서서 버티는 것."

 

자신을 좀 더 신중히 바라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자신 안의 타인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다.

혹은 타인을 신중히 바라봄으로써 자신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소통이란 이런 신중함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너무 쉽게 소통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지는 말자.

 

배우가 되든 화장을 하든 진정성을 가지고 나 자신/타인을 바라 보고 싶다.

 

어느날 리모컨으로 티비 채널을 돌리듯 타인의 고통을 보고도 쉽게 스쳐지나가는 내 모습이 혐오스러워 졌다.

언젠가는 내가 나를 그렇게 바라보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무감각함을 부인하기.

폐허 속에서 고통받으며 깨어있기는 얼마나 힘든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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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현기증

오랫만에 산 영화 잡지를 읽는데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불안이라기 보다는 기분좋은 현기증.

 

벤야민이 모스크바에서 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라시르였을까?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였을까?

 

어느 하나라고 말하긴 힘들게다.

 

질문을 바꿔보자.

 

모스크바에 라시르가 없었더라도 그는 그 곳에 갔을까?

 

혹은 모스크바가 사회주의 국가의 수도가 아니었더라도 그는 그 곳에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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