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술 - 2004/09/14 23:59

恐怖와 言論이 戰場에 미친 영향

    - 미국의 월남전쟁과 GULF전을 중심으로 -

 

6 軍團長   中將  徐  慶  錫


 

[目次]

1. 序   言

2. 本   言
 가. 恐怖가 戰場에 미친 영향
    1) 핵(核)에 대한 恐怖
    2) 중공군의 참전과 그들의 인해전술(人海戰術)
       에 대한 恐怖
    3) 세계 여론과 공산권에 대한 恐怖
 나. 언론이 전장에 미친 영향
     ** GULF전에서는 어떻게 했나? **
3. 結   言

                                                     
1. 序   言

 

클라우제비츠(Clausewitz)는 그의 저서에서 “공포(Fear)”는 기본적인 전력 특히 그 중에서도 공격력을 약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주장했다.1) 남북전쟁 당시 남군의 스톤월 잭슨(Stonewall Jackson) 중장이 저술한 『지휘의 연구(A Study in Command)』에서도 이미 100년 전에 『공포에 대한 선입관을 가져서는 안된다.』라고 충고한 바 있다.

 

또한,『공포(Fear)라는 말 자체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바보라 할지라도 공포가 전쟁터에서 위험한 요소라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공포에 대한 선입관(先入觀)이며 만약 두려움에 마음이 사로잡히게 되면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사고기능(思考機能)은 마비(麻痺)되고 따라서 위험만이 증가되는 것이다.』라고 언급하였다.

 

공포와 위험과 위협(威脅)에 대한 선입관을 가져서는 안된다. 전쟁시는 언제 어디서나 공포와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며, 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국의 어떤 위협요소나 공포요소에 집착(執着)한 나머지 선입관이나 편견에 따른 고정관념(固定觀念)을 갖게 되면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사고(思考)의 기능을 마비(麻痺)시켜서 영원히 극복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전쟁지도부는 명확하고 확고한 전쟁지침을 내릴 수 없으며 예하 전투 지휘관들은 소신있는 작전구상과 지휘를 하지 못하게 되어 결국은 패전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미국이 월남전에서 역사상 최초의 패전을 기록한 것은, 전혀 예기치 못했던 새로운 국면에 직면하므로서 전쟁에 대한 공포의식이 조성되고 전승에 대한 확신이 사라지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세계 최대강대국인 미국으로 하여금 패전의 길을 걷도록 한 요인은 무엇인가?

 

 

2. 本    言
 
   가. 공포가 전장에 미친 영향

 

      1) 핵(核)에 대한 恐怖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미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은 핵(核)이 얼마나 가공(可恐)할 무서운 무기인지를 인식하였다. 1953년 8월에 소련이 핵무기를 실험하였고, 1964년 10월 16일에는 중공이 첫 핵실험을 시작하면서 핵투발계통(Nuclear Delivery System)을 급격히 향상시켜 나갔다.
 
한국전쟁 당시와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 미국이 소련 공산주의와 서로 대치하게 됨을 인식하자 국민들 사이에는 소련과 중공의 핵(核)을 미국이 일본에 터트린 것과 같은 무서운 위험으로 간주하여 그 당시와 같은 무시무시한 피해가 우리에게 닥치겠구나 하는 공포의식(恐怖意識)이 싹트게 되었다.

 

이는 매우 현실적인 위협으로 당시 미국인의 공포는 미국이 적의 핵으로 망(亡)하지나 않나, 최소한 월남전에서 적국이 전술핵(戰術核)을 사용하여 미국 군인이 떼 죽음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2) 중공군의 참전과 인해전술에 대한 恐怖

 

미국이 핵의 위력을 믿고 있을 때, 중공은 1964년 10월에 핵 실험을 하고 나서는 한국전쟁의 예를 들면서 월남전에 참전하겠다고 위협을 했다. 미국은 핵 공격도 우려되지만 전쟁의 확산을 두려워했다. 따라서 또 하나의 공포는 미국이 아시아의 지상전에서 중공과 싸우게 되지나 않나 하는 두려움이었다. 한국전쟁 초기에 미국은 위험과 공포를 느끼지 않고 오직 북괴군을 격멸하기 위한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으나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문제의 양상이 바뀌었다.

 

1950년 10월 26일 Smith 소장이 지휘하는 미 제1해병사단이 원산에 상륙하여 장진호(長津湖)방향으로 공격을 개시하고 서부에서는 Walker 장군이 지휘하는 제8군이 한국군 제1사단을 선두로 평양을 탈취하고 파죽지세(破竹之勢)로 한만(韓滿) 국경선으로 공격을 계속하여 일부는 압록강까지 전진하였다.

 

이때 중공군 제42군의 3개 사단은 만주를 출발하여 10월 14일 압록강을 건넜으며, 11월 초에는 제9병단의 3개군이 장진호 지역으로 남하하였다. 서부에서는 한국군 제2군단이 온정리(溫井理)에서, 동부에서는 미해병 제1사단이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에 강타 당하고 도처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를 당해 많은 피해를 보고 서울이 다시 적에게 피탈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자 미군은 일본으로 철수하는 계획까지 수립했었다.

 

이에 미국은 중공 본토를 공격하지 않는 이상 수(數)도 없이 밀려드는 중공군을 막을 길이 없다고 판단하고 휴전이라는 카드를 내놓고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으로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 모두가 중공군의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인해전술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미국은 6.25 전쟁의 악몽이 월남전에서 되풀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3) 세계 여론과 공산권에 대한 恐怖

 

분명히 월남전쟁은 월맹군의 도전에 의한 월남에 대한 침략전쟁이었다. 그러나 월맹뿐 아니라 모든 공산국가들은 월남전쟁을 월남국민들이 현재 체제를 부정하고 스스로 봉기(蜂起)한 내전(內戰)이라고 선전하면서 “남의 나라 국내 문제에 다른 강대국이 개입하는 것은 내정간섭(內政干涉)이다. 따라서 월남인 스스로 자기나라 문제를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의 월남전 참전은 내정간섭이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이로 인하여 세계의 여론은 미국의 월남전쟁을 정의(正義)롭고 가치있는 전쟁으로 보지 않게 되었다. 미국은 국내여론이 나빠지고 반전사상이 팽배하게 되자 월남전쟁은 분명히 월맹의 침략전쟁인데도 불구하고 이를 월남내의 내전으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미국은 게릴라를 목표로 하여 게릴라를 쫓는 군사행동만을 주로 행사함으로써 월맹내의 적 군사주력과 전쟁지도본부를 공격하지도 못하고 포기해야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쟁기간중에 공군에 의한 월맹폭격은 있었으나 이것 또한 지속적이거나 적의 의지를 파괴하기 위하여 실시하지는 못했으며 지상군이  국경을 넘어서 월맹본토를 공격한 일이 한번도 없었던 것은 적 주력 격멸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는 월남전쟁을 한 나라의 단순한 내전(內戰)으로만 보았다는 의미가 되고, 세계의 여론을 극복하지 못하고 두려워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여론에 떠밀려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연합국은 소련 및 중공과의 군사적 충돌을 두려워하면서 과감한 군사행동을 계속하지 못하고 전쟁을 월맹측으로 확산시킨다던가 Combodia, Laos등에 있는 소위 성역(聖域)인 호지명 루트를 공격하는 등의 과감한 작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나. 言論이 戰場에 미친 영향

 

특히 미국 정부가 무서워한 두려움의 대상은 소련이나 중공 및 월맹보다도 자국내의 여론(與論)이었다. 많은 미국 젊은이가 전장에서 죽거나 부상당했으며 반전운동 및 공산주의자의 선전선동(宣傳煽動)활동 때문에 미국 행정부는 자국국민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고 취재활동 역시 구속받음이 없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법이 이를 보장하고 있다. 미국은 여론정치(與論政治)의 나라이다. 여론은 대부분 TV가 만든다. 미국이 월남에서 손을 떼고 월남이 공산화되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은 TV카메라 때문이었다. TV수상기는 그 특성상 종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영향을 가져다 주었다.

 

TV는 거짓말쟁이 중에서 그럴듯한 거짓말쟁이다. 어느 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서 그럴듯하게 설명을 하면 그것을 보는 국민은 TV의 설명을 믿는다.

 

월남전 이전에는 전황보고를 라디오를 통해 음성으로 전달하였다. 현장 사진이 없이 말로만 전달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가 없다. 그러나 TV의 등장으로 생생한 현장사진이 안방에까지 전달되었다.

 

영국군은 미국 위성에서 중계한 TV를 통해 포클랜드 전쟁의 전기(戰機)를 잡을 수 있었고, 걸프 전쟁시는 전장의 생생한 모습이 전세계에 전파되었다.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싸우려는 적의 의지를 파쇄(破碎)해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적의 전투력과 전쟁지도본부를 파괴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 자체가 살생(殺生)이고 파괴 그 자체다. 따라서 비참하고 잔인하다. 살생의 현장은 끔찍하다. 그런데도 미국내에서는 월맹의 수도인 하노이 폭격시 생생한 현장사진을 TV를 통해 보고 비인도적이라는 여론이 일어났다. 미 공군의 폭격으로 네이팜(Napalm)탄의 불길을 뒤집어 쓰고 울부짖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 온 가족이 저녁을 먹고난 후 거실에 모여 앉아 즐거운 담소를 하는 시간에 TV스크린에 비춰졌다.

 

전 미국인의 대부분이 이 잔인한 모습을 같은 시간에 보았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내 손녀가, 부모들은 내 딸이 울부짖는 것으로 착각까지 하게 되었다. 미국 국민으로 하여금 자국군대의 잔인성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오류(誤謬)를 낳았다. 월남인들이 모두가 다 그렇게 죽는 것으로 착각(錯覺)하고 자기 자식들이 그렇게 죽거나 잔인하고 무자비(無慈悲)하게 월남인을 죽이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TV 스크린은 월남전쟁을 부도덕한 전쟁, 더러운 전쟁으로 여기도록 여론을 들끓게 하는 견인차 역할을 한 셈이었다. 국익을 챙기지 않고 흥분되는 순간과 특종만을 찾아 다니는 TV가 이적행위(利敵行爲)를 한 결과를 가져왔다.


 

TV 화면이 등장한 이후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TV의 화면과 해설이 국민의 여론을 주도하게 되고, 그 여론은 바로 한 나라의 힘의 중심점(Center of Gravity)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정부와 전쟁지도본부에서는 국민의 여론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월맹측과 공산주의 국가들은 월맹이 힘으로 싸워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간접접근 전략의 목표를 미국의 힘의 중심점이 되어버린 국민여론을 향해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미국의 TV가 한 수 더 떠서 나라의 힘의 중심점이 되어버린 국민여론을 적에게 유리하게 유도(誘導)하는데 크게 기여(寄與)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 공산진영의 선전매체는 이에 호응하여 사실을 확대과장(擴大誇張)하고 그들의 전쟁을 정당화(正當化)시키고, 미국의 전쟁을 비인간적이고 추악(醜惡)한 행위로 간주케하고 남의 나라의 내정(內政)에 뛰어들어 간섭(干涉)하면서 전쟁을 대신(代身)하고 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결과적으로 월남정부는 미국의 꼭두각시로 미국의 앞잡이 노릇이나 하는 나라이고 정부가 부패하여 지원과 원조의 가치가 없는 나라로 부각시켰다.

 

힘의 중심점이 되어버린 미국의 여론을 파괴하기 위하여 무섭게 달려드는 적 앞에서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미국의 정신나간 대학교수, 주교, 목사, 수녀 등의 종교인과 지식인, 월남전 참전을 기피한 학생들로 구성된 반전단체(反戰團體)는 미국의 월남지원을 종료시킴으로써 세계평화를 달성하자는 멍청하고 악명 높은 호소문인 『목사의 편지』를 널리 유포시켰다.

 

마침내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선동 및 청년학생들의 반전시위로 인해 미국의 힘의 중심이된 여론은 자기정부가 아닌 적 월맹측으로 넘어가고 말았고 미국정부와 전쟁지도본부는 그 여론을 두려워한 나머지 전쟁의 승리에 필요한 과감한 정책을 수립하여 시행하지 못했고 군사력을 집중 운용하지도 못했으며 노력을 통합하지도 못했다.

 

미국은 월남전쟁을 자국내의 내전(內戰)으로 규정함으로써 월남 내부에 있는 적과 싸우는 것으로 개념을 한정(限定)시켰다. 북폭을 한다던지 월남국경을 넘어서 호지명 루트나 월맹본토를 공격하는 명분(名分)도 상실했고 실제 공격을 하지도 못했다. 이는 미국이 자국내 여론(與論)을 두려워하고 싸워야 할 대상인 적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은 월남에서 겪은 전철을 소말리아에서도 똑같이 되풀이 하고 있다.

 

지난 1993년 10월 3일 소말리아에서 미군 12명이 숨지고 최소한 6명이 실종한 사건을 계기로 미국 전역이 들끓고 있었다. 소말리아의 반군에게 포로가 된 추락한 헬기 조종사 마이크 듀란트(32)는 다리를 다친 채 겁에 질린 표정이었고 얼굴은 피투성이이고 곳곳에 멍든 흔적이 있는 채 그대로 방영되었으며, 또한 그 조종사 가족의 침통한 모습도 앞을 다투어 보도하였다. 이와 함께 피습당한 미군 헬기의 찌그러진 모습과 살해된 미군의 시신(屍身)이 방치되어 있는 장면, 다른 하나는 소말리아의 소년들이 사살된 미군의 시체를 줄에 매어 질질 끌고 다니는 참혹한 모습이 TV에 그대로 방영되었다.

 

이런 내용이 방영된 직후 미국 전역에서는 월남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듀란트 준위의 고향인 카나다 국경부근의 소도시에서는 노란 리번이 빌딩과 차 안테나를 뒤덮었다. 60년대 말 베트남의 참혹한 실상이 TV에 방영된 뒤 반전여론(反戰與論)이 들끓었던 것처럼 평범한 군인이었던 듀란트 준위의 비참한 모습의 사진 한장이 미국의 소말리아 정책의 정당성 여부를 평가하는 하나의 상징(象徵)이 되어 버렸다.

 

하원과 상원에서는『미국이 제 2의 베트남전 수렁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소말리아 주둔 미군을 즉각 철수시키라고 클린턴 대통령에게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ABC - TV가 여론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64%가 미군 철수를 희망한 반면, 29%만이 미군의 계속 주둔을 지지했다.

 

결국 미국은 언론보도로 인한 국내여론에 의해 월남에서 와 똑같이 철수 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경우는 비단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체첸 공화국간의 전쟁에서도 러시아가 똑같은 체험을 했다.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게 된 것은 러시아가 현대의 매스미디어 위력을 간과하므로서 미국의 월남전시 TV가 월남전 참상을 각 가정에 전파로 보낸 것과 똑같이 전장현장의 참상이 TV를 통해 생생하게 각 가정에 전달됨에 따라 전쟁에 대한 국민의 두려움이 반전(反戰)여론으로 돌아서고 전쟁지도부의 반목과 불협화음으로 까지 이어지게 되어 일사불란한 전쟁지도가 이루어 질 수 없었다.

 

러시아의 역사를 통해 보면 현재 체첸(Chechen)공화국 사태 정도의 참상(慘狀)과 비교도 되지않을 정도의 참혹한 시련이 수(數)도 없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hechen 사태는 Russia TV에 전장의 모습이 국가의 검열없이 보도된 최초의 전쟁으로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매일 밤 Russia의 각 가정에는 동토(凍土)의 얼어붙은 땅에서 죽거나, 부상당하여 울부짖는 Russia 병사의 참혹한 모습이나 결사항전(決死抗戰)을 외쳐대는 Chechen 병사들과 절규하는 민간인들의 모습이 TV를 통해 전달되었다.

 

그것은 폭격중지나 전쟁종식 등에 관한 정부의 주장(主張)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를 전달했으며, 오히려 Yeltsin 정부를 거짓과 잘못의 변명집단으로 부각(浮刻)시켰다. Russia인들은 검열제도가 사라지고 이토록 개방된 언론보도에 접해 본 적이 없어 당황했고 더 큰 분노를 느끼게 되었으며 언론보도에 익숙하지 않은 국민은 오히려 정부의 보도보다도 TV의 해설을 믿고 Chechen전쟁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게 되었다.


언론 특히 TV스크린의 위력을 미쳐 모르던 Russia 정부는 다시 검열을 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이미 민심(民心)은 부도덕하고 불필요한 전쟁에 우리의 아들들이 너무 비참하게 죽어간다는 쪽으로 기울어 버린다.2)           

 

Yeltsin 대통령과 정부관리들은 Russia의 TV와 신문이 Chechen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편파보도(偏頗報道)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국영 TV 방송국의 사장을 해임하겠다고 위협하는 우스꽝스러운 사태에 까지 이르렀다.

 

일부 군장성들까지 Yeltsin을 포함한 정부관리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였고 알렉산드로 레베트 중장(옛소련 공화국 몰도바에 주둔한 러시아 제14군 사령관)은 『그라쵸프 국방장관이 사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부의 Chechen대응책을 비난하고 크렘린 지도자의 아들이나 손자들로 구성된 부대가 있다면 Chechen에서 그 부대를 지휘할 용의가 있다.』고 정부를 조롱(嘲弄)까지 했다.

 

모스크바의 푸쉬킨 광장에서는 Russia군의 어머니들이 체첸에서 전사한 아들의 영정을 들고 반전시위를 벌이고, 민영방송인 NTV는 『정치인은 이번 전쟁이 아프칸 전쟁같이 어물어물 마무리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언론의 역할을 모르는 데서 오는 것이다.』라고 언론의 전장 참여와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의미(意味)로 정부와 맞섰다.


지금 Russia에서는 언론(言論)과 정부의 줄다리기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TV 스크린의 위력(威力)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 정부가 사전에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의회의 동의(同意)도 받지 않고 국민의 의견수렴도 없이 공격을 감행한 Yeltsin 대통령은 국민 지지율이 14% 하락하여 군부에 의한 쿠테타까지 외신(外信)은 전달하고 있다.

 

언론의 무절제한 보도는 국민들로 하여금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도록 하므로서 결국은 전쟁에실패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종종 적을 이롭게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                     ※
  
2차대전시 영국에서의 "예" 

 

1994년 노르만디에서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작전이 개시되어 독일 본토에 대한 위협이 증가되자 히틀러는 비장의 무기를 등장시켰다. 6월 12일 독일군의 영불해협쪽 비밀기지에서 런던을 향해 사상 최초로 V1 로켓트를 시험 발사하였다. 다음날에는 54대의 발사대에서 500여 발의 로켓트를 준비 하였으나 10발 정도만 발사에 성공하였고 그중 5발이 영국까지 날아갈 수 있었으며 그중 1발이 정확하게 런던 시가에 명중되었다. 런던 시가지에서 대폭발을 일으킨 로켓트의 위력은 그 파괴력 만큼이나 영국 시민들에게 던져 준 충격이 더 컸다. BBC를 비롯한 각 방송 매체에서는 즉각 사건의 전모를 추적 보도하면서 독일을 극렬하게 비난하였고 폭발 현장의 위치를 비롯한 생생한 피해 상황을 보도하였다.

 

그러나 사태의 심각성은 2일 후 더욱 엄청난 불행을 가져왔다. 영국 방송에서 중계해 준 로켓트의 탄착 현황 덕분에 독일군은 정확하게 탄도 수정을 가하므로써 140여 발이 영국까지 도달하였고 그 중 73발이 런던에 명중하였다.
 
런던 시가지는 아비규환으로 변했고 엄청난 파괴와 불길 속에 속에서 도시의 절반 이상이 잿더미로 변했다. 영국의 BBC 방송은 조국과 국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걸프전에서는 어떻게 했는가?** 주3)

"뉴스 미디어 관계자는 항상 에스코트를 받아야 한다. 반복한다. 항상 에스코트를 받아야 한다."               
 
베트남전쟁 실패 이후, 패전 이유에 대한 연구가 미국내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 검토에서 여러 가지 패인(敗因)중에, 미 군부의 거의 일치된 견해중에 하나는 매스콤에 대한 정책이 잘못되었다는 것이었다.


기자들 특히 TV 방송기자들에게 거의 무제한의 취재자유와 현장접근을 허용했기 때문에, 작전에 차질이 생겼을 뿐 아니라 전장의 비참한 모습이 지나치게 부각되어,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적을 이롭게 함은 물론 반전(反戰)여론을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군이 싸울 수 있는 명분을 상실케 된 것이 가장 큰 문제로 검토되었다.

미 군부는 기자들에게 장비의 고장이나 작전의 실패같은 불리한 사실이 알려지면, 언론의 생리상 그런 부정적인 사건이 집중적으로 보도되고, 전투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기사는 다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같은 생각은 영국군의 포크랜드전쟁으로 더욱 확실해졌다.영국군은 아르헨티나와 싸운 이 전쟁에서 엄격한 보도통제를 실시했고, 군사작전을 군인들이 소신껏 수행함으로써 승리할 수 있었다.

 

미군은 1983년의 그라나다 작전 때 그 교훈을 활용하였다. 미군은 기자들을 완전히 따돌려 놓고 그라나다섬에 침공했다. 기자들의 항의가 거세자, 미군은 기자들의 대표자를 뽑아서 종군을 시키고는 그 내용을 나누어 갖게 하였다.

 

1989년 미군이 파나마를 침공할 때는 이러한 제도조차 운영하지 않았다. 체이니 국방장관에 의해 군사작전이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하여 철저한 보안조치를 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국방부의 조사위원회에서 그러한 조치가 지나친 보도통제였음을 시인하였다. 그러나 그 때는 군사작전이 다 끝난 뒤였다.

 

체이니 국방장관은 두 가지 원칙을 고집했다.

 

첫째는 언론의 권리보다는 군사적 성공이 우선한다. 이 원칙에 따라 지금까지 종군기자에게 부여되었던 여러 가지 특권이 폐지되었다.

둘째는 정부의 신뢰성을 확립한다는 것이다. 근거가 없거나, 확실한 자료도 없이 뜬 소문을 갖고 사실인 양 보도하는 것을 못하도록 그 근원부터 차단을 했다. 월남전쟁에서는 전선의 사실과 보도내용에 큰 차이가 있어서 신뢰성에 큰 문제를 갖고 있었다.

 

이같은 기본원칙에 따라 5가지 항목의 정보관리 정책이 추진되었으며 철저하게 지켜지도록 강조되었다.

 

첫째, 이라크의 위협과 군사력의 강대성을 최대한으로 홍보하고, 연합군의 역사적 임무를 최대한으로 강조한다.            

둘째, 국민이 과도한 기대를 갖지 않도록 하고 항상 예상을 상회하는 결과가 나오게 하여 신뢰감을 갖도록 한다.

 

셋째, 걸프전쟁이 비인도적이라는 인상을 갖지 않도록 한다. 부시 대통령이 주전론자라는 인상을 갖지 않도록 한다.

넷째, 이라크를 포위하는 동맹국, 연합군의 결속유지를 저해하는 정보를 극력 억제한다.

 

다섯째, 이라크를 기만하기 위하여 가능한 한 모든 거짓 정보를 이용한다.  

 

전쟁이 시작되기 한 달 전, 체이니 국방장관의 대변인 피트 윌리암스는 미국의 주요 언론사 사장들과 만나 기자들의 종군 취재를 약속했고, 전투가 벌어지면 풀 기자제도(기자들의 대표를 뽑아 종군시킨 다음 그 기사를 나누어 갖는 제도)를 운영할 것도 약속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도착한 기자들은 미중앙군사령부에서 취재허가를 받기 위해 6페이지나 되는 종군보도지침에 서명을 해야 했다. 그 지침에는 윌더머드 대위가 써 넣은 구절이 아래와 같이 들어 있었다.

"항상 군이 제공하는 에스코트 병력과 행동을 같이 할 것."

 

그에 앞 서서 기자들은 체력 테스트를 받아야 했다. 종군기자도 전장에서 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체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기자들의 체력 테스트는 종군기자들의 집결지인 다란의 인터네셔널 호텔의 풀장에서 실시되었다. 미군이 정한 기자들의 체력 테스트는 41세의 남자를 기준으로, 업드려 팔굽혀펴기 2분간에 33회를 한 뒤, 2분간 복근운동 29회였다. 마지막 과정은 달리기로, 호텔 주위 2400미터를 18분안에 돌아야 했다. 기자들을 통제하고 길들이기 위한 최초의 통제수단이었다.

 

기자들에게는 야전 자켓과 내피, 야전 하의, 슬리핑 백, 탄띠, 수통, 화학전 캡, 야전배낭, 붕대, 가스마스크, 아트로핀 주사기, 화학전보호의와 구두, 가글, 헬밋이 지급되었다. 이 군장을 다 짊어지면 움직이기 조차 힘들었다. 생명을 지키기 위한 이러한 조치는 군에 통제를 받지 않으면 죽는다는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간접적인 통제방법을 사용하였다.

 

풀 기자제도는 미군의 중앙군사령부에서 마음대로 운영했기 때문에 기자들은 불평이 많았다.사우디아라비아에는 기자는 많이 있었지만 전선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제한되었다. 갈 수 있다고 해도 미군 당국에서 지정한 장소만 갈 수 있었고, 미군과 같이 생활할 수도 없었다.
물론 모든 기사는 검열을 받아야 송고할 수 있었다. 어느 현지 부대장은 휴대용 컴퓨터로 작성한 원고는 읽기가 어렵다고 타이프라이터로 친 원고를 요구하기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 - 이라크 국경선을 따라 동서로 연결되는 도로에는 헌병이 배치되었다. 이들에게는 최우선적으로 기자를 저지하라는 명령이 내려갔다.

 

뉴욕타임스의 에릭 슈미트, 존 키프너, 크리스 헤지스 등 세 기자가 이 도로에서 한 미군병원을 취재하려 했다가 체포되었다. 워싱턴 포스트와 AP 통신사의 기자와 영국의 BBC 방송의 취재팀 6명을 포함하여 프랑스인 사진기자도 체포되거나 억류당했다.
 
그렇다고 모든 기자들이 미군의 작전계획을 몰랐던 것이 아니었다. US NEWS AND WORLD REPORT지의 편집부장 데이비드 거겐은 지상전이 시작되기 2주전에 연합군의 공격목표를 알아냈고, 미해병대의 상륙작전도 없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지만 스스로 공개하지 않았다.

미국의 다른 언론매채도 여러가지 정보를 입수했지만 모두 미군의 안전을 위해 스스로 공개하지 않았다.

 

NEW YORK TIMES의 말콤 W. 브라운 기자는 걸프전의 스타로 떠오른 F-117A스텔스 전투기 기지를 방문했다.

 

그는 기사를 작성해서 그를 에스코트하는 장교에게 첫번째 검열을 받았다. 아무런 문제가 없이 통과되었다.

이 원고는 비행단 본부로 제출되었다. 비행단 본부에서 다시몇 개의 단어를 고치라는 지시가 전달되었다. 즉 gibby(충동적인)라는 단어로 조종사를 표현했는데 이는 호전적(好戰的)인 단어로 적당치가 않으니 proud(자랑스런)로 고치라는 것이고, 원고에는 F-117A를 "전폭기"로 표현했는데 이를 "전투기"로 고쳐 쓰라는 연락이었다.

 

마감시간에 쫓긴 두 기자는 비행단장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들의 기사는 다란에 있는 이테네셔널 호테로 보내진 것이 아니라, 미국 본토의 네바다주 토너퍼에 있는 F-117A 기지본부로 보내졌다. 이 기지의 보안장교는 군사기밀을 누설한다는 이유로 그 기사를 보류시켰다. 결국 그 기사는 작성된 지 24시간이 지난 뒤에야 김이 다 빠져서 검열을 통과했다.

 

미 제1기갑 사단을 취재하던 LOSANGELES TIMES의 도우 젤 기자는 군당국의 검열로 일할 의욕까지 상실하였다.

 

"내 원고는 나를 따라다니는 에스코트 장교의 검열을 거쳐 제1기갑사단의 공보장교에게 넘겨지고, 공보장교가 그 원고를 본 다음, 사단 참모장에게 가지고 갔습니다.
그 다음에 그 원고는 다시 7군단 공보장교에게 보내져 다시 검열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원고는 중앙군사령부로 가서 검열을 받았습니다. 검열을 거칠 때마다 원고는 가필되고 새로운 해석이 추가되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가장 많은 훈장을 받고 전역한 데이비드 헤크워드 예비역 대령은 전장 기고가로서 뉴스위크지를 위해 취재를 하다가 기막힌 꼴을 당했다고 술회하였다.

"미군병사들이 소총에 총검을 꽂고 우리들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이번에 실제전투보다 더 많이 미군이나 사우디 아라비아군으로부터 총뿌리로 공격을 받았습니다."

 

기자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미군사령부의 검열과 통제를 벗어나려고 했다. 많은 기자들이 미육군 또는 해병대원으로 위장하여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많은 기자들이 체포되었다. 12시간이나 일선부대의 영창에 갖혀있던 기자도 있었다. 어떤 기자는 이렇게 한탄했다. "나는 일선에서 시간의 3분의 2는 MP의 눈을 피하는 데 썼습니다. 결국 취재시간은 3분의 1 정도밖에 안되었습니다." 

 

 

3.結 言

 

북한은 전 세계의 국가 가운데 언론과  TV가 철저하게 통제당하며 국가에서 지시하는 것만 보도한다. 따라서 국민여론 형성도 국가의 의도대로 이끌려 간다. 전선의 비참한 모습은 각 가정에 비춰지지도 않겠지만 우리의 시각으로 북한의 국민 여론을 보아서는 안된다.

 

국가가 선전선동(宣傳煽動)의 매체로서 역할을 담당하여 옛날 독일의 Hitler가 하듯, 소련의 Starlin이 하듯, 전젱에 광분하여 뛰어들게 만들 것이다. 국가의 노력과 군대의 전투력 집중이 가능하고, 중공군이 하듯 한 전선 뚫기 위하여 인해전술도 불사할 것이다.
 
적의 선전매체는 월남 및 소말리아에서와 같이 잔인하고 비참한 전장의 모습을 골라 TV 스크린을 통해 집중적으로 비춰줄 것이다. 우리 자체내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여론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미국이 자국군대의 과감한 전투력 투입을 주저토록 하기 위하여, 방송과 TV를 포함한 전 선전매체를 이용하여 집중적인 선전 공격을 가할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와 미국 및 세계의 TV 스크린이 월남, 소련의 체첸 침공, 소말리아 사태와 같이 국익과 전쟁승리에 아랑곳없이 특종을 찾아 전혀 예측하고 계산되지 않은 자극성 보도를 할 때 국군과 미군의 전투수행 능력이 어떻게 될까?

 

군사적 식견과 자제(自制)가 없는 무절제한 보도는 정부로 하여금 국민의 눈치를 보게 하고 힘을 못쓰게 만든다. 군대의 고급지휘관은 결전의 호기를 포착하고도 인명 피해가 많이 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전투력 사용에 눈치를 보게되고 소신있는 부대 지휘를 하지 못하므로서 결국 전투에서 패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 직업군인들은 평소부터 문제의식을 가지고 공포와 두려움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을 전례를 통해 연구분석하여 대처방안을 강구해야 하고 언론과 긴밀한 협조를 실시하여 군사작전에 지장이 없도록 필요한 조치를 사전에 강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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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On Strategy : A Critical Analysis of the Vietnam War.Harry G,Summers,Jr. 1983.12.25, 민평식역, 병학사 P75

주2) Russia's TV War. 다시 고개드는 러시아 언론 검열. Newsweek 1995. 2. 8. P 24-25

주3) 첨단전쟁, 이남규, 조선일보사,1992.3.11,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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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4 23:59 2004/09/14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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