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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장 - 2011/12/18 14:20

1주일에 2~3일정도, 1년에 8~10개월만 근무한 일용계약직 노동자에게도 퇴직금을 주어야 할까? 보통의 경우 퇴직금은 1년이상 계속근로한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것이 이른바 상식이고, 이 상식을 신봉하는 사람이라면 앞의 질문에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얼마전 대법원이 이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대법원은 지난 4월 14일 경륜, 경정장에서 일했던 노동자 유모씨등 57명이 국민체육진흥공단을 상대로 낸 퇴직금청구 소송에서 “근로계약 사이 일부 공백이 있더라도 기간이 길지 않고 계절적 요인 등 업무 성격 때문이라면 근로관계 계속성은 유지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최초로 소송을 제기한때가 2007년 6월이니 무려 4년여만의 판결인 셈이고, 나름 획기적인 내용인지라 여러 언론이 앞다투어 보도했다.

 

이 판결이 난후 며칠뒤 아침 일찍 법률원 사무실에 전화가 왔다. 나이가 좀 들어보이는 여성노동자였는데, 사연인즉 앞서 얘기한 소송에 자신도 참가했었다가 회사가 재계약을 해주며 소취하를 종용, 어쩔수 없이 포기했었는데 이제라도 퇴직금을 받을 방법이 없겠냐는 것이었다.

 

조금더 이야기를 들어보니 1심 판결전에 취하한 것이라 다시 소제기는 가능하겠지만, 퇴직금을 청구할 수 있는 기간을 넘겨버린게 문제였다. 현행 근로기준법 48조에 따르면 임금채권의 경우 3년간 행사하지 않으면 시효가 소멸되도록 되어 있는데, 이분의 경우 그 기간을 안타깝게도 놓쳐버린 것이다.

 

이런 사정을 설명드렸으나 전화를 건 노동자는 십년넘게 회사를 다녔고 퇴직금도 천만원이상 될텐데 어떻게 방법이 없겠냐며 여러번 같은 질문을 계속하다 결국 “회사가 재계약도 해줬는데 소송을 계속 하는건 곤란하지 않느냐고 해서 취하했는데, 제가 바보 병신이라 이렇게 됐네요”라고 울먹이셨다. “선생님이 바보 병신이어서가 아니라 노동자의 생존권을 미끼로 정당한 권리행사를 방해한 회사가 나쁜 겁니다”라고 말씀드리면서 나도 울컥했다. 결국 이 여성노동자가 빼앗긴 것은 천몇백만원의 퇴직금이 아니라 노동자가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져야할 자존감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판검사, 법학자들은 이런 경우 근엄하게 얘기할 것이다. “법은 권리위에 잠자는 자를 보호하지 않는다”고. 얼핏 훌륭해보이는 이 말은 그러나, 정규교육과정에서 단한번도 노동자의 권리를 가르치지 않는 현실과 어렵게 자기 권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권리를 주장한 노동자에게 자본이 얼마나 철저히 보복하는지를 은폐하고 있다. 법률원에 전화를 했던 이 여성노동자가, 당장 하루를 벌지 못하면 내일을 기약할수 없는 일용노동자가 “재계약을 해서 회사를 다닐수 있게 해주었는데도 소송을 계속할거냐”고 묻는 회사에게 당당하게 맞서지 못한게 죄일까? 자신의 권리위에 잠들어버린 것일까? 이 경우 오히려 회사가 형법상 강요죄(324조)로 처벌받아 마땅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하루종일 마음이 편치 못했다.

 

미국의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은 개에대한 전기충격 실험을 통해 ‘학습된 무기력’이란 개념을 제안했다. 어떤 행동을 해도 전기충격을 피할수 없었던 개는 무기력을 학습하게되어 충분히 피할수 있는 상황에서도 묵묵히 고통을 받아들인다는게 실험의 내용이다. 즉 무기력은 선천적으로 타고나거나 상황과 조건에 따라 자동적으로 생기는게 하니라 학습되는 것이라는게 셀리그만의 주장이다.

 

이 사회가 노동자들에게 학습시키는 것은 그들의 권리일까, 아니면 무기력일까? 많은 경우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알면서도 포기하는 것은 그들이 바보 병신이어서가 아니라 사회화의 과정에서 무기력을 학습한 결과일뿐이다. 그렇게 무기력을 학습당했기 때문에 피해자가 스스로를 바보 병신이라 부르며 주어진 상황을 운명처럼 받아들일수 있는 것이다. 사실 누구도 자신의 권리위에 잠들고 싶어하진 않는다!

 

올해 초 프랑스의 판사노조는 사르코지 대통령에 맞서 파업을 전개했다. 파업기간중 ‘판사노동자들’의 손에 들린 피켓에 적혀있던 “노동자의 권리는 법보다 위에 있다”라는 구호가 화제가 된적이 있었다. ‘법보다 위’에 있는 권리는 언감생심 바라지도 못할 이 천박한 자본의 천국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들이 최소한 ‘법만큼’의 권리라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그래서 피해를 입고도 스스로를 바보라 부르는 노동자가 더 이상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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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8 14:20 2011/12/18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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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장 - 2011/12/18 14:16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튼튼한 근육이나 날카로운 이빨대신 1kg이 조금 넘는 뇌에 자신의 생존을 맡겼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환경속에서 매번 가능한 모든 정보를 파악하여 판단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인간은 과거의 경험과 집단속에서 학습한 상식등을 토대로 간단한 몇가지 정보만 가지고 빠르게 판단하고 행동에 옮긴다. 낯선 상황에서 새로운 존재와 맞닥뜨렸을때 공격해야 할지, 방어해야 할지 또는 도망쳐야하는지를 신속하게 판단하는 것은 인류의 생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이 과제를 인간이 어떻게 해결했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인지심리학이나 행동경제학의 키워드는 휴리스틱이다. 휴리스틱(heuristic)은 ‘발견하다’ ‘찾아내다’는 뜻의 그리스어에 어원을 둔 말인데, 경험과 상식 또는 주먹구구식 셈법에 의존한 즉흥적이고 단순한 추론을 뜻한다. 휴리스틱은 그러나 자주 오작동하기 일쑤여서 오해와 편견과 같은 부작용을 낳곤 한다. 게다가 그러한 오해와 편견이 집단 또는 이해와 결합되면 무서운 결과를 빚어낸다.

 

10년쯤전에 민주노총의 지역본부에서 조직담당자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날 경찰로부터 출석요구서가 날라왔다. 워낙 경찰서 출입이 잦던 시절이라 또 집시법위반정도려니 생각하고 갔는데 웬걸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이란다. 생판 모르는 이른바 듣보잡 어느 분께서 나에게 폭행을 당해 전치 8주의 부상을 입었다며 고소한 것이다. 당시 이랜드노조가 투쟁중이었고 내가 담당이라 자주 집회 사회를 맡았었는데 사측 구사대중 한명이 찍어서 무고한 것이었다. 어처구니도 없고 황당해서 강하게 무죄를 주장했지만 경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검찰조사과정에서도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부장검사까지 나서서 “상대방이 무고한게 맞는 것 같긴하지만 민주노총이 주최한 집회에서 사람이 다쳤으니 누군가 책임져야한다”며 그대로 기소했다. 겨우 당일 촬영된 비디오 테이프를 찾아서 법원에 제출하고 두어번의 거짓말 탐지기조사까지 받고 나서야 무죄를 인정받을수 있었다. 무죄를 선고했던 1심 판사는 판결을 낭독한뒤 나에게 “법적으로는 무죄라 판단하지만 도덕적으로 당신은 유죄”라며 편견의 서슬퍼런 칼날을 내 가슴에 서슴없이 쑤셔박았다. “오죽하면 순진한 상인들이 무고까지 했겠냐”는게 이유였다.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는 나의 변호사를 만나 자신은 100% 유죄를 확신한다며 “그자의 얼굴을 보면 범인임이 확실하다”고 항소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천년전에 사라진줄 알았던 궁예의 관심법은 그렇게 권력의 뒤뜰에서 무성히 자라고 자라 내게까지 독기를 뿜어댔다. 야간이라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비디오 테이프를 수십번 돌려가며 겨우 확인한 증거가 없었다면 나는 꼼짝없이 범죄자가 되었을 것이다. “열명의 도둑을 놓치더라도 한명의 억울한 피의자를 만들지 않는다”는 유명한 법언은 그저 책에나 존재했다. 민주노총 상근자라는 직업과 얼굴, 이 두가지 정보만으로도 판사, 검사 모두 내가 범인임을 확신했다. 이른바 ‘태도휴리스틱’이 작동한 것이다. 나로서는 들춰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던 그 두터운 육법전서에 통달한 분들이 그렇게 쉽게 허술한 편견에 갇혔다는 것이 여전히 신기할 따름이다.

 

‘사고의 지름길’ 휴리스틱은 빠르고 편한 길이긴 하지만 종종 이렇게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낭떠러지로 몰아넣기도 한다. 잘못된 휴리스틱 사용이 사회적으로 고착되면 편견이 되고 그 편견은 차별과 탄압의 날선 무기가 된다. 얼굴만 봐도 범인인지 아닌지 구분가능한 능력자 검사들에게 노동조합 조합원이란 신분은 이미 범죄의 확실한 증거이다. 무고를 당한 억울한 사람더러 “당신은 도덕적으로 유죄”라고 당당히 선고할수 있는 판사들에게 파업은 무조건 처벌해야 마땅한 범죄행위에 불과하다.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는 인류의 뇌는 아직 오류투성이 휴리스틱수준밖에 진화하지 못했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법치는 천년전의 관심법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법을 제대로 운용할 책임이 있는 자들의 오만한 편견과 그것을 통해 유지되는 차별과 착취의 구조탓이다. 그것이 오늘도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이 법적으로 보장된 최소한의 권리라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걸고 싸워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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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8 14:16 2011/12/18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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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장 - 2011/12/18 14:15

최근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권리가 ‘지나치게 신장’되었다는 주장들이 심심찮게 들린다. ‘여존남비’니 ‘보슬아치’ 따위의 단어들이 인터넷상에 차고 넘친다. 과연 그러한가? 남성의 노동과 여성의 노동은 같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가? 이 사회는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을 남성의 그것과 동일하게 존중하고 있는가?

 

최근 우리 법률원에서 진행중인 직장내 성폭력사건을 한번 보자.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대형 금융권회사의 이야기이다.

 

“회사주최의 산행 뒷풀이 자리에서 K가 신러브샷을 알려주겠다며 손가락을 걸고 술을 마신 뒤에 ‘안주야’라며 갑자기 입을 맞추었습니다. 순식간의 일이라 놀랐지만 그 사람이 윗상사인지라 그냥 웃으면서 분위기를 마무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밖에도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친다든지, 다른 사람과 입맞춰 보라고 강요한다든지 등등의 여러 사례들이 있었다. 제일 상급자인 K가 그러니 다른 자들도 어느틈엔가 ‘자연스럽게’ 그런 행위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문화’처럼 여성들위에 군림했다. 피해를 입은 사람은 한사람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후배들도 지속적으로 그런 일들을 당했고, 그녀는 그런 후배들을 지켜주지 못하는게 미안해 눈물만 흘렸다.

 

가해자 K는 이렇게 얘기한다. “엄한 아버지, 허물없는 오라버니의 마음으로 힘든 격무를 참고 일해준 여직원들에게 친근감을 표시하고 감성터치를 한 부분이 외설적인 부분으로 치환되어 집중 부각된 것일 뿐입니다”. 친근감과 감성터치가 법적인 문제로까지 비화된 이유는 “그녀들 대부분 활달하고 개방적인 성격으로서 성적인 문제에 있어서 보수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신체적 접촉이나 성적인 농담이 당시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으나 나중에 사이가 틀어져 성추행으로 문제삼은 것”이란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그녀는 노동조합의 간부이며, 리더쉽이 강하고 소위 대가 센 여자입니다”. 당시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일인데 사이가 틀어지자 대가 센 노동조합 간부가 성희롱으로 왜곡하고 있어 억울하다는 것이다.

 

신체적 접촉을 당하거나 하도록 요구받는 일이 계속되자 참다못한 누군가가 사내게시판에 익명으로 글을 올렸다. 회사는 감사에 착수했고 K는 징계를 받았다. K는 억울했다. 억울해서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시며 피해 여성노동자들에게 전화를 하여 따졌다. 그녀가 근무하는 사무실에도 쫒아가 볼펜형 녹취기를 보란듯이 꺼내놓고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물론 부하직원인 그녀에게 커피를 타오라고 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한사람씩 따로 만나 “내가 널 이뻐해서 그런 것이니 너는 고소에서 빠져라”고 조언도 했다. 회사 게시판에도 “생을 마감할 각오도 되어 있다”며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했다. 그리고 자신의 명예를 훼손한 자들은 현행법에 따라 7년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질수 있음을 친절히 안내했다. 심지어 조선시대 경국대전까지 인용해가며 옛날같았으면 곤장 100대에 처해질 중범죄임도 상기시켜줬다. 자신은 너무 억울하니까!

 

독일의 페미니스트 알리스 슈바르쳐는 자신의 책 ‘아주 작은 차이’에서 “남성들은 ‘아주 작은 차이’ 때문에 여성들이 그렇게 지독한 고통을 겪는 다는 것을 모른다”고 주장한다. 남성들은 ‘아주 작은 차이’일뿐이라고만 얘기하고 그 작은 차이가 빚어내는 엄청난 결과에 대해서는 침묵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K가 말하지 않고 있는 ‘엄청난 결과’에 대해 들어보자. “무서웠고 남들이 와서 볼에 뽀뽀를 할때 정말 기분이 더러웠다”, “저에게 그런 짓을 했다는 것에 더럽고 창피하고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언제 나타나서 협박을 할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저는 임신한 상태로 이런 일까지 있게되어 너무 정신적으로 힘들고 태아에도 안좋고 요즘 자꾸 악몽도 꿉니다”. 피해 여성노동자들은 이런 엄청난 결과에 여전히 시달리고 있다.

 

양성평등의 문제에 대해 섣불리 “예전보다 나아졌다”는 주장을 하기에 앞서 차별과 성폭력으로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여성들의 호소에 잠시라도 귀 기울여 보자. 그리고 그 목소리앞에 양심으로 대답해보자. 우리는 지금 평등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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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8 14:15 2011/12/18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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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장 - 2011/12/18 14:15

"스스로 자기 목을 베었다가 도로 살아나게 된 한 남자가 교수형에 처해졌소. 자살의 죄목으로 그를 교수형에 처한 거요. 의사가, 그를 교수형에 처하려면 그의 목의 상처가 벌어져 그 틈구멍으로 숨을 쉬게 될 것이므로, 교수형은 불가능하다고 이미 경고했는데도 말이요. 사람들은 의사의 충고엔 귀기울이지 않고서 그 사람을 목 매달았소. 당연히, 그 사람 목의 상처가 당장 벌어져 목을 졸랐는데도 또다시 살아나게 되었소.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시(市) 참사회원을 소집하는 데 시간이 걸렸소. 드디어 참사회원들이 모여, 그 사람 목의 상처난 자리 밑을 꼭꼭 졸라매었소. <그 사람이 마침내 죽을 때까지> 말이요. 오 나의 메리, 이 무슨 놈의 미치광이 사회이며, 어리석은 문명이란 말이요."

 

알프레드 알바레즈가 자신의 책 ‘자살의 연구’에서 인용한 편지글이다. 원글은 E.H Carr의 ‘낭만의 망명객’에 나오는 니콜라스 오가레프(Nicholas Ogarev)의 편지이다. 그리 먼 옛날 중세시대의 일도 아니고 바로 전세기인 20세기 초반의 사건인 것이 놀랍다. 너무 야만적이라 눈살이 찌푸려지는가? 그럼 이런 이야기는 어떤가?

 

택시 노동자인 A씨는 지난해 소속 노조의 위원장에 출마했다. 선거당일 투표에 참가했던 조합원이 기표한 투표용지를 핸드폰 카메라로 찍었던 사실이 발각됐다. A씨는 선거관리위원회에 가서 부정선거 우려가 있다며 항의했으나 선관위는 별 문제가 없다며 투표강행 방침을 밝혔다. 기표된 자신의 투표용지를 촬영하는 행위는 IT강국 대한민국에서 최근 유행하는 부정투표의 신종사례이다. 몇몇 사업장에서 회사쪽이 노동조합의 선거에 지배개입하기 위해 누구에게 투표했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사용하여 세간에 유명해졌다. 후보자인 A씨로서는 당연히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선관위는 A씨의 이의를 묵살했다. A씨는 선관위 사무실을 나와 회사 근처의 페인트가게에 가서 시너 0.5ℓ를 구입했다. 다시 철물점에 들러 재봉틀용 기름통 6개를 구입한뒤 시너를 이 통들에 나누어 채우고 선관위 사무실로 돌아갔다. 선관위 사무실에서 기름통 2개분량의 시너를 자신의 머리에 뿌리고 분신을 시도하였으나 주변의 사람들이 막아 다행히 사고는 벌어지지 않았다. A씨는 어떻게 되었을까?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A씨를 연행한뒤, ‘살인미수’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A씨가 “죽여버리겠다”며 상대후보에게 신너를 뿌리고 불을 지르려고 했다는게 구속영장상 기재된 범죄사실이다. ‘민주노조’를 만들어 보려고 선거에 출마했지만 그 소박한 꿈이 부정선거로 인해 좌절되자 분신이라도 하고 싶었던 A씨가 갑자기 살인미수범으로 둔갑한 것이다. 증거불충분등의 사유로 구속영장은 기각되었다. 검찰은 죄목을 ‘현주건조물방화미수’로 바꾸었다. 피의자, 피해자 누구도 듣지 못했고 유일하게 검찰의 영장청구서에만 존재했던 “죽여버리겠다”는 얘기는 이제 사라졌다. 아마도 검찰과 경찰의 귀에만 환청으로 들렸던 모양이다. A씨는 법정에서 자신의 절박했던 심정을 절절히 호소하며 선처를 구했다. 그러나 법원은 A씨가 현주건조물방화미수죄를 저질렀다며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110여년전 영국에서 벌어졌던 일과 2010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사건 사이에 차이가 느껴지는가? 사람에 따라 다르게 판단할수 있겠지만, 나에겐 눈살이 찌푸려질만큼 야만스럽게 느껴지는건 동일했다.

 

대한민국의 또다른 이름은 ‘자살공화국’이다. 한국에서는 30분에 한명꼴로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고 있고, 자살율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를 비롯해서 생존권을 빼앗긴 수많은 노동자들도 죽음을 택하고 있다. 이런 암울한 현실에서 법과 정의는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 ‘MB정권은 중도실용’이라며 친정부적 행각을 보여 지금은 많은 이들의 지탄을 받고 있지만 한때 나름 진보적인 작가였던 소설가 황석영. 그는 예전 자신의 소설 ‘아우를 위하여’를 통해 “이 겨울에 한사람의 거지가 얼어죽어도 그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제몸에 시너를 끼얹고 죽겠다고 할만큼 절망에 빠진 한사람의 노동자를 위무하기는 커녕 온갖 법조문을 들이대며 처벌하겠다고 덤비는 사람들이 한번쯤 가슴깊이 음미해 보아야할 문장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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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8 14:15 2011/12/18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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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 2011/12/15 20:18

* 땅을 떠나 우주의 무중력상태에서 생활하면

  근육이 소실되기 시작하고,

  뼈의 밀도가 낮아진다.

  때문에 우주 비행사들은

  우주선안에서 틈만나면 열심히 운동을 한다.

 

* 깊고 차가운 물, 물살이 센 곳에서 사는 물고기의 육질은 단단하다.

  반대로

  깊지 않고 따뜻한 물, 물살의 세기가 그리 크지 않은 곳의 물고기는

  육질이 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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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5 20:18 2011/12/1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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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아둘 글 - 2011/12/01 16:30

The cruelest prison is the one we build for ourselves out of fear and regret.

가장 끔찍한 감옥은 우리 스스로 두려움과 후회로 세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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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1 16:30 2011/12/01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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