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아둘 글 - 2007/08/15 01:50

 

50대 후반의 어머니가 서른이 다 된 아들에게 이야기한다.

“너, 사귀는 여자가 있는데 왜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지?”

“어머니, 그 애 아직 이십대 초에요. 아직 어려요. 그녀도 사람 사귈 기회를 가져야죠.”

어머니가 듣고 놀란다. “그러다가 그 애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어쩌려고 그러니?”

“어머니, 그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그야 그의 선택이죠. 저는 그 선택을 방해하지 않아야죠.”

그 어머니는 놀란다. 그 기회를 갖게 하는 것. 이것이 관용이라는 것이다. 옛날 같으면 애인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배신이고 복수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울고불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자식은 어머니 세상하고는 다른, 더 나은 세상을 대비하고 있구나 하고 감탄한다.


여러 사람을 사귄다는 것. 그건 여러 사람이라는 다양성을 전제로 한다. 그 다양성이 확보되어야만 선택이라는 것이 가능하다. 동질적인 것만, 일체적인 것만 있다면 선택의 여지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을 존중하자면 관용이 관습으로 되어야 한다. 우리가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고 선택을 중요시하자면 그 차이를 감내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 감내에서 관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옛날에 애인이 ‘배신’했다면 두 사람은 서로 그 사랑의 고귀한 가치를 경험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평생 만나지 못할 불구대천지원수로 되곤 했다. 이제 이 아들 세계는 ‘울고불고 할’ 그런 사랑이 아니라 더욱 관용이 바탕이 되는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장한다. 이제 ‘울고불고 하지 말자.’

김진균 ‘불나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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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15 01:50 2007/08/15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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