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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고등학생시절부터였다. TV과외 대신 틈틈이 봤던 다큐멘터리에 재미를 느끼다 좀 더 지나서야 더 많은 형태의 다큐멘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다큐멘터리 제목인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처럼 많은 것들이 TV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즈음 나에게 다큐멘터리는 세상을 이해하는 텍스트이면서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파장이었다.
광화문 네거리의 미디액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인권영화제와 미디액트가 사전 제작을 지원해 준 옴니버스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되면서부터다. 당시 편집 장비가 없던 나는 같이 작업한 감독들과 편집실에서 며칠씩 기거하며 작업을 했는데 덕분에 처음하는 다큐멘터리 제작의 두려움을 넘을 수 있었다. 아직도 그 편집실 구조가 기억에 난다. 이후부터 미디액트는 독립다큐멘터리를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내게 좀 긴밀한 공간이 되었다. 작업 때 마다 찾았던 녹음실, 차근차근 쌓여 가는 스텝들의 경험을 나눌 때의 즐거움은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주노 동자에 대한 다큐멘터리 이후의 일은 내게 참 중요한 분기점을 만들어줬다. 처음 장편으로 이주노동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나서 마음이 허했다. 다큐멘터리 제작은 끝났지만 뭔가 계속 이주노동자와 같이 할 것이 필요했다. 그때 시작한 것이 미디어 교육이다. 조금씩 더워지는 날씨와 함께 조금씩 지쳐가는 이주노동자 명동성당 농성단과 미디어교육을 진행하게 되는데 그때도 미디액트가 함께 했다. 농성단에 맞는 교안을 만들고 장비를 실어 나르고 했던 기억. 그 이 후로 미디어교육을 해오지만 그 때 교육과정에서 만들었던 영상은 잊히지 않는다.
미디어교육이 끝날 때 즈음 이주노동자들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시작한 인터뷰프로젝트도 미디액트에서 진행됐다. 많은 스텝들과 감독들이 참여한 프로젝트는 이주노동자 들의 안전과 활동을 위해 한밤중에 진행됐다. 그해 여름밤은 미디액트에서 촬영한 기억으로 가득하다. 많은 사람들이 촬영이 끝나고 첫차가 다닐 때까지 기다리며 보냈던 미디액트 로비, 회의를 했던 틈새 공간들, 그리고 한 여름 밤의 소나기 냄새. 기억들이 쏟아지는 쌀알처럼 자잘하게 들어찬다.
그리고 우연히 다큐멘터리 강의를 맡으면서 좋아하는 다큐멘터리 공부도 하고 수강생 사는 이야기도 들으면서 다큐멘터리에 대한 수다를 실컷 떨면서 좋은 인연들을 만들기도 했다.
이리 주저리주저리 미디액트와의 인연을 나열하는 것은 제작을 하고 연대활동을 하고 다큐멘터리 공부를 지속하게 해준 미디액트의 역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 역할 덕분에 나는 꿈을 꾸물꾸물 피우며 내 시간을 촘촘하게 채울 수 있었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다. 그 시간이 내게만 소중하겠나? 그 공간을 지나쳤을 많은 이들이 그만큼 소중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올 많은 이들의 시간도 분명 소중했을 것이다. 그런데 형식적인 공모제로 미디액트와 인디스페스의 운영권을 빼앗아 전리품인 양 권력의 무리들에게 나눠지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황당하다 못해 분노가 인다. 그 많은 경험들을, 그리고 앞으로 있을 많은 경험들을 이제는 할 수 없다는 것이 화가 난다. 어떤 사업인지도 모르고 어떤 철학을 가지고 해야 하는 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리를 틀고 있는 이상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의 꿈이, 생활이, 시간이 짓밟힐 것이다. 그 고통을 당해내야 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갑갑해 온다.
주현숙 (독립영화감독)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77일 투쟁백서 『해고는 살인이다』. 지난 달 한 노동자가 이 책을 보면서 눈물 흘리는 것을 본 일이 있다. 그 노동자는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평택에 가보지 못했던 동지였다. 부끄러움 때문이 었을까?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기 때문 이었을까? 그 동지는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가방 속 깊은 곳에 가지고 다니며 화보를 들쳐본다.
노동자들에게 공장은 산업화의 원동력도, 선진국에 대한 열망도 아니다. 노동자에게 공장은 한 밥상을 놓고 삶을 이어가는 공동체의 젖줄이자,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아이 들을 보듬고 교육시킬 수 있도록 해주는 현장, 땀흘리며 족구 한판 벌이고 막걸리잔 나눠 마시는 우정의 공간이다. 그런 공간에서 별안간 1,000여 명의 노동자가 내몰렸다. 쌍용자동차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구조조정 한파가 닥친 금호타이어, 한진중공업 등 전국의 금속사업장에서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옥쇄파업 77일 동안 현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입사 후 지금껏 현장에서 동고동락했던 형, 동생들이 정리해고자와 비해고자로 갈렸다. 회사 경영이 어려워 불안감이 돌 때 여행을 함께 가 “어떻게 되더라도 열심히 살자”던 형님은 사측에 동원돼 구사대가 되었다. 집안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누구보다 제일 먼저 달려오던 아우는 정리해고자가 되어 도장공장 옥쇄파업 현장에 짐을 싸들고 들어갔다. 아래 윗집 김치도 같이 담그던 가족들도 갈렸다. 가족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전국을 눈물 바람으로 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측이 나오라고 종용해 관제데모에 동원된 가족들도 있었다. 아이들 교실에서도 “니네 아버지 짤렸지”, “니네 아버지 같은 사람들 때문에 경제가 어려워 진대 ”는 친구들의 말에 깊은 상처를 받은 아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77일 동안 공장 안팎에서 노동자들은 그리고 가족들은 정리해고를 막아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도장 공장을 점거한 옥쇄파업 노동자들, 70미터 상공 굴뚝 농성자들, 정당과 종교단체를 돌며 눈물로 호소했던 가족대책위, 원하청 연대를 하며 옥쇄파업에 동참한 비정규직노동자들. 이 책은 이러한 노동자들의 투쟁과 눈물, 삶과 희망, 그리고 마침내 다다른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잘 담아내고 있다. 모든 것을 걸고 싸웠던 노동자들의 기록이 여기에 있다.
이 책은 노조 소식지, 각종 정책자료, 사업보고서, 언론 기사 모음, 사진, 동영상, 회의자료, 회의록, 각종 교안, 공문, 홈페이지 게시판 의견, 파업 프로그램 등을 수집한 것을 기초로 집필했다. 2개월에 걸친 분류 작업을 통해 17권의 ‘쌍용자동차지부 투쟁자료집’을 엮고 그걸 초석으로 삼아 다시 1권의 백서로 엮은 것이다. 자료로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조합원 17명의 구술과 4명의 연대단위 면접, 조합원 13명의 서면질의와 면담, 한상균 지부장의 서면질의도 진행했다고 한다.
역사는 가진 자의 역사고 힘 있는 자들의 역사다. 자본이 쓴 역사가 한국사고, 세계사다. 노동자들의 기록은 지워지고 사라졌다. 그 기록을, 역사를 스스로 쓰지 않으면 우리 노동자들이 목숨 걸고 투쟁했던 기억은 말살된다.『해고는 살인이다』가 소중한 이유는 그래서다. 한상균 지부장은 옥중에서 이렇게 썼다. “산 자도, 죽은 자도, 구속자도, 징 계자도, 희망퇴직자도 어떤 위치에 있건 여전히 노동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을 날이 금세 올 것입니다.” 그걸 깨닫게 만드는 기록, 여기『해고는 살인이다』가 있다.
김대영 (울산 금속노동자)
가장 소외된 자들의 혁명성
박종필 감독은 장애인과 홈리스 운동에 오랫동안 결합하며 이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 왔다. 박종필 감독에게 빈곤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 했는데, 너무 바빠서 시간 잡기가 힘들었다. 지방출장 다녀오는 사람을 새벽에 만나고 보니 자연스럽게 취중 인터뷰가 됐다.
장애인과 홈리스 인권에 대한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학생 때 그림을 그렸는데, 내 그림이 화랑에 걸리면 택시 운전하는 아버지가 내 그림을 향유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 때부터 빈곤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 영상 시작하면서 빈곤 문제에 대해 소소한 작업을 하다가 IMF 구제금융 시대 때 노숙인 작업을 했다. 노동에 대한 영화도 하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장애인 노동권에 대해 관심이 갔다. 장애인 단체 행사나 토론회 같은 데 쫓아다니다가, 마로니에 공원에서 에바다 투쟁 1,000일 문화제를 접하고 에바다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난 제도 언론과 주류 미디어의 문제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한편 거기에 길들여진 상태였던 것이다. 당시 대안 미디어가 별로 없는 상태에서 에바다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이 없다면 현실을 제대로 볼 방법이 없었다. 아무래도 해결이 안 됐으니 투쟁 문화제를 하는 것이고, 그래서 평택으로 내려갔다. 갔더니 뚜껑이 딱 열렸다. 스스로 반성도 좀 하고.
말 안 듣는다고 두들겨 패서 죽이고, 변사체로 발견됐는데도 법적으로 아무 문제없이 처리되고, 노동 착취는 다반사로 일어나고, 장애인에게 쓸 돈을 착복 하는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거지. 그런 과정을 담아서 문화제에 상영했지만, 완성도가 있거나 깊이가 있는 작업은 아니었다. 자족적인 영상물로 끝낼 수 없어 깊이 결합하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장애인 운동을 하는 분들과 관계를 유지했고, 이동권 투쟁이 터지면 또 결합하고, 중간 중간에 홈리스 운동과 결합했다.
작년에 홈리스 행동 주점에 갔다가 뒤풀이까지 따라갔는데, 난 그 때가 홈리스들과 첫 만남이었다. 재밌는 자리였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안 나는 냄새를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그게 어렵더라. 일단 홈리스들과 함께 활동하려면 그런 걸 재껴야 할텐데?
맞다. 그것만 재끼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다. 처음에 그들과 어울리면서 고민이 심했다. 당시에 만났던 분들 중에서 노숙을 청산한 분이 없었고, 거의 거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 분들 술을 엄청 마셔댔다. 사실 당시에 일을 찾으면 없진 않았지만 임금이 너무 적었다. 노가다 나가면 거리 노숙은 안해도 쪽방이나 여인숙에서 잘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을 깨기가 참 힘들었다. 내가 몰랐다. 그런데 그 분들이 왜 그렇게 사냐면, 대부분 저학력이고 불안정한 가족관계에 처하다 보니, 주위에 도움받을 길이 거의 없다. 자본주의에서 평가되는 값싼 노동력 말고는 없다. 아무리 뼈빠지게 일해봐야 쪽방이란 걸 충분히 경험한 분들이라 노동에 대한 희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분들 참 착하다. 착하지 않았으면 도둑질을 하거나 강도질을 했겠지. 어쨌든 자본주의에 희망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걸 몸으로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희망없는 현실을 잊고 싶어서 술과 담배에 찌들어 내일이 없이 사는 거지.
그런 점에서 장애인 운동도 비슷하다. 70년대 일본의 푸른 잔디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장애인의 신체성 자체가 이미 자본주의를 거부하고 있다.” 장애인의 노동력은 자본가의 입장에서 별로 착취할 게 없잖아? 홈리스나 장애인이나 같은 거지.
그런데 난 이 희망없음에서 희망이 보인다. 상대적이지만 그들은 더 인간적이야. 물질세계에 관련된 욕망과 목적이 약하고 그러다보니 사람에 대한 애정이 더 큰 거 같애.
그러면 우리가 구체적인 그림은 못 그리더라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사회의 소유관계와 분배문제 같은 걸 상상하잖아? 그런 사회라면, 예를 들어 삼성맨하고 홈리스하고 누가 더 잘 적응할까? 홈리스들이?
어. 당연히. 속된 표현일 수 있는데, 가진 게 없을수록 자유로운 거야.
흔히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란 말을 하잖아? 듣다 보니 그런 느낌이 드는데, 한편으로 법 없이도 살 사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바보의 전형이기도 한거 같아 아이러니하네. 근데, 그 분들의 준법의식(?)은 어때?
기득권 세력이 만들어 낸 법에 기득권은 자유롭잖아? 사회구조나 법과 관련해서 저학력이고 착한 사람들이라 법에 자유롭다기 보다는 그냥 법을 거부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래서 노숙을 하는 거지.
근데 이 정도 하면 반 쯤 했나?
아 몰라요. 술 마시다 엉뚱한 이야기로 빠진 것 같기도 해. 그럼 본론으로 돌아가서, 내가 묻고 싶은 건, 여기 저기 다니다 보면 운동권의 인권 감수성도 영 형편없을 때가 많아. 공식적인 발언이나 연설 듣다가 손발이 오그라들 때가 자주 있거든. 그 쪽 전문가로서 운동권은 어때?
어디? 사노준?
이웃까지 모두 다. 그리고 사회주의 운동과 장애인, 홈리스 운동이 어떻게 결합할 수 있을까?
인권 감수성의 필요성을 모르나? 알면서 못할 수 있겠지. 사회주의자, 좌파 그러면 이성의 화신이란 느낌이 들어. 사람을 움직이는 건 가슴인 거 같은데. 이성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에서 가슴만으로도 사람이 움직이진 않지만, 이성으로 안다면 가슴이 동해야 사람이 변하는 거 아닐까? 그리고 사람은 충돌이 있어야 변하잖아? 난 작업하며 느끼는 게, “충돌없이 변화없다”야. 아, 이런 고민은 힘들어! 내 일상과 다른 것들을 학습했지만, 현실에서는 다른 상황을 만나게 돼. 그걸 연결하는 것도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지. 이론적으로 자본주의가 어떻고 저떻고 하는 것 보다 삶 속에서 고통받고 희망을 잃으며 세상을 바꾸고 싶은 욕구가 더 강해지는 거 같애. 학생 때 학습하며 노동자가 혁명의 주력부대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표현이 지금은 부담스럽고 고민돼. 그래도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희망을 찾는 나는 지금 무지 행복해.
이 신문 “문제는 자본주의다” 자본주의가 끔찍하지만, 그걸 느끼는 건 우리가 자본주의에 발을 딛고 있기 때문이겠지. 사회주의 운동이 공허하지 않으려면, 자본주의에 거부당했거나, 자본주의를 거부한 장애인과 홈리스들을 혁명의 주체로 함께 투쟁하는 거겠지. 어떻게 함께 할까? 하여간 공중부양을 할 순 없잖아?
문화예술위원회의 혼란
문광부 소속 문화예술위는 이상한 이중권력 상태다. 노무현 전 대통령 때 취임한 김정헌 위원장이 이명박과 유인촌에게 해임됐다가 지난달 법원에서 해임 효력정지 결정을 받아 다시 문화예술위원회에 출근하면서 두 명의 위원장이 동거하게 된 것이다. 이 혼란에 책임있는 문광부 장관 유인촌은 “재미있지 않겠어?”란 무책임한 발언을 했다. 국가 권력이 스스로 무능함을 시인하는 모습이 재밌는 건 사실이지만, 이 재미는 문화적으로 상당히 천박하다.
문화예술위는 국가, 지역, 계급, 계층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공공의 영역으로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도록 문화예술인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기관이다. 모든 국가 기관이 인민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더이상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문화예술은 정치권력의 문제로만 볼 수 없는 영역이다. 여기에 어떤 정치가 관계하느냐가 문제다. ‘어떤’은 철학의 문제다.
이명박과 유인촌의 문화예술
노무현이 임명한 김정헌 위원장이 MB와 유인촌의 코드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표적 감사로 해임됐다고 알려져 있다. 그 코드란 무엇일까? 다른 위원장인 오광수를 보면 안다. 문화예술위가 지원하는 문화예술인과 문화예술단체에 지원 조건을 내건다. 데모하지 말 것. 데모에 나간 적 있거나 데모할 성향의 사람이나 단체에는 이미 지원을 다 끊었다. 문화예술은 정치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 이명박과 유인촌의 코드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문화예술
거슬러 올라가면, 문화예술이 정치에 길들여진 건 김대중과 노무현 시절이다. 문화예술을 끔찍히 사랑했던 김대중과 노무현은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오랜 군사 정권에 숨죽이던 재야 문화예술인들을 양지로 불러들였던 것이다. 문화예술을 정치에 복종시키진 않았지만, 정치에 길들였다. 문화예술의 정신과 철학이 없어지진 않았지만 약해졌다. 지원없이 문화예술하려니 나이도 들고 힘도 들어 데모 안하고 지원받는 문화예술인들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고, 그건 김대중과 노무현의 코드다.
그러면 사회주의 문화예술은?
역사적 사회주의의 경험에서 초기 혁명기에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혁명을 지지하고 열광했다. 사회주의 정치가 문화예술을 길들이거나 복종시키려 하기 전에 먼저 지지하고 열광했던 그 한때는 좋은 시절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오래 가진 못했다. 소설 태백산맥에서 김범우가 인민군 종군기자였다가 중도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당이 강요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는 사회주의 정치도 김대중과 노무현의 정치, 이명박과 유인촌의 정치와 다르지 않았다.
문화예술의 정치
김정헌 위원장이 법원으로부터 해임 효력정지 결정을 받은 것과, 그래서 다시 출근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다른 차원의 문제다. 법원의 결정은 이명박과 유인촌의 정치가 패배했다는 의미지만, 만신창이가 된 문화예술위와 김정헌 위원장이 복원된 것은 아니다. 다시 출근하는 것은 그가 앞으로 문화예술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를 떠나 문화예술인의 정치를 시작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문화예술이 더이상 정치에 휘둘리게 둘 수 없다는 표현이다.
정치가 문화예술하는 것과 문화예술이 정치하는 것의 차이다. 러시아 혁명기에 볼셰비키에 가담했던 시인 마야꼬프스키는 혁명기에 이런 시를 남겼다. “러시아의 정치여, 영원하라! 예술이여, 정치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워라!” 그리고 그는 예술의 자유가 사라졌을 때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길, 자살을 선택했다.
세월이 많이 흘러 21세기가 되어 사회주의자들도 문화예술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졌다. 사회주의 정치가 어떻게 문화예술할 것인지의 단계를 뛰어 넘어야 한다. 이제 문화예술을 배우고 익혀 문화예술의 정치를 시작해야 한다. 문화예술가를 죽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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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액트 수강생인 김태화님이 직접 만든 가툰이다.
문광부 소속 영화진흥위원회는 그냥 이명박, 유인촌 코드다. (사)독립영화협회에서 영진위에 위탁받아 운영했던 미디액트와 독립영화전용관을 이렇게 날리는데 2년 걸렸다. 이명박이 당선될 때부터 이런 결과를 걱정했고, 어떻게든 피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아쉬운 점은 이런 결과를 피하려고 노력하는 2년 동안 (사)독립영화협회 관계자들은 너무 눈치만 본 건 아니었나 싶다. 지금 미디액트 홈페이지에는 수많은 수강생과 회원들로부터 탈퇴와 개인 정보 삭제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새 사업자도 회원들을 얻을 수 없지만, 옛 미디액트도 회원들을 잃게 되었다.
문화예술 운동을 공공영역으로 확장했던 미디어 활동가들의 투쟁의 경험과 실력은 여기까지였다. 그러나 끝나지 않았다. 다음 라운드를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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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슐러 K. 르 귄 읽기 2
단편집 ‘바람의 열두 방향’의 한국어판과 영어 판. 이 단편집의 첫 작품 ‘셈레이의 목걸이’는 헤인 에큐먼 시리즈를 탄생시킨 짧은 전설이다. 표지 그림은 셈레이가 살던 은하 제8지역, No. 62 : 포말하우트 II의 바람말과 셈레이로 추정된다. 이 행성은 나중에 다음 작품에서 그 제목인 ‘로케넌의 세계’란 이름을 얻는다.
다르게 흐르는 시간
책을 펴면 당신이 전혀 경험하지 못한 다른 환경의 행성을 본다. 거기는 공전과 자전의 주기가 지구와 다르기 때문에 시간의 느낌이 전혀 다르다. 그래서 한동안 시차적응기가 필요하다. 작가가 시차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줄 때도 있지만, 미지를 탐험할 때 안내자에게 너무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시간 개념이 다르면 생각도 분명히 다를 것이란 걸 추리할 수 있다. 단지 관찰의 목적만으로 여행할 거면 그 정도만 유념해도 되겠지만, 다른 행성의 주민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그들 방식으로 생각하는 연습도 필요할 것이다. 권리의식이나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라면 이 모험에서 재미보다는 짜증을 더 많이 느낄 것이다. 르 귄의 문장은 그리 쉽게 재미를 선사하진 않는다. 대신 다른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을 학습시켜 준다.
단순한 서사, 깊은 사색
이 시리즈의 주인공들은 자신도 모르고 독자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적과 대결하기 위해(로케넌의 세계), 생존을 위해(유배 행성), 자아를 찾아(환영의 도시), 연맹을 맺기 위해(어둠의 왼손), 위기를 극복하려고(빼앗긴 자들) 떠난다. 이들의 여행은 대단히 고단하다. 자신이 모르는 곳을 여행하기 때문이다. 그 여행을 읽는 독자도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만큼 고단하다.
그런데 이 여행은 의외로 단순하다. 외계인과 결투하거나 괴물에게 쫓기거나 하는 스펙터클한 모험이 펼쳐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도 이 여행이 흥미진진한 것은 모르는 환경을 익히며 알아가는 지적인 과정의 모험이기 때문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의 자아와 여행 속의 자아가 서로 대립하는 모험이다. 이전의 자아는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것을 잃고, 여행 속의 자아는 뭔가를 얻어간다. 주인공의 여행은 주인공을 서서히 변화시킨다. 그것을 읽는 독자가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는 만큼 독자도 주인공과 같은 변화를 경험할 것이다. 그저 관찰만 해도 상관은 없다. 어떤 소설이나 다 마찬가지 아니냐고 물으면 물론 그렇다. 그러나 다른 어떤 소설들과 차이는 그 깊이가 다르다는 점이다.
소통의 방법 찾기
독자는 여행이 시작되고 주인공과 마음의 대화를 나눌 수 있거나, 스스로 주인공이 되었다면, 이제 새로운 동반자와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의 단계로 넘어간다. 주인공과 여행의 동반자는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왔다. 말은 통하지만 그 생각이 통한다고 볼 순 없다. 시차적응기 같은 한동안의 적응기가 필요하다. 그 시간이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다. 대화로는 어려워 텔레파시를 쓰기도 한다. 그러나 텔레파시 또한 그들이 살아온 문화를 극복하진 못한다. 그래서 르 귄은 침묵을 권한다. 상대의 말을 들으려면 일단 침묵하라고 한다. 그런데 둘 다 침묵하면 어떻게 들을까? 참 답답해지기도 한다. 그렇게 여행은 계속된다. 표정과 손짓 발짓에서 상대를 차츰 알아간다. 오랜 침묵 끝에 서로의 대화는 그 전의 대화보다 좀 더 깊은 공감대를 만든다. 작은 공감대가 형성되면 이제 좀 더 빠른 진전을 경험한다. 이 소중한 경험은 큰 기쁨을 느끼게 만든다. 독자와 주인공과 동반자는 서서히 소통의 방법을 찾는다. 이 정도 되면 긴 여행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끝맺음 할 것인지 너무나 궁금한 나머지 책을 놓을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다.
한편 각 편은 르 귄이 저작한 순서대로 보일듯 말듯 한 희미한 끈으로 연결되어있지만, 각 편은 모두 독립적이다. 그래서 어느 편으로 읽기를 시작해도 상관은 없지만, 로케넌의 세계에서 배운 여행의 기술은 유배 행성의 여행에서 유용하게 쓰인다. 유배행성에서 배운 여행 기술은 환영의 도시에서 유용하게 쓰인다. 그런 식이기 때문에 저작 순으로 읽으면 여행을 따라 잡는데 힘이 적게 들고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성숙의 대가
이제 여행의 마지막 단계다. 로케넌은 적으로부터 행성을 지킨다. 유배자들은 멸족을 면하고, 젊은 왕자와 인류는 적의 지배에서 해방된다. 에큐멘의 대사는 겨울 행성과 연맹을 체결한다. 쌍둥이 행성의 물리학자는 두 행성의 유대를 형성하고 사랑하는 동반자에게 돌아간다. 좋은 결말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아주 큰 희생을 치렀거나, 희생을 감당해야 한다. 적이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은 여행에서 동반자와 진정한 소통을 통해 이룬 유대의 힘이다.
로케넌은 낯선 행성의 여행에서 얻은 텔레파시 능력에 힘입어, 그리고 빛보다 빠른 통신기 앤서블로 에큐멘 본부에 사격지원을 요청하자 곧바로 빛보다 빠른 무기가 적들의 기지를 파괴한다. 본부에서 그 행성으로 곧바로 빛의 속도로 나는 우주선이 하루 만에 그 행성으로 날아갔지만, 로케넌은 이미 죽은 지 몇 십 년이 흘렀고, 행성의 원주민들은 그곳을 로케넌의 세계라 불렀다. 빛의 속도로 나는 우주선이 있지만, 그보다 더 광대한 우주에서 한 인간의 시간은 너무나 짧다. 인류의 유대를 위해 에큐멘의 대사들은 자신의 짧은 시간을 기꺼이 희생한다. 참 까마득하고 아스라한 시간의 이야기다.
지금은 지구의 반대편에 불과 하루면 날아갈 수 있다. 불과 500년 전에는 수년간 목숨 걸고 항해했다. 인류는 그렇게 어렵게 다른 문화와 관계를 맺으며 변화해 왔다. 꼭 좋은 방향의 변화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변화는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헤인 에큐멘 시리즈의 기나긴 여행과 성숙의 대가는 어스시의 마법사 시리즈에서 마법의 균형으로 표현된다. 다음 호에 계속
문화 또는 문명의 충돌
인류의 과학기술은 우주진출을 이미 시작했다. 아직 알 수 없지만, 곧 외계인과 조우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이 넓은 우주에 지구에만 생명체가 있다는 믿음은 이제 종교적 맹신으로 치부된다. 수많은 소설과 영화와 드라마에 심심찮게 대중을 심각하게 만드는 외계인과 조우에 대한 기대와 걱정은 인류의 수많은 문명과 문화가 충돌한 경험 때문일 것이다. 자본은 완전히 세계화되어 지구 어느 오지에도 그 영향력을 행사하며 심각한 충돌을 만들고 있다. 그 양상은 다르지만 역사시대 이전부터 좁게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 넓게는 공동체들 사이에 충돌해왔다. 한편 충돌의 역사는 서서히 거대한 공동체를 만들며 거대한 공동체 문화를 만들기도 했다. 이상적인 공동체를 향한 인류 정신의 최고 단계를 아직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이미 공산주의라는 상당히 구체적인 이상을 다양한 방법으로 실험했고 여전히 실천하고 있다. 그 변화가 너무나 더디게 보이기도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변화의 방향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염세적인 인간들의 디스토피아식 저주 또한 어느 정도는 좋은 세계를 위한 경고와 계몽의 메세지로 읽을 수 있다. 인류는 어렵지만 서서히 앞으로 나가고 있다고 말하면 막연한 낙관같지만, 대중이 스스로 운명의 주인이 되려는 신념과 노력 또한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이다.
르 귄의 헤인 에큐멘 시리즈는 지금보다 훨씬 앞으로 나간 인류에 대한 상상이다. 그러나 이 상상은 지옥의 현실로부터 출발한다. 르 귄이 살고 있는 지구, 미국,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유럽의 문화, 자신이 공부한 중국의 노자 사상 등이 상상의 재료다. 지금보다 훨씬 앞으로 나간 인류는 어떤 충돌을 경험할까? 개인과 개인의 충돌은 똑같고, 공동체들 간의 충돌은 행성간의 문명 충돌로 표현하고 있다. 행성간 다른 인간 종족의 충돌은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한 다른 문화의 차이보다 훨씬 클 것이다. 이 시리즈는 다른 문화와 문명의 충돌을 어떻게 극복하고 소통하는가의 이야기다.
소통을 위한 기술, 과학과 정신
르 귄은 소통을 위한 과학기술로 빛보다 빠르고 거리를 초월한 실시간의 통신기 앤서블을 발명해낸다. 이 과학기술은 행성간 교류와 발전이라는 인류의 진보에 날개를 달아주지만 르 귄은 인간을 과학기술에만 의존하는 존재로 그리지 않는다. 소통을 위한 인간의 정신적 노력으로 언젠가 텔레파시의 능력을 습득하게 만든다. 말과 문자 언어가 가지는 오해와 한계를 지적하며 정신 그대로를 상대에게 전달하는 능력을 상상한 것이다. 이 정신적 노력이야말로 르 귄이 추구하는 소통의 핵심이다.
한편으로 과학과 정신 두 가지 기술은 악용되기도 한다. 그 기술을 지배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정체불명의 존재를 에큐멘의 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빛보다 빠른 물질의 이동 기술은 메세지 통신이 아니라 파괴를 위한 에너지의 이동 또한 가능케 한다. 텔레파시의 능력도 차원 높은 소통이 아니라 약자의 정신지배를 위해 사용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인류의 과학기술의 이용방법은 에큐멘 보다 정체불명의 적에 가깝다. 첨단 과학은 대중을 지배하려는 자본가 계급의 전유물이며, 약소국을 강탈하려는 제국주의의 무기였다.
다른 종 사이의 소통을 위한 상상은 SF세계의 매우 중요한 요소다. 얼마 전 본 영화 아바타에서는 판도라 행성의 생명체에 ‘교감’을 위한 촉수모양의 감각기관을 상상하고 있었다. 인간의 환경파괴를 막아낸 것은 촉수들로 판도라 행성의 모든 생명체가 교감을 나눠 그 감각기관이 없는 인간을 물리친다는 내용이었다. 아바타에서 말하는 ‘교감’의 촉수기관은 대단히 훌륭한 상상이지만, 그 촉수기관으로 관계를 맺은 사이는 주종관계와 소유관계를 형성했다. 약간만 삐딱하게 보면, 판도라의 종족은 만물을 다 따먹고 군림하는 종족이었다. 헤인 에큐멘 시리즈에 등장했다면 분명히 적이었다.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에큐멘의 대사들과 주인공들은 다른 문화와 소통을 위해 끝없는 이해와 노력을 아끼지 않고, 희생도 불사하지만, 약자를 지배하려는 적들에 대해서는 두가지 기술을 무기화해 무자비한 공격을 감행한다. 인류 역사 속의 뛰어난 혁명가들을 연상케하는 대목이다.
현실로 돌아와 지금의 양자물리학은 앤서블 같은 기술이 이론적으로 가능함을 증명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앤서블의 실현은 시간문제다. 텔레파시의 능력은 과학적이라기보다 정신의 영역이다. 대중의 열망이라는 거대한 에너지를 귀신같이 악용하는 기업과 정치인들이 있고, 대중의 열망을 직접민주주의로 실현하려는 사회주의자들도 존재한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대중의 열망이 언어와 이미지라는 데이터로만 파악되지는 않는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마음이고 정신이다. 지배가 아니라 소통을 목적으로 눈과 귀를 열고 마음을 여는 것이 텔레파시의 출발이 아닐까? (다음호에 계속)
12월 13일 오산이주노동자센터 회원의 밤. 지역아동센터 다솜공부방 아이들의 춤공연에 사진을 찍으러 무대 앞으로 모인 엄마들. 오른쪽 끝이 글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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