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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의료수준과 최하의 건강수준의 공존
미국은 세계 최고의 의학 수준을 자랑하는 나라이다. 하얀거탑처럼 국내에서 유행했던 의학드라마에 주인공의 경쟁자로 등장하는 사람은 미국의 대학병원에 있던 교수인 경우가 많고 국내 대학의 교수들도 미국의 대학병원에서 연수하고 온 것을 자신의 경력에 자랑스럽게 소개한다. 그리고 돈이 많은 재벌들은 미국으로 암 치료를 받으러 간다. 얼마전에는 이런 인식에 조응이라도 하듯 스페인의 한 공공연구기관에서 발표한 세계 100대 병원에 미국의 병원이 1위~24위를 전부 차지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 인식에는 학문에 있어서의 사대주의, 영어라는 언어를 자국어로 하는 나라의 기득권, 많은 자본을 바탕으로 의학계의 유명한 논문에 대한 높은 지배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미국이 최첨단 의료 기술의 도입과 실험이 가장 활발한 나라인 것은 사실이다. 의학의 기술적 측면만 놓고 보자면 미국은 세계 최고 수준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미국의 천명당 영아사망률이 6.8명으로 OECD 국가중 27위이고 국민의 15.3%인 4,570만명이 의료보험이 없다. 매년 200만명이 의료비 때문에 파산을 하고 민간의료보험 가입자의 1인당 의료비 지출은 1만 불을 넘는다. 2006년 캐나다의 한 연구소에서 평균 기대여명, 영아 사망률, 각종 암 유병률 등 건강수준과 암이나 심근경색으로 인한 사망과 같은 진료실적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결과 미국은 OECD 국가 중 23위에 불과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경제적, 군사적, 학문적 영향력을 고려하면 어이가 없는 일이다. 게다가 미국은 전체 GDP의 15%이상이 의료비 지출이다. 돈은 OECD 국가 중 최고로 많이 쓰고 있는데 국민들의 건강수준은 거의 최하위라는 것이다. 투자를 많이 하면 성과가 좋아야 하는데 미국의 의료시스템은 돈을 먹는 하마나 다름이 없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오바마의 도전, 공보험 체계의 도입
이러한 기이한 현상의 가장 핵심은 우리나라의 건강보험과 같은 공적 보험체계가 전혀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미국의 독특한 의료보험 체계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오바마가 제시한 의료개혁은 전국민이 의료보험에 가입하는 것을 목표로 진행된다. 민간의료보험과 경쟁할 수 있는 공보험(public option)을 만들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현재 논란의 핵심은 막대한 추가 재원의 문제보다 공보험의 설립 문제이다. 의료 시장에서 돈을 버는 제약회사나 보험사, 병원들은 사실 손해 볼 것이 없다. 공보험 구조만 아니라면 정부에서 나서서 전국민이 의무적으로 민간보험에 가입하도록 해주겠다는 것이 현재의 상원 재정위를 통과한 개혁안이기 때문이다. 보험에 가입할 사람도 많아지고 병원에 찾아와서 약을 처방받는 환자도 많아질 터이니 막대한 재정부담이나 세금의 문제는 사실 본인들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이렇게라도 보험에 가입한다면 병원에 보험이 없어 가보지도 못 하는 사람은 줄어들 것이고 전체 국민의 보건의료 수준이 향상 될 수는 있다. 고비용 고효율의 시스템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사실 오바마는 공보험을 도입하여 그 시장 규모를 키우면서 민간보험을 견제하도록 해 민간보험 스스로가 자정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겠다는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 시점, 재정위를 통과한 안은 이상하게도 전국민 의료보험이 실시되면서 엄청나게 돈을 벌었던 과거 한국의 의사들을 생각나게 할 뿐이다. 물론, 공보험을 도입한다고 해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전국민 의료보험 체계 안에 있지만 보험에 적용이 되지 않는 다양한 검사와 수술을 통해서 돈을 벌고 있는 한국의 병원들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민간보험자본들은 큰 일이라도 난 뜻 난리를 부린다.
의료비 지출의 문제를 넘어 공급의 문제로!
재정위에서 공보험에 대한 조항이 사라진 개혁안이 통과됨으로 인해 오바마의 의료개혁안은 상당한 논란과 갈등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지만 공보험의 체계조차 없던 미국에서 이러한 실험은 의료민영화가 예상되는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공보험의 도입은 의료시장에 정부가 하나의 사업자로 뛰어들어 거대한 보험 자본과 경쟁을 하겠다는 선전포고이다. 이때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그곳이 병원과 제약자본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특성을 가진 의료시장이라는 점이다. 공보험을 아무리 잘 만들어 보장성을 높이고 본인부담금을 최소화한다고 해도 끊임없이 돈을 벌고 싶어하는 병원과 제약자본들은 비싼 신약과 치료 기술로 더욱 더 많은 수익을 챙겨가게 될 것이고 민간보험 회사는 법망을 피해갈 수 있는 교묘하고 비싼 상품들을 내어 놓을 것이다. 이번 개혁안에서 최초에 논의되던 ‘약가 상한제’가 제약회사의 강력한 로비에 밀려 슬그머니 사라진 것만 보더라도 의료 산업을 둘러싼 기업들이 고스란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은 자명해보인다. 오바마 이후의 미국 정부가 이를 통제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 또 다시 그 피해는 고스란히 민중들에게 넘어갈 것이다. 당장의 의료개혁을 통해 일시적으로 국민들의 건강수준을 높일 수는 있겠지만 이윤을 늘리고자 하는 의료산업의 자본들을 통제하지 못 하면 계속 비용을 올라가지만 국민 건강 수준은 오히려 하락하거나 양극화가 더 심해지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
병원이, 제약자본의 성과가 이윤으로 증명되는 세상에서 적정한 양질의 진료는 어려운 일이다. 국가의 보건지표뿐만이 아니라 병원이나 제약회사의 성과의 지표는 돈이 아닌 우리들의 건강과 생명이어야 한다. 밑빠진 독에 물을 계속 부어봤자 소용이 없고 두꺼비가 막아준다고 해도 두꺼비가 죽고나면 다시 물은 샌다. 이런 방법이 아니라 독을 고쳐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양질의 의료는 ‘최고’의 의료나 ‘최신’의 의료를 의미하지 않는다. 최첨단 기술이 아니어도, 비싼 최신의 진단 장비나 치료장비를 사용하지 않아도, 돈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경우가 훨씬 많다. 누구나가 아프면 병원에 가서 적정한 진료를 받을 수 있어야하고 이것이 개인의 기본 생활을 흔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간단한 원칙이다. 일하느라 바빠서 병원을 못 가거나, 병원에 가도 돈이 없어서 의사가 권하는 치료약을 못 먹게 되거나, 보험이 적용이 안 되는 병실료 때문에 병원 근처 여관에서 항암제를 맞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은 의료의 공공성을 강화할 수 있고 의료가 상품으로 거래되는 지금의 공급체계에 대한 저항 없이는 지켜지기 어려운 것임을 다시한번 되새겨야 할 때이다.
핵무기를 줄이는 건 분명히 추상적으로 좋은 일이지만, 절대 못 없앨것이란 건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아프칸 파병 증강이란 구체적인 나쁜일을 저지르고 있다. 의료개혁도 분명힌 선한 의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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