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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11/04
    차라리 하지 말자
    PP
  2. 2009/10/15
    질긴 노동문화, 그 변화와 모색
    PP
  3. 2009/09/07
    문화?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PP
  4. 2009/09/07
    ‘외부세력’과 언어정치
    PP

차라리 하지 말자

관성화된 집회문화
한국이라는 나라는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것 중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것 들이 아주 많은 고약한 나라다. 공식적인 통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시민, 노동, 사회단체 등이 1년에 하는 집회 숫자를 비교해보면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충분히 들 것이다. 왜 그렇게 집회를 많이 하는 걸까? 억울하고, 분해서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고, 권력자들에게 읍소하고, 협박하고, 청원하고, 사정하는 것일 게다. 집회 말고 다른 방법이 없을까?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도 제대로 성숙되지 않은 후진 한국에서는 특별한 방법을 찾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집회공화국이다.
노동단체의 집회는 의례화 되고, 관성화 되어버렸다. 정해진 순서, 의례 하는 행진, 더 이상 긴장감도, 진지함도 없다. 특히 노동절이나 전국노동자대회처럼 대형화 되고 고정된 행사는 더 많은 문제점을 노출한다. 위력적으로 보이기 위해선 많은 숫자를 참가 시키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하는 주최 측은 대대적인 동원령을 내린다. 지도부가 순회를 하기도 한다. 어떤 산별노조는 동원되는 숫자만큼 일당을 챙겨주기도 한다. 그렇게 모인 조합원들이 행사에 녹아들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해의 주요한 이슈나 쟁취할 목표에는 별로 관심도 없다. 집회보다는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옛날 얘기나 하면서 술 한잔 하는 걸 더 원한다. 집회 규모가 점점 커지고 무대가 높아갈 수록 참가자들의 관심은 더 떨어진다.
주최 측은 모처럼 모은 군중들을 이용해서 최대한의 효과를 내려 한다. 언론을 위해서 억지 그림을 만든다. 단체로 만들어 나누어주는 손 피켓은 관례가 되어버렸다. 재미없는 집회를 보완하기 위해, 더 좋은 그림을 만들기 위해 문화선동도 준비한다. 문화선동대는 이것  저것 새로운 것을 선보이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별로 효과가 없다. 조합원들의 눈은 높아져 버렸고, 관심도도 떨어져버렸다. 이젠 문화선동대를 꾸리기도 버거워졌다. 대부분의 집회 주최자들이 문화선동을 잠시 쉬어가는 정도로 생각하는 것도 문제다. 문화는 의미와 가치를 생산하고 정체성을 형성하는 영역이지만 집회 주최자들에게는 이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원래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니까. 

동원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되길 원한다
조합원들은 이젠 예전의 조합원이 아니다. 깃발만 꽂으면 굳은 신념과 의지로 눈을 빛내며 모여들던 예전의 조합원이 아닌 것이다. 세상은 이미 변했고, 신자유주의 정책 속에서 조합원들도 이젠 예전으로 돌아 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이제 그들은 동원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주체가 되길 원한다. 촛불 시위를 봐라. 그들은 스스로 조직하고, 선전하고, 연설하고, 행진 방향도 정한다.
지도부가 주연이 되는 행사는 이젠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 재미없고 식상하다. 지도부만 올라가는 무대, 이제는 신물이 난다. 도대체 집회를 왜 하는지, 요구조건을 관철시키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는지 곰곰이 따져 봐야한다. 다른 방법이 있으면 이제 재미없는 집회는 그만 하자. 화면발을 잘 받는 게 목적이라면 차라리 집회를 하지 말고 그 돈을 가지고 다른 걸 하면 된다. 상상을 초월하는 대형 현수막을 만들어 걸든지, 애드벌룬을 띄우든지, 경비행기를 날리든지, 상징물을 만들어 설치하든지...
 

박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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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긴 노동문화, 그 변화와 모색

[22회 인천노동문화제]

가을로 접어들며 지역마다 지자체와 예총이 주관하는 지역 문화제 또는 예술제를 흔히 볼 수 있다. 지역색이나 전통에 따라 이런 문화제들의 성격은 천차만별이라서 무턱대고 한통속으로 몰아붙일 수는 없지만 그런 문화제들은 대략 구리다. 하지만 인천노동문화제는 그 이름부터 여느 지역문화제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인천노동문화제는 올해 22회를 맞았고, 지난 10월 10일~11일 인천 부평공원에서 ‘이 땅에 우거지고’란 주제로 열렸다.

내부에서 외부로
인천노동문화제가 운동사회의 문화 예술계에서나 문화에 관심있는 노동자들에게는 유명하지만,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겐 생소할지 모르겠다. 동시에 ‘노동문화’ 또는 ‘노동자문화’라는 말조차도 생소할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22돌을 맞이했다는 것은 그만한 저력이 있기에 가능했다. ‘노동’이라는 주제명과 22돌은 민주노조운동과 그 역사를 함께한다는 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것은 인천의 지역성에 기반한 노동운동의 독특한 역사이며, 그 영향은 인천 지역을 넘는 문화운동의 역사이기도 하다.
인천노동문화제란 이름을 쓰기 전에는 1997년까지 가을문화제였다. 현장의 문화패들이 모여 체육대회하고, 장기자랑하는 독자적인 내부 행사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1998년부터 인천노동문화제로 이름을 바꾸고 시민들과 만나기 위해 외부로 방향을 바꾼 것은 당시 민주노조운동이 가진 사회적 힘의 변화와 궤를 같이 한다.

더 넓은 지평으로
인천노동문화제 조직위원회는 크게 민주노총 인천지역본부, 인천노동문화연대, 인천 민예총이라는 3조직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조직위원회 구성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초기의 주요한 동력은 현장의 문화패와 문화단체들이었다. 그러나 노조의 힘도 사회적으로 약화되고, 현장 문화패들도 차츰 사라지는 추세에 인천노동문화제는 내부적인 어려움을 안게 되었다.
올해도 첫날 민주노총 인천본부가 부평공원 근처에서 집회를 한 뒤 집회대오의 집단적 참여가 예정되었지만, 그 집회가 무산되는 바람에 인천지역 노동자들이 참가하는 문화제는 되지 못했다. 이런 분위기는 이미 오래되고 익숙하다. 한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인천노동문화제는 이제 노조의 집회 동원을 통한 연결이 아닌 다른 방식의 연대를 모색하고 있다.
노동운동에서 비정규직 문제가 지금의 중요한 화두이듯이, 노동문화도 정규직 노조의 현장 문화패 보다는 조직되지 않았거나 조직하기 어려운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그리고 다양한 소수자 운동과 소외된 운동의 저변을 넓히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이런 흐름은 한편에서 이야기되는 현장의 노동문화가 사라진다는 우려에 대한 문화운동의 대담한 역공이거나 노동(자)문화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올해 문화제에서도 그러한 단편들을 다각도로 포착할 수 있다. 이미 몇 해 전부터 조직위에서는 그 이름에서 ‘노동’을 대치할 단어를 찾자는 의견도 나왔다고 한다. 내부적인 행사가 외부적인 행사로 탈바꿈하며 이름을 바꿨듯이, 인천노동문화제가 더 넓은 지평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한번 더 이름이 바뀔지도 모르겠다. 이름과 상관없이 실험은 이미 진행중이다. 인천 땅에 이 실험이 어떻게 우거질지 잘 지켜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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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살아있는 풍경 “미래를 돌아보다”
 

재개발로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한 재래시장의 일상 풍경을 담은 사진전. 친숙한 일상모습들로 보이지만 지역공동체 문화의 말살이 전제된 암울함을 함께 읽는다.

 

공연, ‘마리오네따의 역사’
베네수엘라에서 온 극단 Ponix의 공연.
두 사람은 친구로 보였지만, 곧 권력투쟁의 상대가 된다. 여기서 권력은 꼭두각시를 조정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권력관계가 바뀌기도 하지만, 나중엔 조정당하는 꼭두각시가 더 작은 꼭두각시를 조정한다. 이 무서운 이야기를 코믹한 몸짓으로 연기해 많은 웃음과 박수를 받기도 했다.

 

공연, 거리예술단 빵빵유랑버스의 거리공연
환경, 노동, 여성, 이주민의 문제들을 저글링, 타악, 무용, 연극, 국악, 큰 인형(Backparpuppet)극 등을 접목시켜 독특하고 새로운 형태의 거리공연을 시도하고 있다. 운동권 집회문화의 틀을 깨고 직접 거리의 시민을 찾는 실험.

 

참여마당, 도시농업 ‘유기순환 이야기와 상자텃밭 나누기’
퀴즈) 저 근처엔 꾸리꾸리한 냄새가 진동을 했지만, 젊은학생들의 표정이 밝은 이유는?

 

공연, 김중배(현대제철 색소폰 동호회) 색소폰 연주
노동문화제에 웬 뽕짝? 토요일 밤 공원 산책을 나온 노친네들 무척 좋아하셨다. 사실은 남녀노소 다 좋아하더라.

 

공연, 공생을 염원하는 풍물굿
풍물패 더늠, 인하대 청소용역 노동자 풍물패, 서울에서 연대 온 풍물패 터울림 등의 공연으로 22회 인천노동문화제의 막을 내렸다. 한마당 끝날 때마다 땀으로 범벅이 된 풍물패에게 “한판 더 해라”라 “첨부터 다시 해라”고 농을 던지는 것이 죽이려는 것인지, 같이 살자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완전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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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문화 기획자 신유아 인터뷰

 

 

 


 


 

문화?  

 

“어디서 활동하냐” 물어봤을 때, “저 문화연대에 있어요” 이러면 아, 거기? 행사 기획하고 예술가들이 모인 집단 그렇게 생각하는데, 저희가 생각할 때 문화가 아트적인 문화도 있지만 앞에 뭔가를 붙였을 땐 다양한 문화가 나올 수 있어요. 노동문화, 교육문화, 뭐 미디어 문화? 굉장히 다양한 문화가 있자나요. 아저씨 문화 아줌마 문화... 

 


 

 

용산 결합  

 

어느날 아침에 뉴스 속보 딱 한줄 보고 너무 놀란 거에요. 설마 사람이 죽었을 거라 생각을 못했는데, 여기 저기 전화를 막 해 봤죠. 확인이 안되더라구요. 그 때는. 그리고 현장에 먼저 왔거든요. 그 때는 문화일꾼으로서 들어온 게 아니에요. 진짜 감정적인 문제로 들어온 거죠. 이명박이 꿈쩍도 안하면서 점점 늘어지니깐 사람들의 기억속에서도 자꾸 잊혀지고. 이 현장을 좀 더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 때문에 문화일꾼들에게 이래저래 요청을 많이 하게 되는 거죠. 

 

용산은 문화일을 하시는 분들이 다른 현장보다 굉장히 많이 들어와 있어요. 이분들에게 요청할 때, “와서 뭐 해주세요” 라고 요청하지 않구요, “일단 현장에 와 보시고 현장 상황을 알아보시고 기획을 해 주세요” 이렇게 요청을 드렸어요. 그래서 본인들이 기획해서 이렇게 저렇게 하면 좋겠다고 저희에게 역제안을 하시거든요. 그렇게 여기 문화적 분위기가 더 많이 활성화된 거 같아요. 

 


 

 

기억에 남는 기획 

 

일단 최근에 있었던 어린이 그림 그리기 대회가 굉장히 훌륭했어요. 이 공간에 꼬맹이들이 오기가 힘들텐데 부모들이 함께 와서는 저 앞에 글씨 써 있는 거 보고 엄마 여기 경찰이 뭘해? 이렇게 물어봐요. 그러면 엄마가 이 공간에 대한 설명을 해야 되는 거에요. 일단 아이들이 많으니까 사제단도 유가족들도 너무 좋아했고, 길 건너 버스 기다리던 사람들도 꼬맹이들 보러 건너 왔다가 아 여기가 그런 현장이구나 하는 공감대를 만들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이 공간이 굉장히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문화예술인 100인 행동 때는 음악하는 분, 미술하는 분, 작가들 다양한 분들이 오셨는데, 운동과 무관한 분들도 많이 오셨고, 다음부터는 개별적으로 찾아오시는 분들도 꽤 되셨어요. 한번 왔다 가면서 부채감을 느끼신 거에요. 또 오시고 다른 분들도 같이 오시고, 내가 여기서 뭘 할 수 있을까? 물어 보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리고 추모 콘서트. 대중가수들에게 전화하면서 섭외하면서 느낀 건, 시간이 되는 한 오고 싶어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근데 그 분들이 어떤 식으로 여기에 참여할 수 있는지 몰라요. 본인이 들어와서 그냥 참여하면 된다는 생각을 못할 뿐인 거죠. 전화하면 너무 좋은 기회다라고 생각하시는 거에요. 

 


 

 

현장미술 작가 

 

아! 네 저 신작가에요. 스스로 작가라 생각하진 않았는데 하다보니까 현장 미술하는 작가가 됐어요. 예전에 FTA 때나 광우병 때 스치로폼 작가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현장 활동하다 보니까 돈 안들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바닥에 깔고 깨지고 뭉개진 스치로폼이 많더라구요. 용산에서는 꽃 작업을 했죠. 꽃 깎아서 펜스에 붙이는 작업을 했는데, 나중에 용역들이 남일당 밑 펜스에 붙인 꽃을 다 뗐거든요. 그거 왜 떼냐? 난 거기 구호도 안 쓰고 아무 것도 안 쓰고 이미지 작업만 했다면서 대판 싸운 적 있었어요.

 

망루전에 낸 건 뭐냐면요, 처음에 사고나고 저 남일당 건물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전투경찰이 어떤 식으로 투입됐고, 용역이 밑에 층에서 뭘 태웠다는데, 그래서 사실확인을 위해서 모형을 만들었어요. 그 망루에 올라가셨던 분에게 설명듣고, 다른 지역 망루 답사도 가고, 망루 내부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남일당 건물도 몇 번이나 확인하고, 실제 사이즈를 축소해서 그대로 만들었어요. 


 

 

신유아 씨가 만든 스치로폼 꽃과 망루 모형

 


 

 

이미지 작업만 했다는 이야기는 집회하면서 문화공연이라 우기는 거와 비슷한 맥락?  

 

좀 다른, 아니 비슷한 맥락인데, 집회 때 문화공연이라고 하는 건 사실은 문화공연이 아닌 거잖아요. 근데 문화제나 추모제나 종교행사 같은 것은 걔들하고 싸우기 위한 하나의 알리바이 같은 거고, 저기서 싸울 때도 비슷한 맥락으로 싸운 거죠. 사실 경찰이나 용역들이 멍청한게, 사실성을 기반으로 한 이미지 작업은 정치성 있는 거라며 욕을 해요. 추상적인 이미지 작업을 할 경우엔 반응이 없죠. 꽃 작업은 나중에 와서 뭐라한 거거든요. 그 때 전철연 분들이 그랬어요. 용역이 예술을 알아? 깡패가 예술을 어떻게 알아?  

 


 

 

운동권 문화  

 

공연자들이 예전 같지 않아서 이제 스스로 자기 이야기들을 해요. 공연 중간 준간에 난 용산 참사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고 이명박이 잘못하고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그건 경찰이나 정부쪽에서 봤을 때 공연자의 멘트지 발언이 아니에요. 그런데 실제로 집회에 오신 분들 중에 이게 뭐야 발언 하나도 없고 공연만 하냐며 이야기하기도 해요. 그리고 밴드 공연 있죠? 시끄러운 공연. 이 사람들이 공연하면 사람들이 싫어해요. 특히 운동하시는 분들이 싫어해요. 근데 사실 알고 보면 그 사람들도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자기 표현인 거거든요. 근데 그 표현을 인정하지 않는 거죠. ‘촛불아 힘내라’ 라고 시청광장에서 페스티벌 한 적이 있었는데 밤새 밴드 공연만 했거든요. 우리는 싸우고 있는데, 너희들 여기 와서 놀고 있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밴드들은 자기가 잘 하는 노래로서 그들에게 힘을 주겠다는데 그런 다양한 방식들을 인정해 줘야 된다고 생각해요. 아직 운동판 안에서는 그런 게 좀 약해요. 

 


 

 

다음 기획 

 

이야기 나온 거 중에는 추모 콘서트가 굉장히 좋았기 때문에 한 번 더 하자 그래서 초기 기획 해 논 상태구요. 여기 공간이 명도와 관련해서 계속 뺏기고 있는 상황이라 저희가 민법을 보니까 점유권이란 게 있더라구요. 실제로 임차인이 아니더라도 그 공간을 점유한 사람이 점유권을 주장할 수 있어요. 그래서 아직 남아 있는 공간들을 작가들이랑 모여서 리세팅해서 다양한 공간을 만들어보자 해서, 그 공간들을 지금 확인하고 있는 중이거든요. 그렇게 되면 시각예술인들이랑 작가분들이 많이 붙을 거에요. 

 

아, 다음에는 개별작가분들 인터뷰를 했으면... 저는 기획하는 입장이지만 개인 작가분들이 여기 들어와서 이 공간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저도 그런 것들이 대단히 궁금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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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세력’과 언어정치

‘대전발 영시 오십분.’ 이전에 가끔 부르던 대중가요 노랫말이고, 이종기 감독이 1963년에 만든 영화의 제목이다. 언뜻 생각하면 ‘대전발 영시 오십분’은 자정이 넘은 시간에 대전에서 떠나는 열차의 고유한 이름이다. 고유명사라면 지시 대상이 고정되어 있다고 여겨지는데 과연 ‘대전발 영시 오십분’ 차도 그러한가?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연발착으로 꼭 밤 0시 50분에 출발하지 않을 수도, 객차 수가 일정하지 않을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이는 표현과 지시대상의 관계가 수시로 바뀐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대전발 영시 오십분’에 일정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런가? 구조주의 언어학자 소쉬르에 따르면 ‘대전발 영시 오십분’의 의미는 ‘대전발 열시 십분’이나 ‘부산발 여섯시 삼십분’ 등과 차이가 있어서 생겨난다. 언어의 의미는 지시대상보다는 언어체계 안에서 어떤 위치에 속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말이다. 

 

의미가 언어체계에서 나온다는 생각은 언어가 대상, 세계, 현실을 규정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연결될 수 있다. ‘대전발 영시 오십분’이라는 언어표현이 지시대상을 소환하여 존재케 하는 효과가 있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담론이론’이라고 불리는 한 부류의 언어이론이 여기에서 형성되었다. 담론이론에 따르면 언어는 독자적인 물질적 효과가 있으며, 그것을 통해 세계와 현실을 구성하고 주체들을 호명한다. 특정한 담론에는 특정한 형태의 주체들만 등장하게 되어 있다. 의료담론에는 수만, 수십만의 개인들이 등장해도 ‘의사’, ‘환자’, ‘간호사’, ‘가족’, ‘간병인’ 등 소수의 주체형태로 분류된다. 

 

파업담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최근에 끝난 쌍용차 사태에서 보수언론은 농성중인 노동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현장에 간 사람들을 ‘외부세력’으로 불렀다. ‘외부세력’은 여기서 보수언론이 장악한 파업담론에서 등장하는 하나의 주체형태이다. 언뜻 보면 ‘외부세력’은 쌍차노동자들과 무관한 세력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담론이론과 비판적 언어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외부세력’의 의미는 파업담론에 의해 전제된 ‘내부세력’이라는 또 다른 주체형태와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지 정해진 지시대상을 가져서 생기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담론이 갖는 효과이다. 진보세력은 자신이 ‘외부세력’이 아니라는 주장만으로는 ‘외부세력’의 의미를 파괴하기 힘들다. 의미는 현실의 진실과 무관하게 언어작용, 담론과정에 의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담론상의 공격에 대해서는 그래서 담론상의 응전이 필요하다. 파업담론이 지배할 때는 담론 지형 자체를 바꿔야 한다. 담론정치, 언어정치라는 새로운 차원의 실천이 필요한 것이다. 이 실천에서 밀리면 우리는 계속 ‘외부세력’으로 호명될 될 것이다. 

강내희 | 중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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