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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광주를 생각한다.

1. 제가 태어나서 살아던 곳은 내장산과 동학혁명의 첫 시발점인 전북 정읍입니다.

   제가 어렸을적 그러니깐 7살정도 됐을무렵(80년 12월)

   아버지 후배라는 사람 두명이서 손에 총을 들고 우리집에 불쑥 나타났습니다.

   (물론 겨울철 사냥에 쓰이는 총입니다. 동물,조류살상용이지만 인명살상도 가능함.)

 

   그해 오월 광주에서 민중 항쟁이 일어 났었고 아버지 후배라는 사람들은

   시민군으로 참여했다가 마지막 도청에서 살아남았다고 했습니다.

   (어렸을 적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도청전투가 시작되기전 빠져나왔는지,  

   전투후에 군인들에의해 잡혔다고 했는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여하튼 어머니는 참 무섭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아버지 후배들이 잡아온 토끼를 어머니가 요리해 주셨는데

   참 맛있었단 기억이 ㅋㅋ

 

 

 

 

2. 대학에 들어와서는 광주 민중항쟁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었지요^^

   지금이야 고등학교에서도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객관적 자료와 진실을 학교에서 배우지만

   저희때만 해도 그렇진 않았거든요(전 93학번입니다.)

 

   광주 시민들의 시체사진과 독일인 언론인이 찍었다는 흐릿한 비디오를 시청하면서 

   울분을 삼키지 못했던 그때!!

   아마 오월은 80년대 선배들에겐 민주화투쟁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겠지만

   저 또한 오월은 운동의 첫걸음을 떼게했던 사건이었고 지금도 저에게 삶의 숙연함을

   돌이켜보게 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심란할때면 가끔 망월동묘지를 참배하러 가서 마음을 다잡기도 합니다.

   (매년 오월 광주에 가보지만 기억에 남는건 99년 여름 여자친구와 휴가를 전남대, 조선대,

    망월동 묘지 참배하러 갔었답니다.ㅋㅋ)

 

 

 

 

3. 지금 한해를 마감하는 시점에 전 다시 오월 광주를 생각합니다.

    시민군이 점령한 광주에서는 군인들과 시민들의 팽팽한 접전이 벌어지고

    그안의 광주 시민들은 도둑과 살인 방화가 일삼는 곳이 아닌

     저항과 나눔과 자치의 공동체였다고 합니다.

 

    혼연일체로 공동체를 지켰던 그 마음,

    피와 땀과 따듯한 미소로 서로를 하나로 이어주었던 것,

    거기에는 주먹밥이 있었답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과

    이웃의 뜨거운 열정과

    총을 들고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피가 끓던 곳에

    주먹 밥이 있었답니다.

 

    주먹밥은 오월 광주의 가슴이자

    우리 미래의 희망입니다.

   

  -5.18기념재단 소식지 2005년 10월호 일부 인용-

 

   우리 주먹밥 같은 사람이 되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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