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동원된 근대화』를 읽고_1

 

왜 우리는 토론을 멈추지 말아야 할까

『동원된 근대화』를 읽고_1

본 게시물은 『동원된 근대화』(조희연, 후마니타스, 2010년)을 바탕으로 2013년 5월에 작정된 서평의 첫번째 편이다.

향후 한국사회의 헤게모니의 향방은 1987년 이후 지난 20년 동안보다도 더욱 치열한 쟁투의

결과로 구성되게 될 것이다._376쪽.

 

그 쟁투의 모양이 어떠한지는 조희연 자신의 책에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 같다. 이 책 자체가 박정희 시대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신보수와 포스트구조주의, 그리고 ‘지배헤게모니’를 선점하는 진보민주담론 사이의 쟁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예언처럼 쟁투는 치열하고 조희연 또한 쟁투에 걸맞은 치열한 전략가다. 그는 암묵적으로 그의 입장을 강화할 단어들, 그 자체로 그의 주장을 뒷받침해줄 단어를 사용한다. 그는 대답해야 할 질문과 대답하지 말아야 할 질문을 구분하고, 도전장을 내미는 새로운 해석자를 회유한다.

 

그러나 이 쟁투는 그저 서로를 견제하고 해석을 단단히 해나가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이 싸움은 전장(戰場)이자 관객인 독자를 설득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이 독자를 논리적으로 설복하기 위해 꾸며진 하나의 연극무대라고 생각한다. 무대에선 다섯 명의 배우가 서로의 역할을 연기한다. 그들은 박정희 시대에 대한 다섯 가지의 다른 해석을 보여준다. 우선 박정희 시대가 완전한 강압의 ‘독재’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민주화세대가 있다. 두 번째로 박정희 시대가 완전한 ‘동의’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친박정희적 시각이 있다. ‘일면적’이라고 정리되는 이 두 가지 해석은 투쟁을 위해 강압이 필요했던 세력이나 박정희에 대한 국민들의 태도를 자발적인 ‘동조’로 해석해야만 했던 사람들의 목소리다. 그러나 서로를 적으로 삼아 대립하는 두 일면적 시각은 이미 구시대의 것으로 희미한 웅얼거림으로만 무대의 배경을 메우고 있을 뿐이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목소리는 ‘진보민주담론’으로 상징되는 ‘다섯번째 목소리’인 조희연에게 질문을 제기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노동자에 대한 억압을 부정하는 세 번째 목소리가 ‘신보수’, 임지현을 입술 삼아 말하는 네 번째 목소리가 ‘탈구조주의’의 것이다. 서로 다른 목적을 향해 교차하는 질문을 정리하고 대답하는 조희연은, 주인공으로써 기꺼이 모든 목소리를 호명하고 정의한다.

 

박정희 시대에 대한 시각은 1987년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달라진다고 할 수 있겠다. 1987년 이후 1990년대를 거치면서, 반독재 민주화 운동적 논리가 ‘국민적 상식’이 되어가는 것에 상응해, 박정희 정권 시대에 권력에 의해서 강제되던 ‘친박정희적인 관변 논리’가 퇴조하고 반박정희적인 진보 논리가 확산되어 왔다. 후자는 박정희 체제의 폭압성과 노동자·농민 등 민중에 대한 수탈성을 강조하고 있었으며 그런 폭압과 수탈에 대한 분석은 기본적으로 구조주의적인 논리 위에 서있었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 다양한 새로운 논리들이 출현해 왔다. 한편에서는 기존의 폭압론과 수탈론에 기초한 진보적 분석이 포괄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측면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분석 시도들이 나타났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박정희 체제를 새롭게 신우익적 시각에서 옹호하며 폭압론과 수탈론을 비판하는 ‘뉴라이트’적 연구들이 나타났다. 전자와 관련해서는 일상사론, 대중독재론, 구술사적 연구 등을 예로 들 수 있으며, 후자와 관련해서는 이영훈·박지향 외, 교과서포럼 편 등을 예로 들 수 있겠다. _378쪽. 

 

박정희 시대를 바라보는 해석은 시대가 다르고 그들이 처한 입장이 다른 만큼, 계속해서 변화할 것이고 또한 변화해야만 한다. 조희연은 1987년 그 해석이 일변한다고 말한다. 87년에서 90년, ‘친박정희적 관변 논리’ㅡ두번째 목소리ㅡ와 대립하는 동안 생겨난 ‘진보민주담론’ㅡ첫번째 목소리ㅡ가 ‘국민적 상식’이 될 정도로 설득력을 가지며 해석의 흐름을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두번째 분기점은 2000년대에 일어난다. ‘신우익’과 ‘포스트구조주의’의 해석이 등장하며 ‘폭압론과 수탈론’이 포괄하지 못하는 현실의 틈을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다.¹

  

여기서 우리는 포스트구조주의로 분류되는 임지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저자가 4장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임지현의 ‘대중독재론’에 대한 조희연의 답변이기 때문이다.²

 

한양대 임지현 교수팀은 ‘대중독재’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박정희 시대를 재조명하는 논의들을 임지현·김용구 편(2004)에서 제기했다. […] 『대중독재』 출간 이후 조희연(2004c)의 비판이 있었고, 이에 대한 임지현·이상록(2004)의 반론이 있었고 조희연(2005c)의 재반론이 있었다(이 논쟁문은 임지현·김용우 편 2005, 3부에 실려 있다). 그 후 임지현 팀은 임지현·김용우 편(2005; 2007)을 통해 논의를 체계화시켜 가고 있다(182-183쪽). […]필자의 비판에 대해서 임지현·이상록(2004)의 반론이 있었다(277쪽).  

 

이 서평에서 그들의 논쟁 모두를 담을 수 없겠지만 우선 두 입장 사이를 오고 갔던 반론의 연대기를 나열해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흥미롭다. 결국 2010년에 출판된 『동원된 근대화』는 임지현의 대중독재론에 대한 조희연의 대답을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이 책은 여전히 현재적 시제를 갖는다. 따라서 우리는 조희연이 어떤 결과를 바라며 이 책을 썼는가에 대해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그렇다면 ‘대중독재론’이란 무엇인가? 대중독재론은 ‘반독재 민주화 운동 논리’와 ‘친박정희적인 관변 논리’에 대항해 제기된 해석이다. 그러나 ‘일면적인 시각을 탈피하고 다양한 시각을 채득했다’ 정도로 이 이론의 의의를 말한다면 그것은 부족할 뿐 아니라 오해를 일으키는 설명일 것이다. 조희연은 임지현을 ‘포스트구조주의자’로 분류한다.³ 여기서 ‘Post’라는 말은 임지현이 ‘민주화운동’과 ‘친박정희파’가 가지고 있던 구조주의를 벗어나는 어떤 논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나는 이 서평에서 조희연과 임지현의 논쟁을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의 대립이라는 식으로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 무언가를 쑤셔 넣기 위해 틀 지워진 개념은 ‘철창’과 다름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용어가 논쟁의 대립적 구도의 이해를 용이하게 하는 도구의 역할을 해준다는 언급으로 만족하기도 한다.

 

임지현의 대중독재론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기존 논의들과 구별된다. 첫째, 지향하는 목적이다. 조희연이 저항집단을 결집시키기 위한 글쓰기를 한다면 임지현은 체제해석과 이해에 그 목적이 편향된다. 다시 말해 임지현의 논의는 체제의 구조를 살펴보는데 강점이 있고, 조희연의 논의는 집단의 정체성을 지켜내는데 주안점을 둔다. 따라서 임지현의 “소수의 사악한 가해자와 다수의 선량한 피해자라는 도식은 순진함을 넘어 허구적이기까지 하다”, “강압과 그에 의한 민중의 희생 혹은 영웅적 저항으로만 환원될 수 없으며”, “(박정희 시대가) 진보적 논의에서 강조하는 바와 같이 폭압과 폭력, 탄압 등으로만 일관된 것으로 볼 수 없다” 따위의 문장은 진보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체제의 구조를 파악하려는 그의 목적을 의식한 뒤에 읽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들의 주장은 대립되지 않으며 임지현이 옳다, 조희연이 옳다 하는 식으로 다투어야 할 문제가 아니다.

 

둘째, 대중독재론은 그 논의의 시작을 억압자나 피억압자가 아닌 대중에게 둔다는 점에서 기존의 논의와 다르다. 다시 말해 대중독재론은 ‘독재’에의 해석에 있어서 그 무게중심을 ‘지배자’에서 ‘대중’으로 옮기는 시도인 것이다. 따라서 ‘동의’에 대한 해석은 수동적 동의나 자발적 동의와 같은 패러다임 안에서 이해될 것이 아니라, 권력의 주체가 어디로 설정되어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러한 주체변경의 인식은 “근대성과 그 근대성에 기초한 대중성”. “근대 파시즘은 ‘인민주권론’과 같은 근대적 정치 원리에 기반을 두고 출현한 ‘합의 독재’로서의 성격을 가지며 그런 점에서 ‘주권독재’의 외양을 띠며, ‘대중독재’의 성격을 띤다고 본다”, “독재에 대한대중의 자발적 동원, 그 결과로서 독재의 대중적 기반”같은 문장에서 드러나고 있다.

 

조희연이 말하는 것처럼 임지현의 대중독재론은 “기존 독재 혹은 파시즘 분석을 뛰어넘는 새로운 통찰력과 연구 지평을 열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와 함께 조희연은 임지현의 논의를 일정 부분 수용한다. 그는 그동안의 진보의 해석이 ‘일면적’이었기 때문에 현실을 잘 반영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아들이고, 그러한 문제점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 반성한다.⁴그와 함께 그는 임지현이 대중독재에서 말하고 있는 ‘국민적 합의’나 ‘동의’가 근대권력을 이해하는 데 합당한 해석이라고 말한다.⁵ 그는 ‘대중독재론’이 우리에게 주는 이 인식을 ‘합리적 핵심’이라고 부르며 임지현이 말하고 있는 ‘대중의 동의’라는 개념을 민주 진보 담론의 입장에서 수용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민주 진보 담론의 관성화와 정체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측면들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먼저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분석적 과제들이 운동적 언어 속에서 방기될 데서 유래했다는 점이다. 이론적 실천이 정치적 실천의 성찰적 계기로 작동하기 보다는, 이론적 실천이 정치적 실천과 곧바로 동일시되거나 도구화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런 ‘이론적 실천의 도구화’는 운동적 언어가 쉽게 분석적 언어로 치환되어 동일시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속에서 분석의 문제는 쉽게 ‘입장’의 문제가 된다. […] 이런 일종의 ‘본질주의’적 분석이 진보적 분석을 지배하게 되면서, 그 분석의 공백에 뉴라이트 적인 현대사 분석이 존재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진보적 분석 내부에서의 ‘순수주의’ 같은 것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_382-383쪽.  

 

그럼에도 민주진보담론이 무턱대고 ‘동의’ 개념을 수용하기에는 저항지점이 있다. 민주진보담론은 지배헤게모니를 잡고 있던 일명 ‘보수’와 구분되는 측면들을 강조하면서 집단의 틀을 다져왔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박정희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말하며 서로를 결속한 보수담론에 대항해, 억압의 논리를 강조했던 민주진보담론의 역사 속에서 아무리 합리적이라 할지라도 언뜻 보수의 ‘동의’ 개념을 말하는 임지현의 논의를 받아들이는 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조희연의 ‘전략가’적 면모가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임지현의 논의를 수용하면서 그의 입장 또한 지켜내기 위해 몇 가지 개념을 만들어 낸다. 억압과 동의의 관계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 ‘강압적 동의’와 ‘동의적 강압’. 그리고 ‘모순적 복합성’과 ‘헤게모니의 분열이 그것이다.

 

 

 


각주 1 조희연이 가장 집중하는 해석이 ‘신우익’과 ‘포스트구조주의’의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임지현 교수팀의 대중독재론이 기존 진보 담론의 비판적 확장의 문제의식에 서 있다고 하면, 이영훈 교수의 박정희 시대 논의는 좀 더 전면적인 보수적 반론(박정희 시대에 대한 진보적 분석의 전제, 즉 ‘박정희 시대 노동자, 농민, 중소기업이 수탈받고 불이익을 강요받았다’는 것은 허구라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필자는 한편에서 이런 논의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것과 함께, 다른 한편에서 단순한 반박의 차원을 넘어서, 이영훈의 비판적 도전이 ‘근현대 역사사의 개발적 재구성’이라는 과제를 진보에게 제출하고 있음을 드러냈다”(같은 책, 26쪽); “임지현의 논의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기존 ‘민주진보담론’의 공백 지점과 한계 지점을 예리하게 쟁점화한 것이라 할 수 있는 반면에, 이영훈의 논의는 민주진보담론 자체의 ‘전제’에 대한 도전이며 보수적인 입장에서 민주진보담론을 해체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같은 책, 379쪽).

 

각주 2 이 글은 당초 임지현 팀의 ‘대중독재론’(임지현 2004; 임지현·김용구 편 2004)에 대한 비판적 논쟁의 글로서 쓰였다(182쪽).

 

각주 3 조희연은 자신을 구조주의적 입장으로 임지현을 포스트구조주의적 입장으로 명명하고 있다. “(임지현의 대중독재론은) 탈근대론 혹은 탈민족주의론적 입장에서의 민주진보담론의 정체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382쪽); “민주진보담론이 다분히 구조주의적 담론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할 때, 이영훈의 논의는 구조주의적 담론 지향을 공유하면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고, 임지현의 논의는 포스트구조주의적 논의의 성격이 있다고 생각된다. 사회주의 붕괴 등의 조건을 매개로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구조주의적 담론에 대한 포스트구조주의적 담론의 도전은 서구 지식 세계에서는 다양하게 제기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임지현의 논의는 한국 ‘특수적’인 논의라기 보다는 좀 더 일반론적 문제의식을 깔고 있다고 생각된다. […] (임지현의 논의는) 기본적으로 포스트구조주의적인 비판 담론으로서의 성격이 존재한다. 그의 논의는 본질적으로 민주 진보담론의 성찰적 확대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지점을 담고 있다”(386쪽); “임지현은 반독재 민주진보담론과 다르게 포스트구조주의적 혹은 포스트 근대적 분석틀에 기초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 결국 임지현이 탈근대론적 분석틀에서 반독재 민주진보담론의 협애성과 일면성에 도전한다면, 이영훈은 근대론적 분석틀 속에서 민주진보담론의 협애성과 일면성에 도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임지현은 민주개혁이 지구화의 맥락에서 새롭게 도전받게 되는 과제들을 통해서 민주 진보 담론에 도전하고 있다고 하면, 이영훈은 민족 국가적 발전의 맥락에서, 그것도 민주 진보 담론의 ‘과잉 진보화’에서 간과되고 있는 점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387쪽)”. 인용자강조

 

각주4 필자는 (비판적) 연구자들은 단순한 현실의 복합성을 보여 주는 과제를 대면하는 사람이고, 운동가들은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해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급진적인 연구자일수록 거의 운동가와 다름없이 현실을 단순화해 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 진보적 연구자 진영일수록 이런 경향이 미덕이 되고 권장되고 통용된다. [...] 분석의 ‘출발점’이어야 할 개념이 분석의 결론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그 결과 분석은 설명이 아니고 ‘동어반복’이나 ‘단정’이 되는 경우 높은 수준의 전략적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도 ㅡ 연구자와 운동자의 ‘분업’을 현실로 전제할 때 ㅡ 연구자는 현실의 복잡성을 충분히 드러내는 방식으로 분석을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384쪽. 인용자 강조

 

각주5 "대중독재론"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근대 권력(특히 그 일부로서의 근대 독재 권력)은 단순히 강압적 수단을 통해서만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개발이라는 근대적이며 전 국민적 합의에 기반을 둔 국가 목표를 통해서 독재에 대한 민중의 동의를 창출하면서 헤게모니를 형성하게 된다(39쪽). 이런 시각은 임지현팀의 대중독재론의 새로운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대중독재’론에 따르면, 근대 파시즘은 ‘인민주권론’과 같은 근대적 정치 원리에 기반을 두고 출현한 ‘합의 독재’로서의 성격을 가지며 그러 점에서 박정희 체제를 단순히 폭압과 허위의식에 기바한 정권으로 보는 것은 근대적 파시즘의 ‘주권 독재’적 성격에 비추어 보면 일면적이고 단순한 분석이 된다. 박정희 독재는 ‘위로부터의 독재’였을 뿐만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독재’였으며, 이렇게 볼 때 ‘독재를 악으로 보고 반독재를 서으로’ 일면화하는 ‘도덕적 이원론’을 넘어설 수 있게 될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이런 대중독재론의 합리적 핵심을 긍정적으로 파악하면서 그것을 ‘근대 독재 권력의 모순적 복합성’이라는 분석틀을 중심으로 재인식․재설정하고 그에 기초해 박정희 체제의 성격을 분석하고자 한다(277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