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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08/10
    <미래연대>19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의 함성
    투사
  2. 2004/08/10
    <미래연대>전평의 1946년 9월 총파업과 자주관리운동
    투사

<미래연대>19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의 함성

19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의 함성



2003년 7월 또다시 지도부의 배신적 타협으로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은 투쟁의 깃발을 내렸다. 자신의 힘을 믿고 투쟁했다면, 그리고 민주노총의 연대총파업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면 분명 승리로 전진했을 투쟁이었다. 철도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을 벌벌 떨게 할 위력적인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투쟁은 바리케이드 너머의 적이 아닌 내부의 적에 의해 가로막혔다. 승리를 향한 파업의 진군을 가로막은 지도부의 타협과 배신, 이후 자본의 거침없는 현장탄압. 불과 1년 반 사이에 세 번이나 이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철도의 선진노동자들은 낡고 불철저한 지도부를 대체할 새로운 지도력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과제와 또다시 마주치고 있다. 이제는 "새로운 지도력을 만들자!"라는 선언을 반드시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가? 답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과거 선배노동자들의 투쟁 속에서 쉽게 문제의 해답을 얻어낼 수 있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골리앗투쟁"은 오늘날 민주노조운동에 많은 영감을 던져준다.


골리앗투쟁. 첫번째 장애물


87년 노동자대투쟁의 거대한 불길에 겁먹고 동요했던 자본가들은 민주노조운동의 불꽃을 꺼뜨리기 위해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을 시작했다. 공격의 초점은 당시 민주노조운동의 주력부대 중 하나인 현대중공업이었다. 대낮의 식칼테러, 노조사무실 습격, 직권조인 무효와 어용노조 퇴진을 요구하며 벌였던 88년 128일 파업과 가두투쟁의 무력진압 등 탄압은 강도를 더해갔다. 숨막히는 공안정국 속에서 누군가 앞장서 저지선을 구축하고 재반격의 계기를 만들어야 함을 모든 노동자들이 느끼고 있을 때, 현중노동자들은 자신이 그 "누군가"가 되겠다고 선포했다.

90년 4월 25일 단체협상 이행, 구속동지 석방, 노태우 타도를 내걸고 1만 7천여 현중노동자들은 법률적 제약 따위를 단호히 거부하며 쟁의발생신고 없이 과감하게 파업에 돌입했다. 그간의 패배를 겪으며, 승리를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힘을 남김없이 모두 동원해야 함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법"이라는 자본가의 족쇄에 묶이기를 거부했다. 공장의 장비와 재료로 무기가 만들어지고 바리케이드가 세워졌다. 128일 파업에서는 겁이 나서 쓰지 못했던 민주박격포에도 볼트와 너트를 가득 집어넣었다. 우유부단과 머뭇거림은 패배를 의미할 뿐임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타오르는 현중노동자들의 투쟁을 가로막은 첫번째 장애물은 끝까지 이 싸움을 책임질 지도부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대중의 뜨거운 투쟁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간 진민복 비대위장의 뒤를 이어 총파업의 총대를 메겠다고 나섰던 김영환 비대위장 역시 "정치파업은 못하겠다"며 적들에게 투항해버렸다. 그러나 대중들은 첫번째 장애물을 멋지게 뛰어넘었다. 위원장의 잇따른 투항에도 대중의 투쟁열기는 조금도 식지 않았고, 곧바로 전투적인 지도부를 탄생시켰다. 새롭게 구성된 이갑용 집행부는 무장한 사수대로 둘러싸였다. 자신들의 지도부를 자본의 회유뿐만 아니라 공권력으로부터 스스로 지켜내겠다는 현중노동자들의 적극적인 행동이었다. 지도부의 직권조인과 파업철회에 단순히 분노하거나 풀죽어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수동적인 모습을 거부하며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지도부를 만들어내고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지도부를 포섭하여 파업을 꺾으려는 시도가 실패하자 정부는 직접적인 공격으로 전환한다. 28일 새벽 73개 중대 1만명이 지상, 해상, 공중으로 동시에 들이닥쳤다. 총파업전선을 사수하고 전국적으로 확대하기 위해 곧바로 150여명이 골리앗 크레인으로 올랐다. 중공업 진입로에서는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을 시작으로 격렬한 가두투쟁이 시작되었다. 민주노조운동의 후퇴를 막아내려는 현중노동자들의 헌신적인 투쟁은 전국노동자들의 연대를 끌어냈다. 전노협 선봉대가 울산으로 모여들었고, 5월에는 전국 127개 노조 25만명이 현대중공업 골리앗투사들을 엄호하기 위해 연대총파업에 나섰다!


골리앗투쟁. 두번째 장애물


대중의 자발성이 고양될수록 자신의 지위에 위협을 느끼는 조합주의적 지도부는 비틀거리기 마련이다. 현중골리앗투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현중노동자들에 대한 자본가정부의 탄압을 보며 노동자투쟁은 승리하기 위해서 연대투쟁과 정치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배운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을 향해 현자 이상범 집행부는 "임단협을 준비하기 위해 정상조업에 들어간다"고 배신 결정을 발표했다. 이 이탈을 기점으로 투쟁은 한풀 꺾이기 시작했다. 연대투쟁이 소강기로 접어들고 결국 싸움은 골리앗투사들의 외로운 투쟁으로 변해갔다. "골리앗의 외로운 늑대들"은 패배를 예감했다. 전체 자본에 맞서 전체 노동자의 힘을 충분히 동원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결국 점거 14일만인 5월 10일 골리앗투사들은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골리앗을 내려오게 된다.

두번째 장애물은 이 시기에 등장한다. 투쟁이 일시적으로 난관에 봉착하거나 패배하면 대중은 일시적으로 사기저하에 빠진다. 그러나 모든 힘을 끌어내 싸운 노동자들은 패배주의에 빠지는 대신 "승리하기 위한 투쟁의 정확한 방향과 수단은 무엇인가?"라는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격렬한 투쟁을 통해 법, 의회, 정부, 언론 따위는 자본가의 권력기구이고, 노동자는 단사투쟁을 전체 노동자의 투쟁으로, 나아가 정치투쟁으로 발전시킬 때 비로소 진정한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음을 배우며 자부심을 느낀다. 골리앗투사들은 자본가를 굴복시키고 더 높이 오르기 위한 전망을 갖고자했지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가진 노동해방 지도부를 만날 수 없었다. 결국 희망을 갖지 못한 노동자들은 패배주의만을 가질 수 있을 뿐이었다.

이처럼 골리앗투쟁이 마주쳤던 두번째 장애물은 미래의 승리를 위한 투쟁의 방향과 수단의 부재, 노동해방 정신으로 무장한 지도력의 부재였다. 노동자투쟁은 성장하면서 더 거대한 과제를 선진투사들에게 던진다. 이때 선진투사들이 충분한 답을 쥐어주지 못할 경우 대중의 사기저하는 계속되고 투쟁이 아닌 굴종, 노동해방이 아닌 개량주의에서 대안을 찾는다. 조합간부보다 관리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당당히 투쟁하기보다 눈치보며 계산기를 두드리며, 단사의 울타리를 절대 뛰어넘지 않으려 하고, 정치문제에 무관심하게 된다. 전체 노동자의 공동의 이익을 사수하기 위한 투쟁에는 무관심해진다. 오직 자기사업장, 자기부서, 자기 가족의 이익을 지키는 데에만 편협하게 모든 관심을 쏟게 된다.

반면 대중의 투쟁의지와 열망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수로를 여는 진정한 지도부를 발견했을 때 대중은 승리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굴하지 않고 행동하려 한다. 이것은 투쟁을 끈질기고 완강하게 만들뿐 아니라, 투쟁의 파고가 꺾이면서 동요가 생기는 상황에서도 그간의 투쟁의 성과를 보존하고 대중의 투쟁의지와 단결력을 보호하며 다음의 투쟁을 준비할 수 있게 한다.


대중의 자발성과 선진노동자의 지도력


골리앗투쟁은 노동자가 얼마나 멀리 나아갈 수 있는지 그리고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가르쳐준다. 골리앗투쟁은 대중의 열망을 현실화시키는데서 무능력한 지도부를 단호하게 갈아치우는 역동성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현중노동자들이 보여준 역동성은 전체 노동자에 대한 책임감에서 비롯되었다. 현중노동자들은 자본가정부의 대대적인 공세 속에서 질식해가던 민주노조운동의 활로를 뚫으려는 돌격대로 자신을 간주했고, 자신들의 투쟁이 정치투쟁임을 분명히 했다. 현중골리앗투쟁을 둘러싼 공방전은 총노동과 총자본의 이후 투쟁의 향방을 결정하는 대회전의 성격을 가졌다. 비장한 마음으로 골리앗 크레인에 올랐던 현중노동자들은 "전체 노동자의 공동의 이익"이라는 계급적 시야와 책임감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골리앗투쟁은 대중의 자발성에 걸맞는 지도력을 갖추지는 못했다. 마지막에 선출된 전투적 지도부는 대중이 이끌어간 투쟁에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함께 했지만, 대중들을 장기적인 승리의 방향으로 이끌 만큼 확고하지는 못했다. 투쟁과정에서 보여준 노동자들의 본능적인 힘을 의식적 투쟁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지도해내고, 전체 노동자를 하나의 투쟁대열로 결집시키는 더 강력한 지도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 힘을 갖추지 못했기에 현중골리앗투쟁은 난관을 극복하지 못한 채 좌초하고 말았다.


더 멀리 나아가자!!


이제 과제는 더욱 분명해졌다. 조합주의적 지도력을 뛰어넘는 선진노동자다운 지도력을 획득할 것! 그 지도력을 바탕으로 아래로부터 활력있게 밀어나가고 지도부를 강제하는 현장노동자들의 힘을 고양시킬 수 있도록 대중 속에서 활동할 것! 대중의 잠재력과 열망이 현실화되는 정도는 선진노동자들의 분투에 달려있다. 이렇게 나아갈 때 골리앗투사들의 외침은 우리의 피와 살이 되어, 미래의 희망을 개척해나가기 위한 훌륭한 자양분이 될 것이다. 90년 현중노동자들이 우리에게 던져준 교훈을 받아안고, "골리앗의 외로운 늑대들"보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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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연대>전평의 1946년 9월 총파업과 자주관리운동

전평의 1946년 9월총파업과 자주관리운동



1946년 전평의 9월총파업


1946년 9월 24일, 4만 철도노동자들의 투쟁이 전개되었다. 미군정 운수부의 25% 감원방침이 그 계기였다. 철도노조와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은 미군정의 탄압에 맞서 "쌀을 달라! 물가인상에 따라 임금을 인상하라! 실업자에게 일과 집과 쌀을 달라! 공장폐쇄·해고 절대반대! 민주주의운동 지도자에 대한 체포령 철회와 즉각석방! 언론·출판·결사·시위·파업의 자유를 보장하라! 해방일보 등 탄압받고 있는 신문을 즉시 복간시키고 직원들을 석방하라!" 등의 요구를 내걸고 총파업에 돌입했다. 경제적 요구뿐 아니라 정치적 요구까지 포함하는 총파업투쟁이었다. 전화국, 우체국 노동자들이 이 파업에 합세하고 더욱 확대되어 전국적으로 25만 이상이 참여했다.

한국노동운동 최초의 위력적인 총파업이었으며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전평의 9월총파업은 결국 미군정과 경찰, 우익세력의 물리력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패배로 타격을 입은 전평은 이후 다시 한번 조직화에 나섰으나, 미군정과 우익세력은 기세를 몰아 탄압의 고삐를 더욱 조였다. 전평은 급속히 쇠약해졌다.

오늘날 전평은 "먼 과거의 기록"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뛰어난 계급의식으로 새로운 세계를 향해 전진해나가던 전평노동자들의 위대한 업적과 의의를 계승해야 한다. 또한 그토록 강력했던 전평노동운동의 패배의 원인을 규명하고, 우리 운동의 자양분으로 삼는 것은 보다 더 중요할 것이다. 전평노동자들이 넘어서지 못했던 "벽"은 지금의 민주노조운동이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벽"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직 전평운동만큼의 역량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전평노동운동의 전진과 패배를 검토하며 미래의 승리를 준비해야 한다. 그것이 "먼 과거"의 기록을 들여다보는 이유다.


전평 건설과 공장위원회


일제 패망 후 이 나라 산업의 80%가량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자본가들이 대대적으로 철수하자 경제 또한 극심한 침체와 혼란을 맞게 된다. 친일자본가들은 공장폐쇄와 사보타지를 통해 공장가동을 중단시켰다. 많은 노동자들이 실업자가 되었다. 공장이 멈추면서 심각한 물자부족과 물가폭등으로 노동대중의 생활수준은 급격히 하락했다. 노동자들은 일본자본가들과 친일자본가들이 운영했던 공장들의 공백을 메꾸고, 마비된 산업을 재건하며, 심각한 물자부족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시급한 과제를 안게 되었다.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생존을 위한 투쟁 자체가 노동운동을 한층 고도한 수준으로 밀어올리고 있었다. 우리는 이 시기 노동운동의 역사 속에서 "자주관리운동"을 만나게 된다.

해방 후 전국 각지에서 산업별로 노동조합 혹은 공장위원회가 조직되었다. 1945년 11월 5일, 전국 단일노동조합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즉 전평이 건설된다. 노동자들은 공장위원회나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야근철폐, 8시간노동제 실시, 차별배급 철폐" 등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투쟁에 나섰다. 동시에 폐쇄된 공장, 경우에 따라서는 폐쇄되지 않은 공장에서도 "공장관리를 공장위원회에 맡길 것"을 요구하는 공장 자주관리운동을 벌였다. "자본가 없이" 노동자들이 스스로 공장을 가동하고 생산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성방직의 경우, 김연직이라는 한국인사장은 노동자들의 요구에 맞서 공장 문을 닫고 투쟁지도자 5인을 해고했지만, 노동자들은 공장위원회 지도 하에 조업을 계속했으며 오히려 생산액을 증가시키기도 했다.


공장 자주관리운동 :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


전평은 전체 노동자의 단결을 위해 분투했다. 생산의 조직화는 기존에 조직되어 있는 조합원들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공장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사무직·생산직을 막론하고, 숙련공·미숙련공·관리직을 막론하고, 무엇보다 조합원·비조합원의 차이를 넘어 현장의 모든 노동자들이 단결 협력해야만 한다. 전평의 자주관리운동은 생산현장의 모든 노동자를 포괄해야만 한다는 과제를 이해하고 있었다. 가령 전평은 공장 내 노동자를 분열시키려는 시도에 정면으로 맞서 "직종간 물자 차별배급 철폐"를 주장하며 노동자의 단결을 외쳤다.

더 나아가 전평은 "노동시간 단축, 인력 확충, 실업 방지, 실업노동자에게 일자리 보장"을 요구했다. 전평노동자들은 실업자 역시 노동자계급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동료임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평은 "실업자 즉 산업예비군이 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현업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열악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실업자운동은 실업자뿐만 아니라 현업노동자가 선두에 서야 한다"고 선언하며 적극적으로 실업노동자들을 조직했다. 전체 노동자의 일부로서, 그리고 먼저 조직된 노동자로서 노동자계급 공동의 이익을 위해 선두에서 투쟁할 것을 꺼리지 않는 헌신적인 태도를 모범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전성기 전평의 55만 조합원 중 절반 이상이 실업노동자였다는 사실은 전평이 현업노동자인가 실업노동자인가를 떠나 모든 노동자들을 굳게 단결시키기 위해 분투했음을 잘 보여준다. 현장에서 함께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의 단결조차 두려워하는 현시기 정규직 노동조합운동(물론 전부 그렇지는 않다)과 크게 대비되는 대목이다. 이처럼 전평노동자들의 선진적이고 헌신적인 활동으로 전평은 노동자 전체를 단일하게 결속했을 뿐만 아니라, 생산 자체를 자주적으로 통제하는 기관으로 성장해나갈 수 있었다.

공장 자주관리운동은 노동대중의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자발적 행동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러나 자본가 없이 노동자 스스로 공장을 가동하고, 물자를 생산하기 시작하자 문제는 달라졌다. 공장위원회와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은 "누가 공장의 주인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자주관리운동을 전개하던 노동자들은 자신의 실천 속에서 그 답을 찾아냈다. 지금까지 자본가들 밑에서 땀흘려 일해왔던 이 공장의 진정한 주인은 자본가가 아니라 바로 노동자라는 것, 노동자이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노동자들의 의식이 생산 전반의 통제와 계획이라는 단계에 도달하면 그것은 곧 국가의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이탈리아 공장평의회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전평의 자주관리운동 역시 국가의 문제에 직면했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재화를 체계적으로 생산, 관리하는 것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기 때문이다. 개별공장에서의 생산통제를 전체 산업으로 확장시킨다면 그 통제기관은 낡은 지배자들의 국가를 대체하는 새로운 권력기관으로 등장할 수 있다. 전평의 자주관리운동은 바로 그와 같은 기관의 맹아였다. 해방 후 정치적 공백기에 펼쳐진 노동자계급의 역동적 운동이 새로운 사회의 씨앗이 되는 새로운 형식의 기관을 창조해갔던 것이다. 전평의 자주관리운동은 "새로운 역사의 창조자"로서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조금씩 자신의 힘을 축적하며 성장해가던 전평의 자주관리운동은 커다란 "벽"에 부딪히게 된다. 그 "벽"을 넘는다면 전평의 자주관리운동은 승리할 것이고 노동자의 피땀을 한줌 자본가들에게 빼앗기지 않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은 가능할 것이었다. 반면 그 "벽"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자주관리운동은 정체하게 되고, 미군정을 중심으로 전열을 정비한 자본가들의 공격에 괴멸될 것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그 "벽"은 전평노동자들에게 치명적 한계로 다가왔다

 

 

전평의 정치적 한계


 

급격히 성장해가던 전평의 자주관리운동은 두 가지 난관을 맞게 된다.

우선 전평이 이른바 "양심적 민족자본"에 대해서는 파업을 자제하고 협력할 것을 하달한 것이다. 당시 전평은 "자주독립을 위한 견실한 통일전선 결성을 통한 민중권력 수립"이라는 목표를 위해 노동자, 농민, 도시 소자본가, 양심적 민족자본 등 모든 계급이 연합할 것을 제기해왔다. 민중권력의 수립을 위해서 "민족자본"과의 마찰은 피하려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를 수긍할 수 없었다. 자주관리운동은 단순한 생존권 보장의 의미뿐 아니라 기존 자본가들을 몰아내어 착취를 없애기 위한 파업투쟁의 형식을 띠었다. 그리고 전평이 이야기한 "양심적이고 건전한 자본가"는 사실 존재하지도 않았다. 전평이 제시한 협력방침은 노동자들의 고유한 무기인 파업의 권리를 박탈하여 무장해제하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공장 자주관리운동의 방향타를 망가뜨렸다. 현장의 노동자들은 전평의 이와 같은 조치에 반발하거나 혼란에 휩싸였다.

두번째로, 전평은 "자주독립을 원조하는 미·소 양군에 협력"이라는 원칙하에 미군정에 대한 협조노선을 취하였다. 전평은 소련과 함께 미·영·중을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로 규정하고 조선 해방의 은인으로 격상시켜 평화적 민중권력 수립을 기대한 조선공산당의 어리석은 주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협조노선이 성과를 가질 수는 없었다. 전평이 "협조"라는 이름으로 무장해제시킨 노동자들을 미군정이 짓밟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노동자들의 대중투쟁과 공장 자주관리운동은 탄압받기 시작한다.

전평은 그릇된 지도방침으로 전평노동자들의 능동적인 공장 자주관리운동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공장 자주관리운동은 급격히 위축되었고, 노동자들은 미군정과 자본가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코민테른과 조선공산당의 그릇된 입장


 

해방 후 공장위원회, 노동조합의 건설과 공장 자주관리운동의 확산은 노동대중의 자생적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노동대중의 폭발적 물줄기를 자주관리운동으로 이끌었던 것은 일제시대부터 현장과 밀접하게 결합해 왔던 노동해방 세력이었다. 공장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하여 노동대중의 광범한 지지를 받고 있었던 노동해방 세력이 없었다면 자주관리운동은 빠르고 강한 힘으로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시대부터 활동하며 해방 후 노동운동에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던 노동해방 세력 즉 조선공산당은 성장하는 노동운동을 억제하고 결국 패배하게 만든 근본원인이 되었다. 전평의 미군정에 대한 협조노선, 자본가 및 소자본가들과의 통일전선전술은 바로 조선공산당의 그릇된 입장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노동운동의 발전방향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을 미리 획득하여 노동운동을 선두에서 이끌어 갈 선진노동자들 없이 노동운동의 발전은 있을 수 없다. 반면, 현실과 어긋난 왜곡된 발전방향을 제시하는 세력이 노동운동을 주도한다면 그 운동은 패배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당시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의 하나로 자국의 이해를 위해 전쟁을 벌여나가고 있던 미국을 "진보적인 국가"로 인식하고 미소공동위원회에서의 교섭을 통해 평화적으로 국가권력을 수립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던 것, 그리고 일제자본이든 민족자본이든 노동자를 착취함에는 변함이 없음에도 "양심적 민족자본"으로서 노동자계급과 협력할 수 있다고 본 엉터리 정치노선은 전평노동운동을 패배하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에 모든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다. 조선공산당의 그릇된 입장은 국제노동운동의 전반적 미성숙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1920년대 말을 통과하며 러시아 노동자국가가 관료들의 손아귀에 떨어지자, 러시아 즉 소련이 주도하고 있던 코민테른 (당시 노동자들의 국제연대기구) 역시 관료적 외교기구로, 국제노동운동 압살기구로 타락하기 시작했다. 세계노동자들의 공동이익을 도모해야 할 코민테른은 또다른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한 소련의 일국적 이익만을 추구하게 된다. 코민테른은 노동자의 단결과 해방이라는 포장지를 덮어쓰고 세계노동운동을 주도한다. 때로는 극좌적으로 때로는 극우적으로 비틀거리며 코민테른은 세계노동운동을 위험에 빠뜨렸다. 1935년 7차대회에서는 이른바 "반파시즘 인민전선" 방침이 채택되는데, 이는 소련의 제국주의적 이익을 위해 미국, 영국 등과 동맹관계를 맺고, 조선공산당에 미군정과 협조할 것을 제기했던 것이다. 코민테른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조선공산당은 이 방침을 따르게 되었다. 당시 관료기구로 변질한 코민테른의 한계를 인식하고 극복하기에는 국제노동운동이 성장해 있지 못했고, 조선공산당 역시 이 한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처럼 그릇된 정치의식이 바로 전평노동운동을 패배로 이끈 핵심요인이다. 전평과 조선공산당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올바른 노동해방 정치를 획득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당시 노동운동이 뛰어넘지 못한 커다란 "벽"이었다. 그리고 이 "벽"은 아직도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다시, 1946년 9월 총파업


 

1946년 중반이 되자 미군정은 전평노동운동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에 돌입한다. 그리고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전평과 조선공산당은 미군정에 대한 협조노선을 폐기하고 전면적인 투쟁에 나선다. 9월 총파업은 이와 같은 배경에서 진행된 것이다.

미군정의 탄압에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무기력한 처지에 놓여있던 노동자들은 재차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전평과 조선공산당의 정치적 오류로 노동자들의 힘은 약화되어 있었다. 반면 미군정은 우익세력의 힘을 결집하여 더욱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전평노동자들은 패배를 예감하면서도 정면으로 미군정에 맞선다. 패배를 직감하면서도 투쟁에 나섰다는 것이 어리석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9월 총파업은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평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창이다.


 

민주노조운동에 남겨둔 숙제


 

노동자는 자본가와의 투쟁을 통해 성장해간다. 노동운동은 패배를 통해 더 많은 교훈을 얻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간다. 그리고 다시 자본가들에 맞선 투쟁, 패배, 보완을 통해 결국에는 자본가들보다 더욱 큰 존재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미래의 승리를 위해 현재의 희생을 감수하는 가장 선진적이고 헌신적인 노동자 없이 노동운동의 승리는 보장받을 수 없다. 전평노동자들은 미래의 승리를 위해 당장의 희생을 감수했다. 미군정의 힘에 눌려 자신의 힘을 최대한 동원하여 싸워보지 못하고, 노동운동의 생명인 단결, 연대, 투쟁의 무기를 빼앗겨 무기력한 존재로 떨어지게 된다면 결국 노동해방의 전망으로부터 더욱더 멀리 떨어지게 될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전평의 노동자들은 9월 총파업이라는 힘을 동원한 것이다.

패배를 예측하면서도 미래의 승리를 위해 당장의 고통을 감수한 전평의 노동자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노동자들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배울 수 있다. 당장의 이익을 위해 미래의 승리를 포기하는 경향이 주류를 장악해가는 현재, 전평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희생을 잊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전평의 노동운동은 자신의 한계를 통해 민주노조운동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전평과 조선공산당이 넘지 못했던 정치적 한계는 민주노조운동에 그대로 남아있다. 우리는 전평과 같이 강한 규율과 헌신성을 가진 선진노동자들을 충분히 배출하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해외자본과 국내자본을 다르게 바라보는 민족주의 관점, 개혁의 옷으로 갈아입은 노무현 정권에 대한 환상 등과 같은 정치적 한계 역시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이 가야 할 길은 멀다. 하지만 과거의 동지들이 개척해 놓은 길을 따라 끈질기게 전진해간다면 시행착오를 최대한 줄이며 최대한 빠르게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전평노동자들이 넘지 못한 장벽! 이제 우리가 그 장벽을 무너뜨리고 전진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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