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12/05

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2/05/30
    미스박의 리뷰_혁명을 기도하라
    몽상가
  2. 2012/05/20
    롱다리 미스박 프랑스 가다
    몽상가

미스박의 리뷰_혁명을 기도하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생소한 고대 근동의 사회, 희미하게 알고있던 예수와는 너무 다른 전복적인 그가, 처음에는 매우 이질적이었다. 하지만 곧 저자의 발랄함을 따라 고대 근동과 현대의 한국을 즐겁게 넘나들게 되었다. 억압받는자, 가난한 자, 소외받는 자들의 친구였던 그의 일대기를 읽으며 낮은 자존감을 강요당하는 가난한 경리인 난 예수의 위안을 받았다. 이 유랑에 동행하며 받은 젊은 학자의 생그러운 기운은 이 책의 보너스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롱다리 미스박 프랑스 가다

프랑스 행을 꿈꾸기 시작한 건 27살 무렵부터였다.

우연히 홍세화의 프랑스 망명 시절 이야기를 엮은 책 두 권을 읽고 나서였다.

당시 나는 참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지방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취업에 대한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본격적으로  하층민 여성으로써의 삶이 시작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술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내던 나는 우연히 읽은 그의 책에서

프랑스를 처음 만났다.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나 여기보다는 삶이 더 나아지리라를 희망이

조금 더 있을 것 같은 그 곳으로 가고 싶었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월 30만원의 적금을 들었다.

그리고 서울 종로에 있는 불어 학원에 등록했다.

그때 갔다면, 어땠을까. . .

 

당시 나는 90여만원의 급여를 받으며 수영장에서 안내데스크 일을 하고 있었다.

입사한 지 3개월도 안 되어 회사는 축적된 경영 악화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실시했고

알량한 월급이었지만 4대 보험과 퇴직금의 적용을 모두 받는 정규직이었던 내 일은

시급을 받는 아르바이트로 대체되어버렸다.

 

나는 퇴사했다.

오갈데도 없고, 할 수 있는 일도 없었지만

정규직으로 하던 일을 아르바이트 대우를 받으며 할 수는 없었다.

비통한 심정으로 은행에 가서 적금을 해약하고

다시 지옥에 빠져버렸다.

 

그 후 어찌어찌 삶을 수습해 살아가는 동안

프랑스 행은 내 인생에 일어날 수 없는 해프닝이라 여겨졌다.

 

그런 내가 다시 프랑스 행을 떠올린 건 경리 일을 시작하고나서다.

20대를 그렇게 완전한 루저로 보내버린 지리멸렬한 경력의 30대 초반의 여자.

할 수 있는 일이 적었다.

 

난 여자들이 가장 많이 하고 비교적 나이 들어서도 할 수 있는

경리로 진로를 정했다.

 

세무회계 관련 자격증을 딴 뒤 첫 직장.

육류 유통업이었던 회사 내부 곳곳에 CCTV를 달아놓고 직원들을 감시하던 사장에게

성희롱을 당해 그만뒀다.

 

두번째 직장.

늦게까지 다함께 야근하고 다함께 술을 먹어야만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회사 분위기에

적응하기 싫어 버티다 이기적이라는 비난과 함께 퇴사했다.

물론 이 회사에서도 날 만진 은 있었다.

 

세번째 직장.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중증의 불안증과 강박증을 가진 가족기업.

"미스박 커피 한 잔 만"이란 업무 지시에 커피를 타다주면 40대 부장은 좋아서 입이 찢어진다.

(이해하지 못하실까봐 부연설명을 하자면, 어린 여자가 커피 타주니까 좋아서 입이 찢어지는거다.

커피는 어린 여자가 타줘야 맛있으니까. 30대가 어리냐고요? 40대 중반을 바라보는 부장에게

30대 초의 여자란 주머니에 돈 두둑히 챙기고 롬살롱에나 가야 만날 수 있는 이쁜이다.)

 

바로 이 세번째 직장에서 부장의 무한한 천박함에 내 정서적 안정의 마지노선이 붕괴되기 시작할때쯤

다시 프랑스 행이 떠올랐다.

 

거의 두 달을 고민했다.

돈이 부족했다. 그리고 전문직 종사자도 아니고 연봉 2,000도 안 되는 구로의 가난한 경리 따위가

프랑스에 간다는 건 너무 비현실적이고 무모한 일이 아닌지

애시당초부터 실현 불가능한 일을 하겠다고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건 아닌지 두려웠다.

 

하지만 미칠 것 같았다.

모두가 고야의 그림 '사투르누스'에 나오는 이 같은 고통에 찬 눈을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이 곳을 떠나지 않으면

머리부터 가슴, 그리고 발끝까지 온 몸이 폭탄처럼 터져 산산히 부서져 버릴 것 만 같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